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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약속대로 1월에 다음편을... (-┏;)
이 다음 편은 2월 말에 올라갑니다. 예정대로라면 3월에는 성실연재 (... 응?) 라는 걸 해서 4월 초에는 끝을 볼 예정입니다;;;
“내가 에린네 집 데릴사위로 들어가기로 한 건 알고 있지?”
“하는 수 없잖아. 블랑셰가는 남자가 가문을 이어나가는 구조니까.”
“그래. 조만간 난 마히르 블랑셰가 될 거야. 그리고 아키가 그걸 인정해 주었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아무 생각 없이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던 펜릴의 손이 잠시 굳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 유스타니아 가문이 전통적으로 약간 조혼 풍습이 있었다는 걸. 종종 조혼이 아닌 가주들도 있긴 했지만, 그건 괴짜인 그의 이모나 혹은 형제가 많을 경우에만 해당했다. 아키가 지금까지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건 집안에서 그다지 내켜 하진 않았지만 마히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키는 조만간 무도회를 열거야.”
마히르가 자신의 찻잔에 술을 두어 방울 떨어뜨리며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신축한 별관을 공개하기 위해 여는 무도회라고 하지만 사실은 틀려. 아키로서는 드물게 성대하고 화려한 무도회를 열거고 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을 많이 초대할 생각이야. 특히 ‘적당한 위치의 남자들’ 을.”
사실 이번 무도회를 열게 된 계기가 눈앞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남자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용케도 참고 있는 중이었다. 정확히 63번째의 꽃바구니와 청혼 카드를 받은 이후, 아키는 꽃을 돌려보내면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결혼할 때도 된 것 같아.”
스물아홉이면 적은 나이도 아니었다. 그나마 그동안 가문의 노친네들이 심하게 잔소리 하지 않았던 건 망나니긴 하지만 마히르가 있었고 여차 하면 그 쪽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가 결혼을 하게 되었고 이젠 그 쪽 가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정식으로 허락까지 받았으니 아키에게 가해질 압력이 상상이 갔다.
“생각하고 있는 남자가 있어?”
“요즘 재무성 일이 바빠서. 한 분기가 지날 때 마다 얼마나 분주해지는지 알고 있잖아. 몇 주 후면 한가해 질 테니까 적당히 사람을 볼까 해.”
마히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노친네들은 뭐라고 하셔?”
“몇 분 괜찮다고 추천 받은 사람들은 있어. 그렇지만 직접 만날 시간이 없어.”
두툼한 보고서를 살피며 밑줄을 그은 아키가 이마를 문질렀다. 주변의 서류더미를 본 마히르는 한숨을 쉬었다.
“노친네들이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아니군. 가끔은 쉬어가며 일 해도 괜찮지 않아? 계례 회의도 끝났는데 이렇게 매달리는 이유가 뭐야?”
“내버려두면 쌓일 뿐이야.”
아키가 간단히 말하면서 서류를 한 장 넘기고 몇 군데 표시를 했다. 이렇게까지 일에 파묻혀 있는데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이는 아키가 가끔은 신기하고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런 여자한테 63번째 청혼 카드와 꽃바구니를 보낸 남자를 생각했다.
“아키. 그냥 이렇게 거절하는 걸로 해결 될 거라고 생각해?”
“더 할 수 있는 일이 뭔데?”
대답할 말이 없었다. 돌려보내는 것으로 그녀의 의사 표시는 분명히 했고, 청혼하지 말라고 따지기엔 아키는 펜릴을 잘 알고 있는데다가 펜릴의 지위 문제도 있다. 그녀의 말대로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진지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난 진지하지 않다고 생각해?”
마히르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누이. 누이도 좀 진지하게 생각해 봐. 진지하다고 한 번만이라도 생각을 해 보라고.”
“진지하던 진지하지 않던 내 입장은 이게 다야.”
씨알도 안 먹히네.
마히르가 속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여자한테 청혼 카드를 63개 보낸 남자를 떠올리고 다시 고개를 젓고는, 바로 황태자궁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그리고 속으로 비실비실 웃으면서 예상 외로 민감해진 펜릴을 건드리는 흔치 않은 재미를 한껏 누리고 있었다.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한다라...
시종장이 가져다 준 계례회의 요약본을 읽는 도중에도 펜릴은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몰아낼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마히르가 말했을 때부터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는 게 맞았다.
아키텐의 나이 스물아홉. 결혼 적령기를 살짝 넘긴 나이였다. 대부분의 귀족 영애들의 결혼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이루어지는 것을 생각한다면 많이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게다가 가문의 수장이니 결혼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어찌 보면 지금 와서 생각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지금껏 왜 아키텐의 결혼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차분하고 무엇이든 해쳐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성격 때문이었나? 아니면 주변에 남자가 없어서 그랬었나? 그것도 아니면...
