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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꼿꼿한 자세로 걸어가는 진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현우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깊은 인연이라고, 잊히는 게 아쉬워서 팔래스의 바로 맞은편에 레스토랑을 열고 이름을 그대로 딴 상호를 내 걸 정도로? 서른도 안 돼 보이는 젊은 여자와 팔래스와의 깊은 인연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현우는 이미 고인이 된 아버지의 얼굴과 방금 전 그에게 쌩하니 등을 돌리며 나가버린 여자의 모습을 겹쳐서 생각하고는 이내 지워버렸다.
내가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고 있는 거야.
어머니의 그 말도 안 되는 의심 때문에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던 분에게 아들인 자신이 똑같은 만행을 저지르다니,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한 시간, 아니 삼십 분만 연락이 안 돼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남편의 행방을 의심하고, 누구와 만났느냐, 밑도 끝도 없이 추궁하던 어머니 때문에 현우의 집안은 다툼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엄마, 제발 그만 좀 하세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부르짖던 절규가 무색하게도, 지금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어머니와 같은 의심이 계속해서 들러붙었다. 어쩌면 어머니의 의심이 터무니없는 의부증만은 아닐 지도 모른다는 불경한 상상 말이다.
다음 날 현우는 평소 보다 이른 시각에 출근해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두 사람의 관계를 알아내서 뭘 어쩌겠다고. 이미 아버지는 고인이 되었고, 어머니는 이제 아버지에 대해서 더 이상은 관심이 없는데, 설사 그녀가 아버지의 깊은 관계였다고 해도 그게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어떤 관계였는지에 대한 의문이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문제를 앞에 두고 미적지근하게 해답을 미뤄놓는 건 현우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창밖을 노려보다가 이내 결심을 굳히고, 차문을 열었다.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리려면 명확한 해답을 내리는 게 우선이다. 차에서 내리자 얼음 같은 바람이 안면을 강타하였다. 코트 깃을 단단히 여미고 쁘띠 팔래스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던 현우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우뚝 멈추어 섰다. 지은 지 2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오래된 주택의 1층을 개조한 레스토랑. 담을 완전히 허물고 마당에 테이블을 놓은 것을 보아 쁘띠 팔래스는 단순한 세입자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는 건 저 오래된 주택이 이진하의 집이라는 얘기다. 갑자기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잠시 아찔하였다.
아버지는 왜 그토록 한적하던 주택가에 레스토랑을 열었을까. 그것도 팔래스와 깊은 인연이 있다는 여자의 집 바로 맞은편에. 단순한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절묘하다. 회벽 옆으로 이름표처럼 귀엽게 붙어 있는 간판이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쁘띠 팔래스, 팔래스.
대학병원의 교수였던 아버지가 별다른 이유도 없이 사직서를 내고 레스토랑을 차린다고 하였을 때 어머니는 살벌하게 반대를 했다고 한다. 교수직을 팽개치고, 고작 식당을 한다는 게 어머니로서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말 수가 적고, 큰 소리를 잘 내지 않아 호인처럼 보이는 아버지는 한 번 마음먹은 일에 대해서는 타협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타인의 이해를 구하기도 전에 묵묵히 밀어붙이는 불도저 같은 아버지 옆에서 신경질적인 어머니가 아무리 떠들어봤자 허공에 고함지르기 밖에 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되는 바였다.
아버지와 팔래스, 그리고 어머니는 이를 테면 잘못된 관계였다. 아버지는 모든 관심을 팔래스에 쏟았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쏟았다. 원래도 집요했던 어머니의 의심과 추궁은 팔래스 오픈 이후 완전히 병적으로 변해갔다. 사우나에 간다고 나간 아버지가 10분만 늦게 오면 여자를 만나러 간 거 아니냐고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해 하다가 사우나로 급습해서는 아버지가 사우나에서 나오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도 ‘어느 여자랑 만나고 뒤늦게 들어간 것이냐.’며 아버지를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몰아세웠다. 그렇다고 확실한 증거가 있었던 것은 아닌 게, 어머니가 의심하는 아버지의 여자는 상황에 따라 매번 바뀌었다. 어떤 때는 아버지가 얼굴을 마주 하며 웃었다는 이유로, 또 어떤 때는 아버지의 시선이 오래도록 머물었다며 도대체 그 여자가 누구냐며 생사람을 잡았다. 속이 훤히 비치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위태로웠던 하루하루. 먼저 손을 든 것은 아버지였다. 잘 나신 처가 식구들의 반대로 어머니를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려는 시도조차 불발이 되어버리자 아버지는 양육권을 비롯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채 어머니에게서 벗어나기를 선택하였다. 그토록 아름다웠던 어머니는, 학창시절 모든 남학생들에게 여신처럼 떠받들어졌다는 어머니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로 읍소하였지만 생지옥에서 빠져나가겠다는 아버지의 결심은 굳건하였다. 비뚤어진 애정은 증오로 변하여, 어머니는 외가의 권력까지 동원해서 아버지의 모든 것을 빼앗아버렸다. 팔래스는 그런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붙들고 놓지 않았던 유일한 소유물이었다.
