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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있을 줄 알았지.”
“성훈오빠?”
“그래. 지금 집 앞이야. 5분 안에 나와.”
불도 켜지 않은 채 앉아 있던 미유는 갑자기 들려온 핸드폰 벨소리에 놀랐다. 놀라서 불을 켜고 전화를 받으니 성훈이었다. 머릿속에서 갖가지 망상과 불안과 걱정이 회오리치고 있던 참이라 그런지 성훈의 목소리마저 반가웠다. 병원에서 찬별을 간호하다 엄마와 교대를 하고 온지 3시간이었다. 집을 대강 치우고 잠시 눈 좀 붙일까 싶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있는 내내 불안했다. 금방이라도 찬별이 악화 됐다고 전화가 오는 건 아닐까. 찬별이 아픈데도 아프다고 하지 않고 참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시작해서 온갖 잡생각들이 떠올라서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런 때에 성훈이 적절하게 나타나 준거였다. 물론 나오라는 소리는 그다지 달갑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집앞이라는 말에 다른 말을 덧붙이지 못한 채 미유는 카디건을 걸친 채 밖으로 나왔다.
“밥은 먹었어? 잠은 좀 자고?”
얼굴을 보자마자 성훈은 미유에게 밥부터 묻는다. 하지만 미유의 파리한 얼굴을 보는 순간 미유를 보는 기쁨에 들떴던 성훈의 얼굴이 차갑게 식는다. 눈 밑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있고, 피곤한 듯 입술이 하얗게 일어나 있다. 이런 모습으로 걱정하지 말라고, 잘해 나갈거라고 말하면 안심이 안 된다는 거다. 성훈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성훈은 애써 굳은 얼굴은 편다. 미유의 근심에 한 자락도 더 얹어주고 싶지는 않아서. 지금 그의 근심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어.”
“어, 는 무슨. 묻는 내가 바보지. 얼굴을 보아하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피죽도 못 얻어먹은 거 같은데. 혼자 있으면서 집에 불도 안 켜놓고 말이야.”
“어쩐 일이야?”
미유는 자신의 얼굴을 깊게 들여다보는 성훈의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리듯 물었다. 지금 기분으로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만나면 언제나 마음이 무거워지는 성훈은 더더욱.
“인마, 반갑지 않아도 좀 반가운 척 해라.”
콩. 성훈이 미유의 이마에 콩알을 먹이며 장난스레 말했다. 그녀는 그의 장난스런 행동에 괜히 더 미안해진다.
“어머님 특명이야. 성훈아, 미안하지만 우리 미유가 아무 것도 안 먹고 있을테니 밥 좀 먹이고 와줄래? 라고 말하셨어. 어때 이 정도면 여기 올 이유 충분하지?”
“밥?”
“그래. 밥. 너 밥 언제 먹었는지 기억은 나?”
“당연하지. 아침에, 먹었어.”
당연하다고 큰 소리 치는 것과 달리 미유의 말끝이 흐려진다. 곰곰 생각해 보니 과연 아침을 먹었는가 싶기도 하다. 하도 정신이 없어 언제 밥을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과연, 공복감 같은 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짓말. 먹은 얼굴이 아니래도. 가자.”
“어딜?”
“불러서 밥이나 먹고 들여보내려고 했는데, 네 얼굴 보니까 안 되겠다. 가자, 마트. 내가
한성훈표 특제 영양밥으로 봉사한다.“
“그냥 사 먹자. 오빠가 여기까지 왔으니까 내가 사 줄게.”
미유는 봐, 지갑도 가지고 나왔어 하듯이 지갑을 성훈에게 보여주며 앞장을 선다. “어머니께서 냉장고 좀 채워놔달라 그러셨어. 네가 지금 이 정신에 택시 타고 마트 갈 것도 아니고, 어머니도 허리가 안 좋으셔서 무거운 거 들고 다니기 힘드시잖아. 마트 얘기 하시길래 내가 얼른 알았다고 했어. 그러니까 한성훈표 특제영양밥은 그냥 덤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겠어?”
“귀찮지 않아?”
