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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주위는 피로 가득했다. 팔이 꺾인 채 힘없이 엎어진 사람들 위로, 그들에게 꽂힌 칼날 아래로, 반짝이는 머리카락 사이로 붉게 흐르던 피가 조금씩 말라붙었다. 까마귀들이 내려앉았다가, 한때는 지상을 지배했던 위대한 한 종족의 시체를 탐할 수 없는지, 오히려 지키듯이 날갯짓을 했다. 그들의 붉은 피가 말라붙고 땅으로 스며들어 그 원한과 저주를 아래로 아래로 내려부을 때, 그 사이로 두 사람만이 살아서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남자와 여자였다. 흑과 백이었다. 공격자와 방어자였다. 가해자와 피해자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한몸이라도 된 듯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검고 검은 남자가 희디흰 여자에게 말했다.
“가. 도망가. 여기는 내가 막을 테니까.”
“그러면 당신은?”
“죽이면 죽였지, 죽지는 않을 거다.”
“죽을 거야, 아무리 당신이 강해도 계속 싸우다간 죽고 말 거라고! 그러면 내가 어디에 숨은들 무슨 소용이 있어!”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냐!”
검은 남자가 절규처럼 내지른 소리에 흰 여자가 입을 다물었다.
“널 내주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동족을 죽이고 말지! 차라리 그 손에 내가 죽고 말지! 널 잃느니! 네가 죽는 걸 보느니!”
“안 돼.”
여자가 남자의 머리를 껴안으면서 완강하고 침착하게 말했다.
“그런 생각하지 마. 먼저 마음으로 지는 거야. 나, 당신 없이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아. 함께 살든지, 함께 죽든지, 어느 쪽이라도 끝까지 함께 해.”
“오즈리크.”
남자는 숨이 막히는 듯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숨을 골랐다. 여자의 얼굴을 만지고, 또 만지면서, 마치 금방 사라질 사람처럼 여자의 얼굴을 시선으로 훑었다.
“오즈리크, 제발 도망가 줘.”
“싫어.”
“제발. 도망가. 마지막 기회야. 차라리 도망가.”
“말했잖아, 당신 없이는 아무 데도 안 가. 가려면 같이 가.”
“저들은 널 죽일 마음이 없어.”
“어째서?”
“마지막 메나르로 두고두고 살려서, 구경거리로 삼을 거다.”
“정말 악취미네. 올레인이 그렇게 변할 줄은 몰랐어. 긍지가 높은 종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자는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 고개를 젓는 모습에는 공포라고는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상대에 대한 경멸과 슬픔만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더욱 긍지가 높고 침착한 얼굴이었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바라보면서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었다.
“널 죽이지 않는 이유는 또 하나 있어.”
“뭔데?”
“모든 메나르가 죽으면 올레인도 신의 벌을 피할 수 없으니까. 너만 남겨 놓고 신의 벌을 모면해 보려는 거지. 네가 올레인으로 인해서 죽는 것만 아니면, 자식을 남기지 않고 자연적으로 죽기만 하면 신의 벌도 피하고 메나르도 멸종시키고 아무 탈 없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거다.”
“정말 최악이로군, 올레인…….”
“그러니 도망가라.”
“언제까지? 평생? 이 세상에 하나 남은 메나르가 어디로 어떻게 숨을 수 있겠어? 그리고 말했잖아. 당신이랑 함께가 아니면 아무 데도 안 가.”
“그럼 선택할 건 나로군.”
순간 여자는 남자의 강한 포옹에 놀랐다. 그리고 뜨거운 고통에, 남자가 자신을 찔렀다는 상황에 몸부림을 쳤다. 멀리에서 남자의 동료처럼도 보이고 여자의 동료처럼도 보이는 회색 남자가 달려왔다.
“안 돼! 떨어져, 아드리안!! 오즈리크!!”
“신이여, 오시오.”
남자는 여자를 품에 안은 채 중얼거렸다.
“와서 이 썩어 빠질 죄인들을 단죄하시오. 당신의 사랑하는 메나르를 죽인 이 손을 저주하시오.”
여자는 희미해져 가는 숨결 속에서 힘겹게 팔을 들어 남자의 머리를 툭 쳤다.
“이 바보. 왜…….”
“신이 널 구해 줄 거다.”
“바보…….”
“산 채로 그런 끔찍한 꼴을 당하게 두진 않을 거다.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하겠어. 올레인은 벌을 받아야 해.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죄인이다.”
“미친 놈! 너 뭐 하는 짓이야!! 어떻게 네가 이럴 수가 있어, 죽으려고 환장했냐?!”
회색 남자가 여자를 안은 남자에게 몸을 던져 공격했다. 그 바람에 여자는 남자에게서 떨어져 바닥에 쓰러졌다. 흐릿하게 붉은 눈으로 여자는 두 남자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회색 남자가 검은 남자를 일방적으로 때리고 메다꽂는 광경이었다. 그마저도 조금 뒤 눈부신 빛에 가려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것이 너희가 한 그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너희에게 자비심이 한 톨이라도 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터이다.’
‘그것은 상관없어. 동족이라고 감쌀 마음은 없다. 오즈리크는 어떻게 된 거지? 어디로 빼돌린 거야? 내게서 숨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여자는 빛 속에서 한 점이 팽그르르 돌면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점은 점점 커지더니,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형태로 보이기 시작했다. 물방울 모양 꽃잎 다섯 개가 도톰하게 붙고, 그중 두 잎은 길어서 입술 같은, 붉고도 붉은 꽃. 그 꽃이 점점 커지면서 여자에게 다가오더니 눈앞을 모두 가렸다. 여자는 맨 몸에 몹시 부드러운 천 같은 것이 감기는 것을 느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만지는 것인데도 붉고 따뜻하다는 느낌부터 들었다. 여자는 그것에 뺨을 대고 눈을 감았다.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낮이 죽고 남은 피 웅덩이 있지. 저 꽃은 거기서 피어난 거다. 신이 우리에게 내린 증표라고 할 수 있지. 저 꽃은 우리의 저주가 존재하는 한 지켜져야 하고 밤의 수장은 저 꽃을 보존할 의무가 있다.’
예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 반대이지. 밤의 수장이 꽃을 보존해야 하는 게 아니라, 꽃을 보존할 수 있는 사람이 수장이 되는 거지. 나는 당신 외에는 아무에게도 나를 허락하지 않으니까. 당신에게 손을 대게 하지 않겠다는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서 몇 번을 다시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도 저것만은 당신 옆에 남아서…….
예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앞에 있는 사람을 보았다. 몇 번을 다시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도 계속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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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겨우겨우 연재 주기를 맞춘 자하입니다. 정말 분량이 짧아서 했지 아니었으면 펑크날 뻔.
출간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데, 오늘처럼 글을 올릴 때마다 굉장히 찔리면서도 안심이 되기도 합니다. 정말 지금은 이야기 진행에 필요한 최소한도만 쓴다는 느낌이 들어서, 올릴 때마다 포스트 잇을 붙여 두고 싶달까요. 변명인 줄 알면서도, 일단은 완결하는 게 가장 급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쓰고 있답니다. 그래서 혹시 출간하게 되면, 꼭 이 부분 저 부분 그 부분은 보완하고 에피소드 넣고 해서 풍성하고 재미나게 만들어야지 하고 다짐하게 돼요. 오늘 올린 부분도 확실히 그런 부분입니다. 부족한 모습 보이게 되어서 죄송하고, 그래도 역시 격려 부탁드려요!
그럼 월요일에 뵐 수 있도록 다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완결부분을 보여주시니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