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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언니, 놀이터 사장님 와요.”
작전 수행 중의 참모대장처럼 긴장감이 서려 있는 목소리에 진하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윤지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호들갑이야.”
짜증 섞인 목소리로 타박을 주기는 했지만 진하도 내심 저 남자가 왜 이렇게 자주 들르는 것일까, 의아한 생각이 들기는 하였다. 현우가 쁘띠 팔래스에서 식사를 한 게 벌써 4일 째다. 처음엔 귀신이라도 나타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던 윤지도 점차 침착성을 되찾으면서, 진하에게 되도 않는 작전지시를 내렸다.
“언니, 오늘은 제발 좀 상냥하고 친근하게, 아셨죠? 그냥 다른 손님한테 하는 것처럼 하시란 말이에요.”
윤지가 어이없는 훈계를 해대며 잽싸게 진하의 매무새를 훑어보았다. 마음에 들었는지,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내며 저 혼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너 진짜 자꾸 이럴 거야?”
진하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매서운 표정으로 윤지에게 엄포를 늘어놓았다. 현우를 단순한 손님으로 대하지 못 하는 이유는 순전히 윤지 때문이었다. 들어오기도 전에 작전지시를 내리고, 나가고 나면 현우를 대하는 진하의 태도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며 평가를 내리니 어떻게 평상심을 유지할 수가 있겠느냔 말이다.
“이게 다 언니를 위해서예요. 평생 다신 안 올 찬스를 눈 뜨고 놓칠 셈이에요?”
뒷목 잡는 발언에 미처 반박할 새도 없이 가게 문이 열렸다. 문에 매달린 종소리와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온 현우는 주저한다거나, 머뭇거리는 기색 하나 없이 매일 들르는 단골손님처럼 아주 편안한 표정이었다. 뭐랄까, 보면 볼수록 평범한 사람은 아니지, 싶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공항으로 바이어를 마중 온 회사원처럼 활짝 웃고 있는 윤지의 옆에서 진하가 머쓱한 표정으로 부추잡채를 소복하게 담은 접시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제 막 점심을 먹으려던 참이라서.”
명색이 손님 앞에서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도 민망한 일인데, 주방에서 몰래 먹는 것도 아니고 대놓고 손님 테이블에 펼쳐놓고 먹는다는 게 영 부끄러웠다. 손님으로 북적거리는 놀이터에서 이런 행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러시면 꼭 제가 일부러 시간 맞춰 들어온 것 같잖아요.”
매우 유감스럽다는 표정으로 부추잡채를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현우의 능청스러운 태도에 무안함으로 굳어 있던 진하의 표정이 단숨에 허물어졌다.
“좀 드실래요?”
모른 척 할 수 없어서 예의상 던진 질문에 현우가 불편하거나 미안해하는 기색 한 점 없이 덥석 자리에 앉았다.
“좋죠!”
“잠시만이요.”
진하는 뜨악한 감정을 속으로 감춘 채 주방으로 들어가 현우 몫의 밥과 수저를 챙겨 나왔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음식 장사를 하는 사람이 왜 자꾸 남의 식당에 식사를 하러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설마, 진짜 나한테 마음이 있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속 보이게 드나드는 거라고?
안 그러려고 해도 자꾸만 헷갈리는 감정이 생기는 건 어찌할 수가 없었다.
“부추잡채 드셔보셨어요?”
진하가 상냥하게 말을 건네며, 현우의 반응을 살폈다.
“이게 부추잡채인가요? 메뉴판에 적혀 있는 것만 봤지 직접 먹어보진 못 했습니다.”
아버지와 자주 다니던 동네 앞산의 등산길 초입에 자그마한 보리밥집이 하나 있었는데, 진하는 거기서 부추잡채를 처음 먹어 보았다. 시퍼런 부추와 당면을 함께 볶아 볼품없어 보이는 첫인상과는 달리 한입 넣는 순간 매콤하고 고소한 첫맛에 홀딱 반하였다. 게다가 강된장에 쓱쓱 비빈 밥에 곁들여 먹으면 가히 환상적이었다. 일요일마다 아버지를 따라 힘든 등산길을 마다 않고 다녔던 것은 순전히 이 부추잡채를 먹기 위해서였다.
