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4장  흔들리다








“싫은데.”


처음 네이트온 이메일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었을 때, 송미래는 물어본 사람 무안하게 단박에 잘라 거절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그저 동기 메신저 주소 물어보든 태연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그런데 딱 잘라 퉁박이었다.


“빈달아, 내 이메일 주소 알려줄까.”


옆에서 다른 여자애들은 오히려 알려준다고 성화였다. 마음이 상해 빈말로라도 ‘그래, 너희도 알려줘.’라는 말도 못했다. 싫음 말고, 란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앉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고 했지만, 이미 자신의 표정이 바뀌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무안함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으니까.


‘내가 싫은 걸까.’


빈달은 답지 않은 자괴감에 빠져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그랬다. 대학에 들어오기도 전 오티에서 처음 만났던 그 날, 오리엔테이션에 조금 늦는 바람에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생명공학과’라고 써 있는 방문을 두드려야 했던 그때. 문을 열자마자 눈에 띈 건 부드러운 갈색 단발머리의 여자애 하나. 늦은 죗값으로 떠들썩하게 인사를 하고, 일부러 단발머리 여자애가 앉아있는 자리로 찾아들었다.


“들었겠지만, 나는 나빈달. 너는.”


애써 태연한 척 하며 갈색머리 여자애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돌아온 건 옆에 앉은 다른 사람들의 떠들썩한 인사뿐이었다. 붉은 입술을 새치름하게 삐죽이며 그녀는 고개를 돌렸었다. 결국 그 밤이 지나도록 갈색 머리 여자애의 이름은 알 수 없었다.


송모래.


그 다음날에서야 알게 된 여자애의 이름은 첫인상만큼이나 건조하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빈달



이미 알고 있었다. 먼저 친구요청을 할까, 말까 몇 번이나 망설였는데. 뭐, 네이트온주소가 뭐냐고. 나는 이미 다 외울 지경이었다.


“싫은데.”


1초만에 나간 대답은 지나치게 빠른 감이 있었지만, 솔직한 심정이었다. 왜냐면, 나만 먼저 빈달의 이메일주소를 알고 있었다는 게 기분이 나빠서였다. 픽, 하니 돌아서는 폼이 기분이 상한 듯 보였지만 나 또한 기분은 좋지 않았다. 뭐야, 당연히 알려줘야 한다는 듯 그런 거만한 폼은. 내가 흥이다, 라고 생각했다. 홍미래와는 벌써 1촌까지 맺었다는 얘기를 들어서 그런지 더욱 대답해주고 싶지 않았다.


나빈달을 처음 만났던 대학 오리엔테이션 때. 달칵, 문이 열리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녀석에게 쏠렸다. 뭔가 눈길을 사로잡는 면이 있는 아이였다.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눈부시지 않았는데도 조용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활기차게 인사를 하는 모습에 나는 조금 넋이 나갔던 것도 같다. 어쩌면 조금은 반했던 거라고 지금은 인정한다. 그때는 제 정신이 아니어서 그게 그런 감정인지도 몰랐지만.


“들었겠지만, 나는 나빈달. 너는.”


잠시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한 1.5초쯤. 착각이었구나, 느낀 건 옆에 앉아 있던 홍미래 때문이었다. 선배들이면 선배들, 동기들이면 동기들 하나 같이 눈이 부신다는 듯 쳐다보았던 홍미래.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에 반달처럼 커다란 눈을 하고 있는 홍미래는 내가 보기에도 좀 예뻤다. 수줍게 인사를 하는 미래를 보는 순간 나는 왠지 기분이 나빠져 그만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나빈달이 나는 본 척도 않은 채 홍미래에게 말을 건 순간, 나빈달은 좀 미운털이 박혀버렸던 거다. 너는 무조건 싫어, 정말 싫어. 그런 생각이 박혀버렸던 것도 같다.


-모래




‘아이가 아파.’


아이가 아파. 성훈의 그 말 한 마디가 자꾸 반복되어 그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얼마나 아픈지, 병원에 있다면 입원을 했다는 건지, 그렇다면 그렇게 심한 병이라는 건지. 궁금했다. 바보처럼 걱정이 됐다. 그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머나먼 관계라는 걸 알면서도. 그래서 묻고 싶은 말이 더 많았지만 그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도건씨.”