미유는 성훈 모르게 입을 삐죽였다. 남의 신세를 지는 걸로 치자면 세상에 엄마만큼 싫어라 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처음에는 성훈을 낯설어하고 데면데면했던 엄마가 지금은 성훈에게는 신세를 지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미유는 그것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성훈에게 언질을 주었을 엄마를 생각하니 별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트 한 번 같이 가는 일이 뭐 어렵다고, 밥 한 번 먹는 일이 뭐 귀찮다고 자꾸 성훈에게 모질게 대하나 싶기도 했다. 부담스러운 건 부담스러운 거였지만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괜찮아. 귀찮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나야 미안해서 그렇지. 늘 오빠 귀찮게만 하잖아.”
“별 게 다 미안하네. 얼른 타. 출발하자.”
그럼 한 번만, 미유는 중얼거린다. 탁. 차문이 닫히고 두 사람의 한숨이 엷게 차안에 퍼져나간다. 한 사람의 안도의 한숨을, 한 사람은 답답한 심정의 한숨을 그렇게 토해냈다.
“생일이요?”
“그래. 저번 주 일요일이 서연이 생일이었다지 뭐니. 오늘 사부인과 얘기를 하다가 내가 다 미안하지 뭐니. 그래서 내가 그랬다. 아직 애들이 친해지는 단계이고, 서연이가 부끄러워서 말을 못했나보다고 말이야. 그러니 니가 슬쩍 선물이라도 하도록 하려무나. 도건아, 듣고 있니?”
도건은 갑작스레 걸려온 어머니의 전화에 놀랐다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이야기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렇게 마음에 든단 말인가. 그는 후, 하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로감이 몰려왔다. 뻣뻣함이 느껴지는 뒷목을 그는 핸드폰을 들지 않은 손으로 꾹꾹 눌렀다. 어머니의 말은 길게 이어졌다. 갸름한 얼굴에 도회적인 얼굴의 서연이 떠올랐다. 언제 어디서나 웃을 수 있는, 화가 나는 일도 내색하지 않으려면 언제든지 내색하지 않을 수 있는 모습의. 그래서 어쩌면 더 가까워질 수 없는지도 몰랐다.
“듣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너희 아직 약혼반지를 하지 않았더구나. 물론 마음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형식도 무시할 수 없는 거란다. 오늘 마침 서연이와 집에 들르기로 하지 않았니. 이따 서연이가 웃으며 선물 자랑하는 걸 보고 싶구나.”
제안을 빙자한 강요였다. 도건의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어머니.”
“난 서현이가 참 마음에 든다. ‘어머니, 어머니.’하면서 싹싹하게 구는 참 좋구나. 아마 할아버지도 계셨다면 참 좋아하셨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할아버지, 란 말에 도건은 혀끝까지 맴돌았던 말을 거둔다. 어머니가 할아버지까지 거론할 정도라면 이미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는 뜻이었거니와, 자신의 마음을 알아달라는 표시이기도 했다. 이왕 시작한 길이었다. 도건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서연에게 청혼을 한 순간부터 어쩌면 모든 것이 시작된 셈이었다고.
“알겠습니다.”
“그래, 내 뜻을 알아주니 고맙구나.”
탁. 통화가 끝나고 핸드폰을 닫으니 조금 떨어진 곳에 서연이 다가와 있다. 도건은 손목의 시계를 확인한다. 그러고보니 어느 새 약속시간에 임박해 있었다. 서연은 그가 핸드폰을 닫는 모습에 가까이 다가왔다.
“오셨군요.”
“네. 중요한 통화를 하시는 것 같아서 그냥 기다렸어요.”
“그러셨군요. 일단 타실까요.”
“네.”
차 안은 잠깐 정적에 휩싸인다. 도건은 시동을 켜지도 않은 채 고민에 잠겼다. 약혼반지, 란 단어가 주는 무게감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저, 도건씨. 출발 안 하세요?”
