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unk paradise
- 소설
- 연재소설
19세 이하는 오늘은 돌아가 주시지요.
<12>
柔股兩兩縈廻 부드러운 허벅지는 쌍쌍이 뒤엉켜 휩싸이고
달밤은 환했다. 높은 궁궐 담장으로 쏟아지는 둥근 달은 손을 뻗으면 잡힐 듯 선명하게 보였다. 연은 걸음을 멈춰서고 눈을 감았다. 차가운 기운을 내뿜으며 발밑에 깔린 후원의 흙이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몽롱해지는 몸을 주체 하지 못한 연은 긴한 숨을 한꺼번에 토하였다.
환영연에서 보았던 해단의 모습은 지난 밤 눈보라처럼 몰아쳤던 모습과는 또 달랐다. 쏟아지는 맑은 볕보다 빛나는 옷을 입고 상석에 올라 얼굴을 가린 사내는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까르르 터지는 웃음을 머금은 곱디 고운 여인들을 아우르고 있는 자. 그의 말대로 서국의 왕이 맞았다.
마음으로 인식하고 있던 것을 눈으로 확인한 자리였는데, 연은 그를 똑바로 볼 수조차 없었다. 용안에 자리한 붉은 천을 볼 때마다 뜨겁게 타던 그의 경멸하던 눈빛이, 그녀를 사정없이 찌르던 붉은 성기가 또렷하게 떠올라 온 몸이 타는 것처럼 아파왔기 때문이었다.
화내며 몰아쳐도 끝까지 아니라고, 진정 몰랐다고 해볼 것을...이제와 후회해봐야 헛일인데 옥좌에 앉은 사내를 보면 자꾸 마음이 동하였다. 멀리 보이는 청해만 쳐다보며 차라리 저 곳에 빠져들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차가운 물에 몸이라도 담가야 온 몸을 사로잡은 열기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청해에 몸을 담군들 화기가 쉽게 연을 놓아줄리 없었다. 홍비의 화려한 무도를 보는 순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눈을 사로잡아 가져간 매혹적인 몸짓은 연의 마음을 이유 없이 쓰리게 했다. 그저 보기 좋은 무도라 여기려 애를 써도 마음으로는 묘한 강샘이 솟아났다. 붉은 탈은 여인의 춤만을 바라보는데, 왜 홀로 사내를 바라보며 샘하고 아파하는지 알 수 없었다. 미와산에서 스쳐갔던 따뜻한 손길이 무엇인가 특별한 의미였다고 혼자서 믿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면 사내는 그리 아프게 연을 파고들지 않았을 터였다.
그랬다면 그리 쓴 말로 연을 조롱하지 않았을 터였다.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연을 한번은 돌아봤을 터였다.
태유소의 딸로 들어와 이미 지난 인연을 끌어안고 있는 꼴은 비참했다. 맞았다. 태유리든 태유연이든 상관없다는 사내의 말이 진정 옳았다. 그렇기에 다짐을 소리에 담아 부른 연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깨달으라 부른 것이었다. 그러나 다짐의 끝은 연이 아닌 해단이 매듭지어주었다. 그도 그러하다고.
쓸쓸한 소름이 돋는 어깨를 끌어안고 연은 후원을 걷고, 또 걸었다. 걸음마다 냉기가 붙고 더 붙어 걸음은 점점 무겁게 변해갔다.
"환영연은 마음에 들었느냐!"
갑자기 섞인 말이었다. 감고 있던 눈을 가만히 뜬 연은 모아 쥔 손을 가슴으로 가져갔다. 음성을 듣기만 해도 빠르게 달려 나가는 심장이 들킬 것만 같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세차게 일어나는 마음을 억누른 연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달빛이 비추지 않는 어두운 담벼락 밑에 서 있는 사내는 그림자처럼 어렴풋했다.
"예."
