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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8시 25분.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5분이 남았다. 약속 시간보다 5분 정도 일찍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10분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하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 우철에게는 퍽이나 낯선 일이었다. 거의 모든 만남이 프라이빗한 공간에서 이루어졌고, 먼저 도착해 기다리게 되는 경우에는 약속 상대가 도착할 때까지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보고를 받다 보니, 이렇게 무작정 상대를 기다릴 일이 없다. 차 안에 앉아서 이 얼굴이 그 얼굴이 맞는지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펴보고 있자니 다양한 인물이 나오는 무성 영화를 보는 것 같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중저가의 옷을 유행 공식에 맞추어 입은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그 중 몇몇은 그 간단한 유행 공식조차 따라잡지 못 하고 그야말로 몸을 가리는 용도로 옷을 걸치고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 중이다.
얼굴을 전혀 모르는 이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우철의 차가 세워진 곳으로 다가왔다.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돌발 상황에 대비해 김 과장의 긴장한 표정으로 남자의 행동을 주시했다. 김 과장의 걱정과는 달리 젊은 남자는 중고차 시장에 온 것처럼 자동차를 꼼꼼하게 훑어보더니 오오, 감탄 섞인 표정을 한 번 지어보이고는 얌전하게 지나갔다. 저 남자는 평생 이 차의 시동을 걸어보지 못 한 채 생을 마감할 것이다.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남의 물건을 저런 눈으로 쳐다보지 않는다.
8시 29분.
최근의 유행 공식에 속하는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벨트를 꽉 조여 묶은 채 걸어오는 영희의 모습이 보였다. 약속 시간을 넘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빠른 걸음이었다.
“클랙슨.”
우철의 지시에 김 과장이 자동차의 경적을 짧게 한 번 울리고 차에서 내렸다.
“안녕하세요! 자주 뵙네요.”
인사를 건네는 영희의 목소리가 퍽이나 친근하게 울렸다. 김 과장을 언제 봤다고 저렇게 격 없이 구는 건지. 품위 없는 태도에 우철의 눈썹이 못마땅하게 치켜 올라갔다.
“타십시오.”
김 과장이 예의바른 미소로 차 문을 열었다.
“아니요, 저 그냥 앞에 탈게요.”
영희가 정색하며 말을 했다. 우철의 옆자리에 앉는 게 어지간히 불편한 모양이다. 그녀의 입장에서 우철이 만만하고 편한 상대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앉으시라고 문까지 열어줬는데 굳이 앞좌석에 타겠다고 버티는 건 또 무슨 매너란 말인가. 촌티도 적당히 내야 귀엽게 봐주지.
“앞자리는 불편해서 못 앉으세요. 타십시오.”
예의바른 목소리로 부드럽게 강권하는 김 과장의 카리스마에 더는 사양하지 못 하고 영희가 어색한 표정으로 차에 탔다. 시시하게 얼굴을 귀 밑까지 발갛게 물들인 채. 동네 아이들은 감히 고개도 못 드는 파란 지붕 집 할머니한테도 당당하게 제 할 말 다 하던 오영희가 고작 남자 앞에서 이렇게 주눅 들어 있는 모습이라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과연 우철에게 미래 그룹이라는 백 그라운드가 없었어도 지금과 같은 반응일까 생각하니, 더욱 그랬다.
“오겠다는 말을 안 하기에 못 오는 줄 알았는데, 왔네요?”
무안해 하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 일부러 자존심을 건드리는 질문을 했다. 가겠습니다, 하고 확실하게 답 문자는 안 왔지만 단 한 순간도 영희가 약속 장소에 안 나올 것이라는 생각은 안 했다. 침묵이 거절이라고 하는 것도 서열이 동등하거나 우위를 점할 때의 경우다. 서열 상 아래에 있는 사람의 침묵은 분부대로 하겠다는 뜻이다.
“엄마야. 안 와도 되는 거였어요? 혹시 안 오면 자르실까 봐 무조건 달려왔는데. 저 지금 내릴까요?”
영희가 분부만 내려지면 당장이라도 탈출을 감행하겠다는 듯 잠금 장치에 반갑게 손을 올렸다. 이렇게 공격적으로 달려드는 사람을 상대할 일이 거의 없으니 오히려 당황한 쪽은 우철이었다. 그야말로 한 방 제대로 맞았다.
“김 과장. 출발하죠.”
우철이 이 상황이 퍽이나 재미있다는 척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분 탓인지 룸미러에 비친 김 과장의 얼굴이 웃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찜닭을 파는 집이라고 하니 당연히 식당인 줄 알았는데 주점 분위기의 아주 시끄럽고 산만한 곳이다. 문을 여는 순간 쿵쿵 울리는 클럽 음악 소리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부터 후회가 엄습했다.
