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unk parad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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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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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수녀가 될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과 나는 안돼요.
- ……당신 스스로에게 진실을 알려줄 필요가 있어. ……당신이 자기 누나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이유, 말이에요.
차분한 표정. 차마 손대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웠던 그녀.
그런 그녀에게 자신은 무슨 짓을 했던가. 단 한번 뿐이었는데, 그것만으로도 도저히 잊혀지지 않았던 여자. 그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은 그녀와 얼굴보다 분위기가 닮은 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차분하고, 그리고 역시 세속을 초월한 듯 경건한 이미지가 난생 처음으로 흐트러진 것은 그가 자신을 때렸을 때였지.
- 이 자식!
해실거리며 입에서 흘러나온 웃음. 정말이지 통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씁쓸했다. 항상 부숴버리고 싶었다. 볼 때마다 정말이지 부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부수고 나자 남은 건 오직 허탈감 뿐. 그런 충동을 느낀 건 그게 두 번째였고, 그 허무함을 알게 된 이상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방심한 자신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우리 꼭 애인처럼 보이지 않아요? 누가 물어보면 아니라고 해야겠지만.”
천진한 표정으로 옆에서 웃고 있는 그녀.
항상 지독하게 찔러온다. 가장 아픈 데를 직설적으로, 그것도 웃으면서.
차라리 안아버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얼굴을 볼 때마다, 아니 뒷모습을 볼 때나 언뜻 그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순간마다. 그 욕구를 처음으로 강하게 느낀 것은 차안에서 잠들어 있는 그녀를 본 그 때부터였다. 아니. 그것은 의식적인 것일 뿐, 자신은 처음부터 그녀를 원했던 것일까. 그래서 경계했던 것일까.
상대도 원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의식적인 것인지, 아니면 무의식중에 여자로서의 본능에 자극받은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눈, 입술, 목소리, 그 모든 것이 그를 원한다고 간절히 말하고 있었다.
“애인? 그렇게 보일 거 같아? 남매 정도라면 몰라도.”
“나이차가 많이 나서? 안 그래요. 도저히 30대론 안 보이는 걸.”
“그게 아니라 네 쪽이 20대로 안 보여.”
“쳇.”
입술을 비죽이 내미는 모습이 더 자신을 어려 보이게 만든단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을까. 네온의 빛이 머리카락에 비쳐 붉은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가득한 여름밤의 거리. 늦은 시각이긴 하지만 여름이기 때문일까, 대낮과는 다르지만 부산한 활기가 길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생기 넘치는 음악 속에 사람들의 표정은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건 밝기만 하다.
무릎 약간 위로 올라가는 스커트를 입은 채 경쾌하게 걷고 있는 미희의 몸을 막 지나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가볍게 비추고 그리고 서서히 꺼져간다. 눈이 순간적으로 부셔서 얼굴을 찌푸린 한 순간ㅡ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가버린 건가? 도망친 건가? 왜……?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봤을 때 마치 마법처럼 사라져 있던 여자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주머니에서 꼬깃한 지폐를 부스럭거리며 꺼내고 있는 미희 앞에 ‘불우이웃돕기’라고 씌어진 모금함을 든 사람들이 서 있는 게 보인다. 빠른 걸음으로 그녀 뒤에 다가선 현호는 그녀가 얼마 안 되는 돈을 아낌없이 모금함에 집어넣는 광경을 보고 어이가 없어졌다. 살 곳과 돈이 없어 남자를 찾았던 주제에…….
뭐냐.
“나 보라는 거야?”
“응?”
그를 바라보는 미희의 눈동자가 조금 놀란 것처럼 커져 있다가 이내 원 위치로 돌아간다. 장난스런 미소.
“맞아요! 돈도 많으면서 이런 데는 절대 안 쓰죠?”
“따로 단체에 기부하니까. 그걸로 충분해.”
라고 말하면서도 현호는 지갑에서 10만원 수표를 꺼내 상자에 넣었다. 실은 그게 가진 현금의 전부였다. 보통은 카드로 해결하기 때문에 따로 쓸 일이 없다.
“감사합니다!”
모금원들이 환호성을 올린다. 미희가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와우, 역시 부자는 씀씀이가 다르네?”
“놀리지 마.”
현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감사의 뜻으로 내가 한 턱 낼게요.”
명랑하게 말하면서 그녀가 가리킨 곳은 떡볶이며 순대, 오뎅, 김밥 등을 파는 포장마차였다. 현호가 가만히 있으려니 그녀가 불안하게 얼굴을 흐리며 물었다.
“왜……, 이런 건 싫어요? 난 무지 좋아하는데.”
“싫어하지 않아.”
그저 위화감을 느꼈을 뿐이다. 자신도 그녀도 평범한 회사원이나 여대생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세련된 복장을 하고 있었으므로. 특히나 미희가 입고 있는 옷은 저런 먼지 묻은 나무벤치에 앉기에는 아까울 만큼 비싼 이탈리아제 브랜드였다.
뭐, 가끔은 이런 것도 좋겠지.
그렇게 내심 중얼거리면서 포장마차에 자리 잡고 앉았다. 미희는 떡볶이, 순대, 김말이 등을 고루 섞어 잔뜩 주문하더니 오뎅꼬치까지 꺼내 손에 쥐어주었다.
