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1화  스치다









지지지직. 지직-. 지지지직.


“뭐야. TV가 왜 이래.”



TV 내용이 끊겨서 들린다. 아, 짜증나.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모래는 투덜거리며 쾅쾅, TV를 때린다. 말로 안 될 때는 매가 약이다, 라고 중얼거리면서. 고물이 다 되어버린 TV를 바꾸자고 엄마한테 몇 번이나 말했지만 먹히지 않았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매타작을 당하는 텔레비전이었다.



“그만 보라는 신의 계시지 뭐야. 나랑 놀자.”


“됐거든.”



툭. 까맣게 변한 화면을 바라보는 모래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덮어버린다. 아무래도 통화를 하고 있던 사빈달의 저주로 화면이 꺼진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단 말이지. 탁탁. 신경질적으로 모래는 한 번 더 본체를 두드렸다.



“아, 된다. 나온다. 휴우, 아직 시작 안 했구나. 다행이다.”






봄날의 아지랑이가 멀리 피어오르고 있는 시골길을 시골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귀한 차가 이른 아침부터 지나가는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자동차가 지난 마른 길에선 뿌연 먼지가 하얗게 피어올랐다. 구불구불 구부러진 시골길에 영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미 수없이 그런 차가 지나간 탓에 동네 사람들은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윤성규. 이름 석 자만 들어도 우는 아이가 멈춘다고 할 정도로 뜨르르한 권력을 가진 양반이 죽었다. 어젯밤부터 어마무지한 차들이 이 좁은 시골길을 메웠다.


“윤노인네 손잔가 보네.”


“그네. 그 양반이 돌아가셨다는 게 어젯밤이니 벌써 왔어야지. 그래도 서울 산다드만 빨리 왔네.”


“와야지. 생전에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손자였는데. 그렇게 예뻐했는데 그 은혜를 알면 와야지.”


“요새 젊은 사람들이 그런 걸 아는가. 다들 저 잘났다고 그러지. 어쨌든 저 집 자식들은 전부 효자 효녀라고 소문나지 않았는가.”


“그러면 뭐해. 저 바쁘다고 임종도 못 지킨 위인인데.”


“에그. 남 말할 게 다 뭐야. 우리 집 자식은 그보다도 못한 위인인데, 누굴 욕하겠어. 자자, 가서 우린 일이나 하자고. 아직도 모 낼 게 허리 휘도록 많다구.”


허벅지까지 오는 노란 장화를 신은 세 명의 여인들이 지나가는 차를 보며 왈가왈부하며 지나갔다.


“네. 일주일만 부탁드립니다. 네. 전부 빼주십시오. 출장 건도 열흘 후로 조율 부탁드립니다.”


도건은 메마른 목소리로 간결하게 말했다. 선이 굵고 남자다운 얼굴에 검은 머리는 자칫 무섭게 보일 정도로 강한 인상이었다. 밤을 세어 벌겋게 달아오른 눈동자도, 거뭇하게 올라온 수염도 그의 매력을 죽이지는 못했다.


끼이익. 그는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고향집 앞에 차를 세웠다. 이미 좁지 않은 길에는 다른 차들로 만원이었고, 드나드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아이구, 우리 장자 왔구먼. 어서 와.”


먼 친척 아주머니를 필두로 반기는 손길들이 웃으며 그를 맞았다. 그는 깍듯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속으로는 웃고 떠드는 사람들에 대한 화가 치밀고 있었다.


넓은 마당엔 이미 몇 개나 되는 차일이 쳐져 있었고, 누군지 알 수도 없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웃, 아니면 친척, 그도 아니면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지인이었기에 그는 마주치는 사람마다 예의를 다해야 해서 부모님이 계신 안채까지 가기엔 시간이 걸렸다. 그와 더불어 피곤과 짜증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할아버지가 진짜로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전에는 편히 쉴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게 진짜라면 그는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심술궂고 완고하고 고집불통이었지만 그는 할아버지를 사랑했다. 저번 달까지만 해도 “언제 증손주를 보여줄 게야.” 하며 심술을 부리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그는 인정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그의 정신적 지주였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보다 할아버지를 더 따랐고, 법을 선택한 것도 할아버지의 뒤를 잇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도 제대로 보기 전에 할아버지가 이렇게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 나이가 많긴 했지만 누구보다도 건강했던 할아버지였다.


안채에 다다랐을 때에야 상갓집에 어울리는 곡소리가 들려왔다. 마당에서 떠들고 있는 수많은 소음에서 느낄 수 없던 비탄 섞인 울음소리였다. 그는, 그가 일하는 로펌에서 피도 눈물도 없기로 유명한 그는 순간 가슴 언저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 아파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도건아.”


아버지였다. 인자한 얼굴에 언제나 웃음을 띠고 있던 양반인데, 아버지의 죽음만은 견딜 수 없는지 침통하고 어두운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서 바꿀 수 없는 사실에 대한 확인을 받은 것만 같아 그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 왔습니다.”


“빨리 왔구나. 이쪽이다. 따라 오렴.”


그는 말없이 앞장 선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아빠아아, 아빠아아. 마지막 모습이나 보여주고 가지 무에 급하다고 그리 훌쩍 갔어. 으어어어.”


고모였다. 커다란 병풍 앞에 놓인 할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서럽게 울고 있는 건 고모였다. 여든 살의 인생을 산 할아버지의 죽음은 남들에게 호상(好喪)이었지만 당사자들에겐 아버지의 죽음이란 슬프고 안타까울 뿐이었다.