펜릴이 건성으로 종이를 한 장 더 넘겼다. 눈에 다음 회기의 예산 초안이 들어와야 하는데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만큼 그의 정신이 저 먼 곳을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마히르나 캐롤린의 말에 일리가 있어.
펜릴이 생각했다. 아키텐은 어디에 내놔도 꿀릴 신붓감이 아니었다. 유스타니아가의 수장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도 그녀는 스물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국가의 재산을 책임지고 있는 재무성의 엘리트 그룹인 1급 서기관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업무적으로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엷은 금발에 미안(美眼)의 총리라는 별명을 가졌던 어머니를 꼭 빼닮은 보랏빛 눈동자는 차분하면서도 뇌쇄적이었다. 외모에서 꿀릴 것도 없다는 거다. 거기다 크레이안 귀족가문 중 최고라는 유스타니아가의 가주이다. 능력 있고, 외모 있고, 게다가 집안까지 받쳐주고 있으니 모르긴 몰라도 그녀도 그에 못지않게 결혼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을 터. 게다가 자신과는 달리 싫은 일을 피해가려 하지 않는 그녀라면 분명 일찍 결혼을 결심했어야 옳았다.
이유가 뭘까?
그리고 왜 이제 와서 결혼을 생각하는 걸까?
지금껏도 잘 지내오지 않았냐 말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잘 지낼 수 있을 텐데.
생각이 여기까지 이른 펜릴은 흠칫했다.
어이. 너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확실히 그랬다. 지금 아키텐이 결혼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에게만 너무 유리한 것이다. 조금 더 자유를 가지고 싶었고, 그러려면 아키텐이 꼭 필요했으니까. 청혼을 계속 넣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청혼을 계속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아키텐뿐이었으니까. 적어도 앞으로 1년 정도는 결혼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언젠가는 결혼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아키텐의 결혼이 때가 아닌 것처럼. 적어도 그녀는 행복할 권리가 있었다. 좋은 남자를 만나서 행복할 권리가.
그건 그녀가 정하는 거야.
그의 마음 한 구석에서 무언가가 속삭였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그는 읽고 있던 서류철을 내던지고 말았다.
“제길.”
“뭣 때문에 신경질이야 오빠?”
캐롤린이 집무실로 들어와 서류철을 집어 들며 무심하게 말했다. 한 손에는 초대장이 쥐어져 있었다.
“뭐 이 밤중까지 서류철이나 봐야 한다는 것에 대한 신경질이랄까.”
“놀러다니지 못해서 서운해?”
“넌 내가 놀러다니는 한량쯤으로 생각되나 보구나.”
캐롤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생각해도 하는 수 없잖아 오빠. 요즘 내내 오빠는 아키 언니 ‘로’ 놀고 있으니까. 그리고 아키 언니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다음 달 초에 있는 유스타니아 저택 별관 증축 기념 무도회에 갈 생각이야?”
“응?”
“초대 못 받았어?”
캐롤린이 초대장을 흔들며 물었다. 펜릴이 동생의 손에서 나풀거리는 흰색 초대장을 빼앗듯 낚아채 열어보았다. 단정하고 차분한 문체로 무도회의 일정이 쓰여 있었다.
“자기 손으로 무도회 초대장을 쓰다니 아키언니 답지 뭐야. 엄청 귀찮은데 그 바쁜 와중에서도 초대장을 일일이 손으로 써서 부치다니. 그런데 초대장 아직 안 왔어?”
“내일 우편물에 끼어있겠지. 너랑은 다르게 난 하루에 한 번만 개인 우편물 확인을 하잖아.”
캐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런데 갈 거야 말 거야? 오빠가 같이 갈 거라면 파트너 신경 쓰지 않고 드레스를 가봉할 수 있거든.”
말인 즉. 그를 파트너로 해서 무도회에 갈 거란 뜻이었다. 사촌이자 크레이안 최고의 가문을 이끄는 가주가 오랜만에 여는 행사에 황실 식구가 한 명도 참석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파트너 찾기에는 어렵지 않지만 찾기를 귀찮아하는 캐롤린은 그와 같이 가는 행사에서는 그의 에스코트를 받고 싶어 했다.
“글쎄다.”
예전 같았으면 별 생각 없이 간다고 했을 것이다. 아키와는 그런 딱딱한 관계를 떠나서 친구고, 일처리가 능숙한 만큼 큰 행사도 매끄럽게 처리하는 아키의 수완에 내심 감탄하면서 파티를 즐기다 왔겠지. 하지만 이번엔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다음 달 초에 바빠?”
우아한 포즈로 무도회장을 누빌 아키의 모습이 잠시 뇌리를 스치자 그는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대답하고 있었다.
“아니. 갈 거야. 하지만 널 에스코트할 생각은 없단다.”
삽질이 필요한 태자님.
아키야~당장에 멋진 남자를 잡아버렷~!!!!!!!
태자님의 염장질을 해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