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가자.”


“네?”


너무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는 이야기에 미유가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건은 그런 미유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뭔가 견디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아파서일까. 오히려 아픈 사람은 미유처럼 보였다. 화장기도 없이 부스스한 얼굴에 하얗게 일어난 입술을 보니 마음이 답답해졌다.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수도 있다, 는 공포는 그도 알고 있는 감정이었다. 아니 이미 잃었을 때의 슬픔까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미유의 창백한 얼굴이 그냥 지나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뭘 할 수 있지? 하는 자괴감이 그의 마음을 스쳤다.


“잠깐 나가. 얘기 좀 해”


상한 마음과는 상관없이 언제나처럼 딱딱하고 건조한 도건의 음색이었다. 그는 평소 그런 자신이 싫었지만 지금만은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강미유란 사람 때문에 마음이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걸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특히 눈앞에 있는 미유에겐 더욱 더.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오빠랑 저랑 무슨 할 얘기가 있다구요.”


미유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사레를 쳤다. 그 강력한 거부에 도건은 비죽, 심술이 돋아났다. 예전에도 그랬다. 처음의 강미유는 그의 호의를 한 번이라도 선뜻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미유의 성격 중에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도 그거였다. 하긴. 그런 점마저 좋았던 게 문제라면 문제일까. 그 땐 그랬다. 그의 말에 아니라고, 틀렸다고 그러는 것조차 전부 좋았다. 일단 미유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 때완 다르다.


“가. 일단 가자. 병실 앞에서 이렇게 계속 떠들래?”


별 것 아닌 그의 말에 그녀는 어색하게 병실문 쪽을 보더니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도건은 그게 자신의 제의에 응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는 미유의 어깨를 밀었다. 어깨에 와 닿는 미유의 어깨는 작은 새를 손에 안았을 때 느꼈던 그럼 촉감과 비슷했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금세 부서질 것만 같은 그런 느낌.


도란도란. 아기병아리의 지저귐 같은 찬별의 음성을 뒤로 하고 도건은 발걸음을 떼었다. 어느 새 그의 뇌리에선 병실문 안쪽의 찬별과 성훈은 까맣게 잊혀졌다. 미유를 보는 순간.



‘보았을까?’


두근.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니, 못 봤을 거라고 그녀는 미루어 짐작했다. 아니 도건이 찬별을 보았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심장은 못 말리도록 두근거렸다. 얼굴이 홧홧해지는 기분에 그녀는 도건에게서 고개를 들렸다. 사춘기 계집애도 아니면서 두근대는 자신의 마음을 책망하며. 애써 도건이 찬별을 보았을까 봐 그런 거라고 자신을 속였다.


“커피?”


“네.”


병원 밖으로 나가려는 도건을 미유가 잡았다. 금방 들어가 봐야 한다는 이유로. 실제로 그래야 하기도 했지만, 도건과 함께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도건과 함께 있을 때면 항상 그랬던 것처럼, 기분이 좋으면서도 불안했다. 심장의 두근거림의 한 편엔 언제나 불안함이 도사렸다. 지금도 그랬다. 반갑다는 마음은 조금이고, 불안함과 더불어 알 수 없는 감정에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아무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옆에 서 있는 윤도건이란 존재에게 온통 신경이 쏠릴 뿐이었다. 그래서 조금은 그녀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도건 옆에 서 있던 화사했던 여자의 모습이 떠오르자 더욱 그랬다.


철컹. 음료수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입술이 바싹 말라 와 그녀는 내심 커피가 반가웠다. 그녀는 도건이 커피캔을 내밀거라 생각하며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생각과 달리 도건은 캔커피를 바로 그녀에게 건네지 않았다. 도건은 캔의 입구를 한 번 닦은 후, 톡, 뚜껑을 열어 그녀에게 건네는 도건을 그녀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동작은 언제나 해왔던 것처럼 익숙하고 몸에 배인 것이었다.


“아, 습관이 돼서.”


