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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谷風無情不復來 골짜기에 불어오는 바람은 무정하여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잠행을 오는 동안 만난 직지사들에게 받은 장계위로 검은 먹은 춤을 추웠다. 같은 구절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해단은 이마를 짚으며 장계 위 맨 처음 글자를 다시 살폈다.
"얼마나 지났느냐."
해단의 뒤에 시립했던 내관은 천막을 걷고 하늘을 살폈다.
"두 시진 가까이 되었습니다."
이내 어둑해진 장막으로 해단의 뒷그림자가 길어졌다. 해단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는 복잡한 걸음을 감히 마주할 수 없던 내관은 고개를 돌렸다. 왕은 말을 많이 하는 성격도, 재촉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이따금 뜻 모를 하문으로 당황케 하는 적은 있어도 이렇게 조바심을 내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등을 타고 흐르는 진땀을 더 참지 못한 그는 허리를 숙였다.
"전하. 따로 기다리는 것이 있사옵니까?"
해단의 묘한 눈빛이 내관에게 닿았다.
"무슨 뜻이냐?"
해단의 가늘어진 눈매를 마주한 내관은 더욱 허리를 숙였다. 어느 사이에 왕은 내관의 바로 앞에 와 있었다. 내관의 입술이 쉽게 말을 올리지 못해 떨렸다.
"무슨 뜻이냐 물었다."
무표정한 눈에 성심은 가려졌다. 세월을 따라 깊게 파인 내관의 이마로 주름이 좁아졌다. 내관은 눈을 껌벅거리며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황송하오나 자꾸 시각을 하문 하시어. 소신의 생각엔 기다리는 바가 있으시다 생각하였나이다."
내관은 거의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대답하였다.
"그리 느껴졌느냐?"
되묻는 옥음에 내관은 살짝 고개를 들어 용안을 살폈다. 그를 내려다보는 용안은 묘하게 어두웠다. 도무지 살필 수 없는 왕의 심중에 내관은 더욱 당황하였다.
"예. 소신이 보기에.."
"잘못 보았다."
"예? 아. 소신이 감히 성심을 앞섰나이다. 용서하여주십시오."
"앞선 것이 아니라 잘못 보았다 하질 않느냐. 앞으로는 괜히 쓸데없는 말로 성심을 어지럽히지 말라!"
어느 사이에 감정이 흘러 넘쳤던 모양이었다.
겨우 하루 밤, 우연한 만남이었거늘.
아랫것들 눈에 띌 만큼의 마음이 기울었다는 것에 해단은 짜증이 났다.
내관에게 마음을 읽힌 것에 화가 난 것인지. 두시진이나 지나도록 소식을 전하지 않는 인규에게 화가 난 것인지. 애써 평정심을 찾으려던 심중은 더 어지러워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화를 식히려 해단은 거칠게 장막을 걷고 밖으로 나왔다. 당황한 내관과 무호사병들이 따라왔지만 해단의 시선은 멀리 묶인 흑우만을 향했다.
차라리 가슴을 어지럽히는 감정의 근본을 만나서 확인 하리라.
분명 다시 만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저 추운 산에 두고 온 것이 미안했을 뿐이지.
암 그것뿐이지.
고삐를 잡아 말에 오르려던 순간, 해단의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달라붙었다. 해단은 느리게 뒤를 돌았다. 숨이 턱까지 오른 채 달려온 인규의 얼굴은 알 수 없이 어두웠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해단은 피어오르는 궁금증을 접으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잘 다녀왔느냐."
"예."
짧은 답은 흐릿하기만 했다.
고삐를 쥔 해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말을 타고 가는 것 까지만 확인 하라고 했던 것은 그 자신이었다. 더는 알려 하지 말라던 것도 그 자신이었다. 사실 인규가 아닌 그 자신에게 한 말인데, 이제와 아니라 지울 수는 없었다. 망설임이 길어질 수 록 주변의 궁인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번져갔다. 해단은 낮게 일렁이는 가슴을 지그시 억누르며 고삐 쥔 손을 살며시 폈다. 마디마디 하얘지도록 꽉 쥐었던 손끝으로 열기가 스쳐 지났다.
"고생하였다. 그만 가서 쉬어라."
굳어진 인규의 어깨를 쏘아보던 해단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옥음은 평소처럼 차고 건조했다. 껄끄럽게 부딪히는 마음이 이제 깔끔하게 정리되었다고 생각을 정리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아주 만족스럽게 마무리 된 인연이라고 고개도 끄덕였다. 움직일 줄 모르던 인규는 시립하며 말을 올렸다.
"전하. 따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멀리서 살피는 터라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으나 필시 지난밤의 일이 문제가 되었던 모양이었습니다. 한 무리의 노복들을 이끌고 나타난 사내로 인해 깊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 사내는 여인의 주인처럼 보였습니다."
막사로 돌아가던 해단은 그대로 멈춰 섰다.
