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26




아드리안은 예나의 입술이 마치 예나의 온몸이라도 되듯이 탐했다. 얇은 윗입술을 핥고, 도톰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입술이 맞물린 사이로 들어가 달콤한 혀를 맛보고, 부드러운 입 안을 두드렸다. 거칠게 이빨을 부딪치며 돌진했다가, 다시 물러나면서 달랬다. 그 모든 과정이 달콤하고 달콤해서 놓아 주기 싫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팔을 목에 감고 자신에게 답하던 예나가 힘을 잃고 몸이 아래로 처지자, 입술을 떼고 얼굴을 볼 수밖에 없었다. 예나는 볼이 발갛게 되어서 넋을 잃은 듯 부끄러운 눈으로 아드리안을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에 아드리안은 다시 예나를 안을 수밖에 없었다. 웃음이 나왔다. 곧 정신을 차린 예나가 원망하듯이 어깨를 두드렸다.


“왜 그래, 왜 웃어!”


해결된 건 하나도 없는데도, 그저 네가 눈 감고 넋을 잃은 얼굴만 봐도 좋아서, 그 얼굴을 보면 내가 넋이 나갈 것 같아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너를 안아 버릴 것 같아서, 그 오랜 시간 동안 보지 못한 만큼, 안지 못한 만큼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정말 바보 같게도, 이런 상황에서조차 네 얼굴만 보면 웃음이 나와서. 마음속에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이유가 떠올랐지만 왠지 목이 메어서 아드리안은 한마디밖에 하지 못했다.


“예뻐서.”


그 말을 듣자 잠시 예나의 눈이 커지더니 눈꼬리가 처지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본인은 그걸 눈에 보이지 않으려고 몹시 노력하면서 태연한 얼굴을 유지한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불행히도 다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드리안은 다시 비직비직 웃음이 배어나왔다. 예나는 크게 선심을 베푼다는 듯이 아드리안을 흘겨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럼 용서해 줄까…….”


“부디.”


사실은 용서받지 않아도 상관없었지만, 사실은 미움받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알았지만 아드리안은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렇게 대답하는 자기 얼굴에도 절실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웃음만 넘쳐서, 예나가 보기에도 뻔하기만 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니나다를까, 예나는 그런 아드리안을 빤히 보더니 갑자기 뺨을 쥐고 세게 꼬집었다.


“으웃, 왜 그래?”


“너무 딴 사람 같잖아.”


예나는 깊게 가라앉은 속에서 고요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아드리안의 눈을 쓰다듬고, 잿빛으로 가라앉았던, 지금은 불그스레하게 피가 도는 듯한 그의 뺨을 꼬집고, 세상에 다시없을 다정한 미소로 완전히 달라진 입술을 매만졌다.


“정말 이 사람이 처음에 악마처럼 보이던 그 사람인가, 못 믿을 정도라고.”


“너도 그때 뺨을 때리고 도망가 버리던 그 아가씨로는 보이지 않는데.”


“왜 그렇게 못 되게 굴었던 거야, 그때는?”


아드리안은 슬금슬금 다시 예나의 허리로 손을 가져다 대고, 예나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거부감 없이 끌려오면서도 예나는 대답을 하라는 강요가 담긴 눈으로 아드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짐짓 예나의 눈을 피하던 아드리안은 들릴락 말락하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예나는 아무 말하지 않고 그저 손을 귀에 갖다 대고 얼굴을 아드리안에게 들이댔다. 아드리안은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 외면하더니, 결국 견디지 못하고 나지막이 말했다.


“보석은 혼자만 보고 아는 거다.”


“그게 무슨 소리야, 도대체?”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를 것 같았다. 예나는 다시금 조르듯이 아드리안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눈으로 졸라 댔다. 어서 더 말해 보라고.


“남이 못 보게, 나만 알게, 남이 보고 샘내거나 뺏어가지 못하게……. 귀한 보석은 귀한 티를 내면 안 된다.”


