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5장 사랑하기 때문에

 

어쩌면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운영은 그 언령이 경계의 땅에 울렸을 때 그렇게 생각했다.

 

너는 죽게 될 거다

 

너는 다른 사람의 사랑에 의해서 죽게 될 거다

 

그것은 벌써 8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8세의 휘련이 궁에 들었을 때, 운영의 나이 16세였다. 운영은 다음 해 17세가 될 무렵 계례를 올릴 예정이었다. 계례는 정식으로 왕의 여자가 되는 궁녀들의 혼례식이다. 보통 17세에서 19세 무렵에 올리는 의식이지만, 운영은 그 의식을 1년 앞두고 마음이 복잡했다. 운영은 생각시들 중에서 특출난 것도 아니었지만, 또한 뒤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평범, 딱히 모난 것도 아닌 부족한 것도 아닌 17세에 계례를 올리지 않을 아무런 이유도 없었기에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영아, 오늘 외출하는 날이지?”

같은 방의 자란이 운영을 바라보며 머뭇머뭇 물어왔다. 운영은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며 내심 한숨을 쉬었다. 평소에는 차분하고 냉철하지만 요 1년 새 그녀는 빈틈이 많아졌다. 운영이 그녀를 탓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조금은 원망해지고 싶어졌다.

저기, 이 책을 돌려드리고 싶은데…….”

운영은 뻔한 핑계를 대며 연심을 품은 책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살며시 웃었다.

괜찮아요, 언니. 가는 길인데요.”

그리고…….”

그리고 그 분이 빌려주는 다른 책을 받아오면 되죠?”

이 반년 동안 반복해왔던 일이다. 처음 급보를 받고 1, 그 절반의 시간동안 운영은 연서를 전하는 오작교가 되어 있었다. 원래 궁녀는 어지간한 일이 없으면 궁밖에 나갈 수 없다. 그런 운영이 정기적인 외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병세가 점점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년 전 몸이 안 좋던 어머니는 결국 쓰러졌고, 운영은 정식으로 허락을 받고 어머니를 만나러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 때 운영은 자란으로부터 돈을 받아 어머니에게 좋은 약을 지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럴 수는 없었지만, 운영의 어머니는 일시적으로 몸을 회복했다. 자리보전하는 처지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덕분에 서너달 회복하는 듯 싶었다. 그러나 견습나인 신분의 운영이 자주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고, 운영은 자란에게 어머니의 상태를 부탁했다. 하지만 반 년 전 지나치게 자주 외출하던 자란은 징계를 받아 궁 밖 출입이 엄격해지고, 동시에 좋은 약도 한 두 번이라고 결국 병세가 심해져 점점 몸이 약해지던 운영의 어머니를 위해 운영이 정기적으로 외출하게 되었다. 그 때였다. 자란이 궁녀로서는 품어선 안 되는 금기의 마음을 품었던 것은.

분은 오실 것 같니?”

자란은 조심스럽게 운영에게 물었다. 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자란은 살짝 기쁘면서도 슬픈 표정을 지었다. ‘는 언제나 자란이 직접 올 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매번 운영의 사가(私家)를 찾아왔다. 운영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운영은 알고 있었다. 자란이 징계를 받기 전에 운영의 어머니를 핑계대고 그를 만나기도 했다는 것을. 때문에 외출 빈도가 지나치게 많았던 것이다. 모두 자신의 어머니 때문이라고 함께 변명해주었고, 애초에 계기도 자신 때문이었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운영은 거짓말을 했다. 의심받을 만한 모든 외출을 자신의 부탁이라고.

그렇구나…….”

자란은 기운 없이 답하지만, 혼잣말이나 다름없었다. 운영도 입을 다문 채 침묵했다.

그럼 갔다 올게요.”

운영은 장지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뒤이어서 자란이 일어나는 기척이 났다. 운영은 뒤돌아 다시 자란의 얼굴을 보며 방긋 밝게 웃었다.

걱정 마요, 언니. 잘 전할테니까요.”

자란은 운영이 조금이나마 우울한 기색마저 없애고 자신을 위해 웃어주는 것을 깨닫고 안심했다. 그녀는 운영이 자신을 걱정하고 또한 이런 위험한 일을 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 마음을 그만둘 수 없었다. 그럴 수 있었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안해.”

운영은 아무말없이 미소를 돌려주었다.

 

운영아, 오늘도 집에 가는 거냐?”

익숙한 문지기 아저씨가 운영을 보고 아는 척 한다. 사실, 생각시인 운영이 문지기와 낯을 익힐 일은 없어야 하지만, 사정상 종종 보는 이 이라는 자는 비록 견습나인이기는 하나 궁녀인 운영에게 말을 툭툭 던지고 했다. 잦은 외출로 마음이 꺼려져 누구든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았지만 운영을 할 수 없이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유독 운영의 출입패를 꼼꼼히 보더니 다시 운영에게 돌려주었다.