화사하게 웃으며 서연이 차의 뒤를 가리켰다. 빵빵, 클랙션을 울리는 소리가 그제야 귀에 들려왔다. 이런. 그는 급히 시동을 걸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일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결국 그는 마음의 결정을 하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그는 서연에게 청혼을 한 후 처음으로 성급했던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누구랑 해도 상관이 없을 줄만 알았다. 남들처럼 약혼을 하고 결혼을 하고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가리라 결심했다. 그런데 어려웠다. 약혼을 하고, 결혼을 할 여자의 부모님을 찾아뵙고, 자신의 부모님에게 결혼할 여자를 선보인다는 일련의 행위들은 어렵고 번거롭고 귀찮고 힘들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도건은 오히려 참아내고 있었다. 그의 이기적인 행동에 대한 행위들이 너무 쉬웠다면 오히려 그는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몰랐다. 차라리 이게 낫다고 그는 스스로를 위안했다.
“갖고 싶은 게 있습니까.”
“네.”
도건의 말에 서연은 환하게 웃었다. ‘남자란 말이다, 달라고 하면 자꾸 달라고 하면 주게 되어있어. 그러니 네가 도건이의 마음을 얻고 싶다면 자꾸 졸라. 그러면 얻게 될 거야.’ 시어머니가 서연에게 해준 말이었다. 그녀는 그 말을 믿었다. 그렇기에 도건이 준다고 하는 건 전부 거절하지 않을 작정이었고, 더욱 조를 작정이었다. 그의 마음을, 그의 모든 것을.
“또 만나는군.”
먼저 입을 연 건 도건이었다. 도건의 짙은 눈이 성훈과 미유의 카트를 지나 성훈에게 가 멈춘다. 도건은 기분이 언짢아졌다. 남편이 있는 주제에 성훈과 저렇게 다정한 모습으로 카트를 밀고 있어도 되는 건가 싶기도 했다. 물론 그가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불쑥 치미는 이 불쾌감.
“자주 만나네. 안녕하세요, 서연씨.”
“안녕하세요, 성훈씨라고 하셨죠. 옆에는 미우씨라고 했던가요?”
성훈은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옆에 있는 서연까지도 챙기는 걸 잊지 않는다. 서연이 이마를 곱게 찌푸리며 기억을 되살리려 애썼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는지 다른 이름을 댄다. 성훈은 씨익, 웃으며 금세 그 이름을 정정한다. 싱글벙글 웃는 폼이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미유, 강미윱니다. 흔한 이름은 아니죠.”
“네, 미유씨. 반가워요. 이런 데서 다시 만나네요.”
P시는 좁은 곳이었다. 백화점이라고 해 봐야 여기까지 합해 세 곳밖에 되지 않았다. 메이저급이라고 하면 단연 이곳이었기에 어쩌면 이렇게 만나게 되는 건 그리 특별한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도건이 네가 백화점엔 어쩐 일이야. 넌 이렇게 시끄러운 데 싫어하잖아.”
보통의 남자가 그러하듯 도건도 시끄럽고 사람 많은 백화점을 싫어했다. 아니 견디지 못한다는 게 옳은 표현이었다. 하지만 도건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는 성훈도 이런 공간을 견디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렇기에 둘은 학창시절부터 피시방이나 당구장을 드나들면서도 견디지 못해했다. 그런 면에서 죽이 잘 맞았다고도 볼 수 있었다. 시커먼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 있는 것 또한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었기에 둘은 둘만 붙어다니는 경향이 강했고, 그래서 더 친해진 면도 없잖아 있었다.
“아. 며칠 전이 제 생일이었거든요.”
그의 침묵이 부담스러웠는지 옆에 서 있던 서연이 입을 열었다.
“아 그러시군요. 축하드립니다.”
“어머, 아니에요. 그냥 제 생일이었다니까 도건씨가 선물을 사준다고 하셔서 그만. 도건씨가 백화점을 싫어하는 줄 알았으면 다른 데로 갈 걸 그랬나봐요.”
“아닙니다. 이왕 온 김인데요.”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시달린 참이었고, 지금 다시 밖으로 나가 운전을 해야한다면 그때야말로 정말 못견디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걸로 사달라고 하십시오. 저 녀석이 저래보여도 꽤 능력이 있는 친굽니다.”
