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11>


宮中深夜砧萬足 궁궐의 깊은 밤, 방망이질이면 족하네







소문은 날개가 없어도 궁궐 담장을 쉬이 넘었다. 바람에 실려 전해질 때마다 말은 보태고 덜어져 하루 만에 황주성 어느 곳에서도 지난 밤 일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예청은 분주하였다. 후비이니 직접 옥체가 움직일 리는 없지만 교지만 내리면 별궁의 여인을 언제든 궁으로 모셔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검사 나으리. 별궁의 제상궁이 들었습니다."


책빈 의식을 위한 물품을 정리하던 사검사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낮은 기침으로 제상궁을 맞았다. 내품계와 신료의 품계는 엄격히 다르기에 굳이 제상궁을 높일 이유는 없지만 늙은 궁인의 눈 밖에 나서 좋을 일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사검사 유헌은 낮게 목례를 했다. 들어온 제상궁은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언제 들어도 무뚝뚝한 궁인의 인사에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 유헌은 곁에 있는 의자를 권하며 본디 앉아 있던 자리에 착석하였다.


"사는 것이 다 그렇지. 별 다를 것이 있겠는가. 그나저나 제상궁께서 여기는 어인일이 신가."


후비가 들어와 가장 바쁠 별궁의 제상궁이 오늘 같은 날 아침 예고도 없이 찾아온 이유가 궁금한 유헌이었다. 사감사가 권한 의자에 천천히 앉은 제상궁은 소매 깃 속에 손을 넣어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올렸다. 높은 자리에 오른 궁인이 사용하는 주머니라고 하기엔 천이 해지고 낡아있었다. 감 또한 값나지 않게 보였다.


"이것이 무엇인가."


별 귀하지 않아 보이는 주머니를 공손히 든 것에 유헌의 의아함은 더욱 커졌다.


"법도에 따르면 입궁 시, 궁 밖에서 가져온 물건은 사사로이 궁 안으로 들일 수 없게 되어있지 않습니까."


유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예청의 허가를 받으면 들일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원칙적으로야 그러하지. 그러나 한 발짝만 잘못 내딛어도 사단이 나는 궁 안에서 괜히 사가의 물건을 가져와 큰일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어디 있었는 가."


바쁜 시간 찾아와 당연한 것을 자꾸 묻는 것이 슬쩍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함부로 핀잔을 할 수 없는 높은 궁인이라, 유헌의 말투는 짐짓 퉁명스러워졌다.
제상궁은 말없이 주머니의 매듭을 천천히 풀었다. 작은 입구를 벌리고 손가락을 집어넣어 꺼낸 것은 검은 천 조각이었다. 금방이라도 부서져 재가 떨어질 것 같은 물건은 조심스럽게 접혀 있었다.
유헌은 눈매를 더욱 찌푸렸다.


"이것이 무엇인가"


"잘은 모르겠으나, 타다만 가죽이 아닐런지요."


유헌은 제상궁의 손바닥에 놓인 것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내 눈에도 그리 보이네만. 내가 따로 궁금한 것은 제상궁께서 어찌하여 이런 물건을 가져와 보이는 건가. 그것이네."


제상궁은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들었다. 가로진 주름마다 궁의 녹이 묻은 듯 보이는 깊은 얼굴이었다.


"지금 별궁에 계신 마마님께서 이것을 궁에 들이고자 하십니다."


답을 기다리던 유헌의 눈매가 더 날카로워졌다.


"제상궁.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고 있는가. 여인의 물건이라고 할 수없는,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가죽은 사내의 물건이 아닌가. 더구나 타다만 것을 어찌 궁으로 들이겠다는 말인가. 상서롭지 않은 물건이네. 불가하다 말씀 올리게."


지금까지 예를 갖추던 것과 달리 단호한 말은 재고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꿈쩍하지 않고 앉은 제상궁의 눈빛은 변화가 없었다.


"제가 이리 사검사 나리를 찾은 적이 있습니까."


"그야 없지."


"제가 지엄한 궁의 법도를 어기고 경거망동하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 또한 없지만."


답하는 유헌은 점점 난처해졌다.


"들일 수 있도록 해주시지요."


느릿한 말투에 힘이 실렸다.


"제상궁. 하지만.."


"궁의 더운 밥을 오래 먹다보니 소인의 눈에는 안 보려 해도 보이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소인이 책임을 질 것이니 허락해 주시지요."


유헌의 망설임은 점점 길어졌다.


