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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헌터 첫번째 시리즈인 <판타지 러버>는 초절정에로틱파워에 더해 신화와 현실을 뒤섞고도 말이 되게 이야기를 풀어나간 스토리가 대단히 흥미진진한 패러노멀 로맨스입니다. 두근두근 말초신경을 잔뜩 자극하는 전형적인 로맨스의 대부분이 재밌긴 했으나, 이 책만큼 단순하고 뻔뻔했던 책이 과거에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도 않을 정도로 강렬합니다. 아무리 로맨스라 하나 이 정도로 기름 한사발 먹고 시침 뚝떼는 잘생긴 남자의 입에서 전형적인 대사를 줄줄 내뱉고 있는 것을 읽고 있으니 그동안 제가 읽어왔던 숱한 로맨스의 역사와 상투적인 문구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갑니다. 그리고 가장 전형적이고 가장 상투적이라 무시했던 주인공들이 남겼던 대사들이 로맨스 장르에서 발을 못떼게 만든 장본인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판타지 러버>는 독자가 읽고 싶어하는 로맨스가 무엇인지에 대한 심리가 아주 극단적이면서도 명확합니다. 남주의 비극적인 과거도 대단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남주의 노골적인 섹시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요. 이 황당무계한 패러노멀 로맨스의 압권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섹스심벌을 표현하기 위해 끌어다 쓴 어마어마한 표현들. 프롤로그에서 부터 표현된 남주 줄리안에 대한 묘사는 정말 한 마디로 정의할 수도 없어요. 아예 신격화시킨 남주의 육체적 조건에 어안이 벙벙하다가도 나중엔 결국 다 말이 되게 만드는 것도 신기합니다. 트라우마를 이 정도로 효과적으로 사용한 로맨스도 드물지 않나 싶군요. 어찌 말로 다 설명 하겠습니까. 부디 직접 확인해보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기꺼이.


셰릴린 케년은 발군의 유머 감각은 있으되, 패러노멀 소재를 인상 깊게 쓴 카렌마리모닝보다 글을 세련되게 쓰는 작가는 아닌 듯 합니다. 추측인 이유는 번역본이라 제가 원래 이 작가의 글쓰기 스타일을 원서 입장에서 읽지 못했기 때문이고, 번역한 자체가 자연스러운 윤문을 거치지 않은 듯한 초고의 느낌이 종종 났기 때문입니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건너뛰어버린 문장들도 종종 있어서 '대체 얘가 이 장면에서 저 장면으로 어떻게 넘어간 거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때도 있었구요. 카렌마리모닝은 시공을 왔다갔다 하는 당황스런 상황도 유연한 글발로 자연스럽게 넘어갑니다만 셰릴린 케년의 소설에서는 그닥 세련되지 못한 장면 전환이 수두룩하지요. 그럼에도 대단히 매력적어서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이유는 물론 로맨스의 판타지를 최대한 만족시켜주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치와 느끼함의 극을 달리는 전형적인 로맨스 대사들을 읽으면서 웬만해서는 단련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저조차도 몸을 잔뜩 뒤틀 정도였으니. 단언컨대 로맨스 독자라면 최소한 취향이 아니어서 못 읽는 경우는 절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 흡인력이 대단합니다. 사실 글 전반에 걸쳐 성적 긴장감이 팽팽한 소설 치고 흡인력 없는 게 없지만.


이 책을 뻔뻔하다고 하는 이유는 패러노멀을 빙자한 남주의 노골적인 캐릭터 설정 때문입니다. 저 정말 이렇게 엄청나게 비현실적인 남주 캐릭터 생전 처음입니다. 기본적으로 남주 줄리안은 아프로디테를 어머니로 둔 반인반신의 남자예요. 그리스 신들이 내린 벌로 책속에 갇혀 있다가 남주를 불러내는 방법을 아는 여자들에 의해 세상 밖으로 나오면 보름간 성적으로 최대한 만족시켜주고 다시 돌아갑니다. 남자는 만족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에 대단히 엄청난 형벌이 됩니다.(아, 정말 이 바닥이 어떤 바닥인데... 이런 설정에 고생하는 남주가 얼마나 괴롭겠어요-_-)