부모의 이혼이 결정되던 날 현우는 안도감마저 들었다. 그러나 이혼이 지옥의 끝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혼자가 된 아버지가 다른 여자를 만나지는 않을까, 여전히 촉각을 곤두세웠고 밤마다 눈물을 쏟으며 미친 여자처럼 굴었다. 현우는 이제 매일 밤 어머니가 자살을 하지는 않을까, 초긴장 상태였다. 어머니의 울음소리를 자장가 삼으며 잠을 청했고,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날에는 숨을 죽인 채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 어머니의 숨소리를 확인하고 나서야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세상을 등진 건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였다. 등산 중의 실족사였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두 가지를 남겼다.
어머니의 평온과 팔래스.
아버지가 자신 외에 다른 여자를 만날 지도 모른다는 의심에서 벗어나게 된 어머니는 마침내 편안하게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어마어마한 은행 융자금을 떠안고 있어 애물단지로 전락한 팔래스는 어머니의 남동생, 현우에게는 외삼촌이 떠맡게 되었다. 타고난 장사꾼인 외삼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팔래스에 대해 푸념을 하는 척 아버지의 험담을 해댔다. 마치 그것 때문에 팔래스를 떠맡기라도 한 것처럼 즐거운 표정으로.
“도대체 병원에나 있어야할 양반이 뭐 때문에 레스토랑은 한다고 나섰던 거야? 아니, 레스토랑이건 뭐건 장사를 하겠다고 했으면 이윤이 남겨야지, 그게 도대체 뭐하는 짓거리인지. 내 계산으로는 도통 답이 안 나오네. 매형이 하는 식으로는 가게에 사람이 꽉 차도 돈이 남을 수가 없다니까. 아니, 누나는 안 뜯어말리고 뭐 했어?”
“내가 안 말렸겠니? 너희 매형이 어디 내 말 듣는 사람이야? 그 사람, 장사 한다고 팔래스 연거 아니야. 다른 속셈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내가 몇 번을 말 해.”
이혼으로 재산을 모조리 빼앗긴 아버지는 팔래스를 담보로 융자를 얻어 레스토랑 운영비로 충당을 하였고, 나중에는 은행 이자조차 버거운 상황에 몰렸던 것이다. 팔래스가 그 지경이 되지만 않았더라도, 제대로만 운영이 되고 있었더라면 아버지의 죽음이 현우의 가슴에 그토록 고통스러운 상처로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아버지의 죽음이 단순한 실족사가 아니라 자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하지 않았을 테니까. 아니, 어머니와 외삼촌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인생을 그토록 우습게 만들지만 않았더라도 복수까지 꿈꾸지는 않았을 것이다.
의대 본과 4학년 때 돌연 휴학계를 내던지고, 교내에 새로 지은 학관 건물 상가를 분양 받아 레스토랑을 운영을 하게 된 것은 어쩌면 순전히 복수심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일생을 엿같이 만들어 버린 어머니와, 어머니의 비정상적인 행동을 묵과하며 동조한 외가 식구들에게. 마치 아버지가 죽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을 뽑아내고 싶었다. 팔래스를 망가뜨린 것은 아버지의 무능함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버린 어머니 때문이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어머, 사장님. 어서 오세요!”
현우가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 중이던 윤지가 허둥거리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볼을 발그레 붉히고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시선에서 그는 이미 윤지가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식사 중이셨군요.”
현우는 넉살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호감을 갖는 현지를 공략하였다. 불편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는 목표물은 잡시 접어두기로 하고.
“네. 사장님은 식사하셨어요?”
주먹밥에서 나는 향긋한 깨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였다.
“식사 하러 왔어요.”
그러자 내내 시선을 피하고 있던 여자가 뜨악한 표정으로 현우를 쳐다보았다.
“저희 식사 다 했는데요.”
“다행이군요. 그럼 지금 주문해도 될까요?”
현우가 메뉴판을 집어 들어 보이자 진하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네, 그럼요.”
잔뜩 의심이 서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개의치 않고 현우는 일부러 입구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와, 사장님 오늘은 정식 손님이시네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는 현지를 불편하게 쳐다보다가 진하도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우는 메뉴판을 들여다보는 척 자신들이 먹고 있던 접시를 대강 수습하고 있는 여자의 모습을 슬쩍 훔쳐보았다. 키는 165쯤, 균형 잡힌 몸매에 수수한 듯 단정한 생김새.
아버지와는 어떤 깊은 인연일까?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현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네, 그러면 감사하죠. 여기는 뭐가 맛있죠?”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는 현지를 캐는 게 오히려 유용한 정보를 얻는 데 수월할 것이다.
