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6장 아흔아홉번째 인연

 

세오가 운영을 만난 것은 8년 전 구렁이로부터 한 소년을 구했을 때였다. 그들은 도망치듯 사람의 기색을 살피며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 듯한 발걸음이었다. 서두르고 있었지만, 이 고개를 넘는다고 다음 고개를 넘는다고 그들이 머물 장소는 정해지지 않은 것 같았다. 체격이 큰 남자와 아직은 어린 소년. 소년의 얼굴은 침울했고, 어두웠다. 발걸음을 재촉하는 큰 남자의 기세와 달리 소년은 생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유영아 마음을 알겠다만, 집안에 마지막 한 사람이 아니더냐.”

체격이 큰 남자는 기운 없이 느리게 걷고 있는 소년을 재촉하며 말했다. 그 때였다. 위기감이 서린 새들의 소란스러운 울음소리가 들린 것은.

까악! 까악!

어린 까마귀들이 둥지에서 빽빽거리며 울고 있었고 당황한 부모 까마귀들은 어쩔 줄 모르며 울고 있었다. 커다란 구렁이가 새끼 새를 노리고 나무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유영은 순간 분노가 어린 얼굴로 허리에 찬 단검을 꺼내 던졌다. 단검은 정확히 구렁이의 머리에 꽂혔다. 구렁이는 머리가 나무에 찔린 채로 두꺼운 몸체를 뒤틀더니 끝내 힘없이 늘어뜨리고 말았다.

이제 살았다. 괜찮을 거야.”

유영은 죽은 구렁이에게 다가와 단검을 빼 근처 수풀에 문지르고는 까마귀들을 향해 말했다.

유영아! 그만 가자.”

도준만은 유영의 하는 짓을 그저 바라보다가 다시 그를 불렀다. 유영은 조금은 속이 풀렸는지 까마귀들에게 살짝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는 도준만의 곁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유영과 준만은 산기슭에서 홀로 사는 여인을 만난다. 낡은 초가집에서 평상에 널은 나물을 서둘러 거둬들이는 손길을 보고 안심한 준만은 실례를 무릅쓰고 하룻밤 잠을 부탁한다. 여인은 망설이는 듯 했지만 방을 내주었다. 거기에 밤참까지 준비해주는 정성에 준만은 감탄한다.

차린 건 별로 없지만…….”

수줍은 듯 급히 상만 내려놓고 방을 나가버리는 여인. 산기슭에 홀로 고고히 살아가고 있는 하얀 소복의 여인. 아마도 남편을 잃고 오랜 기간 홀로 살아왔던 게 아니었을까. 도준만은 뭐에 홀린 듯 밑도 끝도 없는 호감을 느끼고 만다. 그러나 아직 미성년인 유영은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을 보며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자주 있는 전개잖아.’

린은 숲 속에서 가장 높은 나무 위에서 반쯤 잠을 청하며 생각했다.

갑자기 없어졌다고 용궁 애들이 하도 난리를 쳐서 찾으러 나왔더니 이상한 거나 시키고.’

신수는 인간 세상에 간섭을 안 한다. 아주 안 할 수야 없지만, 되도록 간섭하지 않는 것을 법칙으로 하고 있다.

기껏 반쯤 각성해놓고 복수라니 지가 인간인 줄 아나.’

린의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 죽던 상관없었다. 사실 둘 다 살든 죽든 그녀 입장에서는 찜찜하긴 똑같았다. 때문에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용왕의 시커먼 속이야 린이 알바 아니었다. 도리어 기분 나빠서 손 하나 까닥 안 할 작정이었다.

나한테 맡긴 놈이 잘못이지.’

