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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내 머리통이 휙 날아 가는 걸 보았다.
나는 숨을 삼키고 잠시 멈췄다. 몸속의 모든 기관이 스르르 정지모드로 바뀌다가 뚝 멈추는걸 느낄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나는 눈을 두세번 깜박거렸다. 맑게 갠 밤하늘처럼 고요하고 깨끗한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인이가 말했다.
“ 나 사랑하는 사람 있어. 너 아냐. ”
사랑하는 사람 있어,에 너 아냐, 를 급하게 붙여 말했다. 가증스럽게도.
거기까지 말했을 때 나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재인이가 하는 말이 현실적으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거만해 보일 정도로 침착하게 물었다.
“ 그 사람이 누군지 말해 줄 수 있니? ”
-사랑은 움직이는 거란다- 친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 기오야. ”
“ 뭐? 이기오? ”
“ 응. ”
뭐야?
“ 나도 기오 사랑해. 친구잖아. ”
“ 그런 거 아니고. ”
가만. 이 애는 아까부터 표정이 한번도 바뀌지 않았다. 말끔한 얼굴로 눈 위를 걸어가듯 사각사각 말하고 있다.
“ 그게 뭔데? ”
나는 어린애의 말투로 반문했다.
“ 너한텐 많이 미안하다. 일찍 말 못해줘서.... ”
미안해? 왜?
휘익 떠오르려고 하는 뭔가가 있었지만 나는 순식간에 걷어차버리고 재인이를 빤히 봤다.
“ 충격이....클 거야.... ”
“ 충격? ”
“ 그러니까....기오와 나 3년쯤 됐어. ”
그러니까....그러니까....그러니까....그러니까....그러니까....얘들은.... 이건 순 사기야. 나는 입술을 꼭 닫은 채 주절대고 있었다.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머릿속은 뜨겁게 타올랐다.
“ 그래도 우리 계속 만날...거...지?. 친구니까. ”
친구? 였던 적 없어 난.
시간이란 진짜 덧없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재인이와 나, 재인이와 기오와 나, 우리들이 담긴 장면들이, 수백 수천 컷 빠르게 돌아가는 필름처럼 눈앞에서 스쳐 지나갔다. 그 장면들은 몇 년에 걸친 것들이지만 지금 이 시간속에서는 단 몇초에 불과했다.
나는 뭔가에 어깨를 잡히지 않으려고 푸르르 떨면서 몸에 힘을 주었다.
나는 재인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재인이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테이블 위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턱을 많이 숙이지도 않고 비스듬한 시선에 맞춰 조금만 기울이고서.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 재인이의 하얀 이마가 그 순간 애처롭게 느껴졌다. 진정코 애처로울 사람은 난데 말이다.
평소에도 별 말이 없고 말을 해야 할 때도 줄여서 하는 애다. 지금도 하기 어려운 말을 간단, 명료하게 하고 있다.
기오와 3년쯤 됐고 기오를 사랑하고, 아니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기오이고 3년쯤 됐다, 그런 얘기인가보다.
그래서 뭐? 나는 어거지를 쓰려다 정말이지 공허해지려고 해서 관두기로 한다.
“ 그럼 난? ”
목소리가 커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나는 말했다. 눈으로는 재인이를 무섭게 노려보면서.
“.... ”
언제 사랑의 약속이나 맹세 같은걸 했나? 하고 이 애는 속으로 불평하고 있을까? 아마 아닐 거다. 그러진 못할 거다. 나라는 사람의 존재감을 이 애는 무시할 수 없다. 절대로.
“ 조금만 더 성의를 가지고 내게 설명해봐. ”
“....”
오늘은 여기까지, 라는듯이 재인이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모호한 눈빛이지만 그런 의사가 분명히 그 눈 속에 있었다.
“그래. 뭐가 뭔지 잘 모르겠으니까 집에 가서 생각 좀 해야겠다. ”
나는 조용히 일어났다. 재인이는 커피를 한모금도 마시지 않고 있었다. 재인이와 나는 한여름에도 꼭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
빌리 조엘의 `뷰디플 투나잇`이 흐르고 있었다. 빌리 조엘이라니....웬...지금이 몇 년도야? 그런건 왜 따져? 좋은 노랜데... 그러고 보니 그동안 음악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 같다. 그럴리 없는데. 음악은 계속 흐르고 있었을텐데.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애가 팔랑팔랑 기분 좋은 몸짓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넥스트`의 출입문을 밀면서 힐끗 그녀를 본다. 멋진 다리다. 장식이 없는 심플한 디자인의 킬힐. 명품 핸드백. (짝퉁은 아닌 거 같다) 이어링이라든지 악세사리 같은 걸 걸치지 않아서 마음에 든다. 푹 파인 목 아래 가슴골이 슬쩍 보인다. 미끈한 다리가 시원하게 뻗어 있다. 뭐가 더 필요해?