“호호, 안 그래도 그러려고요. 반지를 살까 싶어요. 전 생각지도 못했는데 도건씨가 약혼반지는 어떠냐고 해서요. 약혼식은 간단하게 치르려고 하는데 약혼반지까지 해야할지 잘 모르겠어서 고민이에요. 그냥 커플링이 나을까요, 아니면 그래도 약혼반지가 나을까요?”
서연은 고민스럽게 중얼거렸다. 그저 같은 반지일 뿐인데도, 어떻게 이름 붙이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무게감이 실린 약혼반지가 좋을지, 아니면 연인이라는 느낌을 살리는 커플링이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아직 반지는 보지도 않았으면서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다.
“아, 이런 실례를. 우선 약혼을 축하드렸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이왕 약혼식까지 올릴 거면 약혼반지를 정식으로 맞추는 게 좋겠죠.”
성훈이 깜빡했다는 포즈로 자신의 이마를 쿵쿵 두드리고는 갑자기 정색을 했다.
“윤도건, 네 약혼 축하하는 의미에서 내가 저녁 한 번 사는 건 어때. 오늘 시간 어때? 미유야, 너도 시간 되지?”
“아, 아니에요.”
“아, 아니야.”
“아, 그건 안 될 것 같군.”
동시에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여자와 한 남자가 입을 모았다. 그 갑작스런 합창에 성훈이 눈을 크게 떴다.
“오빠, 난 조금 있다가 병원에 가야 돼서.”
“아. 그렇구나. 미안. 그 생각을 미처 못 했다. 그럼 오늘은 힘들겠구나.”
응,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미유의 모습에 도건은 괜히 심술이 났다. 그래서 딱히 축하받고자 하는 마음도 없으면서 미유에게 시비를 걸었다.
“강미유, 넌 약혼 축하한다는 말 한 마디도 없어?”
어딘지 날이 선 듯한 그의 말투에 성훈이 그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누군가의 신경을 쓰기엔 그의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일까. 언제부터 기분이 나빴었지. 정확히 어머니의 전화를 받은 후였던가. 아니면 백화점에서 성훈과 미유의 나란한 모습을 본 순간부터였던가.
“축하드려요, 물론. 서연씨라고 했죠, 결혼 축하드립니다.”
“네가 언제부터 나한테 존댓말을 썼다고 답지 않게 존댓말이야.”
태연한 표정으로 웃음까지 지으며 미유는 서연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에 도건은 주먹을 꾸욱, 쥐며 빈축의 말을 했다.
“이제 나이도 먹었으니까요.”
미유는 신경질적인 그의 말을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했고, 옆에 있던 서연이 급히 중재라도 하듯 입을 열었다.
“나중에 성훈씨랑 꼭 오세요. 청첩장 보내드릴게요.”
“네. 그럼 오늘은 이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도건오빠, 만나서 반가웠어요. 안녕히 가세요.”
흔연한 표정으로 반가웠다고 말하는 미유의 말을 들으며 도건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뇌에서 채 거르지도 않은 말을 입 밖으로 마구 내뱉었다.
“그래, 잘 가. 결혼식에서 보자. 그땐 네 남편이랑 꼭 봤으면 좋겠구나.”
도건은 자신의 할 말만 한 채 상대를 무시하듯 바로 뒤돌아섰다. 그렇기에 일그러지는 성훈의 얼굴도 미유의 얼굴도 보지 못했지만, 그 둘처럼 동시에 그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나한테 남편이 다 생겼네.”
일그러졌던 얼굴을 했던 미유가 엷게 웃으며 성훈을 향해 농담을 던졌다. 성훈은 그 순간 얇은 얼음판을 디디고 있는 듯한 불안감을 느꼈지만 그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그저 웃음 지으려 노력했다. 쇼핑한 짐들을 다 성훈의 차에 정리한 후 식사를 하러 근처 레스토랑으로 들어온 참이었다. 집에서 밥을 해주려던 성훈에게 밥을 먹자고 청한 건 오히려 미유였다. 아마 그와 둘만 집에 있는 게 부담스럽기 때문일 거라고 그는 혼자 생각하고서는 실망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식당을 고르고 운전을 했다.
