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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No.01 재회와 감회 : 과거완료
신후가 그답지 않은 머뭇거리는 걸음을 옮겨 모교 근처에 당도하기까지 30분이 족히 걸렸다. 기실 달음질에 가까운 소년의 보폭으로는 20분도 넉넉한 거리였다. 학창시절을 반추하자면 도보로 20분의 등굣길 아래로는 신비로운 법칙 - 이른바 등교시간 불변의 법칙 - 이 깔려있어 버스를 이용해도, 자전거를 몰고도, 다리를 재게 놀려서도 등교에는 항상 일정량의 시간이 소모되곤 했다. 손목에 휘감긴 시계의 바늘이 조급하게 튕기는 모양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신후는 짐짓 황혼을 맞은 노인처럼 한숨을 지었다. 하긴 십대 나이 기준으로 보면 나도 퇴물이군. 중장년층의 혈압을 대기권으로 끌어올리는 막말을 중얼거리며 신후가 느긋하게 시선을 쳐들었다. 선 자리와 몇 미터나 떨어졌을까. 원근감으로 인해, 가로로 늘어서 교사를 호위하는 육중한 철문이 신후의 아름에 안길 길이밖에 안되었다. 교문 옆으로 누구를 기다리는지 이따금 신경질적으로 한발을 구르는, 얼굴이 학부형 못잖게 늙수그레한 고교생 남아 하나가 보였다. 피부처럼 달라붙어 하체에 압력을 가하는 자학 콘셉트의 바지하며, 섭리에 대항하여 모근의 반대방향으로 쓸어 넘긴 머리모양이 생경했다. ……미묘하게 핀트가 엇나간 십대의 미의식은 여전하군. 교정에 발을 들여야 확실해지겠지만 일단 재회한 모교의 첫인상만큼은 새로울 게 없다. 안도감을 느끼는 신후를 비웃듯 본관 현관 처마 밑에 달아둔 알량한 전광판이 경망스럽게 껌뻑거렸다. 문득 미숫가루빙수가 맛있더라는 대학가 단골 술집의 폐업을 애도하며 나윤이 격앙되어 떠들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그나마 강산이 변해도 학교는 대부분 제자리지 않냐? 단골 술집들 나날이 없어지고 바뀌는 거 보면, 모교란 게 되게 의미 있는 거 아닌가 싶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오다, 가다 옛날에 다니던 고등학교 눈에 띄면 괜히 뿌듯하고 애틋하더라. 넌 학교도 외국으로 가서 더 그럴 거 같은데.’
‘……논점으로 돌아가시죠. 애초부터 형님이 문 닫기 직전의 가게를 좋아는 탓 아닙니까. 후미지고 손님 뜸하고. 원, 취향 한번 세기말적이지.’
‘그래, 새끼야. 내가 넘버원 클로저다. 제길, 패전처리 투수도 아니고.’
애틋함이라. 신후는 쓴웃음을 흩뿌리듯 세게 고개를 저었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지른 주머니가 두둑했다. 정우를 만난후로 수년간 난 자리를 못 느끼고 잘만 지내던 담배에 대한 갈망이 솟구쳤다. 결국 아침 댓바람부터 정신이 몽롱했던 오늘에서는 끓어오르는 흡연욕구를 이기지 못하고 오는 길에 편의점을 들렀다. 손으로 주머니 안을 휘저은 신후는 지갑과 열쇠와 소시지를 피해 새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냈다. 이어 무작스레 비닐포장을 벗겨내곤 빼곡히 들어찬 담배 가운데서 한 개비를 뽑았다. 어느새 입술에 필터를 문 신후가 자연스럽게 가스라이터를 담배 끝에 가져가 숙달된 손놀림으로 동그란 쇠바퀴를 긁었다. 갓 돋아난 새싹같이 앙증맞은 불꽃이 담배에 맺혔다.
후욱, 신후가 숨을 깊게 들이켰을 때다. 윽. 오랜만에 목청을 타고 넘는 담배연기는 계산보다 훨씬 자극적이었다. 때문에 맵고 독한 향을 무방비로 흡입한 신후는 처음 담배를 피우는 서투른 반항아마냥 켈룩켈룩 기침을 뱉고 말았다. 제길, 짧은 욕지기를 내며 찡그렸다 바로한 눈에, 길 맞은편에서 신후를 주시하다 피식 조소하는 참신한 미의식의 청소년이 걸려들었다. 스스로를 <남자는 대개 나이를 불문하고 자존심을 목 위에 두는 미련한 짐승>이란 통설의 반례로 삼아왔건만, 신후는 정말이지 고교생이 된 마냥 분개해서 당장 달려 나가 소년의 뒷덜미를 잡을 뻔했다.
