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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얼음에 번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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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구정 전야에 직속 조직원들이 모이는 게 청현회의 오래된 전통이다.
바닷가에 위치한 요정 「애연루(愛緣樓)」. 그 인근 도로변은 온통 검은 차의 물결이었다. 주차장은 당연히 차로 꽉꽉 들어차 더 이상 발 디딜 틈이 없는 상태였다. 보이는 외에 경찰들도 근처에 꽤 많이 잠복해 있을 것이다.
웬만하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청현회 총 보스 지남신이 유일하게 그 얼굴을 비추는 날이 바로 오늘이다. 그리 길지 않은 식이 끝나면, 총 보스가 직접 중간 보스들에게 수천억 단위의 자금을 나눠주고, 그것이 끝나면 중간 보스가 또 각자의 부하들에게 금액을 배당한다. 똘마니 급 조직원들에게까지도 최소한 한두 장 정도의 수표가 든 격려금 봉투가 돌아가는 날이기도 하다. 이른바 보너스랄까.
정명회는 규모가 좀 더 작은 행사를 주로 9월에 하고 신정에 배당을 나누는 반면, 청현회는 어디까지나 구정에 이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상당히 거창한 행사임에도 놀랄 만큼 엄숙하게 모든 의식이 진행되는 날이다.
미리 깨끗이 치워둔, 놀랄 만큼 커다란 방에는 적색 카펫이 깔려 있었다. 전체적으로 중국풍 색조로 꾸며진 방은 지남신의 취향에 맞춘 것이었다. 강인은 양복을 단정히 걸친 모습으로 그 방에 있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방 내부는 무척 더웠지만, 그의 얼굴엔 땀 한 방울 비치지 않았다.
오른 편에 있어야 할 치윤은 거기 있지 않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청현회의 행사인 것이다. 정명회를 비롯한 외부인은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저편에 있던 청현회 중간보스들, 고홍민, 노병윤, 김문철이 차례로 인사했다. 강인은 자신도 정중하게 일어서서 마주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 뒤편에 있던 중간보스들의 직속 부하들도 90도 각도로 단정히 고개를 숙였다. 살집이 있는 사람, 마른 사람, 30대 중반에서부터 환갑이 넘어 보이는 노인까지 여러 타입의 사람들이 연달아 강인 앞에 멈춰서 인사한 후, 자기 자리를 잡고 섰다.
얼마 전 갑작스런 뇌출혈로 죽은 중간보스 서윤광 대신에 온 대리가 강인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강인은 마주 인사하면서 60이 갓 넘었던 서윤광의 얼굴을 떠올렸다. 온갖 난리를 겪으면서도 살아남았던 인간의 갑작스런 죽음. 매년 이곳에 들를 때마다 새로운 사람의 부고를 듣는 것은 결코 뜸한 일이 아니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죽는 것인데다, 이곳은 죽음의 세계와는 유난히 가까웠으므로.
죽음의 세계를 처음 접하게 된 건, 고작 8살 때의 일이었다.
“오셨습니까.”
“아, 오셨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모였을 때에서야 비로소, 청현회 총 보스인 지남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급스런 개량한복을 입은 그는 그 나이로는 드물게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중년 남자였다. 위엄 있는 걸음으로 걸어온 그는 모두의 인사를 받으면서 자신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뒤에는 그의 두 아들, 지정인과 지승인 외에도, 청현회의 관리를 총괄하고 있는 47세의 오은규와 젊은 시절부터 지남신을 보좌해 왔고 신뢰가 그 만큼 두터운 67세의 구경호가 자리해 있었다.
청현회의 현 보스 지남신.
그의 과거는 온통 베일에 감싸여 있었다.
지금의 강인보다도 어렸을 무렵의 젊은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마치 ‘바람처럼’ 청현회에 등장하자마자 순식간에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켰다고 한다. 그건 너무나 갑작스런 데뷔였지만, 그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조직 안에 아무도 없었다. 지금은 죽은 청현회 전 보스만은 알 거라고들 짐작하고 있었지만, 지남신만큼이나 입이 무겁던 그는 죽기 전까지 그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추측만은 난무했다. 전 보스의 혈육이라든가. 물론 그 짐작은 지남신이 보스의 딸과 결혼했을 때, 쏙 들어가 버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볼 때 지남신은 전혀 전 보스와 닮지 않았다. 몽골리안 토종이란 느낌이 강한 전 보스에 비해, 그는 굵직굵직한 생김이 어딘가 이국적인 남자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가 외국에서 살다왔다는 설도 등장했다.