"좋네..허면 그 말! 꼭 기억해둬야 하네. 일이 생기면 그대가 책임을 진다는 그 말! 말이네."


그제서야 제상궁의 얼굴로 아주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늙은 궁인이라 걸 것은 없사오나, 제 이름을 걸고 약조를 지키도록 하겠나이다."


목숨보다 중한 것이 궁인이 세월을 따라 쌓아온 이름이었다. 그것을 걸어 놓고도 제상궁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들어올 때처럼 정중한 예를 갖추고 자리를 털었다.




손수 문을 열어 제상궁을 배웅 하려던 순간 유헌의 마음으로 궁금증이 일었다.


"그나저나, 제상궁.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자네는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뒤를 돈 제상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인의 물건이 아니온데 어찌 알겠습니까. 모르지요."


당연하다는 듯 답한 제상궁을 보던 유헌은 기가 찼다.


"무슨 물건인지도 모르며 이런 짓을 한다는 말인가."


"때로는 마음 가는 데로 하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이만 가보겠나이다. 무탈하십시오."


더는 말을 섞지 말라는 것처럼 굳어진 늙은 궁인의 어깨는 점점 멀어졌다. 멍하니 서서 제상궁의 뒷모습을 보던 유헌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제 밤, 궁 안에 불어왔던 겨울 바람은 경망한 광풍임이었음이 분명했다. 전하께서 별궁으로 달려가 여인을 품으셨다는 일을 전해 들었을 때도 뭔가 요상타 했더니 제상궁까지 저리 하는 것을 보니 더 그러했다. 별궁에 새로 들인 후비가 요물인가보다 어깨를 들썩거리는 유헌이었다. 그러나 홀로 생각은 깊지 못했다. 이내 밖에서 들리는 음성이 그의 생각을 흩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헌. 있는가?"


교지를 기다리며 기계적으로 푸른 조복에 금대를 두르던 유헌은 고개를 돌렸다. 복잡한 마음을 덜어내도록 해줄 것 같은 벗의 음성에 유헌은 한걸음에 달려 나갔다.


"규. 그대가 여기까지 어인일 인가. 파직당한 관료라더니 궁궐 구경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좋아 보이는 구만!"


인규의 어깨를 끌어안는 유헌의 목소리에선 반가움이 묻어났다. 인규 역시, 유헌의 등을 세차게 두드렸다. 문신과 무신으로 길이 달라 자주 볼 수는 없지만 어린 시절 함께 수학했던 동연이었으니 때마다 기쁘고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정복을 차려입은 것을 보니, 일이 있는가?"


"자네가 진정 몰라서 그러는 것은 아닐 터. 책빈 교지가 아직 오진 않았으나, 별궁에서 곧 들이지 않으시겠는 가. 하여 준비하고 있었네."


유헌은 고개를 빼고 대화전이 보이는 것처럼 눈짓했다.


"그런가."


알듯 모를 듯 아리송한 인규의 말이었다. 유헌은 주변을 슬쩍 둘러보다 인규를 뒷마당으로 끌었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을씨년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난 밤, 일은 나도 대강 들어서 알고 있으니 굳이 감출 것도 없네. 무호사부의 자리에서 물러났다고는 하나 자네가 모를 리 없지 않은가. 아는 것이 있으면 어디 꺼내보게."


유헌은 인규에게 바짝 다가가며 낮게 말을 하였다.


"아는 이가 어디 나뿐 이겠는가. 그대가 알고 있는 것이 거의 맞을 것이네."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며 희미하게 웃는 인규의 낯빛이 슬쩍 붉어졌다.
전날 달려갔던 옥체는 급하고 날랐다. 싸늘하게 굳어져 나온 용안이 묘하게 걸리긴 하였지만 여인에게 들은 말 때문에 마음이 쓰여 그런 것이라 믿었던 인규였다. 그가 미처 산에서의 일을 아뢸 수는 없었지만 뜨거운 남녀의 교합의 밤에 그가 따로 덧붙일 말은 없을 것 같긴하였다. 활터에 이르러 그를 물리 셨던 성심을 미루어 짐작할 수는 없지만 미와산에서부터 이어졌던 인연은 차가운 왕의 속내를 흩어 놓을 만큼 긴하고 반가웠다고 여길 뿐이었다. 어쩐지 슬퍼보였던 여인의 눈도 환해졌을 것 같아 괜히 성심을 대신하려 쓰이던 마음도 붙잡아 놓을 수 있으리라 여기는 그였다.