“아빠아, 아빠. 손자가 왔어요. 마지막까지 찾던 장자가 왔다구요. 당신 손자가 왔다구요. 아아빠, 아빠아아. 흐흐흐흑.”


쓰러지듯 그의 팔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영정을 향해 소리치는 고모의 모습에선 언제나 단정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자지러지듯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고모를 한 켠으로 모신 후 영정으로 다가갔다. 인자한 웃음을 띤 할아버지가 금방이라도 ‘잘 왔다, 내 새끼.’ 이럴 것만 같아 그는 이를 악물로 꾸벅 절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할아버지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현실이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그는 속으로 할아버지를 몇 번이나 불렀다. 불러도 대답할 수 없는 할아버지를 부르는 그의 눈에 스릇, 물기가 어렸다. 하지만 아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아무 말 없이 그는 그렇게 사진 앞에서 몇 분이고 앉아 있었다. 사람들의 곡소리도, 작은 한숨소리도,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말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이 공간 속에 할아버지의 사진과 자신 둘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침내, 겨우 머리로 할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때가 돼서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친 다리를 꾸역꾸역 일으킨 그는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곁에서 조문객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의례적으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고, 혹은 절을 하면서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은 어떤 상황에서라도 슬픈 일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것이 예정되었던 일이라도, 예정되지 않았던 일이라도 누군가와의 이별은 가슴 쓰리도록 아프고 괴로운 것이었다.



“선이요?”


제(祭)를 모두 마치고 난 뒤, 커다란 집은 더욱 조용하게 느껴졌다. 도건은 아직 남은 휴가도 휴가거니와 덩그렇게 큰 집에 남게 될 어른들이 걱정되어 남은 휴일을 집에서 보내기로 한 참이었다. 할아버지를 보낸 후, 기진맥진하신 할머니는 일찍 잠자리에 드셨다. 그 후, 부모님과 향이 좋은 녹차를 마시던 중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말에 그 답지 않게 말끝을 높였다. 막 그가 주름이 깊어진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이제는 많이 늙으셨단 생각을 할 때였다.


“그래. 네 나이도 어느 새 서른이 훌쩍 넘었구나. 벌써부터 마음먹었지만 네가 급하게 여기지도 않는데다 나도 네가 원하는 때 시키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지. 더구나 네 일도 꽤 바빴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내 후회가 되는구나. 살아 계실 때 아버님께 증손자 못 보여드린 게 걸려. 마음이 좋지 않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어머님께서 네가 결혼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 게 이 애비의 마음이다.”


“아버지, 아직 할아버지 돌아가신 지 채 한 달도 안 됐습니다.”


“당장 결혼하라는 게 아니야. 결혼할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게다. 선을 보고 한 달, 두 달 안에 갑자기 하는 결혼은 나도 싫다. 일단 선을 보고 마음에 맞는 아가씨가 있으면 그때부터 차분히 만나 봐. 그렇게 시작해.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거야. 널 보고 있으면 일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구나. 결혼에는 더더욱 그렇고. 이쪽에도 시선을 좀 돌려서 네 보란 얘기다.”


아버지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함이 깃들어 있다. 누구든지 3초 이상을 버티지 못하는 그의 시선을 아버지는 부드럽게 응시한다.


“내 마음도 그래. 그 동안 아버지가 너에게 부담주지 말라고 해서 선자리가 들어올 때마다 거절했었어. 그치만 이제 아버지의 허락도 떨어졌으니 이 어미가 부지런을 떨어볼까 생각중인데, 괜찮겠니? 나도 이제 할머니가 되어 보고 싶구나.”


도건은 진지하고 차분한 어머니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협동 공격에 그는 수세에 몰린 기분이다. 하긴 가끔씩 만나는 결혼 안 한 친구들은 모두 집안에서 결혼하라는 닦달을 듣는다고 한 게 벌써 몇 년째이니 이미 늦은 얘긴지도 몰랐다.


결혼이라. 해도 나쁠 건 없겠지. 그는 사랑이 없다면 결혼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로맨티스트는 아니었다. 더욱이 그는 그래도 아직 심각하게 결혼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왠지 모르게 터져 나오는 한숨을 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들은 이미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가 말씀을 꺼내신 터였다. 그러니 이쯤에서는 그가 양보를 할 차례였다. 그는 간절한 눈길을 보내고 있으신 어머니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할머님께도 얘기 드리면 좋아하실 거야. 여보, 나 벌써부터 막 마음이 들떠요. 그 동안 아까운 아가씨들이 얼마나 많았게요.”


“허허, 당신이 더 신난 거요?”


“그래요. 신났어요. 아들이 선본다고 해서 신났답니다.”


침통하고 우울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우는 걸 보며 그는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당분간은 이주일에 한 번씩 내려오는 게 어떻겠니? 아님 어미가 서울에 올라갈까?”


“제가 내려오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자꾸나. 그렇게 닭장 같은 집이라서 올라가야 불편하기만 하지 뭐. 그런데 건아, 이제 집은 옮기는 게 좋지 않겠니. 사무실에도 멀고, 집도 여간 좁은 게 아니야. 더구나 네가 들어갈 때 10년은 됐던 집인데, 이제 20년은 됐겠구나. 아무리 혼자 산다지만 너도 불편할 거 아니니.”


“괜찮습니다.”