그 중에 제일 유력한 것은 그가 중국 본토의 조선족 출신이란 것이었는데, 이것은 그가 이렇다 할 학력을 갖고 있지 않았음에도 중국어를 한국어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유창하게 했기 때문에 나온 루머였다. 상대적으로 약간 억양이 어눌한 한국어가 추측에 신빙성을 더했다. 게다가 지남신은 중국어 외에 어느 정도의 일본어까지 능숙하게 하는 지적인 보스였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그가 보스의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청현회는 고만고만한 세력을 갖고 있던 다른 어떤 조직보다도 일찍 타국 조직들과 연계해서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다. 중간보스인 무렵부터 이쪽 일이 천직인 것처럼 능숙하게 때로는 머리, 때로는 주먹을 써서 일을 처리하는 모습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도대체 저런 놈이 어디 있다가 나타난 걸까. 모두들 궁금해 하는 동안에도 빠른 속도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한 후, 그는 마침내 보스의 딸과 결혼해 청현회 전체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급변한 시대에 발맞춰 조직을 더욱 확장해갔다.
그런 지남신의 무서운 점은, 주먹이 아닌 머리였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청현회도 지남신 이전까지는 완전한 그물의 정점에 있다고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청현회를 명실상부한 최고로 만든 건, 다름 아닌 그의 두뇌와 계획을 바로 실천에 옮기는 행동력이었다. 그리고 정보.
주먹으로 제압하는 시대는 지났다. 조직이 음성적인 분야에서 활약하는 시대도 이미 가버린 지 오래다. 청현회의 주력산업은 겉보기에는 철저히 양성화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지남신은 특유의 정보력과 감으로 양성사업들에 타 어떤 조직보다 빠르게 손을 뻗었고, 그 결과 엔터테인먼트나 부동산 산업은 물론, 금융업에서도 다른 어떤 조직보다도 방대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야 물밑에서는 아직까지 섹스관련업이나 도산청부업 등 음성사업에도 어느 정도 관여하고 있을 터였지만, 그것은 표면상 전혀 드러나지 않는 철저한 비밀주의 하에서였다.
어떤 관료나 대기업도 청현회를 의식하지 않고는 함부로 그들의 사업을 진행할 수 없는 게 지금의 현실. 그것을 가능케 했던 것은 보스 지남신의 머리였다.
“모두 자세를 풀도록 합시다.”
지남신이 말했고, 이어서 오은규의 사회로 행사는 시작되었다. 구경호가 대표로 나서서 뭔가 짧게 이야기를 한 후, 각 중간보스들이 한사람씩 보고 겸 인사를 하러 나왔고, 그 시간이 꽤나 길게 이어졌다.
식이 끝나자 1년 치의 자금을 배당하는 순서가 돌아왔다.
보스 급들만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총 보스인 지남신과 중간보스들이 함께 술을 들이키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어서 술을 받은 중간보스들이 또 각자의 직속 부하들에게 한잔을 권하고, 준비한 정통 한식요리를 먹는다. 그 모든 일이 끝나면 해산해서 각자의 사무실로 돌아가는 것이다.
강인은 그쪽에는 섞여 들어가지 않고 처음에 있던 방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아니, 그는 청현회의 멤버가 아니었기에 섞여 들어갈래야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런 그에게 둘째 형 승인이 다가왔다. 강인보다 1cm 작은 키인 그는 눈높이가 거의 엇비슷해 편안히 맞닿는 시선을 강인에게 돌리면서 물어왔다.
“갈수록 시간이 길어지는군. 나중에 가족 모임도 있으니까 남아라.”
“가족?”
“피는 물보다 진하잖아? 이산가족이 이런 날이라도 뭉쳐야지. 안 그러냐?”
동의하지도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서 있는 강인을 보며 승인은 슬며시 목소리를 낮췄다.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는데.”