그녀의 시선을 눈치 챘던 건지, 도건이 약간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 미세한 표정이었지만 미유는 알 수 있었다.


“약혼녀한테 이렇게 해주시나 봐요.”


의도와는 다르게 조금 퉁명한 느낌의 말투였다. 미유는 자신의 말투에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급히 입으로 가져갔다. 마치 질투하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질투하는 게 아니야! 그녀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질투라니, 당치도 않은 감정이잖아. 그런 걸 느낄 사이야 아니잖아. 그저 물어보려는 거였어. 그냥 그런 거였어. 그녀는 몇 번이나 자신의 생각을 곱씹었다.


“뭐.”


긍정도 부정도 아닌 도건의 애매한 말에 그녀는 심장이 바자자작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왠지 고통스러웠다. 이건 아니잖아. 그녀는 입술 끝을 깨물며 생각했다.


‘왜 또 심장이 뛰는 거야. 바보처럼. 윤도건은 이미 남의 남자야.'


“찬별이가 기다려서 가봐야 해요. 할 말 있으면 빨리 하세요.”


잠시였을까. 한참이었을까. 그의 옆에 선 순간, 시간감각을 잃은 미유가 기다리다 못해 입을 열었다. 까마득하게 오랜 시간 같기도 했고, 한번 훅, 하고 숨을 몰아쉴 정도로 짧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마조히스트가 아니었기에 결국은 아무 말도 않은 채 서 있는 도건에게 돌아섰다.


쨍-. 커피자판기만을 바라보며 서 있던 때는 몰랐다. 그가 이렇게 가만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그도 자신처럼 자판기를 보고 있거나 그 옆의 유리창을 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블랙커피보다 짙고 검은 눈동자가 눈부셔 미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지만 그러고도 도건은 말이 없었다.


"할 말 없으면 그만 들어갈게요."


“넌 할 말 없어?”


“네?”


“나한테 뭐 할 말 없냐고.”


이건 무슨 말이지? 마치 그녀가 그에게 꼭 할 말이 있어야 한다는 것 같은 뉘앙스잖아. 하지만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설마, 찬별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걸까?


수없이 많은 생각이 순간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알 리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도건의 추궁에 그녀는 잠시 얼어붙었다. 살며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니,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꺾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가 있다.


그의 얼굴 표정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할 말 있잖아, 얼른 말해 봐.’ 이런 것 같다. 입술을 꾹 다물고 눈에 있는 대로 힘을 넣으면 화가 난 것처럼 무서운 얼굴이 된다. 억지를 쓸 때면 짓는 저 표정, 은 아주 오래전부터 수도 없이 보아온 얼굴이다. 그는 미유에겐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저런 표정이기 일쑤였다. ‘그래서 뭐? 어쩌라구?’ 이런 표정인 날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 얼굴을 다시 보는 순간 느껴지는 격렬한 반가움에 그녀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째서 저런 짜증 섞인 표정마저 반가운 걸까.


“아, 아뇨.”


없어요, 그런 거.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겨우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그냥, 잘 지냈나, 궁금했다는 걸론 안 되나?”


“네?”


“그냥 궁금했어. 너랑 나, 거의 7년만이잖아. 그 7년보다 더 오래 알았던 우리, 아니 너랑 나니까 궁금해 할 수 있는 사이잖아. 그 동안 잘 지냈는지, 지금도 잘 지내고 있는지. 어머니는 건강하신지. 또, 아이가 아프다는데 어느 정도인건지, 치료는 잘 받고 있는지.”


그의 음성은 점점 더 커졌다. 크레센도라는 음악부호를 읽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얼굴 표정은 점점 차가워지고 무표정해졌다. 어떻게 보면 심드렁한 얼굴이기도 했다.


“난 안 궁금했어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어요. 오빠랑 난 그런 거 궁금해 할 사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이제 더 이상 이웃사촌도 아니고, 더 이상 애인 사이도 아니고.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그런 거, 안 궁금해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침착해. 침착하게 말하는 거야. 미유는 최대한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입을 열었다. 과연 정말 그런가? 하는 마음 한 구석의 의심을 접어둔 채 최대한 진심을 담은 목소리로 말이다.


