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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 달을 보며 울다
설정 및 줄거리
여고 3년생인 한기쁨과 잘 나가는 대통령 집안의 막내 아들이자 20대 후반의 강은곤은 집안의 강요로 결혼을 하게 된다. 각자 이유는 다르지만 결혼을 하기 싫어한다는 점에선 의견이 일치한 두 주인공은 결국 집안을 속이기로 하고 일단 계약결혼을 한다.
하지만 자신의 결혼 사실을 알리기를 원치 않는 두사람은 분가하고, 이사한 곳의 주변 사람에게는 사촌으로 밀고 나가면서 은밀한 이중생활이 시작된다. 그 이후 여러 해프닝을 거치면서 두 사람은 진정한 부부로 거듭나게 된다.
분위기 및 주의점
엽기 로리풍 코믹. 남자 주인공은 꼭 잘나지 않아도 되나, 후에 어린 여주에게 몸달은 변태 중년(?)의 모습을 보이며 무너지는 남주의 모습을 그릴 것. 이것이 맨 처음 시작하신 룰루랄라 님의 의도입니다. 아마도 여주는 끝까지 빼면서 남주의 마음을 달궈야 하지 않을까, 짐작.
- 1 -
"결혼이라니요! 아빠 지금 무슨 소리에요!"
놀란 기쁨은 먹고 있던 바나나를 입에서 떨어뜨리고 말았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이지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기쁨은 지금 아빠가 농담을 하시나 싶어 아빠의 얼굴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얼굴 펴라. 이름에 먹칠하지 말고. 전혀 기쁘지 않은 얼굴이구나."
혀를 차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기쁨은 잠시 두 눈을 깜박이며 아빠를 응시했다. 아무래도 아까 먹은 저녁밥에서 쉰내가 살짝 났었는데 그게 결국 탈이 났나 보다. 기쁨이 잠시 아빠가 어디 잘못 된 것이 아닌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펴 보았지만 그녀의 그런 행동에도 아빠는 태연한 모습으로 그녀의 앞에 앉아있었다.
"아빠, 결혼이라니요?! 지금 농담하는 거죠? 내 나이가 몇인데 결혼이에요."
"네 나이가 18살이라는 것은 내가 더 잘안다. 옛날 그 나이엔 애가 둘이었어. 그러니 잔말 말고 조용히 시집가라."
아빠의 말에 방바닥에 떨어진 바나나를 주워 입으로 가져가던 기쁨의 동작이 멈추었다. 그녀는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아빠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다 결국 그녀의 목소리가 커지고 말았다.
"아빠! 이번 신학기가 시작되면 난 고3이라고요!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이 목숨을 거는 고3! 이런 중요한 시기에 나보고 결혼하라고?! 그럼 대학은 어떻하라고?"
'1년 죽어라 고생하여 대학에 들어가 여러 미남들을 수집하겠다는 내 원대한 포부는 어떡하라고~!' 이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기쁨은 간신히 삼켰다.
더구나! 유부녀, 라는 것은 아무리 이쁘고 귀여운 꽃돌이들을 봐도 군침만 흘리며 바라만 봐야한다는 그 유부녀렷다. 흥, 절대로 그렇게 될 수는 없지. 강은곤이든, 강금곤이든. 난 결혼은 절대 못해!
……잠깐. 결혼은 절대 안 되지만…… 어떻게 생겼을지……. 꽃미남일까? 기쁨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꽃미남이면 결혼을 고려해볼수도……. 아냐, 절대 안 돼!
기쁨은 약간 자신이 앞서나간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조금 냉정해지기로 했다. 아빠의 얼굴을 보았지만 포커페이스, 전혀 정보가 없다. 남들은 고3되면 공부하라는 말을 귀에 피가 흘리도록 듣고 산다고 하던데, 어찌된 영문인지 자신은 결혼이라는 엉뚱한 소리나 듣고 앉았다니. 기쁨은 아빠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아빠, 어디 아픈 건 아니죠? 나 공부에 스트레스 받을까 봐 지금 개그하는 거죠?"
"그럴 리가 있냐. 내 상태 멀쩡하다. 다만 시기가 좀 당겨졌을 뿐이야. 그쪽이 갑자기 서두르자는 바람에 말이다. 발정이라도 했는지 원."
"바, 발정?"
기쁨은 자신이 손에 들고 있던 바나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후다닥 내려놓았다. 입에 잠시라도 물었던 달콤함까지도 저주스러웠다.
갑자기 아빠는 푹 하고 한숨을 쉬었다. 기쁨은 발딱 눈을 들었다.
"기쁨아. 내 딸 기쁨아. 이 아빠가 우리 기쁨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무……, 물론이죠."
기쁨은 경계심을 곧추 세웠다. 위험하다. 이렇게 나오는 아빠는 대단히 위험하다. 경계를 늦추고 긴장을 풀었다가는 가딱 지옥형 낭떠러지로 급강했던 경험이 어디 한두 번인가? 좋다. 다른 일은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하지만! 결혼이라니! 절대 안 된다. 기쁨은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두었다.