짧은 답에는 다행이도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연을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에 걸쳐 선 사내에게선 술냄새가 났다. 흐트러지지 않게 올곧은 몸과 어울리지 않는 향은 낯선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사내의 얼굴을 가린 붉은 탈은 즐겁게 웃는 듯 보였다. 어울리지 않는 웃는 탈을 쓴 사내의 마음을 짐작 할 수 없었다. 정지된 가짜 웃음만큼 상대를 조롱하는 것도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어딜 다녀온 것 같으냐."
그만 아는 답이니 연은 몰랐다.
"모르겠습니다."
"홍비에게 다녀오는 길이다."
해단의 음성은 즐거웠다. 여흥에 젖어 축축하게 감기는 말이었다. 귓가에 붙은 말로 인해 한삼에 감겨있던 번들거리던 홍비의 매끈한 나신이 앞에 아른거렸다. 그런 여인의 몸이라면 누구인들 찾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탈한 마음을 모른 척 입술을 깨문 연은 꼿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십니까."
"보기에 홍비가 어떠하더냐."
해단은 농을 하는 듯 가볍게 다시 물었다.
"예쁘다 생각했습니다."
솔직하게 말을 하는 연이었다.
"너에 비하면 어떠하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태유소의 딸이라 역시, 세상 보는 눈 하나는 또렷하구나. 과인이 보기에도 그러하다. 홍비에 비할 바는 아니지."
스스로를 지탱하던 어떤 끈이 탁 하고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연은 마른 입술을 가만히 축였다. 지난 밤, 사정없이 퍼붓던 말이 차라리 반가웠다. 미와산에서 만났던 사내가 서국의 왕임을, 궁의 여인을 맘 것 취하고 품을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묘하게 어려웠다.
"허면 이곳에는 왜 오셨습니까."
애를 썼지만 원망이 담긴 말이었다. 모르길, 모른 척 해주길 간절히 바라고 바랐지만 앞에 선 사내의 눈매가 더 차가워진 것을 보니 속의 마음은 겉으로 표가 났던 모양이었다. 사내는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아들을 원한다 하지 않았느냐. 오래 끌어봐야 좋을 것이 없는 일이다. 약조하였으니 그것은 지킬 것이다. 너 역시 그러하질 않느냐. 처음부터 정을 나누고자 함도 없었다고, 깊은 방망이질이면 만족한다고 너도 그리 말하질 않았느냐."
그뿐이었다. 아들을 달라고 한 것은 연이었고, 그것을 지키겠다는 사내였다. 그런데 마음은 아려왔다. 다른 여인을 품다가 언제든 달려올 수 있는 사람. 그가 해단이었다. 그때마다 그 날처럼 다리를 벌리고 그를 맞아야 한다는 것은 깊은 좌절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예. 그렇습니다."
연은 한참 만에 대답하였다.
"좋은 밤을 보냈었다. 여색에 실컷 취할 수 있으니 좋은 밤이라 할 수 있지. 아무렴."
사내는 굳이 알려주었다.
"경하드리옵니다."
울고 싶었다. 그러나 울음의 이유가 없었다. 깊은 사랑을 나누지도, 미래를 약조하지도 않은 사내를 두고 울 수는 없었다. 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킬 자존심은 본디 없는 것이냐. 아무리 큰 뜻이 따로 있다 하여도 다른 여인과 밤을 보내다 온 사내에게도 경하를 보내는 속내는 진정 대단타.! 투기치 않는 보살승 같은 후비를 얻어 축하까지 받으니 그것 참 과인의 호사로다."
이유 없이 잔뜩 꼬인 해단은 성큼 성큼 다가왔다.
사내의 모멸스러운 말에는 연이 찾을 수 있는 까닭이 없었다. 앞서 자랑하듯 늘어놓다 이제와 자존심을 운운하는 비난에 연은 숨이 막혀왔다. 차라리 그의 얼굴을 가린 천이 반가웠다. 그의 경멸과 조롱이 담긴 깊은 눈매를 안보니 참을 만 했다. 거칠어진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이 다가온 사내는 연을 확 끌어안고 담벼락으로 밀어 붙였다. 얼어붙은 담벼락의 흙이 세찬 움직임에 후드득 떨어졌다. 등줄기와 머리채로 쏟아지는 차가운 흙먼지는 짓이겨 뭉개졌다.
