- junk paradise
- 소설
- 연재소설
<18>
不傳從前若許慇 얼마나 아파했는지 전하지는 못합니다.
뱃전에 닿은 물소리는 잔잔하게 이어졌다. 스쳐가는 찬 바람이 연의 옷깃도 지나지 못하도록 연을 바짝 보듬어 안은 해단은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촘촘하게 박힌 별은 유난히 빛나 청해로 떨어져 반짝거렸다.
"별이 참 많다."
해단의 품에 등을 기대 같은 곳을 올려다보던 연은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 붉은 입술을 두고 볼 수 만 없는 해단은 연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아랫 입술을 핥던 해단의 혀끝은 점차 깊게 연을 잠식해 들어갔다. 사내의 숨은 이내 더욱 거칠게 엉켜들었다. 사내의 손이 옷깃을 파고 드는 것을 가까스로 밀어낸 연은 해단을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이러다 또 병이 깊어 지십니다."
둥글게 말린 눈썹아래 반짝거는 연의 눈동자는 장난으로 가득 차있었다. 아쉬움을 떨쳐내지 못해 연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해단의 눈매가 짙어졌다.
"감히 놀리는 것이냐."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심려되어.."
심려된다는 말과 달리 연의 목소리에는 웃음이 가득 묻어났다. 방긋 올라간 양 볼과 고른 이를 드러낸 연을 짐짓 쏘아보던 해단은 연의 손목을 잡아챘다.
"이미 중환이다. 네게 깊이 들어가 쏟아낸들 또 병환은 급해질 터, 심려가 크다. 허나 그냥 두어 보면 중심은 자꾸 치고 치고 치올라 옥포를 뚫을 기세이니 어찌하면 좋겠느냐."
옷가지 위로 불끈 솟은 것을 엉겹결에 잡은 연의 볼은 어색하게 붉어졌다. 연은 서둘러 주변을 살펴보았다. 노를 저어 나가는 궁인들과 등롱을 들고 주변을 밝힌 궁인들 모두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한 듯 앞만 보고 있지만 민망함은 사라질 줄 몰랐다. 목덜미까지 붉어진 연을 보던 해단은 그제서 피식 웃으며 연을 힘주어 보듬었다. 따뜻한 사내의 품에 기댄 연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들었을 지도 모릅니다."
"무엇을 말이냐."
"조금 전 그 말씀 말입니다."
"조금 전? 아.! 그랬을 수도 있겠구나."
"보았는 지도 모릅니다."
"그랬을 수도 있겠구나."
"어찌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부끄러워하는 연의 음성은 점점 낮아졌다. 해단은 연의 까만 눈동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손을 들어 턱을 끌어당겼다. 강하나 부드러운 손끝을 따라 연의 턱 선이 미세하게 떨렸다.
"연아. 너는 부끄러운 것이냐."
"너무 내어놓고 말씀하시니 그러합니다."
"하하. 내어놓고 말한다?"
"말씀뿐이 아닙니다."
"허면?"
연은 머뭇거리다 황금색 옥포위로 솟은 사내의 것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것도 너무 내어놓고 커지시어."
"하하! 허나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바가 아니질 않느냐."
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찌할 수 있는 손도 보란 듯이 움직이시니 민망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연의 가슴을 부드럽게 움켜쥐고 있던 해단은 아쉬운 듯 손을 떼며 낮게 헛기침을 했다.
"손내관. 손내관!"
열 보 쯤의 거리를 두고 서있던 내관은 몇 걸음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찾으셨나이까."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솔직하게 답해주겠느냐."
"하문하시지요."
"조금 전, 무엇인가를 보았느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사오나, 근자에 신의 눈이 침침한 지라 낮에도 또렷하게 앞을 보지 못하는 터, 게다 밤에는 더 그러하여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나이다."
손내관은 전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허면, 조금 전 무슨 말을 들었느냐."
