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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는 두고 간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해괴한 집안을 훑었다. 하얀 소파며, 파스텔 톤으로 인테리어 된 실내는 전형적인 영국인의 집이었다. 하지만 벽에 아무렇게나 걸려있는 그림들은 정말 아니었다. 새빨갛고, 새까맣고, 샛노랗고. 강렬한 색의 향연이 펼쳐진 캔버스가 하나, 둘, 셋, 넷, 다섯…, 벽에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잭슨 폴락의 추상화보다 더 강렬한 그림을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 걸어 놓다니.
-이 남자 취향 한 번 엽기적이군.
안나의 중얼거림에 여자가 쳐다보았다.
-아, 아니에요. 그나저나 앞으로 어떻게 할 거에요? 공부하러 온 거죠?
-네. 3월부터 학기 시작이에요.
-아. 그럼 여행 다니려고 일찍 온 거에요?
안나는 생각보다 어려운 처지는 아닌 거 같아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그냥…빨리 오고 싶었어요. 너무 런던에 오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부모님은 영국으로 공부하러 가는 걸 반대하셔서 간신히 설득시켰어요. 만약 제가 사기당한 걸 알면 공부고 뭐고 다 그만두고 들어오라고 하실 거에요.
좋은 꿈을 꾸는 듯 황홀함에 넘실거리던 표정이 다시 깊이 가라앉았다.
-부모님들은 다 왜 그러시나 몰라! 저는 대학가기가 너무 싫었거든요. 평생 여행만 하고 살고 싶었어요. 그런데 죽어도 대학은 가야한다고 해서 그냥 대학등록금 가지고 런던으로 도망 왔어요. 그 때는 사촌언니가 있어서 무작정 왔었는데 정말 힘들었어요. 영어도 안 되지, 돈도 없지. 그래도 열심히 랭귀지 스쿨 열심히 다녀서 영어 많이 늘었어요. 그리고 파트타임으로 돈 모아서 유럽여행 다 하고. 요즘은 재충전 중이에요. 여행 경비 모으려고 정말 죽어라 일했지만,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얼마나 행복한 건데요. 그러니까 절대 포기하지 마요!
안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었다.
-너무 …고맙습니다. 처음 본 사람을 이렇게 챙겨주시고.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여자는 허리를 굽혀 고마움을 표시했다. 안나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에이,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요. 비슷한 처지끼리 돕고 사는 거죠.
-누군가를 돕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아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아이참, 쑥스럽게. 있지, 저 남자에게나 꼭 고맙다는 인사해요. 생판 모르는 사람을, 그것도 외국인을 재워준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고맙다는 정도는 영어로 할 수 있죠? 아, 저기 온다.
여자는 안나에게 뭐라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거실 문을 열고 나오는 남자를 보고 입을 닫았다.
"다 챙기셨습니까?"
하얀 폴로 티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맨발에는 검은색 슬리퍼가 신겨져 있었다. 목을 덮는 머리칼이 엉켜져있고, 깎지 않은 수염이 날렵한 턱을 가리고 있었지만, 말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은 정말이지, 영국의 젠틀한 신사의 모습이었다.
"네, 발은 괜찮아요?"
안나는 맨발로 거리를 질주하던 남자를 떠올리자 웃음이 새어나왔지만 꾹 참았다.
"괜찮습니다."
안나가 웃음을 참고 있다는 것을 아는 남자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안나를 일별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이 여자분이 할 말 있대요."
안나는 옆에 서 있는 여자의 어깨를 툭 쳤다. 턱을 당겨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있던 여자가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남자는 습관인 듯 팔짱을 끼고 여자를 주시했다. 여자는 망설임 없이 다가오는 남자의 눈빛을 마주했다. 까맣다. 짙다. 그녀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두려웠다. 하지만 한편으론 남자의 깊은 눈에 빨려가고 있었다. 남자가 무릎을 꿇고 쳐다보던 그 때부터 남자의 눈이 검은 눈동자라는 것보다 깊은 눈동자라는 것에 온 신경이 쏠렸다. 깊고도 깊은. 그래서 몇 미터나 떨어져 있지만, 여자는 단숨에 남자가 바로 앞, 종이 한 장의 거리만큼 좁혀진 것 같았다. 입을 열어 고마움을 전해야 하는데, 입술을 달싹일 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눈에 빨려 들어가는 것만큼 목이 꽉 막혔다. 여자를 쳐다보던 남자가 시선을 거두었다.
"흠. 차 마시면서 할까요?"
남자가 소파에 눈길을 주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주방으로 들어가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주방을 본 안나가 으악, 자기도 모르게 괴성을 질렀다. 아주 낮게. 싱크대에 가득 담긴 그릇들. 분명 저 곳에 티 주전자와 찻잔도 있을 것 같았다.
