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22





그것은 귀에 익은 음성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듣는 것이긴 했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남자의 낮은 목소리. 저 정중하고 품위 있는 말투는 절대 다른 사람의 것일 리 없다.

돌아보자 눈에 들어온 건, 키가 거의 현호와 비슷할 정도로 큰 젊은 남자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방금 빠져나온 그는 단정한 양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다소 야위어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특유의 기품어린 미모는 여전하다. 다만 어딘가 굉장히 피곤하고 지쳐 보일 따름이었다.

그 뒤에 강용우의 거구가 있는 걸 발견하고 현호는 남자에게 눈을 돌렸다.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저희는 전무님과 아는 사인데 잠시 들렀습니다. 제가 잠시 정신을 놓고 있는 사이 그새 기다리는 걸 못 참고 이 아이가 소란을 피워 모두에게 폐를 끼쳤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미희야, 가자.”

그의 말을 듣고 미희는 순순히 현호의 팔에서 벗어나 남자에게 향했다.

“전무님.”

그녀가 자기 옆으로 온 걸 확인하고 그 남자, 이영진 신부는 현호에게 말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잠시만 얘기할 수 있을까요.”

조용한 목소리였다.

“금방 회의가 있을 예정입니다만,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시면 안되겠습니까.”

현호는 조금 당황한 기색을 미처 감추지 못하고 대답했다.

“아뇨. 5분이면 끝날 겁니다. 지금 들어주실 수 없을까요?”

이영진은 그렇게 잘라 말하고는 현호의 뒤에서 이쪽을 살피고 있는 사촌 신호를 차갑고 건조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 시선에 신호가 움찔하는 게 느껴진다.

“잠시만 미희를 부탁드립니다.”

이영진이 뒤에 서 있던 강용우에게 말하자 비서는 맡겨 주십시오, 라는 것처럼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미희는 그 말대로 강용우를 따라가면서도 어딘가 불안감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등 뒤의 현호를 돌아다보았다. 그런 그녀에게 그는 괜찮다는 것처럼 미소 지어 보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회의실 반대편에 있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이영진이 입을 열었다.

“강 비서님과 얘기하는 사이에 저 애가 멋대로 엘리베이터를 타버려서요.”

“……그렇습니까.”

현호가 간신히 대답하자 젊은 신부는 평화로운 미소를 떠올렸다. 세월의 흐름은 젊은 시절의 날카로움을 조금씩 온화하고 부드럽게 바꾸어놓는 모양이었다.

자신은 어떨까. 그 때와 조금은 달라졌을까.

침묵하고 있는 현호를 마주 보던 신부가 이윽고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흰 종이봉투를 꺼냈다. 자신 앞에 내밀어진 봉투를 보고 현호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그저 젊은 남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성당 건물과 대지의 부동산 권리섭니다.”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그 말에 놀라 고개를 드는 현호에게,

“여러 가지 사정상 성당을 퇴거시키기로 했습니다. 보육원도 폐쇄할 겁니다.”

“무슨…….”

“아까 일이 아니더라도 미희가 폐를 끼친 모양이더군요. 사과드립니다.”

고개를 숙이는 남자를 보며 현호는 한층 곤혹스러워졌다.

“아뇨, 그건 잘못 알고 계시는 겁니다. 잘못한 건 그 애가 아니라 제 쪽입니다. 게다가 이런 것까지 주시면 제가 더욱 죄송해집니다.”

“전무님이 받아주지 않으면 HJ리빙에 가져갈 겁니다. 이미 결심한 거라서요.”

“신부님…….”

현호는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 때, 당신이 토지매수를 권하러왔을 때 그 말을 들었어야 하는 거였습니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땅을 내놓고 싶지 않아서 고집을 부렸습니다. 더 좋은 마을을 만들기 위해서 하는 일에 협력했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후회하고 있습니다.”

젊은 신부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가 여동생에게 그런 짓을 했는데도 말입니까?”



- 이 자식!



저 남자의 차분하고, 그리고 역시 세속을 초월한 듯 경건한 이미지가 처음으로 흐트러진 것은 그가 자신을 때렸을 때였다. 현호가 수녀가 될, 자신의 여동생과 잤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남자의 난생 처음으로 흐트러진 얼굴을 보고 입에서 해실거리며 웃음이 흘러나왔지. 그렇지만 통쾌한 건 아니었다. 그저 씁쓸했을 뿐.

다시금 숨이 막혀왔다.

“짐작하셨겠지만……, 그건 제 협박 때문이었습니다. 여동생은…… 그저 협박에 넘어갔을 뿐입니다. 제 비열한 거짓말에…….”

“알고 있습니다.”

신부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자제심을 잃고서 당신을 때렸던 겁니다. 동생이 수녀가 될 몸이었기 때문에 제가 화를 냈던 건 아니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현호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다는 말로 절대 용서받을 수 없겠지만……, 사과하게 해 주십시오. 저는……, 최악의 인간입니다. 비열한 거짓말로 동생을 속이고…….”

고개를 숙이며 금방이라도 무릎을도 꿇을 것 같은 현호를, 젊은 신부는 만류했다.

“아니요. 당신은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 말에 현호는 고개를 들었다. 신부의 눈이 똑바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동생은 당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예……?”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어디까지나 여동생의 의지였습니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부의 눈에 괴로운 기색이 스쳤다.