상대와 상황을 파악하고 기꺼이 몸을 낮추는 법 - 즉 생존기술을 좌시하는 용맹함과 올곧음 탓에 원체가 적이 많은 소년일까. 신후가 전투적으로 발을 떼려는 찰나 그보다 먼저 표적을 노린 그림자가 있었다. 정황을 파악하는 사이, 정수리에 머리뭉치를 얹은 역시 특출한 미의식의 여학생이 살랑살랑 날아와 어깨에 손을 얹자 남학생에게서 초조한 기색이 전부 떨어져나갔다. 학교에서 멀어져 종래에는 까만 점이 되어버린 두 사람의 등을 망연히 지켜보며 신후는 헛웃음을 지었다. 속독을 하여 줄거리만 훑고서 덮어버린 <어린왕자>가 떠올랐다. 네가 네 시에 오면 난 세시부터 기뻐질 거야. 학교 도서실에서 빌린 삽화가 유치하고 두께가 얄팍한 책의 한 문장에 형광펜으로 줄이 그어져 있어 절로 이끌린 눈이 멋대로 외워버린 터다. 물론 두세 번 되뇌어 보고는 젠장, 세시부터 들떠서 다른 일을 못할 바엔 일찍 만나란 말이다, 한마디와 공공의 기물에 누가 줄을 치는 거야, 두 마디가 신후가 쏟아낸 감상의 전부였더랬다.
그러나 분명 그에게도 약속조차 하지 않은 사람을 기다리던 어수룩한 봄이 있었다. ……병신. 불티가 통과한 자리, 새카맣게 타들어가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던 담뱃재가 검지의 도닥거림에 부스스 흩어져 내렸다. 이윽고 할 노릇을 다한 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신후는 오로지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성큼성큼 나아갔다.
신후가 적극 부인한다 해도 틀림없이 신후와 윤후는 한 장의 사진을 각기 다른 재료로 그린 그림 두 점처럼 닮았다. 윤후가 풍부한 색감을 수십 번 덧칠하여 완성시킨 화려한 유화라면 신후는 메마른 나뭇가지 끝에 잉크를 찍어 뻑뻑 갈긴 간결하지만 인상이 진한 드로잉이었다. 신후, 윤후 형제는 일종의 상보(相補)관계를 이루어 둘이 한 벌의 짝을 이룰 때 각자의 개성이 더욱 도드라졌다. 실지 둘을 한 데 세워놓고서는 풍기는 기세며 이목구비의 세세한 생김이 판이하여 구별이 어렵지 않았는데 막상 둘 중 하나가 외따로 있노라면 윤후인지 신후인지 긴가민가 헷갈려하는 이들이 많았다. 때문에 마치 원곡과 표절곡마냥 교묘하게 닮은 외모는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노상 화젯거리로 오르내렸고 이는 번잡할 바엔 차라리 권태로운 일상을 추구하는 신후의 의향에 정면으로 대치됐다. 꾀까다로운 성미에 낯가림을 더해 타인의 관심을 몹시 불쾌하게 여기는 신후로서는, 본인이 원하지 않는 화제성을 한결 드높이는 <윤후효과>의 가세가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반면 꿀통에 벌떼처럼 사람들을 몰고 다니는 윤후는 신후를 어제 받은 선물로 여겨 자랑하기 바빴다. 불가항력으로 윤후와 한 학교에 진학하게 된 신후는 정말이지 교문에서 두 마리 켈베로스가 지키는 지옥 입구를 보았다. 열일곱 이른 봄부터 윤후가 졸업한 열아홉의 늦겨울까지, 신후가 거의 삭발과 흡사하게 짧은 머리를 유지한 연유였다.