“다 먹을 수 있어?”
“혼자서도 거뜬하니 걱정 말아요.”
“흠.”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오뎅을 한입 베어 물었다. 그리운 감각이 입안에 퍼져간다. 마지막으로 이런 걸 먹었을 때가 언제였더라. 신도시 프로젝트에 참가해서 매일처럼 공사현장에 살았던 무렵이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일 자체와 그 일에 관련된 사람을 접하는 것이 너무 기분 좋아서였을까, 연이은 철야도 전혀 힘들지 않던 시절. 아무리 피곤해도 밝게 웃을 수 있었던 무렵.
“올해 몇 살이에요?”
갑자기 미희가 물었다.
“그런 건 조사 안했어?”
“음, 깜박했어요.”
그녀는 천연덕스레 말했다. 현호는 잠시 얼굴을 찌푸렸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서른하나.”
“전무라면 무지 높은 직책 아니에요? 이렇게 젊은 사람이 맡아도 되나.”
“그러게 말이야.”
“당사자가 그런 말 하면 어떡해요?”
미희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에 반응하듯 현호도 엷게 미소 지었지만, 그의 머릿속엔 복잡한 상념이 떠오르고 있었다. 한진증권과 한진건설을 중심으로 하는 한진그룹의 회장이자 창설자인 아버지의 후계자로 주목받고 새파란 나이로 실장에 발탁된 뒤 승진을 거듭해 전무자리에까지 오른 지금. 그것이 물론 실력 때문만은 아니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뭐, 콤플렉스일지도.
“형제는?”
“사생활에 간섭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싸늘한 대답이었지만, 미희는 별로 섭섭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떡볶이 접시를 받으면서 무심한 투로 말을 이었다.
“누나가 있잖아요?”
오뎅국물이 담긴 컵으로 뻗어나가던 손이 일순 멎었다.
“그 사진에 있던 사람, 누나잖아요?”
그 사진이라면 당연히 책장에 놓여 있던 액자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어떻게 알았지? 혹시 이미 알고 있었던 건가.”
“아뇨. 그냥 왠지.”
오늘처럼 후덥지근한 여름날, 바닷가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 그렇지만 거기 비친 누나는 자신보다 키가 작고 가냘파, 절대 누나로는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그 사진을 처음 보고 ‘누나’라고 정확히 짚어낸 건 미희가 최초였다.
“그냥 어딘가 닮았어요. 얼굴은 전혀 아닌데, 분위기가.”
그는 대꾸하지 않고 잠자코 국물을 마셨다. 묘한 향기를 품은 도시의 밤바람이 포장마차에 앉아 있는 그들의 목덜미와 등을 훑고 지나간다. 모기가 그들 주변을 맴돌고 있는 걸 그제야 알았다. 신경 쓰인다.
“그냥 내가 궁금한 건……, 왜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건지…….”
“악몽?”
“몰랐어요? 밤에 헛소리를 하면서 힘들어할 때마다 내가 와서 보고 있었던 거. 깨우려고 해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던데요. 대체 ‘누나’한테 무슨 잘못을 했기에 매일 밤 누나한테 잘못을 비는 거죠? 용서해달라고 매번…….”
“내가 그런 말을 했어……?”
“그래요. 누나, 정말 미안해……, 미안해……, 그렇게. 그것도 밤마다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입안으로 쓴물이 고여 오고, 바람 덕분에 제법 싸한 등 언저리와 반대로 얼굴에는 열이 오르는 걸 깨닫는다.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접시를 보고만 있는 그에게, 미희가 주춤거리며 그래도 덧붙였다.
“혹시……, 죽은 건가요?”
역시 침묵.
정곡을 찔렀단 사실을 안 미희가 ‘미안.’ 하고 작게 웅얼거렸다. 다시 혼란스레 흔들리며 뒤섞이기 시작한 머릿속을 어떻게든 수습해보려고 노력하면서, 두통기가 어린 이마를 손가락으로 쿡쿡 눌렀지만 소용없었다. 그렇지만 보는 사람 눈에는 그것 뿐, 꽤나 무감정해 보일 거라고 생각한다. 현호는 서늘하게 뒤틀린 뱃속의 감정을 누르면서, 하지만 티가 전혀 나지 않는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피가 섞이지 않은 누나야. 내 친어머니는 내가 8살 때 돌아가셨어. 새어머니가 누나를 데려왔지. 그쪽 친아버지도 어디 사장이라고 했는데…….”
창백한 얼굴, 가냘픈 체구, 꿈꾸는 듯한 눈매. 하나하나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그 무렵의 나는…… 어려서, 새어머니도 누나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치밀어 올라서 줄곧 괴롭히고 있었지. 몸도 약하고 뭣 하나 제 손으로 할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내가 14살 때 죽었어. 네 말대로. 아니, 죽임을 당했단 표현이 맞을까.”
“죽임을 당해요……?”
미희가 먹는 것조차 잊은 채 자신을 보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숨을 가볍게 들이켜고, 되도록 아무렇지도 않게 묵직한 문장을 입 밖에 내보냈다.
“내가, 죽였어.”
계속.
거의 다 써 갑니다.
한번도 안 쉬고 매일 올릴 수 있을 듯합니다.
아무래도 뭣에 씌었는지ㅡ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10-06 17:11)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