"신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하였나이다. 신의 나이가 깊어 바로 곁의 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지경인지라 송구하옵니다. 그저 신이 비껴 본 것은 밤하늘이고, 흐릿하게 들었던 것은 물소리와 바람소리 뿐, 그 이상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나이다."
"허면 되었다. 그만 물러가거라."
짐짓 진실을 고하는 듯 긴한 말을 남긴 내관은 처음 서있던 곳으로 멀어져갔다.
"이제 되었느냐."
옥음은 의기양양해져있었다. 연은 해단을 돌아보며 눈을 또렷하게 뜨고 까맣게 응시했다. 짙은 눈동자는 제법 날카로워져있었다.
"다른 이도 불러서 확인 하면 편해지겠느냐."
"그럴 필요 없습니다. 백번을 불러 묻는다 한들 같은 답을 할 것입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다고. 저리 환히 비추는 달빛도 안 보인다 하는 이들에게 더 물어봐야 무엇하겠습니까."
"허면 저들이 거짓을 고한다는 말이냐. 허! 고얀 것들이로다. 허면, 내 당장 거짓을 고한 손내관을 불러다 경을 쳐야 하겠구나!"
당장이라도 손내관을 부르려는 듯 엄히 중얼거리는 해단이었다. 깜짝 놀란 연은 뒤돌아 해단의 어깨를 잡아 끌어당겼다.
"그러지 마십시오."
"거짓을 고했으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니냐. 감히 군왕을 능멸하고 눈과 귀를 가리는 간사한 늙은이로다! 당장 끌어와 죄를 따져 물을 것이다. 손내관! 손내관!"
짐짓 노여움이 묻어나는 옥음은 크게 울려 퍼졌다. 연은 해단의 가슴을 파고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십시오. 손내관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믿습니다."
해단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진실로 그러한 것이냐."
연은 힘주어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면, 앞으로의 일도 그들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겠구나."
말허리가 길어질수록 가까이 다가와 귓전에 은밀하게 속삭이는 해단의 음성이었다. 가만히 해단의 말을 듣던 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분인지 몰랐습니다."
"무슨 뜻이냐."
"말씀을 올리면 또 괜한 이를 끌어와 욕을 보이려 하실 터이니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가는 입술을 깨물고 뒤돌아 앉는 연의 뒷목에 뜨거운 입술을 가져간 해단은 낮게 웃었다. 사내의 입술이 천천히 목덜미를 빨아 당기자 연의 입술 사이로 낮은 숨소리가 불규칙적으로 퍼졌다. 이미 활시위를 떠난 활이었다. 해단은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연의 허리를 힘주어 바짝 끌어당겼다. 사내의 단단한 허벅지위에 올라 앉은 연의 어깨가 어색하게 굳었다.
"괜찮다. 괜찮아. 놀랄 것 없다."
몇 겹으로 쌓인 치맛자락을 들추던 해단은 가까스로 말을 뱉었다. 사내의 손이 연의 치마를 차례로 들쳐 올릴 때 마다 연의 등허리에 닿은 사내의 것은 더욱 크고 단단하게 솟아났다. 모른 척 할 수 없을 만큼 커진 사내의 물건 때문에 연의 볼은 더 붉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사이에 연의 은밀한 곳에 닿은 해단의 손은 부드럽게 움직이며 꽃잎을 벌리고 있었다.
"어찌...이곳에서 이리 하십니까."
"아무도 못 볼 것이니 근심치 말거라."
"허나."
해단은 연의 말을 거친 입술로 막아 세웠다. 부드러운 입술을 벌리고 힘차게 밀고 들어오는 혀 끝에 연의 몸에서 힘이 빠진 사이 사내는 여인의 허리를 잡아 살짝 들어 올렸다. 사내가 벌려 놓은 치맛단 사이로 겨울 바람이 타고 들어 소름이 돋을 무렵 연의 꽃문에 뜨거운 것이 느껴졌다. 단단한 무두끝은 촉촉한 계곡을 따라 주저없이 밀고 들어왔다. 이미 젖어들었다고는 하나 묵직한 힘에 연의 허리가 살짝 뒤틀렸다.