참 태평하다. 그래도 이런 쓰잘데 없는 생각으로 나는 살짝 탈출을 시도해보는 것이지. 가엾게도. 아, 정말이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나는 나를 향해 짜증을 내면서 거리로 나섰다. 여름 햇살이 길바닥에 퍼질러져 있었다. 햇빛 때문에.....라던 뫼르소우가 생각난다. 깃털같은 가벼움으로 어깨에 내려앉는 허탈감.....이 가벼움의 무게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가로수의 파릇파릇한 잎사귀들이 가지에 딱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는다. 길 건너 커피전문점 파라솔 아래 사람들이 마시거나 말하지도 않는 듯이 고요함속에서 스톱모션으로 보인다.
아직은 몰라. 뭐가 뭔지 확실하진 않잖아. 확실하지 않긴. 명명백백하게 말해줬는데. 그래....도. 어쨌다는 거야? 말이 되긴 해?
길을 건너지도 걷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내 앞으로 영업용 택시 한 대가 멈춰 섰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택시에 올라 탔다.
택시가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비현실적인 감각에 붙잡혀 있었던 거 같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다. 뇌도 가슴도 마비된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꿈도 없이 깊은 잠을 잤다. 블랙 홀에 빠진 것처럼.
1.
커피가 식을 때까지 홀짝홀짝 마시고 있다. 머리통은 진즉에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으니 먹먹한 가슴만 남아 있다.
음악도 듣고 싶지 않고 술도 마시고 싶지 않다.
뭐라도 폭파해버리고 싶은 야만적인 욕구가 내 속에 꽉 차 있다. 건드리면 터진다, 라는 것의 상태가 이런 걸거다. 나는 온몸으로 견디고 있다. 나라는 인간의 존재 자체를 뒤흔들면서 난동을 부리고 있는 이 감정을 다독거리기위해서.
핸드폰이 신호를 보내 온다. 곁눈질로 확인해 본다.
재인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 씹어버려? 그건 좀 웃기지. 둥둥둥 심장이 북을 두들긴다. 무서워.... 어쩌라고.... 아, 몰라. 더 못견디고 핸드폰을 집어 든다.
“ 여보세요. ”
여보세요는 무슨. 딴 때 같으면 어, 나야 했을텐데. 반대로 재인이가 응, 나야 한다.
재인이의 목소리를 들으니 눈도 귀도 목도 다 칵 막혀버린다.
“ 누구한테....말....안했지? ”
미친....누구란 마리를 가르킬 거지. 아마도.
마리한테 말하면 한반도에 호외 뿌린 거다. 아니지. 요즘 세상에 호외가 어딨어. 인터넷으로 게임 끝인데. 어쨌든 마리에게 얘기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 울었어? ”
“ 아니. ”
울진 않았지만 운 거나 다름 없다.
“ 뭐 하고 있는데? ”
“ 암 것도 안해. ”
“.... ”
“ 넌 뭐해? ”
“ 나도..... 지금은 일 없고, 이따 공항에 픽엎 나가야 돼. ”
“ 상해에서 온다는? ”
“ 응. 일행이 스물 일곱명이나 된대. ”
중국 여배우가 광고 촬영하러 온다고 했다. 세계적인 스타여서 요구사항이 많아 준비가 복잡했다고 한다. 일행이 스물 일곱? 메이크 엎, 코디, 의상, 헤어, 몽땅 한국 스텝 쓴다면서 웬?
“ 수고해라. ”
“ 전화하께. ”
맘씨 너그러운 아줌마처럼 수고해라, 해놓고 참 어이없다. 재인이는 왜 전화한거지? 얘와 난 무슨 말을 주고 받고 있는거야? 공기속에서 허무한 울림이 피부를 슬며시 만지며 미적거린다. 아, 이 나이에 허무의 감정이라니. 하지만 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다. 아니 생각나지 않는 거겠지만.
재인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하다. 목소리 속에는 변한 게 없다. 사실은 하늘과 땅이 뒤바뀔만큼 변했는데.
어떤 경우에도 서로 미워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재인이와 내가 그런 사
람들이라고 믿는다. 아마 사실일 것이다. 진실은 다를지도 모른다. 갑자기 그게 두려워진다.
서재인. 고여 있는 물처럼 잠잠하고 알맞게 따뜻한 아이. 하얗고 말랑말랑한 살결을 지닌 아이. 감정은 숨기고 마음만 드러내는 아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행동이 반듯한 아이. 먼 눈동자에 광기를 숨기고 있는 아이.
내게 재인이의 색채는 무지개빛이다.
작년 초가을쯤에 아줌마의 전원주택(아줌마의 화실이기도 하다) 마당에서 해 질 무렵, 테이블 건너에 앉아 있는 재인이의 어깨너머로 멀고 아득한 경치가 보였다. 노을이 지고 있어서 마치 한 장의 오래 된 사진처럼 보이던 그 장면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재인이는 말없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예기치 않게도 재인이의 그 모습이 내 가슴을 심하게 흔들었다. 불현듯 마음이 아파왔다. 나는 그 때 본능적으로 재인이의 인생과 내 인생이 같은 속도로 흘러가고 있지 않다는 걸 인식했던 거 같다. 조금 슬펐지만 왜 슬픈지 나 자신 잘 이해하지 못한채 그래도 괜찮아, 하고 나는 내게 조그맣게 속삭여 주었었다.
우리는 얼마동안 침묵하고 있었는데 침묵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편안한 침묵을 나는 처음 경험했다.