이곳은 미유가 좋아하는 스파게티를 하는 집이었다. 그렇기에 주차장이 없어 애매한 곳임에도 굳이 이 곳을 선택했다. 엷은 연두빛, 5월의 햇살이 부서져내리는 레스토랑의 창가는 매우 아름다워서 그는 만족스러웠다. 빙그레 미소짓는 미유의 표정에 더더욱.
“그러네. 언제 생긴 거야, 나도 모르게.”
성훈도 가벼운 농담으로 받아쳤다. 달리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고맙다고 해야겠지. 아무 말도 안해 준 것에 대해. 오빠 입 무거운 거야 알고 있었지만.”
“아니. 그런 말은 안 해도 괜찮아.”
그냥 나의 이기니까. 성훈은 마지막말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자신의 마음에 살아있는 미유에 대한 사랑, 혹은 미련이 질겨서 그는 마음이 아팠다. 그는 도건의 20년지기 친구였다. 그런데도 모든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건 그의 미련이며 이기였다.
“없는 남편을 어떻게 만들어서 가야 하나. 정말 남편 데리고 결혼식장 가면 쟨 여기 왜 왔어, 이러는 거 아냐?”
장난 반, 진담 반인 그런 말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싶지 않아 치는 방어벽 같은 농담이었다. 하지만 성훈은 그렇게 태연하지 못했다. 가슴이 떨려서 목구멍에서 치솟는 진심을 고스란히 내뱉고야 말았다.
“그 남편 내가 해줄까?”
“농담하지 마.”
실수했다. 편히 웃고 있던 미유의 얼굴에 다시 깜빡 경계의 불이 들어온다. 성훈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한숨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편하게 허물없이 대할 때면 미유는 그에 맞게 웃으며 그를 대한다. 그러면 그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서는 다시 바보 같은 짓을 하고 미유는 그를 또 경계한다. 그러다 성훈의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연기는 다시 시작되고. 그는 미유의 불편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였을까.
도건이 그의 옆에 약혼녀까지 대동하고 나타나서였을까. 아니면 이제는 사랑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묵어버린 자신의 감정에 미안해서였을까. 성훈은 그답지 않게 정색을 하고 만다.
“농담 아니야. 나는 네가 받아준다면, 언제든 네 남편이 될 마음이 있어.”
“오빠, 나는.”
“그래, 알아. 네가 강미유이고, 그 강미유가 내 제일 친한 친구랑 어떤 사이였는지, 다 알고 있어. 찬별의 아빠가 누군지까지 나는 전부 알고 있다. 그래서 말할 수 있어. 나는 네가 좋아. 너를 사랑해. 그런데 나는 네가 불편해한다는 이유로 이 감정을 오랫동안 숨겼어. 아니 어쩌면 너도 알고 있었잖아. 그러니 그렇게 날 불편해했겠지. 그런데, 이제 나는 이 감정을 숨기지 않을 거야.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너를 사랑해. 아주 오래전부터 쭉 그런 감정이었어.”
단호하게 자신의 감정을 말하는 성훈을 채 바라보지 못해서 미유는 고개를 돌렸다.
“…….”
미유의 입술이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는다. 성훈은 그만 누군가 심장을 꾹 쥐어짠 통증이 든다. 창밖을 보는 듯 시선을 돌린 미유의 얼굴은 고집스럽게 그의 이야기를 외면하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가슴이 아파왔다. 금방이라도 농담이야, 라고 말을 꺼내 그 전의 관계라도 회복하고 싶었다. 하지만 더는 그저 좋은 선배오빠로만 남고 싶진 않았다. 차라리 지나가는 타인보다 먼 사이라도 되고 싶었다.
그것이 어떤 파국을 가져온다 해도. 사실은 미유를 더 이상 볼 수 없다 해도.
하지만 그는 조금 후회했다. 밥이라도 먹고 이야기 할 걸. 이런 이야기를 들은 후 미유가 씩씩하게 밥을 먹을 수 있을지에 대해선 걱정이었다.
“오빠.”