아. 그렇지. 도건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그제야 맞은편에 서연이 앉아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서연을 보는 순간 그는 지금의 상황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그는 애써 웃어보려 했지만 얼굴이 굳어질 뿐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흘깃, 시계를 살폈다. 같이 있던 시간은 고작 30분이었는데 몇 시간이라도 지난 듯 지루했다. 영화를 보자고 한 서연의 제안에 아무 말 없이 그러자고 한 게 새삼 후회가 되었다.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는데, 그 일렁임이 수북하게 쌓인 일들을 방해했다. 그래서 차라리 서연과 영화라도 보는 게 낫지 않나 생각했다.


“네.”


“편하게 말해주세요. 이제 곧 결혼할 사이인데 존칭 계속 듣는 거, 왠지 거리감이 느껴져서 싫어요. 편하게 말해 주세요.”


수화기 너머 성훈은 잠시 말이 없다고 그가 묻는 대로 대답을 해주었다. 많이 아파서 입원을 했고, 언제 퇴원을 할지 모른다. 계속 된 생각에 그는 그만 서연의 말에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어색한 침묵이 둘이 앉은 공간에 퍼져나갔다.


“차차, 하도록 하죠.”


"네. 그래요. 천천히 해도 되죠. 도건씨와 저에겐 아직 수없이 많은 날이 남아 있잖아요. 천천히 하나씩 같이 해나가는 거, 꽤 즐거울 것 같아요."


"……."


"영화는 제 취향대로 골랐는데, 괜찮을까요? 물어보고 예매를 했어야 했는데 제가 좋아하는 걸로 고르고 말았어요."


"괜찮습니다."


그건 진심이었다. 그는 영화도 책도 특별히 취향을 타지 않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대로 영화도 책도 모두 보았다. 그런 면에서는 미유도 그랬다. 어렸을 때 집에서 굴러다니던 오빠의 국어교과서까지 전부 읽었다던 미유는 책이라는 책은 전부 좋아했었다. 교과서라곤 들고 다니지 않아 덕분에 제 차지였다며 울던 미유의 얼굴이 컴컴한 밤에 어느 새 떠오른 달처럼 선명하다.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서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도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더 이상 자리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무례한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영화관에 들어가 영화를 보는 걸 해낼 수 있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도, 도건씨."


"영화는 다음에, 보도록 하죠."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그대로 밖으로 향하는 도건을 잡지도 못한 채 서연이 멍하게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도건은 밖으로 향하는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가슴 속에서 일렁이는 무언가가 입 밖으로 흘러나와 버릴 것만 같았다.


젠장. 잠잠했던 마음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아이의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미유는 그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병원에 들르면 아이는 자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미용실에서 일을 하다 저녁이 되면 아이는 또 자고 있었다. 하지만 새액새액, 자고 있는 아이의 표정이 날로 어두워져갔다. 찬별을 지키고 있는 엄마의 말로는 밥 먹는 양이 점점 줄어든다고 했다. 먹을 수 없다, 는 게 맞는 표현이리라. 독한 약을 아이의 소화기관이 이겨내지 못하는 증거였다. 하지만 맞는 골수를 찾을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내려면 약을 이겨내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점점 쇠약해져 가는 아들을 아무런 대책도 없이 보고 있는 건 견디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미용실을 나가서 일을 해야 할 때 그녀는 속이 상했다. 하지만 찬별에게 맞는 골수 공여자를 찾게 되고, 수술을 하게 될 때 들어갈 엄청난 수술비를 생각하면 마냥 미용실 문을 닫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조금이라도 아끼고, 조금이라도 더 벌어야 했다. 휴우.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답답하고 우울했다. 찬별이를 생각해서라도 힘을 내야한다는 걸 알았지만 찬별이가 없을 때면 저도 모르게 한숨이 튀어나왔다. 해사했던 미유의 얼굴에 피로와 근심으로 인한 어두움이 드리웠다.


“그만 들어가 봐.”


예약손님의 머리를 막 끝냈을 때였다. 토요일 오후의 미용실은 휴가철 공항처럼 북적이고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들어가라니. 미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둘이 어떻게든 할 수 있어.”


