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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愁心留印墻邊 근심하는 마음은 담장 따라 머무네.
저릿한 통증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일렁이는 불꽃처럼 화르륵 타오르는 작열감과 이질감에 연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힘을 주어보자 손안의 낯선 감촉이 선명해졌다. 정신을 잃은 동안에도 불속에서 가져온 피갑을 놓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모른 척, 손에 쥔 것을 이불 속으로 밀어 넣으며 연은 몸을 일으켰다.
"며칠은 아플 것이다."
태유소의 음성은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졌다. 가만히 눈을 뜨자 화려한 비단 옷이 흐릿하게 보였다. 연은 태유소를 쏘아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에선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손을 들어 입술을 훔치자 붉은 선혈이 하얀 손등에 묻어났다.
"닦아 내거라."
태유소는 앞에 있는 영견을 내밀었다. 연은 물끄러미 베조각을 응시했다. 깨끗하게 접힌 하얀 천은 한눈에 보아도 부드러워 보였다.
"직접 닦아주랴?"
"괜찮으니 나가보십시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마른 음성이었다. 내민 손을 거두는 태유소의 입가로 알 수 없는 웃음이 흘렀다. 그의 희끗한 수염은 가늘게 떨렸다.
"더 누워 쉬지 그러느냐?"
가슴까지 얼려버릴 만큼 차가운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위로의 말에 연의 숨이 질렸다. 연은 고개를 들어 태유소를 똑바로 응시했다.
"마음에 드는 눈빛이다."
뜻밖에도 태유소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연은 대답 대신 쓴 침을 삼켰다.
"마냥 쓰러져 울고만 있기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드느냐? 그 눈은 당장이라도 이리 달려와 내 목이라도 졸랐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구나."
"그러면 끝이 나지 않습니다."
덜덜 떨리는 어깨를 끌어안고 움츠린 연은 또박또박 대답했다.
"아주 똑똑하구나."
마치 아비가 딸에게 칭찬을 하는 듯 다정했다.
"용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을 절대로 용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용서? 아비와 딸 사이에도 그런 말이 필요하더냐? 피는 물보다 진하고, 끊어낼 수 없는 것이 부녀의 정이 아니냐."
재미있어 죽겠다는 태유소는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연에게 손을 뻗었다. 한 뼘만 더 뻗으면 연의 어깨를 토닥일 수 있는 거리였다. 연은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눈동자만큼 커다란 옥석은 누런 금덩이에 매달려 손가락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연은 그 마저도 끔찍하다는 듯 뒷걸음질 치며 그의 손을 쳐냈다. 어색하게 손을 거둔 태유소는 다 이해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나를 이해할 수 없겠지? 원망이 크고, 넓어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너도 나를 이해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설사 이해하지 못한다 한들 뭐 상관은 없지만."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당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태유소의 뒷말을 자른 연은 단호했다. 태유소의 눈썹이 하늘로 비스듬하게 치켜 올라갔다.
"이해한다고?"
"그렇습니다."
"그래? 그것 참 고마운 일이로구나. 네가 제법 영리한 줄은 알았지만 이해심도 크다는 것은 미처 몰랐구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지 않으십니까. 곁에 있는 사람을 밟든, 죽이든, 상관치 않고 그 손안에 모든 것을 움켜쥐고자 함이 아니십니까. 당신은 그리 하고자 뭐든 하실 분이십니다."
"아주 잘 아는 구나."
태유소는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쳤다.
"저도 그리 가지고 싶은 것이 생겼습니다."
태유소는 뒷말을 묻고 싶은 마음을 자제하며 연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까만 눈은 담담하고 허했다. 비어있는 눈매 뒤에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태유소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으려는 연 사이에 침묵은 오래 흘렀다. 한참 만에 연은 흐릿하게 웃었다. 그러나 웃고 있는 얼굴은 기쁘지 않았다.
"무엇이 가지고 싶은지 묻지 않으십니까?"
"어림짐작은 한다."
"당신 말처럼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다는 궁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움켜쥘 것입니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손안으로 제가 누릴 수 있는 힘을 모두 모을 것입니다. 당신이 준 기회이니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태유소는 박수를 쳤다.
"얼쑤! 아주 잘 생각했다."
"그리고...그렇게 모든 것을 다 가지면 당신이 가진 것도 하나 남김없이 다 빼앗을 것입니다. 당신 것이라면 모두 이 손안에 넣을 것입니다."