"그쪽이 말이다, 대통령 집안이란다. 한 마디로, 그쪽과 결혼하면 넌 대통령 막내 며느리가 되는 거란다. 이 아빠는 우리 기쁨이를 정말로 사랑한단다. 그래서 널 좋은 가문에 시집보내고 싶은 거야."
대통령 막내 며느리? 기쁨은 침통한 표정이 되었다. 내 인생의 꽃미남은 진정 물러간 것인가! 기쁨의 머리 속에는 뉴스에서 지겹도록 봐오던 역대 대통령 아들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그 얼굴을 보면서 하나하나씩 별명을 붙여주던 순간이 생각났다. 저건 멸치 대가리, 저건 모기 아저씨, 저 사람은 왕파리……. 기억하기 싫은 또 하나의 얼굴은 돼지를 닮은 두꺼비의 얼굴이었다. 아, 김정일의 둘째 아들이었던가. 기쁨은 마음 속으로 절규했다.
"아빠가 딸을 사랑하는 마음은 알지만, 난 내가 낳는 애들이 곤충이나 동물이 되는 건 싫단 말예요."
기쁨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아. 내 딸아. 그쪽 집안 아들이 얼마나 훤칠하게 생겼는데 그러냐. 인물 좋고 대범하고, 성격 호탕하고. 완전히 호남형이지. 암."
아빠의 기준에서 훤칠이라든지 호남형이라는 단어는 그다지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건 경험상 다 알고 있는 사실었다. 아빠의 기준으로 보자면 느끼 백만배인 가수 남진 같은 스타일을 호남형이라고 했으며, 길가다가 강호동과 붕어빵처럼 닮은 녀석보고 훤칠하니, 남자답다고 중얼거리셨던 것이다. 속지 말자. 속지 말자. 송대관 같은 남자가 내 신랑이 될 지도 모르는 마당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아빠가 뭐라든, 난 결혼 못해요! 말도 안돼. 난 공부도 해야 하고, 게다가 할일도 많아요. 너무너무 많아서 결혼 같은 건 시간 없어서 못해요."
다음 주 모의 고사 공략법이나 캐고 있어야 할 판에, 결혼 못하겠다고 버티는 꼴이라니. 마치 서른 넘은 노처녀의 히스테리 같지 않은가. 기쁨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누군가 마법을 부려서 날 십년 후로 돌려놓은 건 아니겠지.
아빠는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 기침은 점점 심해지더니 온몸을 뒤틀 정도로 격렬해지기 시작했다.기쁨은 갑작스레 당황했다.
"아, 아니다. 에고에고……. 몸이 예전 같질 않구나. 자꾸 기침이 나오고, 오슬오슬 한 게 작은 병은 아니지 싶구나. 에고고……."
"……그 말이 왠 안 믿길까요."
"흠흠. 그래……. 우리 기쁨이……, 결혼하기 싫다는 네 마음, 이해는 간다. 하지만 어른들끼리 약조한 게 있는 데다가 네 장래를 위해서 이 아버진 파혼에 찬성할 수 없구나."
기쁨이 막 다시 항의할 찰나, 아버지는 다시 말했다.
"이건 어떠냐. 일단, 만나보거라. 만나본 뒤에 결정하거라. 알았지?"
"아빠, 그래도 난 싫어요."
딸의 태도에 변함이 없을 것으로 보이자 아버지 한용운은 방법을 바꿔 당근과 채찍 전술을 쓰기로 했다.
"너 이번에 안 나가면, 두 달동안 용돈 없을 줄 알거라. 뭐, 나간다면 그동안 네가 요구했던 용돈 인상을 고려해볼 수도……."
"정말이지요? 나가면 용돈 인상이란 말이죠!"
아빠의 말에 기쁨은 갑자기 태도를 확 바꾸며 물었다.
"뭐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좋아요, 까짓것 나가보죠. 아빠 지금한 약속 잊어먹기 없기에요!"
기쁨은 아빠가 말을 바꾸려는 기색이 보이자 얼른 용돈인상 쪽으로 매듭 짓고 후다닥 방문을 열고 나갔다.
"기쁨아, 돌아오는 일요일 1시 힐튼 호텔 1층이다."
아빠가 방문을 나서는 기쁨의 등에 대고 외쳤지만 기쁨은 아빠의 외침을 들은 체 만 체하고 방문을 닫았다. 기쁨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 벌렁 누웠다.
'돌아오는 일요일 1시라……. 뭐, 만난다고 무조건 결혼으로 이어지나? 그냥 시간 잠깐 내서 맛있는 거 얻어 먹으면 될 거고, 아빠한테는 약속 지켰다면서 용돈 인상 시켜달라고 말하면 이게 바로 일석이조 아니겠어? 크크. 그나저나 강은곤 이라고 했나? 내 기대 이하이기만 해 봐라, 당장 테이블 뒤집어 버리고 나온다.'
- 2 -
일요일 오후 1시 힐튼 호텔.