“이렇게 많은 사람을 어떻게 해.”


미유가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미와 서현 둘이서는 힘이 들 게 분명했다. 붐비는 상황을 정리하면 병원에 들어갈 시간이 얼추 될 거였다. 누가 코를 베어간대도 모를 정도로 바쁜 시간이 지나고 미유는 온 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축 늘어졌다. 시계를 보니 엄마와 교대를 할 시간이 되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다미가 건네주는 샌드위치를 씩씩하게 베어 물고는 병원으로 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엄마와 찬별에게는 씩씩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야 모두들 힘을 낼 수 있으니까.


오늘은 또 찬별이 무슨 이야기를 해줄까, 생각하며 미유는 발걸음을 옮겼다. 찬별은 하루 종일 있었던 일들을 하나 하나 미유에게 해주는 걸 좋아했다. 어떤 간호사 누나가 친절한 지, 주사는 얼마나 아팠는지, 소독약을 부은 듯한 맛없는 밥을 하나도 안 남기도 열심히 먹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 기운이 없어 축 쳐진 어깨를 애써 반득하게 펴며 미유는 병실을 향해 걸었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찬별을 보면 기운이 솟았다. 그렇게 막 병실에 도착했을 때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빙그레. 아들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미유의 입이 자연스레 위로 향했다.


“우리 찬별이, 토해서 기운이 하나도 없겠네.”


“괜찮아요.”


찬별이 괜찮다고 대답하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기운이 쭉 빠진 것처럼 힘들어보이는 모습에 미유는 가슴이 아파왔다. 엄마 왔다고, 소리를 지르려는데 또 토했다는 말에 울컥 눈물이 치밀어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러지 말아야지, 마음을 굳게 먹어야지 항상 다짐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아유, 착해라. 우리 찬별이 이렇게 착한데 선생님이 선물 하나 줄까. 말해 봐. 선생님이 뭐든지 들어줄게.”


박선생이 환하게 웃으며 찬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제 보아도 참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성훈과 셋이 보았을 때는 차갑고 도회적인 이미지일 뿐이었는데, 아이들을 대할 때면 항상 웃는 모습에 밝은 얼굴이 인상적인 의사였다. 그렇기에 미유의 마음이 한결 놓이기도 했다. 성훈이 믿을만하다고 했을 때 마음 한 구석으로는 믿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점차 그녀는 박선생이 좋아지고 있었다.


“음, 제가 바라는게, 딱 하나 있긴 한데요. 그건 선생님이 못 해요.”


“왜? 피자나 스파게티 이런 거야. 음, 그런 건 조금 곤란한데.”


“먹는 거 아니에요. 피이, 선생님은 내가 돼진 줄 알아요.”


찬별이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박선생에게 퉁박을 주는 모습에 미유는 강찬별! 하고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하지만 그런 모습마저 귀여웠는지 박선생은 미소를 짓는다.


“이런, 미안. 피자는 선생님이 먹고 싶었는데. 그럼 우리 찬별이는 바라는 선물이 뭐야.”


“아니에요. 선생님은 줄 수 없는 거예요.”


“그래도 선생님은 궁금한데. 선생님한테만 잠깐 말해주면 안 돼?”


찬별이 입을 삐죽 내민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을 때 찬별이 하는 행동이었다. 미유는 들어가려던 마음을 접고 그렇게 문가에 서서 찬별을 바라본다. 찬별이 갖고 싶은 게 뭔지 궁금해졌다. 해줄 수 있는 거라면 어떻게든 해주고 싶었다.


“비밀 지킬 거죠?”


“물론.”


소근 소근, 박선생의 말소리가 작아진다. 자연스레 찬별과 박선생의 머리가 가까이 모여진다. 박선생이 말해보라는 듯 찬별에게 가까운 쪽 귀로 손을 가져간다.


“아빠. 아빠가 만나고 싶어요.”


쿵. 아빠, 란 말에 미유는 눈앞이 캄캄해진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임에도 놀란 가슴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그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찬별의 모습에 일격을 당한 심장이 통증으로 찌릿거렸다.


“헤헤. 그치만 비밀이에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요, 자 약속.”