“청양 고추가 들어가서 매워요.”
진하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곧장 부추잡채 쪽으로 향하는 현우를 향해 걱정스레 일렀다.
“보기와는 다르게 진짜 맵네요.”
현우가 놀란 표정으로 숨을 크게 내쉬며 뜨거워진 입 속을 식혔다.
“얼음물 좀 갖다 드릴게요.”
윤지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진하의 손목을 붙들어 세웠다.
“언니, 제가 가져 올게요. 식사하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윤지가 진하를 향해 잘 좀 해 보라는 눈짓을 보내며,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입맛에 맞으세요?”
현우를 쳐다보는 진하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입술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계속해서 부추잡채를 먹는 현우의 모습에서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네, 정말 맛있는데요.”
미끄러운 당면 때문에 젓가락질에 애를 먹는 현우를 보다 못 해 진하가 직접 수저를 들었다.
“부추잡채를 이렇게 밥에 비벼 드시면 맛있어요.”
부추잡채를 듬뿍 집어 밥 위에 올리며 시범을 보이자 현우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따라했다. 완전히 몰입해서 먹는 모습에, 차라리 마음에 편해졌다.
그래, 내가 아니라 내가 만든 음식을 좋아하는 거였어.
“평소에도 이렇게 자주 해 드세요?”
“아뇨, 가게에서는 잘 못 해 먹어요. 아무래도 냄새가 많이 남아서요. 이번은 엄마가 가져다준 부추가 냉장고에 시들어가고 있어서, 얼른 만든 거예요. 요즘 손님도 없이 한가하기도 해서.”
그러자 음식에 집중하고 있던 현우의 시선이 진하에게로 향했다.
“부모님이 멀리 사십니까?”
부모님이라는 단어가 진하의 뇌리에 불편하게 날아와 박혔다.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를 해야 할 때면 아직까지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온양에 계세요.”
굳이 아버지 얘기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적당히 얼버무렸다.
“충남 온양?”
“네. 아산시 온양 읍이던가, 아마 그럴 거예요.”
현우가 기억을 더듬으며 애매모호하게 대답하는 진하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정확한 지명을 모르는 걸 보면 거기가 고향은 아닐 테고, 부모님께서 거기로 가신지 얼마 안 됐나 보군요.”
“작년 겨울에 옮기셨어요.”
현우의 입에서 계속해서 나오는 부모님이란 단어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여기도 어르신들 살기에 좋은 곳인데, 멀리 옮기셨군요. 따님 혼자 남겨두기 힘들었을 텐데 거기가 어지간히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게 된 모양새라 괜스레 마음이 찔렸다. 차라리 털어놓자, 마음을 먹고 어렵사리 얘기를 꺼냈다.
“사실 저희 아버지는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랑 둘이서 줄곧 여기서 같이 살았는데, 작년 겨울에 이모부가 돌아가시고 이모 혼자 되셨어요. 그래서 제가 두 분이서 살림 합치라고, 등 떠밀어 보내드렸어요. 그때만 해도 제가 회사에 다니고 있었을 때라 엄마 혼자 집에 계시게 하는 게 마음에 걸렸거든요.”
진하의 얘기를 듣고 있던 현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가 얼마 안 되셨나 보죠?”
“아니요, 5년도 넘었어요. 그러고 보니 벌써 6년 전이네요.”
“7년이라고요?”
“네.”
진하는 쓸쓸한 표정으로 창 너머 보이는 가로수를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 겨울처럼 앙상한 나뭇가지가 찬바람에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빨리 봄이 왔으면 좋겠다. 봄이 오면 이 거리는 벚꽃이 흐드러져 한 폭의 수채화처럼 변신하였다.
“돌아가신지 6년이 지났다고요. 몰랐습니다.”
