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2.

휘익 둘러보면 스무 동이나 되는 아파트에 바글바글 사는 사람들이 어째 서로 알고 지낼까 싶다. 그렇지만 들여다보면 볼수록 엉킨 파마머리처럼 떼어놓기 힘든 것이 인간관계이다. 한 자리에서 오랫동안 희야 살롱을 운영해 온 홍선희를 아는 사람이 많은 만큼 근처의 새날교회 여전도회장인 조숙자를 아는 사람도 많고 그 두 무리의 교집합도 상당히 컸다.
한참 홍선희가 남편 김주양 때문에 속을 썩일 무렵이었다. 바쁘게 일 하다가 미용실 바닥을 발발 기어 다니는 소영이를 안아 올린 선희는 서러움에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의자에 엉덩이 붙일 사이 없이 힘들게 일해도 똑똑한 딸아이 인영이 과외를 시켜주지 못한 처지였다. 게다가 소영이를 맡아주었을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기일이지만 시간이 없어 묘소를 찾지도 못하는 처지가 원망스러워 엉엉 울어버렸다. 그런 그녀를 본 단골손님 윤정이 엄마는 새날교회 전도주간이 돌아오자 인영이 어머니 교회 나오시라며 졸라대었다.
평생 무교로 살아온 선희는 얼떨결에 교회에 나갔다가 승훈의 작은 고모 조숙자를 만났다. 희야살롱에서 머리를 하지는 않지만 간판은 자주 봐서 알고 있던 조숙자는 선희를 반갑게 맞으며 금요일이면 자신의 집에서 드리는 구역예배에 참여하라 했다. 문제는 선희가 첫 구역예배를 끝내고 커피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아무리 아이 엄마라고 하지만 선희는 스물에 인영이를 낳았기 때문에 인영이 학교 친구들의 어머니보다 최소한 대여섯 살 어린 편이었다. 거기다 이제 서른 초반인 그녀는 어릴 적의 미모 그대로였다. 늦게 결혼해서 큰 아이가 스물이었으니 쉰을 바라보는 조숙자는 방에서 혼자 텔레비전을 보기 마련이던 남편이 거실에 나와 커피를 같이 할 때부터 가재미눈을 떴다. 그 다음주, 이십년을 전도해도 너나 교회 가라던 남편이 머리를 곱게 빗고 구역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하자 그녀의 의심은 구체화되었다. 늘 이발소에 가던 그녀의 남편은 갑작스레 미용실에 가봐야겠다며 너스레를 떨었고, 조숙자가 홍선의의 오입장이 남편이 돈을 족족 날려먹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어도 젊은 사람이 고생한다며 오히려 선희의 편을 들었다.
그래도 다른 구역으로 보내면 끝날 일이었다. 김주양의 어머니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내 아들 어디로 갔는지 찾아내라고, 네 독한 딸년까지 다 싸잡아 죽여 버리겠다고 덤비는 할머니가 희야 살롱에 쳐들어왔다. 늦은 저녁 시간까지 남아있던 손님 한둘이 말려도 김할머니는 선희의 머리를 움켜잡고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때 마침 퇴근길이던 조숙자의 남편은 허둥지둥 차를 세우고 내려 선희를 구조해주었다.
열시가 넘어 집에 돌아온 남편을 심문해 알아낸 조숙자는 분함에 다른 이야기는 듣지도 못했다. 그녀는 선희가 얼마나 그 할머니에게 두들겨 맞았는지,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관심이 없었다. 왜 그녀의 남편은 하필 그 골목 앞으로 차를 몰았는지, 왜 남에 일에 끼어들었는지, 왜 경찰서까지 쫓아간 건지 알고 싶어할 뿐이었다. 열아홉의 어린 나이에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했던 선희 사정은 알 바가 아니었다. 이혼해 줄 테니 2천만원을 마지막으로 해 달라던 김주양에게 돈을 해 주고 이혼 도장을 찍은 지 몇 달이 지나 그 소식을 듣고 올라온 김주양의 어머니가 무슨 패악을 치든 그건 이혼녀 미용실 아줌마 얘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에게 꼬리 친 순간부터 홍선희는 풋풋한 새신자에서 미용실 꽃뱀아줌마로 전락했다. 그렇지만 아내의 분노를 잘 이해하지 못한 남편이 불쌍한 여자 홍선희를 왜 못 잡아먹어 안달하냐 한 마디를 잘못 내뱉지 않았다면 홍선희가 조숙자에게 머리끄덩이를 잡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시어머니에게 얻어맞고 머리 뜯긴 흔적이 아직 뚜렷하게 남은 홍선희는 그 다음날 그녀의 미용실로 들어닥친 조숙자에게 붙잡혔다. 이 여우같은 년을 죽이니 살리니 해 대던 그녀는 중학생 인영이가 미용실 안으로 들어오자 잠깐 멈칫했다. 인영이는 잠자코 조숙자와 어머니 홍선희를 바라보다 가방을 내려놓고 조숙자에게 물었다.
“아줌마, 우리 엄마가 뭐 잘못했어요?”
조숙자는 맹랑한 꼬마의 질문에 마구 악을 써댔다. 네년의 어머니가 화냥년이다, 남의 가정 찢어놓고 어찌 잘 되나 보자, 네가 그렇게 행실을 제대로 못 하니까 니네 남편도 떠난 거다 등등을 쏟아내었다. 들어가라는 어머니의 손짓을 무시하고 가만히 서 있던 조숙자에게 인영은 차갑게 내뱉었다.
“아줌마, 그 말 다 책임 질 수 있어요? 저랑 같이 경찰서 가실래요?”
그 즈음 되어서 조숙자의 남편이 벌써 손님과 구경꾼들로 복작거리는 희야살롱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조숙자가 잡아들었던 홍선희의 멱살을 놓고 어린 인영이의 뺨을 거세게 때리고 홍선희가 얻어맞은 인영이를 감싸 안았을 때에 조숙자는 그녀의 남편에게 팔을 이끌렸다.
“놔요! 저 쪼끄만 게 아주 딱 제 엄마 닮아서, 뭐 저런 게 다 있어!”
뺨을 세게 얻어맞아 입술이 터진 인영이는 기하나 죽지 않고 고개를 꼿꼿이 들고 조숙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줌마나 그렇게 살지 말아요.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주제에 어디 엉뚱한데 와서 화풀이하고 지랄이야?”
“인영아!”
홍선희가 놀라 인영의 입을 손으로 덮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아저씨! 이 아줌마 빨리 수거해가세요.”
인영이는 싸늘한 한 마디로 상황 종료시켰다.