"허면! 그 말들이 모두 사실인가! 전하께서 여인에게 달려가시어 품으셨다는 그 말이.!어허! 여인을 가까이 하시되 한 번도 정도를 지나친 적이 없는 전하께서 어찌하여 품계조차 내리지 않은! 엄밀히 말하면 아직은 사가의 여인이 아닌가. 게다가 부서부에서 온 여인인데! 이런 말은 뭣하지만...저기 저 별궁에 들인 후비가 성심을 훔친 마물임이 틀림없네."


"유헌!"


팔짱을 끼고 못마땅하게 중얼거리던 유헌은 인규의 엄한 목소리에 놀라 돌아보았다. 딱딱하게 굳어진 인규의 얼굴은 정색을 하고 있었다.


"유헌! 자네. 무슨 말을 그리하시는가!"


"아니..왜 내가 뭐 못할 말이라도 하였나. 안 듣는데서야 나랏님 얘기도 한다는데, 아직 책빈도 받지 않은 후비 얘기를 못할 것이 또 무엇인가."


유헌도 지지 않았다.


"마물이라 불릴 분이 아니시네."


단호한 말에 유헌은 기가 찼다.


"자네까지 점점 하! 진정 내 짐작이 맞는 모양이네. 요물이든 마물이든! 내 알바 아니지만 오늘 아침 제상궁도 찾아와 타다만 가죽을 궁에 들이겠다고 편을 들더니, 왜? 전하의 총애를 입을 것 같으니 벌써 자네도 줄을 대려는가? 그러는 거 아니네."


쓴 소리를 하는 목소리는 잔뜩 성이 나있었다. 가만히 듣던 인규의 눈이 반짝거렸다.


"잠깐..지금 타다만 가죽이라고 하였는가."


급하게 묻는 인규는 다그쳤다.


"글쎄, 타다만 가죽을 들인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라.."


듣고 있던 인규는 피식 웃었다.


"들이라 허락해주시게."


"자네...점점!"


"허락하여도 될 듯 하니 나를 믿고 그리하게."


"정말 이상타! 이상타 하였지만 찾아온 이마다 자신을 믿고 들이라니, 자네는 보지도 않고 그 물건이 허락하여도 될지 어찌 아는가! 자네도, 제상궁도 별궁의 마수에 걸려든 사람들 같이 보이는 구만!"


"그런 것이 아니래도."


"허면 무엇인가?"


다그치는 유헌의 근심어린 눈동자를 보던 인규는 피식 웃었다.


"자네 좋을 데로 생각하게나. 허나, 나를 믿고 허락해 주게. 허락 해주는 것이라 믿어도 되겠는가?"


인규는 유헌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못마땅하게 인규를 보던 유헌은 한 참 후에 긴 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그 잠깐 뭐가 씌어댄 것인지...이미 허락하였네."


힘없는 말은 축 늘어졌다.


"잘 하였어! 잘 하였네."


인규는 멍한 유헌을 놔두고 홀로 웃어 젖혔다.

















************************************














곤전(坤殿)이 비어있으니 조현의 의식은 따로 없었다. 선왕비였던 서대비는 병중이라 참여 하지 않았기에 새로이 책빈 된 후비를 위한 환영연은 여러 후비들과 궁인들만 모여 간소하게 열렸다. 청해(靑海)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넓은 황주성안 인공 못 위에 세운 누각에 모인 여인들은 저마다 환한 웃음으로 연을 맞았다. 차례로 인사를 나누며 오가는 덕담은 깊이로는 바다보다 깊고, 높이로는 하늘보다 높게 따뜻하고 사려 깊었다. 겉으로 보기엔 더할 나위없는 환영이었다.
모든 인사를 마치고 누각의 가장 끝에 앉은 연은 무표정하게 청해의 먼 곳을 지긋이 응시했다. 청해에 띄워놓은 배마다 켜둔 등은 색색이 반짝거렸고, 함께 탄 악부들은 듣기 좋은 가락을 연주했다. 그 것 만에 푹 빠져있는 것처럼 보이는 연의 얼굴은 지극히 고요했다. 은은한 눈매는 홀로 깊었고,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겠다는 것처럼 멀어진 듯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가장 상석에 앉아 붉은 탈 너머로 연을 쏘아보던 해단의 깊은 눈빛이 가라앉았다. 마치 지난밤의 일은 홀로 꾼 악몽처럼 여겨지기까지 했다. 세차게 요동치는 근본없는 마음을 억누르며 해단은 앞에 놓인 술잔만 자꾸 비워냈다. 식도를 타고 들어가는 독주라도 있어야 엉킨 생각이 바로 설 것 같았다.