“두 분이세요? 두 분 자리 안내해 드려라.”
게다가 자리를 안내하는 직원의 건방진 태도라니. 서민들이 오가는 주점에서야 별다를 게 없는 서비스 매너겠지만 철저하게 교육받은 서비스에 익숙해져 있는 우철은 모욕을 당한 것처럼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점장님. 매븐 거 좋아하세요?”
영희가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해고될까 봐 억지로 왔다는 사람치고 상당히 적극적이다.
“매운 음식 먹으면 장에 안 좋아요.”
우철은 매운 음식은 쥐약이었다. 굳이 먹으려면 먹을 수는 있는데 몸에서 받아들이질 못 하는지, 반응이 즉각 온다. 추운 겨울에 모닥불 앞에 서 있는 사람처럼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새빨개지고 한 며칠은 속 쓰림 증상으로 고생을 좀 해야 한다. 그걸 영희한테 곧이곧대로 털어놓기는 왠지 싫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에둘러 말했다.
“이번에는 장 트러블이라고 안 하세요?”
그 분이 장이 많이 안 좋으셨나 봐요, 하고 말하던 영희의 조심스러운 표정이 떠올라 웃음이 쿡 튀어나왔다.
“그 말 몬 알아들었다고 제가 우리 애들한테 얼마나 놀림 받는지 아세요?”
영희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마치 그 모든 책임이 장 트러블이라는 말을 한 우철에게 있다는 투다. 장 트러블을 사람 이름으로 알아들을 것이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동생들이 그 얘길 어떻게 알았는데요?”
사무실 안에는 두 사람 밖에 없었고, 우철은 말한 적이 없으니, 범인은 한 명으로 좁혀진다.
“제가 말해줬죠.”
우철이 당연한 일 아니냐는 듯 쳐다보는 그녀를 십 초쯤 가만히 응시하였다. 영희가 이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한 방 맞은 듯 입을 떡 벌렸다.
“엄마야. 지금 제 잘못이라고 쳐다보시는 거 맞죠? 자업자득이라고요.”
“전 아무 말 안 했는데요.”
빙글거리며 능청을 떨어 보이자 영희가 어이없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와, 점장님. 외람된 말씀 죄송하지만, 굉장히 얄미우시네요.”
예상치 못 한 신랄한 촌평에 유쾌한 웃음이 쿡 터졌다. 얘기를 하다 보면 가끔씩 예전의 오영희가 보여서 당황스럽다.
둘이 먹기에는 지나치게 큰 사이즈를 주문한다 싶더니, 찜닭 대자가 나오자 영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김 과장님은 왜 안 오세요? 벌써 음식이 나왔는데. 전화 한 번 해보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우철이 젓가락을 들다가 잠깐 멈칫했다.
“김 과장은 따로 먹을 거예요.”
운전대를 잡고 있는 동안은 근무 시간이고, 근무 시간에 하는 식사는 전부 비용 처리가 된다. 별도의 지시가 없어도 늘 그렇게 하듯 이 근처 적당한 식당에서 알아서 끼니를 해결하고 있을 것이다.
“왜요? 원래 같이 드시잖아요.”
원래 같이 먹다니?
김 과장에게 운전대를 맡긴지 3년이 지났지만 같이 식사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손님이 있는 자리에서 같이 밥을 먹다니, 상상해보지도 않은 일이다. 순간 어제 영희의 집 앞에서 둘러댔던 얘기가 퍼뜩 떠올랐다.
돼지국밥!
김 과장이 추천한 집이라고 했으니 저녁마다 같이 맛집 탐방하러 다니는 사이인 줄 아는 모양이다.
“오늘은 우리 둘이서 먹어요.”
순간 장난스럽게 웃던 영희의 입매가 긴장으로 살짝 굳었다. 미래 그룹 신영호 회장의 아들 신우철 상무가 무슨 뜻으로 우리 둘이서, 라는 말을 하는 걸까, 여러 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한 모양이다.
“그럴까요? 김 과장님 몫까지 많이 먹어야겠다.”
짐짓 즐거운 척 닭고기를 집어 들었지만 우철의 눈에는 분명하게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 보이는 경계의 눈빛.
더욱 자주 의심하고 더욱 많이 경계하시길.
그러므로 끊임없이 우철을 생각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오늘 만남의 목적이니까.