“무슨?”
강인의 눈썹이 슬쩍 움직였다. 부탁? 부탁이라니. 그의 둘째 형은 보통 이런 말을 잘 쓰지 않는다. 대체 무슨 얘길 하려는 걸까.
“이번에도 한 바퀴 뛰어야겠다. 상대가 악에 받쳤는지 제법 거한 상댈 데려온 모양이야. 이번엔 조작하기도 벅차. 지난번보다도 무려 5배가 걸렸거든. 너 만한 인재가 없다. 뺄 것 없이 나와 줘야겠어.”
지하투기장 얘기였다. 승부조작, 짜고 치는 고스톱에도 한계가 있는 모양이다. 그러게 괜찮은 선수를 진작 확보해 놨어야지. 강인은 아래로 시선을 돌려 방안 등에 비춰진 그림자를 한번 훑고 나서 조용히 물었다.
“아버지는?”
“아버지 명령이시다. 내 부탁이기도 하고.”
둘째 형의 부탁은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아버지의 ‘명령’이었다. 8살, 그가 아버지와 처음 대면했을 때. 아버지는 말했었다. 네가 내 손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는 내 명령을 들어라. 명령은 상대를 복종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지남신은 명령이 몸에 익은 남자였다. 어릴 때부터 명령만 듣고 살아온 인간은 ‘명령’이 몸에 배게 마련이다. 강인이 그러했고 승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승인은 ‘부탁’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그것조차 명령이란 사실을 강인은 알고 있었다.
“언제지?”
“금방이야. 날짜가 정해지면 연락을 주마.”
승인은 동생이 제안을 받아들일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당연하게 말을 받다가 이내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생각난 듯 물었다.
“게임은 어때? 잘 돼가?”
“마지막 스테이지를 하고 있어. 곧 클리어할 거야. 그런데,”
흥미가 담뿍 어린 웃음을 입가에 걸친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형에게 강인은 마찬가지로 입가에 슬쩍 미소를 비치며 말을 받았다.
“손에 넣으면 무슨 이득이 있단 거지?”
처음부터 내내 궁금했던 사실이다. 사진을 본 순간, 머릿속이 흐려져서 미처 묻지 못했던 질문. 고작해야 일을 시작한 지 4년, 젖비린내가 풀풀 나는 애송이 검사에게 고작 어디 튈 줄 모른다는 이유로 손을 대려한다는 건……, 이상하다.
물론 강인 자신도 민하에게 이렇게 설명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 ……꽤나 눈에 띄어서 말이야. ……아마, 상당히들 신경 쓰고 있는 눈치였어. 맹수 새끼는 초반에 길들이지 않으면 피곤해지니까 말이야. ……얼굴에 솜털이 부숭하든 주름이 계곡을 이루든, 법을 ‘수호’하시는 분들에 대해선 알아두는 게 예의이자 도리지. 만일을 위해, 약점을 생각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고.
하지만 굳이 지금부터 손을 대야만 하는 이유가 있단 말인가? 서민호 정도가 아닌, 훨씬 파워가 강한 고위직 법조인 상당수들과도 손을 잡고 있는 청현회다. 상식적으로 볼 때 필요 없는 일이다. 그것도 정명회에 몸을 담고 있는 자신에게 ‘게임’을 제안하면서까지 지켜보려는 의도가 달리 있는 것일까? 승인은 냉정한 성격으로, 아무 속셈 없이 함부로 제안할 인간이 아니었다.
“그저 대비책이야. 재미고. 게임이라고 했잖아. 그나저나 너, 생각보다 즐기고 있는 거 같은데? 그 아가씨가 은근히 맘에 든 거 아닌가? 그런 취향이었어?”
“취향 따윈 없지만, 아직 청춘이니까. 아 참, 그런 형님께서도 뒤늦게 타오른 불이 만만치 않으시단 소문이던데.”
“훗, 누구를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아직 정인 형처럼 개 목걸이를 달고 싶지는 않다. 내 섹스 라이프에 대해 무슨 얘길 들었든 과잉반응은 사양하겠어.”