가끔 응? 하는 눈빛으로 재인이가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을때가 있다. 그럴때 나는 재인이의 청결한 마음이 다가와서 잠시 잠깐 황홀해지곤 한다.
이 세상에서 나의 전부를 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은 재인이다. 밤하늘 단 하나의 별, 그게 서재인이다.
“가끔 말이야 남이 너랑 있을 때 명랑한 멜로디가 들려. 아주 가까운 데서. ”
라거나,
“ 어제밤 꿈에 남이 너랑 우주선을 탔어. 티켓이 엄청 비쌌는데 물론 내 카드로 샀지. 내 카드는 한도가 없잖아?. 근데 너가 자꾸만 도중에 내리겠대. 도중에 내리면 돌아올 수 없는데. ”
“ 그래서 내려줬어? ”
“ 권혁남이를 누가 당해. 나도 같이 내렸지. ”
“ 둘 다 못돌아 오는데두? ”
“ 팔자소관이지 뭘. ”
이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할 때, 나는 재인이에게 무조건의 애정을 마구마구 퍼붓고 싶은 것이다.
나는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바깥의 풍경이 꼭 다른 나라, 다른 동네의 풍경으로 변해 있을 것만 같아 불안해서.
심장이 규칙적으로 뛰지 않고 찌리릿 찌리릿 괴상한 소리를 내고 있다.
아, 왜 이리 덥지? 에어컨도 켜져 있는데.
숏팬츠와 탱크 탑만 입고 거실을 왔다 갔다 한다. 뭘 하지? 난 뭘 하지? 왜 이렇게 외로운거야? 세상이 날 버렸나? 그 많던 해야 할 일들이 기억 속에서 깡그리 사라져 버렸다.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안하면서 허둥거리고 있다.
아냐. 사실은 내 두 번째 책, 을....쓰고 있었잖아. 할 일이 없긴....아, 몰라. 배 고프네. 배 고파. 그래 씻고 나가자. 마리한테 가서 마리랑 배 터지게 아무거나 먹자.
아줌마는 알고 있을까? 그럴 리 없지. 불쌍한 아줌마. 암것도 모르고 양수리 화실에서 그림만 그리고 계시려나. 이혼하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지만 그래도 외로울 거지. 보통의 중년 아줌마들이 목숨 건다는 아들에 대한 로망도 있어 보이지 않는 아줌마. 아줌마는 그저 아줌마 자신으로 살고 있을 뿐이라 했다.
아줌마는 나를 좋아한다. -이름이 좀 그렇다. 혁남이가 뭐니, 사내 이름같잖아. 예쁜 이름도 많드만-했었다. 이름? 그야 어쩔수 없지. 우리집은 `혁`자 돌림인 걸. 계집애에게 돌림자를 붙여 준 것만 해도 어디냐, 라고 고모는 말했었다. 권혁남. 권세 권, 빛날 혁, 사내 남. 뭐 어때서. 하필 왜 사내 남이야? 아빠는 내가 사내처럼 씩씩하게 살길 바라셨나? -혁남이가 내 딸이면 좋겠다. 며느리여도 좋고. 딸같은 며느리, 좋잖아- 랬는데. 아줌마 어떡해. 며느리는 물 건너 갔어. 제아무리 자유 분방한 아줌마라도 이건 넘어가지 못할 걸.
“ 오이, 우리 혁남이 왔구나. 전화도 없이 웬 일? ”
마리는 나보다 두 살 위다. 그래도 우린 친구 먹었다.
마리는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쬐끄만 옷가게를 하고 있다. 기업의 차석 디자이너였는데 때려치고 나왔다. 만들고 싶은 옷 못만들 바에야 팔고 싶은 옷이라도 팔겠다고. 가게 이름도 `마리`다. 수완도 안목도 좋아서 장사가 꽤 잘 된다. 한때는 인터넷 쇼핑몰도 같이 운영하드니 최근에 관뒀다.
나는 싫증 난 악세사리등을 시침 빡 떼고 마리네 가게에 내다 팔기도 한다.
마리는 스물 아홉, 나는 스물 일곱이다. 재인이는 스물 여섯. 기오는 스물 여덟? 아홉? 잘 기억이 안난다.
“기오씨 공연 보러가? ”
“ 내일이잖아. ”
“ 아, 그렇구나. ”
마리는 기오를 좋아한다. 아니 연모한다. 불쌍한 년.
기오는 모르고 있다. 활달하고 개방적인 성격의 마리가 딱 한가지 일에만은 소심하다. 연애. `진짜연애`에만. 기타 등등의 남녀 관계에서는 대범하면서.
마리는 플레이 걸이다. 나는 그렇게 단정 짓고 있다. 얘, 쟤, 꽤나 건드리고 다닌다. 또 마리는 섹스에 용감하다. 방안에 다른 사람이 있어도, 까페나 화장실에서도 한다. 상대의 신분 같은 거 가리지 않는다. 잘 모르는 상대라도 게의치 않는다. 위험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면 가까운 사람이, 평소 착한 사람이, 더 위험하다나.
마리가 남자한테 까이는 꼴을 본 적이 없다. 마리의 해명(?)에 의하면 까이기 전에
먼저 차버리기 때문이라 했다. 그럼에도 기오앞에서는 조용하다. 마리가 조용한 건 진짜 좋아하는 거다. 기오는 마리에게 특별한 관심은 없어 보인다. 관심을 보일리도 없지만.
