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unk paradise
- 소설
- 연재소설
4.
“반갑습니다. 신우철입니다.”
점장이 말문을 여는 순간 뱃속에서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격통이 느껴졌다. 통증의 강도와 성격으로 미루어 판단컨대 1년에 한 번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다 싶은 순간 불시에 들이닥치는 장염이 틀림없었다. 못 마시는 맥주를 마신데다 진희가 쓸데없는 얘기를 한 바람에 잠을 설친 것이 화근이 된 모양이다. 차라리 아침을 챙겨먹지 말 걸 그랬다. 차라리 출근 전부터 신호를 보내던가, 점장이 취임 인사를 하고 있는 바로 이 시점에서 장염이 도지면 어쩌란 말인가. 쉽지 않겠지만 점장이 인사말을 시작한 이상 견뎌내는 수밖에 다른 선택은 없다. 영희는 괄약근에 힘을 주기 용이하도록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우와, 정말 멋지다.”
옆에 앉아 있는 아동복 매니저 소윤이 귀에 대고 감탄을 내뱉었다. 이게 무슨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 한 가운데 맨 몸으로 서 있는 사람한테 한가로이 초원을 거니는 양떼 같은 소리란 말인가. 태평하게 앉아서 점장의 외모를 품평할 수 있는 소윤의 처지가 부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잠시 잠깐이라도 긴장을 풀었다가는 전 직원들 앞에서 평생 두고두고 회자될만한 대참사를 일으킬 것만 같은 두려움에 영희는 전신의 기운을 괄약근을 조이는 데 집중했다.
점장이 인사말을 끝낼 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여기서 한 번 더 사고 쳤다가는 아버지 집으로 내려가 농사짓고 산다는 얘기가 더 이상 농담이 아니게 된다.
“여러분이 도와주신 덕분에 저희 미래백화점이 예상보다 훨씬 빠른 시일 내에 대구 내에 확실한 입지를 다질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점장님. 진심으로 감사하다면 일개 직원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인사말을 끝내주세요. 제발요, 제발.
영희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두 눈을 꼭 감았다. 지금 당장 점장이 인사말을 마쳐준다면, 이 한 몸 미래 백화점을 위해 아낌없이 바치겠다는 각서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끝까지 버틸 수 있을까.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다. 이대로 화장실로 직행 하는 것이 직원들 앞에서 더 큰 참사를 막기 위한 현명한 대응 방법이 아닐까. 시시각각 극한으로 내 모는 통증 때문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영희의 낌새를 눈치 채고, 소윤이 조그맣게 물었다.
“니 어디 아프나? 와 그래 끙끙 대?”
“언니야, 내 지금 배 아파 죽겠다.”
죽겠다는 말에 절박함이 배어 나왔다. 20층 난간에 매달린 채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구조대원을 기다리는 심정이 이럴까.
“화장실?”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 채고 소윤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할 기운도 없어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우야노. 좀만 참아라. 니 또 사고 치면 안 되잖아.”
이 언니야. 참아야 된다는 걸 누가 모르겠나.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으니, 죽겠다는 거 아닌가.
안 되겠다. 지금 나가야겠다.
엉덩이를 들썩이는 순간 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이곳을 빠져나가는 순간 닥쳐올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사무실로 불려갈 것이고,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느냐며 문책을 당하면 어쩔 수 없이 작금의 상태에 대해서 소상한 설명을 해야 할 것이고, 그 순간 이후로 점장이 취임 인사를 하는 도중에 화장실이 급해 뛰쳐나간 돌아이로 백화점 내에 소문이 자자할 것이다.
참자. 혀를 깨물며 참자. 인사말이 길어야 얼마나 길겠는가.
그러나 끝이 날 듯 점장의 얘기는 계속 이어졌고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제발 그만 좀 하라고 고성을 지를 뻔했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 의미도 없는 의미 그만 찾고 제발 입 좀 다물어, 제발! 점장님, 이제 그만 인사 좀 마쳐주세요. 제발. 제발.
“지금 현재 대구 내의 유통 상황은.......”