한마디 한마디를 이어 갈수록 연의 가슴은 묘하게 아파왔다. 독하게 먹은 마음이 따로따로 흐트러지지 않도록 다잡으며 하는 말인데, 날카로운 바늘이 심장에 촘촘히 박히는 것처럼 저미게 아팠다. 연은 가슴을 찍어 누르며 태유소를 쏘아보았다.
그제서 태유소는 얼굴에 가득한 미소를 서서히 거둬들였다. 무섭도록 반짝거리는 눈으로 연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너는 나를 닮았구나."
어이없는 웃음이 연의 입술사이로 터져 나왔다.
"저는 당신을 닮지 않았습니다."
“너는 나를 닮았다. 그것도 아주 꼭 닮았어. 네 말처럼 모든 것을 가지도록 애써 보거라. 내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보아라. 그 날이 온다면 아주 기쁘게 모든 것을 네게 내어 놓을 테니. 어쩌면...어쩌면 말이다. 나는 가끔 너를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원치 않습니다."
"그럴 테지. 나도 생각하지 않도록 애는 써보도록 하마."
태유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연은 따라 일어서지 않았다. 산등성이의 나무처럼 꼿꼿하게 그대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아비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네게 선물을 하나 주자면 연아. 궁은 이곳과 다르다. 흐르는 시간도, 불어오는 바람도, 입으로 나오는 말과 머릿속의 말과, 가슴 속의 말도 모두 다르게 하는 곳이 바로 궁이다.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할 때가 가장 위험하고 아무것도 쥔 것이 없을 때가 가장 안전할 지도 모른다. 제 멋대로 춤추는 칼날은 사방에서 올 것이며, 노력한다하여도 절대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 허나, 긴 세월 지치지 않고 잘 버티면 너라면...너라면 가질 수도 있겠구나 싶다."
방을 나가려던 태유소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입을 떼었다.
그 음성은 이상하게 연의 가슴을 울렸다. 태유소의 입에서 스스로 처음 꺼낸 아비라는 말을 지워내려 애를 써도 귀로 들어 버릴 소리를 가슴이 먼저 듣고 말았다. 이유도 없이 자꾸 눈앞이 흔들렸다. 저런 말 따위에 눈물을 흘릴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눈은 아프도록 뜨겁기만 했다. 연은 고개를 저었다.
깨문 입술까지 또르르 굴러 떨어진 것도.
양 볼을 타고 흐르는 것도.
눈물은 아니었다. 절대로 눈물은 아니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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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이었다. 눈이 지독하게 쏟아졌던 검은 하늘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투명하게 빛나 미와산 너머 흰 구름마저 손에 잡을 수 있을 듯 선명했다. 대제관 앞에 모인 사람들은 기대감에 가득한 눈으로 안채의 나무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미처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담벼락과 나무위에 매달려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고우실 까."
연에게 옷을 덧입히던 막이어멈은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서국의 왕의 보낸 옷은 홍색 바탕에 소매와 어깨에 금실로 수놓은 용 무늬의 넓은 깃이 있었다. 안감은 모두 은사로 덧입혀져 화려하게 반짝거렸다. 손끝보다 긴 홍색, 황색의 색동단은 덧대어 연의 손을 덮었고, 등에는 한 쌍의 화려한 적조가 하늘을 오를 듯 선명했다. 마지막으로 적상까지 갖춰 입은 연의 머리로 붉은 천이 내려왔다. 앞을 가린 천으로 아무것도 볼 수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촘촘하게 짜인 직물 사이로 보이는 모든 것은 또렷했다. 연은 고개를 살며시 돌렸다.
"네 어미라도 찾느냐."
뺨을 한 대 맞은 듯 연의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별사들 앞에 나설 수는 없으니, 내실에서 나오지 말라 해두었다. 괜한 의심을 살 필요는 없지 않느냐."
재빨리 쏘아붙이는 설리였다.
"알고 있습니다. 마님께서도 편치 않으시면 들어가셔도 괜찮습니다."
설리의 붉은 입술이 치켜 올라갔다.
"끝내 마음에 들지 않아! 천한 것이 무에 그리 잘라 나를 다 안다는 듯 살피느냐. 나 역시 너처럼 좋아서 여기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니니, 마차에 오를 때까지 잠자코 있거라."
모진 말에 곁에서 거들던 계집종들의 얼굴로 민망함이 번졌지만, 정작 연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유선이 꼽아 놓은 머리 장식만이 부드럽게 부딪치며 흔들릴 뿐이었다.
"지독한 계집!"