배가 다름에도, 그리고 아주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는 아주 많이 닮아 있는 형제는 마주보고 친근하게 웃었다. 물론 그런 걸 가리켜서 세간에서는 가식이라고 부르는 거겠지만, 적어도 ‘개 목걸이’ 부분만큼은 절대적인 공감대가 형성된다. 베이스에 자리한 건 결국 상대방에 대한 견제였지만.
“오, 개목걸이다. 양반은 못되시는군. 훗, 나중에 보자.”
승인은 그렇게 말하고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그를 부르고 있던 다른 중간보스에게 걸어갔다. 강인은 그런 형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는 고개를 돌려, 마침 저쪽 에서 새침한 표정으로 들어오고 있던 ‘개목걸이’를 바라봤다.
“어머, 도련님. 오랜만이에요.”
말을 걸어 온 건, 큰 형 정인의 부인인 형수였다.
“정말 오랜만에 보네요. 이쪽에도 좀 자주 들르고 그러세요. 이러다 얼굴 잊어먹겠어요. 너무 반가워요.”
말과는 달리 표정은 털끝만큼도 반가움이 드러나 있지 않았다. 큰 형의 형수는 만만치 않은 가문의 딸로 부드러운 인상과는 달리 야심가였다. 지남신의 부인이 암으로 일찍 죽었기 때문에, 현재 이 집의 안살림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형수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삼형제 중 비교적 온건한 성격인 큰 형 정인을 뒤에서 조종해서 이런저런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녀의 비위에 거슬려 정인의 휘하에서 목이 잘린 부하들도 꽤 있었고, 적어도 정인의 권한 하에서 가능한 일에 대해서만큼은 그녀가 일일이 참견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꼬리 아홉 개를 감춘 무서운 여자, 그것이 강인의 형수였다. 꼭 맥베드 부인을 보는 것 같군. 강인은 생각하며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형수님.”
형수는 우아한 미소를 지으면서 강인에게 인사를 하고는 그의 곁을 지나갔다. 강인은 그런 형수의 뒷모습을 무심한 눈으로 쫓으면서, 혼자 서 있는 그를 눈치 채이지 않도록 곁눈질로 훑어보는 청현회 사람들의 시선을 감지하고 있었다.
사방이 적, 사방이 동료인 척 하는 적 투성이다.
강인은 청현회 사람들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정명회에 몸을 담은 변절자, 정명회의 일부 사람들에게는 청현회의 스파이로 인식되고 있었다. 물론 정명회의 총 보스인 김근현이나 치윤처럼 그를 좋게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에 비례해 안티 세력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안티가 있다는 건 그 만큼 그가 정명회에서 중심적인 위치로 올라섰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지만.
고작 20대 중반인 청년이 풍기는 강렬한 분위기에 압도당한 사람도 많았다. 손바닥에 칼이 꽂혔음에도 무표정하게 상대를 제압하고 손목을 부러뜨리는 강인에게 공포를 느낀 사람도 있었지만 동시에 경외감을 품은 사람도 있었다. 게다가 행동대장 중 하나인 현홍과 함께 일단 움직이면 반드시 중심에 서 있는 강인의 아래에 스스로 들어오는 자들은 갈수록 늘어갔다.
인정 따위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차가운 태도에도 불구하고, 자석처럼 그는 사람을, 특히 젊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강인을 신뢰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청현회의 현 보스 지남신의 젊은 시절을 빼어 닮았다는 것이었다. 그런 강인은 단시간 내, 어떤 압력 없이도 정명회 중간보스의 자리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그것은 청현회에 있어, 그리고 정명회의 반대세력에게 있어서도 위협으로 비쳐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17살이 되도록 그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그의 친지들은 어느 때부터인가 청현회의 행사가 있으면 형식적으로나마 그를 부르게 되어 있었다.
아니, 그들은 강인에게 참석을 ‘요구’했다. 그것은 무언의 표시였다. 네가 어디에 있든 너는 청현회 사람이란 걸 명심해라, 하고 못을 박아두는 무언의 표시. 강인은 순순히 그 부름에 따랐다. 비록 언제나 뒷전에서 관망하는 자세로 머물러 있을 따름이었지만 말이다.