“뭐? 아무 사이도 아니라구?”


뚝. 갑자기 볼륨을 줄인 라디오처럼 도건의 음색이 나지막하고 음산해진다.


“그럼 우리가 무슨 사이라도 되나요? 아니에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커피는 잘 마셨어요."


미유가 아니란 말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커피캔을 자판기 근처에 있던 쓰레기통에 던졌다. 텅-. 쓰레기통이 비어있었는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커피캔이 쓰레기통속으로 사라졌다. 미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도건에게서 멀어졌다.



‘난 안 궁금했어요.’


‘오빠랑 난 그런 거 궁금해 할 사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쁜 계집애. 도건은 이를 악물었다. 탕. 어두운 색의 책상을 힘차게 내려쳤지만 그는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했다. 지금 그의 몸이 자극에 반응하는 곳은 오직 심장뿐이었다.


'헤어지면 그대로 끝인가? 편안한 안부인사 정도도 못한다는 거야? 나는, 나는 이렇게 아직도 가슴이 쓰라린데? 너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그래?'


어쩌면 예상하고 있던 일인지도 몰랐다. 자신을 보는 순간, 어색하게 굳어지던 얼굴에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봐야만 하는 부담감이 어려 있었으니까. 제가 먼저 차버린 남자,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을 그 감정은 너무도 어렵지 않게 짐작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참담했다. 왜 그와 미유가 나눴던 8년의 세월이 그렇게 한 순간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려, 그에게 그렇게 모질게 헤어지자고 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그 때도 이해할 수 없었고, 그 후로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감히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너무나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녀는 말하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그런 사이, 가 아니라고.


왜 지금 또 이런 한심한 고민을 하고 있는가. 그는 자신이 답답해졌다. 왼쪽손가락에 자리잡고 있는 반지가 다른 때보다 더욱 묵직하게 느껴졌다. 이런 바보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순간에도 그는 누군가의 약혼자였다. 다른 누구의 의지가 아닌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윤변, 윤변.”


함께 경찰서에 들렀던 서변이었다. 이야기를 건넸던 것일까. 아무 것도 듣지 못한 것이 멋쩍어 도건은 씨익, 웃고 말았다. 차가 고장 나 택시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는 얘기에 조금 도는 길이었지만 데려다 주겠다고 한 길이었다.


“응.”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아, 별 거 아니야.”


“별 거 아니긴.”


“그냥 아까 경찰서에서 본 얼굴이 낯이 익어서. 익숙한 얼굴인데 생각이 안 나네.”


“윤변한테 낯익어봤자 뻔하지 뭐. 나쁜 짓 해서 잡혀들어왔던 놈들 밖에 더 있어?”


“그렇겠지? 안 그래도 김경사 앞에서 조서 쓰고 있긴 했는데. 이상하지. 인상이 나쁜 짓 할 사람은 아닌데, 하는 느낌이었단 말이야.”


“윤변이 그런 소리를 해? 나쁜 짓하는 놈 중에 얼굴 반반한 것들이 얼마나 많아? 알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소리 한다. 안 어울리게 왜 그래?”


“그렇지.”


동의하며 도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긴대로만 산다면 세상에 범죄는 없다, 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착하게 생긴 사람들이 저지르는 수많은 범죄를 본다면 도건의 말은 있을 수 없는 소리긴 했다. 하지만 남루한 옷을 입었으면서도 어딘가 낯익은 남자의 모습을 보는 순간 경찰서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윤변, 난 여기서 내려줘.”


“그래.”


“고마웠고, 다음에 이 원수는 술로 갚을게.”


“별 걸 다 챙기려 드는군. 들어가.”


“오케이.”