"주스 어때요?"
냉장고 문을 연 남자는 다시 가만히 서 있었다. 몇 주 전에 제임스가 사다준 식료품이 있을 리가 없었다. 빈 주스병에 남자는 난처한 듯 눈썹을 긁었다.
"그냥 물 주세요."
안나는 남자 혼자 사는 집의 실상에 몸서리치며 말했다. 안나와 여자가 소파에 앉자마자 남자가 생수 세 잔을 들고 나왔다. 목이 말랐는지 안나와 여자 모두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저 궁금한 건 계속 머릿속에 남아있어서 그러는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물을 마시면서 눈동자를 굴려 거실 공간을 또 살펴보던 안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그림들을 정말 좋아하는 거에요?"
질문이 끝나자마자 남자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아닙니다. 주인 취향이죠."
남자는 해괴망측한 그림과 자신을 연결시킨 게 못마땅한지 눈살을 찌푸렸다.
"아, 이 집 주인이 따로 있나 보군요?"
남자는 더 이상 질문은 받지 않겠다는 듯 살짝 눈썹 끝만 움직일 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생각을 더듬던 안나는 이 집의 주인이 전에 펍에 같이 왔던 그 남자라고 생각했다. 옷차림이 아주 난해했던. 러플이 휘날리는 재킷과 엉덩이 부분이 축축 늘어졌던 괴상한 스타일의 소유자만이 이런 그림을 좋아할 것이다. 게이인게 분명했다. 그 날도 쫙 달라붙는 머리에 어딘가 가벼운 손짓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맥주 하프파인트를 시켰다. 보통 런던 펍에서 하프파인트를 시키는 건 게이였다. 거기다 두 남자가 붙어 있는 모습은 브로크백 마운틴의 제이크 질렌할과 히스 레저만큼이나 황홀했다.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깔끔하고 귀티가 넘쳐흐르는 이 남자와 특이한 스타일에 자유분방한 태도의 그 남자가 묘하게 어울렸다. 둘은 분명 연인 사이인 게 틀림없었다.
-에, 그래서 방에 들이기를 꺼려했던 거군.
안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어젯밤, 남자는 다른 방에 난방을 안 틀어놨다고 거실이 오히려 따뜻할 거라고 소파에 여자를 뉘였다. 보통의 남자라면, 그럼 자신의 침대를 내 놓을 텐데 남자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연인과 함께 쓰는 침대에 여자를 뉘이고 싶지 않았던 거다. 그래, 그거다. 그런데 그 이상한 스타일의 남자는 어디 있는 거지? 안나는 끝도 없는 망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뭐라고 했습니까?"
"아, 아뇨. 그런데 집이 참 …어수선하네요."
안나는 남자의 뒤로 보이는 주방을 보고 지나가는 듯 말했다. 남자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남자는 등을 곧추세우며 안나의 시야를 가렸다.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남자가 다시 여자에게 물었다. 슬며시 눈을 마주친 여자는 가느다란 호흡을 하고는 입을 달싹였다.
"고…고마워…요."
물잔에 다가가던 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이마가 빳빳하게 당겨졌다. 남자는 의외의 눈빛을 보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여자가 화들짝 시선을 내렸다. 방금 전까지는 사자 앞의 토끼처럼 와들와들 떨더니, 고맙다는 말을 하고. 어머니가 말한 '신사의 사과' 덕분인가? 역시 어머니를 당할 수 없었다.
"제 명예를 찾게 해줘서 오히려 제가 고맙군요."
남자는 여자가 알아듣기 쉽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대신했다. 이제야 성마르게 달아올랐던 언짢은 마음이 가라앉았다.
"아,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이런 일이 빈번한가요?"
남자가 안나에게 묻자, 안나가 반문했다.
"그러니까 저 여자분이 당한 사기요."
그는 여자가 혹시 알아들어 기분이 상할까 싶어 여자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아, 부쩍 그런 일이 많아졌어요. 진짜 너무하죠? 벼룩의 간을 빼먹으라죠, 정말. 경찰도 찾기 어려울 거라 하고, 대사관도 속수무책이에요. 그나저나 이 사람도 큰일이죠. 있는 돈은 400파운드가 전부라는데…"
안나가 안타깝게 여자를 쳐다보았다.
"저기, 혹시 무료로 지낼 수 있는 그런 보호소 같은 곳, 아는데 없나요? 아무래도 영국인이니까 더 잘 아실 거 아니에요?"
자신도 여자를 도울 수 있을 만큼 넉넉하지 않아서 안나는 남자에게 물었다. 런던에서 잔뼈가 굵은 안나지만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많았다. 혹시 남자가 좋은 곳을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축 처져 있는 여자를 보니 남자도 측은한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그런 곳을 그가 알 리가 없었다. 무수히 많은 자선 행사에 참석하기만 했을 뿐이다.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면서, 어려운 이들을 돕는다는 생색을 내고 있는 것이 그였다.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면, 따끔하게 호통을 치실 일이었다.