"전하. 이 좋은날 어찌 홀로 술잔을 기울이시옵니까. 신첩이 마음을 다해 한잔 올리겠나이다."


궁에 들어온 세월 순에 따라 가장 가까이 왕을 모시게 된 홍비는 매끄러운 웃음을 보이며 살짝 다가왔다. 비어있는 옥잔에 투명한 액체가 쪼르르 떨어졌다. 온갖 장신구가 홍비의 움직임에 따라 울렸다. 술을 올린 후에도 달라붙은 여인의 몸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녀의 긴 손가락은 섬세하게 조각되어있는 청동술병의 손잡이를 부드럽게 쓸었고 입가로는 가는 웃음빛이 번져 흘렀다. 마치 옥봉을 쓰다듬는 것처럼 나른하게 움직이는 손끝은 성심을 유혹하고자 마음을 다했다. 가만히 홍비를 보던 해단은 옥수를 들어 홍비의 손을 확 휘어잡았다.


"그런다고 술병이 너를 품겠느냐."


"호호. 술병이야 그럴 리 없지요. 다만 신첩의 손이 자꾸 말을 듣지 않아. 아쉬운 데로 술병이라도 담아 쓸고 있었나이다."


까르르 웃으며 홍비는 새끼 손가락을 좁은 술병 입구에 넣었다 뺐다를 반복했다. 병의 입구를 탐한 홍비의 소지는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앞뒤로 움직이는 손가락이 무엇을 뜻하는 지 잘 알고 있는 다른 여인들의 얼굴로 난처한 기색이 번졌다. 헛기침을 하는 여인, 애써 고개를 돌리는 여인, 발개진 얼굴을 감싸 쥐는 여인, 그러나 맨 마지막 자리의 연만이 아무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찬웃음을 지으며 홍비의 놀음판을 치우려던 해단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미와산에서 만났을 땐, 그리 생생하던 눈빛은 화복에 담아 놓은 인물처럼 굳어져 흐릿하기만 했다. 마음으로 한꺼번에 화기가 솟구쳤다. 해단은 비릿하게 틀린 마음을 애써 무시하며 홍비의 어깨를 강하게 끌어 당겼다. 갑작스럽게 왕의 품으로 쓰러진 홍비는 날카롭게 찢어진 눈을 깜박이며 웃었다. 아니 웃음소리라고 하기엔 너무 가늘고 긴 색정 가득한 신음과 비슷했다.


"하고 싶은 것이 그리 간절하면, 해야 할 것이 아니냐."


짐짓 즐거운 옥음이었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참아내고 있었으나, 전하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신첩 몸들 바를 모르겠나이다. 성은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홍비는 손바닥을 펴서 왕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쓸며 올라갔다. 왕의 앞에 놓인 탁자에 씌워놓은 황금색의 천으로 인해 홍비가 하는 냥이 보이진 않았으나 무엇을 하는 것인지는 어림 짐작하고 남는 상황이었다. 환영연의 분위기는 묘하게 흘러갔다.
청동 술병을 세 병이나 비워낸 옥체에 거의 달라붙은 홍비만이 홀로 즐거워 낮게 웃고 있었다. 왕의 무릎에 가슴을 바짝 부비며 허벅지를 매만지던 홍비는 결심한 듯 더 깊은 곳으로 손을 넣었다. 순간, 홍비의 몸으로 큰 실망감이 번져왔다. 흥에 함께 취했다고 믿었던 옥체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스쳐갔지만 홍비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손을 바지런히 놀렸다.


"이만 되었다."


옥봉만큼 차갑게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소름이 돋을 만큼 낮고, 단호한 옥음에 홍비의 입가에 머문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홍비는 조심스럽게 물러나며 왕의 의대를 정돈해주려 하였지만 왕은 그마저도 밀어냈다. 벌써 두 번째였다. 마치 더러운 것을 쳐내는 듯 홀로 움직이는 옥수는 이내 멀어졌다.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진 홍비는 눈을 깜박이며 아랫 도련 안으로 손을 모아 쥐었다. 그나마 홍비의 마음이 흡족한 것은 주변에 앉은 여인들의 눈에 부러움과 시기가 번졌기 때문이었다. 홍비는 턱을 꼿꼿하게 세우며 하나씩 훑어갔다. 눈이 마주치면 살짝 고개를 내리는 후비들은 암묵적으로 그녀의 위치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껏 좋아하던 마음은 맨 끝에 이르러 험하게 꼬였다. 홍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보고 있는 여인은 오늘 새로 입궁한 단비였다. 지난 밤, 일을 전해 들었기에 홍비는 더 신경이 쓰였다.