어머니가 빨리 일어나길 바란다.”

운영은 묵묵부답이거늘, 특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말을 던졌다.

그럼.”

가볍게 인사를 하고 운영은 궐을 나섰다.

이봐, . 아무리 아직 품계를 받지 않았더라도 항아님에게 그리 말을 던지면 쓰나?”

특의 하는 모양을 지켜보던 동료 문지기가 핀잔을 주었다.

관례를 치르면 안 그래도 꼬박꼬박 항아님 항아님 할텐데 뭐하러 지금부터 그러나?”

특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뭔가 수상하단 말야…….”

특은 원래 이런 낌새는 잘 맞추는 편이었다. 호기심도 많고 소문 듣는 것도 좋아하는 특은 궁궐 내에 운영이 왜 이리 자주 외출하는 지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건 또 뭐 떨어질 게 있을 지도.’

특은 동료가 눈치 채지 못하게 평온한 얼굴을 한 채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온한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세상사정 모르는 궁녀 한명의 뒷조사 쯤 나중에 해도 얼마든지 정보가 쉽게 튀어나올 것이다. 아니, 털어서 나오지 않는 자는 없다. 특은 느긋하게 운영의 뒷모습을 눈에 새겨 넣었다.

 

운영은 길을 걷다가 음습한 시선을 느끼고 몸을 떨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의 시선인지 알 수 있었다.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외출할 때마다 시간을 끌며 운영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자다. 운영은 그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렇다고 딱히 다른 누군가와 상의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아니면 그 분……. 문득 스치고 지나가는 한 사람의 얼굴. 운영은 괜스레 마음이 찔려서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곧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할 수 없지. 상의해 볼까.’

그녀는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장터를 들러 어머니를 위한 약을 조제해 들고 반찬거리를 사서 집으로 향한다.

들어주마.”

어느새 곁에 와 있었는지 도씨 아저씨가 운영의 손에서 약과 야채를 빼앗아들었다.

여기까지 나와 있었어요?”

…….”

아저씨는 묵묵히 걸어간다. 도준만, 아버지의 친구다. 아버지 박선주, ‘그 분과의 인연은 아버지로부터 시작된다. 아버지는 무예를 익힌 분으로 무과에도 합격했었다. 하지만, 몸이 약한 어머니를 위해 돈을 더 많이 주고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사설 무인이 되었다. 실력이 아주 뛰어났던 것 같지는 않았지만 성품과 배경 때문인지 주인어른의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도 운영이 아주 어렸을 때 일이다. 아버지는 운영의 나이 6, 운영의 동생 유영이 갓 돌이 지났을 때 직무 중 사망했다. 어떤 연유로 돌아가시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주인어른 수행 중 사고로 죽었다고 했지만, 운영도 그녀의 동생 유영도 어렸기 때문에 정확히는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그때부터 자식들을 부양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몸이 약해 좀처럼 길게 일할 수 없었던 어머니를 위해 운영이 궁녀로 들어가야 했었던 일만 기억한다. 그것도 아버지가 일했던 주인어른의 소개였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길고 끈질긴 인연이다.

누님!”

싸리문을 들어서자 마당에서 손을 휘젓던 유영이 그녀를 보고 밝아지며 외쳤다. 그 모습에 짐짓 굳었던 가 운영을 향해 돌아섰다. 운영은 유영에게 시선을 주며 동생을 안아주었다.

네가 왔구나.”

그 말투에서 느껴지는 실망감, 그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아 운영은 그의 얼굴을 직시할 수 없었다.

기다리게 해 드렸군요, 나리. 송구합니다.”

문과 시험을 준비 중인 진사, 김서진. 그가 과거 아버지의 주인의 아들이자, 현재 자란언니의 연모대상이다.

아니다. 그게 네 탓이겠느냐.”

운영은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다시 유영과 얼굴을 마주했다.

우리 영이, 잘 지냈어?”

조금은 자조감이 섞여버린다. 그녀의 동생도, 그녀 자신도 이라는 글자가 있어 누구도 영이라 불리곤 해서 그때마다 운영은 동생이 생각난다. 물론, 자신을 영이라 부르는 사람은 자란언니 뿐이다.

무예는 잘 익히고?”

운영은 그저 손을 휘젓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친구였던 도준만 아저씨가 유영이를 가르친다. 운영은 그것만으로 그가 아버지께 보일 의리는 충분히 지키고 있다 싶었다. 감사하고 있었다.

제가 약을 다릴게요, 누님은 가만히 있으세요.”

아저씨를 따라 진사댁을 다니더니 말투가 어른스러워졌다. 운영은 그것이 조금 서운했다. 어른이 되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누나 누나하며 어리광을 부리던 동생의 모습을 버리기도 아쉬웠다.