기오는 뮤지컬 배우다. 1m 87의 큰 키에 잘 생긴 얼굴. 멋진 바디. 데카당스해 보이는 눈빛. 그 썩소. 춤도 잘 추고 노래도 물론 엄청 잘 잘 한다. 기오는 `몬테크리스토백작`에 주인공으로 출연중이다. 기오의 팬클럽 회원 수는 몇만명이라던가 뭐 그렇다고 한다.
“이 옷, 어때? 내일 기오씨 공연에 입고 갈 옷. ”
마리가 은색의 미니 원피스를 제 몸에 대보인다.
“ 이어링은 이거, 네크레스는 이거. 어때? 어때? ”
“ 다 좋네. ”
“ 구두도 보여줘? ”
“ 됐고요. 난 안입혀 보낼 거유? ”
“ 이 아줌마 왜 이러셔. 섹시하고 정열적인 빨간 드레스, 이거! ”
“ 너무 몸에 붙잖아. ”
“ 어머. 왜 이러셔? ”
“ 쫌 그런데.... ”
저걸 입으면 내 가슴이 터져 나올듯 솟아 보일 거고, 허리 라인도....지금 이 판국에....
마리는 바디 라인이 드러나는 옷을 좋아한다. 그것은 즉 타인의 시선을 즐긴다는 뜻이라고 해석해도 된다. 난 아니다. 그런 시선따위 귀찮잖아.
“ 재인이가 쓰러진다, 너 이거 입으면. 반짝이는 아니잖아. 이어링은 과감하게! 네크리스는 생략. 대신 이 팔찌! ”
저걸 다 도로 갖다 놓고 팔테지? 뻔뻔스러운 기집애.
마리는 만반의 준비를 해 둔 모양이다. 마리는 여배우들 보다 더 튀고 싶은거다.
“ 쫌만 내려. 쪼끔만 죽여 봐. ”
“ 왜? 재인이랑 싸웠냐? ”
" 아아니. “
“ 그럼? ”
“ 쓸데 없이 아무 데서나 튀니? ”
“ 안 튈려면 왜 살어? ”
나는 마리와 상관 없이 입을 때는, 그러니까 일상에서는 헐렁한 유니섹스 스타일이다. 하이힐 보다는 부츠가 좋다. 여름에도 부츠가 편하다. 내게는 낡은 부츠가 여러컬레 있다.
“ 우리끼리 막걸리라도 한 잔 때리자. 응? ”
“ 배 고파. 고기 먹자. ”
“ 고기? 뭐 열 받은 일 있냐? ”
아무튼 마리와 나는 꽃등심을 실컷 먹고 냉면도 한 그릇씩 때리고 소주 1병만 비우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해 지는 창가에 서서 내게 유예를 선언했다. 일단 보류. 더 이상.... 생각을 멈추기로 하였다.
그렇게 먹어댔는데도 여전히 배가 고프다.
8월의 첫째주 금요일. 인터넷에서는 난리가 났다. 기오가 출연하는 날의 티켓이 매진이란다. VIP석이 15만원이나 하는데.
우리는 예술의 전당 야외 까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몽골 텐트가 몇 개 처져 있고 음료수와 샌드위치, 햄버그 등을 팔고 있다. 재인이는 10분쯤 늦게 도착했다.
그날 보고 처음이다.
얼굴이 약간 상기돼 있다. 상해에서 온 여배우 때문에 엄청 스트레스 받고 있을 테지.
“ 미안. 주차하느라. ”
그레이색 셔츠에, 보라색 좁은 넥타이. 검은 양복이다. 하얀 얼굴이 더 돋보인다. 적당한 크기의 코와 핑크빛 입술. 가느다란 손가락 끝이 반짝인다. 재인이는 역시 스타일이 좋다.
그렇게 무서운 말을 하고 들은 재인이와 나였는데, 하마터면 그런 사실을 잊어버릴뻔 했다. 재인이의 얼굴도 그렇고 내 마음도 아무런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건 좋은 징조인가, 아니면 나쁜 징조인가. 나는 모르겠다.
“ 큰 일 땄다며? 바쁘겠네? ”
마리가 아는체를 해주고, 나는 음흉한 눈으로 재인이를 살핀다.
“ 뭘....며칠은 죽었다, 하고 사는 거지요. ”
재인이는 광고회사의 프로듀서이다. 회사에서 맡지 않은 광고도 사진만 찍기도 한다. 재인이네 회사의 스튜디오 시설과 사진작가들은 국내 최고다. 재인이는 지난 봄 젬마 왓슨을 직접 섭외해서 국내 화장품회사의 CF모델로 계약을 성사시켰다. 재인이는 그런 일이 재미있다고 한다. 재인이는 중고교를 캐나다에서 다녔다. 아줌마가 이혼하면서 재인이를 데리고 캐나다로 이주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대학에 입학 할 무렵 재인이가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졸라서 귀국했다고 한다. 남들은 대학에 가기 위해 조기유학을 떠난다는데. 왜 그랬는지 나는 재인이에게 물어 보지 않았다. 재인이가 스스로 말하지 않으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테니까.
