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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이 나오기 전에 김세희 님과 잠깐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리뷰를 적어달라고 하셨는데, 다 읽고도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왠지 난감해서였습니다. 뭐랄까, 특이했습니다. 분명 매력은 있는데 어딘가 산만한 느낌. 그런 이유로 리뷰를 적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김세희 님과 이야기를 나눈 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번 리뷰를 적는 것은 순수한 자의에서 나온 것임을 밝혀 둡니다.

그럼 시작.





사기꾼보다 윈터, 요하네스버그가 좋고, 윈터보다 집착이 좋았습니다. 갈수록 몰입을 방해하던 군더더기가 줄고 자기 색이 확연히 그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출판을 거듭할수록 발전하는 작가. 이 작가님에게 출판은 그저 책을 내는 것이 아닌, 발전하는 계기를 부여하는 모양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작품을 계속해서 읽어온 독자는 기뻐집니다.



사기꾼을 읽었을 때부터 느꼈습니다. 어, 이 작가는 좀 달라. 좀? 아니 많이. 단순히 다른 작가들과 환경이 달라서(김세희 님은 남아공에 거주하고 계십니다)만은 아닐 테죠. 특유의 향기가 있는 작가, 특유의 향기가 있는 글. 이토록 강한 개성을 느낀 작가로는 서후 님이 계셨는데, 김세희 님이 강도는 더 셌습니다. 이야, 진짜 묘하네. 그런 느낌.

김세희 님의 글은 불연속 곡선 같습니다. 플롯이 촘촘하게 잘 짜여진 글은 결코 아니고 큰 연관성이 적은 사건들이나 각각의 상황이 뭉쳐서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데, 묘하게도 그것이 위화감을 주거나 하지 않을 뿐더러 한눈에 잘 들어오고 잘 읽힙니다. 그 선들을 조금만 다듬어주시거나 색으로 강약을 주셨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지만 그것은 어찌 생각하면 독자로서의 지나친 과욕 같기도 합니다.



 

자폐, 아스퍼거.

저한테는 익숙한 단어들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전에 솔직히 얼마나 잘 썼는지 한 번 보자는 심정으로 집어든 것도 사실입니다. 이 소재를 갖고 작가님이 진부한 스토리, 통속적인 애절모드를 그려냈다면 읽다가 말고 훗, 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책을 집어 던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작가님은 까다로운 독자를 끝까지 읽게 만들었습니다.



작가 자신이 아는 지식으로 자신이 늘 생각해 온 생각을 쓴 글과 작가가 잘 모르는 지식을 단지 흥미를 느꼈다는 이유만으로 수박 겉핥기로 조사하고 대강 유추해 그려낸 글. 어느 쪽에 점수를 주게 될지는 자명한 일이 될 겁니다. 다행스럽게도 집착은 전자. 아스퍼거는 작가님이 늘 생각하던 질문에 대한 답을 얻어내기 위한 필수설정이었을 겁니다.



소재가, 설정이, 지식이, 그냥 그걸로 끝나지 않고 잘 녹아들어가 있습니다. 워낙에 독특한 이야기라 충분히 잘난 척 하는 걸로 비칠 법도 한데, 거부감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작가님이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글을 써내려갔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작가님이 흔치 않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또 점수 왕창.



자동차 엔진 단면도는 기억만으로 그려내면서 사람들을 이해하기란 너무도 어려운 케이 왓킨슨이라는 캐릭터는 정말이지 그려내기 힘든 성격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읽으면서 저한테는 케이가 보이더군요. 아주 생생하게. 정말 있을 법한 느낌. 아마도, 작가님은 어딘가 케이와 닮아 있는 분일 겁니다. 분명, 그럴 겁니다. 그래서 케이라는 평범과 거리가 먼 캐릭터는 피와 살을 가진 살아 있는 인물로 제 앞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거겠죠.

그래서 케이는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스티브도, 라이언도.



물론 분명히 이 작품에는 단점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단점들은 때로 장점을 돋보이게 만들거나, 제게 있어서는 장점 때문에 용서가 되는 그런 단점들 뿐.



작가님이 내내 외국에 계셨다는 걸 깨닫게 만드는 다소 거친 문장은, 그러나 집착의 경우에는 캐릭터를 강화시키는 시너지 효과를 만들었습니다. 천재지만 사랑에 서툰 케이를, 잘 갈아낸 가루처럼 매끄럽고 유려한 문장을 써서 묘사했다면 그 얼마나 조화롭지 못한 글이 되었을지. 이 점이 제게 윈터보다 집착이 더 매력적이었던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케이 앞에서만 흔들리는 균형 잡힌 남자 스티브와 자신의 불균형을 어둠으로 감춘 채 살아가는 라이언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그래서 집착은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글.

하지만.



역시 안타까움은 존재합니다.



다른 독자 분들께서는 스티브보다 라이언이 더 매력적이고 살아있다고 하시는데, 캐릭터의 묘사나 매력도 자체로는 스티브도 사실 뒤지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작가님은 스티브를 매력적으로 그릴 수 있으셨습니다.

한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라이언이 더 인상적이던 이유는?

라이언은 남조입니다. 남조는 여주와의 로맨스가 아닌 캐릭터의 매력만으로 충분히 점수를 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주는 다릅니다. 로맨스 소설에서 남주는 여주와의 로맨스를 통해 그 개성과 매력을 보여주는 존재입니다. 물론 스티브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케이를 한결 같이 멋지게 사랑해 줍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케이나, 스티브나, 너무 한결 같았습니다.

