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엄마.”


찬별이 멀리부터 그녀에게로 달려온다.


“넘어져. 뛰지 마.”


미유는 행여 상처 진 무릎에 다른 상처가 생길 새라 조심하라고 외쳤다. 돌이 밝힌 흙길이라 위험했다. 불안하게 달리던 찬별이 무사히 그녀의 품에 안겼다. 말랑한 아이의 살이 포근하게 와 닿아 그녀는 찬별을 휙, 안아 들었다. 그게 재미났는지 찬별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의 웃음 소리에 가라앉았던 마음이 다시 즐거워지는 기분이다.


“엄마. 산촌, 왔쪄.”


“삼촌?”


“응, 산촌.”


“산촌이 아니라 삼촌이야, 별아. 삼촌.”


“응. 산촌. 산촌 왔쪄.”


삼촌을 발음 못하는 찬별이에게 삼촌을 가르쳐주며 미유는 찬별을 안고 시골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게 얼마나 된다구 이래요. 딱 오백이라니까. 어머니한테 그 정도야 있을 거 아니유. 아들내미 죽는 꼴이 그렇게 보고 싶어요, 응?”


“죽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대신 나가서 하려무나. 집에서 행패 부리지 말고.”


“에이 씨, 나 정말. 집안 꼴이 이래서 내가 뭘 못해 먹잖아. 오백이 얼마나 된다고 그렇게 유세야, 유세는.”


퍽, 탱, 떼구르르.


엄마가 다듬고 있던 열무를 담은 통이 오빠 한수의 발길질에 봉당을 지나 마당으로 굴러 떨어진다. 연두빛 열무가 힘 없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오빠.”


미유는 급히 소리를 지르며 날아간 열무와 통을 집어 들었다. 요란한 꽃무늬가 그려진 티셔츠는 단추가 몇 개나 풀린 상태였고 아래 바지는 구깃구깃한 채 그것도 무언가 잔뜩 묻은 채였다. 꽤 먼 거리였는데도 마당까지 담배냄새와 술냄새가 진동이었다. 얼굴에는 밴드 몇 개가 엉성하게 붙어 있었다.


“아니, 우리 잘난 동생 아니신가. 마침 잘 왔다, 너. 돈 있지?”


“오빠. 밥은 먹었어?”


“밥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돈, 돈을 내 놓으라니까.”


“잠깐만 기다려.”


미유는 찬별과 열무통을 엄마 옆에 내려놓고는 급히 가방을 넣어둔 방으로 갔다. 지갑을 확인하니 어머니께 드리려고 가져온 50만원과 만 원짜리 몇 장 밖에는 없었다. 그녀는 차비만을 제외하고는 전부 손에 모아 쥐고는 급히 밖으로 나왔다.


“오빠, 여기. 지금은 이것 밖에 없어.”


그녀가 오빠의 두 손에 돈을 쥐어주자, 옆에 있던 엄마가 말리고 나섰다.


“그만 둬라. 네가 힘들어 번 돈을 뭐 하러 이런 불한당 같은 놈한테 줘. 됐어. 한수, 네가 염치가 있는 놈이니, 없는 놈이니.”


“아유, 정말 노인네가.”


한수가 거칠게 엄마의 팔을 뿌리쳤고, 미유는 놀라 휘청이는 엄마의 팔을 부축했다.


“엄마, 괜찮아. 얼마 안 돼.”


“에이, 정말 얼마 안 되잖아. 내가 담에 미용실로 한 번 갈테니까 돈 좀 해 놔라. 알겠냐?”


찍. 마른 마당에 침을 내갈긴 한수는 히죽 웃으며 돈을 주머니에 넣고는 건들건들 걸으며 사라졌다.


“엄마. 산촌, 무써워.”


찬별이 미유의 치마를 붙잡고는 파고들었다. 그런 찬별이를 보며 엄마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오지 마. 딱 발걸음을 끊어. 네 애비건, 네 오라비건 일절 상대하지 마.”


“엄마.”