기쁨은 자못 얌전을 빼며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처음 입어보는 정장이 거치적거려 당장이라도 벗어던지고 싶지만, 참았다. 용돈 인상은 아빠로썬 전대미문의 협상전략이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인상되지 않았던 용돈. 그 선이 오늘 이 자리 한번으로 무너진단 말이다. 아싸!
사실 약간 호기심도 있었다. 아빠가 입에서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남자의 상판데기를 보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단 소리다. 적당히 분위기 좋은데서 값비싼 밥을 먹는 것도 싫지 않았고.
예약석에 앉은 기쁨은 손목에 찬 시계를 흘끗 보았다. 1시 10분. 아직 자신의 상대남은 도착하지 않았다. 여자보다 늦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하지만,뭐 조금 늦을 수 있지. 란 넓은 아량으로 참은 시간이 10분, 20분 흐르더니 시계는 어느 덧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뭐야, 뭐하자는 플레이야! 누군 시간이 남아돌아 추운 날씨를 감수하고 여기에 나온 줄 알아? 이번 방학이 끝나면 고3인 내가, 시간이 아까워 죽을 내가, 바람이나 맞으려고 여기 나온 줄 알아!'
밥을 달라고 아우성 치는 배를 무시하고 기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음으로 자신은 아빠한테 용돈인상을 당당히 요구할 권리를 얻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회를 만들어 준 상대남에게 잠시 고마움을 느꼈다. 그러나 아무 연락없이 자신을 바람맞혔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처 입었다.
'흥, 누군지 몰라도 4가지가 만땅으로 출장간 놈이군. 약속을 못 지킬 것 같으면 상대방에게 연락을 줘야 한다는 기본 예절도 모르나? 에휴, 누군지는 몰라도 부인될 여자가 불쌍하네. 이봐요, 4가지 양반. 댁이 누군지 모르지만 그래가지고 어디 장가나 가겠수?'
기쁨은 여전히 빈자리로 남아있는 상대방 자리를 살짝 노려본 후, 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맛있는 점심은 고사하고 쫄쫄 굶은 데다 바람까지 맞아 기분은 최악이었다.
성질이 난 탓에 일껏 신은 높은 굽의 단화 뒤꿈치를 홱 돌리며 현관을 향해 나가려는데, 뒤통수에 불이 번쩍 했다. 캭! 이게 왠 마른 하늘, 아니 지붕까지 멀쩡히 있는 집안에서의 날벼락이람! 안 그래도 기분이 나빴는데 이게 머야! 이제 화가 머리끝까지 난 기쁨은 아직도 얼얼한 머리를 감싸쥐며 자신의 동그랗고 어여쁜 뒤통수를 후려갈긴 임자를 찾아 눈을 희번덕거렸다.
어멋, 이 신기한 생물체는 누구야? 눈앞에서 "이런,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하며 쩔쩔매고 있는 이……, 꽃미남은! 기쁨은 저도 모르게 만지던 뒤통수의 혹을 꾹 눌러보았다가, 눈물을 찔끔 흘리며 제 자리에서 펄쩍 뛸 뻔했다. 아야! 이게 꿈은 아니구나! 하지만 이게 진짜 정말 리얼리틱하고 진실된 현재 진행형의 사실일까? 이번엔 눈을 몇 번이나 깜빡거리며 비벼보았다.
세련된 무테 안경속의 길고 샤프한 눈매, 미소녀들이 떼로 울고 갈 고운 피부, 샴푸할 때마다 트리트먼트를 매번 해주는 것이 분명한 저 찰랑거리는 걀색의 앞 머리카락, 거기다 180은 너끈히 되어 보이는 후리후리한 키, 잘못 입으면 노티 나 보일 실버 그레이의 양복을 너무나 잘 소화해내는 멋진 몸매……. 어떤 고마우신 신이 내 꿈을 그대로 빚어서 인간으로 만들어 놓은 걸까? 기쁨은 거의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저기……, 혹시 한기쁨 양이 아니신가요?"
게다가 목소리도 환상 그 자체!
"네, 제가 한기쁨인데 어떻게 아셨……!"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의식하지 못하던 기쁨은, 갑자기 눈을 똥그랗게 떴다. 에? 뭐라고? 방금 이 남자가 뭐랬지? 날더러 내가 아니냐고 물었겠다!
"어머, 그럼 그 쪽이 바로……! 앗, 처음 뵙겠어요. 제가 바로 한기쁨이랍니다. 오호호호호호……."
기쁨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채 감추지 못해 몸을 외로 꼬며 입을 가렸다. 그럼, 내가 바로 우리 아버지 한용운씨의 딸, 한기쁨이지! 내가 나가 아니면 또 누구겠어? 기쁨은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기쁨에 넘치는 얼굴로 남자를 다시 잘 뜯어 보았다. 흠, 이 정도면 아저씨래도 데리고 살 만하겠는 걸?
노골적인 그녀의 주시에 남자는 겸연쩍은지 연신 얼굴을 붉혔다. 어머 어머, 나이답지 않게 귀엽기까지 하잖아?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남자는, 시선 처리에 한참 시간을 끌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실은 그게 말이죠,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만 기쁨 양이 기다리시던 분은 제가 아니라……."