현우가 굳은 표정으로 진하를 쳐다보았다.
“당연히 모르시죠. 말을 안 했는데.”
“그렇군요.”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게 싫어서 던진 농담에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는 현우가 다시 수저를 들었다. 마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밥 먹는 행위로 도망친 것처럼 얼굴에 생각이 가득하였다. 남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그토록 충격적인 일인가, 싶어서 의아해 하고 있을 때 윤지가 얼음물이 담긴 유리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어?”
“일어난 김에 화장실 좀 들렀다 오느라고요.”
둘이 있을 때도 아니고 손님이 계신데 밥상머리에서 화장실 얘기를 스스럼없이 하다니, 진하가 기겁하며 쳐다보자 윤지가 당치도 않은 윙크를 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둘이 있을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 행동이라, 그거다.
“그래, 수고 했다.”
진하가 일부러 또박또박 힘을 주어 말을 하며 윤지를 매섭게 쳐다보았다. 테이블 앞에 앉은 윤지가 뭔가 어색해진 분위기를 읽었는지, 의아한 눈으로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때 현우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진하를 쳐다보았다.
“부추는 그럼 어머니께서 직접 기르신 겁니까?”
무슨 큰 걱정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처음 던진 질문이 부추라니, 너무 예상 밖이라 오히려 웃음이 났다.
“아니요. 근처 비닐하우스에서 사 오신 거예요. 텃밭을 가꾸시기는 하는데, 그냥 취미 생활 정도죠. 비닐하우스 같은 본격적인 농사는 못 하세요.”
“부모님께서 금슬이 좋으셨나 보군요. 6년이 지났는데도 그렇게 힘들어하셨다니 저한테는 영화 같은 얘기로 들리는데요.”
인사 차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이 담긴 말에 진하의 가슴이 아려왔다.
“지금은 그래도 많이 괜찮아지셨어요. 아무래도 이 집은 아버지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기도 하고 또 할 일이 마땅히 없으셔서, 더 힘드셨을 거예요. 온양에서는 텃밭도 가꾸고, 김칫독도 묻고 정말 바쁘게 사시거든요. 감상에 빠질 겨를도 별로 없으실 걸요.”
창 너머를 바라보며 쓸쓸해하던 어머니의 옆모습만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가슴이 욱신거린다. 사랑이라는 게 사람의 가슴을 얼마나 허하게 만드는 것인지. 진하는 어머니 같은 그런 깊은 사랑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헤어지면 가슴이야 아프겠지만, 그렇게 오래도록 길게 아파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머니 곁에서 힘드셨겠습니다.”
순간 진하의 가슴에 조그마한 파문이 일었다. 어머니의 아픔을 헤아려주는 사람은 보았어도 진하의 아픔을 걱정해주는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게다가 현우의 시선이 묘할 정도로 깊게 느껴져서, 진하는 저도 모르게 등줄기에 힘이 꾹 들어갔다.
“그런데, 언니네 어머니가 정말 미인이세요. 전 정말 처음 뵀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제가 만나 뵌 어르신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이었어요.”
처음 어머니를 만났을 때 입을 떡 벌리며 감탄을 금치 못 하였던 윤지가 그때의 감상을 다시 한 번 토해내며 흥분을 하였다.
“너 깜짝 놀라서 나한테 물어봤잖아. 언니 정말 친딸 맞느냐고.”
진하의 얘기에 윤지가 박수를 치며 깔깔 대었다.
“에이, 그냥 웃자고 한 소리죠. 언니도 예뻐요.”
“됐거든.”
엎드려 절 받기지만 칭찬에 쑥스러워진 진하가 퉁명스럽게 쥐어박았다.
“혹시 아버지께서 겨울에 돌아가셨나요?”
굳은 표정으로 묵묵히 앉아 있던 현우가 다 끝난 얘기를 다시 물었다.
“네. 어떻게 아셨어요?”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진하를 쳐다보며, 현우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겨울이 원래 사망 사고가 많이 나는 계절이라.”