"전하. 이리 좋은 날, 흥겨운 가락은 있으되, 움직임이 없으니 무엇인가 빠진 듯 느껴집니다. 신첩이 나서 무도를 해보겠나이다."


홍비는 입고 있던 겹겹의 옷을 요염하게 벗었다. 얇은 한삼차림이 되어 앞으로 나선 홍비는 천천히 몸을 흔들었다. 동여맨 가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라 그 사이 깊은 계곡을 드러냈고, 가락에 맞춰 움직이는 허리는 부드럽고 매끄럽게 움직였다. 한 바퀴 휘 돌면 얇은 한삼이 몸에 감겨 적나라한 몸맵시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같은 여인이 보아도 자극적인 몸짓은 점점 빨라졌다. 더운 숨을 뱉으며 다리를 쓸어 올릴 때마다, 여인들은 긴한 숨을 토해냈다. 절정에 이르러 마치 화려한 꽃이 피어오르는 듯, 수 십 바퀴를 돌다 멈춘 홍비의 한삼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몸에 찰싹 붙은 한삼 아래로 탐스럽게 만개한 살갗이 그대로 드러났다. 마치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입지 않은 것보다 더 은밀하고 깊숙이 되바라졌다. 지나치게 환히 빛난 무도를 마친 홍비는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며 왕의 곁으로 다가왔다. 충분히 만족한 여인의 입가엔 미소가 완연했다.


홍비의 몸에 가득하던 분내와 향내가 사라진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코끝에 감기는 살내는 분내보다는 덜 역겨웠다. 애초에 마음을 얻는 것보다 몸을 얻는 것은 더 쉬웠다. 그편에서 생각해보면 저리 애쓰는 모양새가 어쩐지 홍비다워 해단은 피식 웃었다. 왕의 붉은 천이 살짝 흔들리며 웃음을 토해낸 것을 확인한 홍비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전하. 소첩이 환영의 뜻으로 재주를 보여드렸으니 이제는 단비께서 화답할 차례가 아닌지요. 단비, 답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가까스로 목소리를 가다듬은 홍비는 차갑게 웃으며 연을 가리켰다. 홍비의 격렬한 춤사위에도 전혀 동요되지 않는 듯 청해 너머를 응시하던 연은 그제서 고개를 돌렸다. 단단하게 굳어진 열매처럼 찔러도 움츠리지 않는 어깨는 해단에게 어떠한 도움을 청하지 않고 있었다. 이유 없이 비틀린 해단의 심사는 더욱 꼬였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환영연의 주인공인데, 단비의 화답무를 보지 않으면 섭섭함이 마땅하지."


멀리 악부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잠자코 앉아 있던 연은 가만히 일어났다.


"춤은 배우지 못했나이다."


홍비의 입술이 비틀렸다. 허나, 먼저 뒤틀린 말을 뱉은 것은 해단이었다.


"춤이 불가하다면 뭐라도 해야 할 것이 아니냐. 궁으로 들어온 여인이 재주도 하나 갖추지 못하고서야 어디 큰 뜻을 이루겠느냐. 답하는 예도 모르니 품은 마음이 과욕이다!"


순간 누각에 있는 여인들의 얼굴이 표나지 않게 환해졌다. 알게 모르게 지난 밤 일을 전해 듣고 알게 모르게 단비를 견제하던 후비들이었다.


"답이라 하기엔 보잘 것 없지만...가락에 맞춰 소리를 하겠습니다."


뜻밖의 말에 해단은 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억을 더듬어 따져보면 부드러운 음색이었다. 무포를 달라며 화를 낼 때도, 또르르 눈물을 떨구며 어깨가 흔들 때도, 연의 목소리는 귓가에 감기던 그런 음색이었다. 들어본 적 없지만 어울릴 것 같다 여기는 성심은 슬쩍 움직였다. 저도 모르게 연의 입술에 기대하고 따라 모였다.