강인은 벽에 등을 기댄 채, 그에게 희미하게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듯 받아내고 있었다. 그의 뇌리에 누군가의 말이 또렷한 울림을 띠고 스쳐지나갔다.
- 兵者, 詭道也. 故能而示之不能, 用而示之不用, 近而示之遠, 遠而示之近.1) 참 심오한 말이야. 이것만 제대로 알아도 제왕학 따위는 필요도 없지. 안 그런가? 그러니 네 형들과 차별대우한다고 섭섭해 할 건 없을 거야.
지금은 머릿속으로만 재생 가능한, 억양 강한 이국(異國)의 목소리. 기억조차 애매모호할 만큼 빠르게 흘러가던 10대의 하루하루. 몸에서 멍이 가시지 않던 무참한 나날 속에 파편처럼 남아 있는 메모리 칩 하나.
사방에 적이 있다면 하나씩 부숴나가면 된다. 다만, 가급적이면 싸우지 않는 방식으로. 그러므로 그 앞에서는 태연히 행동한다. 때로는 돌아가자. 때로는 이익을 갖고 유인도 하자. 늦게 출발해도 먼저 도달하기만 하면 된다.
웃음을 요구하면 웃어주겠어. 분노를 바란다면 그런 척 해주겠다.
그렇지만 속내만큼은 절대 보이지 않겠어.
그것은 타의에 의해 보내진 어떤 곳에서 얻은, 가장 쓸 만한 교훈이었다.
50
언젠가부터 구정이 싫어졌다.
“올해는 좋은 일만 생기려나 보다. 민호가 자기 배필을 다 찾고. 호호호.”
둘째 고모의 목소리는 끔찍하게 호들갑스러웠다.
“그러게요. 것도 기왕지사 다홍치마라고, 대신건설 집 따님이라니 얼마나 잘된 일이에요. 세상에! 검사가 엘리트는 엘리트인가 봐. 우리네 서민들은 어디 그런 가문이랑 연결되는 거, 언감생심 꿈이나 꿔 보겠어? 민호처럼 똑똑한 애나 그런 행운을 잡을 수 있는 거지.”
큰 고모의 목소리도 카랑하게 울린다.
“그래, 어떻게 만난 거여? 선 봤어?”
“그럼 언니.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상류층에서는 다 짝을 고르고 골라서 구한대. 우리 민호가 서울지검 검사니까 다 장래성을 보고 고른 거겠지.”
“선 아닙니다.”
무릎을 단정히 꿇고 앉아 있는 민호의 말투는 지나치게 딱딱했다. 어제 워낙 늦게 들어온 탓에 신경이 날카로운 것도 날카로운 거겠지만, 그렇다고만 보기엔 정도가 심각하다. 민하는 그릇에 남은 물기를 행주로 닦아내다가 고개를 들었다. 부엌까지 대화가 들려온다.
“선 아녀? 어머나! 그럼 연애해서 잡은 거야? 봉 잡았네, 봉 잡았어!”
“아이고, 잘 풀리는 인생은 뭐가 틀려도 틀리구먼. 언제 인사 안 시켜 줄 거야? 약혼식 같은 건 안하기로 한 거야? 그래도 명색이 재벌가문 딸내민데, 호텔에서 제대로 치러야지. 내친 김에 우리도 인사시켜 주고.”
“제가 시간이 없어서 상견례로 끝내기로 했습니다. 식장에서 바로 인사시키고, 신혼여행 갔다 와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많이 섭섭하신가요?”
“아, 아니 뭐……. 시간이 없다는데 어쩌겠어. 그래도 좀 그렇네? 그쪽은 그쪽의 도리가 있을 텐데……. 신부가 섭섭하다 그러지 않아?”
“그쪽도 일로 많이 바쁩니다.”
아무래도 오빠의 인내심이 한계수위에 다다른 것 같다. 고모들도 어지간했다.
구정. 자기네 차례 지내기도 바쁠 텐데, 점심이 지나자마자 좁은 집에 쳐들어온 걸 보면 할 말이 참 많았던 모양이었다. 옆에서 파리한 얼굴로 뒷정리를 하고 있는 작은 어머니를 힐끗 보고, 다시금 민하는 그릇으로 눈을 돌렸다.