고마워.”

운영은 순순히 유영에게 약을 맡겼다. 유영은 아저씨 손에서 약을 채가더니 약탕기를 가지고 약을 달일 준비를 한다. 아저씨가 마루 위에 반찬거리를 내려놓는 것을 보며 운영은 김진사에게 다가갔다.

저번에 부탁드렸던 책입니다.”

운영은 자란이 부탁했던 책을 김진사에게 건넸다. 그가 책에서 서찰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자고 내일 들어가느냐?”

그렇긴 한데…….”

운영은 오늘 유독 문지기 특이 신경 쓰였다. 운영의 기색이 이상했는지 김진사는 한참을 망설이는 그녀를 보다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어찌 그리 머뭇거리지?”

운영은 잠시 묵묵히 있다가 대답했다.

오늘은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니 답신은 다음에 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일이 있다면 답신은 다음에 해도 좋지만, 무슨 일이냐?”

아니, 조금 더 두고 보고 싶은 일이라,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운영은 망설이다, 입을 다물었다.

왜 난 결국 말하지 못했을까.’

자란언니는 위험을 무릅쓰고 를 선택했다. 은애하고 바라본다. 하지만 운영은 그에게 완전한 신뢰는 줄 수 없었다. 비록 그것이 어느 쪽을 향한 질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애매한 감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둘 다일지도……. 하아, 난 뭘 하고 싶은 걸까.’

운영은 다른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게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둘 다에게 살짝은 원망과 화가 나 있는 상태이다. 운영도 이런 갈피를 못 잡을 상태에 있는 것이 괴로웠다.

가자.”

김진사는 생각에 잠긴 운영을 뒤로 하고 도준만과 싸리문을 나섰다. 운영은 문득 눈을 들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 지금처럼 그는 나를 향해 한번 얼굴을 돌아보고…….

 

운영은 가슴이 뛰었다. 그 때 그 순간 느꼈던 아련한 연심 때문이 아니었다. 참을 수 없는 격한 분노 때문에 그녀의 심장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때의 그 김서진과 같은 얼굴을 한 선비가 막 그녀의 집 돌담을 넘어서고 있었다.

…….”

동요 때문에 말을 잃은 운영에게 그가 말을 걸었다.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

그는 대답 없는 운영 때문에 당황한 듯 했다.

당신이 알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운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이것은 노골적인 자극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과거를 가지고 자신을 자극하고 있었다.

찾는 사람이 누구죠?”

흑룡, 이하.”

아아, 그렇구나.’

운영은 어쩐지 납득하고 말았다. 자신의 구체적인 과거를 알고 있는 자는 용왕 외에 그녀뿐이다. 조금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당신은 누구죠?”

김서진.”

남자는 아직도 어딘가에 살아서 자신의 죽음을 바라고 있을 의 이름을 대고 마당에 서 있었다.

거기 그 툇마루에 앉으시죠, 김선비님.”

운영은 싸늘하면서도 애달픈 감정으로 말했다.

 

운영은 복잡한 기분을 가라앉히고 어머니가 누워있는 문을 열었다.

어머니, 저 왔어요.”

한껏 밝은 목소리로 외쳤지만, 어머니는 쇠한 기력으로 간신히 운영을 보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뭐 하러 왔어. 또 윗분들에게 찍히려고.”

자란언니가 징계를 받았던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운영도 함께 벌을 받았지만, 사정을 봐줘 열흘 야간 번을 서는 것으로 가볍게 넘어갔다.

괜찮아, 궁이 그렇게 매정한 곳은 아니에요.”

또 빈말한다. 살얼음 같은 곳이 궁이라던데, 나나 영은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어머니가 이미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자신의 수명의 한계를 느끼고 있던 어머니는 비싼 약을 매번 대는 자란언니나 진사나리 둘 다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환자지만, 그 불온한 분위기는 눈치 채고 있는 탓에 그 와중에 딸이 다칠까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괜찮아.”

운영은 어머니에게 다가가 그 손을 쥐었다.

그냥, 좀 더 있어줘요. …….”

운영의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 아니 우리들만 남겨두지 말아줘요. 엄마.’

짐이라 생각하면서 딸이 상처 입을까 입을 다물고 마지막 기력으로 버티는 그녀의 어머니, 남매 단 둘만 남겨두고 마지막 기댈 데 마저 사라지는 것이 두려운 딸 운영. 둘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아파했다.

내가 곧 밥 차려드릴게.”

운영은 울컥 흘러나올 듯한 눈물을 삼키고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런 운영을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영이 바라보았다.

? 누나 왜요?”

으응, 아냐. 누나가 밥 지어줄게.”

진사나리와 도준만이 사라지자 조금은 다시 어리광 섞인 말투가 나와 우스우면서도 아직 어린 유영을 보며 마음을 다잡은 운영은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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