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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5편으로 계획중인 '크레이안의 유스타니아가' 시리즈의 마지막 되겠습니다. 길게 쓰는 재주는 없는 고로, 아마 중단편 정도 될 거 같구요; 너무 오래간만에 오기 때문에; 글도 상당히 오래간만에 한 번 업데이트 되겠습니다. 참고로 직장에서 할 일이 없어서 놀다가 올리는게 절대 아닙니다 (...)
그 날은 결혼식 날이었다.
"비가 오잖아."
곧 유쾌한 신랑이 될, 유쾌한 난봉꾼인 마히르 유스타니아는 창문 너머 퍼붓는 억수같은 비를 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에린이 불평을 할 거 같지는 않은데."
"내가 불만이라구. 도대체 새출발을 시작하는 이런 경사스러운 날에 웬 폭우? 게다가 에린의 예복은 어쩔거냐구."
"에린의 예복?"
"흰색이라구. 흰색이야. 흰색이란 말이지."
마히르가 고개를 까닥이며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흔들어보였다.
"사촌도 알겠지만, 우리 에린한테는 치마가 좀 안 어울리지 않아? 게다가 웨딩드레스 같이 나풀거리고 걷기 힘든 옷은 치명적이라고. 그래서 나랑 아키를 비롯한 몇몇 사람이 죽자고 말려서 결국 바지로 결정 봤어."
고뇌에 찬 기나긴 한숨을 내쉬며, 마히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흰색 예복이 아니면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야. 결혼식엔 흰색이라나. 도대체 그런 거지 발싸개같은 이론은 어디서 나온 거야? 그렇지만 난 그것까지 거절 할 순 없었어. 사촌도 알겠지만 에린이 무슨 색이든 잘 받지만 특히 흰색을 입으면 정말 끝내주지 않냐구."
입에 침이 마르도록 아내가 될 예비 신부 자랑을 늘어놓을 기세인 동갑내기 사촌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은 한심함 그 자체였다.
"뭐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렇겠지."
"그래서 굳이 말리지 않았는데 말릴 걸 그랬어. 알겠지만 사촌. 야외 결혼식 아니겠어? 이 비가 그친다 해도 땅이 마르려면 한참 걸릴텐데 이를 어쩌란 말이야? 말 좀 해봐 펜. 이런 건 황태자의 직권으로 어떻게 할 수 없냐고."
크레이안의 황태자이자 제 1 황자인 펜릴 카노아 크레이븐은 반 패닉 상태에 빠진 동갑내기의 외사촌을 보며 기나긴 고뇌의 한숨을 쉬었다. 마히르가 맛이 간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오늘은 더 최악이었다. 도대체 왜 결혼에 이렇게 목을 매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장차 마히르의 신부가 될 에린은 착실한 성격에 마히르가 그녀에게 목을 매고 있는 만큼이나 마히르에게 목을 매고 있었다. 서로 마음이 그렇게 통하는데 굳이 결혼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펜. 내 말 듣고 있어?"
"그래."
사실 이렇게 맛이 가기 전의 마히르는 배짱 좋고 넉살 좋고 감이 좋은 한 마리의 붙임성 좋은 여우 같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모험심 가득한 성격 덕에 왕실에서 비밀리에 지원해 주는 특수 단체인 '붉은 달에 꽃잎이 지는' 이라는 단체의 수장을 아주 제대로 맡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꽤 쓸만한 대장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랑이란 것에 빠져 헤롱거리기 전보다는 많이 무뎌져 있었다.
그래서 사랑 따위 쓸데 없다는 거였다. 쓸 만한 비밀 요원의 실력을 녹슬게 하고, 친한 친구를 진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만약 그가 결혼을 한다면, 사랑에 빠지지 않을 여자와 하고 싶었다.
"히르. 그냥 결혼을 미루는게 어때? 한 일주일 쯤 후로."
"죽고 싶어?"
"문서성 1/4분기 예산안 좀 부탁해요."
"각하?"
감색의 휘장이 휘날리도록 세차게 고개를 돌린 재무성의 10급 서기관은 놀란 얼굴로 뒤돌아보았다. 오늘은 헤렌의 날. 공식적인 휴일이었고, 눈 앞에 서 있는 주홍빛 휘장의 소유자는 지금 재무성의 썰렁한 복도가 아니라 성당에서 동생의 결혼식을 보고 있어야 했다.
"아직 준비되지 않았나요?"
"네. 그게 저."
이 유리알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재무성의 바다빛 제복이 잘 어울리는 여자는 재무성의 1급 서기관이었고 10급 서기관인 자신이 까마득하게 올려다 봐야 할 상관이었다. 게다가 소문에 의하면 일처리에 있어서는 철저한 편이라 했다. 그래도 설마, 동생의 결혼식이 있는 휴일에 일터에 나와 일거리를 요구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마 그녀의 상관들도 마찬가지였을 듯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어제 재무성은 불붙은 듯 생난리가 났을 것이다.
"분명 다음주에 있는 계례 원로원 회의 때 장로분들이 납득할 만한 결과를 들고가야 한다고 말씀 드린 듯 한데요."
물론 그랬다. 그러려면 내일까지 일을 마쳐야만 했다. 설마 그것 때문에 동생의 결혼식을 건너뛰고 일터로 뛰어들었단 말인가?
"아. 이미 6급 회의까지 진행이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도대체 왜. 하필 자신이 당직일 때 이 사람을 마주쳤어야 했던 것일까? 말단의 서기관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비오는 날 당직으로 출근한 것도 서러운데 일하러 출근한 상관을 맞이하고 거기에 더해서 꼭 일을 할 분위기이니 혹사당할건 뻔할 운명인 것 같았다. 말단의 서기관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서류를 찾으러 돌아섰다.
"비상 연락망을 가동시켜서 6급 이상 모두 출근하게 하세요. 6급 이상 서기관들이 모두 출근한 것을 확인하시면 퇴근하셔도 좋습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상관이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사람이 있는데 당직이 있을 필요는 없고, 6급 이하로 일처리가 모두 끝났다면 휴일에 나올 이유는 없으니까요."
말단의 서기관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에 대해 바늘 끝도 안 들어갈 만큼 철저하긴 하지만 쓸데없는 자원 낭비는 하지 않는다. 라고 비아냥 거렸던 직속 상관의 투덜거림이 떠올랐다.
"그리고 각하라고 부르지 마세요. 이곳은 직장입니다."
"네. 각... 아니 유스타니아 선임 서기관님."
"그럼 6급까지 진행된 1/4분기 문서성 재무 자료를 부탁드립니다."
제복의 모자를 벗으며 아키텐 프로미넌스 유스타니아가 피곤한 어조로 말했다. 헤렌의 날.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동생은 오늘 결혼을 할 예정이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가 볼 필요까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