그 날 저녁, 인영이는 그녀를 혼내려는 어머니에게 오히려 대들었다.
“왜 울어? 왜 그런 소리 듣고도 그냥 가만히 있어? 그런 취급 받고 살고 싶어? 엄마는 그럼 끝까지 그렇게 살아!”
조숙자 앞에선 아주 당당하게 말도 잘 하던 인영이는 발악하듯 소리를 지르고는 제 풀을 못 이겨 바닥에 쓰러져 마구 통곡을 시작했다.
몇 주가 지나서인가, 몇 달이 지나서인가, 홍선희는 큰딸 인영이에게 왜 그날 대들지 않았는지를 띄엄띄엄 설명해주었다. 그녀가 스물둘 되던 해에 남편 김주양과 바람피운 술집여자를 찾아내었다. 감히 술집여자 주제에 내 남편을 넘보았다고 징그럽게도 욕을 퍼부어주고 머리채를 붙잡을 때는 몰랐다고 했다. 서른 초반의 예쁘장한 이혼녀였던 그 바람녀는 주양씨를 사랑한다고, 그래서 그랬지만 정말 잘못했다고 빌었단다. 그래도 내 남편을 넘보았다는 분함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괘씸하게도 사랑이니 뭐니 타령해대어서, 서럽게 우는 그 여자를 원 없이 패주었다고 했다.
그 때 그 여자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자신이 조숙자에게 머리채를 붙잡혀서야 알게 되었다고 홍선희가 중얼거렸다. 서른 초반에 이혼녀 딱지 달고 살기가 요즘도 참 살기 힘든 세상인데, 본부인 앞에서 아무 할 말 없는 그녀가 얼마나 서글펐을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고. 천하게 못쓸 남편이라도 남편이 있는 쪽이 낫다는 사실이, 이혼녀는 다 제 남편 넘본다는 여자들을 만날 때마다, 이혼녀는 조금만 잘 해줘도 금방 홀라당 넘어올 거란 남자들을 만날 때마다 뼈저리게 느낀다고. 그렇지만 인영이가 무슨 소리라도 들을까 두려워서 섣불리 싸우지도 못하겠다고.
인영이의 대학발표가 나던 날, 홍선희는 얼음으로 굳어진 눈밭 위에서 십년이 넘은 자주색 털장갑을 낀 두 손으로 인영이를 껴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엄마처럼 안 살아서 고맙다고, 공부 잘 해서 너는 제발 당당하게 살라고 부탁하며 울었다. 그리고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인 소영이는 언니 옆에서 마냥 좋다고 손뼉을 치며 웃었다.