대구의 유통 상황을 지금 꼭 얘기 해야 돼? 천하에 재수 없는 인간. 눈치라고는 모기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
“으아!”
영희의 입에서 단말마의 신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더 이상은 한계다. 이대로 있다가는 백화점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떠나야 될 수도 있다.
“언니야, 나 지금 나간다.”
영희가 비장하게 속삭였다.
“뭐? 다 끝나간다. 좀만 참아.”
소윤이 기겁하며 손을 붙잡았다.
“안 된다.”
결연하게 소윤의 손을 떨쳐냈다.
“니 미쳤나? 지금 이 분위기에 어떻게 나간다 그라노?”
“그럼 여기서 쌀까? 혹시 누가 물어보면 아프다고 말 좀 해줘라.”
그때였다. 앞줄에 앉아 있던 최 대리가 대체 왜 그러고 있느냐는 눈빛으로 돌아보았고 놀라 고개를 든 순간 단상 앞에 서 있는 점장과 정통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무슨 일이십니까?”
점장이 영희를 향해 말을 건네자 연회장 안에 앉아 있는 직원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한꺼번에 그녀 쪽으로 쏟아졌다. 신임 점장의 취임 인사를 중간에 끊게 만들고, 모든 직원들의 질책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이 터무니없는 상황 속에서도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했다,
화장실!
정상적인 사고와 타인에 대한 배려도 기본적인 욕구가 채워졌을 때 가능한 법이다. 지금 당장 싸겠는데 신임 점장한테 찍히는 일이 뭐 대수고, 담당 부장한테 불려가 깨질 일이 뭐 그리 큰일이겠는가.
“죄송합니다.”
그리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샤인볼트를 방불케 하는 초고속 스피드로 연회장을 뛰쳐나가 화장실로 직행한 것 밖에는.
“몸이 안 좋으면 처음부터 참석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반드시 참석을 해야겠다고 욕심을 부렸다가 그만 실수를 저지른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여성복 담당 부장이 매우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구십도 각도로 허리를 숙였다. 취임 인사 도중 연회장을 뛰쳐나간 초유의 사태를 벌인 주범으로서 영희는 부장보다 한 십도쯤 더 깊숙이 허리의 각도를 꺾었다.
“이 부장은 이제 그만 나가보십시오.”
그 말인즉슨 이 부장이 없는데서 영희한테만 따로 얘기를 하겠다는 뜻이다. 예상치 못 한 상황에 이 부장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점장실을 나서며 이 부장이 영희에게 눈빛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실수 했다가는 죽는다.
“몸이 많이 안 좋으세요?”
살피듯 쳐다보는 눈빛이 영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다. 하기야 지금 이 멀쩡한 낯빛을 보면 안 믿기도 할 것이다. 변기 물을 내리는 순간 온몸으로 찾아드는 평화로운 기운에 이게 대체 무슨 드라마틱한 반전인지 그녀조차 믿기지 않았으니까.
“그건 아니지만, 그 상황에서는 정말 급박했어요.”
마음 같아서는 10초만 더 길게 끌었다면 연회장에서 벌어졌을 대참사에 대해 상세한 브리핑을 하고 싶었지만 여자로서, 아니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체면이 발목을 잡았다.
“장 트러블입니까?”
점장이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장 트러블? 그게 누구지?
프랑스 사람인 것 같긴 한데,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 짐작이나 가야 대답을 할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죄송한데, 그 분이 누구신지 제가 잘 몰라서요......”
“장이 안 좋냐고 물었어요.”
“아, 네. 네. 장염이 좀. 그런데 그 분이 장이 많이 안 좋으셨나 봐요.”
순간 얼음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처럼 무표정하던 점장의 입매가 아주 잠깐 부드럽게 허물어지더니, 입술 사이로 짧은 마찰음 소리가 났다. 기침처럼 간결한 웃음이지만 웃으니까 인상이 전혀 다르다. 뭐랄까, 굉장히 익숙한, 그리운 느낌이 가슴 속을 살짝 훑었다. 고향 집 마당에 서 있는 감나무를 볼 때처럼.
“왜 웃으세요?”