밤새 다른 여인을 품다 온 해단은 그렇게 연도 품으려는 모양이었다. 싫었다. 이렇게 사내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거친 움직임에 몸을 피해 움직여 보려 하였지만 해단은 연의 허벅지를 움켜쥐고 허리까지 바짝 올려 벌렸다. 다리 하나를 사내의 허리에 휘감고 사내의 손길을 따라 이리 저리 움직이며 점차 하복부를 드러내고 선 모습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차라리 달빛이 사라졌으면 좋으련만 고스란히 쏟아지는 달은 더욱 빛이 났다. 그러나 집요하게 치맛자락을 들추는 해단은 달빛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몇 겹이나 되는 치맛자락을 한꺼번에 걷고 들어온 사내의 손은 뜨겁고 험했다. 간밤에 쓸린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아 더 깊게 찢어졌다. 밀려오는 고통에 연은 아랫 입술을 세차게 깨물었다.
"아아!"
참으려 했지만 부어오른 입술사이로 앓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순간 사내의 붉은 탈이 허한 숨에 흔들렸다. 그는 천천히 붉은 탈을 걷어 올렸다. 묘하게 일그러진 사내의 얼굴은 연을 향해 그대로 내려왔다. 통증에 신음하려 하는 것은 연인데 쓰게 아파하는 것은 해단인 것처럼 그는 바짝 다가오며 이를 앙다물었다. 사내의 거친 손에 엉덩이가 들려 담벼락에 처박히듯 버티고 선 연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마주한 눈동자가 연을 태울 것처럼 뜨거워서 차마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봐주지 않았다. 살갗이 벗겨진 것처럼 빨개진 꽃 문으로 달아오른 옥봉이 조금씩 밀려들어왔다. 굵은 무두는 잔뜩 성이나 조금씩 자리를 넓힐 때마다 여인의 몸에 저리저리한 작열감을 안겨주었다. 연은 괴로움을 참아 보려 고개를 돌렸다. 순간, 박아 들어오던 말뚝은 그대로 그쳐 섰다.
"하지 말라 할 참이냐."
사내는 연의 허리를 감고 있던 손으로 연의 턱을 끌어 당겼다. 그의 더운 김과 엉킨 연의 숨소리는 더 긴해졌다.
"아닙니다."
연은 가까스로 답을 했다.
"아프냐."
아팠다. 너무 아파서 주저앉고 싶었다. 그러나 뜨거운 옥수와 조롱의 말은 연이 도망치게 두지 않았다.
"참을 수 있습니다."
그제서 사내는 다시 움직임을 시작했다. 천천히 교합의 길을 넓히던 것과 달리 벌하려는 듯 빨라진 움직임이었다. 해단의 숨소리는 더욱 거칠어졌다. 허리를 뒤틀며 본능적으로 피하려 했지만 딱딱한 담벼락은 물러설 리 없었다.
"이래도 참을 것이냐."
무두는 세차게 연을 들두들겼다. 잇따라 이어지는 자극은 연의 몫이었다. 숨을 쉴 수 없게 들어 앓는 연의 다리 사이로 상처는 깊어졌다.
"이래도! 참을 것이냐 묻지 않느냐!"
"예."
연은 물러서지 않았다.
"허면 버티거라. 어디 버텨 보거라."
더욱 성기고 굵게 밀고 오던 해단은 신음을 토하며 집요하게 하복부를 움직였다. 단단한 근육은 하나하나가 터질 듯 부풀어 올라 연을 더 깊게 찔러댔다. 해단의 허덕임은 연의 귓가에 더 짙게 감돌았다.
"하학! 하학!"