3.

매일매일이 즐겁기만 하던 소영에게도 사춘기의 마수가 뻗쳐왔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소영이는 엄마가 언니에게만 좋은 걸 다 물려주었다고 곧잘 투덜대었다. 꼭 뜯어보자면 인영이가 소영이보다 훨씬 더 예쁘거나 그렇진 않았다. 그러나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살도 많이 빠져서 얼굴형이 갸름해지고 옷차림도 아가씨인 인영이를 중학생 소영이에 비교하면 안 되는 거다. 중학교 1학년생 소영은 굵은 뿔테 안경에 단발머리를 더한 패션이었고, 키는 작달막한데다 얼굴살까지 최고로 탱탱하게 올라있었다. 제법 오똑한 콧날과 시럽으로 코팅된 것 같은 빨간 입술은 통통한 볼 살에 묻혀버렸다.
아무리 소영이 언니만 예쁘게 낳아주었다 불평 해대어도 인영이 오히려 소영이를 부러워했다. 정말 엄청나게 먹어대는 소영인데, 얼굴로만 살이 가지 팔다리는 늘씬했고 예의상 한 줌은 잡혀야 하는 똥배도 없었다. 저주받은 하체의 대표격인 인영은 혹독하게 살을 빼도 움직이지 않는 아랫배와 허벅지에 한숨을 푹푹 쉬면서 밤 열한시에 치킨을 뜯어먹는 소영을 마구 노려보곤 했다. 그것도 모자라 중학교 2학년이 된 소영은 살이 잘 붙는 부분이 또 하나 생겼다. 가슴. 비컵이라고 우기고 싶어 하나 사실 에이컵으로 충분한 인영은 중학교 2학년 1학기에 벌써 비컵을 넘치게 채우는 소영을 콕 쥐어박곤 했다. 어디 건방지게 언니 앞에서 비컵 브라를 살 수 있느냐 하면서 말이다.
소영 본인에게 사춘기가 언제 시작되었냐 묻는다면 예쁜 언니에 대한 질투와 같은 반 반장 기준이에 대한 짝사랑이 스르륵 모습을 드러내었던 중학교 3학년이라고 할 것이다. 알바니 뭐니 헛소리 하지 말고 용돈 줄 테니까 공부나 하라던 언니의 엄명을 어기고 여름방학에 기준이의 친척분이 하는 햄버거집에서 알바를 시작한 것도 기준이에게 조금 더 가까이 가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여름방학에는 기준의 코빼기도 볼 수 없었지만 겨울방학에는 기준이가 확실히 그곳에서 일 할 거라 했고, 마침 딱 타이밍 맞춰 시력이 떨어져 준 덕에 소영이는 속눈썹이 눈을 찌른다고 석주를 밤낮으로 불평해 대어 쌍꺼풀 수술까지 했다. 알바 시작하면서 짜잔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일 년 동안 고이 간직해 온 연심을 고백하리라 다짐했던 소영은 첫날부터 엄청난 경쟁상대와 마주쳤다.
“어머, 너 눈 수술했구나?”
퀸카로 이름을 날리는 최수정이었다. 예쁜데다 공부까지 잘하는 싸가지 없음으로 부반장을 맡아 기준과 잘 어울려 다니긴 했으나 설마 같은 곳에서 알바까지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었다. 아름다운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기준과 첫 키스를 나누는 환상이 와장창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기준아, 이리 와 봐. 소영이 눈 수술 했어.”
“어, 정말 뭔가 달라 보인다 했더니, 눈 수술 했구나. 예쁘다.”
기준이 해사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립써비스에 불과할 지라도 기분 좋은 건 좋은 거라 소영이는 속없이 방실 웃었다.