하여튼 덕분에 재인이는 영어를 잘 하고 지금의 비즈니스에 무지 도움이 되고 있다. 고등학교에서는 제2 외국어 선택을 프랑스어로 했다 한다. 프랑스어 전공인 나와 재인이는 프랑스 영화 함께 볼 때 기분이 엄청 좋다.
이번 일은 상해의 주류제품 CF 촬영을 재인이네 회사에서 맡았다. 물론 그들의 컨셉대로 촬영만 한다. 국내 언론에는 공개하지 않기로 해서 모델인 여배우의 스케줄도 숙박하는 호텔도 다 비밀이다.
“ 재인아 쟝쯔이 예뻐? ”
아, 그랬다. 그 여배우는 쟝쯔이였지.
“ 예쁘겠지요.”
대답하고 재인이는 나를 본다. 그 맑고 깨끗한 눈으로.
“ 책은 잘 돼 가? ”
“거의....일러스트하고 미팅해야돼. ”
나는 `홍콩에 간 인어아가씨`란 동화를 쓰는 중이었다.
“ 뭐 먹을래? 공연 끝나면 10신데 .”
재인이가 일어 설 폼으로 말한다. 마리가 얼른,
“ 난 햄 안들어간 샌드위치랑 딸기쉐이크. 혁남이 껀 알지? ”
재인이는 쟈켓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쳐 두고 일어난다.
나는 내 얼굴에 얹혀 있을 표정을 걱정한다. 재인이는 잠잠하다.
“ 재인이 멋있다. 저 탄탄한 힢 좀 봐. 착 올라 붙었네. 섹시해요. ”
“ 남의 밥에 침 튀기지 말라고요. ”
“ 으으~ 아깝다 아까워. 내 꺼가 아니어서. ”
마리는 혀를 쏙 내민다. 오늘 기분이 좋아 뵌다. 약간 들떠 보이기도 한다.
마리는 반짝이가 들어간 은색의 미니 원피스를 입었다. 머리칼을 목 위로 걷어 올려 포니테일로 묶었다. 드러난 목이 육감적이다. 이어링은 귓바퀴에 딱 달라붙는 심플한 걸로, 네크레스는 화려하고 대담한 디자인이다. 마리는 오늘 우아하고 아름답다. 두달 전쯤 마리는 코를 성형했다. 눈도 쬐끔 찢어서 커 보인다.
나는 역시 그 빨간 원피스는 집어치고 겨자색 실크 블라우스에 검은 미니스커트를 선택했다. 구두는 검정 펌퍼스힐.
마리는 숄을 의자에 걸쳤다. 나는 마리를 째려 본다.
“ 내 껀 왜 없어? ”
“ 바보. 그래야 재인이가 널 안아주지. ”
“ 그러세요?! ”
“ 근데 느이들 너무 편하다? 서로에게 마음이 편해지면 이미 연애가 아니거든. 남녀 사이에 긴장이 빠지면 뭐 되냐. 섹스는 하고 사니? ”
하드니
“ 했니? 했어? ”
또 점검한다.
“ 아동문학가라고 연애도 동화적으로 하시나? “
마리는 재인이와 내가 너무 섹스를 안한다고 바가지를 긁곤 했었다.
맞았다. 마리는 역시 도사다.
나는 샌드위치를 우적우적 먹었다. 마치 엄마에게 야단 맞고 실컷 울고 난 담에 먹어대는 아이처럼. 재인이는 먹는둥 마는둥 한다.
재인이는 여전히 잠잠하다. 감정도 동작도 펑소처럼 절도 있다.
배우들의 땀냄새가 객석에까지 끼쳐 오는 것 같다. 관객은 젊은 여자들이 대부분이다. 마리의 말로는 몽땅 기오 팬이란다. 나는 무대 위의 기오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리도 그런 것 같다. 마리와 나는 다른 감정으로 한 사람을 보고 있다.
공연이 끝나고 우리는 언제나처럼 분장실로 갔다. 나는 와인 한 병, 마리는 크다란 장미꽃다발을 들고.
“ 왔구나! ”
기오가 반긴다. 마악 무대에서 내려와 그 열기가 몸에서 나가지 않은 채이다.
기오와 재인이는 짧게 포옹한다. 치사하게도 나는 그들을 염탐하는 눈초리로 본다. 마리가 꽃다발을 내밀자 마리와도 포옹한다. 나는 와인병을 분장실 거울 앞에 슬며시 놓았다.
“ 와인이야? 댕큐. ”
기오가 눈썹을 약간 올리면서 나를 본다. 왜 나랑은 포옹 안해?
돌연, 기오의 몸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충동이 생긴다. 나는 기오에게 다가가 기오를 껴안았다. 내 뺨이 기오의 가슴께에 닿는다. 기오의 몸은 축축했다. 진한 체취 때문에 머릿속이 어질어질한다. 기오가 내 등을 가볍게 두드린다. 체취가 너무 강해. 그리고... 달라도 이렇게 다를까. 재인이는 상쾌하고 담백한데. 말도 안되는 비교를 하면서 나는 남몰래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건 아니지. 너무 치졸하잖아.
“ 매진이라며? 이기오. 역시 멋있어 ”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웃으면서 나는 내가 너무 징그러워 죽을뻔 했다.
