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6.

 

어제 밤에 내가 우리 집 앞에서 누구 만났게?”

영희가 출근하는 동생 둘을 불러 모아서,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얘기를 하고 싶어서 평소보다 십오 분이나 일찍 출근했다.

누구 만나셨는데요?”

지연이 부지런히 눈알을 굴리며 물었다.

깜짝 놀랄 걸.”

집 앞에 주차돼 있는 차가 점장님 차였고, 그걸 또 훈탁이가 자전거로 박을 확률이 대체 몇 퍼센트나 되겠는가 말이다.

설마 점장님 만나서 또 배 아프다고 화장실 가신 건 아니죠?”

선미가 말만 해도 웃겨 죽겠다는 듯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끅끅거렸다. 당분간 화장실이라는 키워드는 영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간 검색어가 될 것이다.

, 진짜 매니저님. 장 트러블이 누군지 물어보신 건 생각만 해도 웃겨요.”

평소 아는 척 많이 하는 선미는 몰라도 맹한 지연이 저것까지 놀리는 데 가담하니, 그저 후회가 막급할 뿐이다.

저런 것들을 믿고 치부를 드러내는 게 아니었는데. 솔직한 성품이 화를 불러 일으켰구나.

그만 웃어라. 니들도 취임식 도중 화장실로 뛰쳐나가서 점장님한테 한 번 불려가 봐라. 멀쩡한 정신으로 앉아 있을 수나 있는지.”

정색하고 한 마디 하는데도 웃음을 멈추려는 노력 한 번 안 한다. 이게 다 평소 너무 잘해줘서 만만하게 보인 탓이다. 그저 선한 성품이 죄다.

그런데 누구 만나셨는데요?”

한바탕 신나게 웃고 나서 지연이 눈물이 찔끔 맺힌 채로 물었다.

점장님.”

?”

영희가 못 들을 말을 들은 것 모양 입을 헤하고 벌리고 있는 동생들을 째려보며 한 마디 했다.

화장실은 안 갔거든.”

점장님을 만났다고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재차 묻는 선미를 향해 한 번 더 못을 박았다.

화장실은 안 갔다고.”

우와, 맞아요? 말도 안 된다.”

자기 입으로 점장을 거론할 때는 언제고 선미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 한 채 감탄을 연발했다.

근데 황당한 게 뭔지 아나? 이번에는 내가 아니라 우리 훈탁이가 사고 쳤다. 내가 진짜 못 산다.”

훈탁이가 왜요?”

그 밤에 자전거 타겠다고 그래 고집을 피우더니, 집 앞에 주차 돼 있는 차에 퍽 갖다가 박더라고. 딱 보니까 비싼 차대. 아이고, 죽었다 싶어서 훈탁이보다 차 상태 먼저 살폈다 아이가. 운전석에 대고 죄송하다 하는데 갑자기 뒤에 문이 딱 열리더니, 거기서 점장님하고 똑같이 생긴 남자가 내리는 거라. 희한하다. 사람이 어째 이리 닮을 수가 있을까, 멍청하니 쳐다보고 있으니까 아는 괜찮냐고 묻는데 오 마이 갓. 점장님이더라고.”

우와, 진짜 대박이다.”

지연이 로또 1등을 해도 이렇게는 많이 외치지 않을 것 같을 정도로 연신 대박을 외쳤다.

그런데 점장님이 매니저님 댁에는 왜 가신 거예요?”

선미가 퍽이나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우리 집엘 왔겠나. 우리 집 앞에 장안 국밥 집으로 돼지국밥 먹으러 오셨다 카더라.”

점장님이 돼지국밥을요? , 말도 안 된다.”

지연이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가쁜 숨을 내뿜었다. 소고기국밥만 됐어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게. 나도 깜짝 놀랐다.”

재벌이라고 해서 돼지국밥 안 먹을 리가 있겠느냐마는, 배탈을 장 트러블이라고 표현하는 우아한 양반과 돼지국밥이라니, 시골 장터에서 마놀로 블라닉의 스틸레토 힐을 신고 활보하는 것만큼이나 이질적인 궁합이다.

거가 유명한 데예요?”

우리 동네에서나 유명하지, 전국구 급은 아인데 점장님 차 운전하는 기사 분이 추천했다 카더라.”

, 맞아요?”

지연의 표정으로 미루어 판단컨대 운전기사와 같이 겸상하며 저녁을 먹는 점장의 소탈한 인간성에 감동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근데 점장님 차는요? 기스 많이 났어요?”

오로지 점장한테만 관심을 갖는 지연과는 달리 선미가 이야기의 주제에 걸맞은 질문을 했다.

몰라. 어두워서 선명하게는 안 보였다. 사채 끌어다 쓸 각오로 견적 내보시고 알려 달라 캤더니 점장님이 신경 쓰지 마라, 하시대.”

어머. 완전 너무 멋지다.”