“그런데 소영아, 너 눈두덩에 지방 많아서 절개법 해야 하지 않았어? 의외로 상처는 좀 안 남았는데, 붓기는 안 빠졌구나. 빠지면 좀 자연스러워 보이겠지.”
예쁜 애들 중에는 일부러 잔인하게 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안 예쁜 여자들의 고충을 모르기 때문에 개념 없이 잔인해지는 애들이 있었다. 바로 최수정이가 그랬다. 나름대로 칭찬한다고 하는 말이었으나 소영이는 좋아하는 기준이 앞에서 한없이 낮아져버렸다.
“어이, 뭘 모여서 놀고 있어? 손님 오셨잖아.”
햄버거집 주인 박사장이 소리를 빽 질렀다. 기준과 수정, 소영은 금세 해체하여 제자리에 복귀했다. 그리고 카운터를 맡은 소영은 키가 훌쩍 큰 남자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네었다.
“안녕하세요. 뭐 주문하시겠어요?”
“......”
그 남자는 메뉴판을 볼 생각은 하지 않고 소영의 얼굴만 빤히 들여다보았다. 워낙 사고가 긍정적인 소영이라 방금까지의 굴욕은 잊어버리고 이 훤칠한 남자가 나에게 반했나, 역시 눈 수술은 효과가 있었나 착각했었다. 그 남자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
“눈 수술했네.”
“네? 네. 눈, 눈꺼풀이 자꾸 눈을 찔러......”
“안 하는 게 더 나을 뻔 했다.”
“네?”
“너, 종규 친구잖아. 몇 번 봤는데, 그냥 실눈이 더 예뻤어.”
그러고 보니까 초등학교 친구 종규네서 한두 번 마주친 적 있는 남자였다. 머리 스타일이 확 달라졌고 안경을 낀 데다 옷차림도 양아치스러워 못 알아본 거였다.
“......뭐 주문하시겠어요?”
그런데 왜 반말하세요 하고 따지려던 소영은 손님이란 것을 상기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야, 너 진짜 수술 안 하는 게 더 나을 뻔 했어.”
“네. 주문하세요.”
“안 했을 땐 눈꺼풀이 이렇게 부어서......”
아무리 성격이 좋다지만 좋아하는 남자가 왔다갔다거리는 상황에서 외모 가지고 그렇게 뭐라 하는 남자에게 끝까지 착하게 굴 여자 없다. 소영은 아이라이너 때문인지 따끔따끔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손님, 알았으니까 주문하세요.”
“아, 미안. 화 난 거야?”
그가 멋쩍어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새빨간 입술을 자근거리는 꼴을 벌써 보았을 것이다.
“주문하세요.”
“치즈버거 한 개 줘. 너 이름이 뭐야?”
“그러는 댁은 누구세요?”
성격이 정반대라고는 해도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사는 언니이니까 인영의 말투가 묻어날 때가 있었다. 흔하지는 않은 일이지만 소영이가 신경질이 나면 특히나 그랬다.
“나, 조승훈. 너는?”
언니에게 제대로 배웠다면 더 싸가지 없게 한 마디 했을 텐데, 승훈의 부드러운 웃음에 소영은 그만 녹아버렸다.
“김소영.”
어쩔 수 없는 푼수 끼로 소영은 방긋이 웃었다.
“너, 종규랑 같은 반이면 나랑 같은 연도겠구나. 나 2월생이라서 1년 일찍 들어갔거든.”
“어? 나 3월 4일 생일.”
“며칠 차이 안 나네. 나 2월 22일.”
“치사하다. 그래도 일 년 앞서니까 오빠네.”
소영이는 손님이란 건 잠깐 잊고 말꼬리를 잘라먹었다. 승훈이 피식 웃으며 돈을 내밀었다.
“치즈버거 한 개 줘,”
“응.”