손가락을 거는 찬별과 박선생의 모습을 미유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술 한 잔 할까.”


병실에 차마 들어가지 못한 미유는 다시 미용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닫는다 해도 뒤처리를 해야 할 일들이 좀 많은가. 아니 그렇다기보다 찬별의 맑은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미안하고 속상해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줄줄 흘러내릴 것 같았다. 하지만 찬별 앞에선 울 수도 없었다. 가슴이 온통 멍이 든 것처럼 아파왔다. 그렇게 들른 미용실인데, 아직 다미가 퇴근 전이었다. 왜 다시 왔냐는 물음도 없이 다미는 술타령이었다. 파랗게 질린 미유의 얼굴을 보며, 그녀는 지금 미유에게 필요한 게 뭔지 단박에 눈치 챈 모양이었다.


“술은. 할 일이 이렇게 태산인데.”


“청소야 내일 하면 되지. 뭐 더러워서 문 못 열겠으면 하루 쉬면 되고.”


농담인 게 분명한 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툭 뱉는 무심한 다미의 표정에 미유는 킥, 웃고 만다. 만났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다미의 저런 무덤덤한 성격이 그녀를 얼마나 많이 위안해 주었는지 모른다.


“좋은 생각인데.”


“하루 쉴까. 그럼 서현이가 엄청 좋아하겠네. 아니, 앉은 김에 쉬어간다고 아예 당분간 휴업이라도 할까.”


“말도 안 돼. 농담은 거기까지만 해.”


“충분히 진지하다고 보는데.”


냉장고에서 꺼내 온 맥주를 따던 다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미의 눈동자는 속을 알 수 없을만큼 까맣고 어두웠다.


“잘 생각해 봐. 앞 일은, 생각대로 되지 않고 내 맘 같지가 않거든.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잖아. 나는 그래서 네가 찬별이 곁에서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해.”


오래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쉽게 얘기할 수 없는 문제여서였을까. 평소에도 차분한 다미의 어조는 무섭도록 침착하고 차가웠다.


“괜찮을 거야. 찬별이 나을 거야.”


미유가 고집스레 대답했다. 다미의 말에 깔린 최악의 경우, 같은 건 생각해보고 싶지도 않았다. 톡. 맥주캔을 따서 다미가 그녀에게 밀어준다. 그녀는 맥주캔을 멍하니 바라본다.


“나도 그러길 원해. 진심으로. 그렇기 때문에 미용실을 쉬자는 말도 한 거야. 그런데 넌 그건 못 보겠지. 너 때문에 미용실 쉬는 거 용납 안 할 거야.”


“응. 언니, 난 그런 건 싫어.”


“그러니까 대신 유급휴가 줄게.”


“언니.”


“찬별이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나 계속 곁에 있었어. 너는 니 아들이니까 찬별이를 사랑하겠지만 난 아냐. 조그맣고, 여리고, 그러면서도 씩씩하고, 한없이 사랑스러운 존재야. 나한테 그래. 그러니까 나도 찬별이 죽는 꼴은 못봐.”


“나도 못 봐.”


꿀꺽. 맥주를 마시니 체한 것처럼 막혔던 가슴이 뚫리는 기분이 든다. 아, 많이 답답했구나. 그런 감정이 밀려온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세상에서 둘도 없는 친구인 다미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했다. 너무 답답해서, 그녀도 하소연할 곳이 필요했기에.


“언니. 찬별이가 아빠를 보고 싶어해. 찬별이한테 미안해서 너무 속상해. 왜 나는 남들 다 있는 아빠 하나를 찬별이한테 못 만들어줬을까 싶어. 그땐 그게 정말 옳은 일었다고 생각했는데…….”


“넌 잘 했어. 최선의 선택을 했고, 그 선택에 맞게 성실히 노력했어. 그럼 된 거야.”


다미는 재판장의 판사라도 된 것처럼 진지하고 근엄하게 말한다. 그녀가 몇 번이고 언제나 반복해서 미유에게 하는 말이었다. 넌 잘 했어. 넌 최선을 다했어.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그 말은 미유에게 항상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고는 했다. 만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객관적인 타인으로서의 다미가 당시 해줬던 말은 미유에게 큰 힘이 되고는 했다. 하지만 오늘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언니 나는 내가 그때 벌 받았다고 생각했어. 나 때문에 찬별이가 그렇게 된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지금 다시 또 그때랑 같은 일이 벌어지니까, 견딜 수 없어. 미쳐버릴 것 같아.”