해단은 격하게 신음했다. 젖어든 꽃문은 무두를 움켜쥐고 조여 왔다. 거칠게 하면 할수록 더 궁극이 가까워지는 듯 했다. 더 품고 싶었다. 더 넣고 싶었다. 더 오래 머물고 싶었다. 해단은 한 손으로 담벼락을 잡고 버티며 시간을 벌었다. 이에 재촉하며 다그치는 옥봉의 움직임이 바람을 타며 느려졌다. 벌하려는 듯 강하기만 하던 반동도 조금씩 부드럽게 변해갔다.
귓를 간질이던 숨결은 어느 사이에 연의 귓불을 빨아 당기고 있었다. 귓가부터 시작된 묘한 울림은 곧장 연의 몸으로 퍼져들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아리아리한 느낌이 발끝부터 천천히 전해져 올라왔다. 비단신안 발가락은 곧게 펴지며 힘이 실렸다. 연의 반응은 온 몸을 느리게 밀어 넣던 해단에게도 전해졌다. 작은 변화를 감지한 해단은 천천히 귀에서 입술을 떼고 움직였다. 턱선을 따라 조금씩 붉은 낙인을 찍던 사내는 결국 목덜미까지 내려왔다. 연의 하얀 목에 진한 입맞춤의 흔적이 아롱 새겨졌다. 사내는 멈추지 않았다. 매정하지도 서늘하지도 않은 입술은 연의 목을 따라 조금씩 아래로 내려왔고 낯선 감촉은 지나치게 잘고 고와 노글노글 연을 간지럽혔다. 저도 모르게 뒤로 휘어지는 연의 허리를 사내가 더욱 강하게 잡고 놔주지 않았다. 깊은 숨은 어깨를 따라 움직이다 연의 옷 위에서 멈춰 섰다. 해단은 연의 당의를 거칠게 헤쳤다. 단단히 매어둔 고름은 당의 뿐이 아니었다. 손길을 막아서는 옷을 더는 참아낼 수 없는 사내는 연의 매듭들을 잡아 뜯어버렸다. 한꺼번에 벌어진 가슴으로 매서운 겨울 바람이 몰아쳤다. 벌어진 옷사이를 가려보려 애를 썼지만 사내는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곧장 연의 한삼을 찢어 채 영글지 못한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찬바람과 뜨거운 손길을 동시에 맞이한 가슴으로 꽃망울이 살며시 피어 올랐다. 손바닥에 꽉 맞게 들어오는 작은 열매위에 핀 선홍색 꽃망울을 내려다보다 사내는 입술을 가져갔다. 뜨거운 손길보다 더 뜨거운 입술은 젖가슴 위를 이리저리 지분거리다 솟아오른 꽃망울을 빨아 당겼다.
"아."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열기가 지리지리하게 등줄기를 타고 올라 연의 입술 사이로 긴 신음을 토해냈다. 뭔가 더 있을 것 같았다. 이대로는 아닐 것 같았다.
연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연의 안에 들어와 있던 기둥은 다시 속도를 내며 움직임을 시작했다. 쓸린 살은 아파왔지만 무턱대로 거칠지도 대놓고 아리지는 않았다. 힘차게 들어왔다 스르륵 빠져 나갈 땐 알 수 없는 허전함까지 밀려왔다.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연의 다리를 끌어 세차게 끌어당기며 사내는 단단한 기둥을 더 깊게 박아 넣었다. 끈적하게 조이는 느낌은 해단을 더욱 격하게 만들었고, 열기는 고스란히 연의 하복부에 전해졌다. 단단히 날이 세워진 옥봉은 연의 안으로 더 넓게, 더 깊게 파고 들었다.