서변이 내리고 막 출발을 하려는 참이었다. 도건은 멈추어 선 곳이 성훈의 병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20분 정도만 달리면 있는 거리. 아직 하지 못한 사과라든지 화해의 말들이 입에 뱅뱅 돌았다. 분명 만나게 되면 마음에 있는 말이 십분의 일도 나오지 않을테지만 이대로 그냥 지나가기는 왠지 아쉬운 감이 있었다. 잠시 들렀다 갈까.


그 때 드르르륵, 드르르륵, 하고 도건의 핸드폰이 울렸다.


“윤도건입니다.”


-서연이에요.


어쩐지 조금은 들뜬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에 비해 도건의 표정은 조금 딱딱하다.


“예.”


-저녁 약속 있지 않았나 해서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럼 됐어요. 이따 만나요.


“알겠습니다.”


탁. 핸드폰을 조수석에 던져놓은 도건은 천천히 액셀레이터를 밟아 성훈의 병원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말이에요? 말도 안 돼.”


“뭐야, 너 그 말투는.”


“그럼 우리 엄마랑 나이가 똑같단 얘기잖아요. 그치만, 그치만 우리 엄마가 훠얼씬 어려보인단 말이에요.”


“어머, 찬별이. 선생님은 섭섭해. 나는 찬별이가 나를 이만큼은 좋아해주는 줄 알았더니.”


환자일 게 틀림없는 조그마한 아이와 의사 가운을 입은 한 여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에 도건은 쿡, 웃음을 터트렸다. 웃기는 얘기라고도 볼 수 없는 이야기였는데 그는 왠지 웃음이 났다. 도건은 자신의 진료실에 없는 성훈을 찾으러 간호사들이 말했던 병실로 향한 참이었다. 저 여자인가. 성훈이 이 병실을 자주 찾는 이유는 저 여자의사 때문이 아닐까, 하고 도건은 막연히 짐작했다. 붉은 립스틱이 강렬한 여자는 아이의 이야기와는 별개로 싱싱하고 활기찬 한 송이 튤립처럼 씩씩해 보였다.


“음, 물론 선생님도 좋지만 난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제일 좋아요.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제일 예쁘거든요.”


또랑또랑한 말투의 아이는 아이답게 여린 팔뚝에 주사바늘을 꽂은 채임에도 불구하고 양손을 크게 벌려 제일, 제일을 표현했다. 그 때문에 가슴이 덜컹한 건 그뿐이 아니었나보다. 빨간 립스틱의 의사선생님은 단박에 아이의 팔을 잡아 내렸다.


“알겠으니 진정하세요. 찬별이 엄마, 강미유 여사님이 제일 예쁘지요. 그래도 팔은 그렇게 들지 마. 알겠지?”


“네. 또 깜박했어요.”


“깜빡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지만, 이건 정말 굉장히 중요한 일이니까 까먹지 말도록 해. 알았지? 어이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찬별아, 금방 할머니 오실 거야. 할머니 오실 때까지 있으려고 했는데 오늘 할머니가 조금 늦으시네.”


“어유, 박선생님. 저희 있잖아요. 신경 쓰지 말고 얼른 일보러 내려가세요.”


“맞아요.”


옆에서 지켜보던 어머니들이 한 마디씩 거들자 박선생은 환한 웃음을 띄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든 제가 필요하면 연락하세요! 제가 화장실에서 큰 일을 보고 있더라도 꼭 달려오겠습니다.”


박선생이라 불린 여자는 손에 든 삐삐를 흔들어 보이고는 급했던 건지 부랴부랴 사라졌다. 문 밖에 서 있는 도건을 잠시 일별하고는 박선생은 금세 자리를 떠났다. 찬별, 찬별이라고 했던가. 강미유의 어린 자식은, 아들이었다. 밤톨을 깎아놓은 것마냥 생긴 저 어린 아이가 미유의 아들이었다.


