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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응대하고 있던 손님이 계산을 하고 돌아서자 햄튼의 오랜 단골손님인 고명진이 영희가 서 있는 카운터 앞으로 다가와 말을 건넸다.
“언니, 있잖아요.”
용건이 있으니 여태 기다렸을 텐데 더는 말을 잇지 못 하고 애먼 시선만 맞추고 있다.
“무슨 일이신데요?”
재촉해 묻자 명진이 러브레터라도 건네는 양 소심하게 쇼핑백을 내밀었다.
“저기요, 이거 택배 좀 보내주실 수 있으세요?”
“뭔 택배 보내달란 말을 그렇게 어렵게 하세요. 그냥 보내 달라 카면 되지.”
어이없게 웃으며 쇼핑백을 받아드는 순간 영희의 표정이 황당해졌다. 명진이 자주 드나드는 여성복 브랜드의 쇼핑백이다.
“저기요, 여기 택배비요.”
쇼핑백을 쳐다보고 있는 영희의 눈치를 살피면서 명진이 천 원짜리 지폐 석장을 슬그머니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택배 신청이야 단골손님에 대한 서비스 차원에서 충분히 해드릴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왜 옷을 구매한 매장에서 요구 하지 않고 굳이 다른 매장에 와서 소심한 목소리로 제 돈으로 택배비를 내면서 부탁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게 이해가 안 가는 것이다. 저렴한 브랜드도 아니고 블라우스 하나에 삼십 만원이 넘는 고가의 브랜드에서 택배 서비스는 기본 중에 기본이다.
“여기서 해달라고 하시지, 왜요?”
당연한 의문 제기에 명진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해달라 카기가 좀 그래서요.”
대답을 들으니 더 기가 막혔다.
“어머, 말도 안 된다. 그 비싼 옷 사면서 택배 해달라는 소리도 못 하셨다는 분이 어떻게 우리 매장에 와서는 그렇게 편하게 하세요?”
대놓고 쥐어박는 소리에 명진이 속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언니가 편해서요.”
“진짜 성격 독특하시네. 옷을 사면서 택배 해달라 카는 말을 와 못 하시는데요? 거기 매니저가 눈치 줘요?”
마땅히 요구해야 될 일도 쭈뼛거리며 말을 못 하는 소심한 성격 탓에 명진은 백화점 VIP 고객인데도 대접을 받기는커녕 홀대 당하는 일이 다반사다. 이번에도 그런 경우인가 싶으니 물어보는 목소리가 곱지 않게 나왔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명진이 뭔가 숨기는 표정으로 상황을 얼버무렸다.
“아무 눈치도 안 줬는데 택배 보내 달라 소릴 왜 못 하세요?”
강하게 묻는 기세에 밀려 명진이 우물쭈물 거리다 속내를 실토했다.
“그게 아니고, 선물을 자주 하신다고, 누구냐고 궁금해 하셔서요.”
그 순간 잔뜩 굳어 있던 영희의 안면근육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그러니까 대리구매를 하고 있다는 걸 매니저에게 들킬까봐 지레 찔려서 택배 해달라는 말을 못 한 것이다. 시즌 마다 몇 번씩 선물을 보내니, 매니저 입장에서는 호기심이 드는 게 당연하다. 별 뜻 없이 물어본 말에 대강 둘러대면 될 것을 뭐가 무서워서 겁을 집어먹고 택배 서비스 해달라는 말도 못 하고 내빼느냔 말인가.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 어떻게 카드빚은 몇 천만 원씩 지고 있는지 정말이지 세상은 요지경이다.
“아이고, 진짜 별 눈치를 다 보신다. 살짝 거만하게 웃으면서 챙겨야 될 데가 많다 카죠, 왜. 그리고 대리구매 한다고 알려져도 그게 뭐 어때서요. 나쁜 일 하는 것도 아인데. 신경 쓰지 마세요.”
