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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말하고 있는 거지만, 오면 온다고 전화를 하려무나."
혈루는 아들이 웬 여자를 안고 지하 우물에서 솟아올라왔는데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대신 우물에서 나오는 아들의 손에서 여자를 받아 한 쪽에 세우며 한 마디 했을 따름이다.
"죄송합니다."
적월이 우물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벽에 창백한 얼굴로 기대 있는 유안을 보던 적월은 어머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데려오려고 한 대 쳤어요. 각성제, 가지고 계시죠?"
"한 잔 하세요."
혈루가 블러디 메리를 유안에게 건넸다. 바에 있는 스툴 의자에 앉아 유안은 그 핏빛 액체를 받았지만 마시진 않았다.
"그 아이의 무례를 사과하지요."
"괜찮습니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니까요."
유안이 간단히 대답하며 바의 한 구석을 바라보았다.
"교육이 부족해서는 아니랍니다."
혈루가 건조하게 대답했다. 약간의 의아함을 담아. 그리고 유안의 시선이 머문 바 한 쪽의 구석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아들이 수석 비서 겸 참모인 아홍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쯤이죠?"
"압구정이에요."
"여러 가지로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요.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유안이 정중하게 혈루에게 인사를 하고 일어섰다. 딱 부러지는 말투와 정확히 90도로 꺾어지는 인사를 받은 혈루가 유안을 제지했다.
"잠시만 앉아서 마음을 가라앉혀 줘요. 그런 식으로 가게 되면 내가 불편해져요."
유안이 혈루를 바라보았다. 검고 마력적인 눈동자에서는 거역할 수 없는 무게가 느껴졌지만 그녀는 그저 혈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정중히 인사했을 뿐이다.
"죄송합니다."
"나중에 저 못난 아들 녀석이 날 곤란하게 만들 거에요."
혈루가 고개를 저으며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었다. 유안의 눈동자가 약간 커졌다.
"저 정신 나간 작자가 자기 어머님한테까지 피해를 주는군요."
유안이 다시 의자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혈루는 나름대로 얌전히 자리에 앉는 유안을 찬찬히 살폈다.
보통이 아니겠어.
어쩐지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며 혈루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유안의 앞에 놓인 블러디 메리를 치우고 위스키에 물을 타 내밀었다.
"감사합니다만 술은 마시지 않아요."
"아이리시 커피 정도는 괜찮겠죠?"
유안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혈루가 잠시 주방으로 들어가는 동안, 유안은 스툴에 앉아 계속해서 적월을 쏘아보고 있었다.
"누구죠?"
아홍이 유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손님이겠지."
"홀려놓으신 겁니까?"
"글쎄."
적월은 태연한 표정으로 아홍을 마주보며 말을 돌렸다.
"어떤가?"
"이아와 와신이 헌원의 은신처를 찾아냈습니다만 이미 철수했다고 합니다."
"저런."
적월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말투의 나른함과는 사뭇 다른 눈빛에 아홍은 긴장하며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탐색 능력자들의 80% 정도가 헌원의 발자취를 찾는데 능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계속할까요?"
"일단 숫자를 줄이는 것이 좋겠군. 혈액원 사고 이후의 마무리는?"
"약 85% 정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순조로운데다 정혈 시설 쪽의 피해가 의외로 적습니다."
"그건 다행이로군. 마무리가 끝나면 보고를."
"알겠습니다."
아홍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수장님."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러실 것 없습니다."
아홍이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건 제 일이니까요. 그럼 다음 보고 때 뵙겠습니다."
바의 문 쪽으로 멀어지는 아홍을 바라보며 적월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여러 가지로 벌어진 일들 중 하나라도 제대로 되어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의 한숨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바에서 금방이라도 그를 얼려버릴 듯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유안을 느끼고 그는 금새 움찔하고 말았다.
"자. 드세요."
금방이라도 죽일 듯한 유안의 노려보는 시선을 중단케 한 것은 혈루가 가지고 나온 아이리시 커피였다. 유안은 혈루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인 후 커피를 한 잔 마셨다.
"깊고 묘하게 풍부한 맛이 나는군요. 좋은 위스키를 쓰신 듯 하네요."
혈루가 빙긋 웃었다.
"30년 이상 된 술이지요. 지인이 직접 담그신 것이니 맛은 보장한답니다. 거기. 예의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아들내미."
적월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어머님."
"이리 와서 나 좀 보자꾸나."
"예. 어머님."
적월은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똑같이 고집 세고 차가운 네 개의 눈동자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이니?"
혈루가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새 단골을 데려온 것뿐입니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화려한 등장이었잖니. 그 지하수를 그런 식으로 사용하다니 제정신이니? 앞으로 그 물로 맛 좋은 오미자주를 담그기는 틀렸구나."
"나중에 보상할게요. 그리고 어머님. 잠시만 이 아가씨를 맡길 곳이 필요한데요."
혈루는 아들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낮에도 활보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겠지?"
"예."
"알아도 모른 척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겠고?"
"예."
"그렇다면 너 밖에 없구나."
"제가 할 수 없는 이유는 어머님이 제일 잘 아실텐데요."
"너말고 내가 생각나는 사람은 제이 정도 밖에 없단다. 하지만 제이라고 해도 무덤까지 비밀을 가져갈 순 없을 게야. 그러니 너 밖에 없다는 거지."
"알고 있습니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게로구나."
"멍청한 짓이지만 후회하진 않습니다."
"하."
혈루가 코웃음을 쳤다.
"일단 생각해 보겠다. 아가씨?"
"네."
"이름이 뭐죠?"