케이는 물론 점점 스티브를 사랑하게 됩니다. 분명히 감정의 변화는 있습니다. 스티브도 마찬가지. 그런데 그들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플롯 자체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스토리 구성력이 미흡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구성력 없는 작가의 글이었다면 끝까지 읽지 못했죠. 

단, 이야기의 구성을 그래프로 그렸을 때 절정을 향해 치닫는 파워가 모자랐다 해야 하나. 물론 글의 성격에 따라 다르지만 집착은 좀 더 그 강도가 강했으면 좋았을 글이었기 때문입니다. 발단에서 전개까지는 좋았습니다. 다음, 전개에서 위기로, 위기에서 절정으로 이어지는 느낌이 조금만 더 강렬했다면 스티브 에딩턴은 절대 라이언 리에 그 매력이 뒤지지 않는 남주로 깊이 독자의 가슴에 자리잡았을 텐데요.

아주 많이도 필요 없었는데.
(특히 2권에서)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두 사랑스런 주인공들이 드라마틱하게 이루어졌더라면.
두 사람의 편지는 귀여웠지만, 그것만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두 사람의 심리변화를 절절히 느끼게 해주었더라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초반부에 케이와 스티브는 자연스럽게 대화로 관계형성을 시작합니다.
자연스러웠지만 역시 함께 입양되어 내내 케이를 지켜주던 존재인 라이언을 누를 만큼의 임팩트는 없었습니다. 만약 케이의 캐릭터에 좀 더 과장 섞인 설정을 섞었다면 아주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은데ㅡ



실제인물이며 회복된 자폐인인 템플 그랜딘 박사의 <어느 자폐인 이야기(Emergence : Labeled Autistic)>이라는 책에 보면 기숙학교에 간 템플이 또래 아이들과 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아주 유명한 책이라 작가님도 읽어보셨을 듯).



어느 날 저녁, 식사 종이 울리기를 기다리면서 줄을 서 있었다. 내 뒤에 있는 아이들이 웃거나 이야기했지만 나에게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아이가 갑작스럽게 내 앞으로 끼어들었다.

그 순간 내가, "야, 끼어들기 없잖아!" 하고 말하며 그 애 앞으로 나갔다. 그 때 그 여자아이가 숨을 깊이 들이쉬는 것을 느꼈다.

"날 괴롭히지 마, 멍청아."

그 애가 말하며 나를 떼밀었다.
충동적으로 나는 휙 돌아서서 그 애를 한 대 쳤다.



타인과의 관계형성에 어려움을 느끼는 케이에게 공격성향이 있고 그에 따라 이런 사건이 벌어져, 순식간에 부근이 아수라장이 되고 모든 사람이 케이를 공격할 때 그 광경을 목격한 스티브가 케이를 방어해 준다던가 하는 에피소드ㅡ가 있은 다음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되었다면 좀 더 드라마틱해지지 않았을까요? 두 사람의 관계에 긴장감을 더해주는 사건들이 조금만 가미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답니다. 물론 이런 류는 작가님의 스타일이 아닐 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느낀 점은 라이언이 케이에게 해주는 것과 스티브가 케이에게 해주는 것의 대비가 좀 더 분명하게 존재했다면, 그리고 스티브가 케이에게는 확실히 더 어울리는 사람ㅡ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부여했다면. 또 그러기 위해서는 임팩트가 강한 에피소드가 조금 더 필요했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충분히 좋았습니다.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한 케이와 다정한 스티브가 행복해지는 과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단점이 보여도 기분 좋게 넘어갈 수 있는 만큼의 매력을 김세희 님의 글은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색을 강하게 갖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쓰고 있는지 작가 본인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드물게 작가 자신이 아는 이야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작가 중 한 분이기 때문에.

왠지 케이와 스티브는 작가님과 남편님을 닮았을 것 같다는 짐작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작가님이 이 리뷰를 보실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번에는 약간만 더, 아주 약간만 더 후반부를 드라마틱하게 풀어 주십시오. 

물론 부담은 갖지 마시길. 큰 드라마틱함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김세희 님의 글은 일단 소재와 배경과 캐릭터 자체가 평범치 않기 때문에 크게 드라마틱할 필요도 없답니다.



자신만의 향기를 가진 사람은 돌아보고 싶도록 멋집니다.
자신만의 향기를 지닌 글 역시 다시 들춰보고 싶도록 멋지죠.
김세희 님이 또 다른 자신만의 향기를 보여주시기를 기대하며 리뷰를 마칩니다.





P.S
아까만 해도 두통이 엄청 심했는데 이 리뷰를 쓰는 동안 가라앉았습니다.

댓글 '5'

Lian

2006.01.08 04:02:26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책을 읽게 만드는 리뷰네요. ^^

Junk

2006.01.08 04:08:19

한 번 읽어 보세요. 참 매력적인 소설입니다. 그런데 리앙님이 댓글 다시는 동안 제가 내용을 좀 첨부했던 것 같은데ㅡ;

설보경

2006.01.08 20:04:23

저도 폐인님(김세희님) 글을 다 읽었어요..^^
출판된 것들이요...넷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실때 부터 쭉 보아 왔는데
정말 묘하다는 표현이 적절하게 쭈~욱 이어지는 글들이지만 매력이 있어요

하늘이

2006.01.08 20:22:25

우와~ 다시 한번 느끼지만- 아직 집착을 읽지 못했지만,
정크님 리뷰 너무 멋집니다. 리앙님 말씀처럼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포스가 모락모락^^

토리아

2006.01.24 15:34:48

이미 집착을 읽었는데... 리뷰를 읽으니 다시한번 더 읽고 싶어지네요..
저도 라이언이 좀더 기억에 강렬했는데.. 그렇게 느끼신 분들이 의외로 많으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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