분장실 안과 밖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진다. 출연자들과 찾아 온 사람들. 들락거리는 스텝들.
“ 거기서 봐. ”
기오가 재인이를 보며 조그맣게 말했다. 재인이는 눈으로만 끄덕인다. 재인이는 내가 옆에 있다는 걸 잊은 걸까. 저렇게 평안하고 차분하다니. 나는 이렇게 속이 시끄러운데. 아무려나 잠잠재인이다. 하지만 서재인. 아마, 언젠가는, 너의 그 잠잠한 호수에 돌을 던지는 사람이 있을 거다. 나는 너와의 세월을 담보하여 이렇게 호언 장담할 수 있다. 너의 그 고상하고 스마트한 모습이 부서지고 말 거다. 나는 무슨 짓이라도 할 거다. 너를 지키기 위해서. 설령 너에겐 잔인한 일이 될지라도 나는 주저하지 않을 거다.
나는 음침한 욕망을 숨기고 드글드글 끓고 있는 중이다.
금요일 밤. `파탄`에는 손님이 꽉 찼다. 술집 이름이 파탄이라니. 모두 파탄하고 싶어 환장들 하셨나.
“ 외국어 아냐? 한국말이야? ”
마리는 파탄이 무슨 희랍어나 에스파니아어라도 되는줄 알았다는 얼굴이어서 우리는 킬킬대며 웃었던 일이 기억 난다. 마리를 빼고 재인이와 나, 기오, 우리 셋은 처음부터 파탄은 파탄으로 알아들었는데 말이지.
우리 셋은 언젠가 파탄이 날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니지. 아니야. 다른 수가 날 거야. 나는 속으로 다짐(?)한다. 아무런 대책도 없는 주제에.
마리는 러시안 블랙을, 나와 재인이는 여늬때처럼 마가레타를 주문했다. 스테이지에는 인디밴드들이 연주를 하고 있다. 다섯명의 저 그룹은 실력이 장난 아니다. 드럼 치는 애가 재인이랑 기오랑 아는 사이다. 뭐 그리 친한 거 같진 않고.
우리는 별 말 없이 음악을 들으며 칵테일을 홀짝이고 있다. 세사람 모두 제각각의 생각에 빠져 있거나 아니면 셋 다 아무 생각도 않고 그냥 앉아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나는 뭔가 열심히 생각하고 있는데 뭘 생각하고 있는지 정작은 명확하지가 않다. 진짜 이상한 현상이다. 치과에 가서 마취 주사를 맞고 발치한후 집으로 돌아올때 뺨의 먹먹한 감각 그런거 비슷한 거 같기도 하다.
1시간쯤 후에 기오가 왔다.
“ 혼자 빠져 나오느라 혼났네. ”
그러시겠지요. 나는 삐딱한 눈길로 기오를 본다. 재인이와 기오가 눈치 못챌만큼만 삐딱하게.
기오가 재인이의 어깨를 누르듯이 하며 슬쩍 짚었다 놓는다. 재인이는 반응이 없다.
기오는 재인이가 내게 말 한 걸 알고 있을까. 그래 보이진 않는다. 기오의 얼굴은 말쑥하다. 다분히 감정적인 기오가 아무렇지도 않을리 없지. 아니면 여태 나의 존재는 두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만큼 비중이 있는 존재가 아닌걸로 돼있어서 재인이가 내게 말을 했건 안했건 상관이 없다는? 오우! 그런 개뼈다귀같은 경우가 가능해? 하긴 서투른 애들이 아니다. 나는 만만찮은 이 애들과 전쟁을 치를 것이다. 누가 승리하든 패배하든 그건 중요치 않다. 결판을 내는 일이 중요하다. 어느쪽으로의 진정성이 더 우위에 있을지 아무도 전망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세상 안에서 살아야 하니까 전쟁을 피할수 없을 것이다. 아니다. 하긴 이건 진정성, 그런 문제가 아니다. 갑자기 막막해진다. 시끄러운 술집에서 나는 너무 깊은(?) 생각을 하고 있다.
금속으로 된 기오의 팔찌와 반지가 눈에 들어온다. 기오는 맥주를 한 잔 들이키고 난 뒤 위스키를 주문한다. 본격적으로 마실 타임이다.
마리와 재인이 사이에 기오가 앉아 있고 나는 기오를 마주 보고 있다. 마리는 나름대로 매혹적인 몸짓을 지어 내고 있다. 마리는 기오를 만지고 싶은 열망을 참고 있을 거다. 아이러니지.
마리가 손등으로 턱을 괴었다. 허공에 떠 있는 마리의 빨간 손톱이 앵두처럼 영롱하게 빛난다. 꼬고 앉은 다리가 허옇게 드러나 보인다. 허벅지가, 아니 엉덩이가 반쯤 삐져 나오려 한다. 노팬티는 아닌지 모르겠다.
“ 속은 안 썩여? ”
기오가 재인이의 눈을 들여다 보며 말한다.
“ 별로. 의상을 마음에 들어 해서 디자이너가 두벌 선물로 주기로 했어. 데게 좋아하던 걸. ”
“ 오우, 재인. 쟝쯔이 그 여자 어느 호텔에 묵어? ”
마리, 이윽고 참을 수 없을 만큼 심심해졌다. 기오의 반응이 없으므로.