자기 앞에 서 있는 꽃돌이 말에 기쁨의 입은 웃은 채로 경직되어 버렸다.
'이게 왠 개가 자다가 풀뜯어 먹고 봉창 두드리는 소리다냐? 맞선 당사자 본인이 자신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란 거야?'
기쁨이 꽃돌이를 다시한 번 훑어보았다. 뉘집 자식인 줄 몰라도 인물하나는 정말 훤하다. 쓰읍~
그러나 눈 앞에 있는 꽃미남를 감상하는 것도 잠시, 기쁨의 뒷통수에 화끈한 마찰음과 함께 눈에는 꽃미남 대신 별들이 보였다.
"누구야!"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이 한기쁨님의 어여쁜 뒷통수를 후려치다니. 기쁨은 뚜껑 열리기 일보 직전 간신히 이성을 수습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더 이상 놔두면 침이 바닥에 강을 이루겠네. 금곤아, 이 꼬맹이가 오늘 나랑 선 보기로 한 그 꼬맹이 맞냐?"
'이잉?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이 꽃미남이 언제 내 뒤로 왔지?'
기쁨의 뒤에는 방금 앞에 서 있던 꽃돌이가 서 있었다. 기쁨은 다시 앞을 쳐다 보았다. 자신의 앞에는 정중한 예의를 보여준 그 꽃미남이 산뜻한 미소를 자신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기쁨은 얼른 다시 뒤를 돌아 보았다. 커헉, 설마 쌍둥이?!
다다익선. 물론 세상에 꽃미남이 많으면 좋기야 하지만, 버뜨, 어째 이 뒤의 물건은 앞의 꽃돌이랑 상태가 다른 것 같다. 기쁨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눈알을 데구르르 굴렸다. 그런데 뭐라, 이 꼬맹이가 오늘 나랑 선 보기로 한, 이라고. 그렇다면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목소리며 인상마저 성난 곰 같은 - 비록 꽃돌이와 같은 얼굴이지만 - 저 사람이 강은곤?
기쁨은 저도 모르게 엄지손가락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한참을 생각에 빠져 있던 기쁨이 갑자기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너, 너 골드드래곤???"
"노, 노, 실버드래곤이겠지. 골드는 저쪽이야. 고3인데 골드와 실버도 구분 못해서 어쩌나. 그래서 수도권 내 대학 입학이 가능하겠어?"
산뜻하게 웃고 있는 원조 꽃돌이 옆에서 삑사리 꽃돌이, 즉 꽃돌이는 꽃돌인데 어딘가 가시돋힌 느낌이 나는 또 다른 꽃돌이가 어이없다는 듯,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느물거리고 웃으며 대꾸했다.
기쁨은 이제 나란히 서 있는 쌍둥이 형제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자신에게 산뜻한 미소를 날리고 있는 꽃미남 옆에 서서 느물거리는 꽃돌이의 미소 - 남들이 하면 중년 변태아저씨의 미소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이 넘은 외모가 받쳐주니 무시하기로 한다 - 를 보고 있으니 그녀의 기억 창고에서 뭔가가 푱~! 하고 떠오를 것 같았다.
"뭐야, 얼굴 표정이 왜그래? 골드 드래곤이라고 말하는 거 보니까 완전하게 기억이 난 것 같은데 아닌가? 흠, 좋아. 기억나게 해주지."
가시돋는 변태 중년 아저씨 꽃돌이는 그렇게 말하더니, 기쁨에게 두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기쁨을 집포대처럼 덥석 안아 들었다!
깜짝 놀란 기쁨이 소리지르기 전, 중년 아저씨 꽃돌이는 '역시' 생각보다는 무겁다고 중얼거린 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전혀 상관하지 않은 채 기쁨을 짐포대처럼 들고있는 자세 그대로 성큼성큼 호텔 밖으로 나섰다.
"안에서는 좁아서 하기 힘드니까, 여기서 해줄게."
자기 딴에는 산뜻하게 웃는 얼굴로, 그러나 기쁨에게는 거대한 은빛 살모사가 다람쥐를 보고 헤죽거리는 듯한 미소를 머금은 채, 중년 꽃돌이가 말했다.
"뭐, 뭘?"
전혀 짐작할 수도 없었지만, 은색 파충류가 해준다는 그 무엇이 두려워 기쁨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왜 기억 안 나? 네가 어릴 때 많이 해줬잖아? 내가 그걸 해주면, 넌 항상 꺄꺄거리며 좋아했었지."
중년 꽃돌이는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미소를 머금고, 포대처럼 들고 있던 기쁨을 가로로 휘익 돌렸다.
'이, 이게 무슨 야리꾸리한 자세야!'
자신의 윗배는 드래곤의 왼쪽 옆구리에, 아랫배는 엉덩이 바로 윗 부분에, 허벅지는 오른쪽 옆구리에 찰싹 붙은 참으로 민망한 자세가 된 기쁨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눈을 희번덕거리며 입만 크게 뻥긋거리고 있었다.