"아마 그런 곳이 있다고 해도 계속 지낼 수는 없을 겁니다."
안나도 동의했다. 살풋 한숨을 쉬며 주위를 둘러보던 안나가 크게 어깨를 들썩이며 손바닥을 부딪쳤다.
"아! 직접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네?"
벌겋게 달아올라 기대감에 부풀어있는 안나와는 다르게 남자의 미간이 좁혀졌다.
-설거지, 청소, 빨래. 뭐 이런 집안일 잘하죠? 아니, 신체 자유자재로 움직이면 다 할 수 있죠. 뭐. 그쵸?
안나는 여자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혼자 고개를 열렬히 흔들었다.
"집안일 잘 못하죠? 설거지는 며칠은 안 했고. 요리도 못해서 매일 펍에서 사 먹는 거죠? 그리고 이거 봐요. 청소 안 하지는 얼마나 됐어요?"
안나는 탁자를 검지로 쓱 쓸었다. 회색 먼지가 촘촘히 묻어나왔다. 남자는 갑자기 안나가 왜 저러는지 영문을 몰라 가만히 있었다.
"이거 다 해 줄 수 있어요."
"대체 무슨 말입니까?"
남자는 팔짱을 끼고 무겁게 말했다.
"이 여자분이 다 할 수 있대요. 그 대신 지낼 방 하나만 내어주시면 되요!"
"네?"
-네?
남자의 외침에 여자의 소리가 묻혔다. 놀라 고개를 퍼뜩 든 여자의 행동은 안나의 폭탄선언에 누구의 이목도 끌지 못했다.
"이 여자분이 정말 지낼 곳이 없대요. 2월까지만 어떻게 하면 지낼 곳이 생긴다고 하니까. 딱 두 달만 방을 빌려주세요. 방세 낼 돈 없는 거야 뻔히 아시니까, 대신 집안일은 다 하면 되죠. 요리, 청소, 빨래, 시키는 건 뭐든지! 어때요?"
안나는 정말 굿아이디어라고 생각하며 자신만만하게 제안했다. 하지만 남자의 표정은 계속 가라앉았다.
"별로 좋은 생각 같지 않군요."
"네? 왜요? 비어있는 방이 있잖아요. 그리고 그냥 지내겠다는 것도 아니고, 집안일을 다 하겠다는데 왜요?"
남자는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웃었다. 간신히 숨을만한 곳을 찾았는데 누구를 들인다니. 그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설마 저 여자가 뭘 알고 있는 걸까? 남자의 눈빛이 번뜩 빛났다.
"설마…, 당신…!"
"아, 정말. 너무하시네요. 저 네덜란드 여행할 때요. 소매치기 당해서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사라라는 아주머니가 집으로 데려가셔서 음식도 차려주시고, 침대도 빌려주셨거든요. 그리고 여행 조심히 하라면서 여비까지 쥐어주셨어요. 생판 모르는 사람인데도 얼마나 친절하게 대해주셨는데요. 그래서 제가 너무너무 고마워서 런던으로 돌아와 돈 벌어서 두 배로 사라에게 보내줬어요. 사라가 좋아하다는 잉글리쉬티까지 함께 부쳐서. 이게 바로 세계는 하나! 지구촌. 우리 모두는 이웃! …뭐, 그런 거 아니겠어요?"
말하다보니 흥분해 너무 멀리 나간 안나는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남자는 안나의 긴 설명에도 가늘게 눈을 뜨고 안나를 맹렬히 살폈다.
"내가 도와줄 수 있으면 이런 제안도 안 해요. 여행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 받은 거 생각하면 제 통장이라도 빌려드리고 싶지만. 보시다시피 전 거의 무일푼이에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하루살이라고요. 방만, 아니 그냥 소파만 빌려주셔도 되요. 설마 이 추운 겨울날, 이 여자분 사정 다 알면서 내보내면 정말…정말…, 암튼 그 쪽은 집안일 해 줄 사람 생겨서 좋고, 이쪽은 지낼 곳이 생겨서 좋고. 서로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요?"
나쁜 놈. 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막은 안나였다. 하지만 남자의 표정이 풀어지지 않았다. 굉장히 신중한 모습이었지만, 안나에게는 굉장히 매몰찬 모습으로 보였다.
"본인 생각이 그런 겁니까?"
안나에게 박혀있던 남자의 시선이 여자에게 향했다. 여자는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어안이 벙벙한 듯 반쯤 정신이 나가있었다.