멀리 시선을 주었던 미유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사슴처럼 커다란 눈망울은 그저 고요했다. 방금 사랑고백을 받은 사람 같은 흥분이랄까, 동요랄까 그런 건 보이지도 않았기에 성훈은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역시 안 되는 걸까.
“식사 나왔습니다.”
막 말을 시작하려던 미유는 음식을 들고 나오는 종업원을 보고는 뒤로 물러났다. 후우, 한숨이 나오려고 했다. 장을 보고 성훈과 가벼운 대화를 나눌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하루가 피곤하게 마무리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도건의 만남, 그리고 성훈의 고백은 그녀를 혼란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지금까지 고요하고 편안했던 시간들이 거짓말처럼 휘몰아치는 바람 속으로 사라져갔다.
“오빠, 배고프다.”
후우, 한숨을 쉬는 듯한 성훈의 모습에도 미유는 그저 눈앞에 놓인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들었다. 모른 척 할 수도, 알고 있다고도 할 수 없는 주제의 이야기였다. 성훈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해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듣는다는 것은 그녀에게 다시 한 번 부담이었고 충격이었다.
“그래, 먹자.”
미안했지만 이게 그와 그녀 관계의 한계였다. 어쩌면 진즉에 서로가 어디에 사는지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른 채 타인이 되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관계였다. 미유는 맛도 모른 채 눈앞의 스파게티에 집중했다. 조개를 먹고, 스파게티면을 먹고, 피클을 먹고 하여튼 먹을 수 있는 건 전부 입으로 넣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무슨 말이든 해버릴 것만 같았다. 그 말을 해버린다면 모든 게 다 엉망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그녀는 포크를 놓지 않았다. 꾸역꾸역 음식을 먹는 미유를 향해 성훈이 물컵을 살며시 밀어주었다.
“오빠, 난 지금이 좋아.”
물을 한 모금 꿀꺽, 삼킨 미유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알았어, 성훈이 조그맣게 대답한 것도 같았다.
“조금. 조금밖에 안 아파. 참을 수 있져.”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아 미유는 이를 악물었다. 목소리가 떨려오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찬별이 더 불안해했을 거였다. 불안은 전염성이 강하다고, 그 불안이 아이들의 희망을 좀먹는다고 성훈이 그랬다. 어른이 웃어야 아이들이 웃는다고 했다. 그럼 아이들의 웃음에 어른들은 힘이 난다고 했다. 아픈 아이들을 어른들이 단순히 간병하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응원하고 북돋워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걸 아는데도 웃어지지가 않았다.
“응. 우리 찬별이 잘 했어. 정말 대견해.”
미유는 조심스레 찬별을 가슴에 품었다. 안 그래도 어린 새처럼 작은 몸이었는데 치료를 받는 사이 더욱 야윈 느낌이 들어 그녀는 속이 상했다. 튼튼하고 강하게만 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어려운 일들은 모두 막아주고 싶었다. 밝고 튼튼하게 자라만 준다면, 이라는 그녀의 소망이 무색해졌다.
“우리 엄마도 잘 했어.”
토닥토닥. 할머니가 그러는 걸 본 모양일까. 찬별이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어 미유의 등을 두드린다. 마음이 약해진 걸까. 그런 찬별의 모습에 미유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렇게 작고 사랑스러운 우리 찬별이가 아팠다. 대신 아플 수만 있다면 그녀는 자신이 가진 전부를 내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었다.
“아빠, 아파. 어어엉.”
주사를 맞은 팔뚝을 보여주며 어리광을 부리는 혜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를 잘 따르는 혜진은 엄마 앞에서는 의젓하다가도 아빠 앞에서는 곧잘 어리광을 부리고는 했다. 미유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찬별도 자신과 같은 곳을 보고 있다는 걸 눈치 챘다. 미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집스레 입을 꾹 다문 찬별을 바라보았다. 한 번도 찬별에게 싫은 소리,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던 미유가 찬별에게 큰 소리를 낸 적이 있었다. 아빠에 대해 물을 때였다.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데 너무 당황하고 속상한 나머지 미유는 찬별에게 아빠 따윈 없다고 소리를 질렀다. 소리 지르지 않았다면 좋았을텐데. 다른 때처럼 여유롭게 받아넘기지 못했다. 찬별인 고작 다섯 살일 뿐이었는데. 그래서 그때 그녀는 처음으로 찬별이를 유치원에 보낸 것이 후회가 되었다.