주인이라는 말에 해단의 몸 한구석이 뜨끈해졌다. 연에게는 남자가 있었는지도 몰랐다. 도망 나온 노예인지도, 그것도 아니라면 전쟁 포로인지도, 그러나 짐작한 것들 중 하나라 한들 이제와 그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인이라는 사람을 찾아나서 서국의 왕임을 밝히고 연을 달라 할 수는 없었다. 그럴 만큼 긴한 사이가 아니었다. 미와산에 머물던 마음만 잠깐 흔들렸을 뿐, 왕의 마음으로 되짚어보면 모른 척 하는 것이 맞고, 당연했다. 또, 그가 원한다 한들 연이 따라 나서지 않을 지도 몰랐다. 데려간다 하였을 때, 연은 분명 갈 수 없다고 얘기했었다.
깊은 고초를 당했다는 말에 솟아오르는 걱정을 애써 눌러 담으며 태연한척 해단은 뒤를 돌았다.
"죽었느냐?"
인규는 눈을 깜박였다.
"죽기라도 했느냐 물었다."
"예? 아! 아니옵니다."
"죽는 변고만 아니라면 되었다. 본디 그 자리로 돌아갔으면 그 뿐, 자세히 알 것도, 알릴 것도 없다."
인규의 얼굴이 난처함에 붉어졌다. 본 것을 고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인규는 마른 침을 삼키며 왕의 뒤를 따랐다.
"전하. 황송하오나 전하께서 살펴 들으셔야 할 일인 듯합니다."
해단은 숨을 내쉬며 인규를 쏘아보았다. 굳어진 용안에는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었다.
"더 들을 말이 없다고 하였거늘, 언제부터 그대가 과인이 들을 말을 정해 올렸느냐."
인규의 뒷머리가 따끔거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성심은 단단히 꼬여있었다. 이렇게 비틀려있을 때는 어떤 말도 듣지 않을뿐더러, 듣는다 한들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음을 잘 아는 인규였다.
"신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놈 저놈, 저마다 어림짐작하여 마음을 어지럽히는 구나."
쓰게 중얼거린 해단은 찬바람을 남기고 사라졌다. 남아 있는 인규와 내관들의 얼굴로 어두운 그림자가 퍼졌다. 짧은 시간, 잠깐 동안 보았던 왕의 들뜬 숨결은 꿈결인 듯 사라지고 얼음처럼 굳어져 범접할 수 없는 영기를 내뿜는 붉은 탈이 용안을 가리고 있었다.
"돌아갈 것이다."
어둑해진 장막으로 들어간 인규의 얼굴에 어지러운 생각이 번졌다. 태유소를 만나 봐야 겠다고 잠행을 한 것이 사흘이었다. 명일이면 그를 만날 수 있을 텐데, 굳이 돌아간다는 성심은 뜻을 짐작할 수 없었다.
"태유소를 보지 않으려 하십니까."
옥체는 아무 말도 없었다. 오랜 고요함을 깬 것은 장막으로 들어선 내관이었다. 상처를 봉합하기 위해 들어온 내관은 왕의 앞에 깊게 절하였다.
"앵속을 준비했습니다."
내관은 가져온 초록의 열매를 올렸다.
"그냥 하거라."
머리의 상처를 살피던 내관의 얼굴로 난처한 빛이 퍼졌다.
"상처가 깊사옵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라고는 하나 통증은 작지 않을 것입니다."
해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말을 올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내관은 긴 숨을 내쉬며 손을 움직였다. 옥체에 단단히 감아둔 붉은 끈을 풀자 찢어진 상처에 엉겨 붙은 피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내관은 끈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따뜻한 물에 적신 천을 들어 상처를 닦아냈다.
"누군지 알 수 없사오나 단단히 잘 묶어 두었습니다."
내관의 말에 해단은 살며시 눈을 떴다. 상처를 꿰매는 고통을 참으려 악물던 입술 사이로 저도 모른 웃음이 흘렀다.
"그런가?"
극렬한 통증을 참으며 말을 이어가는 것이 의아했지만 내관은 모른 척 하였다.
"예. 상처가 더 벌어지지 않았기에 옥체 면환하셨습니다."
"제법 총명해보이긴 했지."
한 참 후, 잘 꿰맨 상처 주변을 재차 확인한 내관은 한 걸음 물러났다.
"이제 끝이 났습니다."
비스듬히 누워있던 해단은 몸을 일으키며 옷가지를 손수 정돈하였다. 인규와 내관이 다가갔지만 해단은 손을 들어 그들을 물렸다. 용포자락을 묶은 해단은 황금색 어깨띠를 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만 물러가겠나이다."
내관은 양 손에 든 은쟁반을 들고 허리를 숙였다.
"수고하였다. 그만 물러가거라."
"아니, 잠깐! 멈추어라."
해단은 쟁반 위에 놓인 붉은 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왕의 시선이 머문 곳으로 내관과 인규의 눈길도 따라 흘렀다. 매끄러운 은색의 쟁반위에 피로 얼룩진 무명끈은 활짝 핀 꽃처럼 붉었다.
"저런 것은 어디에 쓰는 물건이냐."
멍하니 서있던 내관은 눈을 깜박였다.
"신은 잘 모르겠습니다."