이상했다. 한 쪽 가슴이 아릿해졌다. 대여섯 살은 먹었을까. 가느다란 팔, 하얀 얼굴의 아이는 씩씩하게 웃고 있었지만 가슴이 먹먹해지게 하는 느낌을 풍기었다. 도건은 잠시 자신의 이 병실을 왜 찾아왔는지조차 잊은 채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아니, 음 누구세요?”


넉살 좋게 인사를 하고는 이내 깜박했다는 듯 경계의 태세를 취한다. 그 모습이 마치 미유의 어린 시절 모습 같아 도건은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동그란 눈, 새초롬한 붉은 입술이 미유 그대로였다. 그 모습이 왠지 감동스러웠다. 저와 똑같은 모습의 분신을 만들어내다니. 새삼 미유가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엄마 친구.”


“우리 엄마를 아세요?”


“응. 강미유.”


“우아. 맞아요. 우리 엄마. 어떻게 아세요?”


“……. 옛날에 친구였어.”


“그랬구나. 지금은요? 지금은 친구 아니에요?”


지금은 아닌 걸까. 쌔앵, 찬 바람이 돌도록 돌아섰던 미유의 날카로운 얼굴이 새삼 오버랩된다. 그래, 지금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 것 같기도 했다.


“응. 친했던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아닌 것 같다.”


“싸웠어요?”


“글쎄.”


“싸우면 미안하다고 하는 거예요. 삐쳐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면 안 돼요.”


“그래.”


“아, 머리가 따끈따끈하다.”


“찬별, 그만 누워. 너 열나면 안 돼.”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찬별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더니 의자에서 일어나 찬별의 이마를 짚어보고는 찬별을 억지로 눕히고는 이불을 배부분까지 덮어주었다. 찬별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도건을 바라보았다.


“아저씨, 엄마는 이따 이따 내가 잠들면 올 거예요. 그러니까 저 잠들 때까지 여기 있어요.”


“그래. 알았어.”


도건은 처음의 용건이었던 성훈을 잊어버리고는 아이의 말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금세 피곤해진 아이의 얼굴에 냉철한 그 답지 않게 그만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다. 아이의 눈에 금세 졸음의 기운이 어리더니, 새근새근 금세 잠이 들었다. 숨소리가 조금 가쁘긴 했지만 한결 편안해진 모습에 그나마 마음이 놓여 도건은 이제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천사처럼 곱게 잠든 아이의 모습이 보고만 있어도 왠지 따뜻한 그런 기분을 자아냈다.


“윤도건.”


성훈이었다. 도건은 자신을 둘러쌌던 따스한 기운이 순식간에 사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무신경하게 큰 목소리에 금방이라도 찬별이 깨어날 것만 같아 불안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검지손가락을 들어 쉿, 하는 동작을 취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훈의 팔을 붙잡고는 밖으로 나섰다. 그런 그의 동작이 위태로우리만큼 신속했다.


“너 여기 웬 일이야?”


먼저 말을 꺼낸 건 성훈이었다. 당황스럽다고 해야할까, 넋이 나갔다고 해야할까. 성훈은 그런 황망한 표정이었다. 그런 표정에 오히려 당황한 건 도건이었을까.


“왜, 내가 있으면 안 되는 데냐?”


“……병원에 왔으면 날 보러 와야지, 왜 애먼 데 와 있나 해서 그러지.”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달짝이던 성훈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도건은 흘깃, 병실 안의 찬별을 바라보느라 어색한 성훈의 표정을 미처 눈치 채지는 못했다.


“네가 여기 있을 것 같아서. 역시, 여기서 만나게 되잖아.”


씨익, 도건이 그렇지 않느냐는 듯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픽, 헛웃음을 지으며 성훈은 따라오라는 듯 앞장을 섰고 도건은 그런 성훈의 뒤를 따랐다.





댓글 '2'

Junk

2010.09.13 02:53:57

너무 오랫만이라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할 듯... 다시 돌아가서 읽고 감상 달겠슴돠.

판당고

2010.11.14 03:07:30

도건이 알아차릴만도 하다는 것은 제 과욕이겠지요. 안타깝습니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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