그렇게 말하면서 아드리안은 손등으로 예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마치 귀신이 잡아가지 않도록 너무 예쁜 아이는 못 생긴 것처럼 꾸미고 귀한 아이는 일부러 이름을 늦게 지어 준다는 것 같은 이야기라, 예나는 잠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지금 아드리안의 웃음이 넘치는 눈길이라든가 짜릿짜릿할 정도로 부드러운 손길에서 느낄 수 있었다. 예나는 그 눈길이 너무 아파서, 그 손길이 너무 좋아서 그저 가만히 아드리안의 어깨에 기댔다. 올려다보진 않았지만, 손길만큼 부드러운 시선이 자신의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차가운 것이 머리를 적셨다.


예나는 잠깐 놀라 굳었다가, 다음 순간 두려운 듯이 천천히 얼굴을 들어 아드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예상한 것처럼, 예상한 것보다도 더 부드러운, 무한한 사랑을 담은 것 같은 눈으로 아드리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눈에서 맑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물이 흘러내리는 줄도 모르고 있는 얼굴, 오로지 자신만 내려다보고 있는 그 얼굴을 보고 예나는 갑자기 가슴 한구석이 깨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아드리안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안 돼…….”


“응?”


“안 돼요, 울지 마. 당신 울면, 내가, 너무, 너무 가슴이 아프잖아. 울지 마요, 제발.”


우는 사람이 누구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면서 예나는 아드리안의 얼굴을 감싸고, 부비고, 입을 맞추고, 눈물을 닦아내고, 그 눈물에 자신의 눈물을 섞었다. 너무 미안해서, 눈물을 흘리는 얼굴이 너무 가슴이 아파서 제 가슴인 양 아드리안의 가슴을 탕탕 쳤다. 그러다 그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우는 아이 달래듯 입을 맞추었다가, 다시 안절부절못하며 얼굴을 들어 아드리안의 뺨을 감싸 쥐었다. 뺨과 뺨을 부비고, 다시 그 눈을 보았다가, 울상이 되어서 여전히 흘러내리는 그 눈물을 입술로 닦았다.


그토록 어쩔 줄 몰라 하는 예나를 아드리안이 다시 다잡았다. 꽉 안고서, 움직이지도 못하도록, 그 손을 들어서 눈물을 닦지도 못하도록, 얼굴을 들어서 눈물을 보며 아파하지도 못하도록 꽉 안고서 아드리안이 속삭였다.


“알았다. 울지 않겠다. 네가 가슴 아플 일은 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만. 제발.”


꿈틀거리고 빠져나오려고 버둥거리던 예나는 끊이지 않고 속삭이는 아드리안의 말에 점점 진정했다. 그러나 진정하고도 꽤 한참 동안 아드리안의 품 안에서 예나는 훌쩍였다. 무언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어서 아드리안은 고개를 푹 숙여서 예나에게 귀를 가져다 대야 했다.


“미안해요, 미안해……. 다, 나 때문, 인데, 울지도, 못하, 못하게, 하고, 나 아픈 것만, 생각하고, 난…… 진짜 이기적이야.”


