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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안은 춤을 추면서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너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올레인들은 만사 다 포기한 듯이 조용히 있다가도, 무언가 재미있게 전개될 만한 일이 있으면 놓치지 않고 물어졌다. 그중 가장 빈번히 일어나면서 결과도 만족스러울 만큼 소란스러운 일이 아드리안과 네체르의 대립이었다. 네체르 쪽에서 조용히 도발하여 아드리안이 성을 내든, 아드리안의 초지일관 계속되는 무시와 강압에 네체르가 세르자크 같은 주위 사람을 내세워 소란을 일으키든, 그 사태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올레인들에게는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회의 때건, 연회 때건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심심할 틈이 없었다. 자신의 구역에서 조용히 인간을 부리고 소유물을 끼고 있다가, 회의 기간만 되면 이 구경을 하기 위해서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오는 올레인도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유머였다.


그런데 오늘은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처음에 예나를 내보이지 않으려고 가렸을 때 시비를 걸긴 했지만, 아주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고 해야 하나? 그것은 전적으로 그 바보가 자기한테 이제부터 돌아올 시선들이 어떤 건지 모르고 말썽이 일어나지 않기만 바랐기 때문이고, 바보처럼 자신이 그 눈빛에 약해서 냉큼 뒤로 물러서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체르 쪽에서는 어째서 그냥 뒤로 물러나 버린 걸까?


갑자기 네체르가 무엇을 얼마큼 알고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예나가 보여 준 그녀의 모습을, 그녀와 똑같은 춤 추는 버릇을 네체르 또한 알아채진 않았을까? 몰랐더라도, 얼굴이 굳어서 예나를 잠깐이나마 아무 말 없이 바라보던 자신의 모습을 보진 않았을까? 네체르는 옛날부터 이상하게도 자신의 기분에 대해 민감했으니 충분히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게다가 네체르는 예나의 다음 파트너이다.


결국 아드리안은 파트너가 다른 밤들 사이를 돌 때에, 아닌 척하면서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예나를 찾으려고 했는데, 얼굴이 굳은 네체르가 먼저 눈에 띄었다. 네체르의 곁에는 예나가 없었다. 어떻게 된 건지, 예나는 어디에 있는지 찾으려고 황급히 고개를 돌리기 직전에, 네체르가 미소를 짓는 게 보였다. 사이가 갈라진 이후로 수없이 보아 왔던 가면의 미소가 아니라 아주 씁쓸하고 자조적인 미소였다. 아드리안은 네체르가 그 미소를 마지막으로 지었던 때를 기억했다.


‘이후 당신을 친구라고 부르는 일은 없을 겁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을 거고. 당신 같은 반역자에 쓰레기 같은 자와 알고 지냈다는 사실이 수치스럽습니다.’


이제 와서 그때의 미소를 다시 짓다니, 몹시 의심스러웠다. 아드리안은 파트너의 춤 진도를 곁눈으로 살피면서, 다시금 예나를 찾았다. 네체르는 그 와중에도 자신의 충견이나 다름없는 세르자크를 예나에게 붙여 두고 있었다. 어째서? 왜 예나 옆에 붙어 있지 않고 세르자크를 붙였으며 왜 자신을 보고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인가? 아드리안은 다시 네체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십니까? 괜찮아요?”


갑자기 세르자크가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드리안은 예나를 돌아보았다. 예나가 온몸에서 빛을 내뿜으면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예나의 발 밑에서는 연회장 바닥이 조금씩 갈라지고 있었다.


“이런!”


아드리안은 춤이고 뭐고 내팽개치고 대열을 이탈했다. 어차피 올레인들 또한 그쪽을 보느라 모든 것을 멈추고 있었다. 우뚝 서서 그쪽을 재미나다는 듯이 구경하는 올레인들 쪽을 헤치며 나아가는 그 한 순간 한 순간에도, 예나 밑의 바닥은 점점 더 갈라졌고, 예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점점 더 짙어졌다. 아드리안은 달려가면서도 누가 저런 짓을 했는지 당장 찢어발겨 주고 싶어서, 예나가 계속 중요한 할 말이 있다고 한 걸 무시한 자신이 바보 같아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때 올레인 사이에서 누군가 먼저 말했다.


“오즈리크다!”


그러자 홀린 듯 가만히 서 있던 다른 올레인들까지 퍼뜩 깨달은 듯 저마다 오즈리크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올레인들이 보자마자 알아보는 것, 그리고 예나가 나타내는 증상을 보고 아드리안은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렸다. 그 옛날 올레인과 메나르가 전쟁을 벌일 당시에 메나르를 색출하기 위해서 특수 제작한 약품이 있었다. 그것을 바르거나 가까이 대면, 메나르가 아니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메나르는 온몸이 발열하면서 착란 현상을 일으켰다. 착란 현상의 부작용으로 주위에 그 피해가 옮겨가기도 했다. 바로 예나 발 밑에서 깨지고 갈라지는 바닥처럼. 아드리안은 도대체 누가 저런 걸, 그렇게나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갖고 있었으며 무엇을 노리고 여기에 가져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단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누군지 알게 되면 자신이 그자를 죽여 버리리라는 사실을.