핑, 미유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차라리 자신이 아팠다면 느끼지 않았을 고통과 죄책감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닥터 한은 어때? 닥터 한은 널 좋아해. 분명. 내 전재산을 걸어도 될만큼 분명한 사실이지. 찬별이가 아픈 것도 알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에게 한결 같고.”


다미는 너 때문이 아니라고 몇 번이고 다시 얘기해주고 싶었지만 그냥 말을 돌렸다. 미유가 그 문제에 한해선 언제나 자신을 원망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말을 돌려 생각의 흐름을 바꾸는 게 낫겠다 싶었다.


“성훈오빠는 그냥 친한 오빠일 뿐이야.”


“오빠가 아빠 되고 그런 거야.”


“언니 나, 찬별이한테 보여주고 싶어. 찬별이 진짜 아빠를.”


“그럴 거라 생각했어. 휴우. 하지만, 네가 말한 그대로라면 난 말리고 싶어.”


사실은 그게 그녀의 진심이었다. 찬별에게 도건을 보여주고 싶었다. 네가 부러워하는 다른 아빠들처럼 훤칠하고 늠름하고 능력 있는 아빠란 존재가 너에게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큰 꿈이었다. 도건은 찬별의 존재조차 몰랐다. 그런데 이제 와 당신에게 6살 난 아들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다미의 저런 만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 그렇겠지.”


휴우. 미유는 자꾸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 아빠가 만나고 싶어요.’


찬별의 한 마디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차마 누가 들을까 크게 내뱉지도 못하는 아들의 소망이 그녀는 서러워 자꾸만 한숨을 쉬었다.








4월의 마의 달-_-;;
제대로 피어보지 못한 채, 비에 바람에 흔들리는 벚꽃마냥 어수선했던 4월이었습니다.
이제 4월은 안녕 ㅡ.ㅜ;


댓글 '4'

판당고

2010.04.28 01:23:23

안타깝기만 한 것 비바람의 갓 핀 벚꽂같네요. 어미의 심정을 모두는 모르겠지만 나의 소중한 사람이, 나를 살게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것과 그 사람이 간절히 바라는 것을 들어주지 못하는 것의 안타까움은 많이 겪어도 시간이 지나도 '그게 인생이지 뭐'라고 무뎌져도 처연해지기만 할 뿐이라서 더 가슴이 아프네요.

큐리

2010.04.28 10:42:36

아픈 아이의 엄마는 때로는 몰염치해지기도 하고.. 한없이 이기적이게도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도건의 결혼이나 상대인 약혼녀에게 미칠 파장보다는 그저.. 내 새끼가 그렇게 원하는데.. 못할게 뭐야라는 심정이되는거죠. 그걸 개념없다고 뭐라고 손가락질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미유가 도건에게 찬별의 존재를 아무래도 알리게될 것 같네요.

하늘지기

2010.04.28 13:05:15

미유도 어쩔 수 없는 엄마.
아마 조만간 말하게 될 듯..

올리브

2010.04.30 22:28:36

찬별이가 안쓰럽네요
미유가 무슨 사정때문에 헤어진 걸까요?
자주 오셔서 글써주세요~
문서 첨부 제한 : 0Byte/ 2.00MB
파일 제한 크기 : 2.00MB (허용 확장자 :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245 푸른봄 4-3 [2] 편애 2010-09-03
244 붉은 탈 <18> [2] 신지현 2010-06-11
243 푸른봄 4-2 [2] 편애 2010-05-13
» 푸른봄 4-1 [4] 편애 2010-04-26
241 푸른봄 3-2 [3] 편애 2010-04-21
240 푸른봄 3-1 [2] 편애 2010-04-16
239 푸른봄 2-2 [3] 편애 2010-04-12
238 푸른봄-2 [2] 편애 2010-04-05
237 푸른봄-1 [1] 편애 2010-03-28
236 2010 대통령의 딸 (03) [3] 베로베로 2010-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