배에 탄 악부들은 궁인의 손짓에 따라 천천히 악기를 움직였다. 미리 맞추지 않았지만 음은 교화로웠다. 눈을 감고 음을 익히던 연은 숨을 깊게 내쉬며 들리는 가락에 맞춰 노래를 시작하였다.




상봉량량기왕연 相逢兩兩旣往緣
일야입화문답파 一野入花門踏破
당초무심결다정 當初無心結多情
궁중심야침만족 宮中深夜砧萬足
궁중심야침만족 宮中深夜砧萬足



이리 만난 우리 두 사람은 이미 지난 연이었는데
거칠게 꽃문으로 들어서며 짓밟아 버리시네.
처음부터 많은 정을 나누고자 함이 없었으니
깊은 궁궐의 밤 방망이질이면 족하네.
깊은 궁궐의 밤 방망이질이면 족하네.




가락을 따라 부드럽게 휘감기는 연의 소리는 진정 고왔다. 누각위에 모인 여인들이 음색에 젖어 드는 동안, 가만히 듣고 있던 해단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연은 지금 그에게 들으라 부르고 있었다. 지난밤처럼 연의 안으로 들어가 두드려 아들을 만들어 주면 그뿐, 인연도 아니고 정을 나눌 것도 아니라 말하고 있었다. 먼동이 터올라 활터가 환해질 때까지 수백사의 활을 쏘며 편하지 않고 고통스럽게 구겨졌던 마음은 한 순간에 성난 성심으로 바뀌었다. 감히 먼저 아니라고 물리치고 있었다. 해단은 가락이 채 멎기도 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전하!"


깜짝 놀란 여인들이 따라 일어서며 어쩔 줄 몰라 당황했다.


"宮中深夜砧萬足"


그러나 연은 상관없다는 듯 후렴구를 가만히 반복하고 있었다.


"차마 들어 줄 수 없는 음색이 아니냐."


연의 소리는 그제서 멈춰섰다. 하얗게 번져있던 연의 얼굴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나 것처럼 더 어둡게 흐려졌다.


"나 역시 그러하다!! 목숨 값만 치르면 그뿐! 더는 상관치 않을 것이다!!"


연이 부르던 후렴구를 싸늘하게 쏘아붙인 해단은 그대로 누각을 내려갔다. 서둘러 따르는 여인들과 궁인들 뒤로 연만이 홀로 앉아있었다. 멀어지는 사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연은 고개를 돌려 못의 먼 끝을 응시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청해는 흔들리는 마음처럼 가늠할 수 없었다.











*월요일 아침이네요. 행복한 한 주 보내세요. 며칠 내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


댓글 '8'

행복약

2009.12.07 09:48:17

인규도 참 ...저리 눈치가 없어서야..
해단의 심술은 언제쯤 끝날지...

진하

2009.12.07 11:07:25

며칠내가 언제일지 그게 제일 궁금한데요.ㅋㅋ

위니

2009.12.07 13:13:41

아이고...오해의 골이 이렇게 더 깊어지면...우리연이는 어쩌라고..ㅡㅜ

so

2009.12.07 13:42:49

언젠가는 사랑으로 행복하겠지만 그 날이 오기까지가 너무도 험난하여 가슴이 아프나이다.ㅠ_ㅠ

^^

2009.12.07 15:02:43

어쩜 저리 연의 마음을 모르는지ㅠㅠㅠㅠ

마가렛

2009.12.08 06:35:43

울 해단군에게 비타민이 필요하군요..철 성분이 가득 들은걸루다가..ㅎㅎㅎ
빨리 오셔요...기다리옵나이다..테러리스트님!!^^*

ßong

2009.12.08 22:32:08

해단도 참... 얼렁 감정을 깨닫고 알뜰살뜰하게 잘 해줘야할텐데..

2010.01.14 02:50:56

좋아해서 그러는건 알지만, 왜 읽을 수록 더 조바심이 나는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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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일요일로 가는 길목 04 [7] 버져비터 2009-11-30
221 붉은 탈-&lt;9&gt; [10] 신지현 2009-11-30
220 붉은 탈-&lt;8&gt; [3] 신지현 2009-11-26
219 붉은 탈-&lt;7&gt; [6] 신지현 2009-11-23
218 일요일로 가는 길목 03 [6] 버져비터 2009-11-20
217 붉은 탈-&lt;6&gt; [4] 신지현 2009-11-19
216 붉은 탈-&lt;5&gt; [5] 신지현 2009-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