양 손을 마주 잡고 찬송가를 부르기 직전인 지연의 옆에서 선미가 아는 척 하며 한 마디 보탰다.

돈 많은 사람들은 우리하고는 다르다. 예전에 인터넷에서 봤는데 마이바흐라고 7억 넘는 차를 폐차 직전인 차가 갖다 박았다 카더라. 근데 그 폐차를 모는 사람이 노인이었대. 운전기사가 차에서 내려가 난리를 치니까 할배가 완전 사색이 되더란다. 안 그렇겠나? 수리비만 천만 원 넘어갈 텐데. 바로 그때 뒷좌석에서 창문이 딱 내려가더니 마이바흐 차주가 한 마디 하더란다. 괜찮다. 보내드려라.”

가만 얘기를 듣던 영희가 애매한 표정으로 물었다.

니 지금 나더러 폐차 모는 노인이라 카는 거 맞제?”

생각지도 못 한 시비에 선미가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제가 언제요?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얘기죠. 부자들하고 서민들하고는 돈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다르다고요.”

, 상관없다. 사채 빚 쓰느니 폐차 모는 노인 하지, .”

영희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데 그렇게 너그러우신 분이 권 여사한테는 왜 그렇게 치사하게 굴었을까. 불쌍한 서민들에게 수리비는 기꺼이 내줄 수 있지만, 팔뚝은 절대 내 줄 수 없다 이건가.

생각해 보니까요, 매니저님, 이건 정말 보통 인연이 아니에요.”

선미가 양 미간을 좁히며 진지하게 말했다.

무슨 소리가?”

어떻게 이렇게 우연이 겹칠 수가 있어요? 우연히 점장님이 처음 시찰 온 매장이 우리 매장이고, 점장님 취임식 날 매니저님이 장염에 걸려서 대형사고 치고, 그날 바로 매니저님 집 앞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정말 생각할수록 신기하지 않아요?”

그래서, 점장님이 현빈이고, 내가 하지원이라고?”

지연은 물론이고 얘기를 먼저 꺼낸 선미까지 황당한 웃음을 터뜨렸다. 미래 그룹의 신평호 회장의 막내아들 신우철 상무와 인연이라니. 차라리 현빈하고 인연이라는 게 더 현실적이겠다.

 

점심 식사를 패스하고 창고 안에 비치된 낡은 소파에 걸터앉아서 1시간 동안의 달콤한 낮잠을 즐기고 있을 때 딩동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오늘 저녁에 뭐 먹으러 갈까요?

비몽사몽 나른한 손놀림으로 메시지를 확인하던 영희가 돌연 눈을 부릅떴다. 발신 번호가 점장님의 핸드폰이다. 오전에 점장님 핸드폰으로 어제 밤새 정리한 음식점 리스트를 보냈는데 아무래도 다른 사람에게 보내야 할 문자를 실수로 그녀에게 보낸 모양이다. 번호를 착각했다고 지적을 해줘야 할지, 모른 척 가만 있어줘야 할지 아주 잠깐 고민하다가 문자 창을 열었다.

-점장님. 햄튼 매니저, 오영희입니다. 번호를 착각하신 것 같아서 문자 드려요.

슈트 화보 사진에서 걸어 나온 것 같은 완벽한 점장님도 이런 허술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는구나.

핸드폰을 내려놓는 영희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그려졌다. 30으로 지고 있다가 한 점 만회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요. 오영희 씨한테 보낸 거 맞는데요?

?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순간 혼란스러운 머리로 어제 점장님하고 나눴던 얘기를 되새김질 해보았다. 술 한 모금 안 먹은 멀쩡한 정신이었고, 최 대리도 김 부장도 아닌 점장님하고의 대화다. 머리에 총 맞지 않은 이상 점장님하고 식사 약속을 해놓고도 잊어버릴 수는 없다. 아무래도 스케줄 복잡하신 점장의 기억이 꼬인 모양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상하 관계가 분명한 직장 내에서, 부하 직원이 한 수 접고 들어갈 수밖에.

-몇 시에 어디서 만나기로 했었죠? 어제 사고 때문에 경황이 없어서 기억이 잘 안 나서요. 죄송합니다.

나름 기지를 발휘해서, 상황을 만들어 냈다. 몇 시에 어디서 만나는 줄은 알아야 나가서 기다리기라도 할 것 아닌가.

-내가 착각하게 문자를 보냈나요? 저녁 때 뭘 먹으면 좋을까, 물어봤어요.

뭐라고?

점장이 보낸 첫 번째 문자를 다시 한 번 읽어봤다. 같이 먹으러 가자는 말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순간 온몸의 피가 머리통으로 확 쏠렸다. 얼굴이 뜨거워지다 못해 익을 지경이다. “이 일을 우야노, 진짜.”

