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unk paradise
- 소설
- 연재소설
24
아드리안은 예나가 아무런 방비 없이 차가운 물에 떨어지기 직전에 간신히 그녀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더 생각할 틈도 없이 아드리안은 타는 듯이 뜨거운 그녀를 완전히 감싸 안았다. 그리고 온몸으로 물에 떨어질 때의 충격을 혼자 견뎌 냈다. 너무나 높은 곳에서 떨어졌던 터라 한동안은 제어할 수 없이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기만 했다. 하지만 물 속에서 오래 있었다가는 인간의 몸을 가진 예나가 얼어붙거나 숨이 멈춰 버릴 게 뻔했기 때문에 아드리안은 다시 온 힘을 다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힘껏 저어서 수면 위로 올라가자 그때까지 눈을 감고 죽은 듯 축 늘어져 있던 예나가 희미하게 눈을 떴다. 그리고 젖은 얼굴로 잠깐이나마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살아 있는 데 안심하고 숨을 들이쉬던 아드리안은 예나가 내뱉은 말에 잠시 창백해졌다.
“내가 기억을 찾을까 봐 무서워요?”
아드리안은 예나를 안은 채 물 속에서 그대로 아무 말도 못하고 예나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엄마가 죽은 게 그렇게 안타까워요?”
도대체 무엇을 기억해 낸 것일까. 엄마라니, 그 여자를 말하는 건가. 그때의 기억은 다 지워졌을 텐데.
“내가 당신을 기억할까 봐, 두려워요?”
예나는 파랗게 얼어서 잘 떼어지지도 않는 입술로 그렇게 뜬금없이 자기 할 말만 하고는 다시 의식을 잃어 버렸다. 아드리안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예나를 안고 기슭을 향해 헤엄쳐 갔다. 주위가 어디인지 확실하게 알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날아오르련만, 꽤 긴 시간을 떨어져 내린 이 지하의 강이 어디쯤을 흐르고 있는 것인지 아드리안은 당장 알 도리가 없었다. 아드리안은 천천히 떨어지도록 주문을 걸어 예나를 기슭으로 올린 후, 자신은 그냥 맨몸 그대로 뛰어 올라갔다.
주위는 축축하고 시커먼 바위 동굴이었다. 곳곳에 박쥐가 거꾸로 매달려서 침입자들을 향해 날아올 준비를 하는 곳, 원래의 물 색깔을 알 수 없는 시커먼 지하수가 무서운 소리를 내며 땅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가는 곳이었다. 아드리안은 예나를 다시 안아들었다. 안 그래도 무거운 드레스가 물을 먹고 축 늘어져서 엄청난 무게로 예나를 잡아끌었다. 아드리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빠른 손놀림으로 예나의 드레스를 벗기고 거대한 틀과 코르셋을 풀었다. 그러고도 아직도 남은 속옷이 많았지만, 일단 예나가 숨을 좀 편하게 쉬는 걸 확인하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축축하고 공기가 나쁜 곳에서 알몸으로 만드는 것도 몸에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아드리안은 신중하게 걸음을 옮기고, 자신이 있던 흔적을 대기에서 지웠다. 마지막으로 싸워 본 때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한 여인의 의미심장한 말이 머리를 메우고 있어도 아드리안은 전사였고 사냥하는 법을 아는 사냥꾼이었으며 그래서 사냥당하지 않는 법을 아는 영리한 사냥감이기도 했다. 기척을 숨기고 발자국을 숨기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주위로 발산되는 존재감을 지우자 물에 젖은 한 여인을 어깨에 얹고 가는 평범한 한 남자만이 남았다. 아드리안은 그런 자신의 모습에 씁쓸한 박수를 보내며 걸음을 재촉했다.
동굴 밖으로 나가는 출구는 몹시 좁았다. 아드리안은 안심했다. 출구가 좁다는 것은 밖에서 들킬 가능성이 적다는 뜻이었다. 예나를 품에 안고 최대한 웅크려서 바위와 바위 사이를 빠져나왔다. 옷이 찢어지고 살이 조금 긁혔다. 상관없었다.
나오자마자 보인 풍경은 익숙한 숲이었다. 테르비낙. 아드리안은 위험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익숙한 방향으로 목적지를 잡았다. 예나가 자랐던 곳, 그 여자가 혼자서 예나를 기르던 곳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 오두막은 깨끗이 치워 두긴 했지만 세월이 흘러 먼지가 가득 쌓였을 것이다. 올레인들이 루치안이나 제니를 다그친다면 쉽게 발각될 수 있는 곳이긴 했지만, 제니는 죽었고 루치안은 웬만한 고문을 받아도 입을 열지 않을 테니 위험하다는 것은 과민한 판단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웬만한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었다.
아드리안은 움직여 가면서 마음속으로 자신의 충실한 종들을 불렀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게,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네 주인의 부름에 답하여 이리 오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숲 곳곳에 흩어져 있던 종들이 고개를 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드리안은 그들의 철저한 호위 속에서 오두막까지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예나를 적당한 곳에 내려 두고 오두막 안에 쌓인 먼지를 털면서도 아드리안의 눈은 자꾸 예나 쪽을 향했다. 그리고 어느 새인가 예나가 했던 질문에 마음속으로 답하고 있었다.