“화가 났던 겁니다. 당신도, 여동생도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에게 진심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여동생과 제게 솔직했던 당신에게 속내를 말할 수 없던 제가 가장 비겁한 인간이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잘 알 수 없었다. 현호는 그저 멍하니 젊은 신부의 단정한 윤곽을 응시했다. 신부는 눈을 감고 말을 이었다.

“왜 우리 남매가 신에 귀의하기로 결심한 줄 아십니까?”

“아뇨.”

현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처음 듣는 신부의 자기 얘기였다.

“당신은 피가 섞이지 않은 당신 누나를 사랑한다고 했었지요. 하지만 저는 피가 섞인 여동생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현호의 눈에 놀라움이 어리는 걸 신부는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성직자의 길을 택했던 겁니다. 신과 버림받은 아이들을 위해 인생을 바치는 대신 마음으로만 여동생을 사랑한다면 하느님도 저를 용서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여동생도 똑같은 생각으로 수녀의 길을 지망하고 있다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런 와중에 당신이 나타났던 겁니다.”

“신부님…….”

“당신은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저와 여동생이, 누나에게 연심을 품은 당신을 마음속으로 비웃고 있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건 오해였습니다. 여동생이 제게 당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건, 제가 당신의 감정을 공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젊은 날의 오해가 무서운 결과를 낳았단 사실이 무섭도록 현호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동생에게는 당신이 나타난 거나 다름없었지요. 저는 질투심으로 괴로웠습니다. 동생의 마음이 당신에게 완전히 가버린 것을 알고 나서는 더욱. 그래서 마지막까지 진실을 알려주지 않고 당신이 떠나는 걸 방치했던 겁니다. 그 결과는……, 동생의 죽음이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잠시 침묵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녀는……, 어떻게 된 겁니까.”

그렇게 묻는 것조차도 괴로웠다. 신부에게 있어서도 괴로운 질문일 것이다.

“누구 탓이라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사고였으니까요. 편지도 적어놓지 않아서 확실치는 않지만, 동생은 당신을 찾아가려고 결심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애를 태우고 가던 고속버스가 그만 절벽 길에서 미끄러져서…….”

신부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고통스런 표정이었다. 사과조차 함부로 하기 힘들 정도로 고통이 가득 밴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동생을 따라서 죽음을 택하고 싶을 정도로 괴로운 시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만을 바라보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보며 어떻게든 버텼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버텨서 이렇게 살아남아 당신을 만나러 올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

현호는 목 언저리에 뻑뻑한 감각을 느끼면서 신부를 불렀다.

“편찮으시다고 들었습니다. 괜찮으신 겁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수술을 받고 회복할 수 있을지, 아니면 증세가 더 악화될지는 하느님만이 알고 계십니다. 제가 성당을 퇴거시키기로 결심한 건 그 때문입니다.”

병자라기에는 너무나 의연한 자세로 신부는 말했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없을까요. 새로운 성당을 만드는데 도와 드린다던가…….”

현호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아는 사람이 작은 성당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그쪽으로 먼저 보낸 다음, 수술을 받고 회복하면 저도 그쪽으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고개를 젓는 남자의 입가에는 상냥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아. 하지만……, 그렇군요. 부탁하고 싶은 일이 하나 생각났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미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예상 밖의 말이었다. 신부가 자신을 용서할 수 있으리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아니, 용서 이전에 이해해주지도 않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신부는 지금 자신에게 소녀를 부탁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애가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 때까지는 어떻게든 그 애가 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도록 제가 보살필 생각입니다만, 대학까지 뒷바라지는 지금 저희 형편으로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애는 머리가 좋습니다. 아마 형편만 좋다면 무사히 일류대에 진학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드는데, 그런 그 애의 날개를 제대로 펼 수 있게 도와줄 수 없는 자신이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무님이 성인이 된 그 애의 후견인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그 애를 진심으로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말입니다.”

현호는 잠자코 신부의 말을 듣고 있었다.

“당신이 잘못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아이가 먼저 접근해 온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저 이번 경우에는 당신이 어른이기 때문에 그 아이와는 달리 쉽게 면죄부를 받을 수 없다는 점이 문제겠죠. 하지만 저는 당신을 믿고 있습니다. 그 애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당신뿐이란 생각이 듭니다.”

신부의 시선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하며 신부가 내민 손을 잡았다. 현호가 바라는 것은 단 한가지였다.

“빨리 쾌유하시길 빌겠습니다.”



계속.




중편이어야 한다는 의지에 휩싸여서 쓴 사건의 해결부분이 조금 설렁설렁한 구석이 있는 걸 알고 있습니다. 양해를ㅡ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10-06 17:11)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22)

댓글 '3'

리체

2004.07.28 13:59:39

....그런 거였구나..ㅠㅠ
이럴 줄은 몰랐지 뭐야...;;감탄감탄..;;

Junk

2004.07.28 18:19:09

근데, 설렁설렁 얘기를 하자마자 틀린 부분을 지적받았음^-^;

누리

2005.09.30 23:56:27

저도, 이럴 줄은 몰랐다는...
우와, 하고 다시금 감탄을...
이래서 정크님한테 헤어나질 못 한다는 게죠^^   [01][01][01]   [0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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