유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유안입니다. 있을 유 (有) 자에 편안할 안 (安) 자를 쓰지요."
혈루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마 그 우스운 아이러니를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잠시만 바에 있겠어요? 아가씨 목숨도 아깝긴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유안이 고개를 저었다.
"목숨은 아깝지 않아요. 단지 시간과 제가 구속받는 자유가 아까워요. 그러니까 이 일은 저 나름대로 해결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난 에미에요."
혈루가 딱 잘라 말했다.
"에미는 자식을 항상 아까워하는 법이죠. 자식을 둔 에미로서 당신에게 간절히 부탁하겠어요. 구속하진 않아요. 약간이라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때까지 만이라도 이 곳에 있어주면 안되겠어요?"
혈루가 매혹 능력을 약간 섞은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적월은 혈루의 강하고 마력적인 눈길을 한치도 지지 않고 맞받는 유안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막상막하였다. 하지만 굴복한 것은 유안 쪽이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이 곳에서 회사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조건 하에서 그렇게 하겠어요."
"고마워요. 그거라면 이 바보 아들내미가 어떻게든 해 주겠죠."
혈루가 적월을 노려보며 상냥하게 말했다.
"당분간은 집에서 일을 할 생각이에요."
"네?"
최 비서의 얼굴은 볼 만했다. 마음의 여유가 남아있기만 했더라도 그 얼굴을 보고 피식거리기라도 했으련만.
"중요한 연락은 전부 핸드폰을 통해줘요. 당분간 직접 참석해야 하는 공식 행사는 전부 스케줄에서 빼 주고요."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몸이 좋지 않아요."
그 말에 비서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하지 마시라고 몇 번 말씀드린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그러게요."
"그럼 푹 쉬세요. 다음 번 주주총회 때까지는 나으셔야 할 텐데요."
"저도 그랬으면 해요."
급하게 검토해야 할 서류에 사인을 하고 훑어볼 서류와 사안을 정리한 디스켓을 정리하니 서류 가방으로 하나 이상이 나왔다. 양 손에 서류 가방을 든 유안을 안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비서는 주변을 뒤지더니 한숨을 쉬었다.
"사무실에 그것들 이상으로 큰 가방은 없군요. 무거우시겠어요."
"괜찮아요."
사실 무겁긴 했지만 유안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새벽녘에 출근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맞은편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은 회사에 들어왔을 때와 다를 바 없는 색이었다.
"하."
어쩐지 우스워져서 피식 웃고 있는 그녀의 팔을 잡는 차가운 손길이 느껴졌다.
"갈까."
"손떼시지."
적월이 손을 떼며 유안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보낸 적월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원래 스킨십을 그다지 좋아하는 아닌 듯 했지만 지난밤에 일어났던 습격 사건으로 인한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것이 눈에 보였다.
왜 화가 났는지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 화를 가라앉혀 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무리한 것을 바란 듯 하다. 게다가 최소한의 도움을 바라고 하는 수 없이 찾아간 어머니는 곤란해하는 아들의 모습을 즐기기만 할 뿐.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
"유안."
"왜?"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어."
"결과적으로는 끌어들였잖아."
좁은 엘리베이터 안의 차가운 공기가 거슬린 적월은 그저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다. 아무래도 쉽게 화가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왜 한 마디도 이야기 해 주지 않은 거지?"
"입에서 나온 이상 비밀은 없으니까."
적월이 간단히 대답했다. 찾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였고, 자신의 자취를 깔끔하게 없앨 방법도 여러 가지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단 입으로 말하고. 그 말이 어딘가 새어나가게 되면 방법이 없었다.
"찾아오는 것은 안전하고?"
"흔적을 없애는 방법쯤은 여러 가지 강구하고 있으니까."
"그게 고작 이거?"
"미안하다."
적월이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유안의 속을 알 수 없는 눈동자가 적월의 눈동자와 부딪혔다.
"하는 수 없지. 일은 이미 벌어졌으니까."
유안이 짧은 한숨을 쉬며 체념하듯 말했다.
"하지만 잘못했다는 것은 알아야 해. 계약 당시에는 응하지 않을까 봐 숨겼을지 모르지만 그 이후 위험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숨긴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어."
"알린다고 해서, 뭔가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 거야."
"그래도 회사 경비원에게 야밤에 쫓기는 일은 없었을테지."
적월이 한숨을 쉬었다. 마지못해 화를 풀었을지 모르지만 원한이 남은 듯 했다.
"빚을 진 거야. 알고 있지?"
"그래."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실패를 마주하는 것만큼이나.
"그렇다면 나중에 내 부탁 하나 둘 정도는 들어줄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일족과 목숨에 관계된 것만 아니라면."
유안이 딱딱하게 굳은 적월의 얼굴을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잠시 들었다 내렸다. 그것을 본 적월이 그녀의 손에서 서류가방과 노트북을 낚아채 갔다.
"중요한 서류가 들어있어."
"알았어."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유안이 적월을 돌아보았다.
"첫 번째로 부탁할게."
그 무뚝뚝한 음성에 적월이 유안을 주시했다.
"나에게 그 물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 줘."
"알겠어."
자유게시판 란에 몇 자 적어놨습니다만, 어머님이 자리를 비우신 동안 집안 살림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두 남정네와 함께 집을 지켜야 합니다.
보통 퇴근 후에 밤을 새며 글을 쓰고 새벽에 잠들어 오후에 출근하는 생활을 해 왔었는데, 아침에 집안일을 하게 될 것 같으니 당분간 글하고는 안녕이군요.
... 다음 편은 언제 올라올 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님의 빠른 귀환을 바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