“정말 그렇긴 해요. 저희 이모부도 겨울에 돌아가셨거든요.”
무표정하게 있던 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덕분에 맛있게 먹고 갑니다.”
현우가 나가자마자, 윤지가 다다다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언니, 사장님 표정 봤어요? 언니네 아버지 돌아가셨다니까 정말,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거!”
“그게 뭐! 사람 죽었다는데 그럼 웃으랴?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하고, 밥이나 마저 드셔. 얼른 먹고 치워야지.”
그렇지만 현우의 반응에 놀란 것은 진하도 마찬가지였다. 입장을 바꾸어놓고 생각을 해 보면, 그녀 자신은 그렇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 것 같지는 않았다.
“언닌 좋겠다!”
그만 하라는데도 기어이 한 마디 보태는 윤지를 황당하게 쳐다보고 있다가 이참에 버릇을 고쳐놓자 싶어서, 팔짱을 걷어붙였다.
“야, 오늘 자세히 살펴봤는데, 놀이터 사장님이 여기 나 보러 온 거 아니야. 내가 만든 음식 먹으러 오는 거야.”
“임도 보고 뽕도 따는 거죠.”
“웃기지 마. 음식에 집중하느라 나는 안중에도 없었어.”
“그래서, 섭섭했어요?”
진하가 푸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윤지를 살벌하게 째려보았다.
“이게 언니를 아주 갖고 놀라고 그러네.”
“에이, 언니도 사장님이 싫지는 않잖아요. 부추잡채 드셔보셨어요? 하고 묻는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르게 아주 상냥하고 우아하던데요? 평소 언니 모습이 아니야!”
사람 같지 않은 소리는 멍멍 짖게 내버려둬야 하는 법이건만 진하는 참지 못 하고 버럭 달려들고 말았다.
“야! 언제는 손님 대하듯이 하라며?”
“그러니까요. 내가 지금 언니 잘 했다고 칭찬하는 거잖아요. 앞으로도 쭉 여우짓 해요.”
윤지가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엉덩이를 톡톡 두드렸다. 허공을 응시하며 더운 콧김을 내뿜고 있던 진하가 윤지의 밥그릇을 홱 빼앗아 들었다.
“그만 먹어!”
“어, 언니! 이러는 게 어디 있어?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윤지의 격렬한 항의를 무시한 채 진하는 밥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전투적으로 걸어 들어갔다.
“너 지금 개님 무시하니? 네가 개님 보다 나은 점 다섯 가지만 대면 밥 도로 줄게.”
“뭐요!”
흥분해 달려드는 윤지를 피하는 진하의 입가에서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자그마한 식당 안을 가득 채웠다.
도망치듯 쁘띠 팔래스에서 나온 현우는 뚜벅뚜벅 미친 듯이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부터 호기심을 갖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모르는 척 제 갈 길을 갔어야 했는데, 기어이 열어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를 건드리고 말았다. 아버지의 여자는 무섭지 않다. 호기심이 채워지고 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면 그만이니. 그렇지만 아버지의 딸이라면 다르다. 호적에 올라 있건, 아니건 간에 피로 이어져 있는 혈육이 아닌가 말이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몰아세울 때마다, 아버지를 의심하며 혼자 히스테리를 부릴 때마다 현우는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피붙이가 하나만 있었으면, 수백 번, 수천 번을 꿈꾸었다. 그렇지만 막상 어머니가 둘째를 갖고 싶다는 욕심을 드러낼 때면 제발 어머니의 원 대로 되지 않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어머니가 둘째를 갖고 싶어 했던 것은 순전히 아이들을 좋아하는 아버지를 확실하게 붙들어 두기 위한 도구 이 이상은 아니었으므로. 너무나도 바랐지만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겼던 혈육이 정말로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니,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웠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그는 모르는 일이다. 더 깊은 수렁에 빠져서 옴짝달싹 못 하게 되기 전에 그만 발을 빼자.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는 거다.
이젠 동생으로 의심하나 보네요..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