"아프게 하지 않을 것이니 믿어 보거라."
해단의 무릎에 어정쩡하게 앉아있던 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앙다문 입술 사이로 격한 숨이 오르내렸다.
"천천히 움직일 것이다."
긴장한 연을 위해 해단은 천천히 연의 허리를 잡아 올렸다. 부드러운 움직임이 계속될 때마다 연의 꽃길은 조금씩 자리를 넓혀가며 무두를 단단히 조여왔다. 자제심을 잃지 않으려 애를 쓰는 해단은 낮게 숨을 토해냈다.
"불편하십니까."
"그럴 리 있겠느냐. 다만, 기다릴 뿐이다."
사내가 조심스럽게 파고들자 발끝부터 슬며시 번져오는 느낌은 점점 뜨겁게 연을 감싸왔다. 연은 곁에 있는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무엇이라도 잡지 않으면 그대로 쓰러져 버릴 듯 온 몸이 몽롱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찌 기다리십니까."
가까스로 뱉은 말이었다. 여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내가 기다리던 말이었다. 또한, 사내의 몸에서 시작된 단단한 움직임은 여인이 기다리던 몸짓이었다. 사내는 크게 신음하며 빠르게 움직임을 시작했다. 더 집요하게 파고들며 깊게 찌르는 사내의 중심을 따라 연의 허리도 함께 흔들렸다. 끝을 향해 갈수록 더 빠르게 움직이는 사내의 물건은 더 뜨겁고 단단하게 연을 찔러왔다. 깊어진 사내의 숨소리는 여린 여인의 숨소리와 한데 섞여, 여인과 사내를 구분할 수 없게 만들었다. 사뭇 긴한 신음이었다.
"아프냐."
연은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허면, 좋은 것이냐."
말조차 꺼낼 수 없을 만큼 온 몸을 조여오는 지릿함에 연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연아.. 나도 그러하다. 나도 그러해. 허니 이 병이 고쳐질리 있겠느냐."
더욱 강하게 위로 솟구쳐 찌르는 사내의 막대를 여인은 더 깊게 내려 받았다. 끝없이 계속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움직임이었다. 깊게 여인의 몸을 두드리는 단단한 막대는 쉬이 만족할 줄 몰랐다. 팔걸이를 단단히 움켜쥔 연의 손끝이 하얗게 변하도록, 연의 입술 사이로 허걱되는 숨이 몰아치도록, 살짝 들리는 엉덩이가 사내의 아랫배를 집요하게 문지르도록 계속 되었다. 결국 연은 참지 못했다. 뒤로 젖혀진 허리는 사내의 것을 한껏 빨아 당기게 만들었고, 벌어진 다리 사이로 꽉 찬 사내의 것은 여인의 움직임에 절정을 재촉하였다. 너무 조여 뻘겋게 달아오른 무두 끝으로 허연 진액이 쏟아져 나오는 순간, 여인의 꽃길도 따라 젖어 뿌려졌다. 그리고 그들의 격정의 신음이 토해져 뒤엉킬 무렵 뱃전을 밝히던 등롱은 하나 둘씩 꺼져 사그라들었다.
"많이 생각한다."
헤쳐 풀어진 연의 검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해단은 중얼거렸다.
"무엇을 말입니까."
아직도 뜨거운 사내의 품에 기대 누운 연은 감은 눈을 뜨고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허. 이리 눈치가 없어서야."
연이 향한 곳을 함께 보고 있던 해단의 입에서 쓴소리가 번졌다. 연은 피식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또렷하게 검은 눈동자에 담긴 원망의 눈빛은 투정부리는 아이의 것과 닮아있었다.
"저를 생각하신다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되었다!"