“엄마, 왜 난 아빠가 없어?”
“엄마랑 아빠랑 많이 싸웠거든. 그래서 아빠가 가버렸어.”
“미안하다고 하지.”
“그럴 걸 그랬나?”
“응. 우리반 도영이도 나 때문에 싸웠는데 응, 내가 미안하다고 하니까 괜찮다고 했어. 그래서 나랑 도영이는 사이좋게 아이스크림 먹었는데.”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는 얼굴로 찬별은 엄마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좋은 엄마가 아빠랑 싸웠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언제나 웃어주고 착한 엄마인데 왜 싸웠을까. 아빠가 나쁜 사람이었던걸까. 세상엔 착한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다고 선생님이 그랬다. 누구나 착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쁜 행동을 하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하고, 그러면 다시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안하다고 안한 엄마는 그럼 나쁜 사람인가?
하지만 찬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예뻤다. 그러니까 아마 아빠가 잘못을 한 걸거라고 찬별은 결론을 지었다. 아빠가 미안하다고 안 한 게 분명해. 찬별은 얼굴도 모르는 아빠를 원망했다.
“그래도, 보고 싶다.”
“응?”
“아니야. 엄마, 나 물 마실래.”
미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보고 싶다, 는 말은 아마 얼굴도 보지 못한 아빠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속이 상했다. 혼자 찬별을 낳기로 결정하고, 수없이 이런 상황을 생각했다. 생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몇 번이나 생각해보았다. 그런데도 막상 이렇게 눈앞에 닥치자 그녀는 막막했다. 찬별에게 미안하고 속상했다.
“응. 엄마가 줄게.”
컵에 물을 따르며 미유는 도건의 옆에 서 있던 약혼녀를 떠올렸다. 서연이라고 했던가. 화사한 복숭아빛 원피스를 걸친 그녀는 예쁘고 눈부셨다. 커다랗고 듬직한 도건의 옆에서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다웠다. 선남선녀처럼 아름다웠다.
“엄마, 물 넘쳐.”
아. 찬별의 말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물잔을 넘쳐 흘러버린 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옆에서 놀란 얼굴의 찬별이 보였다. 미유는 정신없이 협탁 위에 놓여있던 화장지로 넘쳐버린 물을 닦아냈다.
“엄마는 차암.”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닦아주는 찬별을 보는 순간,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6살이 가졌어야 할 어리광이나 고집 같은 건 어디에도 없는 찬별의 모습에 그녀는 마음이 아파왔다. 방약무인한 고집쟁이었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까.
“엄마! 땡!”
“응?”
“뭐야. 난 엄마가 얼음이 된 줄 알고 녹여주려고 그랬지.”
“엄마가 얼음된 걸 우리 별이가 어떻게 알았을까?”
미유는 애써 웃으며 다시 물을 따라 찬별에게 건넨다. 최대한 밝은 음성으로. 그녀가 웃자 찬별도 따라 웃었다. 그제야 심장에 박혀있던 얼음 하나가 녹는 듯한 기분이 든다.
“엄마가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니까 그랬지. 아, 아쉽다. 놀이터 나가서 얼음땡 하고 싶다.”
찬별이 어후, 한숨을 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픈 거 다 나으면 엄마가 놀이터에 집이라도 지어줄테니까, 약 꼬박꼬박 잘 먹고 치료 잘
받자.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금방까지 눈꼬리에 눈물을 달고 있던 찬별이 씩씩하게 경례까지 하며 대답을 했고, 미유는 함께 경례를 하며 힘껏 웃었다. 찬별이 웃으니 그녀도 덩달아 웃음이 났다.
어젠 다섯시간반밖에 안 잤는데, 지금까지 깨어있을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에요.
점점 자는 양이 줄어드는 것 같아요.
잠이 아깝네요...ㅡ.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