난생 처음 남자의 엉덩이와 자신의 배및 허벅지가 밀착해버린 상황에, 어떤 여고생이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있으랴. 게다가 여기는 만인이 보는 호텔 현관 앞이다. 기쁨은 얼굴 전체가 새빨개졌다. 남자의 탱탱하고 단단한 엉덩이에서 뜨끈한 열기가 전해오는 것 같아, 기쁨은 눈을 꼭 감고 소리쳤다.
"이런 짓, 그만 둬! 난 아직 허락 안 했단 말이야!"
그 소리에 중년 변태 꽃돌이는 뚱한 얼굴이 되어 어깨 너머로 기쁨을 내려다 보았다.
"허락? 무슨 허락? 똥장군 하는 데도 꼭 허락을 받고 해야 하냐? 아직 쪼끄만 게 그새 좀 컸다고 악악대기는."
"똥……장군?"
기쁨은 중얼거렸다. 그 때, 천둥치듯 예전 기억이 기쁨을 강타했다!
기쁨은 순간 오싹해져서 두 팔로 은곤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꺄꺄거리며 좋아했다고, 이 변태야. 넌 무서워서 소리지르는 거랑 좋아서 소리 지르는 것도 구분 못하냐. 어지럽고 간지러운 것에 유난히 약한 기쁨은 어릴 적 은곤이 재밌게 해준다며 똥장군을 할 때 마다 어지럽고 간지러움에 늘 눈물을 한 바가지씩 쏟곤 했다. 그런데 뭐 좋아했다고?
그 때도 그랬다. 이 파충류과 인간과 나란히 이웃을 하고 살때도 이 넘은 늘 이런 식으로 자신을 괴롭혔다.
하얗게 질린 기쁨을 확인하고서야 은곤은 히쭉, 웃으며 기쁨을 내려 놓았다.
"오랜만이다, 한기쁨."
기쁨은 어지러움에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흔들다가 은곤이 내민 손에 시선이 간다. 인상을 써서 사나워 보이는 얼굴과 다르게 단정하게 자른 손톱과 길쭉한 손가락은 참 매끈했다. 호오, 손은 이쁘네 하고 감탄하던 기쁨은 그 손을 마주 잡고 인사를 해야 하나 잠시 고민을 했다. 그 새를 못 참고 성질 나쁜 드래곤이 불을 뿜어버렸지만.
"그만 봐라, 내 손 닳겠다."
은곤의 말에 기분이 확 상한-사실은 자신이 은곤의 손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들킨 것에 대한 무안이 큰 기쁨이 자신의 손으로 그의 손을 확 쳐냈다. 은곤의 손등에 작지만 선명한 붉은색 손자국이 찍혔다.
"역시 힘은 세구나. 힘은."
은곤은 손자국이 난 자신의 손등을 잠시 바라본 다음, 기쁨의 얼굴을 보며 씨익 웃었다. 기쁨은 그 미소를 본 순간 이 인간의 탈을 뒤집어 쓴 은색 파충류가 어떤 파충류인지 생각났다. 이 놈은 받은 것은 두배로 돌려주자는 주의였다.
"어어, 이건 고의가 아닌 사고, 그러니까 accident였다고."
기쁨은 뒷걸음을 살살 치는 동시에 뒤를 흘끗거리며 시야를 확보했다. 다행이 이 쌍둥이 형제가 호텔 정문 쪽으로 서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뒷걸음 치는덴 문제가 없었다.
"오, 오늘 우연이었지만, 만, 만나서 반가웠어."
기쁨은 자신의 앞에서 복수를 다짐하는 불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은곤을 주시하며 계속 뒷걸음을 쳤다. 그들과 어느 정도 거리가 확보되었음을 확인하자 갑자기 몸을 뒤돌려 뜀박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3 -
집으로 돌아온 기쁨에게 아버지 한용운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돌아온 딸을 보며 반갑게 맞이했다.
"오늘 어땠냐? 잘 됐지? 그래 양가 상견례 날짜는 잡았고?"
아버지의 말을 듣는 순간, 기쁨은 예상치 못한 인간과 재회를 하느라 오늘 자신이 그 호텔에 간 목적이 바로 선을 보러 간 것임을 잊고 있었다. 더불어 용돈 인상이 걸려 있다는 것도. 기쁨은 애매모호한 미소를 띄우며 고민했다. 신중한 대답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자칫하단 죽도 밥도 못 얻어먹을 판이었다.
"아빠, 그러니까 말이죠……. 오, 오빠가 날짜는……, 천천히 잡자고 하더라고."
등 뒤로 또르르 굴러 떨어지는 식은 땀을 느끼며 기쁨은 약간의 어색한 미소와 함께 거짓말을 뱉어냈다. 물론 용돈도 용돈이거니와 상견례 날짜는 커녕 싸우듯 도망쳐 온 걸 아빠가 알면 호적에서 파내신다고 성을 낼지도 모를 일이었다.