그는 결혼 생각만큼이나 이사 생각도 없었다. 25평은 고저택에서 살아온 어머니에겐 개집만큼이나 작아보였지만 그는 살기에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10년이라는 시간만큼이나 쌓인 추억이 있는 공간이었다. 대학시절부터 산 그 집은 그에겐 제 2의 집처럼 느껴졌다.


“여보. 당신이 좀 말해 봐요. 당신도 거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랬잖아요.”


자신의 말이 아들에게 설득력이 없다는 걸 깨달은 어머니가 옆에 앉은 아버지를 채근했다. 하지만 이 문제만큼은 그도 설득당할 생각이 없었다.


“건아.”


“아버지, 그건 제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자겠습니다. 두 분 안녕히 주무세요.”


집 문제는 마음대로 못했지만 선 문제를 매듭지은 어머니가 시아버지를 잃은 시름을 잊은 듯 활기 차 보이는 모습을 확인하며 그는 밖으로 나왔다. 공기가 맑은 시골 하늘엔 도시의 것보다 유달리 밝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벼얼. 강찬별. 지금 나오면 이거 다 먹는 걸로 끝나지만 안 나오면 꿀밤 다섯 대야.”


미유는 정신없이 머리를 빗으며 소리쳤다. 파운데이션도 채 못한 얼굴이지만 입술에 붉은 립스틱을 칠하는 걸로 마무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십대의 마지막에 선 미유의 모습은 방금 비를 맞은 칸나 꽃처럼 화사했다.


“아휴, 정신없다.”


손에 걸려 스킨과 로션이 우르르 넘어지는 모습에 미유는 질겁을 하며 그것들을 일으켜 세웠다. 월요일 아침이면 늘 그렇다. 일요일 오후의 여운 때문에 잠들기 싫어하는 아들을 겨우 재우고 나면 잘 시간이었고, 가계부를 정리하거나 세금고지서나 은행 대출이자를 생각하다 보면 한 두시간은 꼬빡 갔다. 그러다보면 이렇게 월요일부터 지각하게 될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 거다. 거기다 평소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 하필이면 이런 때에 밥 안 먹겠다고 투정을 부리는 일이 생긴다. 좋아하는 반찬들로만 아침을 차려놨는데도 싫다고 우는 건 무슨 조화인지 정말 모르겠다고 미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야. 안 봐줄 거야. 딱 셋만 셀 거야. 하나, 둘, 둘 반.”


미유는 겨우 준비를 끝내고 가방을 소파에 던져 놓은 후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찬별이 숨어 있는 식탁 의자를 보면서 천천히 숫자를 셌다.


“엄마. 먹을게. 먹고 있어.”역시. 셋을 세기 전에 찬별이 어느 새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들고 있다. 입술에는 먹던 밥풀이 그대로 묻어있다. 그 모습에 바쁜 와중인데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얼른 찬별이를 먹이고 유치원 차에 실어 보낸 후 급히 미용실로 내달려야 할 판이었다.


“하하. 찬별. 이건 점심 때 먹으려고?”


미유는 찬별의 입술에 붙은 밥풀을 떼어 녀석의 입술에 넣어준다. 찬별은 입을 내밀면서도 오물오물 그걸 받아먹는다. 까만 눈동자, 동그마한 이마, 하얗고 보드라운 뺨을 보니 자기가 낳았지만 세상 어떤 아이보다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인다.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 뽀뽀 해주고 싶었지만 립스틱을 발랐다는 생각으로 그녀는 겨우 참았다.


“아휴. 우리 찬별이는 어쩜 이렇게 예쁠까?”


대신 미유는 잘 빗어놓은 찬별의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중얼거렸다. 머리가 흐트러지는 걸 싫어하는 찬별은 엄마의 손을 피하며 대답했다. 유치원을 가게 되면서 머리 스타일과 옷에 신경을 쓰게 된 찬별이었다. 이제 겨우 6살인데 말이다.


“당연, 예쁘고 착한 우리 엄마지.”


먹기 싫은 당근 때문에 잔뜩 인상을 쓰면서도 찬별은 또랑또랑하게 대답했다. 대답 끝에 웃음이 따라온다. 유치원에는 예쁜 엄마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 제일 예쁜 건 단연 자신의 엄마였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이런 말을 배웠을까.”


“할머니. 할머니가 그랬어. 우리 강아지, 엄마 닮아 이렇게 이쁘구나, 하고. 나중에 커서 엄마한테 효도해야 된다. 할머니가 그랬어.”


미유는 콧날이 시큰해져 찬별의 말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엄마는 처음부터 차가웠다. 사실은 자식인 그녀에게도 따뜻하고 정 있는 엄마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한 때 자신이 다리 밑에서 주워왔거나 밖에서 낳아 온 자식이란 생각을 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찬별에겐 더 심했다. 임신을 했을 때도 애비도 없는 자식을 어떻게 키울 거냐는 시큰둥한 반응에, 아이를 낳았을 때도 제 어미 힘들게 다 커서 나오는구나, 하고 푸념을 했을 뿐이었다. 그랬기에 아이를 많이 안아주지도 않았고 차갑게 대해 언제나 찬별이는 할머니를 어려워했다. 그래도 워낙 밝은 성격 탓에 할머니, 할머니 하면서 먼저 가 안기는 찬별이었다. 그게 어느 새 6년이었고 엄마의 마음도 서서히 풀리는 중이었다. 이런 말을 할 정도로 가까워진 건가 싶어 괜히 가슴이 먹먹해졌다.