인규도 뒤따랐다.
"신도 잘 모르겠습니다. 여인들의 물건인 듯한데..."
그들의 답에 해단의 입술이 가늘게 실룩거렸다.
"내관이야 그럴 수 있다 하나 그 나이가 되어서 인규, 그대는 참 딱도 하다. 머리카락은 장식으로만 있을 뿐 머리카락 하나 없는 승려와 같으니. 그대들에게 물은 과인의 어리석음을 탓해야지. 누굴 탓하겠느냐."
옥음이 길어질수록 내관과 인규의 얼굴은 붉은 끈처럼 발그레해졌다.
"이리 가져오너라."
내관은 쟁반을 올렸다. 해단은 손바닥에 끈을 내려놓고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궁금하시면 알아보겠습니다."
"아니다. 되었다. 끈이니 뭐든 묶는 것이겠지. 머리를 묶든, 옷을 묶든, 아니면 마음이라도 묶을 것이 아니냐. 손내관은 그만 나가보라."
내관을 물린 왕은 몸을 일으켜 장막 안을 걸었다. 몇 걸음 가지 않아 멈추고 다시 뒤돌아 걷는 걸음은 한동안 계속 되었다. 그 걸음에서 아무 암시도 받을 수 없는 인규는 가만히 기다렸다. 한참 만에 멈춘 옥체는 뒤를 돌았다. 무심결에 왕의 손을 살폈지만 붉은 끈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해가 지기 전 돌아가야 하니, 준비를 서두르라 하여라."
"성심을 짐작하지 못하겠나이다."
인규는 가만히 답하였다.
"다 같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대 입으로 사람은 다 같다고. 허니 태유소라고 해서 뭐 다를 것이 있겠느냐. 부귀영화를 탐내고, 권력을 더 오래 움켜쥐고자 열심이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터, 과인에게 힘이 있는 한 충신일 것이고 과인이 힘을 잃으면 역적이 될 것이고. 내 말이 틀렸느냐?"
옥체는 이곳이나, 성심은 이미 왕궁으로 돌아간 옥체를 느낄 수 있었다.
"틀리지 않습니다."
"태유소의 여식도 마찬가지다. 기왕지사 곱다면 과인으로썬 어두운 밤 잠깐의 기쁨이 배가 되어 고마울 뿐이지. 소중한 것을 두고 온 여인의 진심이 왕궁에 머물 리 없고, 진심 없는 여인은 품어봐야 과인의 것이 될 수 없다. 마음을 주지 않는 관계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겠느냐. 따져보면 여인들이나 나나 같은 처지다. 나는 그들을 가지기 위한 힘이 있어야 하고, 그들은 나를 얻으려 힘을 가지려 하고. 더 특별할 것도 없고, 덜 특별할 것도 없는 왕의 매일이 아니더냐. "
인규의 가슴은 회오리치는 바람으로 흔들렸다. 모든 기억이 뒤엉켜 또렷했다.
"진심이 있는 여인도 있습니다."
왕은 고개를 돌렸다.
"진심이 있는 여인도 분명 있습니다."
"과인은 왕이다."
인규는 눈을 깜박였다.
"왕이 아니라면 그런 여인을 만날 수도 있었겠지. 허나 왕의 곁에 그런 여인은 있을 수 없다. 있다고 믿는 것은 자유이나, 있지 않다는 것은 그대도 보질 않았느냐?"
싸늘한 옥음도, 비웃는 옥음도, 다그치는 옥음도 아니었다. 가슴 깊이 흘러나오는 성심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 성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왕의 말이 옳은지도 몰랐다. 그가 모시는 사람은 왕이고, 군왕의 길은 무릇 사내들과 다를 수밖에 없는 외로운 길이었다.
"잠깐 얼굴을 드러내고 바람을 맡고 달리는 동안 참으로 편안하였다. 왕의 무게를 벗어 던지고 보낸 하루는 꽤 신이 났다. 그것으로 충분한 휴식이었으니 이젠 돌아갈 것이다. 태유소를 만나 여식을 데려오는 것은 그대가 남아서 처리 하거라."
더는 올릴 말이 없는 인규는 긴 절을 하고 왕의 막사를 빠져나왔다. 아까 보았던 여인의 눈물이 진심이어도, 그것을 궁으로 데려갈 것인지 판단하는 것은 그가 아닌 왕의 몫일 터, 모른다 하겠다 마음을 잡는 그였다.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날 것이고, 만나지 못한다면 그저 옥체가 쉬며 달렸던 부서부의 들꽃 한 송이겠지.
인규는 바쁘게 짐을 꾸리는 무호사병들을 스쳐가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겨울 하늘에 어릿한 달은 그의 마음처럼 어지럽기만 했다.
이젠 더 이상 여린 왕이 아니구나. 비뚤어져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잘 알기에 차가운 것이구나.
손이 닿지 않는 먼 곳까지 홀로 간 왕의 길을 생각하며 인규는 체념을 배웠다. 어쩌면 오래 전 그날 받아들였어야 할 마음을 혼자서 부정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