"예? 저기…,"
-내가 제안했어요. 이 집에서 묵는 대신 집안일을 다 하겠다고. 어때요? 괜찮죠? 에? 너무 겁먹지 말아요. 아까도 봤지만, 이상한 짓 할 사람도 아닌 것 같고. 그리고 제가 이 집 옆 세 번째 집에서 살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쉿. 안 그러면 정말 한국으로 돌아가야 될지도 몰라요.
안나는 얼떨떨해 하는 여자의 입을 막았다.
"이 분도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열심히 일하겠다고 하는데요? 좋은 일 한다고 생각하고 한 번만 도와주세요!"
안나의 애절한 표정에 남자가 머리를 비스듬히 하고 생각에 잠겼다.
"혹시…나 알아요?"
말하는 남자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알기는 알죠. 우리 펍 단골이시잖아요."
남자의 저의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안나가 눈을 깜빡였다. 남자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깊은 눈을 마주한 여자도 흠칫 놀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남자는 둘을 유심히 바라보다 덥수룩한 머리 위에 가려진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자꾸 마음이 흔들렸다. 뒤통수를 치는 지능적인 파파라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 것도 몰라요 하는 눈망울은 홀로 런던에 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것이었다. 남자는 다시 날렵한 매의 눈을 하고 여자를 응시했다. 어딘가 겁에 질린 여자의 눈빛이 그를 바라보다 뚝 아래로 떨어졌다. 여자의 처지를 생각하면 불쌍했다. 자신을 이상한 남자로 오해를 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아하니 외국에 나온 것도 처음인 것 같고, 활달한 성격도 아닌 것 같다. 아마 저렇게 축 늘어져서 다니다가는 있는 돈도 다 사기당할 것 같았다. 내 한 몸 성히 보호하기도 힘든 판국이건만.
"설거지, 청소, 요리, 빨래. 다 하겠다고요?"
"네!"
"내가 시키는 건 뭐든 지요?"
"네!"
안나는 여자의 등을 툭툭 쳐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안나씨.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남자랑 단 둘이 살아요?
여자가 안나의 팔을 붙들고 속삭였다.
-걱정 마요. 저 남자, 게이에요.
-에?
안나가 여자를 보고 씨익 웃었다. 여자의 아래턱이 툭 떨어졌다.
"그런데 저 여자분은 영어를 잘 못하는 것 같은데…."
"아니…,"
"에이. 바디랭귀지가 있잖아요. 이게 얼마나 효과적인 의사소통인데요. 그리고 그 쪽이 영어 좀 가르쳐주면 좋겠네요. 그쵸?"
안나의 당당함에 여자는 또 말이 끊겼다. 그리고 남자는 한시름 놓았다. 영어를 잘 못하는 외국인이라면 그를 모를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 불쌍한 여자의 처지와 영국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인이라는 점. 그리고 여자가 머무는 두 달 전에 그가 이 집을 나갈 수도 있다는 점 등. 보이는 사항들이 그에게 그리 나쁘게 작용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집안일을 해 준다는 점이 그럭저럭 괜찮았다. 평생을 누군가의 시중을 받고 자란 그에게 집안일은 사약과 같았다. 하지만 누구도 들일 수 없어서 지저분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 터였다. 이 여자라면 아마 괜찮을 수도, 그래. 그럴 수도 있다. 생각을 정리한 그는 빙그레 웃었다.
"좋습니다. 도와드리죠."
"와우! 정말 고맙습니다."
환하게 웃으며 안나가 여자의 옆구리를 찔렀다. 멍한 표정의 여자는 안나를 따라 머리를 숙였다.
-정말 이렇게 해도 되는 거에요?
-그럼요! 아,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되요?
-유진, 진이에요.
안나가 허연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었다.
"이 쪽은 진이에요. 앞으로 잘 지내봐요. 그런데 이름이…,"
"윌리…,"
무의식중에 이름을 말하던 남자가 멈췄다.
"윌. 윌이에요."
아무렇지 않게 이름을 말한 남자가 입가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잘 …지내봅시다. 진."
"…고맙습니다. 윌"
진은 수염에 싸여 웃고 있는 윌에게 인사했다. 안나는 일이 잘 해결된 기쁨에 하하하,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진은 남자의 까만 머리에도 까만 눈동자에도 아까처럼 무섭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조심스레 남자의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봤지만, 공포감이 들지 않았다. 그가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을 때, 그의 눈빛은 새까맸지만 진짜처럼 느껴졌다.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그래, 괜찮아. 진은 윌을 보고 살짝 미소 지었다. 그는 의외의 미소에 눈썹을 올렸지만, 이내 생긋 웃었다.
진과 윌, 둘의 이상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
일단 올리고...갑니다. ㅠㅠ
남자의 정체가 뭘까요?
남자,여자 모두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