“엄마, 나 다 먹었어. 가자. 유치원 차 왔겠다.”


“응. 나가자.”


원복을 입은 찬별은 익숙하게 제가 먹은 그릇을 개수대에 두고 자신의 가방을 챙겨 현관에 선다. 그리고는 얼른 오라는 듯 미유에게 재촉하는 얼굴을 한다. 그녀는 소파에 던져두었던 백을 들고 나란히 찬별의 옆에 가 섰다. 미유가 익숙하게 고개를 숙였고, 천진한 얼굴로 찬별은 그녀의 볼에 뽀뽀를 했다. 그렇게 미유와 찬별의 손이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향한다. 서로의 손을 나란히 잡고 다정한 모자는 집을 나섰다. 이제 막 시작된 초여름의 아침햇살이 둘의 어깨위로 부서져 내렸다.



헐레벌떡 도착한 미용실에는 이미 함께 일하고 있는 다미 언니가 출근해 있었다. 그녀는 ‘헤어 스케치’의 헤어 디자이너이자 사장이다. 함께 일하는 다미 언니와 아직 출근 전인 서현, 이렇게 셋이 작은 미용실의 전 직원이었다. 생긴 지 이제 4년.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건 아니지만 제법 고정 손님도 생기고 예약도 점점 늘고 있는 추세였다.


함께 일하고 있는 다미 언니는 그녀가 임신을 했을 때 쓰러졌던 미용실 언니였다. 쓰러진 그녀를 자신의 미용실에 눕히고 간호해 주었던 계기로 친해졌다. 그래서 자신의 길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미용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때, 자신의 손을 잡아준 누구보다도 고맙고 감사한 사람이었다. 여성스럽게 생겼지만 괄괄한 성격에 엄청난 골초에 커피 중독자였다. 그녀 역시 커피라면 언제나 오케이였기 때문에 미용실의 아침은 언제나 사약처럼 시커먼 모닝커피로 시작되었다.


“굿모닝.”


“굿모닝. 아직 커피 한 잔도 못한 얼굴인데. 커피 콜?”


“물론이지.”


“어제도 찬별이가 안 잔다고 떼썼구나?”


“응. 12시까지. 평소엔 열 시면 재깍 자면서 일요일만 되면 그런다니까.”


“놀아줄 수 있을 때까지 놀아주는 게 좋아. 나중엔 엄마가 놀아 준데도 싫다는 날이 온다니까.”


“우리 찬별이 안 그럴 거야.”


“으이그. 하여튼. 아들 자랑은.”


갓 내린 커피를 마시며 미용실의 창과 문을 여는 사이, 미용실의 마지막 직원 서현이 분주한 발길로 허겁지겁 들어섰다.


“언니, 나도 커피 한 잔. 미안미안. 쪼금 늦었습니다. 난 왜 이렇게 알람 소리가 안 들릴까. 오늘도 결국은 택시였어. 기다리는 버스는 안 오지 마음은 급하지. 월급 타면 뭐해. 다 택시비로 들어가는데. 5분만 빨리 일어나면 되는데 그게 안 된단 말이야. 못살아, 정말. 아침부터 만원이나 깨졌네.”


서현은 넓은 테이블에 널부러진 채 투덜거렸다.


“넌 5분 갖곤 안 돼. 적어도 30분은 일찍 일어나야 계산이 되지. 얼른 안 일어나? 언니들 청소하는 데 너 놀래?”


서현은 아침잠이 많아서 제 시간에 맞추는 건 손에 꼽았고 지각을 하는 것은 예사였다. 때로는 세수도 안 하고 잠옷 바람으로 나오는 통에 미유와 다미는 당황하기도 했다.


서현이 잠에 관해선 말릴 수 없다는 걸 아는 다미가 냉정하게 말하며 청소함에서 꺼낸 빗자루를 서현 쪽으로 던졌고, 서현은 예상했다는 듯 익숙하게 그걸 한 손으로 척 잡아냈다. 그리고는 어이없단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두 사람을 향해 빗자루를 두 손으로 들고 세리머니를 했다. 피식, 어이없는 웃음이 미유의 얼굴에 걸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서오세요.”


밝게 인사를 하던 미유의 얼굴이 잠깐 굳어진다. 하지만 이내 웃음을 띤 얼굴로 손님에게 다가간다.


“머리가 금방 자라네요. 다듬으려고 왔습니다.”


미유가 안내하는 대로 자리에 앉은 남자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남자의 말과 달리 머리는 더 이상 정리할 것도 없이 단정했다.


“네. 그럼 조금만 다듬을게요.”


“그래 주십시오.”


“아저씨. 머리가 그렇게 금방 자라는 거 보면 맨날 야한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바닥을 쓸던 서현이 장난스레 한 마디를 건넸고 남자의 얼굴은 나이답지 않게 붉어졌다. 미유는 서현에게 그러지 말란 눈짓을 보내며 미용기구가 담긴 트레이을 밀었다. 그런 미유에게서 거울 너머 남자의 시선은 떨어지지 않는다. 미유는 웃으며 “시작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미유씨. 저녁에 시간 어떠십니까? 오늘 경호네 횟집에 싱싱한 게 들어왔다고 하네요. 같이 가실래요??”


“찬별이 숙제 봐줘야 해서요.”


“찬별이도 같이 가면 좋지요.”


“아니에요, 말씀은 고맙지만 어려울 것 같네요.”