딸의 말에 아버지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뭘 천천히 잡아. 당사자끼리 서로 얼굴 확인하고 합의 봤으니 문제는 없겠다, 얼른 날 잡아서 상견례 치루면서 같이 결혼날짜까지 잡아버리면 되는 일을 가지고.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으니 이왕 말 나온 김에 은곤이네 할아버님께 전화드려서 날 잡자고 해야 겠다. 에휴, 강하군 그 친구는 대통령이 된 이후 얼굴은 커녕 목소리도 듣기 어려워졌으니. 쯧쯔. 그러면서 용케 결혼 약속은 기억하고 있네."
말씀하시는 중간 부분 쯤에는 혼잣말을 하시며 전화기가 있는 곳으로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기쁨의 얼굴은 탈색 되었다 싶을 정도로 하얗게 질렸다. 갈수록 첩첩산중, 위기위발이었다.
"아, 아빠, 하지만 그건 너무해요!"
급한 김에 소리를 와락 질러버렸다. 아빠는 수화기를 들다 말고 멀뚱한 표정으로 기쁨을 쳐다 보셨다.
"너무하긴 뭐가 너무해? 어차피 할 결혼, 후딱후딱 해치우자는 건데."
어느 집 닭이 풀 뜯어먹냐는 눈길이시라, 기쁨은 초조함이 더했다.
"아니, 그, 그러니까……."
더듬거리는 기쁨의 말투에, 아빠의 눈길이 문득 위협적으로 변했다. 으윽, 우리 아빠의 눈매가 원래 저렇게 샤프했었나?
"너 혹시, 상대가 너무 버겁다던가, 그런 소릴 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런 말을 하려던 게……."
소 여물 씹듯 말을 입 속으로 우물거리다가, 눈이 확 뜨였다.
"맞아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오빠는 나보다 훨씬 어른이고, 집안도 대단하고, 또……, 얼굴도 잘 생겼고……, 내 쪽이 너무 기울잖아요. 결혼은 너무 기울게 하는 게 아니라던데."
기쁨은 억지로 우울한 얼굴을 만들어보였다. 윽, 내 입으로 그 실버 드래곤이 잘생겼다는 얘기까지 해야 하다니 정말 우웩이다! 그 성질에 얼굴이 잘생기면 뭘 하냐! 드래곤을 껍질보고 좋아라 하고 있다간 화염방사기 같은 불길에 숯불구이 되기 딱 알맞지, 암.
"그럴 지도 모르지……."
아빠는 좀 슬픈 얼굴을 하고 기쁨에게 다가오셨다. 그리고 기쁨의 한 손을 꼬옥 잡아주셨다. 아버지, 역시 아버지는 딸을 생각하는 자상한 아버지셨군요. 기쁨은 잠시 감격에 겨워 눈물마저 감돌려는 순간이었다. 마주 잡은 아버지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하지만 힘내야 된다! 아무리 강군이 킹, 킹……, 하여간 그 킹 뭐시기라고 해도, 넌 이 아빠의 딸, 한기쁨이 아니냐! 설사 우리집이 그리 뜨르르한 재벌가는 아니라고 해도, 이 대한민국 삼천리 금수강산에, 우리 집처럼 청렴결백하고 지조 있고 품위 있는 집안이 어디 있으며, 우리 딸만큼 멋진 아가씨가 어디 있겠니? 있음 나와 보라 그래! 그걸 알아 봤으니 대통령 집안에서도 널 미리부터 낙점을 해놓은 게 아니겠냐? 그렇지 않니? 그렇겠지?"
"그, 그렇지요."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어때? 아빠가 이렇게 말하니 자신감이 팍팍 솟구치지?"
"네? 네에……."
잘못하면 집안의 청렴결백, 지조와 품위까지 의심하는 딸이 되기 싫어 어영부영 대답했건만, 그 대답에 흡족해하신 아버지 한용운씨는 딸 손을 잡은 그대로 삑삑삑 무선 전화기 단추를 눌러 상견례 날짜를 잡아버리시는 것이었다.
오, 하늘이 정녕 이 한기쁨을 버리시려고 작정을 한 것일까? 혹을 떼러갔다가 오히려 하나 더 붙인 격이니 기쁨은 이 시련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막막해졌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지? 이러다 꽃다운 나이 열 아홉에 꼼짝없이 유부녀 딱지 달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열불 뻗치겠다~!'
전화를 끊은 아버지가 흥겹게 밖으로 나가신 후, 하늘로 치솟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기쁨은 거실 바닥을 뒹굴었다.
'이렇게 끝낼 순 없어! 방법을 생각하자, 방법을!'
그 날 오후, 고3의 명분으로 선생님의 눈치를 보아가며 겨우 기른 삼단 같은 머리카락 십수 올을 희생시키며 기쁨은 기어이 묘책을 생각해내고야 말았다.
'그래, 이거야!'
기쁨은 후다닥 자신의 방으로 뛰어올라갔다. 그리고 자신의 핸드폰을 열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DDD……. 이런 젠장! 왜 전화 안받고 그러냔 말야. 짜증 이빠이네, 아씨.