설리는 연의 위아래를 훑었다. 모든 의복을 갖춘 연은 피어오른 꽃처럼 아름다웠다. 태유리 대신 가는 걸음이니 고맙다는 마음이 들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설리의 마음은 불안감으로 꽉 찼다. 저 정도라면 서국 왕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왕의 총애를 얻어 왕자라도 생산한다면? 커지는 불편한 감정을 어쩌지 못한 설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제 다 끝이 났습니다."
여종들은 설리의 명을 기다리듯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설리는 느리게 연에게 다가갔다.
"내 딸, 리로 살아갈 준비는 다 되겠지. 잘 가거라."
홀로 핀 꽃처럼 서있던 연은 얼굴을 가린 천을 살며시 걷었다. 짙어진 눈매로 설리를 바라보던 연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를 부탁드립니다."
"네가 먼저 칼을 뽑지 않으면 나도 그렇게 할 것이다. 너도 알겠지만 나는 대감마님과 많이 다르다. 대감 마님은 늘 다음을 대비하시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할 능력이 없는 여자다. 궁지에 몰리면 난 뭐든 할 것이니...네 어미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말아라."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고 나서야 설리의 얼굴로 만족스런 웃음이 번졌다. 연은 설리를 가만히 쳐다보며 걷은 천을 살며시 내렸다. 빨갛게 부어오른 상처가 있는 손끝으로 붉은 천을 완전하게 덮기 직전의 눈동자가 설리와 마주쳤다. 말을 할 수 없는 눈인데, 어쩐지 설리는 그 눈동자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처연한 눈빛에 설리의 등 뒤로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설리는 괜한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을 열거라. 지체할 수 없는 길이 아니냐!"
설리의 명에 내실에 길게 내렸던 몇 겹의 나무 발이 차례로 올라갔다. 마지막 발이 하늘로 올라가자 시립한 별사들과 화려하게 치장된 마차가 연의 눈에 들어왔다. 청색과 홍색으로 어지럽게 뒤엉킨 마차 뒤로 선 사람들의 입에선 탄식이 터져 나왔다.
곱다. 어여쁘다.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은 낯설기만 했다.
양 쪽에서 부축하던 여종들은 마차를 서너 걸음 앞두고 물러갔다. 이제는 홀로 가야 하는 길이었다. 마차까지의 몇 걸음뿐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날들 모두 홀로 가야 하는 길이었다.
알 수 없는 눈물이 차올라 눈 밑이 뜨끈해졌지만 서둘러 눈을 깜박이며 참았다. 더는 울 수 없었다. 눈물로 곱게 단장한 화장이라도 지워지면 큰일이라고, 마음을 다잡아 보는 연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라, 익숙한 숨소리 하나가 귓가에 들려왔다. 수많은 사람들 틈으로 또렷하게 들리는 숨소리! 긴 시간 연을 보듬고 안았던 그 숨소리가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기에 연은 가만히 멈춰 섰다.
당장이라도 돌아서 세화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 잘 다녀오겠다고 걱정 말라고, 꼭 모시러 오겠다고 약조하고픈 마음은 누르려 애쓴 들 눌러질 리 없었다.
"이만 오르시지요."
생각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연은 고개를 돌렸다. 시립한 사내는 살짝 고개를 들고 재촉하고 있었다. 냇가의 물이 흐르는 듯 비켜 마주친 눈동자는 지나치게 깊었다. 예상치 못한 느낌에 당황한 연은 서둘러 마차에 발을 올렸다. 허둥거리는 마음은 몸에도 전해졌다. 적상아래 길게 늘어 떨어져 있던 규의를 미처 쥐지 못한 탓에 연은 휘청거리며 앞으로 쓰러졌다. 순간, 곁을 지키던 사내가 손을 뻗어 색동깃 안의 손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덕분에 중심은 잃지 않고 바로 섰지만 소매 안에 감춰진 상처는 순간 벌어졌다. 연의 입으로 낮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괜찮으십니까."
마주친 사내의 눈은 이유를 짐작할 수 없지만 따뜻했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이해한 다는 듯, 그런 눈을 감당하지 못한 연은 서둘러 손을 거두었다. 사내도 스스로의 행동에 흠칫한 듯 한발 짝 뒤로 물러섰다.
"괜찮습니다."
