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unk paradise
- 소설
- 연재소설
첫 번째 편지. 난 못된 사람이었어요.
나는 감정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이성적’이라고 자부했고, 모든 일을 간단명료하게 처리해야 직성이 풀렸거든요. 그래서 친구들에게 정말 몹쓸 사람이었어요. 그걸 당신을 만나기 딱 한 달 전에 알게 됐어요. 지난해 9월 4일. 늦더위로 아직은 반소매를 입고 다니던 때였어요. 그래도 밤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해서 가디건을 꼭 챙겼죠. 내가 추위를 많이 타잖아요.
함께 대학 때 몰려다니던 동기 진희가 청첩장을 주겠다며 친한 동기들을 여의도로 불러 모았어요. 웨딩사진 촬영, 혼수 준비, 예비 시댁 흉보기 등등 진희의 이야기가 한창 무르익었는데 성미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렸어요. 성미는 당신과 함께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만났던 그 친구에요. 아주 짙은 검은 단발머리에 덧니가 귀여운 그 친구요. 기훈씨에게 “우리 영이 잘 부탁해요”라고 신신당부했던, 나와 꽤 죽이 잘 맞는 베스트 프렌드라고 했잖아요.
성미가 우는 이유는 헤어진 남자친구 때문이었어요. 29살까지 모태솔로였던 성미는 회사 동료가 해 준 소개팅으로 첫 연애를 시작했는데, 100일 만에 헤어졌거든요. 남자가 헤어지자고 했다나 봐요. 널 사랑하지만 지금 자신의 상황이 너무 복잡해서 헤어지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했대요. 그 말도 안 되는 변명에 나는 이미 그 남자가 싫어졌어요. 거기다 조건도 최악이었어요.
“당연히 잘 헤어진 거지. 솔직히 말해서 성미야, 그 남자는 아니야. 객관적으로 따져봐. 아버지는 두 달 전에 죽고, 재혼했다는 어머니는 얼마 전에 이혼해서 그 남자를 찾아왔다며. 거기다 백수 형까지 있잖아. 그 남자가 S전자에 다닌다고 한들 식구들 건사하느라 마이너스 통장까지 있다고 하지 않았어? 네가 첫 연애라서 그 남자의 모든 게 좋아 보일 수 있어. 하지만 네 앞날을 위해서라면 지금 헤어지는 게 다행인거야. 너희 부모님도 이런 남자라면 반대하지. 아무리 착하고 널 위해준다고 해도 아닌 건 아닌 거야. 그래도 너를 위해 헤어지자니 오히려 잘 된 거야. 이 세상에는 더 좋은 남자 많다.”
그 때 수 십초 동안 정적이 흘렀던 거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애들이 전부 나를 째려보고 있었어요. 성미가 갑자기 나에게 소리쳤죠. “이영! 너는 모른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런 조건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나는 그 사람이 그런 상황이지만 결혼까지 생각했어. 지금도 매달리고 싶어. 몇 번이나 매달려도 이 사람 요지부동이야. 흐흑. 이제 내 전화도 안 받아. 흐흐흑.” 성미의 서운한 눈빛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콕콕 쑤셔요.
그런데 나는 사랑을 몰랐어요. 그래서 계속 “성미야, 네가 힘든 건 알겠지만......”이라고 위로하는 척만 했어요. 성미가 아파하는 건 나도 싫었지만 성미가 그런 남자와 결혼하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나은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때 송 선배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다면 나는 성미에게 그 남자가 얼마나 별로인지에 대해 한 시간은 넘게 말했을 거예요. 나는 야근이 아니어서 바로 관악경찰서에서 여의도로 넘어간 거였는데 송 선배가 급한 취재원 약속이 생겼다며 야근을 바꿔달라고 했어요. 전날 야근에 이어 이틀 연속 야근이라 그다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알죠? 송 선배가 얼마나 잘 챙겨주는지...당신 그 일 일어났을 때도 선배가 내 대신 야근 많이 해줬어요. 너무 고마운 선배라고 몇 번이나 말했었잖아요. 그래서 우는 성미를 뒤로 하고 부랴부랴 커피숍에서 나왔어요. 너무 정신없이 나와서 진희가 준 청첩장도 잊어버릴 정도로.
그 청첩장이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그걸 가지러 다시 커피숍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내가 소개팅을 하겠다는 결심도 하지 않았을 거고, 그럼 기훈씨를 만나지 않았겠죠. 그랬다면...그랬다면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지도 않았을 거예요. 이를테면 진희의 청첩장이 가져다 준 나비효과라고나 할까요.
“영이는 정말 냉혈한이야. 감성적인 부분이 전혀 없잖아. 연애도 안 해봤으면서 사람 마음을 어떻게 알아? 사람 마음이 무 자르듯이 잘라지는 줄 알아. 차라리 이영은 아무 말도 안했으면 좋겠어.”
“그래서 난 영이 앞에서는 내 연애 이야기 절대 안 하잖아. 괜히 했다가는 내 속만 더 쓰려. 잘 나가는 기자면 뭐해. 연애도 한 번 안 하는데. 아니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지. 아무리 지가 특종상 많이 받은 기자라고 해도 저렇게 냉정하고 칼 같은 여자를 어느 남자가 좋아하겠어?”
“난 영이가 멋진 커리어우먼이 된 게 부럽기는 한데 저렇게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객관적으로 처리하려고 할 때는 좀 질리더라. 영이는 아직 애야. 사람 관계에서 가장 하이 레벨이라는 남녀 관계를 경험해보지 못했잖아. 성미야, 그냥 어린애가 몰라서 그런 말 했다고 이해해.”
내 발은 바닥과 붙어있었어요. 더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겠더라고요.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들어본 적은 29년 인생에서 처음이었어요. 기사 댓글에 달린 욕설보다 더 충격이었어요. 너무나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들이었기에 더 충격이었는지도 모르죠. 애꿎은 입술만 깨물고 멍하니 테이블 위에 놓인 청첩장을 바라봤어요.
“헉. 애들아, 왜그래. 영이도 성미 생각해서 그런 건데...그만해,”
기훈씨, 당신 직장 동료인 송혜가 나와 눈이 마주쳤답니다. 그저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해서 ‘묵직이’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그 안송혜씨요. 그래도 이미 나는 도마 위의 생선이었어요. 내장이 발리고 칼집이 나 너덜너덜해진 상태였어요. 그렇게 커피숍을 뒤돌아 나왔어요.
습관적으로 손을 들어 택시를 잡고 뒷문을 열어 택시를 타고 기사 아저씨에게 “광화문이요”라고 외치고 스마트폰으로 최신 뉴스를 검색했어요. 그 상황에서도 발휘되는 직업정신을 보면서 나조차도 질렸어요. 나라는 사람은 정말 야망, 성공, 명예 등등으로만 이뤄진 사람인가. 라는 생각에 빠졌어요. 나는 그 날 전까지 연애, 사랑, 남자 등등에는 0.0001%도 관심이 없었거든요.
그 때 송혜에게 문자가 왔어요. ‘이영, 너도 연애를 해’
권기훈씨, 당신을 만나기 딱 한 달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 한 달 동안 나는 세 번의 소개팅을 했고, 마지막 소개팅에서 당신을 만났습니다. 그게 20XX년 10월 4일입니다.
베로베로님 오랫만입니다. 글을 쓰고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기뻤고 읽으 기훈 씨와 어떤 일이 있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런데 이 홈은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잖아요. 여기 말고도 다른 곳에도 하나 더 올리심이 좋을 것 같아요. 여기에만 올리기에는 아까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