영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점장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근사한 액자 속에 있는 그림처럼 품위 있는 몸짓에 아주 잠깐 재벌1세는 뭔가 다른 종족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 앉으세요.”
책상 앞에 우뚝 서 있는 영희에게 검정색 가죽 소파에 자리를 권하더니 점장이 맞은편에 앉았다. 마주보고 동등하게 앉아 있으니까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취임 인사 도중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르고 야단맞으러 온 주제에 이래도 될까 양심이 찔릴 정도로.
“근무는 가능하세요?”
“네. 괜찮아요. 스트레스 좀 받는다 싶을 때면 한 번씩 그래서 이제 많이 익숙해요.”
“제 취임 인사 듣는 게 그렇게 스트레스 받는 일이에요?”
점장이 농담기 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에이, 설마요. 아니에요.”
그럼 대체 뭐 때문이었냐고 묻는 얼굴로 빤히 쳐다보고 있다. 무표정하게 쳐다보는 점장의 눈빛이 이상하게 만만하게 느껴졌다. 이 부장이 알면 그녀를 죽이려 들 것이다.
“어제 점장님 저희 매장 왔다 가신 후로 저 사무실에 한 다섯 번은 불려갔어요.”
“왜죠?”
왜냐니? 기가 막혀서.
순간 치받아 오른 욱한 감정을 이 부장의 얼굴을 떠올리며 황급히 가라앉히고 가증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저희 매장에서 점장님께 결례를 저지른 것 때문에 많이들 당황하셨나 봐요.”
남의 돈 월급 받으며 먹고 사는 게 이렇게 치사스러운 일이다. 결례를 저지른 인간 앞에서 결례를 저질렀다고 한 수 굽히고 들어가야 하다니. 죄송하다는 말까지는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눈을 살짝 내리까는 것으로 대신했다.
“어제 그리고 오늘, 사고의 연속이군요.”
어제 일은 그렇다 쳐도 오늘 취임식 도중에 깽판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실수였다.
“죄송해요. 저도 정말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는데 도저히 제 능력 밖의 일이었어요.”
점장이 기침 같은 웃음을 보였고 다시 한 번 가슴 속으로 묘한 감정이 일렁였다.
“대구에서 몇 년이나 살았죠?”
생각지도 못 한 질문에 영희가 가만 손가락을 헤아려봤다.
“고등학교 입학하면서 올라왔으니까 한 15년 좀 안 됐을 거예요.”
“제가 대구는 처음이라. 몇 가지 좀 물어봤으면 하는데요.”
순간 뱃속이 찌르르 신호를 보내왔다.
하필이면!
누군가 그녀를 골탕 먹일 작정을 하고 리모컨을 작동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럴 수가 없다. 어떻게 이렇게 절묘한 순간마다 배가 아플 수가 있느냔 말이다.
“네, 뭐가 궁금하신데요?”
“백화점 근처에 아침 식사 해결할 수 있는 데가 있을까요?”
“백화점 근처요.”
가만 생각에 잠긴 것 같은 모션을 취해 보였지만 머릿속이 하얗다. 뱃속에 칼부림이 나고 있는데, 식당 생각이 나겠는가 말이다.
지금 당장 아침 먹을 것도 아닌데 화장실 좀 갔다 와서 하면 안 되나?
“운동 하고 나오는 길에 마땅히 먹을 만한 데가 없어서요. 가능하다면 백화점 근처에서 해결할 수 있으면 하는데.”
지금 태평하게 음식점 얘기나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니다.
신이시여, 도대체 왜 이런 형벌을 내리시나이까. 도대체 무슨 가르침을 주시고 싶어서?!
“식사 말씀 하시는 중에 대단히 죄송한데요.”
점장이 액자 속의 그림 같은 표정을 지으며 지그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제가 지금 또 인력으로 막을 수 없는 고통이 느껴져서요.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나중에 알려드리면 안 될까요?”
이번에는 기침보다는 긴 웃음이었다. 총성이 오가는 전쟁터를 뱃속에 방치해 둔 채 아주 잠깐 넋을 잃고 그의 얼굴을, 웃음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뭐지?
뭘까.
아하하 귀여워요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장트러블...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