남주는 걸어다니기만 해도 여자들이 지남철처럼 저절로 달라붙을 정도로 엄청난 성적 매력을 갖고 있는 남자라서; 그동안 남주 줄리안을 불러냈던 여자들은 하나같이 남주에게 옷 한번 입힐 생각을 못하고 보름을 알차게 보낸 뒤 남자를 다시 책속으로 들여보냈더랍니다. 원래는 마케도니아의 장군이었으되 형벌로 인해 섹스 노예가 되어버린 줄리안은 2천년 간 이 짓을 반복하며 책 속에서 나왔다 들어가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자존심 따위 가루가 되어 자포자기한 상태. 사실 성적 봉사를 할 준비가 된 페로몬 덩어리 노예에게 섹스 그 외의 것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겠지만, 여기에서 보통 여자들과 여주 그레이스의 차이가 여실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줄리안을 불러낸 여자들에게는 보름동안 벌어지는 일생의 행운이었는지는 몰라도, 남주에게는 형벌로 보내는 시간이었던 것만큼 남주의 고통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과거의 장치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습니다. 우리가 그저 읽어내려가며 피식피식 웃었던 부담스런 과거의 진실이 밝혀지면서 생각에 무게를 얹어주고 결국 이 남자의 진짜 내면을 알게 되면서 독자들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됩니다.(사실 반한 건 나체로 책 속에서 뛰어나왔을 때부터일지언정;) 친구를 배신한 잘못으로 인해 인간이 아닌 노예, 혹은 짐승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과거의 상처들을 여주의 노력으로 치유하게 되고, 그런 여주의 아픔을 감싸안고 사랑하기 시작하게 되면서 남주는 스스로의 삶에 애착을 갖게 되고 저주에서 풀려나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되지요.


지극히 당연한 수순의 사랑 고백임에도 불구하고 황당한 설정과 맞물려 어떻게 균형을 잡을까 걱정스러워하는 건 역시 오만한 독자의 기우일뿐, 작가는 이 모든 단계를 무척이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보여줍니다. 남자가 스스로의 감정을 깨닫고 인정하는 장면에서는 울컥할 정도로 나중엔 감정이입까지. 그렇구나, 세상에 남자가 섹시하고 완벽하다고 해서 전부가 아니란 건 이런 거구나. 정말 불쌍한 놈이네. 그렇게 저도 모르게 중얼중얼 하게 만든다 이거지요.


아무튼 작가는 이렇게 말도 안되게 억지스러운 설정을 줄리안이라는 판타스틱한 남자에게 잔뜩 구겨넣어 설정해놓는데, 나중엔 그 구겨넣은 설정을 트라우마를 이용한 갈등 상황을 적절하게 전개시키면서 풀어나갑니다. 과한 페로몬을 뚝뚝 흘리는 남자에게 여주인공이 반항할 수 있는 이유는 고작 첫경험의 트라우마인데 작가는 이 두개의 갈등을 최고치로 끌어올리는 탁월한 심리를 보여줍니다. 남자를 책속에서 불러낼 때마다 당연하게도 남자에게 옷을 입힐 필요없이 봉사를 명했던 다른 세기의 여자들과는 달리 여주 그레이스는 첫만남부터 남주의 인간적인 면을 먼저 보아줍니다. 성적 매력이 흘러넘치다 못해 질질 흘리고 다녀 대책없는 이 남자에게 그레이스 역시 빠져들기는 매한가지지만, 섹스 이전에 사랑을 먼저 이끌어내는데 성공하는 것은 역시 로맨스이기에 짜릿한 이야기.


이 소설이 재미있는 이유는 과거의 복선과 경험들을 두 주인공에게 적절히 배분하고, 이전 소설들이 줄기차게 써먹었던 남주의 극대화된 섹시함에 절절한 이유를 절절히 부여하고, 과거 여주의 비참한 첫경험에 심리를 보태어 두 사람의 마음을 부딪히고 영향을 주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다크헌터 세계의 기본이 되는 그리스 신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팽팽한 사건 전개는 이 책의 완성도를 더욱 높여줍니다. 성적 페로몬의 집합체라할만한 남주의 어마어마한 매력은 2천여년 동안 남주에게는 지독한 형벌로 작용했다는 점, 그 매력 때문에 마음 놓을만한 친구를 제대로 만들 수 없었다던가 하는 사연은 나중에 밝혀지는 남주의 엄청난 과거로 인해 설득력을 갖습니다.(정말입니다-_-) 아니, 이 남자말고 대체 누가 이런 대사를 또 뻔뻔하게 읊을 수 있겠어 라고 생각하며 어느새 고개를 끄덕끄덕.


전반적인 사료 인용이나, 심리적 텍스트의 짜임새는 탁월하지만 소설적인 기법은 오히려 조금 떨어진다고 볼 수 있는 이 <판타지 러버>는 그래서 로맨스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만들어줬습니다. 순전히 독자를 위한 장르 소설이란 것은 글을 얼마나 더 잘 쓰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로맨스 코드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느냐의 문제라는 것을요. (이것도 저것도 로맨스, 이런 잡식성의 문제는 논외입니다) 로맨스라는 장르를 찾는 독자들을 위해서 얼마나 탁월한 로맨스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작가이냐의 문제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장르로 치환시켜 생각해봐도 마찬가지겠지요. 판타지다운 판타지, 무협다운 무협, 추리다운 추리, SF다운 SF. 역사상, 아니 지금까지도 그런 장르들이 대접을 받아왔고,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습니다. 로맨스를 로맨스답게 생각하고 로맨스다운 로맨스를 쓰는 것이 장르 테두리 안에서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 것인지, <판타지 러버>를 보면서 새삼 깨달았습니다.