“그러지 말고 같이 가시죠.”


미유는 전혀 싫은 내색 없이 몇 번이나 했던 거절의 말을 또 늘어놓았다. 미유의 미용실 옆에서 약국을 하는 형국은 한숨을 내쉬며 실망한 내색을 지우지 않았다. 약국을 개업하게 되면서 미유에게 반한 형국이 그녀에게 데이트를 제안한 것도 어느 새 반년 째였지만 언제나처럼 그녀는 웃으며 거절을 했다. 하지만 형국도 포기하지 않았고 둘의 질긴 고집 덕분에 어느 새 그의 데이트 제안은 줄기차게 계속 되어왔다.


“아저씨. 그러지 말고 나랑 가는 건 어때요? 회 엄청 좋아하는데.”


“됐다, 꼬마야. 그럼 미유씨, 이만 가보겠습니다.”


서현의 말을 단박에 일축하며 큰 덩치만큼 순한 웃음을 지으며 형국은 일어섰다. 첫눈에 반했다며 쫓아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두근거림을 느낄 수 없는 미유에게는 난감했지만 그래도 손님으로 오는 사람을 내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언니도 참. 약사에다가 성격 좋지. 덩치가 좀 크긴 하지만 저 정도면 듬직하잖아. 더구나 언니가 저렇게 좋다는 데 한 번 만나보면 어때서. 나 같으면 당장 오케이 하겠다.”


“모르는 소리 하기는. 가끔씩 찾아오는 형국씨 어머니 못 뵀어? 성격 대단해 보이시더라. 더구나 홀어머니시라며.”


“다미언니는. 누가 미유언니한테 당장 결혼하랬나.”


“형국씨 나이가 서른하고도 셋이네. 내일 결혼한대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네요. 너처럼 생각없이 오케이하긴 힘든 나이다 이거야.”


진짜 여자 형제처럼 투닥이는 모습은 이제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미소를 지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보며 미유는 건조대에 쌓여있는 수건들을 걷어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미용실에서는 언제나 빨아도 모자란 게 수건이었다.


그 후로는 정신없이 바쁜 시간들이었다. 쉴 새 없이 손님이 밀려와 셋은 점심 먹을 틈도 없이 허덕였다.


“미유 언니. 여기 핸드폰. 막 울리기 시작했어.”


“응. 땡큐. 여보세요. 네, 안녕하세요, 선생님.”


한 쪽 귀로 전화를 받은 채 수건을 개던 미유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다. 편안했던 얼굴에 걱정이 드리운다.


“네, 네. 알겠습니다. 금방 갈게요.”


“다미언니. 찬별이가 다쳤대. 병원이래. 어떻게, 우리 찬별이. 많이 다친 건 아니겠지?”


“괜찮을 거야.”


“그치, 언니? 많이 안 다쳤겠지?”


어느 새 그녀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다미는 침착하게 미유의 어깨를 두드리며 서현에게 미유의 가방과 핸드폰을 챙길 것을 명령했다.


“가게는 걱정하지 말고. 운전하지 말고 택시 타. 알겠지?”


“응, 응.”


제대로 들은 건지, 어떤 건지 미유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인다. 병원에 갈 정도라니 얼마나 다친 걸까. 울고 있지 않을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걱정이 퐁퐁 샘솟아난다. 그와 같이 눈에서 눈물도 덩달아 샘솟았다.


“강미유. 제대로 정신 차려. 찬별인 괜찮을 거야. 울지 말고.”


다미의 채근에 미유는 눈물을 닦았다. 괜찮을 거야. 괜찮아, 우린 찬별인. 이 말을 벌써 몇 번이나 중얼거렸는지 모르겠다. 다미가 잡아준 택시를 탄 채 그렇게 미유는 병원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찬별이, 찬별인 괜찮나요?”


미유는 낯익은 유치원 선생님의 얼굴이 보이는 순간 다리의 힘이 쫙 풀렸다. 저도 모르게 휘청대는 미유를 유치원선생님이 부축하여 플라스틱의자에 앉혔다.


“죄송합니다, 찬별어머님. 오늘 유치원 근처에 있는 연못으로 야외학습을 갔거든요. 조심을 한다고 했는데 찬별이가 연못 근처에 있던 돌에 걸려 넘어졌어요. 지혈을 했는데 계속 피가 나는 거예요. 그래서 부랴부랴 근처 병원에 데려갔는데, 큰 병원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하셔서요. 일단 연락 드리고 이쪽으로 건너 온 거예요. 정말 죄송해요, 어머님.”


“찬별인 그럼 지금 어디에 있나요?”


“지금 검사할 게 있다고 해서 검사 중이에요. 그래도 울지도 않고 아주 늠름하게 검사 받고 있어요. 지금까지 같이 있다가 어머님 전화 받고 잠시 나온 거예요.”


은근한 선생님의 칭찬도 미유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아침에 봤던 찬별이의 얼굴만이 아른거렸을 뿐이었다.


“강찬별 어린이 보호자분. 잠시 들어오세요.”


순간 들려오는 간호사의 음성에 미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간호사를 쫓아 안으로 들어섰다. 병원이 주는 선입견과 다르게 소아과라 그런지 진찰실은 화사한 분위기였다. 그래도 그녀의 긴장감은 사라지지 않아 그녀는 마른손을 치마에 부볐다.


“보호자분 되십니까?”


“네.”


“엄마.”