고 여사가 하는 대리구매는 인터넷 카페에 20퍼센트 할인된 금액으로 물건을 구매해줄 수 있다는 글을 올려서 구매자를 찾은 다음 구매자가 원하는 옷이나 가방을 대신사서 택배로 보내주는 것이다. 할인 카드가 있는 것도 아니니 20퍼센트의 차액은 고 여사가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왜 그런 손해 보는 짓을 하느냐 하면 순전히 카드빚 때문이다. 물건 값은 현금으로 한꺼번에 받고 물건은 12개월 장기 할부로 구매하기 때문에 당장은 여윳돈이 남게 되니, 급한 대로 카드 값을 융통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대리구매를 하면 할수록 20퍼센트의 차액에 더해 카드 할부 이자가 쌓이게 되니 결국 밑 빠진 독에 물붓기인 셈이다.
“아니, 그래도요. 좀 그래서.”
머쓱하게 웃고 있는 명진을 보고 있으려니, 괜히 마음이 갑갑해졌다.
멀쩡한 사람이 왜 저렇게 자기 인생을 복잡하게 만들면서 사는 걸까.
명진은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을 둔 학부형이자 세무사 사무소에서 15년 동안이나 근무한 베테랑 직원이다. 남의 세금을 계산하면서 월급을 받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카드 값은 그렇게 계산이 안 되는 건지 한 번씩 아주 기가 막힌다. 그리고 쇼핑 중독이 의심될 정도로 물건을 사 쟁였으면 누가 봐도 입이 떡 벌어지게 근사하게 꾸미고 다녀야 할 것 같은데, 고 여사가 입고 다니는 옷은 매번 그 옷이 그 옷이다. 저번에 산 옷들은 왜 안 입고 다니세요, 하고 물어보면 출근 시간에 늦어서 대강 눈에 띄는 거 입고 왔다고 하는 게 아주 고정 멘트다. 입고 다니지도 않을 거면서 왜 굳이 카드빚까지 지고 있는 건지. 답답한 점을 따지고 들자면 끝이 없다. 아예 생각을 안 하는 게 정답이다. 남편도 있고, 친정 식구들도 있는데, 어련히 알아서들 충고해 주겠지 나까지 나설 일이 뭐가 있나, 생각하고 마는 게 속편하다.
“택배는 해드릴게요. 어차피 저희 물건도 보낼 거 있으니까 그때 같이 신청해 드리는 거 어렵지 않아요. 그런데 다음부터는 거기서 해달라고 하세요. 안 그래도 비싼 물건 싸게 사주는데 택배비까지 낼 필요는 없잖아요.”
“네. 죄송해요.”
순간 목구멍까지 불길이 확 치솟았다. 어디다 대고 훈계냐고 화를 내면 도리어 이쪽에서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에 지레 먼저 찌그러져 사과를 하니, 매번 당하고 사는 것이다. 이건 착한 게 아니다. 맹한 거다. 더 이상 말을 하면 오히려 명진을 몰아붙이는 꼴이 될 것 같아 차라리 입을 다물었다.
“안녕하세요.”
매장 막내 지연이 쓰레기통을 비우러 왔다가 명진을 보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 네. 안녕하세요.”
유난히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받는다 싶더니, 명진이 지연을 붙잡고 넌지시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요, 신우철 상무님은 매장 시찰 안 하세요? 전에 D 백화점에서는 사장님이 시찰을 자주 하셨잖아요.”
이 말인즉슨 신우철 상무의 실물을 보고 싶다는 얘기다. 택배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까 요 근래 최고의 핫한 인물이 궁금해지신 모양이다.
“맞죠. 시찰은 아직 한 번도 안 하셨어요.”
점장의 극성팬에 속하는 지연이 아쉬운 웃음을 지으며 명진의 말에 적극 동조했다.
“시찰을 하셔도 지금 이 시간엔 안 하시죠. 이제 좀 있으면 마감인데.”