햄버거집에서 마주치기 한참 전에 승훈은 소영이의 얼굴 모형을 만들어 보았었다. 너무나도 동그랗게 생긴 아이의 생김새가 쉬이 지워지지 않아서 둥그런 찰흙 덩이에 손톱으로 실눈 둘을 찔러 넣고 킥킥 웃기도 했었다. 웃을 때엔 아예 없어지던 그 통통한 눈두덩이 대신에 부기 때문에 좀 어색한 댕그란 눈이 생긴 소영이지만 두터운 볼 살은 여전했다. 치즈버거를 시켜먹고 집으로 돌아간 승훈은 방문을 잠그고 연습장을 꺼내어 동그란 얼굴을 그려보았다. 달덩이 같은 얼굴에 약간 휘인 눈썹, 쌍꺼풀 때문에 뒤집힌 반달 모습이 된 눈 아래는 애교 살을 그려 넣었다. 소영이는 생긴 거 자체가 만화 캐릭이었다. 단발머리를 사납게도 잡아 묶었으나 꽁지는 5센티도 채 되지 않았고 애써 얼굴형을 가린다고 내린 머리카락이 어색했다.
소영이를 그려보았던 두툼한 미색 연습장은 원래 수학 문제풀이집이었다. 중간쯤에 처음 그려본 그림은 그 겨울방학 동안 한 장 한 장 계속 늘어갔다. 딱히 소영이가 예뻐서라기보다 - 예쁜 걸로 치면 그릴 여자는 많았다 - 그리고 나면 제일 실물에 가까운, 그리기 쉬운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게 나야?”
이주일이나 지나고 나서 승훈은 매일매일 찾아갔던 햄버거집에서 소영에게 스케치 하나를 내밀었다. 너무 적나라하게 그린 건 좀 그렇지만 만화식으로 귀엽게 그려주면 좋아할 것 같아서 그렇게 그린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잘 그렸다는 칭찬은 아니라도 신기하다며 좋아할 줄 알았던 승훈은 소영의 일그러진 얼굴에 조금 당황했다.
“응.”
승훈은 그녀에게 넘긴 스케치를 다시 슬쩍 훑었다. 통통 부은 볼과 꽁지 머리, 교목차림이 딱 소영 그대로였다. 캐릭터 식으로 그리느라 볼살을 좀 과장하고 다리를 짧게 그리긴 했다.
“......”
“맘에 안 들어?”
승훈은 소영의 기색을 살피다가 잠바 주머니에서 지점토 인형을 하나 꺼냈다.
“이것도 만들었는데.”
“꺄악! 승훈오빠 이거 너무 예쁘다!”
수정이가 호들갑을 떨면서 끼어들었다. 그 난리에 부엌 뒤에 있던 기준이도 뭐냐뭐냐 하면서 튀어나왔다.
“와! 정말 딱 김소영이네! 너무 똑같다. 하하하하.”
“뭐가 똑같아!”
소영이가 소리를 빽 질렀다.
“아냐, 똑같은데? 눈 수술한 것만 빼고, 수술하기 전 얼굴 딱인데 뭘.”
소영이가 아직 붓기가 가시지 않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면서 수정이가 붙잡은 스케치를 확 뺏어들며 돌아섰다. 승훈은 조금 난처해진 채로 지점토 인형을 조몰락거렸다. 그걸 본 수정이가 또 다시 꺄악 소리를 질렀다.
“오빠! 나 좀 보여줘요! 아 너무 예뻐!”
“이거?”
“줘봐요. 어머어머, 너무 귀엽잖아!”
가만 두면 아주 거품을 물고 넘어질 폼이었다. 승훈은 뒷머리를 긁으며 찬장 뒤로 소영이의 모습을 찾았다.
“아하하하. 오빠, 근데 소영이 얼마나 늘씬한데 이렇게 난장이 똥자루로 만들었어요!”
“아, 좀 만화 캐릭터 비슷하게 만들고 싶어서.”
수정이의 질문에 승훈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너무 예뻐요. 이거 나 가져도 돼요?”