아드리안은 아무 말 없이 예나를 안았던 팔을 잠시 풀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진정시키기 위해 안았던 것과는 다르게, 어깨와 허리를 감싸며 다시 안았다. 아드리안의 숨결이 예나의 귓볼에 닿았다. 예나는 조금 전까지 어린애였다가 갑자기 여자가 된 듯한 놀라움을 느끼며, 눈물로 말라붙기 시작한 눈을 억지로 떼고 아드리안을 보았다. 그러다 다시금 다가온 아드리안의 얼굴과 입술에 눈을 다시 감았다. 다시 감미로운 그의 혀와 부드러운 입술. 예나는 아무 말 없이 갑작스레 쏟아지는 아드리안의 공세에 넋이 나갈 것 같았다. 여전히 어깨와 허리를 강하게 안은 채, 아니 조금씩 풀고 등부터 시작해서 예나를 조심스레 탐색하면서 아드리안은 예나를 바닥으로 몰아붙였다. 예나가 바닥에 깔린 부드러운 모피 코트의 촉감을 느꼈을 때는, 어느새 예나가 걸친 옷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후였다. 예나는 아드리안을 올려다보았고, 아드리안은 예나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차마 입도 제대로 떼지 못하고 달싹거렸다. 예나는 그것이 ‘괜찮아?’라는 한마디라는 걸 알아차렸다. 예나는 꿈을 꾸듯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부푼 욕망과 사랑을 팽팽하게 잡아 가두고, 예나의 대답만을 기다리는 긴장이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예나는 눈물 어린 눈으로 웃었다. 눈물을 삼킨 입술을 그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의 얼굴을 만지던 손을 더욱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눈을 감자 촉촉한 입술이 어깨를 간질였다. 예나는 자신이 물가에 알몸으로 누워 있는 것 같다는 상상을 했다. 물은 적당할 만큼 따뜻하고, 누워 있는 몸을 완전히 적시지 않을 만큼만 찰랑거리며 온몸을 매만졌다. 어깨에서 손가락 끝까지, 발가락 끝에서 허벅지까지, 목에서 쇄골을 지나 가슴에서 오래 머물고, 마침표를 찍듯이 배꼽에서 튕겨 올랐다. 따뜻한 물이 지나갔던 자리는 오히려 더 춥고 차가워졌다. 예나는 그 따뜻함을 잡으려고 팔을 뻗어 보았다. 그러나 약올리듯 손바닥을 적시고는, 그 물은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예나는 더 이상 따뜻함을 잡을 필요가 없어졌다. 은밀한 곳으로 밀려들어오는 물에 온몸이 조금씩 뜨거워지더니, 얼굴에서까지 열이 나기 시작했다. 예나는 입을 벌렸고, 고개를 돌렸고, 몸을 뒤틀었다. 이 따뜻한 물은 예나를 이상하게 만들고 있었다. 숨가쁘게, 정신을 차릴 수 없게, 세상 모든 걸 다 잊게.


그리고 파도가 몰려왔다. 조금은 아프게, 그러다가는 고통조차도 잊고 몸이 둥실 떠오르도록, 파도가 몰려왔다.


한 번, 가볍게 파도가 밀려왔다가 사라졌다. 물결 사이에서 기억의 조각들이 무수히 떨어지며 반짝였다. 그 안에는 길러 준 어머니의 얼굴도 있었고, 할아버지라고 알고 있었던 사람의 기억도 있었다. 예나와 전혀 다르게 생긴 인간 여자의 얼굴이 눈앞에 여러 개 나타났다 사라졌다. 예나는 그 모든 모습이 자신이라는 것을, 오즈리크라는 것을 알았다. 그 여자는 검은 머리이기도 했고 금발이기도 했고 갈색 머리이기도 했다. 웃고 있었고 울고 있었고 화내고 있었고 체념한 것처럼 보였고 무표정하게 자신을 안으로 맺어 버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 얼굴은 모두 비슷하게 빛나 보였다. 물결이 어딘가에 부딪치면 으레 반짝이듯이, 보석이 햇빛을 받으면 그러듯이 그 얼굴 모두 생동감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그 생동감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두 번, 파도가 거세게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기억의 조각은 온통 아드리안의 얼굴로 가득 찼다. 화내는 모습, 무심한 듯 강한 듯 표정을 굳힌 얼굴, 마지못해 웃는 모습, 노심초사 안절부절못하고 걱정하는 얼굴, 차마 다 울지 못하고 입술을 꾸욱 다문 모습, 욕망에 사로잡혀 신음하는 얼굴.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로웠던 그 얼굴이 점점 하얗게 빛이 바래고 표정이 없어지고 입술조차 끝이 올라가지 않고 굳게 다물어지는 것을 보았다.