린의 청개구리 근성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용왕은 자신을 찾아온 린에게 다짜고짜 한 소년을 살피게 시켰다. 왕의 명이니 따르지 않을 순 없었지만, 용왕은 그저 신수들의 세계에서 지도자의 위치에 있을 뿐 강제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다. 왕은 왕이니 존경과 질서를 위해 따르지 않을 수는 없지만 이런 미묘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지는 용왕이라도 강제할 수 없었다. 때문에 린은 반쯤 졸린 기분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인은 부엌에서 쓱쓱 칼을 갈기 시작한다. 그러나 수면성분이 든 밤참을 먹고 잠이 든 유영과 준만은 깨어날 기미가 없다. 자시(子時:11~1시 사이)가 넘기 전에 여인은 둘의 목숨을 취할 생각이다.

쓱쓱-

칼 가는 소리가 어스름한 달밤에 공포스럽게 울리고 있지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여인은 쪽맨 머리를 들고 요사스러운 눈을 빛낸다. 칼 가는 소리가 멈추자 린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눈치 채고 그들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여인은 달빛에 빛나는 부엌칼을 들고 자신이 안내해준 방문을 열고 방 안에 들어선다.

자주 있는 일이지.’

린은 남의 일처럼(남의 일이다) 생각하며 하품을 했다.

~! ~! ~!

그러자 갑자기 종이 울린다. 산꼭대기 근처에 있는 절의 종이다. 그러나 그 종이 울리는 시간은 축시(丑時:새벽 1~3)가 지난 직후다. 그 절은 인시(寅時:새벽 3~5)부터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데 그 때 울리는 종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갑자기 울린 종에 당황한 여인, 그리고 기묘한 종소리에 잠을 깬 준만은 이 집 주인인 여인이 부엌칼을 들고 난입한 상황을 보고 서둘러 곁에 있던 칼을 칼집에서 뺀다.

누구냐!”

준만이 휘두른 칼을 피한 여인은 아깝다는 표정으로 몸을 휙 날리더니 초가집 마당에 두 발을 벌리고 선다. 그 사람 같지 않은 몸놀림에 놀란 것도 잠깐, 준만은 여인을 쫓아 방을 튀어나왔다.

아깝구나! 아까워! 니들이 내 남편을 죽여 놓고 살기를 바라느냐!”

남편?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몰라? 이 산에 들어서기 전의 고개에서 그 잘난 동정심에 내 남편의 머리를 찍어 죽이지 않았느냐!”

머리를 찍다니…….”

그러자 유영이 밖으로 나오면서 외쳤다.

아저씨! 그 구렁이에요. 까마귀들을 습격하던!”

준만은 눈을 가늘게 뜨며 여인을 쳐다보았다.

사람이 아니구나.”

그래! 아직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다. 승천이 멀지 않았거늘……!”

도를 깨우쳐 승천하려는 자가 복수를 위해 사람의 목숨을 노리고서도 승천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억울하다! 억울해!”

여인은 준만의 말은 듣지 않고 한탄을 외치더니 준만을 향해 부엌칼을 들고 달려든다. 그러나 오랜 시간 무도의 길을 걸어온 준만은 단번에 여인을 베었다. 여인은 순식간에 커다란 구렁이로 변해 꿈틀거리다 늘어졌다.

으흠…….’

린은 갑자기 울린 종소리에 호기심을 느끼고 일련의 사건을 보고서는 몸을 날려 절을 향해 달려갔다.

갑자기 어디서 종이 울린 거지?”

준만은 칼을 다시 칼집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여기 산 중턱에 절이 있나 봐요.”

날이 밝으면 가보자꾸나.”

준만과 유영은 잠을 자지 못한 채 밤을 샌 후에 어스름한 새벽길을 나서 아침이 되어 산 중턱에 있는 절에 도착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글세?”

그리고 그들은 스님들이 모여서 당혹스럽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준만은 그런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스님? 무슨 일이 있었나요?”

시주, 나무아미타불.”

스님은 합장을 하며 준만과 유영을 맞이했다.

종 앞에 까마귀 떼가 죽어있어, 기이하게 여기고 있던 중이오이다.”

유영은 깜짝 놀라 스님들을 헤쳐 나가 종 앞에 이르렀다.

아저씨, 이 아이들은…….”

……우리가 묻어주자꾸나.”