두 사람의 숨결은 더욱 거칠게 뒤엉켰다. 해단의 입술은 연의 입술을 탐하였고, 연의 입술은 해단의 입술을 받아들이며 벌어졌다. 진하게 혀가 섞이며 서로를 빨아 당겼다. 엉킨 것은 비단 입술 뿐이 아니었다. 극정을 향해 빻아오는 사내의 아랫도리는 달콤한 덫에 빠져 점차 자제를 잃어가고 있었다. 꽃길은 처음처럼 비좁고 조여왔지만 처음과는 다르게 완전히 매마르지 않고 살포시 젖은 이슬을 머금고 있었다. 힘차게 달려드는 사내는 결국 짐승처럼 포효하며 따뜻한 꽃문 안에 깊은 체액을 쏟아냈다. 전율은 사내의 어깨를 타고 여인에게도 전해졌다. 차가운 밤공기에 어울리지 않는 흠뻑 젖은 사내의 몸은 화기를 머금은 듯 뜨겁게 불탔다. 천천히 촉촉이 젖어든 꽃잎에서 빠져나온 사내는 연의 엉덩이를 움켜쥐던 손에 힘을 풀었다. 몽롱하고 어지러운 연은 무너지는 듯 담벼락을 따라 주저앉았다. 떨어져 나간 옷가지 틈으로 매서운 겨울이 타넘었지만 연은 흩어진 숨결을 주체하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아프면서도 뜨거웠던 흔적은 몸을 휘감고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거친 호흡을 먼저 가다듬은 해단은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연의 머리가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려 그의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느린 손길로 연의 머리를 쓸어올려 주던 해단은 연의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당황한 연의 눈동자가 커졌지만 말없이 걸음을 옮기는 해단은 거침없었다.
새로 꾸민 연의 처소는 훈훈한 기운이 가득했다.
"조실(澡室)로 갈 것이다."
허리를 굽이고 길을 잡은 궁인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사람들처럼 여인을 안아 든 옥체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조실의 가운데 가져다 놓은 목탕에서는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못 본 척 하지만 보았고, 준비했다는 의미였다. 해단의 품에 안겨있던 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안고 있던 연을 탕 안에 내려놓은 해단은 함께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목탕을 잡고 서서 한참 동안 연을 바라볼 뿐이었다. 물에서 전해지는 온기로 몸은 점점 뜨끈해 지는데, 연의 머릿속은 차갑게 변해갔다. 해단의 눈빛에 담은 뜻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촉촉한 더운 김은 연의 어깨를 적시다 또르르 방울 맺혀 가슴을 따라 떨어졌다. 해단의 시선도 따라 움직였다.
톡!
고요한 물결이 스스하게 일었다. 솟아오른 선홍빛 꽃망울은 물속에서 보일 듯 말 듯 잔잔히 요동쳤다. 물속에 있다고는 하나 가릴 것 없이 굽어 보였다. 더욱 발개진 연은 손을 들어 가슴을 슬쩍 가렸다.
"이제와 가릴 것이 있느냐. 되었다."
짙어진 검은 눈동자는 웃고 있었다. 그러나 즐거움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또렷하고 비웃음이라고 하기엔 너무 맑았다. 사내는 천천히 목탕을 잡은 손을 떼었다. 이대로 등을 돌려 갈 것 같았다. 한꺼번에 쏟아진 마음은 그를 잡고 싶었다. 수 백 가지 이유는 다르게 맴돌았지만 끝내 하고 싶은 말은 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예서 씻으셔도 될 듯합니다. 탕이 크니..."
생각이 넘쳐 작은 입술 사이로 나온 것은 다른 말이었다. 결국 가지 말라는 얘기이나 꺼낸 표현은 민망하였다.
"함께 씻자 그 말이냐."
사내의 한쪽 입술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면구함은 더욱 커졌다. 해단은 느릿하게 다가와 연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촤악!
통안의 물은 급작스런 움직임을 이기지 못하고 파도치며 밖으로 쏟아졌다. 사내의 앞섬도 크게 젖어 들었다. 그러나 사내는 마음 쓰지 않는 듯 끌어 안은 연만을 응시했다.
"아니면, 가지 말라는 말이냐."