입학식 즈음엔 시력이 나빠진 윤후가 안경을 맞춰 신후는 내심 쾌재를 질렀다. 뿔테 안경은 실없이 웃느라 늘 유려한 곡선을 그린 윤후의 눈을 시커먼 사각 틀 안에 가뒀고 결 좋은 생머리는 신후의 머리칼과 달리 이마위로 가볍게 늘어져 윤후 특유의 온건한 분위기를 강화했다. 나이야 한 살 어리지만 성장만큼은 신후도 윤후에게 뒤지지 않아 벌써 세부묘사에 들어간 마무리단계의 소묘처럼 외모가 정리되어갔다. 단 신후의 성장은 윤후와 반대 노선을 타 애답지 않게 단정하고 세련됐던 인상이 점차 서늘하고 금욕적인 느낌으로 굳어갔는데, 실상 외모의 저작권 보호를 부르짖던 본인에겐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한 전개였다.
입학한지 열흘이나 되었나. 여간해서는 교정에서 윤후와 마주치는 일도 없겠다, 윤후로 오인 받는 경우도 없겠다, 꽁꽁 여몄던 긴장을 느슨하게 꿰어놓았던 어느 날이었다.
‘신후야! 농구 한 판 뛰어야 하는데 너 껴라. 한 명씩은 용병 넣기로 합의 봤어.’
아직 서먹함이 극지방처럼 차게 감도는 일학년 교실에, 보풀이 일어나고 헤진 조끼와 헐겁게 목에 걸린 남색 타이로 보아 한 학년 선배로 짐작되는 소년이 등장했다. 미닫이문을 열고 광풍마냥 정신없이 들이닥친 윤후는 앞뒤를 전부 잘라낸 한 마디를 환호하듯 외치고 마침 사물함을 정리하던 신후의 팔을 잡아챘다. 신후를 단단히 얽어맨 윤후의 손은 에콰도르의 한낮처럼 뜨거웠다. 잠시 정적을 떠안았던 교실에 혼선과 같은 웅성거림이 가득 찼다.
미국의 금발 미녀들만 멍청한 얼굴로 피쓰를 외치는 것이 아니다. 신후 역시 그녀들 못지않게 진정으로 평화를 원했으나 윤후는 그의 소박한 소망을 묵살했고 이제 싸움은 불가피해진 참이다. 당연하게도 선전포고엔 예의와 온정이 필요치 않지만……그래도 권윤후 낯짝은 챙겨야겠지. 미간을 좁힌 신후는 윤후의 통통한 귓불을 사정없이 당겨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농구 말고 다른 걸로 한판 뜨고 싶냐? 쪽팔리는 일 만들지 말고 좋게 말할 때 꺼져라.’
‘아아이, 형이 부탁 좀 하자아. 이기면 너도 사탕 줄게.’
‘작작해둬. 헛소리 지껄이다 이 새로 하는 수가 있다.’
신후의 강경한 태도에 윤후의 눈초리가 처연하게 기울어졌다. 모르는 사람들이야 윤후더러 남자애가 원체 순하고 여리다 혀가 닳도록 핥아대지만 신후가 알기로 그의 형은 은근히 약아빠진 구석이 있어 수세에 몰리면 급하게 동정이라도 끌어다 위기를 모면하는 천생 너구리였다. 개수작에 넘어갈 줄 알고. 신후는 짙은 눈썹을 위로 끌어올렸다. 주위의 눈치를 살핀 윤후가 기습적으로 신후의 목에 팔을 걸었다. 윤후가 내쉰 더운 숨이 신후의 귓바퀴를 스쳤다.
‘내가 작년에 쓴 독서록 무상으로 넘길게. 우리학교 학교차원에서 독서 장려한다면서 독서 감상문 엄청 쓰게 한다고. 너 뭐 쓰는 거 질색이잖아.’
은밀한 제안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목을 죄는 팔을 꺾어버려야 마땅했지만 윤후의 독서록은 물욕 없는 신후가 드물게 탐을 낼만한 희귀품임에 틀림없었다. 매사 빈틈없는 성격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성적관리에도 철저한 신후의 거의 유일한 취약점이 국어 수행평가계의 터줏대감, 독서 감상문 쓰기인 탓이다. 예술가적 기질을 지녀 그림이며 글 등의 수단을 통한 자기표현이 능숙한 윤후와 달리 신후는 바람과 소회를 감추고 비우는데 익숙해서, 일부분이나마 속내가 투영되고 마는 글쓰기 자체가 몹시 불편했다. 더구나 해가 딱 떨어지는 셈에서 희열을 느끼는 예비 이공계열 신후로서는 어째서 책을 읽은 감상이랍시고 마음에도 없는 얘기를 주절주절 나불거려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신후는 구겨진 미간을 펴지 않고 윤후의 팔을 끌어 내리며 이를 물었다. 아직 머리도 꺼내지 않는 대답을 예측한 능글맞은 윤후가 입을 함지박처럼 벌렸다. 신후는 윤후를 뒤로 앞장서 교실을 벗어나며 씹던 껌을 뱉듯 무정하게 말했다.