황당무계한데다가 어이없을 정도로 유치하고 뻔뻔하지만 저는 이렇게 달달하고 눈에 착 붙는 로맨스가 좋습니다. 다른 장르로 대체하면 말도 안될 뻘소리겠지만 로맨스이기 때문에 뼈에 사무치도록 좋은 사랑 이야기. 좋은 이유를 보편적으로 설명하긴 곤란하지만 로맨스마니아라면 호불호를 굳이 따지지 않아도 저절로 읽혀지는 로맨스. 읽고나면 저도 뻔뻔해지는 기분이 들 정도로 무척이나 판타스틱하니 좋았던 소설입니다. 그리고서는 결국 이렇게 한번쯤 말해보면서 잠들고 싶은 거죠. 세상에 말 안되는 게 어딨어.




댓글 '17'

Junk

2006.05.01 13:23:33

뻔뻔한 게 로맨스의 매력이죠^0^

so

2006.05.01 18:02:18

제목부터 무지 뻔뻔합니다.;;
읽어보지도 않았는데 엄청 낄낄거렸네요.

지현

2006.05.01 19:48:23

근데요, 오늘 만화책 내리 읽으면서도 궁금했던건데, 왜 지남철처럼. 지남철같은, 이런 표현을 쓰는거예요?-_- 난생 처음 대하는 표현에 어리둥절, 대충 글내용으로 어떤 표현인지 짐작은 가지만, 왜 그런 표현을 쓰는지는...모르겠어요;

so

2006.05.01 20:15:21

지현/ 나침반에 쓰는 자석 같은 철인데 모르세요?
'지남철 같다' 관용어구에요.
자연적인 끌림, 의도하지 않은 끌림을 나타내는데
왜, 자석같이 찰싹 붙어있는 상황에 자주 쓰여요.
도움되셨나요?^^

지현

2006.05.01 22:00:13

아, 그렇군요. 몰랐어요...so님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실은 저는 그거 사람 이름인 줄 알았습니다. 왜 바람둥이를 일컫는 말로 카사노바라고 하잖아요, 마찬가지로, 지남철이란 사람에 관련된....뒷 말은 굳이 안해도-_- 뭐, 박장대소하셔도 괜찮습니다; 웃자고 끼적거린거니까요^^;)

리체

2006.05.01 22:03:10

so/아무렇게나 같다붙인 제목같은데도 다 읽고 나면 이 책에 이만큼 어울리는 제목이 있나 싶습니다.
지현/사실 요즘은 지남철이란 표현은 잘 안쓰죠. 저도 쓰면서 되게 오랜만, 이러면서 쓰긴 했는데 관용어구라는 게 워낙 촌스러운 느낌도 있어서 잘 안쓰게 돼요;;

연향비

2006.05.01 23:01:17

지남철이 카사노바라..ㅋㅋㅋ
전 남철 남성남의 남철만 생각나는데..ㅎㅎ
근데.. 리체님 표현처럼.. 단어가 촌스러운 느낌이 너무 강하죠..
그냥.. 자석처럼.. 딱 달라붙어서.. 라고 표현해도 될 듯 한데..;;말이예요

리체

2006.05.01 23:14:12

지현/드라마에서 충분히 써먹을 법한 이름이긴 해요. 지남철. 실제로도 지남철이 이름인 드라마 인물들이 있었을걸요. :)
연향비/제가 읽기로는 지남철=카사노바로 쓰신 게 아니라 바람둥이=카사노바처럼 지남철을 사람 이름으로 착각하셨다는 말씀 같아요. 맞죠, 지현님?*_*

지현

2006.05.01 23:24:44

ㅎㅎㅎ 네, 리체님^^
근데, 촌스럽다는 느낌보다는 정말 많이들 안써서 그런지 입에 안붙어요; 지남철같다...뜻을 알게 됐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람 이름 같아요;

방님마눌

2006.05.02 07:04:32

우와~대단한 리뷰...꼭 봐야겠네요...ㅎㅎ

애플

2006.05.02 07:13:39

ㅎㅎ저도 지남철같다...알고서도 사람이름같네요^^*

연향비

2006.05.02 11:50:08

알아 들었는데.. 그냥 그 연상도 너무 재밌어서..ㅎㅎㅎ ^^

리체

2006.05.02 12:26:47

연향비/하핫, 그렇군요( '')a
스토커한테 붙으면 딱일 이름 같기도 하네요.
지 씨 성을 좋아하는 편인데..이름이 남철이니 정말 촌시럽...;
(대체 이 리뷰와 상관없는 댓글들은..ㅎㅎ;;;)

지현

2006.05.02 20:18:22

원인제공자; 살짝 찔리심;;; ㅎㅎ 조만간 책 몇 권 살 예정인데, 살짝 끼워서 사봐야 겠어요..ㅋㅋ;

자애

2006.05.03 12:33:18

저,, 어디서 볼수 있나요?

리체

2006.05.03 15:15:06

지금은 로맨스파크 홈페이지에서만 구입하실 수 있어요. 일반서점이나 온라인, 대여점에 전혀 들어가지 않는 책이라. 이웃집에서 링크 따라 가보세요.

자애

2006.05.04 09:13:05

리체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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