“다 맛있긴 한데요, 샌드위치가 1등으로 잘 나가요.”
윽, 점심으로 빵을 먹고 싶지는 않다.
“스테이크는 어때요?”
그러자 현지의 표정이 환해졌다.
“아휴, 당연히 맛있죠! 스테이크가 아마 샌드위치랑 가격이 똑같았으면 1등 메뉴는 따 놓은 당상이었을 거예요.”
솔직한 대답에 현우가 하하 웃어 보였다. 자신의 웃는 얼굴이 여자들에게, 특히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여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잘 알고 있으므로.
“그럼 등심 스테이크로 하죠.”
“네, 사장님. 굽기 정도는 어떻게 할까요?”
“미디움이 좋겠군요.”
“샐러드랑 수프는 매일 바뀌거든요. 오늘은 미소 드레싱을 곁들인 훈제연어 샐러드와 단호박 수프가 서빙 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얼마나 맛있을지, 기대가 되는데요.”
“절대 후회 안 하실 거예요. 잠시만이요, 우선 물부터 갖다 드릴게요.”
자신의 화술에 넘어가 현우가 스테이크를 주문했다고 생각했는지, 현지가 뿌듯한 표정으로 주방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현우는 윤지가 물 잔을 가져오기를 기다렸다가 은근슬쩍 말을 건넸다.
“봄에는 야외 테라스를 찾는 손님이 제법 많겠는데요.”
“아유, 그럼요. 빨리 따뜻해졌으면 좋겠어요. 요즘엔 손님이 통 없어서. 근데, 놀이터는 정신없죠?”
“뭐, 그렇죠. 그런데 정원이 굉장히 잘 가꿔져 있네요.”
갈 길이 먼데 도리어 질문이 들어오자 못 알아들은 척 대강 얼버무리며 잽싸게 화제를 돌렸다.
“그렇죠? 저도 처음 보고 굉장히 예뻐서 감탄했어요.”
윤지가 무구한 표정으로 새삼스레 정원 쪽을 돌아보았다.
“정원 관리는 따로 하시는 분이 있나요?”
진하가 지금 누구와 함께 살고 있는지, 슬쩍 에둘러 물어보았다.
“저희 사장님이 직접 하세요. 사람 쓰려면 비용도 만만치가 않잖아요.”
이런! 직접 한다고? 젊은 여자가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정원 관리까지 할 줄이야.
예상하지 못 한 답변에 당황했지만 곧바로 탐문을 개시하였다.
“2층에 기거를 하시나 보군요.”
그러자 윤지가 정색하며 현우를 쳐다보았다.
“절대 소문내시면 안 돼요. 여자 혼자 산다는 거 알려지면 위험하단 말이에요.”
혼자 산다고?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이 오래된 집에 젊은 여자가 온자서 살고 있다니. 미치겠군. 아무래도 아버지의 애인이 맞는 모양이다. 혹시 아버지가 이 집을 사준 걸까? 당신은 자금난에 허덕이며 피가 말랐을 텐데도.
“혼자 산다는 건 말씀 안 하셨으면 몰랐을 텐데요.”
현우가 짐짓 놀리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윤지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야, 소문은 내가 냈네.”
도대체 아버지와는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사장님이 요리를 퍽 잘 하시던데, 어디 다른 식당에서 일하시다가 독립을 하신 모양이죠?”
혹시 진하가 팔래스의 직원이었던 것은 아닌가 싶어 슬쩍 찔러 보았다.
“아니요! 회사에서 같이 근무할 때만 해도 언니가 저렇게 요리를 잘 하는 사람인지 몰랐어요. 저는 아르바이트로 들어간 거였고 언니는 정식 직원이었는데, 사람이 참 좋더라고요. 그때 굉장히 깐깐한 과장님이 한 분 계셨는데, 저를 굉장히 힘들게 괴롭혔거든요. 그때 언니가 절 굉장히 많이 도와줬어요.”
현우는 매우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윤지가 감회에 젖은 얼굴로 쏟아놓는 말들 중 새겨들을 말들만 골라내었다. 회사에 다녔다면, 팔래스의 직원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손님으로 만난 것이겠군.
현우는 슬쩍 주방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이쪽에서 무슨 말이 오가는지, 아무 관심도 없이 뭔가에 푹 빠져 있는 표정. 현우를 향해 대놓고 불편한 표정을 지을 때는 언제고 음식을 만드는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뭐랄까, 어쩌면 아버지는 그녀의 요리하는 얼굴을 무척 사랑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고 있던 오피스텔도 처분하고 팔래스의 다락방에서 기거하셨다고 했는데, 어쩌면 이 집에서 저 여자와 함께 지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아버지가 잘못한 일은 아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 이해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티끌 하나 없이 완벽한 유리에 얼룩을 발견한 것 모양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버지에게 여자가 정말로 있었다니!
그나저나 아주 큰 오해를 하고 있으니 나중에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자못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