연은 팔꿈치를 세워 사내의 위로 몸을 올렸다. 단단한 사내의 가슴으로 연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넓게 퍼졌다. 귓가에 울리는 사내의 심장 소리는 연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어미의 소리를 듣는 아기 사슴처럼 그렇게 가만히 듣고 있던 연은 손을 들어 사내의 턱 끝을 쓰다듬었다.
"어찌 그리 눈치가 없으십니까."
"이거 봐라. 누가 할 소리를 대신 꺼내느냐."
해단은 연의 코끝을 슬쩍 꼬집어 비틀었다.
"많이 생각한다. 대체 무슨 고백이 이러합니까. 솔직히 빠져도 너무 많이 빠져 있지 않습니까."
연은 해단의 말투를 따라하며 중얼거렸다. 해단은 고개를 슬쩍 들었다. 가늘어진 연의 눈매는 장난기로 가득 차 있었다.
"무엇 말이냐."
"사이 사이에 있는 말이 다 듣고 싶어 되묻는 것이니, 처음부터 다 말하면 되실 것입니다."
"허면?"
"뭐..일테면, 연아 나는 너를 많이 생각한다. 네가 그립고, 보고 싶다. 이렇게 표현하시면 될 일 입니다."
"허! 성심은 그리 쉽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틀렸다."
해단은 피식 웃으며 연의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연은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해단을 내려다 보았다.
"틀렸습니까?"
"틀렸지."
"무엇이 틀렸습니까?"
"아..피곤하다."
해단은 연의 궁금증을 모르는 척 눈을 감아버렸다. 연은 쉬이 포기 하지 않겠다는 듯 해단의 얼굴에 바짝 다가왔다.
"무엇이 틀렸습니까?"
"나중에 얘기하마."
해단은 연의 깜박거리는 눈동자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입을 맞추었다.
"궁금하게 해놓시고는.."
원망하며 투덜거리는 말과 달리 연은 사내의 입술을 부드럽게 받아주고 있었다. 장난치듯 뒤엉키는 입술은 차가운 겨울 바람과 달리 뜨겁고 포근했다.
"낮은 참 길더니, 너와 있는 밤은 왜 이리 짧은지 모르겠다."
멀리 조금씩 붉게 변하는 청해를 흘겨보며 해단은 아쉽게 중얼거렸다.
"낮에도 그리 많이 생각하셨습니까."
"허! 감히 성심을 앞서는 것이냐. 꽤나 방자하다."
놀리는 연을 짐짓 꾸짖는 옥음이나 그저 웃음기 가득한 농일 뿐이었다. 한참 후 해단은 다시 연을 불렀다. 옆에 두고 사라질까 거듭 확인하는 것처럼 불러도 불러도 갈망은 커지기만 했다.
"연아.."
"예.."
"하루 하루가 너무 길어 많이 외로울 것이다."
진지한 사내의 말은 연의 마음을 깊게 파고 들었다. 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의 말에 담긴 근심이 진심으로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괜찮습니다."
"어쩌면 힘든 일도 생길 것이다."
"그것 또한 괜찮습니다."
"보통의 사내처럼 너만을 위해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라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다만, 지금처럼 마음을 주시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연의 따뜻한 답을 듣고 있던 해단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슬쩍 올라간 입술사이로 흩어진 웃음소리는 조금씩 커져갔다. 가만히 듣고 있던 연은 의기양양해졌다.
"대견하고 예쁘다 생각하셨습니까?"
"하! 이제 보니 아주 제멋대로다. 어디서 그런 기세가 나오는지 알 수가 없구나."
"괜히 민망하여 그리하시는 것임을 알 고 있습니다."
연은 지지 않았다. 뚫어지게 사내를 바라보는 시선은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당당하고 환했다.
"과인이? 민망한 것은 내가 아니라 연이 네가 아니겠느냐? 기억하고 있는 어느 날은 아들을 달라 하더니, 오늘은 마음을 달라하고, 내일은 또 무엇을 달라 할지 사뭇 기대되어 웃은 것이다."