“어디를 가는 겁니까?”


갑자기 눈앞을 네체르가 가로막았다. 아까의 자조적인 미소는 사라지고 다시 가면을 쓴 듯한 얼굴에 아드리안은 구역질이 났다.


“비켜라.”


“어디를 가시느냐니까요?”


능글맞은 미소를 띄운 채 네체르 자식은 예나 쪽을 돌아보았다. 아드리안은 더 말할 것도 없이 허공에서 자신의 검을 불러냈다. 네체르가 한 번만 더 같은 물음을 물으며 길을 비키지 않는다면 베어 버릴 생각이었다.


그때 예나의 발 밑이 와장창 무너지면서 예나가 노랗게 타오르는 몸으로 떨어져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아드리안은 네체르가 말하기도 전에 위협적으로 검을 주위에 휘둘렀다. 어느 새 올레인들이 적대적인 눈매로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여유롭게 눈웃음을 흘리는 네체르가 있었다.


“비키라고 하신다면야, 힘 없는 저로서는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만, 우리 이거 하나는 분명히 해 둡시다.”


“잔말 말고 비켜라.”


“당신이 지금 이 자리에서 저 여자를 쫓아간다면, 우리는 당신이 이제까지 오즈리크를 고의로 숨기고 있었으며, 고로 당신이 반역자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허울만 좋은 수장이 꼭 지켜야 할 계율이 무엇인지는 당신이 더 잘 알 터.”


올레인들은 주위에 모여서 가면을 벗고 아드리안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서 당신이 정말로 자신들을 속였느냐는 비난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아드리안은 가면을 쓴 채로 그들을 돌아보고 네체르에게 다시 고개를 돌려 단 한마디를 물었다.


“그래서?”


담담하고 되바라지고 더 이상의 말을 가로막는 듯한 그 말투에 네체르가 너 참 안됐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결국 당신의 의무를 저버리시는군요. 마지막으로 드린 기회였건만.”


“아니, 그게 아니다.”


아드리안은 거칠게 가면을 벗어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커다란 검을 한 손으로 들고 마치 선언하듯이 올레인들을 향했다.


“내가 죄인의 몸으로 이따위 죄인의 우두머리 짓을 계속하고 있었던 건 단지 오즈리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너희들 중 누군가가 오즈리크를 위험에 빠뜨렸다. 이제 너희는 내가 보호할 족속이 아니다. 반역자든지 죄인이든지 맘대로 불러라. 또다시 내가 오즈리크를 잃는 일이 생기거든 세상 끝까지 너희들을 하나하나 베러 가겠다. 그게 공평하겠지, 안 그런가?”


“이봐, 아드리아누트…….”


고요한 가운데 세르자크가 뭐라고 말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더 이상 시간을 끌 수가 없어 검을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아래위로 회오리치듯 몸을 돌리며 일으킨 검풍으로 주위의 모든 올레인을 날려 버렸다. 예나가 떨어진 구멍까지는 멀었다. 아드리안은 단번에 구멍으로 뛰어가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뛰어내렸다. 저 앞에는 희미하게, 아직도 빛나고 있는 예나가 떨어지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가슴에서부터 소리를 내지르면서 자신도 한 줄기 빛이 되어 예나를 쫓아갔다.


네체르는 미소를 머금은 표정 그대로 위에서 그것을 지켜보았다. 주위에 있는 올레인들은 얼굴이 굳거나 사색이 되어서 웅성대고 있는데, 그 혼자 기쁜 듯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네체르는 이제 깊이깊이 떨어져 보이지도 않는 아드리안에게 말을 걸듯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게나 원하신다면, 기꺼이 없애 드리지요.”


네체르의 입가에 정말로 천진하고 즐거운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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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겨우겨우 월요일에 올렸네요. 여전히 짧지만.
오늘의 포스트잇: 아드리안의 무기에 대한 이야기를 앞에서 보충할 것. 전쟁에 대한 에피소드도 미리 등장시킬 것.

이번 편 쓰면서 와호장룡 주제가를 계속 들었습니다. 영어 제목이 A Love Before Time 이에요. 무협이지만 끝없는 밤 주제곡이 될 것 같은 강력한 예감!


댓글 '4'

애플

2006.01.23 23:50:50

네체르 진짜 재수없네요...범인은 네체르인듯...예나 이제 위험해진건가요 ㅜ.ㅜ

Junk

2006.01.25 00:07:09

헉, 마지막 네체르의 말이 의미심장...

애플

2006.01.27 01:10:22

어제는 안올라왔네요 ㅜ.ㅜ역시 설 근처라 바쁘신가보네요~

자하

2006.01.27 13:44:52

죄송합니다. ㅠ_ㅠ 설 연휴 월요일까지 쉬겠습니다. 미리 말하지 못한 펑크는 처음이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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