다쳐서 그런지 다른 때 같지 않게 어리광을 부리며 찬별이 그녀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겁에 질린 병아리처럼 찬별의 여린 몸이 느껴져 그녀는 찬별을 꼭 그러안았다.


“찬별이 어머님?”


“네.”


“선생님께서 몇 가지 질문을 드릴 거예요. 긴장하지 마시고 생각나는 대로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네.”


미유는 긴장감에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하지 말란 말을 들은 순간부터 갑자기 모든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애써 진정하며 부드러운 찬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제야 기분이 조금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기다려도 의사선생님의 말이 들려오지 않아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미유?”


“어, 성훈오빠?”


그녀는 반문했지만 이미 금테 안경을 낀 의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녀는 어리둥절했다. 서울에 있어야 할 사람이 대체 여긴 웬일이지, 하는 의문부터 들었다.


“오빠가 여긴 어쩐 일이야?”


그녀의 말투엔 깜짝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나야 여기서 일하니까. 얼마 전에 옮겼어. 얘기 안 했던가. 어쩐지. 찬별이라고 해서 낯익다 했지. 요새 통 못 봐서 긴가민가 했네. 많이 컸다. 일단 출혈이 심해서 수혈해 놓은 상황이야.”


“응. 그런데 우리 찬별이도 못 알아보다니 실망이야. 그나저나 여기였구나. 난 옮긴다고 해서 그냥 서울 쪽이라고 생각했지. 찬별이가 다쳤다고 해서 하도 정신없이 와서 놀랐네. 미안. 제대로 몰라서.”


“미안하긴. 그럼 질문을 시작해볼까.”


미유는 대책 없는 자신의 무신경에 한숨을 폭 내쉬었다. 얼마 전의 통화에서 옮긴다는 얘길 들은 것 같은데 깜박 잊고 말았다.


‘오빠가 나한테 어떤 사람인데.’


성훈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을 정도로 그는 그녀에게 너무나 고마운 은인이었다. 찬별이를 낳을 때 거의 받다시피 해준 사람이었고 그 후로도 작고 큰 문제들이 그녀에게 일어날 때마다 챙겨준 사람이었다. -친구의 아들을 낳았는데 모른척해? 말이 안될지도.


하지만 미유는 자신에게 한 없이 다정하고 자상한 성훈을 대할 때면 그 곁에 항상 함께이던 도건을 떠올리게 된다. ‘니가 그 강미유구나. 난 한성훈. 윤도건의 베스트프렌드지.’ 오래 전 처음 만났을 때의 말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이제는 5년도 더 된 옛날이야기건만 그 때를 떠올리니 아직도 눈가가 슴벅했다. 언제나 성훈과 만나게 되면 느끼는 이 감정은 그녀를 피로하게 했다.


“최근에, 혹은 그 전에라도 찬별이가 피곤하다거나 힘들어한 적 있어?”


“응. 유치원에서 견학 갔다 오는 날 같은 때는 힘들어해서 가끔 집에서 쉬었어. 원래 이 맘때는 그렇잖아.”


“그럼 숨쉬기 힘들다거나 열이 심하다거나 한 때는 있어?”


“음......한 두 번쯤. 무슨 심각한 병인거야?”


“그럼 출혈이 심했다거나 그런 적은?”


“아. 있었어. 저번 겨울에 자전거를 타다가 심하게 넘어져서 출혈이 심했던 적이 있었어.”


“그래서 어떻게 했어?”


“염증이 생길 것 같다고 의사가 주사를 놔줬어.”


“그리곤 괜찮았어?”


“그 때 찬별이가 가렵다고 해서 심하게 긁었었거든. 그래서 몸을 심하게 긁어서 못 하게 했지. 그러다 보니까 괜찮아졌어. 그래서 병원에 한 번 더 갈까 하다가 안 갔지.”


곰곰이 생각한 끝에 대답을 하는 미유의 음성이 가늘게 떨려왔다. 유치원생이 견학을 다녀오거나 유치원에서 태권도를 하고 돌아오거나 하면 피곤해하는 게 정상 아닌가. 이건 분명히 의사의 오버센스일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차트에 기록을 하는 성훈의 얼굴이 심각해지는 것만 같아 가슴이 덜컹였다.


“아직은 확실하지 않아. 하지만 몇 가지 검사를 해봐야할 것 같아.”


“검사요? 원래 어린 땐 잘 피곤해 하는 거잖아요. 가끔씩 열이 올라갈 때도 있구요. 그런데 무슨 검사를 또 해.”


“네 말이 맞아. 그냥 병원 온 김에 종합검진 한 번 받아본다 셈 쳐. 정간호사. 그럼 준비해줘요.”


“네.”


간호사가 찬별을 불렀지만 찬별인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고, 그녀는 겨우 어르고 얼러 간호사에게 아이를 보냈다. 아이의 작은 뒷모습이 애처로웠다.


“커피 한 잔 할래?”


“좋아.”


잠깐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던 성훈의 손에는 짙은 향이 나는 커피가 들려 있었다.


“자.”


“고마워.”


미유는 머릿속에 밀려드는 기억들을 밀어내며 커피를 받아들었다.


“잠깐. 이게 블랙이다.”


“잘못했으면 설탕물 마실 뻔 했네.”


“그러게나 말이다. 자.”


“땡큐.”


미유는 들고 있던 잔을 성훈에게 건네주었다. 성훈인 블랙이라면 질색을 하는 스타일이었고, 미유는 블랙이 아니면 안 마시는 스타일이었다.