연은 짧게 답하며 마차 위로 몸을 올렸다. 의아함과 당황스러움으로 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들킬까 두려운 연은 서둘러 깊게 자리했다. 그리고 문은 이내 닫혔다. 금세 어둑해진 마차 안으로 연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길은 멀었다. 빠를 말로 하루를 꼬박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마차까지 따르고 있으니 시간은 곱절 더 걸릴 수밖에 없었다. 인규는 어두워지는 주변을 살피며 말머리를 당겨 잡았다. 밤길을 달려 갈 수 없는 여정이었다. 미리 준비해둔 막사 주변에 피워둔 불은 멀지 않은 곳에서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주변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인규를 발견하고 재빠르게 달려왔다. 그들에게 말고삐를 내어준 인규는 낙엽처럼 가볍게 땅으로 내려왔다.
"잘 가셨느냐."
인규는 흐릿하게 저문 청마성을 힐끔 보았다. 옥체 뒤로 스쳐간 찬바람은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병사도 같은 마음이었다. 청마성을 향한 눈에는 황망함이 담겼다.
"무호사병 중 서른 명만 따랐습니다. 더 커지면 길이 지체된다 하셨습니다. 두 시진 전쯤 청마성에서 전갈이 왔었으니, 지금쯤이면 영휘문을 지나 황주성에 닿으셨을 것입니다."
무호사병은 낮게 보고하였다. 인규가 비록 무호사부의 지휘를 박탈당했다고 하나 비어있는 자리의 주인이 누가 된 들 사병들은 상관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전까지 그들의 수장은 인규 하나였고, 앞으로도 그리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었다.
"고생했다. 따로 이른 말은 알아보았느냐."
인규는 속도를 줄이며 멈춰서는 마차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대한 답이 있는 곳이 저 마차 안, 깊은 곳이라는 듯 어그러짐 없는 시선이었다.
"예. 태유리라는 딸이 있다는 것은 확실했습니다."
병사의 말에 인규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하였다.
"친딸이 맞다고 하더냐."
"예. 부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이 확실했습니다."
“허면, 혹시라도 떠도는 이야기 중 딸에 관한 다른 말들이 있는 지 은밀히 알아 보거라.”
마차를 물끄러미 보던 인규는 긴 숨을 한꺼번에 내쉬며 명을 내렸다. 부서부의 대제관에 들며 태유소를 본 순간 내뱉었던 숨결과 비슷했다. 인규를 환대하며 머리를 숙이는 그는 작일, 산에서 보았던 그자였다. 멀리 지켜본 탓에 그들이 나눈 대화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여인을 잡고 행한 모든 것은 바로 앞에서 벌어진 일처럼 생생하기만 했다.
설마 그 여인이 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인규였다. 그러나 마지막 발이 걷어지고 궁으로 갈 여인이 나오는 순간 인규는 직감적으로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얼굴을 감췄기에 볼 수 없어도 걸음걸이에서 느껴지는 흔적은 똑 같았다. 만에 하나 아닐 지도 모른다고, 부러 잡았던 손아귀였다. 화상을 입었다면 참을 수 없을 만큼 힘을 주어 잡은 손끝으로 전해지는 감촉과 터져 나온 비명은 더 이상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없었다.
인규는 모든 것이 어지러웠다. 긴 겨울밤 옥체를 모신 여인이 태유리이고, 그런 딸을 물건처럼 취급하는 태유소라.! 친딸에게 그리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소름끼치는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 불안한 것은 성심에 있었다. 모르고 계실 터였다. 지나가는 들꽃이라, 좋았던 하룻밤의 추억이라 하시면서도 묘하게 흔들렸던 성심을 인규는 잘 알았다. 수년 만에 왕은 즐거워하고, 기뻐했다. 망설이고, 기다리고, 앞, 뒤가 맞지 않았었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선 여인이 태유소의 딸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그였다.
"더 이르실 말씀이 계십니까?"
생각이 깊어 인규는 듣지 못했다.
"나리. 더 이르실 말씀이라도..."
이어지는 재촉에 인규는 고개를 저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병사는 어깨를 들썩했다. 멀어지는 병사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인규는 뭔가 깨달은 듯 서둘러 그를 불러 세웠다.
"지유근(地楡根)을 구할 수 있겠느냐."
"약초를 말씀하십니까? 어디 다치셨습니까?"
"그런 것은 아니다. 따로 긴히 쓸 곳이 있어서 그러니 구할 수 있다면 구해 보거라."
의아하다는 듯 눈을 껌벅이는 병사를 놔두고 돌아서는 인규의 어깨가 유난히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번편도 잘읽고갑니다...두사람 곧 만나게 되겠군요..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