둘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서로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었다. 미물이라 하나 남편의 복수를 하려 했던 구렁이, 그리고 은혜를 갚기 위해 스스로의 몸을 부딪쳐 종을 울려 경고를 해준 까마귀들. 유영과 준만은 합장을 하고 까마귀들의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고마워.”

운영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유영과 준만이 까마귀들의 무덤을 만드는 것을 보며 자기 손에 잠들어있는 작은 까마귀를 내려다보았다. 거의 숨이 끊어져있던 아이를 운영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힘으로 치유할 수 있었다. 이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운영과 마찬가지로 반쯤은 경계의 힘을 가지고 되살아날 수 있었다. 그리고 까마귀는 신수로 깨어난다. 타인을 위한 희생. 그 어떤 도리도 넘어서는 이치. 그리하여 까마귀는 신수로 각성하고, 무지(無知)한 신수 까마귀에게 운영은 세오라는 이름을 준다. 자신의 동생을 구해준 세오는 그녀에게 무척이나 고맙고 소중한 존재였다.

그대가 어린 신수 흑룡의 수호자가 되어준다면, 그 까마귀 세오를 신수로 보호하고 길을 이끌어 줄 것을 맹세하지.”

운영은 물끄러미 소년 모습을 한 용왕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신수로 각성했다고는 하나, 자신의 힘을 발전시키지 않으면 금세 힘 있는 자들에게 잡혀 먹힐 거야.”

원래는 김진사의 자객에 의해 죽을 뻔한 유영을 보호해주는 조건으로 무녀를 손에 넣으려고 했다. 유영은 도준만에 의해 보호되고 김진사의 눈을 피해 도망치던 중이었다. 아무리 김진사라 해도 도성에서 도망 간 그들을 끝까지 쫓지는 않으리라는 계산이었다. 실제로 그 직후 자란의 자살로 김진사는 그들을 쫓을 의욕을 잃는다. 사실 모든 것에 대한 의욕을 잃었지만, 그건 그 자신의 사정이다. 용왕은 경계의 무녀의 탄생과 함께 그녀 자신에 대해 조사하고 그 조건을 제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게 흘러갈 것 같지 않아 초조하던 차였다.

신선이라는 존재도 그렇게 대단하지 않은 것 같네요.”

별 표정 없이 운영은 말했다. 운영은 신선이나 신수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경계의 땅의 일부 지식은 스승 메리안 백작 부인에게 사사 받았지만, 아직 완벽하지 않다. 실제로 그녀는 아직 계승을 마친 것은 아니었다.

신수도 결국은 세상에 존재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에 의해 살아가는.”

그래요. 나도 결국은 인간, 이 아이는 나보다 길게 살겠죠. 그러니…….”

그렇게 운영은 용왕과 계약을 맺었다.

 

그러니, 친구와 가족들을 대신해 살아가세요, 세오.”

이어도. 신수들과 월하연의 수장 휘련, 선우자양의 처절한 싸움의 한복판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산호초가 이지러진 햇빛을 받아 신비로운 빛깔을 내는 아름다운 섬, 이어도는 지금 소란스러웠다. 긴 시간을 추적하고 쫓은 끝에 자양은 이어도에 있는 경계의 문을 찾아냈다. 그 노력을 지금 보답 받는다. 자양은 운영의 기척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느끼자마자 이어도의 산호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원래 이어도는 신수들이 성지처럼 취급하는 장소다. 그 사실은 금세 용궁에 알려졌고, 전투성향의 신수들은 용왕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뛰쳐나왔다.

그냥 말해버리면 어때?”

린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런 결과를 보고 싶어서 무녀를 놀렸던 것은 아니었다. 반쯤은 시험하는 기분에 반쯤은 남의 일이라는 기분에 흑룡 이하의 길을 보고 싶었던 린은 결과가 참혹해지자 책임감을 느꼈다.

사실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죽었다고 선언하면 아주 깔끔하게 해결되잖아?”

그래서 그런지 누구를 대하서든 말이 짧아진 채 퉁명스러운 말투를 사용했다.

이하가 원하지 않습니다.”