작년에 또 실직한 작은 아버지가 시작한 치킨 집이 썩 잘 안 풀린다고 들었다. 계속 적자란다. 이제 고3이 될 사촌 남동생의 학원비대기도 빠듯한 형편인 작은 아버지네 집은 여전히 발 디딜 틈 없이 좁았다. 민하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돈을 제법 대주시고는 했는데 돈줄이 끊긴 지금, 마냥 막막할 작은 집이다. 능력 없는 작은 아버지에게 뭔가를 기대한다는 것도 무리였다.
아마 말은 안하고 있지만 재벌가와 결혼할 오빠에게 뭔가 바라는 것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말을 입 밖으로 내고 안 내고의 차이다. 최소한의 양심은 있으신 분이니까. 허구한 날 우는 소리만 하시기는 하지만, 부엌엔 얼씬도 않고 밖에서 큰 소리로 떠들고만 있는 고모들보다는 훨씬 낫다. 그나마 오늘은 신세타령을 할 기운도 없으신지, 작은 어머니는 말없이 일만 하고 계셨다.
“있잖아. 우리 동운이, 이번에 졸업인데 취직이 영 안 풀리네? 토목공학 전공했는데, 알지? 요즘 경기가 영 아니잖아. 애는 무지 건실한데 운이 안 따라주네. 그래 말인데, 대신건설에 껴들어갈 자리 없을까? 좋은 데 아니어도 상관없는데.”
“아유, 그래도 사위 부탁인데 자리 하나 못 만들어 주겠어? 안 그래요, 언니?”
건실 좋아하시네. 그 오빠 나이트 죽돌인 거, 내 귀까지 흘러들어왔네요. 학고 연속으로 맞고 졸업한 게 기적인 인간이 취직이 잘되면 하늘이 무심하신 거죠. 민하는 이를 악물며 손에 든 접시를 깨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싸한 공기가 흐른 잠시 후, 저쪽에서 민호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 그쪽도 요즘 영 경기가 안 좋아서 있던 직원도 자를 판국이라고 들었습니다. 고모님. 실례인 줄 압니다만, 이만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제가 일이 좀 많이 밀려서 일찍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 그, 그래? 섭섭하네…….”
큰 고모의 웅얼거림을 뚫고 민하를 부르는 오빠의 음성은 반고함에 가까웠다.
“으응?”
“가자.”
“어, 이것만 마저 닦고…….”
“됐어. 내가 할께, 어여 가.”
“작은 엄마, 괜찮으세요?”
“다 끝났는데 뭐.”
괜찮다고 고개를 젓는 작은 어머니에게, 민호가 양복 안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봉투를 본 작은 어머니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이게……, 뭐야?”
“세영이, 이번에 고3 되죠. 사촌 형이 아무 것도 못해 줘서 죄송합니다. 이거, 약소하지만 학원비에 보태 쓰십시오.”
“결혼 준비로 돈 많이 들어갈 텐데…….”
“괜찮습니다. 번거로운 거 다 생략할 거니까요. 받으세요.”
“고마워…….”
말을 못 잇는 작은 어머니와 소란스럽게 친한 척 하며 따라 나서려는 고모들을 뒤에 남겨둔 채, 민호와 민하는 작은 집을 나왔다. 근처에 세울 자리가 없어, 차는 꽤 멀찍이 주차되어 있었다. 남매는 주차장까지 죽 이어져 있는 좁은 골목길을 말없이 걸어갔다. 언 바닥이 미끄러워 신경 쓰인다고 민하가 생각했을 때.
민호가 우뚝 멈췄다. 민하가 ‘응?’ 하고 따라 걸음을 멈추는데,
“씨발!”
갑자기 민호가 전봇대를 오른 발로 걷어찼다.
“오빠!”
“씨발! 씨발! 씨발!”
민하가 부르는 소리엔 아랑곳없이, 민호는 몇 번이고 연속해서 전봇대를 강타했다. 분노를 그득 담은 굉음이 둔탁하게 울려 퍼졌다. 민하는 잠자코 서서, 굉음의 수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정확히 일곱 번의 발길질 후, 겨우 민호가 멈췄다. 민하는 조용히 물었다.
“좀 풀렸어?”