“그 방법 밖에 없어. 찬별이가 이렇게 커 가는데 돈을 모을 생각을 해야지. 조금씩이라고 두 인간들 퍼주다가는 남아나는 게 없어. 이제 여긴 오지 마라.”


“그래도 어떻게 해요. 아빤데, 오빤데.”


“진짜 아빠라면, 진짜 오빠라면 이렇게는 안 한다. 이렇게는 안 해. 남이라고 생각하고 모진 마음을 먹어.”


엄마의 한 맺힌 절규가 눈부신 햇살 아래에 울려 퍼졌다. 30년을 도박을 하며 빚쟁이로 떠도는 아빠의 뒷수발을 하다 지친 엄마의 옹송그린 어깨가 애처로웠다. 미유의 두 눈에 핑, 눈물이 돌았다.


“내가 열심히 벌게, 엄마. 열심히 벌어서 엄마 허리도 낫게 해주고, 찬별이도 잘 키울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할머니, 울지 마요. 으으엉, 울지 마요.”


“아니야, 찬별아. 할머니 우는 거 아니야. 뚝.”


봉당에 주저앉은 할머니 곁에서 찬별이 함께 울기 시작했고, 엄마는 어느 새 그런 찬별을 달래기 시작했다. 미유는 그 곁에서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그렇게 서 있었다.



‘그냥 헤어지면 섭섭하겠지.’


전혀 섭섭하지 않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무심하고 어떤 감흥도 없는 목소리였다. 검은 눈은 차갑고 냉랭했다. 15년 전 도건을 처음 만났던 그 때보다도 더욱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떨렸다. 가슴이 쿵, 내려 앉는 기분이었다.


변했을텐데, 분명 7년의 시간 동안 그녀의 마음 어딘가는 변했을텐데 그를 보는 순간 떨렸던 가슴이 너무나 서러웠다. 왜 아직도 그대로인 거야. 내 마음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거야. 잘 사는 모습 보여주고 싶었는데, 다시 보게 된다면 웃는 얼굴로 마주하고 싶었는데. 그 어느 것 하나 그녀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엄마, 엄마.”


“응?”


챙그랑. 설거지를 하던 미유는 갑작스런 찬별의 부름에 들고 있던 얇은 접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주방 바닥에 하얀 접시 조각들이 부서지며 흩어졌다.


“전화. 엄마, 전화 왔어.”


찬별이 놀란 눈으로 바닥을 보고 있다. 다행히 접시 조각들은 그녀 주위에만 흩어져 있다.


“오지 마, 찬별아. 거기 그냥 있어. 엄마가 갈게.”


다행히 실내화를 신고 있었기에 그녀의 말은 무사했다. 그녀는 일단 조심해서 찬별이 쪽으로 걸어가서는 무선전화기를 받아들었다. 다른 손으로는 찬별이 움직일까봐 식탁에 앉혀 붙잡았다. 잠귀 어두운 엄마가 잠에서 깨지 않아 다행이었다.


“여보세요.”


“나야, 성훈이.”


“아, 오빠. 무슨 일이야?”


“검사 결과가 나왔어......내일, 병원에서 보자.”


“전화로는 말할 수 없는 거야?”


미유의 얼굴이 불안으로 굳어졌다. 찬별이 해맑은 표정으로 깨진 접시가 있는 쪽을 보고 있다. 금방이라도 내려갈 것 같은 표정이다.


“아니야. 그냥 미유 네 얼굴이나 한 번 볼까 하는 거지.”


“오빠.”


“찬별이랑 같이 나와. 맛있는 거 사줄게.”


“알았어.”


불안함에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헤딩은 맨땅, 가진 건 맨몸, 땐스는 맨홀, 막나가기이~. 조깅은 맨발, 식사는 맨밥, 땐스는 맨홀, 막나가기이~.”


“사랑은 황홀, 임무는 소홀, 땐스는 맨홀, 막나가기이~. 난 그대 곁에 있고 싶은데 왜들 그리 방해하는데~. 말하자면 파란만장. 지구고 뭐고 파괴해 버릴까아~.”