오롯하게 읽힌 마음이었다. 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의 뜨거운 손은 목덜미를 타고 슬며시 올라왔다. 잔잔히 돋은 소름으로 연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사내는 연의 입술을 물끄러미 보다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거의 닿을 것 같은 순간 연은 눈을 감아버렸다.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해단의 숨결은 강하고 단단한 바람 같았다. 시간은 정지되어 두 사람을 묶어 놓았다. 느리게 흐른 시간을 가늠할 수 없어 답답해진 연이 눈을 떴을 때, 이미 사내의 짙은 눈매는 아득히 멀어져 있었다.
"입맞춤이라도 하길 바랐던 것이냐."
연의 얼굴은 확 뜨거워졌다.
"조급해 할 것 없다. 그리 애를 쓰지 않아도 매일 밤, 너를 품을 것이니 원하는 바는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기교는 배우지 말거라."
그 때문이 아니었다. 아들을 얻고자 그를 잡은 마음이 아니었다. 기교를 부린 것도 아니었다.
"아닙니다!"
잘린 말은 예고 없이 튀어나왔다.
"무엇이 아니라는 말이냐."
옷에 묻은 물을 훌훌 털며 사내는 물러섰다. 연은 입술을 깨물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지난 일이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이대로는 마음이 터질 것 같았다.
"처음부터 다...아닙니다."
해단의 미간이 좁아졌다.
"미와산에서 처음 보았을 때, 당신이 누구인지 진정 알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이름도, 당신이 어찌하여 그곳에 왔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곳에 와서 처음 당신을 보았을 때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반가웠고 기뻤고...지나가버린 마음이라 애써 덮으려 했던 것이 다시 피어올라 좋았습니다. 참 좋았습니다."
이미 막을 수 없는 마음이었다. 깊은 속내까지 모두 꺼내 보인 연의 음성은 가늘게 흔들렸다.
"좋았다..!?"
"진정...좋았습니다."
연은 용기를 냈다. 그러나 해단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연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도, 무심하게 비틀린 입술도 그대로였다.
"그 마음은 믿겠다. 더는 너를 비틀 것 없다 바로 여길 것이다."
사내의 답은 그 뿐이었다.
"아들을 달라 해서 화가 나셨습니까. 제가 아들을 달라 한 것은..."
태유소와의 일을 꺼내려는 연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붉어진 눈가를 매만지던 미와산의 해단이었다면 좀 더 나았을 텐데, 넓은 가슴으로 끌어당기며 안아주던 해단이었다면 좀 더 수월했을 텐데, 연이 하려는 말을 이해해주려는 따뜻한 눈빛을 보내줬더라면....
뒤틀린 마음을 풀기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것은 잘 알지만 사내에게 두 다리를 벌린 채 제 아비에게 받은 모멸스런 행위를 설명하는 것은 힘들었다. 아니 그 보다 오래전 어느 날 울부짖으며 매달리던 딸을 짐승처럼 끌어내라 소리치던 아비의 얘기를...그 때문에 눈이 멀게 된 어미의 얘기를 꺼내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제가 그리 한 것은... 아들을 달라 한 것은...그 사람, 태유소 그 사람 때문에 이루고 싶은 것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기억이 하고 싶지 않은 어느 날, 그 사람이 제 아비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날은 제 어머니가..."
"아니다! 그 때문이 아니다. 아들을 달라는 이유 따위는 상관없으니 굳이 이유를 설명할 것도 없다!"
해단은 연이 가슴으로 하는 말을 차갑게 잘라냈다. 굳게 먹은 연의 마음은 흔들리며 무너졌다.
"만일 마음을 달라 했으면..제가 마음을 달라 하였으면 주셨을 것입니까?"
순간 해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연은 잘 알지 못했다.