“하아……, 하아…….”
오빠는 거친 숨소리로 화답했다. 민하는 빙긋 웃었다.
“성깔 하고는. 후훗, 새 구두 다 망가졌겠다.”
팔짱을 낀 채 빙글빙글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여동생에서 시선을 떼어 이미 다 망가져버린 구두로 돌리면서, 민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너, 오늘 들은 얘기, 성은이한테 하면 죽는다.”
“오빠, 많이 속상하지?”
“그래, 너 땜에 무쟈게 속 탄다.”
“오빠?”
민하는 어느 새 낮아진 오빠의 내리깔린 목소리에 놀라 눈을 깜박였다. 민호는 전봇대를 주먹으로 약하게 한번 치더니, 눈을 지그시 감고 물었다.
“……그 때 니가 우리 집에 데려온 기름 처바른 자식이 어떤 새낀지 알고나 있는 거냐? 대체?”
그 때만해도 웃음기가 살짝 남아 있던 민하의 얼굴에서 바로 핏기가 가셨다.
“그 자식은 개새끼야. 아니 개만도 못한 종자라고.”
“오빠…….”
“그 자식이 깡팬 거 알고 있었지? 그래, 나한테 조폭 어쩌고 물은 거냐? 엉?”
민하의 눈이 그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아! 설마 설마 했는데, 오빠가 알아버렸다! 어쩌지? 어떻게 하지? 아, 대체 뭐라고 해야 해? 그래서 오빠, 새벽에 들어왔을 때부터 신경이 날카로웠던 건가?
“너, 그 자식이랑 어떤 사이야?”
“어떤 사이냐니……, 아, 아무 사이도…….”
“근데 왜 조폭 새끼가 우리 집에 더러운 발을 들이고 얼쩡대고 있는 건데? 그 자식이 너랑 특별한 관계인양 깝죽대는 꼴을 왜 보게 만드는데?”
“그건…….”
“너 그 자식이 어떤 놈인지 알아? 그 놈은 단순한 개새끼에 조폭이 아니란 말이다. 청현회란 우리나라에서 젤 더러운 짓거리를 일삼는 집안에서 자라서 지금은 다른 조직 중간보스까지 하고 있는 자식이야. 법을 물로 보는 정도가 아니라 법을 즈려밟기 위해 존재하는 똥개새끼라고. 그런 새낄 뭐? 학교 선배?”
“오빠…….”
“나 결정했다. 너 절대 따로 못 살아. 잔말 말고 우리 집에 살아라. 아니, 원래부터 너 살아야 할 집이잖아. 괜히 독립 어쩌고 하며 사람 속 뒤집지 마라. 잘못하면 다 뒤집어엎는 수가 있으니. 알았어?”
오빠의 서슬은 시퍼렇다 못해 눈이 시린 수준이었다. 민하는 울상이 되었다.
“대답해! 알았어, 몰랐어?”
“알았어, 오빠…….”
“그 새끼 또 만날 거냐?”
“오빠…….”
“만나거든 이거 전해라.”
응? 민하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살며시 들어서 오빠의 낯빛을 살폈다. 민호는 조금은 차분해진 기색이었다.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그는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민하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쥐었다. 그것은 하얀 종이봉투였다.
뭐야, 청첩장이잖아?
“전하기만 해. 분명 그 자식이랑 아무 사이도 아니랬다, 너. 그 자식이랑 무슨 사이란 얘기가 내 귀에 들리면 그 땐, 알지?”
“오빠, 이걸……, 왜?”
“하! 그걸 나한테 물어? 니가 그 새끼가 비빌 자리를 만들어주니까 이런 일이 생긴 거잖아.”
민호가 어이없는 한숨을 토해냈다. 민하는 눈을 깜박이며 청첩장과 오빠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전하면 알아. 넌 전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민호는 그렇게만 대답하고는 몸을 돌려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민하는 뭐가 뭔지 혼란스런 머릿속을 억지로 가누려고 노력하면서 오빠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청첩장을 쥔 손이 어느 새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이 추위에 언 손이 시려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계속.
다음 편에서야 겨우 두 사람의 투샷이 나올 듯;;;
대체 몇 번을 날리는 건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