캐로로 중사의 엔딩곡을 부르며 개구리 춤까지 불사하는 찬별을 보며 미유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엄마가 웃는 모습에 찬별은 더욱 더 몸을 요란하게 흔들었다. 불안함 마음을 애써 죽이며 미유는 찬별을 보며 더욱 환하게 웃었다.


“하하, 찬별아, 그만해.”


“엄마, 왜? 재미없어?”


“너무 재밌어서 웃었더니 배가 아프려고 하잖아.”


“정말? 많이 아파?”


자신의 말에 걱정스런 얼굴로 다가오는 찬별 때문에 그녀는 순간 행복해졌다.


“아니야, 안 아파. 그런데 엄마 아프면 어떻게 해주려고?”


“호오, 해주려고 그랬지.”


호오, 하고 입술을 귀엽게 모으는 아들을 보던 그녀는 아들의 볼에 쪼옥, 입을 맞추었다. 세상 어떤 것보다도 사랑스럽고 귀한 아들이었다. 그런 찬별이게는 무슨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마음을 다잡으며 그녀는 찬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엄마, 사랑해.”


태어났을 때부터 한 시도 입에서 놓지 않았던 사랑해, 라는 말이 찬별의 입에서 쏟아졌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는 처음 고백을 받는 소녀처럼 괜히 울컥해졌다.


“응, 엄마두 찬별이 사랑해......그럼 다시 가 볼까?”


그녀는 눈물이 울컥하는 걸 참으며 명랑하게 입을 열었다. 아들에게는 세상의 밝고 아름다운 것만 보여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었다.


“응.”


“가자. 저기 벤치까지 누가 먼저 가나 내기할까? 자, 준비.”


“엄마, 잠깐만. 내가, 내가 땅, 할래.”


“그래, 별이가 해 봐.”


그녀의 말에 별이 진지하게 달리기 자세를 취하고는 ‘하나.’하고 우렁우렁하게 외쳤다.


“땅!”


찬별이 구호와 함께 신나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런 찬별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아, 미유 왔구나.”


“안녕하세요.”


찬별이 허리를 숙여 공손하게 인사를 했고 미유는 그런 찬별을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찬별이도 안녕. 거기 앉아서 잠깐만 기다릴래?”


컴퓨터 앞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성훈은 그녀와 찬별을 보자 반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급한 게 있는지 이내 다시 컴퓨터 앞에 주저앉았다.


“응. 천천히 해. 기다릴 수 있어.”


후우. 명랑하게 말했지만 미유는 긴장감에 속으로 숨을 내쉬었다. 소아과인지 동물무늬라든지 꽃무늬로 분위기를 주었지만 병원이라는 긴장감을 숨기기엔 역부족이었다. 병원 특유의 소독 냄새와 걱정으로 위가 뱅뱅 꼬일 것만 같은 기분이다.


“휴우. 겨우 끝났네. 미안. 갑자기 정리해야할 서류가 생겨서 말이야.”


“괜찮아, 오빠. 그보다 빨리 얘기해 봐. 뭐야. 무슨 일이야.”


“그래. 찬별아, 우리 찬별이 아이스크림 먹을래? 여기 누나랑 가면 아이스크림 사줄 거야.”


“엄마.”


아무데도 이상이 없을 거란 말을 기대했는데.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응, 갔다 와.”


“응. 갔다 올게.”


정간호사의 손을 붙잡고 나가는 찬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미유는 그녀의 앞에 와서 앉는 성훈을 똑바로 쳐다본다.


“이제 말해 봐.”


“커피라도 한 잔 할래?”


성훈은 그녀의 눈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말을 빙빙 돌린다.


“아니. 됐으니까 말 돌리지 말고 빨리 얘기해 줘. 대체 무슨 일이야. 우리 찬별이한테 무슨 병이라도 있는 거야?”


그녀의 말이 빨라지고 조급해졌다. 뜸을 들이면 들일수록 불안해졌다.