영희가 답답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끼어들자 명진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벌써 시간이 그마이 됐어요?”
새삼스러운 반응에 영희가 기막힌 얼굴로 한 소리했다.
“고 여사님 매장에 들어오셨을 때가 벌써 7시 20분이었거든요.”
“아, 맞아요?”
안경 너머 맹한 눈초리가 살며시 구겨지며 배시시 무안한 웃음을 지었다. 처음 명진을 봤을 때는 세무사 사무실에서 숫자 계산하는 사람답게 안경 쓴 눈매가 그렇게 샤프하게 보일 수가 없었는데. 사람 첫인상이 얼마나 부질없는 건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근데요, 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명진이 지연을 붙잡고 진지하게 물었다.
“네, 무슨 일이신데요?”
지연이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명진을 쳐다보았다.
“신우철 상무 실제로 보면 어때요? 정말 그렇게 잘 생겼어요?”
순간 코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조카뻘 되는 아이를 붙잡고 저런 유치한 질문이 가당키나 하느냔 말이다. 말을 하는 것은 분명 명진인데 부끄러움은 그걸 지켜보는 영희의 몫이었다.
“완전 멋지세요! 출근하시기 전날에 저희 매장에 손님으로 오셨거든요. 그때 제가 점장님인지도 모르고 응대해드린 거 있죠. 점장님하고 마주 보고 서 있는데, 저 진짜 심장 떨려 죽는 줄 알았어요.”
신이 나서 떠드는 지연에게 슬쩍 명진을 떠넘기고 영희는 컴퓨터 화면을 켰다. 점장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자리에 끼어 말을 거든다는 게 어쩐지 양심에 찔린다.
-여태 흑기사 하나 안 만들고 뭐 했어요?
무심하게 술잔을 들이키던 점장의 얼굴이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아무래도 너무 오랫동안 솔로로 지낸 모양이다. 별 뜻 없는 농담에 가슴이 싱숭생숭해지는 걸 보면.
“근데요, 신우철 상무가 그래 까다롭대요.”
명진이 뭔가를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내밀하게 속닥거렸다. 쇼핑 말고 명진이 열을 올리는 것이 바로 연예인의 가십이다. 인터넷 무슨 카페인지는 모르지만, 하여간에 명진이 전하는 모든 가십의 출처는 그 카페의 비밀 게시판이다.
“어머, 왜요?”
명진이 전해주는 가십뉴스에 누구보다도 강한 신뢰감을 표해오던 지연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달려들었다.
“정재계 인사들하고 여자 연예인을 연결해주는 마담뚜라고 들어봤어요?”
명진이 최소한 그 세계에 발을 담가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마담뚜란 단어를 언급했다.
“있다 카는 얘기는 들었어요.”
마담뚜란 단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에 지레 긴장한 지연이 침을 꿀꺽 삼켰다.
“보통은 남자 쪽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 연예인을 찍으면 마담뚜가 연결을 해주거든요. 그런데 신우철 상무는 여자들 쪽에서 서로 다리를 좀 놔달라고 오히려 마담뚜를 그래 조른대요.”
“와, 맞아요? 아우, 너무 싫다.”
지연이 불특정 다수의 여자 연예인들을 상대로 울분을 토해냈다. 겉으로는 그러든가 말든가 관심 없는 척 하고 있지만 심정이 복잡해진 것은 영희도 마찬가지였다. 저녁에 뭘 먹을까 물어보며 귀찮게 굴던 남자가 사실은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하니 묘한 배신감이 들었다. 우습게도. 언제는 그 남자가 같은 세상에 살고 있었던 것처럼.
“근데 중요한 게 뭔지 알아요? 신우철 상무는 마담뚜가 누굴 들이대든 눈 하나 꿈쩍 안 한 대요.”
“와, 맞아요?”
지연이 금방이라도 눈알이 톡 굴러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눈을 크게 떴다.