‘한 판만이야. 다신 우리 교실 오지 마.’
두어 달 남짓이 지나 윤후의 예고대로 수행평가 과제로써 독서 감상문을 제출하란 명령이 떨어졌다. 장장 스무 편에 달하는 가히 살인적인 분량이라 윤후가 써둔 것을 그대로 베낀대도 왼손이 중노동을 해야 할 판이었다. 고교 들어와 처음으로 맞는 중간고사가 내주로 따라붙은 때라 마음이 분주했던 신후는 일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윤후의 방을 찾았다. 허공을 딛고 사는 듯 중력의 속박을 모르는 자유로운 영혼은 시험 따위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아, 뱃속 편히 야구경기관람을 나선 터였다. 차라리 흔해빠진 웃음이라도 팔아서 가계에 보탬이 될 일이지 학교는 왜 다니는 거냐. 열대 우림에서 하품이나 늘어지게 뿜어대는 나무늘보로 태어났어야 마땅할 놈이 인격과 인권을 부여받아 인생을 낭비한다니. 심혈을 기울여 윤후를 깎아내리면서도 신후는 책장을 헤집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모자라기로는 댈 대가 없는 진성 머저리가 표지로 구분하겠다며 노트 겉장에 과목명 한자 적어놓지 않아 독서록을 찾는 단순작업이 생각만치 간단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나눠준 출력물로 괴생물체 종이접기에 도전했는지 파일 철에 끼인 종잇장중 형체가 말짱한 게 없었다. 망할 놈의 자식, 누구 닮아서. 하고 절로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애먼 사람에게 순식간에 엄마의 마음을 주입하는 재주로 보아 윤후는 분명 여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있을 게다. 사뭇 거칠어진 손놀림에 노트 하나가 책상을 타고 미끄러져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훌떡 펼쳐진 노트는 사진 하나를 토해냈다. 신후는 허리를 숙여 노트와 사진을 한꺼번에 집어 올렸다. 불행 중 다행으로 <여고생 엿보기> 계통의 볼썽사나운 나체 사진은 아니었다.
‘뭐야, 이건.’
교실 풍경이 찍힌 사진 속, 초점은 어깨위로 껑충 올라간 단발머리에 실 핀을 지르고서 먼데를 응시하는 소녀에게 맞춰져있었다. 신나영, 팽 당했나. 아무렴, 노다지도 아니고 구태여 형의 사생활을 캐낼 의욕까지는 조금도 없다. 피식 조소를 흘린 신후가 사진을 도로 노트에 꽂으려다 불현듯 동작을 멈췄다. 여학생의 책상을 구르는 펜들도, 연습장의 겉장도, 창밖으로 너울대는 나뭇잎도, 프레임 안의 전부가 총천연색으로 뚜렷한 빛을 뽐내는데 소녀 혼자만 아무런 색이 없었다. 신후는 짧은 시간 그 메마른 잿빛에 잠식당했다. 아니……착각이야. 심령사진이라면 겁 많은 윤후 녀석이 지니고 있을 리 없겠지. 눈을 몇 번 감았다 뜨자 비로소 소녀의 피부와 의복과 눈동자 위로 겹겹이 색이 덧씌워졌다. 공부로 피로한 눈이 잠시 착시를 일으켰으리라 머리론 확실한 결론이 났건만 이상하게도 사진을 손에서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형체를 갖춘 의문을 지우지 못한 신후는 행여 그녀의 이름이 쓰여 있을까, 막연한 기대를 품고 사진을 뒤집었다.
<바보 이정우>
‘바보는 제가 바보면서 누구더러.’