“처음 병원에 왔을 때, 넘어진 상처라고 하는데 지혈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도착했어. 그랬기 때문에 유치원 선생님이 굳이 병원까지 데려왔다고 하더군. 그것부터 찬별이의 안색이 좋지 않았어. 낯빛이 창백해서 정말 혹시나 했었어. 검사를 한 건 그런 불안감이 진짜가 아니길 바라서였어. 아무 일 없이 튼튼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니라는 거야?”


“재생불량성빈혈이 의심 돼. 골수 검사를 해 보자.”


땅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미유는 앉은 자리에서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휘청거렸다. 성훈이 미유의 옆으로 다가가 그런 미유의 팔을 부축했다.


재생불량성빈혈. tv에서나 들었음직한 병명이었다. 그녀에게, 아니 그녀의 별이에게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하느님, 맙소사. 이건 말도 안 돼요. 우리 별인 아직 어려요.


“뭐?”


“재생불량성빈혈. 골수에서 혈구세포의 생성이 감소되거나 결여되어 적혈구의 감소에 따른 빈혈뿐만 아니라 백혈구 및 혈소판 등 모든 혈액세포가 감소되는 질환이야.”


“오빠, 다시 검사해 보자. 결과가 잘못 나왔을 수도 있잖아.”


“그래. 검사해 보자. 그래서 오라고 한 거야. 정확하게 골수검사를 해 보자. 내 소견이 틀릴 수도 있어.”


그녀는 성훈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럴 리 없어. 그럴 순 없어.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그녀는 중얼거렸다. 귀신에 홀린 듯 멍한 느낌이었다.


“골수검사. 골수검사.”


“미유야.”


“무서워. 진짜면 어떻게 해. 우리 찬별이 정말 그런 무서운 병 걸린 거면 어떻게 해. 어떡해......어떡해, 오빠.”


미유는 성훈의 팔에 매달린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미유의 가느다란 팔이 성훈에게 매달려 위태롭게 흔들렸다. 차마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성훈은 차라리 눈을 질끈 감았다. 의사인 그로서는 그녀에게 달콤한 위로의 말조차 건넬 수가 없었다.


“강미유, 정신 차려. 네가 이렇게 흔들리면 어떻게 해. 일단 검사를 하자. 정말 찬별이가 그 병에 걸린 거라면 오빠가 최선을 다할게. 뭐든지 할게.”


“응. ”


“그래. 그러니까 울지 말고 정신 차려.”


그래, 정신차리자. 강미유, 정신 차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괜찮아. 아무 일 없을 거야. 골수검사 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나올 거야. 그럴 거야.


그녀는 자꾸만 무너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두려움에 온 몸이 떨려왔다.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아들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가정만으로도 그녀는 미칠 것만 같았다. 그 사람이 없으면 죽어버릴 것 같았던 7년 전에도 이런 감정은 아니었다. 그 때는 찬별이 함께 그녀를 지탱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없다.


툭. 툭.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차가운 병원 바닥을 적셨다.







글을 써야 하는데;; 비축분만으로 버티기 힘들어 천천히 연재를 하고 있어요.
그래도 이젠 좀 써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드네요.
그래도 언젠가는 완결도 하고 그런 날이 오겠죠.
희뿌연 황사 뿐이라 해도 봄이 너무 좋네요.


댓글 '3'

하늘지기

2010.04.13 16:16:06

찬별이때매 도건이를 찾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위니

2010.04.14 02:49:46

해딩은 맨땅.밥은 맨밥..아..이노래..은근히 슬프네요..왠지 미유의 처지를 빗대는 노래같아요..ㅜㅠ

판당고

2010.04.14 20:42:29

저도 노래 슬폈어요. 케로로 중사는 안봤지만 캐릭터나 본 친구들이 다들 너무 재밌고 유쾌하다고 했는데 노래랑 너무 달라서요.
그리고 저는 봄은 봄답게 좀 따뜻했으면 좋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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