순간 연의 양 볼이 붉게 변했다. 아린 기억과 민망함이 섞여들어 연은 어깨를 움츠렸다.
"연아. 농이다. 농!"
서둘러 말을 거두며 연을 끌어당긴 해단은 연의 이마에 길게 입을 맞추었다.
"너로 인해 매일이 기다려진다. 너의 하루가 궁금하고, 너의 마음이 궁금하고, 너의 몸이 궁금하다. 계속 곁에 두고 물을 수 없으니 그저 답답할 노릇이다."
쉬이 드러나지 않는 다는 성심은 껍질을 벗겨낸 과실처럼 달게 연을 감싸고 돌았다. 연은 이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붉은 해를 머금은 두 볼을 감싸 쥐며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사내의 눈빛은 뜨겁고 따스했다. 매서운 겨울 아침이 두 사람만을 비껴가는 듯 했다.
"이제 저 해가 청해 뒤로 넘어갈 때 까지 기다려야 다시 너를 안을 수 있으니, 버틸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이미 중환이니 말이다."
해단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으며 연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바짝 붙은 여인의 허리에 사내의 몸은 또 반응을 시작했다. 해단의 위로 걸터앉은 연의 엉덩이로 단단한 것이 슬쩍 움직였다.
"어찌 또 이러십니까. 셀 수 없이 많은 백성도 잘 다스리시는 분이시니, 몸도 잘 다스려내실 것입니다."
연은 가슴을 향해 지분거리는 사내의 손을 떼어내며 단호하게 중얼거렸다.
"아주 힘이 되는 위로가 아닐 수 없다."
거절당한 사내의 옥음으로 퉁명스러운 마음이 실렸다. 연은 피식 웃으며 사내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여인의 손가락에 사로잡힌 단단한 손바닥은 낯선 느낌으로 사내를 자극했다. 해단은 물끄러미 손을 내려다보았다.
"제법 좋다."
"어머니가 늘 이리 해주셨습니다."
"어머니가 참 좋은 분이겠구나."
"예."
생각이 너무 많은 연의 대답은 짧아졌다. 그리움이 담긴 연의 눈매를 슬쩍 보던 해단은 여인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연은 마음에 차오르는 생각을 서둘러 접으며 말을 돌렸다.
"어제 대비마마를 뵈었습니다. 좋은 분 같았습니다."
"좋은 분.. 맞다. 진정 좋으신 분. 이미 곤전의 자리에 계셨으면서도, 친아들이 아닌 내게도 어머니라 부르게 허락해주셨던 분이시다."
손끝을 부드럽게 감싸쥐는 해단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고 있던 연은 가만히 숨을 멈추었다.
"놀랐구나."
"친...어머니라 생각했습니다."
"나도 그리 생각한다. 친 어머니라고. 핏줄이 통하지 않아도 그분은 내게 친 어머니라고 말이다. 단 한 번도 어머니가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연은 손목쯤에서 멈춘 해단의 단단한 손을 가져와 가슴 위로 올렸다. 따뜻함은 진하게 전해졌다.
"괜찮다. 내가 기억할 수 없는 오래 전에 돌아가신 친어머니를 추억할 수도, 그리워할 수도 없음에 가끔 외롭다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그분이 계셔서 항상 덜 외롭고, 덜 슬펐다."
"피가 섞여야 꼭 좋은 어머니가 되고,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니라.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연의 머뭇거림은 손끝으로 전해졌다. 해단은 몸을 일으켜 연을 내려다보았다. 까만 눈동자위로 번진 눈물방울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미 들었던 말과 짐작했던 생각들이 뒤엉켜 해단의 생각이 깊어졌다.
"처음 만났을 때, 태유 연이 아니라, 연이라 했던 까닭을 알고 싶다."
해단은 둘러 말하지 않았다. 연이 아팠다면 찾아 고쳐내고 싶기 때문이었다. 연이 힘들다면 힘이 되어 지탱해주고 싶기 때문이었다. 답을 기다리는 해단의 숨소리는 연의 귓가에 감겨들었다.