두려웠다. 사실은 마음을 달라고 하고 싶었던 연이었다. 처음에 그를 다시 보았을 때, 너무 좋아서 마음을 가지고 싶었던 연이었다. 단지...사내의 비틀린 조롱은 아비를 닮아 있었고, 사내의 화난 입술이 마음을 찢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차마 마음을 달라 하지 못했던 입이 떨어지지 않았기에 꺼냈던 말이었다. 더는 아버지가 아니어도 좋으니 의원을 불러 달라던 그날처럼.... 마음이 아니어도 좋으니 사내를 닮은 아이를 달라고... 시간은 세월을 두고 비켜지나갔지만 연의 자리는 태유소의 내실 앞, 흙바닥인 것 같았다. 연은 떨리는 손을 뻗어 사내의 옷깃을 잡았다. 별궁에서 만났을 때부터 잡고 싶었던 사내를, 사내의 마음을, 사내의 기운을 그제서 잡았다. 그러나 해단은 연의 손을 살짝 털어내며 긴 숨을 내쉬었다. 예뻐해 달라며 귀찮게 달라붙는 강아지를 떼어내 듯, 어머니를 구해달라 매달렸던 어린 연을 거절하듯, 그렇게 정없고 가벼운 손길이었다.
"마음!? 마음을 달라 했으면 뭔가 달라졌는가 하고 묻는 것이냐. 별 다를 것 없다. 나에게서 무엇을 달라하는 것은 그게 마음이든, 돈이든, 권력이든, 아들이든...다를 것이 없다. 알 수 없는 내 마음 따위를 달라하는 것 보다는 현명한 선택이었으니 잘하였다."
해단은 칭찬을 하는 듯 연을 다독였다. 그러나 다독인 말을 듣는 연의 가슴은 점점 서늘해졌다. 어디서부터 잘 못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연이 전하고픈 마음은 사내가 단단히 쳐둔 벽을 깨지 못하고 되돌아와 아프게 박혔다.
"산에서의 당신은...달랐습니다."
연은 가까스로 중얼거렸다. 산에서의 그는 따뜻한 품을 가졌고, 따뜻한 손을 가졌었다. 안긴 가슴은 지나치게 포근했고, 쓰다듬는 손길은 보드라워 편안했다. 기대어 쉬고 싶었던 그런 사내가 사무치게 그리운 연이었다.
해단은 피식 웃었다. 헌데, 웃음은 비어있었다.
허한 웃음..!
연의 몸으로 소름이 돋았다. 숨을 쉴 수도 없고, 뭐라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발개진 눈가로 자꾸만 눈물이 차 올랐다. 참아보려 했지만 연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랬던가. 그랬겠지. 왕이 아니니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허나, 지금 나는 왕이고 너는 단비이다. 미와산에서 만났던 연을 나는 잊을 터, 너도 그때의 해단을 잊어라. 그래야 울지 않고, 숨을 쉴 수 있을 것이다."
느린 말을 끝낸 사내는 그대로 몸을 돌려 조실의 문을 열었다. 뿌연 김 사이로 사라지는 굳은 어깨를 물끄러미 보던 연의 볼을 타고 눈물 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그러나 연은 눈물을 닦지도 못했다. 흐르던 눈물을 닦아 주던 손이 기억나서, 토닥이던 부드러운 목소리가 또렷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연은 천천히 가슴을 움켜쥐었다. 마디가 하얘지도록 그렇게 단단히 붙잡았다. 가슴이 반으로 갈라져 날카롭게 삐걱이며 부딪히는 것 같았다. 토막은 자꾸 더 잘게 나고 나서, 목으로 밀려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아팠다. 가슴부터 목까지 쭉 찢어진 듯 아팠다. 너무 아파서 입술 사이로 낮은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제목이 므흣하면 내용이 아리군요. 제목만 보고 달달한 뭔가를 기대하셨다면 저는 또..테러리스트가 되는 건가요? ㅎㅎ 요즘 뽀로로 동요를 열심히 듣고 있습니다. 자꾸 글을 쓰면서도
[바람 불어도 괜찮아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씩씩하니깐 괜찮아요~]를 흥얼거리게 됩니다. 아... 여기 저기서 행복을 바라는 분들의 질타가 이어지지만 전 씩씩하니깐 괜찮겠죠? 흣*
해단 밉고 지현님은 더 밉다. 엉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