한참 신호만 가던 송화기에서 결국 딸각, 하며 받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들린 건 사람 소리가 아니라, 쿵, 덜그덕, 떼구르르 하는 물건들 구르는 소리였다. 하지만 기쁨이 조금 더 참을성 있게 기다리자 사람 소리도 들렸다.
"에이, 씨입…… 누가 이 새벽부터 지랄이야?"
방금 잠에서 깬 듯 낮게 가라앉은, 그러나 그래서 더 섹시하게 들리는 남자 목소리였다. 낮고 음산하게 깔린 살기어린 목소리에 기쁨은 마른 침만 꼴깍 삼켰다.
'핫! 안돼! 여기서 기 죽으면 어쩌자는 거냐. 한기쁨 화이팅! 꽃다운 청춘이여, 아자!'
당장 오그라든 소심한 마음을 달래며 기쁨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병신!"
하는 최후의 통첩과 함께 달칵 경쾌한 소리를 내며 전화가 끊겼다. 기가 막혀 핸드폰을 노려보던 기쁨은 한숨을 폭폭 내쉬며 다시 내키지 않는 전화를 걸었다. 참자. 참아야 하느니라. 대업을 위해서라면 내 뭔들 기꺼이 못하리오. 콧구멍의 콧털을 한올 한올 뽑아다가 짚신이라도 삼아 신겨주마! 싫으면 말고!
한참 후 다시 연결되자, 예의 그 위험한 음성이 잔잔히 귓가를 울렸다.
"누구냐, 넌?"
"한기쁨이다. 넌 성깔 더러운 실버 드래곤 맞지?"
갑자기 저편에서 침묵이 흘렀다. 계속되는 침묵에 왠지 불안해진 기쁨이 용건을 말하려는 순간, 남자가 말했다.
"잠자는 용의 콧털을 몽땅 뽑아놓다니 그걸로 옷이라도 지어줄 셈이냐? 그런 건 하나도 기쁘지 않을 것 같은데. 안 그래요, 한기쁨 양?"
'이 인간 사이코 아냐? 웬 털코트?'
그러다가 기쁨은 문득 상대의 쿡쿡거리는 마지막 말투에서 최근에 본 누군가를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설마…….
"저…… 혹시?"
"어느 쪽을 할까요, 알아맞춰 봅시다, 딩동댕동~"
부드럽고 낭랑한 목소리가 노래하듯 흥얼거리며 반복하는 동안, 기쁨은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눌렀다.
"골드…… 아니, 금곤 씨?"
부디 아니길. 기쁨은 수줍게 얼굴을 붉히던 꽃미남의 눈부신 자태가,
"오, 맞췄어요! 딩동댕동~ 제가 성깔 더러운 골드 드래곤이랍니다. 숙녀에게 무례를 범하고 말았군요. 하지만 알다시피 콧털을 뽑히면 아프지 않습니까. 그 때의 아픔과 그에 따른 반응을 이해해 주는 것이야말로 진정 숙녀다운 일이 아닐런지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요. 딱히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능글맞은 사이코의 모습으로 산산히 무너져 내리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렇다. 형제는 닮는 것이다. 그리고 골드는 역시 골드일 수 밖에 없다.
"아, 알았어요. 골드 드래, 아니 금곤 씨. 저기, 죄송하지만……."
기쁨은 이를 악물었다. 흥! 꽃미남? 내 이놈의 용가리 형제들을! 언젠가는 그 성질머리들을 필히 고쳐줄 날이 오겠지만 오늘은 내 양보한다! 수단보다는 목적이 우선이니까.
"은곤 씨 있으면 좀 바꿔주시겠어요?"
무지 상냥한, 평소의 그녀 성미를 감안해도 참으로 드물게 온화하고 보들보들한 목소리였다.
"싫습니다."
나긋나긋하고 윤기 흐르는 음성이 곧바로 딱 잘라 말했다.
"왜요?"
상냥한 말투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기쁨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제 잠을 깨웠으니 마땅히 책임을 지고 재워 주십시오. 수단이야 어쨌든 목적만 달성하면 그만이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 건 뭐랄까, 상대에게 민폐를 끼치는 쁨쁨다운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건 곤란해요."
헉. 내 생각을 꿰뚫어보고 있군. 콧털 얘기할 때부터 오싹하더라니. 근데 쁨쁨이라니?
"성깔 더러운 용을 깨워놓고 도망가는 자의 최후는 과연 어떨까요?"
순간, 그 목소리가 아주 나른하면서도 위험하게 변했다. 기쁨은 말문이 막혔다. 잠시 후 쿡쿡거리는 나직한 웃음이 들리더니 금곤이 말했다.
"용의 폭주를 막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어요. 노래를 불러 다시 잠재울 것."
무거운 침묵이 기쁨의 머리 위를 거쳐 유유히 흘러가 방안을 떠돌았다. 침묵 덩어리가 점점 가득찬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그녀의 입이 크게 움직인다.
"이 빌어먹을 인간아, 장난 그만 떨고 당장 은곤인지 은꽁인지 바꾸란 말이닷!"