‘내가 기억을 찾을까 봐 무서워요?’
글쎄.
‘엄마가 죽은 게 그렇게 안타까워요?’
아니. 그 여자는 스스로 화를 자초했지. 그대로 하루만 더 견디다가 나와 약속한 대로 널 멀리 보냈다면, 그런 식으로 끔찍한 죽음을 맞을 일도 없었을 텐데.
다시 생각해 보면 정말로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여자는 무엇을 알고 있었던가. 누구의 말을 들었던가. 누구를 부르려 했던가. 마치 금지된 단어를 뱉으면 터지는 폭약처럼, 채 말을 다 하기도 전에 그 여자는 죽어 버렸다. 다시 살아난다면, 다시 그 여자에게 질문할 기회가 온다면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그 비밀을 누설했는가 묻고 싶었다. 자신을 위해서? 예나를 위해서? 아니면…… 나를 위해서? 그것을 알면 지금 이런 식으로 틀어진 상황에 좀 더 잘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이제 와서는 모든 게 다 늦었는지도 모른다. 연회장은 난장판이 되었고, 나는 올레인들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왔고, 네체르는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빛내고 있었으니. 어느 쪽이든 간에 한쪽은 끝을 맞이할 것이다. 어쩌면 양쪽 다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일은 극단까지 가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상관없다. 어느 쪽이 되었든 예나는, 오즈리크는 다시 태어날 테지. 결국 올레인도 자신도, 끝없이 되살아나는 신의 축복에 대항하여 저주받은 자신의 존재를 잠깐 잊고 싶은 것뿐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먼지를 치우고 한쪽에 불을 피우려다가 아드리안은 멈췄다. 오두막 안이니 밖에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불은 많은 것을 꾀어 들인다. 예나의 옷을 말리는 것은 다른 힘을 쓰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차갑게 식어 가는, 덜덜 떠는 예나의 몸을 보면서 아드리안은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예나는 자신의 힘이 듣지 않았다. 아마도 어떤 올레인의 힘이라도 튕겨낼 것이었다. 예나 자신에 대한 명령은 무엇이든 듣지 않았다. 아드리안은 황급히 옷을 벗었다. 그리고 예나의 옷을 벗기고 자신의 옷을 순간적으로 말려서 예나의 몸을 닦았다. 아드리안은 조금 망설였다. 하지만 파랗게 변해 가는 예나의 입술을 보자 번개 같이 예나의 알몸을 끌어안고 망토로 자신과 예나를 완전히 감쌌다. 차갑고 매끄러운 알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떠는 연약한 몸이 그대로 느껴졌다. 아드리안은 자신에게 체온이란 것이 남아 있음을 안도하며 그대로 예나를 꾸욱 끌어안았다. 예나의 차가운 숨결이 가슴에 닿았고, 아드리안은 심장까지 얼어붙는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 예나의 눈 감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당신을 기억할까 봐, 두려워요?’
그래.
두렵다.
이렇게 모든 게 엉망으로 꼬이고 네 생명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러서도, 네가 나를 기억하는 것이, 네가 나에게 죄를 물을 것이 두렵다.
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무섭다.
네가 그 얼굴로 나를 탓하고 품에 안기면, 그 오랜 세월이 물거품이 되든 말든 그대로 너를 안고 안주해 버릴 거라는 것이, 그럴 내가 무섭다.
그러니까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으로 설 수 있도록, 올레인에게서 너를 숨겨온 지난 세월을 헛되지 하지 않도록. 만약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네가 실망하는 얼굴쯤 잠깐이라도 아무 표정 없이 넘길 수 있기를. 심장이 절반쯤 날아가 숨쉴 수 없게 된대도 나는 끝까지 서서 죽음을 맞이하리라. 부디 이런 내게 실망하여 혼자서 훨훨 날아가기를. 나의…….
아드리안은 어느 새 예나의 이마를 쓰다듬고 있던 자신을 깨닫고 깜짝 놀라 손길을 거두었다. 예나의 얼굴은 많이 혈색이 돌아와 제 색깔을 찾았다. 이제 예나는 보일듯말듯한 미소를 머금고 아드리안의 품에 뺨을 대어 왔다. 아드리안은 다시 한 번 기원했다.
부디, 이대로 내가 떠나기 전에 깨어나지 않기를. 아무 걱정 없이 볼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오래도록 계속되기를.
그러나 그 기원을 듣기라도 한 듯, 예나가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
안녕하세요!
드디어 무대가 다 갖춰졌다(?)고 평할 만한 순간까지 왔습니다. 죄송하지만 이제부터는 간격에 얽매이지 않고 심혈을 기울여 써 보려고 합니다. 월목 연재는 지키기 힘들 것 같고, 오늘처럼 한 장이 되는 대로 올리겠습니다. 이제 중요한 장면들만 남아서 벌써부터 힘들군요. 그럼 조만간, 되도록 빨리 찾아뵙겠습니다!
아드리안은 예나가 누군지 알고 있었던 거로군요.
예나는 환생을 한 건가요? 신에 의해 기억만 봉인당한건지...
궁금증이 부글부글 끓고 있습니다. 호홋. 자하님이 글로 잘 풀어 주시길
기대하면서...기다리고 있겠습니다아~^^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