근원모를 짜증을 윤후의 오만 탓으로 돌린 신후는 윗니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활짝 열려 속을 깐 노트 첫줄엔 벌써 친근해진 이름이 둥둥 떠다녔다. 곧은 의지는 엇나간 열망을 가둘 수 없었다. 신후가 표지에 바이올린이 누운 노트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단순히 그가 대면했던 어떤 난제의 답안보다 이정우가 궁금했을 뿐이다.
「‘아닌데.’하고, 어렵지 않은 부탁은 금방 받아들여 쓸데없는 다툼을 교묘하게 잘 피해 다니는 녀석도 가끔은 정색을 한다. 요컨대 그 의연한 성격에도 도무지 참아줄 수 없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같은 반의 여학생 한명은 유별나게 험담이 심하다. 누구누구는 화장실에서 나와 손을 씻지 않는다더라, 얼굴이 못나빠진 누가, 인기인 누굴 짝사랑한다더라, 누구는 몸가짐이 경박스럽다, 하는 맥락도 의미도 없는 이야기들을 끝 간 데 없이 떠들어댄다. 이 애만은 정우도 참을 수가 없는지 뱀 같은 혀에서 정우가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가 과장되어 나오면 두어 마디 경청하는 흉내를 내다가 ‘아닌데.’ 심드렁한 어조로 문장을 찢는다. 단호하면서도 심술이 느껴지는 정우의 일격에 험담을 특화한 그 여자 아이의 의욕은 발끝을 향해 수직강하 하다 간당간당 정강이에 걸린다. 정우가 구겨서 던져버린 여학생의 의욕을 수치화 하면 전부도 아니고 반도 아니고 팔 할. 담담하고 냉정한 듯 어깨에 각을 잡지만 중요한 부분에서는 기꺼이 져주고 마는 무른 이정우답다. 선사시대 청동검 같아, 너. 나는 미간을 찌푸린 정우를 보면서 웃음을 터트려 꼭 한소리를 듣는다.」
한 장, 두 장. 노트는 느리게 그러나 계속해서 다음으로 넘어갔다. 이윽고 소낙비 같이 세찬 호기심이 떠난 자리엔 심지 않은 씨앗의 싹이 돋아, 신후는 빗줄기에 흠뻑 젖은 어깨를 내려뜨린 채 스스로의 경솔함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이정우, 이정우, 이정우. 후회는 단지 후회로 머무를 뿐 마음의 시계를 역방향으로 돌리지는 못했다. 이튿날부터 신후의 몸에 든 해괴한 버릇이 그 증거로, 주변을 둘러보지 않은 무심한 걸음을 저벅저벅 옮기다가도 이정우 석자의 이름이 들려오면 오감이 소리의 출처로 향했다. 어깨가 대서양만치 널따랗고 하관이 푸르스름한 동명이인 남아 ― 이정우의 존재에 괜스런 역정을 내면서도 몰개성한 이름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었다. 망할 새끼, 저 혼자 좋을 일이지, 왜 나는. 사단은 윤후의 시선이 지나치게 맑고 따뜻한 까닭에 벌어졌다고, 열일곱의 신후는 오래도록 치졸한 변명을 읊조려야만 했다.
“죽도록, 후회했는데.”
간간히 일던 바람마저 멎어 호젓함을 넘어선 을씨년스러움이 교정에 드리웠다. 까만 머리 하나 없이 띄엄띄엄 희미하게 불을 밝힌 가로등만이 그나마 텅 빈 학교를 지켰고 아스팔트 대지를 딛는 낮은 발걸음 소리가 길동무로 그의 곁을 따랐다. 교사를 끼고 돌자 건물 뒤로 모습을 감추었던 운동장이 펼쳐졌다. 오른편 외진 자리에 하늘을 보고 높이 솟은 농구대가 신후를 맞았다. 까슬하게 올라온 돌기가 피부를 스치는 감촉과 팽팽하게 배부른 적갈색 농구공이 거칠게 흙바닥을 튕겨 오르는 소리가 생생했다. 신후는 세상에 대한 불만이 팽배한 소년처럼 양손을 주머니에 지르고서 껄렁대는 걸음걸이로 농구대에 다가갔다. 시야에 영사된 과거의 한 장면이 코트위로 어른거렸다. 노골적으로 공을 갈구하는 동료를 차갑게 외면한 채 지면을 차내어 몸을 사뿐히 띄운다. 이어 눈으로 오로지 링 위를 겨누어 오른 손목을 튕기면 이내 철썩, 링을 두른 그물이 파도치겠지. 입을 벌리고 늘어진 그물이 초라해보여도 내일이면 소년들의 유일한 목표로 격상될 테다. 애잔한 눈길이 농구대를 타고 흘러 키 큰 철골을 받친 하단부에 이르렀다. 아. 반가운 구체가 농구대 아래에 우두커니 놓여있었다. 시작이 시작되는 방식이란 통념에 기대어선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 날이면 날마다 발길에 채이고 바닥에 팽개쳐지는 구체로부터 신후의 지독한 외사랑이 비롯되었으니. 신후는 휘적휘적 걸어 나가 바람 샌 농구공을 두 손에 가뒀다. 드리블은 몰라도 슛은 할만하다. 그의 두 발이 수년 만에 모교의 옹색한 농구 코트를 밟았다.