“ 왜? 쳐들어 가게? ”
기오, 드디어 반응했다.
“ 그 여잔 어디서 살아? 베이징? LA? 파리? ”
“ 마리씨는 별 게 다 궁금하네. ”
재인이 대신 기오가 대꾸한다.
실내는 어둡고 사람들의 말소리와 음악 때문에 몹시 소란스럽다.
나는 이제 시선을 스테이지 위로 국한하고 있다. 그러지 않으면 내 눈동자가 재인이와 기오의 얼굴 위로 굴러 다닐까봐.
“ 우리 클럽 갈까요? 지난달에 새로 오픈한 클럽 알거등요. 물이 어떤지 답사도 할 겸. 어때? ”
마리가 기오와 재인이, 나를 번갈아 보면서 말한다. 기오가 재인이를 쳐다보며 가?하고 말없이 묻는다. 재인이는 나를 본다.
“ 가지 뭐. ”
내가 결정했다. 우리는 모두 일어 났다. 계산은 재인이가 한다.
“ 클럽은 제가 쏩니다. ”
저 오지랖.
나는 마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심술궂게 대꾸한다.
“ 당근 안말리지. ”
기오는 간단하게 댕큐, 하고 사양하지 않는다. 깍쟁이. 우리 넷 중에 기오가 젤 짤 걸?
미쳤나 다들. 클럽에는 청춘들의 몸부림으로 그득했다. 한눈에도 물은 좋아 보였다. 클럽의 물이 좋고 안좋고는 음악이나 실내 장식등으로 판단되는 게 아니다. 여자애들에 의해 결정지어진다. 몸 되고 얼굴 되고 춤 되는 여자애들이 오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종업원이 기오를 알아 보고 얼른 안내를 한다. 마리도 턱을 치켜 들고 힐의 뒷꿈치에 힘을 주어 걷는다. 클럽걸의 모드로 전환중이다.
기오를 본 여자애들이 여기저기서 소리를 지른다. 어떤 여자애가 기오의 코앞에다 손가락을 탁 튕기면서 윙크를 하고 지나간다. 기오는 무시한다.
종업원이 반달모양 소퍼가 있는 테이블로 우리를 안내했다. 나는 의도적으로 재인이와 기오 사이에 자리 잡는다. 질투의 본질은 유치함이다. 마리의 눈빛이 본격적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여자애들은 빵빵한 젖가슴과 초미니 스커트 아래서 쭈욱쭈욱 뻗은 다리를 힘차게 내젓고 있다. 언제부터 한국 여자애들의 가슴이 저렇게 커졌을까.
우리는 넷 다 플로어에 나와 있다.
춤 추는 재인이는 압도적이다. 평소에 보이는 재인이의 모습이 아니어서 신선하다. 재인이의 정신이 멀리 여행을 떠나고 마음은 무장해제 상태이다. 슬몃슬몃 광기를 드러내며 리듬을 뛰어 넘는 저 몸짓. 잠잠재인은 어디로 갔나요.
마리의 춤은 약간 거칠다. 마리는 춤 추는 걸 무지 좋아한다. 춤과 섹스는 정직한 자아 발현이라는 것이 마리의 지론이다.
남자애들 둘이 마리와 나를 채 간다. 재인이와 기오는 우리를 방치한다.
어느 사이 여자애들이 재인이와 기오앞에서 흔들고 있다. 나는 흘낏 그들을 본다. 확실히 재인이와 기오는 여자애들과 무관하게 둘이서만 감정을 교환하고 있다. 내게 그것이 보였다. 억측이 아닌 실재로서.
재인이의 눈빛이 낮은 촉수의 전등처럼 번뜩였다. 저런 눈빛, 내가 알던 재인이가 아니다.
왜 몰랐을까. 함께 클럽에 온 게 처음도 아닌데.
보려고 하면 보이는 것이다. 보지 않으면 존재하지도 않는다.
춤 추면서 술도 마셨는데 이렇게 머릿속이 이성적으로 환히 켜져 있다니. 그야말로 가슴은 뜨겁고 머리는 차갑네.
셔츠를 걷어 올린 재인이의 팔목이 상쾌하다. 깨끗한 몸을 가진 사슴처럼 스마트한 동작으로 춤 추고 있는 재인이.
나는 드문 일이지만 내가 미워지려고 한다. 나는 나를 꽤 좋아하는 편이다. 그렇드라도 재인이만큼 좋아하지는 않을 거다. 재인이는 너무너무 좋다. 나는 요 몇 년간 재인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재인이를 미워 할 수가 없어 나를 미워하려 하고 있다.
왕성한 청춘들이다. 새벽 네시에 우리는 고기집에서 등심을 굽고 있다. 이 시각에 청담동은 고기집까지 바그바글이다. 왜 다들 집에는 안가는 건지.
기오는 고기를 구워서 재인이의 접시에, 재인이는 내 접시에 놓아주고 있다. 나는 쉴새없이 고기를 씹어 댄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진다. 요 며칠 이런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식이라면 금방 허리가 29인치, 아니 30인치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꼴이 되면 나는 마리로부터 짤릴지도 모른다. 각성해야지.