세 번, 거대한 파도가 밀려와 마침내 예나를 높이높이 날려 버렸다. 예나는 까마득히 높은 곳으로 솟아올라갔다. 주위엔 잡을 것 하나 없이 아찔하고 아랫배에 힘이 빠졌다. 아드리안의 이름을 불렀다. 생각나는 단어라곤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절박하게, 손을 뻗어 불렀다. 그 다음 순간 예나는 밑바닥 없는 깊은 물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온몸의 피가 파도와 함께 솟구쳤다가 빠른 속도로 제자리로 돌아가며 열을 남겼다. 그리고 둔하게 몸을 흔드는 감각.


“오즈리크? 괜찮아? 오즈리크?”


다급한 목소리. 예나는 힘겹게 눈을 떴다. 발갛게 달아오른 아드리안의 얼굴이,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예나에 대한 걱정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나른하고 힘겨운 동작으로 예나는 손을 뻗어 그의 얼굴에 대었다.


“응……. 괜찮아요.”


“하아…….”


안심하고 위에서 내려오려는 아드리안을, 예나가 먼저 껴안았다. 묘하게 덜미를 잡힌 꼴이 된 아드리안은 잠시 당황하다가 마주 안아 주었다. 예나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드리안.”


“그래.”


답을 했지만 예나는 잠깐 또 침묵을 지킨 채 아드리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아드리안.”


“말해, 오즈리크.”


"사랑해요.“


이번에 침묵을 지킨 건 아드리안이었다. 예나는 그 침묵 속을 헤엄치듯이, 아드리안을 꼭 껴안은 채 계속 말을 내뱉었다.


“보고 싶었어요.


“오랫동안.


“계속.


“찾았어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때에도.


“당신을 찾았어요.


“사랑해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아드리안이 계속 말하려던 예나의 입을 만져 다물게 했다. 그리고 눈을 마주보더니 말했다.


“나도.”


정말, 어처구니없는 남자. 말 주변도 엄청나게 없는 남자. 하지만 말보다 눈으로, 포옹으로, 그 천년 동안의 기다림으로 그 사랑을 보여 주는 남자. 계속 기다려온 내가 사랑하는 사람.


예나는 아드리안을 다시 안았다. 이제 절대로 이 사람에게서 떨어지지 않을 터였다. 아무도 지금 이 순간을 방해하지 못하게 만들 터였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

 도주!!!


댓글 '9'

둥글레

2007.03.11 08:41:21

드디어.....오셨군요. 하지만 전편이 어땠더라??.. 다시 복습하러 가야할 듯

노리코

2007.03.11 09:46:05

컥! 1년만입니까? -ㅁ-
앞 내용이 기억안나 다시 읽고 있습니다..( ")
그나저나 다시오심을 환영합니다. 자하님~ 꾸준히 오시어요~ ㅎㅎ

mehee

2007.03.11 12:08:43

정말 오랜만에 오셨네요. 많이 기다렸어요.

시즈

2007.03.11 13:16:09

우와, 이 얼마만이십니까? ;ㅁ;
이젠 자주 오시는 거지요?

Junk

2007.03.11 13:28:23

너무 오랫만에 오셔서 눈물이 앞을 가리는 통에 글을 읽을 수가... 잠시 정신을 추스린후 앞부분부터 재독하러 갑니당.

mirage

2007.03.11 16:01:05

작가님~
어딜 도주하십니까~
그래도 다시 읽으니 느므 좋아요~

루이

2007.03.11 20:15:57

동감, 일단 읽고. 다시 확인작업 들어갑니다.

큐리

2007.03.12 09:39:10

이런 너무 오래간만이시잖아요~ 1년만에 반가운 글을 보니 가슴이 콩닥콩닥하는걸요.. 다시 첨부터 복습해야겠어요.. 자주자주 뵈어요~

chika

2007.03.27 08:55:18

이런...저두 전 내용이 하나두 생각안나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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