“강미유, 못 됐어. 내가 연락 안 했더니 이렇게 연락 안 되는 거 봐. 대체 얼마만인 거야.”


“미안.”


“너 습관성 미안, 문제 있댔지. 무슨 말만 하면 미안하다고 하니 이쪽에서 좀 더 투덜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잖아.”


“미안한 걸 어떻게 해.”


“다음부터 연락 잘 하면 되지.”


“알았어. 그럴게.”


“대답을 잘하네.”


짐짓 화가 난 척 투덜대던 성훈은 결국 미유의 말에 웃고 말았다.


“어머님은 잘 계셔? 허리는 괜찮고?”


“늘 그렇지 뭐.”


“담에 한 번 모시고 와. 이 정도면 병원도 가깝겠다, 든든한 빽도 있겠다. 정기검진 받으러 한 번 나오시라고 해.”


“응. 그럴게.”


“말이나 못하면.”


“미안하니까 그렇지.”


“또 또.”


“알았어. 이제 안 해.”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미유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성훈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고작 그 정도였다.


“집들이 때 올래?”


“집들이?”


“응. 이사한 지 한 달이 다 되가는데 아직 못했거든.”


“아니, 다음에.”


“언젠지 알고서는 다음에야?”


“몰라도. 전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끼는 거 싫어.”


미유는 대체로 명랑한 편이었지만 낯을 가렸다. 그건 예전부터 그랬다. 성훈이 그녀를 처음 만났던 때에도, 그녀는 도건의 뒤에 선 채 고개만을 빠끔 내밀었다.


“너도 아는 사람들이야.”


성훈은 미유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를 바라보던 미유의 시선이 바닥을 향한다.


“더 더욱. 만나고 싶지 않아.”


성훈의 고등학교 동창들, 대학교 동창들 중에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성훈과 친했던 한 사람 덕분에, 그녀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아직도 그래?”


“뭐가.”


“아직도 도건이 얘기 나올까 봐 불편하냐는 말이야.”


잠시 성훈이 던진 직구에 그녀는 얼굴이 굳었다. 속으로는 이건 반칙이야, 를 중얼거렸을지도 모른다. 성훈은 그런 미유의 속마음을 모른 척 해버린다.


“아, 아니.”


그게 언제 얘긴데, 라며 태연히 웃고 싶었지만 지금 그녀는 아니란 말을 겨우 하기에 급급했다. 언제라도 웃으며 대답할 수 있도록 꽁꽁 힘을 쓰고 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도건인 잘 지내. 졸업하기 전에 고시 합격했고, 지금은 로펌에서 일하고 있어. 아주 잘 나간다더라.”


“그래. 저번에 다 해준 말이잖아. 그보다 찬별이 어디가 안 좋은 건데. 많이 안 좋은 건가?”


시큰둥하게 반응하며 그녀는 애써 주제를 바꿀 겸 무엇보다 중요한 찬별이의 상태를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성훈은 미간을 검지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아직도 인가. 벌써 6년이 흘렀다. 하긴, 잊을 수 있을 리 없다. 자신도 하지 못한 일을 미유가 해낼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애써 수긍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뭐라 단정적으로 말하기 힘들어. 검사 결과가 나오면 금방 알려줄게.”


“잘 부탁해.”


“그래. 걱정 마. 별 일 아닐 거야.”


말끝에 성훈이 너털웃음을 터트렸지만 미유는 끝내 불안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삐삑. 순간 성훈의 허리춤에서 삐삐의 알림음이 퍼졌다.


“이런. 얘기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가봐야겠다. 여기 새 명함. 연락할게.”


성훈이 그녀의 손바닥을 펴 명함을 놓고는 주먹을 말아주었다. 어쩐지 그 목소리엔 간절함이 실리는 기분도 들었다. 아침에 본 동생한테 하듯 그는 미유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급한 걸음으로 총총 사라졌다.


‘오빠, 나 때문에 한 이사는 아니지.’


그녀는 채 묻지 못한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쓸쓸했다.



“윤도건. 어쩐 일이야. 늘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녀석이.”


“술 한 잔 할까 해서.”


“놀랍네. 윤도건 입에서 이 시간에 술이 다 나오고.”


“나야말로 소리 소문도 없이 내려왔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아예 내려왔다고?”


“응.”


“이유가 뭐야? 결혼이라도 하는 거야?”


“결혼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안 그래도 집에서 선 보라고 난리 쳐서 난감하구만.”


“잘 다니던 병원 뛰쳐나가 시골로 내려왔으니 하는 말이지.”


“시골은. 여기가 시골이면 다른 데는 오지냐.”


“놀라서 정신없이 달려왔잖아.”


정신없이 분주한 대학병원 로비. 급히 누군가를 호출하는 소리, 타닥타닥 급한 발걸음과 사람들의 정신없는 움직임에 마치 시장 한복판에 서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혼란한 틈새 속에서 정장 차림의 한 남자와 하얀 가운을 입은 한 남자가 반갑게 만났다.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살짝 뒤를 돌아보다가 정장차림을 한 남자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한다.


성훈은 도건의 조부상(祖父喪) 이후 처음 보는 그의 안색이 나쁘지 않아 내심 안도했다. 딱딱하고 차가운 녀석이었지만 할아버지를 마음 깊이 의지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걱정이 된 탓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둘은 이미 거의 15년을 함께 한 친구였다.