머리를 무릎에 파묻은 채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점장님하고 인연은 개뿔. 망신살이 제대로 든 게 분명하다. 부임한지 며칠이나 됐다고 번번이 이런 사고를 저지른단 말인가. 문자를 다시 읽으며 내용을 곱씹어볼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오전에 음식점 리스트 보내줬을 때는 잘 받았단 말 한 마디 없다가 한참 지나고 나서 다짜고짜 저녁에 뭘 먹을까 물어보면 어느 누가 식당을 추천해달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겠느냔 말이다. 그리고 아침 식사 해결할 수 있는 식당 알려달라고 해서, 박사 논문 쓰는 자세로 열심히 리스트 작성해서 보냈는데 뜬금없이 저녁에 뭘 먹을까 물어보는 건 대체 무슨 경우냔 말이다.

-점심시간에 잠깐 졸다가 문자를 받아서 잘못 이해를 했나 봐요. 당황하셨죠? 죄송합니다.

치사하고 억울하지만 어쩌겠는가. 사람이 사회생활을 잘 하려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 수는 없다.

매우 비통한 심정으로 점장이 저녁을 먹을 만한 식당을 검색하며 고심하고 있을 때 문자 알림 소리가 울렸다.

-뭐 먹으러 갈까요?

순간 황당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남은 지금 쪽팔려서 돌아가시겠는데 점장은 그런 거 알 바 없고 오로지 자기가 저녁에 뭘 먹으면 좋을지, 그것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 근데 이 인간은 자기가 뭘 먹을지를 와 자꾸 내한테 묻노?”

영희가 핸드폰 문자 창을 짜증스럽게 쳐다보았다.

왜 하필 나야?
백화점 내에 대구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가 한 둘이 아닌데, 왜 하필 열일곱 살 돼서야 대구에 올라온 그녀를 골라 식당을 골라 달라 생떼를 피우느냔 말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의구심은, 속이 안 좋아서 취임식 도중에 자리를 박차고 화장실로 뛰어간 사람 붙잡고 아침 식사 해결할 만한 식당을 물어보고 싶을까. 장염이 무슨 미식가들이 걸리는 귀족병인 줄 아나.

-뭐 드시고 싶으신데요? 점장님 식성을 몰라서 추천 드리기가 어렵네요.

문자를 보내놓고 나니까, 지난 달 서울에서 교육 받았을 때 강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부정적인 표현보다는 긍정적인 표현을 쓰세요, 했던. 목소리가 카랑카랑한 그 강사가 지금 옆에 있었다면 이렇게 충고 했을 것이다. 그럴 때는 점장님 식성을 알면 추천 해드리기가 쉬울 것 같아요, 라고 말씀 드렸어야죠.

됐다. 다 귀찮다. 내가 백화점에서 옷이나 팔면 되지 왜 점장님 식사 메뉴를 골라줘야 하는데?”

영희가 살짝 나사가 빠진 사람처럼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앞으로도 계속 점장의 메뉴 선택을 책임져야 한다면 차라리 부정적인 의사가 제대로 전달 됐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매니저님은 뭐 먹고 싶어요?

메시지를 읽는 순간 황당한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 진짜. 이 인간이 심심하이 할 일 되게 없는 모양이네. 내가 먹고 싶은 걸 지가 와 묻노? 따라 먹게?”

문자의 장점이 감정을 완전히 숨길 수 있다는 데 있다는 걸 지금 이 순간 깨닫고 있는 중이다. 입으로는 투덜투덜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도 문자로는 얼마든지 가식을 떠는 것이 가능하다.

-찜닭이요. 삼덕 소방서 옆에 히로미찌 찜닭.

길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가장 먼저 떠오른 메뉴로, 두 번 대답하는 것도 귀찮아 아예 식당 이름까지 한 번에 찍어 보냈다. 돼지국밥을 먹는 사람이니 찜닭을 못 먹지는 않을 것이다.

 

길고 긴 업무를 끝마치고, 핸드폰을 탁자에 내려놓고 길게 기지개를 폈다.

아이고, 삭신이야.”

삼일 동안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온 몸이 안 쑤시는 데가 없다. 시간 좀 남아 있을 때 잠이나 더 자야겠다는 생각으로 눈을 붙이는 순간 다시 문자가 왔다.

, 진짜.”

거칠게 핸드폰의 문자 창을 열었다. 짜증스럽게 굳어있던 영희의 입술이 맥없이 벌어졌다.

-찜닭 먹을 거면 830분에 D 백화점 옆 골목에 서 있어요.

이 인간 진짜 뭐 하자는 거야?


댓글 '2'

하늘지기

2014.12.04 23:34:11

우철이 작전이 뭘까 궁금해요..

내가 이리 궁금한데 암것도 모르는 영희는 오죽할까..

핑키

2014.12.20 00:36:04

ㅋㅋㅋ 진짜 뭐하는기고~ 영희가 팔딱팔딱 뛰는 모습이 그려져요^^

주인공들의 생동감이 물씬~ 재미나게 읽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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