“그런 걸레들하고 상대 안 하니까 연락도 하지 말라 캤대요.”
“완전 멋지시다!”
지연이 무대 위에 난입하는 극성팬처럼 흥분한 목소리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여자한테 걸레라고 하는 남자가 멋지다니, 멋진 남자 다 죽었나 보다.
“오주연이 가가 왜 미래 그룹 씨에프에서 잘렸는지 알아요?”
“그거 잘린 거예요?”
청순미 넘치는 스물세 살 톱스타의 이름을 거론하자 심드렁하게 듣고 있던 선미까지도 관심을 보였다.
“신우철 상무 핸드폰 번호 알아내서 몇 번 연락했다가 잘렸잖아요.”
“우와, 맞아요? 오주연이 걔 최현재랑 사귀잖아요.”
흥미진진하게 흘러가는 스토리에 사실 관계를 들이대며 태클을 거는 선미를 명진이 답답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결혼하고도 밥 먹듯이 이혼하는 세계에서 양다리가 뭐 대수겠어요? 게다가 상대가 신우철 상무잖아요. 신우철 상무가 오케이 하기만 하면 최현재쯤이야 그냥 차는 거죠.”
어디까지나 명진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추측일 뿐인데 지연이 뭔가 깊은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니 걸레라 카는 거구나. 와, 오주연 그래 안 봤는데 진짜 여시다.”
“최현재가 등신이지. 그딴 취급이나 받고 여태 사귀고 있으니.”
어차피 결론을 낼 수도 없는 남의 연애사에 갑론을박하던 지연이 돌연 질문을 던졌다.
“그럼 우리 지점장님은 사귀는 사람 없대요?”
그런 걸 명진이 어떻게 안다고 묻나, 싶으면서도 은근히 대답이 기다려졌다.
“근데요, 이건 정말 잠깐 새벽에 올라왔다가 펑한 얘기인데요.”
명진이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했다.
“무슨 얘긴데요?”
지연이 덩달아 긴장한 얼굴로 명진을 재촉했다.
“이건 정말 몇 명만 알고 있는 얘기예요. 그 글 올린 사람이 혹시라도 고소 당할까봐 겁난다고 1시간 뒤에 글 지웠거든요.”
고급 정보임을 강조하는 명진의 눈에서 숫자를 다루는 사람 특유의 예리한 눈빛이 발광하였다. 고 여사한테 이런 총기가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누군데 그러세요? 유명한 사람이에요?”
처음부터 무조건 신뢰를 표시하던 지연은 물론이고 반신반의하던 선미까지 완전히 명진에게 포섭되었다.
“영화배우 차윤주래요.”
차윤주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컴퓨터 화면을 노려보며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던 영희마저 입을 떡 벌리며 명진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차윤주. 열여덟 살에 처음 찍은 광고로 데뷔한 이래 삼십 여년 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국민 여배우. 어느덧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지만 아직까지도 이십대 남자 배우들의 이상형으로 꼽힐 정도로 시들지 않는 미모와 영화계에 입문하는 배우들의 워너비로 꼽히는 천부적인 연기력. 연예인에 아무 관심 없는 영희도 차윤주라면 괜히 좋았다. 평생을 스캔들 하나 없이 한 길 인생을 걸어온 고고한 여배우가 조카뻘인 재벌2세와 뜨거운 관계라니, 이건 충격을 넘어서 공포였다.
“차윤주요?”
“에이, 설마요. 도저히 안 믿긴다.”
선미와 지연이 의심하는 모습을 여유 있게 바라보며 명진이 회심의 스토리를 풀어 놓았다.
“2년 전에 신문사에서 차윤주 사생활을 캐려고 몇 달을 쫓아다닌 적이 있대요. 그런데 차윤주 집에서 신우철 상무가 나오더래요. 그때 미래 그룹 측에서 열애 기사 나는 거 막느라 애 좀 썼다 카더라고요.”