"네게 해줄 것이 있다면 그리 할 것이다. 원하는 것이 있느냐."
해단은 가만히 연의 양 볼을 감싸 쥐었다. 마치 다 안다는 듯, 다 이해한다는 듯 바라보는 깊은 눈매를 올려다 보던 연은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제 아버지도 좋은 분이셨습니다."
해단의 눈매가 짙어졌다. 믿지 않는 듯 미간이 좁아진 해단에게 연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가끔 그 보살핌이 과해 힘든 적도 있었지만, 저와 어머니를 잘 살펴주셨습니다."
"그 때, 미와산에서 말이다. 그날.. 일을.."
"이미 지난 일입니다. 또한, 아버지께서 너무 화가 나셔서 그리 하셨음을 알고 있기에 원망하지 않습니다."
또렷하게 말하는 연의 음성은 분명했다. 근심어린 눈빛으로 연을 보던 해단은 그제서 굳어진 얼굴을 풀며 숨을 내쉬었다.
"많이 아팠을 까...많이 힘들었을 까.. 걱정했었다. 다행이다. 사실 그는 내게는 필요한 사람이었다. 부서부를 장악하기 위해서 지금은 필요한 사람...헌데, 너를 아프게 한다면 어찌해야 하나...많이 생각했었다."
잘한 일이었다. 아무렴, 사내를 위해 참 잘한 일이었다. 어머니를 보고 싶은 마음은 조금 더 참아 볼 수 있었다. 그리운 미와산의 향기도 조금 더 묻어 둘 수 있었다. 길어지는 사내의 말을 듣고 있던 연은 가만히 사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눈물이 눈가로 밀려 들어왔지만 연은 꾹 참아 눌렀다.
서대비가 들려준 말은 아프게 또렷했다. 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충분히 힘들었던 사내의 지난 날들을 다 들어 놓고 이제와 그의 어깨에 더 무거운 짐을 올려놓을 수는 없었다. 울음을 참으려 깨문 연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려왔지만, 아침바람에 흔들리는 물결을 타고 앉은 사내는 알지 못했다.
********************
"마마, 홍비 들었습니다."
서책을 읽고 있던 서대비는 소리 나게 책을 덮으며 서책을 손에 쥐었다. 꽉 쥔 주먹으로 불긋한 힘줄이 솟아 올랐다. 잠시 후, 오래된 바닥을 스치는 버선발 소리가 점점 가까워왔다. 서대비는 날카로운 시선을 들어 나무문을 응시했다.
"대비마마, 신첩이옵니다."
홍비는 환히 웃으며 나무문 사이로 요염하게 발을 들여 놓았다. 서대비는 쥐고 있던 서책을 홍비에게 집어 던졌다. 여인의 몸에 부딪힌 서책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웃음을 머금던 홍비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갔다. 홍비는 서둘러 바닥에 엎드렸다.
"마마!"
"네 년이 누구 덕에 그 자리에 있는지 잊었구나."
내실을 울리는 서대비의 음성은 기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짐짓 부드러운 듯 느껴지나 조롱하는 말투는 환후가 깊어 누워있던 늙은이의 목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또렷하고 매서웠다. 엎드린 홍비의 어깨가 긴장으로 굳어졌다.
"그야 대비마마의 은덕으로."
"은덕??!! 은덕이라!? 궁에 오래 있으니 바닥을 핥던 개가 제법 비단을 두른 계집인 척 하는 것이냐. 어디 그 요망한 입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더 들어보자."
서대비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말려 올라갔다.
"마마. 대체 왜 이러시는 지.."
"진정 몰라 묻는 것이냐?"
"신첩은..잘 모르겠나이다."
더듬거리는 홍비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몰라? 허면 더는 볼 일이 없으니 그만 나가거라."
"예?"