그랬기에 그는 지금 고민에 빠졌다. 예전에도 그랬듯 두 사람은 통하는 게 있기라도 한 것처럼 같은 날 그를 찾아왔다. 단순한 우연인 걸까. 아님 그보다 강한 무언가가 있는 걸까. 그의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졌다.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는 생각이 고리들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그를 혼란하게 했다. 지킬 수 있는 우위를 최대한 지키고 싶었던 마음이 술렁였다.


“근데 술을 먹자는 사람이 이런 시간에 왔냐?”


“이른가?”


“그럼, 이르지.”


“끝날 때 됐잖아.”


“귀신같은 놈. 맞아, 이제 끝날 시간이야. 잠깐만 기다려. 음, 한 5분?”


“알겠어.”


“커피라도?”


성훈의 말에 도건은 고개를 흔들며 가죽 소파를 차지했다. 이미 커피숍에서 두 잔이나 마시고 오는 길이었다. 부모님의 강권에 의해 선을 본 지 어느덧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화려한 호텔 커피숍에서 마시는 커피는 질릴 대로 질린 상태였고, 똑같이 지루한 선상대도 이제는 재미가 없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얘기를 풀어내는 일에도 이젠 지쳤다.


그는 답답하게 목을 죄어오는 넥타이를 풀었다. 야생동물을 연상시키는 긴 다리를 쭉 뻗으며 얕은 숨을 내뱉는 그의 눈이 다른 때와 달리 지쳐있었다. 적당한 배우자감, 을 찾는 일은 꽤 지루하고 성과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두 번이라도 만나치려면 금방이라도 예식장을 잡을 것 같은 분위기는 그를 겁나게까지 만들었다.


“평일에 웬일이야? 나랏님보다 바쁜 분이. 어쨌든 나가자.”


어느 새 성훈은 하얀 가운을 벗고 양복차림으로 돌아와 있었다. 도건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담배케이스를 꺼내 불을 붙였다.


“쉬는 날이라고 지나는 말로 했더니 어머니가 선을 잡으셨다. 점심부터 두 건이나 하고 왔지.”


“너도 드디어 닥쳤구나. 결혼재촉. 인마, 여긴 금연이야.”


“한성훈, 네가 지금 금연 얘길 꺼냈냐?”


“물론 난 아니지. 다만 실내에선 금연이라는 기본 룰을 말한 거다. 얼른 꺼. 나가자.”


“급할 것 없잖아. 네 말대로 술 마시기엔 이른 시간인데.”


“나가서 간단히 저녁 먹으면 슬슬 저물겠지. 그런데 벌써 여름이라 해가 길어지긴 했어. 이젠 7시가 넘어도 해가 떠 있더라. 그런데 도희는 아예 나온 거야?”


“응. 할아버지 돌아가시는 거 보면서 불안해졌나 봐. 부모님 걱정이라곤 안하던 녀석이 제 발로 들어온다고 하더니 싹 정리해서 들어왔어.”


“안 그래도 한 번 쳐들어온다고 연락 왔더라. 혼자 감당하긴 힘드니까 너도 꼭 나와.”


“잘 좀 해줘. 도희 걔가 널 좋아하잖아.”


“좋아하긴. 걘 그냥 내가 만만한 거야. 밥 같은 거지.”


도건은 동생인 도희가 예전에 성훈을 진심으로 좋아했었다는 걸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성훈이 내미는 재떨이에 담배를 짓이겼다. 그리곤 급할 것 없이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엄마, 약속했지? 진짜 햄버거 사주는 거다.”


“대신 콜라는 안 돼.”


“말도 안 돼. 콜라 없이 어떻게 햄버거를 먹어.”


“엄만 아까 분명히 햄버거만 말했어.”


“왕치사.”


“찬별이 너,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피이, 엄마한테서 배웠지.”


“요게. 하하하.”


“하하, 엄마, 간지러워. 그만해.”


복도로 나온 순간 스쳐 지나가는 모자의 대화가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다정함이 묻어나는 대화에 도건은 성훈이 그를 쳐다보는 것도 알지 못한 채 한참이나 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인영에 그의 가슴이 잠시 덜컹였다. 그러다 곧 쓴 웃음을 지으며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 때, 멀어져 가던 인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뒤를 돌아보았다가는 이내 아이와 장난을 치며 걸음을 재촉했다.



아직은 여름빛으로 환한 병원의 복도를 멀어져가는 인영 대신 이제는 잊었다 생각했던 과거의 한 사람이 그를 향해 자박자박 걸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도건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쓰고 싶다, 라는 생각이 오랜 시간을 쓰면서 바뀌네요.
처음에는 결국 울어버리고 마는 그런 신파를 쓰고 싶었어요. 안타깝고 슬프고 그러면서도 마음이 두근두근하게(큰 꿈을 가졌던;;) 그러다가, 어느 드라마의 엔딩과 결말을 보면서 생각을 또 하게 됐어요. 우리가 꿈꾸는 해피엔딩을 박살내는 드라마를 보면서 만족하는 저를 발견했죠. 그래서 생각이 조금 바뀐 것도 같고.
그래서 이 소설은 액자소설 비스무리하게 가게 됐네요.
많이 생각했고, 이 설정 자체가 무리일지도 모르지만.






댓글 '1'

하늘지기

2010.03.30 15:51:22

찬별이가 도건이 아들인거 같은데 어쩌다 헤어지게 됐는지..
도건인 찬별이 존재도 모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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