찜닭은 맛있었지만 경계수위를 살짝 넘을 정도로 매웠다. 우철이 최대한 소스를 덜 묻히고 살이 많은 퍽퍽한 가슴살을 골라 먹으며 조심하는 동안 마주 앉아 있는 영희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시뻘게졌다. 고작 맥 주 세 모금에.
“여기 어때요? 좀 시끄럽긴 해도 찜닭 맛은 괘않죠?”
별 이유도 없이 헤실헤실 웃는 게 취기가 도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맥주를 한 잔 따라 겨우 세 모금 마셨다. 우철이 아직 반쯤 남아 있는 맥주잔을 한쪽으로 치웠다. 그걸 본 영희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점장님, 지금 겁먹으셨죠?”
아주 대단한 건수라도 발견한 듯 표정이 아주 신났다.
“뭐가요?”
“제가 인사불성으로 취해서 점장님이 업고 갈 일 생길까 봐 겁나신 거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 맥주 한 잔으로는 절대 그래 안 돼요.”
“두 잔 마시면 업고 가야 되고요?”
별로 웃기는 말도 아닌데, 또 웃음이 터졌다. 우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만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자가 힐끔힐끔 돌아볼 정도로 웃음소리가 큰 건 확실히 좀 문제가 있다.
“두 잔까진 괘않을 것도 같은데 석 잔은 확실히 위험해요.”
영희가 물어보지도 않은 예전의 일을 끄집어내서 술술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옛날에 백화점 처음 들어와서 언니들하고 2박 3일 제주도 여행 갔었거든요. 촌 아가 비행기 처음 타고 제주도 여행 간다니까 얼마나 신이 났겠어요. 모텔 근처에 호프집 가서 맥주를 넙죽넙죽 몇 잔 받아마셨는데 눈 뜨고 보이까 모텔 방 안이더라구요. 이러다 아 죽는 거 아인가 싶어서 언니들이 교대로 제 옆에서 불침번 서고 있었다 카대요. 아침에 제가 눈을 뜨니까 옆에 있던 언니가 영희 살았다! 만세를 부르더라고요. 그때 이후론 집 밖에서 맥주 한 잔 이상 마셔본 적 없어요.”
우철이 편한 상대는 아닐 텐데 더군다나 낯선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영희는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보였다. 사람에게 마음을 크게 다쳐본 적이 없는 것이다. 우철이 알지 못 하는 그녀의 15년 인생은 소박하지만 유쾌하고 시끄럽지만 즐거웠을 것이다. 영희의 평탄하고 평온한 인생에 신우철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겨줄 것이다.
“아니 도대체 이 쓰기만 하고 맛도 없는 걸 왜 그래 먹느냐고요.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맛있는 음식인데. 오늘도 점장님이 권하는 거 아니었으면 절대 안 마셨을 건데 점장님한테는 제가 저질러 놓은 일이 좀 많아서 차마 사양할 수가 없더라고요.”
우철이 옆으로 밀어두었던 맥주잔을 영희 앞에 스윽 밀었다.
“엄마야, 마저 마시라고요?”
당했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영희와 지그시 시선을 마주쳤다. 긴장 없이 풀어져 있던 영희의 안면근육이 점점 경직되었다. 왜냐고 묻기 전에 우철이 먼저 말을 건넸다.
“여태 흑기사 한 명 안 두고 뭐 했어요?”
영희가 미처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우철이 그녀 앞의 맥주잔을 들고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술잔을 내려놓고 영희와 시선을 마주 친 순간 직감했다.
미션 클리어.
오늘 밤 오영희는 밤새 신우철이 했던 말과 행동의 의미를 분석하느라 잠을 설치게 될 것이다.
댓글 '5'
오랜만에 들렀더니 리앙님 새글이!!! 꺄울!!!
우철이 뭔가 되게 야심차게 이글이글 못된 생각하는데 ...귀...귀여워요 ㅋㅋㅋㅋㅋㅋㅋ
뭔가 복수한답시고 엄청 영희에 대해서 생각많이해서ㅋㅋㅋㅋ뭐냐 이 손해보는 거 같은 복수는 ㅋㅋㅋㅋ
뭔가 탄탄한 근육도 생기고 옛날 모습 없어졌다고 (본인이) 생각하지만 안에 든 건 은근 샌님인 거 같아서 웃기고 좋네요. 어허허.
영희말투 대구 아가씨 목소리로 음성지원 돼서 괜히 읽으면서 따라해보고 그렇습니다.
사람냄새나고 생활감 넘치는 리앙님 글 너무 좋아요-! 히히 앞으로도 잘 따라가겠습니다!
너무너무 그립게 기다렸어요..ㅜㅜ
저 역시 리앙님 글을 읽었으니 오늘 미션 클리어.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