‘어떻게, 잘 지냈니?’
‘……대충. 외화낭비하면서.’
‘아……나도 비슷해. 국고 축내고 있거든.’
‘교사?’
‘……허어. 내가 혹시 이 짧은 대화중에 널 가르치려 들었어? 어쩌나, 그렇게 티가 나면.’
슛을 쏘는 순간 눈앞을 스쳐가는 미소에 홀려 거리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다. 손끝을 떠나 짧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공은 링을 때린 뒤 맥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한 보가 모자라서 실패라. 신후는 나뒹구는 공을 챙기려 움직이지 않고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찾았다. 입술에 물린 담배에서 알싸한 맛이 묻어났다. 그래, 한걸음. 그만치 가까운 거리에 서면 정우의 귀걸이에 달린 나비 장식이 간헐적으로 요동치는 모양까지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음을 조금도 몰랐다. 검은 창공으로 피어올라간 연기가 뿌옇게 눈앞을 흐렸다. 연기 탓인지 목이 멨다. 신후는 필터를 거칠게 씹어 버렸다.
“망할 새끼, 그렇게 웃는 걸 네놈 혼자 쳐보고 있었냐?”
예전에 그랬다. 드물게도 정우가 웃으면, 몸은 그저 악기가 됐다. 심장은 초절기교곡의 음표를 쫓는 피아노 건반처럼 뛰어대고, 생각은 메트로놈처럼 휘청거렸다. 더러운 습관에서 벗어났다 오만하게 턱을 추켜든 지가 수년. 급작스레 치룬 시험에서 신후는 형편없는 점수를 얻었다. 제발, 윤후 놈 아닌 걸 알아채라. 아니, 그러지 마라. 절박함의 강도와 순도는 높아지기만 했다. 윤후 놈이 망할 새끼면 나는 개새끼지. 자조하는 신후의 귓가에 멀리서 가늘게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담배를 사며 내친김에 집어든 저희들 간식거리를 알고 아양을 떠는 모양이다. 교복치마 주머니 속에 항상 소시지를 구비하고서 경계태세로 털을 곤두세운 고양이를 살살 꾀던 이정우 때문에 별스런 짓을 다한다. 거듭 말해, 과연 예전에도 그랬다. 이정우의 행태를 예의 주시하는 신후에게 종종 정우의 관심사가 옮아오는 경우가 있어, 신후는 그가 전에 한번 눈길을 던지지 않았던 새로운 세계에 본의 아니게 끌려들곤 했다. 엉덩이 탈탈 털고 고교를 떠나버린 이정우의 어디가 예쁘다고 필름 카메라로 고양이를 찍어 인화한 사진을 졸업앨범 맨 뒷장에 기재된 정우의 집주소로 부쳤다. 네가 없는 학교엔 이만큼 꼬리가 길어진 고양이들과, 이렇게 물색없이 묵직해진 마음으로 네 자취를 뒤쫓는 내가 남아있다. 아마도, 너는 영영 모르겠지만.
“이만큼이면 다 닳아 없어진 줄 알았다, 젠장…….”