매서운 질책을 기다리던 홍비는 의아함에 고개를 들었다. 순간, 홍비의 몸에 소름이 확 번졌다. 비웃음을 머금은 서대비의 주름으로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가라는 뜻에 담긴 속내를 알아차린 홍비는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떼어놓았다.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죽을 죄라? 지은 죄가 이제야 기억이 나십니까."
부드러운 존대에 담긴 채찍은 어떤 칼보다 무섭게 홍비를 파고들었다.
"신첩은...마마께서 진정 환후가 깊으시어...일을 살피시기 힘들다 생각하였나이다. 신첩의 생각이 부족해 그리한 것이니 한번만 용서를 해주십시오."
"부족한 것은 이미 알고 있지만, 하마터면 일을 그르칠 뻔하였으니 대가는 치뤄야겠질 않느냐."
"마마.!"
"아마 소영이라 했던가.."
"마마! 그 아이 말은 들을 것이 못되옵니다. 그 아이가 전한 말은 올바른 신첩의 말이 아닐 것이니 듣지 마십시오!"
소영에게 했던 말이 또렷하게 떠오른 홍비는 팔을 내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서궁에 알리자던 소영을 말린 것은 홍비 자신이었다. 그때 나눈 말을 대비가 직접 듣는다면 목숨을 부지 할리 없었다.
"나도 그럴 것이라 생각은 했다. 설마 나를 두고 말라 비틀어 다 죽어가는 늙은이라 할리야 없지 않겠느냐."
홍비의 굳은 어깨 너머로 식은땀이 번졌다. 따끔하게 올라오는 땀은 홍비의 등허리를 타고 내려왔다. 홍비의 말은 점점 빨라졌다.
"마마! 그 년이 제 정신이 아니었나봅니다. 감히 그런 말을 신첩이 할리 없지 않습니까. 하! 제가 당장 그년을 잡아다 바른 소리를 하도록 손을 쓰겠습니다."
"그럴 것 없다."
서대비는 턱을 괴며 홍비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눈매는 매의 것과 닮아 쉼 없이 떠드는 새를 금방이라도 낚아채 피를 볼 듯하였다.
"아닙니다. 마마! 거짓된 말을 고한 계집이니 가만 둘 수 없질 않겠습니까. 신첩이 지금이라도 나가서."
"그럴 것 없다는데, 참 말이 많구나. 나가 본들 이미 없는 아이를 무슨 수로 찾겠다는 지. 원!"
서대비는 답답한 숨을 내쉬듯 중얼거렸다. 흐릿하게 번지는 숨결 사이로 뱉은 말이 무슨 뜻인지 뒤늦게 짐작한 홍비의 숨이 탁 막혀왔다. 이미 죽은 것 이었다! 소영처럼 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셈을 하려 애를 썼지만, 이미 하얗게 변한 눈앞으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귓가를 울리는 서대비의 낮은 숨소리만이 홍비를 감싸고 돌 뿐이었다.
"홍비야."
"....예..."
간신히 답한 목소리는 흔들려 분명치 못했다.
"두 번은 용서치 않을 것이니 이제라도 둥지를 찾아 오거라. 지난 세월이야 이미 흘러간 것이니 잊어버리고, 앞만 보자꾸나."
"마마.."
서대비는 엎드린 홍비가 떨구는 눈물을 쏘아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이라는 계집에 맞서기에 홍비는 그릇이 너무 작았다. 모진 세월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물이 필요했다. 은혜를 갚겠다고 중얼거리며 조아리는 홍비의 목소리가 내실을 채웠지만 서대비의 머릿속은 깊어진 생각으로 빈틈이 없었다. 옥국에 밀사를 다시 보내야 할 듯 했다.
**********************
이런 어이없는 경우가...ㅎㅎ
글을 올리려고 로그인이하는데, 아뒤랑 비번을 잊어버려서... 13번의 시도끝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진정 바보인가봅니다.ㅠㅠ
어머니라고 믿고 있던 서대비마저 해단에게 칼을 들이댈 것 같아서.. 조마조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