“흠?”
“나 가지고 싶어요.”
“그래.”
“저, 소영이 그린 그림도 있어요?”
“응. 왜?”
“나 그것도 몇 개 줘요.”
수정이가 눈을 반짝이며 졸라대었다. 부엌 안에서 뭔가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좀 불안해진 승훈은 눈치를 보면서 가방에서 연습장을 꺼내었다. 낚아채듯 잡아든 수정이가 연습장 안 스케치를 탐욕스럽게 들여다보았다. 기준이는 불안함에 안절부절 못 하더니 결국 부엌 안으로 홱 들어갔다.
“와, 오빠 정말 잘 그린다. 나 이거 가져갈래. 몇 개 골라도 돼요?”
“응. 맘대로.”
예쁜 아이치고는 참 털털하고 시원시원한 수정이가 고맙다며 몇 번을 인사를 하고 열 장이 넘는 스케치를 부욱 찢어내었다.
“헤헤. 너무 만화같이 그려서 소영이가 안 좋아한 거예요. 소영이 좀 예쁘고 늘씬하게 그려주면 훨씬 더 좋아할텐데. 그렇게 하나 얼른 그려보지 그래요?”
이상한 아이였다. 승훈은 수정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면 나 하나 줘요?”
“너도 그려줘?”
“아, 저도 그려주시려고요?”
“그려달라면.”
“오빠 편한대로 하세요.”
수정이가 방긋 웃었다. 승훈이는 그런 수정이는 무시하고 다시 한 번 찬장 뒤 부엌을 흘끔 들여다보았다. 사과해야 하나 망설임 속에는 섭섭함이 약간 섞였다.
어쨌든 찐빵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아. 길다. 많이 빡빡하기도 하지요? 흠;

댓글 '5'

핑키

2007.08.24 00:27:42

여심을 너무 모르는 승훈이~^^

하늘지기

2007.08.24 10:50:08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대로만 보는 사람들이 넘 많아..

박재희

2007.08.24 11:05:29

저는 수정이라는 친구에 대해서 궁금해지기 시작했어요....

띠야

2007.08.24 13:05:46

그러게요..저도 궁금하네요..수정이라는 친구...
바보 승훈~

Cindy

2007.08.24 17:21:58

예쁘고 공부잘하고 성격까지 털털한 완벽한 그녀 수정이에게도 없는 것이 한가지 있었으니 바로 눈치로군요.. 소영이가 싫어하는 걸 뻔히 알면서 왜 거기서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네요.. 쯧..
그리고, 승훈이는 소영이에게 제대로 찍혔겠는데요.. 벌써 두번째잖아요.. ㅎㅎ
그나저나...
저는 갠적으로 소영이보다는 까칠한 인영이 쪽이라서(예쁘고 똑똑한것도 비슷하면 좋을테지만;;;;) 그런지 소영이가 사춘기를 기점으로 조금은 언니를 닮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인영이도 사랑을 하게되면서 동생과 약간 닮아갔으면 좋겠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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