다음 주에 잠깐 만날 수 있겠냐는 정우의 문자메시지를 받고 정신이 멍했다. 윤후를, 다시 보고 싶었을까. 새삼스러운 절망감이 신후를 긁어내려 대범하게 그러마하고 긍정의 답을 송신할 수 없었다. 만약 배알 없이 수락했다간 마구잡이로 새끼를 낳아 아기고양이 부대로 학교의 밤을 점령한 이정우의 고양이들처럼, 가족계획 모르는 거짓말이 무수한 거짓말을 낳아 비대하게 불어난 무게로 신후를 짓누를지도 모른다. 부정적인 가정에도 불구하고 시계 들여다보듯 시시때때로 정우의 메시지를 읽는 한심한 자신을 야단치기 위해 신후는 무거운 발을 끌고 내키지 않는 산책을 나섰다. 교정을 밟고 과거를 되새기면 미련스럽게 이정우를 쫓는 소년 권신후의 등짝이 사랑의 매가 되어 정신을 번쩍 나게 할 거라 믿었다.
완전한 판단착오로군.
아직 덜 타들어간 장초를 구겨버린 신후는 날렵하게 몸을 놀려 한달음에 저만치 굴러간 공을 주워왔다. 농구대와 정면으로 선 신후가 농구의 신에게라도 기원하듯 공을 공손하게 양손으로 받쳐 올렸다. 살짝 굽혔던 무릎을 펴면서 양발로 바닥을 세게 구르자 다리가, 몸이, 풀썩 튕겨 올랐다. 유연하게 하늘을 가른 공은 가볍게 링을 통과했다. 결론은 진작 나있었는지도. 손끝을 맴도는 통쾌한 감각에 신후가 시원하게 웃었다.
그래, 이정우. 보고 싶었다.
가끔 잠 안 오는 밤엔 이런 날이 오면 어쩌지, 잡고 인사를 해야 하나 그냥 바라보다 말아야 하나 혼자 쓸데없는 고심을 하다 문득 정신을 차리곤 낯을 붉히며 민망해했을 만큼. 그러면서도 내가 모르는 곳에서 어른이 되었을 너에 대한 상상을 완전히 그만두지는 못했을 만큼. 그리고 그렇게 계속 그리워하느니 아예 원래 없었던 마음인 양 모조리 모른 척 했을 만큼.
“……권윤후, 네 첫사랑 좀 빌리자.”
친구들과 잘 다니던 모대학 앞 오뎅바에는 기묘한 글씨가 적힌 액자가 걸려있었습니다. 지하에 자그맣고 사람 적어서(...) 저와 친구들은 꽤 좋아라했던 곳이죠. 액자에 적힌 글귀는 무려 <직장인의 첫 꿈>. 굉장히 의미심장했는데 일년전 쯤 없어졌더라구요. 친구들과 아마도 두번째 꿈을 꾸러 갔다보다고 위로를 나눴습니다.
...음, 이번편은 간단히 신후 원맨쇼.(웃음) 있죠 근데 일요길 은근히 <신후의 유혹> 되지 않나요? 첫사랑에게 아웃오브안중이었던 권신후. 유학으로 자신을 담금질하고(하는 일은 아무튼 기업 사냥꾼) 돌아와 눈밑에 점을 찍고 제가 형인척 첫사랑을 꼬시는데 (왜 너는 나를 만나서어- )
다향님/시답지 않은 개그 포인트 알아주시면 저는 그냥 입이 헤벌쭉. 저는 정말 말장난하려고 글을 쓰는 게 아닐까요(...) 그리고 단편집은 언제나 예정이 먼 후일이에요(...) 이러다보니 <잊었노라>로 끝날지도.
위니님/ ...................네! 으허허 맨날 딱 20권 찍을거라고 외치는 단편집 세 번째 낙찰자(...)셔요. 다만 위와 같이 예정은 모른다는 거죠.
plum님/ 앗! 저도 잊고 있던 계절형제! 쓴지 정말 오래된 것 같은 이 기분. (그리고 내용의 허술함에 자다가 벽을 차고 싶은 이 기분....) 챙겨주셔서 감동입니다!
ssuny님/써니님 아이고 저처럼 마이너 취향이시군요. 에, 형제간 얽히는 거 싫어하시는 분도 많은데, 정말 얽힌다고 하기도 애매하지만 아무튼 이런 이야기에요^^ 오늘에서야 좀 내용이 정리 되실 듯.
지마님/앗, 그러시다면 저야 기쁘지요. ....제 글이 조금(많이)....건조하고 거칠잖아요. 좀더 섬세하고 감성적으로 달달하게 쓰고 싶은데 항상 이 모양이라 말이죠. 즐겁게만 읽어주신다면 그것 역시 저한테 선물이랍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