라고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펄펄 뛰는 다혈질 기질에 어울리지 않는 소심함을 지닌 기쁨은 입만 뻐끔뻐끔했다. 처음 보다시피한 사람에게 함부로 막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아무리 저 쪽에서 놀리듯 메롱거리며 깝죽댄다해도 말이다. 그냥 확 끊어버릴까,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하는 그녀를 금곤이 불렀다.
"기쁨 양? 마음의 준비 됐어요?"
"아, 아직……. 저 노래 잘 못하는데……."
무심코 쭈뼛거리며 대답하자 저 너머에서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흐음, 생각보다 뻔뻔하네요. 그럼 불면증에 괴로워하는 저의 심정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겁니까? 모른 척 두 눈 감겠다는 말인가요?"
다시 한 차례 침묵이 느리게 기어갈 무렵이었다. 갑자기 무엇인가를 참는 듯 떨리는 말투가 들렸다.
"풋. 과연. 아아. 여전하군."
한계다. 더이상 못참겠어!
"도대체 지금 뭐하자는 거에요? 사람 놀려먹는 게 그렇게 재밌어요? 초면에 너무 실례라는 생각 안 들어요?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실망이네요."
"어라, 화났어요? 미안해요. 놀릴 생각은 아니었어요. 너무 반가운 마음에 그만……. 이해해주는 거죠? 무관심한 것 보다는 낫잖아요."
진정으로 미안한 듯 풀죽은 음성에씨근대던 기쁨의 마음도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금곤의 마지막 말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차라리 무관심한 편이 훨씬 나았다.
"그나저나 혹시 아까 진짜로 노래 부를 생각이었어요? 무리에요, 무리. 기쁨 양 같은 희대의 음치에게 자장가라니 당치도 않아요. 용이 마구 폭주해 버릴 거야. 차라리 춤으로 나가는 게 어때요? 그럼 어여삐 여겨 나중에 잡아먹어줄 지도 모르잖아요."
……이 화산 불에 튀겨먹을 용가리 녀석 같으니라구! 내가 늬들한테 바쳐지는 제물이냐! 미쳤니? 어여쁘디 어여쁜 열 여덟에 노땅한테 팔려가는 것만도 억울해 죽갔구만! 거기다 잘 잡아 잡수시라고 춤을 춰? 그녀는 입에서 화염이 뿜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아우, 젠장. 이젠 나도 용과가 되어가는 것일까?
그러나 기쁨은 마음을 추슬렀다. 전화 건 목적을 잊어버리면 안 돼! 이대로 저 사악한눈을 가늘게 뜨고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필히 용을 소환해서 마음대로 부리는 마녀가 되어 줄 거라구."
그랬다. 그녀는 저 무지막지 흉폭한 실버 드래곤과 계약을 맺을 참이었다.
"응? 기쁨 양? 지금 뭐라고 그러는 거에요?"
수화기에서는 금곤의 궁금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자신의 생각에 취한 기쁨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기쁨 양? 왜 그래요?"
"……."
"기쁨? 뭐하는 거니? 쁨아? 쁨? 쁨쁨아!"
자꾸만 높아져가는 수화기 속의 목소리는 이제 초조함마저 띠고 있었다.
"야, 기쁨, 대답해! 한기쁨!"
화난 목소리가 쨍하게 흘러 나왔을 때야, 기쁨은 정신을 차렸다.
그래. 현실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법이지. 아차하고 방심하는 그 순간 빛나는 청춘이여 안녕! 쫑! 빠이! 아듀! 가 될 판이라구. 정신 바짝 차리자. 용가리 굴로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용을 때려눕히고 가죽까지 쭉쭉 벗겨 한 몫 챙길 수 있어!! 새롭게 각오를 다지는 기쁨의 눈에서 초롱초롱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에, 역시 화난건가. 그래도 사실인 걸. 기쁨양의 노래는 빈말로도 참 잘했어요~ 해줄 수가 없으니까. 오죽하면 재갈을 물려놨을까."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리는 금곤의 나른한 음성에 기쁨은 순간 흠칫했다.
"……재갈?"
"응. 기억 안 나요?"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그에게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끼며 기쁨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거야, 이 인간!
"둘만의, 아주 은밀한 시간이었죠."
느릿한 어조로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기쁨은 궁금증에 앞서 황당했다.
"무,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역시 생각 안 나나 보군요.안타깝게도. 저런."
"설마 저한테 재갈을 물렸다는 뜻?"
"아아, 너무 시끄러웠거든. 입을 바늘로 꼬맬 수도 없고, 인두로 지질 수도 없고, 지퍼를 채울 수도 없다. 밖으로 던져버릴 수도 없고, 한 방 날려 기절시킬 수도 없고, 아예 존재 자체를 제거해버릴 수도 없다. 그래서 최대한 피를 보지 않는 선에서 뜻을 이룬 거죠."
계속.
2004/06/25 20:40 건필하시구요 꼭 다음글 보고싶네요 언제 올려주실건가요
자애
2005/09/12 13:07 언제까지 기달려야 할지..... 글빨신을 기원합니다.
릴레이 뒷부분을 다시 정리했습니다. by 정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