마리가 두손을 쫙 펴서 허공에 멈춘다.
“ 나만 거지네. ”
재인이가 얼른 고기를 한 점 집어 마리의 접시에 놓아준다. 기오는 여러 점 한꺼번에 집어서 마리의 접시에 갖다 놓는다. 츠츳. 마리야, 너는 네 운명을 모르는 것이 죄다.
소주병이 너댓 자빠지고, 취기가 급작스레 오르는 거 같다. 나는 뒤통수를 한 대 펑 맞은 것같은 아찔함 속에서 품위를 챙겨보려고 안깐힘을 쓴다, 라고 하면 뻥이고 그저 도망을 치고싶다, 라는 편이 맞다.
하여간 조금 숨이 막힌다. 숨을 쉬려면 뇌를 움직여야지. 나는 원활하게 숨 쉬기 위해서 아무말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 식당 아줌마들이 부엌을 뛰쳐 나와서 군대에 간대. ”
“ 왜? 아들 면회하러? ”
“ 아니. 국가와 민족을 지키려고. 느이들이 못미더워서. ”
재인이가 소리없이 웃고 있다. 그러나 내 귀에는 재인이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나는 또 주절거렸다.
“ 그 많던 고래들은 다 어디로 떠났을까요? "
“ 동해 바다에 모여 있대. ”
재인이가 나를 달래듯 온화한 목소리로 말 한다.
마리는 귀찮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어쩐지 집에 가고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많이 취한 탓으로 뭔가 어거지를 쓸 거라 예측하고 미리 거절하려는 태세라고나 할까, 뭐 그런 비슷한 페인팅을 하고 있다.
슬슬 다운되고 있다. 나의 내부에 있는 기관들이 스르르 쓰러지는 모습이 보인다. 여기서 더 진전하면 졸음이란 놈이 다가온다.
의식이 희미하거나 몽롱할 때 완벽한 평화가 유지된다는 걸 아시는지요. 그런 평화속에서는 진실이 말을 걸어 오지요. 그러면 아파지기 시작한답니다.
갑자기 재인이가 그립다. 재인이는 지금 내 옆에 있는데.
고기 굽는 냄새가 피부를 흠뻑 적시고 있지만 나는 재인이의 냄새를 느낀다. 나만 아는 재인이의 냄새.
차가운 감각이 얼굴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재인이가 물티슈로 내 입가를 닦아주고 있다. 내 손을 붙잡고 손가락, 손바닥, 손등을 닦아준다. 티슈가 시커멓게 칠해진다.
“ 에구 더러워, ”
마리, 너 친구 맞어?
“ 괜찮아. 뭐 하루 이틀이야? ”
재인이의 눈이 나를 보고 웃고 있다. 무한 다정하게.
이건 좀 이상하다. 예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시츄에이션이잖아. 그럼 안되지. 아닌데....
느닷없이 실실 웃음이 나왔다.
“ 으흐흐흐...”
이 시각에 도대체 누구와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지, 기오는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다. 목소리를 낯추어가며.
“ 이제 가야 돼. 쟤 저렇게 웃으면 파장이야. ”
기오가 받은 선물 상자며 꽃다발등을 챙기면서 마리가 재인이를 설득한다.
“ 어디로? 어디로 가? ”
난폭한 제스츄어를 과장하는 나. 나는 지금 실제보다 더 취한척 하는 경향이 있어뵌다. 그저 몽롱할 뿐인데. 그렇잖아?
그래. 어디로? 나는 이제 어디로? 여태 가던 길이 가려던 길이 아니라는데 나는 어디로 가냐 말이야.
나의 절규에는 아랑곳없이 그들은 나를 차에다 실었다.
재인이의 차는 이미 `파탄` 에서 버렸고, 넷이서 택시를 타고 제일 먼저 마리를 떨궈주고 나 우리집에 밀어넣고 재인이랑 기오는 휭하니 떠나갔다. 나는 빈손으로 바람 부는 거리에 버려진것 같다. 내 집의 벽들은 다 사라지고 나는 벌판위에 서 있다.
요란한 밤이었다. 뮤지컬을 보고 술을 마시고 춤도 추고 고기도 실컷 먹고. 아니 그보다 내 마음이 시끄러웠던 밤이었지.
핸드백을 집어던지고 거실의 창에 코를 뭉개듯 붙이고서 어두운 바깥을 본다. 거기에 풍경은 없고 화장이 지워져 범벅이 된 여자애가 피에로처럼 슬프고 희극적인 얼굴을 들이대고 있다. 울지 않을래. 울진 않을 거야. 나는 마음에 다짐을 주고 돌아 앉는다. 거실이 휑하니 넓어 보인다. 가구를 하나 들어낸 것처럼.
공허한 새벽이다.
그래도 절망스럽진 않다.
왤까.
우습지만 정말이다.
나는 오랫동안 허공을 쏘아보고 있다가, 그 다음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런 분위기의 글, 굉장히 오랜만이네요...자주는 아니어도 죽..이어서 와주시면 좋으련만..
아무쪼록....혁남이를 생각하면, 재인이 나쁜 놈인데...막 미워할 수 만은 없게 만들어놓으셨군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