현무가 대답했다. 현무는 이하가 잠든 이후 더 말수가 줄었다.

이 난장판에 그 꼬맹이 의지까지 지켜주자고?”

무녀도 원하지 않습니다.”

……!”

린도 운영의 의지를 무시하면서까지 폭로하고 싶진 않았다. 반쯤 죽은 놈은 둘째 치고 경계의 땅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심하게 책임감을 느끼는 운영의 의지는 존중받아 마땅했다.

어차피, 경계의 땅에 진입할 수는 없다.”

용왕은 자신의 앞에서 대화를 하는 현무와 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기에는 앞뒤 생각도 안하고 뛰쳐나간 신수들에 대한 비난도 섞여있었다.

…….”

하지만, 쟤가 운영을 노리는 건 사실이야. 그 원인에는 신수가 끼어있고. 이대로 방치하다가 큰일이 일어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지?”

불만은 많지만 그래서 더욱 입을 다문 현무를 대신해 린이 용왕에게 말한다.

…….”

용왕은 입을 다문다. 린은 그런 태도에 기분이 더 나빠져 말투가 거칠어진다.

적당히 좀 하지 그래? 호의를 가진 인간조차 아무래도 좋다는 그런 태도, 경멸스럽거든?”

현무는 흠칫 린의 거친 말투에 놀랐지만, 내심 린의 의견에 동의했기 때문에 그 역시 비난하는 눈빛으로 용왕을 바라보았다.

그런 걸 도를 잃는다고 하지 않아?”

……!”

용왕은 화나고 놀란 표정으로 린을 바라보았다. 린의 말은 신수로의 용왕을 부정하는 말이었다.

당신이 인간에게 실망한 건 알겠어. 하지만, 무녀에게까지 확대하지 마! 그녀가 그런 취급받을 이유는 없잖아?”

…….”

아니면, 인간을 구한다는 행위 자체에 거부감이라도 갖고 있는 건가?”

린은 반쯤 흘리는 말투로 용왕에게 말하고는 이어도의 벽화를 향해 걸어갔다.

뭐하는 거지?”

뭘 하긴? 저 미친년을 붙잡든, 죽이든 해야겠지.”

!”

현무가 놀라서 외쳤다. 그러나 그런 현무를 비웃듯 린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운영이 죽을 지도 모르는데 내버려두라고? 아무리 운영이 경계의 무녀라도 만능은 아냐. 실제로 경계의 땅에서 신수로 각성한 이하는 식물인간상태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생명을 경시할 생각은 없어.”

……그녀의 동생은 무시했으면서?”

용왕의 말에 린은 걸음을 잠깐 멈췄다.

말해두지만, 그땐 남의 일이었어.”

린은 그 말만 던지고 이어도의 벽화를 넘었다. 그리고 그녀를 이어서 현무도 걸음을 옮겼다.

너도냐?”

용왕은 반쯤 포기한 말투로 말했다. 그러나 현무는 몸을 돌려 용왕의 정면을 향했다.

제게 무녀는 지키고 싶은 존재이니까요.”

그리고 곧바로 린의 뒤를 이어 이어도의 벽화를 넘었다.


***

마지막 장 돌입입니다.


댓글 '4'

Junk

2015.03.21 00:42:52

아... 이 빈홈에 올리기에는 너무 재미있는데요... 너무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하지만 고맙습니다. 저는 다른 소설 사이트에 가지 않으므로 제가 읽어서 재밌으니 저는 즐겁네요... 다른 곳에만 올리셨으면 못 봤을 거잖아요.

과객연가

2015.03.21 18:09:02

다른 소설사이트에도 올리고 있는데요, 뭐.....

저도 재밌게 읽으셨다니 즐겁습니다.^^

한스

2015.03.25 09:00:54

저도 재밌게 읽어요~힘내서 더 스파트!!!!

감사합니다~^^

과객연가

2015.03.25 18:42:43

재밌게 읽으셨다니 제가 감사하죠.^^

슬슬 마지막까지 폭주해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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