충격적인 뉴스를 뒷받침해주는 그럴싸한 스토리에 설마 하는 얄팍한 의심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의심이 걷히고 나니 명진이 한 말이 모두의 뇌리 속에 기정사실처럼 박혔다.
“근데 차윤주 나이가 몇 살이에요? 마흔도 넘지 않았어요?”
서른 살까지도 아직 한참 남은 지연이 마흔 살 먹은 명진을 앞에 두고 마흔이 어마어마한 나이라도 되는 양 물었다.
“마흔이 뭐예요? 쉰 살쯤 됐을 걸요?”
명진이 마흔만 되도 양반이라는 듯 차윤주의 실제 나이를 거론했다.
“엄마야. 나이가 그 마이 됐어요? 엄청 늙었네.”
차윤희보다 젊다는 이유만으로 우월감에 젖어 있는 세 사람에게 영희가 참다 못 해 직언을 날렸다.
“쉰 살이라도 우리보다 예쁘거든?”
젊고 탱탱한 느낌은 사라졌을지라도 차윤주한테는 젊은 여자가 흉내 낼 수 없는 원숙하고 고혹적인 우아함이 있었다. 나이가 마흔이던 쉰이던 차윤주는 차윤주다.
“그래도요, 점장님이 뭐가 아쉬버서 그래 나이 많은 여자하고. 그럴 거면 차라리 오주연이가 낫지.”
“그러던가 말든가 점장님이 알아서 하라 캐라. 와 네가 나서서 오주연이가 낫네, 차윤주는 아니네, 생난리고. 니가 점장님 엄마가?”
공격적인 목소리에 세 사람의 시선이 영희에게로 쏠렸다. 그러는 댁이야말로 차윤주 매니저쯤 되냐는 듯 힐난의 눈빛이었다. 그제야 아 내가 오바했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모르겠다. 왜 이렇게 짜증이 나고 화가 나는지. 언제부터 차윤주를 그렇게 좋아했다고.
“그런데 의외긴 하네요. 차윤주는 평생 결혼 안 할 줄 알았는데.”
괜히 멋쩍은 생각이 들어 영희가 한 마디 감상을 덧붙였다.
“에이, 결혼은요 무슨. 보통 집안도 아이고, 그 집안에서 결혼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죠. 회장님은 지금 병중이라 캐도 그 댁 사모님 성격이 보통이 아니래요. 차윤주하고 결혼 하겠단 얘길 어떻게 감히 꺼내겠어요.”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영희 혼자만 불끈 화가 치밀었다.
“그럴 거면 사귀지를 말아야지. 점장님 진짜 무책임 하시네.”
“그 세계가 다 그렇죠, 뭐.”
“걔들은 뭐 사람 아닌가요?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죠.”
재벌이나 연예인을 별 세계 사람 취급하면서 은근슬쩍 면죄부를 주는 게 마땅치 않아 한 마디 하고 있는 와중에 핸드폰에서 진동 소리가 울렸다. 잠시 설전을 미뤄두고 영희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점장님.
발신자를 확인한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어제 거기로 나와요. 오늘 저녁은 이탈리안. 괜찮죠?
순간 머릿속으로 불길이 치솟았다.
도대체 이 인간이 왜 이러는 거지?
아무 하고나 만나면 안 되는 별세계 신분 높으신 분이 왜 자꾸 평범한 여자한테 밥을 같이 먹자고 빌붙느냔 말이다. 멀쩡히 애인도 있는 남자가! 자기 애인 하나 제대로 못 밝히는 비겁한 인간이!
“누구예요?”
지연이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영희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아무도 아이다.”
음습하게 한 마디 날리고, 점장한테 보란 듯이 문자를 보냈다.
-오늘은 제가 선약이 있어서 못 나가요. 죄송합니다.
자를 테면 자르라지. 시골에 내려가서 농사짓고 살면 그만이다.
너무 오랜만에 오셔서 더욱더 반갑고 행복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