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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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건설이 신도시 개발이란 거대 프로젝트에 착수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의 일이었다. ‘도원시 프로젝트’란 이름까지 붙어 있는 신도시 계획은 정부의 의뢰를 받아 착수하게 된 것으로 약 3년에 걸쳐 과소화가 진행되는 지방도시를 통째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당시 본사의 개발영업실장으로 일했던 현호는 프로젝트의 책임자라는 막중한 임무를 갖고 현지로 향했다. 그리고 2년 가까이 되는 시간동안 현지에서 지내며 계획, 토지매수, 홍보, 절충까지 전 분야를 체크하며 일을 진행해 나갔다.

디자인적으로도 나무랄 데 없는 경관을 자랑하는 신도시를 건설한다는 획기적인 프로젝트는 금세 전국적인 이슈가 되었다. 그런 화제를 몰고 다니는 프로젝트를 선두지휘하며 현호는 도시 완성을 위해 낮이고 밤이고 심혈을 기울였다.

상황이 달라진 건 완성직전이었다.

때 이른 인사이동소식.

갑자기 그가 본사 기획담당 전무로 임명된 것이다. 실장에서 전무. 표면적으로는 승진이었지만 너무나 갑작스런 데다, 20대 전무라니 아무리 회장 아들이라고 해도 너무 지나친 게 아니냐는 여론도 사내에 팽배했다. 그런 반응이 나올 거란 짐작을 익히 하고 있으면서, 또한 자신이 이 일에 애착을 가진 걸 알면서 무리수를 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이유를 현호는 금세 알게 되었다.

한진건설의 계열사였다가 독립한 ‘HJ리빙’에 신도시 프로젝트가 인수인계된 것이다. 사촌동생 신호가 종합기획실장 자리에 막 오른 HJ리빙은 맨션의 관리를 담당하는 회사였다. 한진건설이 건설하고 매각과 매수를 담당한 건물은 대부분, 아니 거의 전부가 HJ리빙이 관리하는 시스템이었다. 결국 HJ리빙은 현호의 승진과 함께 이슈를 몰고 다니는 거대 프로젝트를 맡는 행운을 얻은 셈이다.

아니, 그것은 사촌동생의 행운이었던 것일까.

한마디로 사촌동생 신호를 총애하는 회장의 배려였던 것이다.

하지만 얄궂게도 사업이 HJ리빙에 인계된 뒤부터 갑자기 트러블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갖가지 트러블을 해결하기 위해 중앙관리센터의 프로그램이 몇 차례나 수정되었지만 그 때뿐, 개선의 여지는 보이지 않았고, 계속해서 주민들의 불평이 쏟아지자 뉴스에까지 보도되는 등 난감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아무리 HJ리빙이 독립회사라고는 해도 실질적인 본사인 한진건설로서는 해결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전속 클레임 대책팀도 마련되었다. 아버지인 한진건설 회장이  걸어온 전화는 이미 그쪽에서 손을 뗀 현호가 그 지휘를 맡으란 것이었다.

“제길…….”

현호는 중얼거리면서 서류에 눈을 떨어뜨렸다.

물이 역류하거나 끊기고 수시로 정전이 일어나며 Security System이 다운될 정도의 심각한 상황이라. 아마도 인구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현호는 메모에 향후의 플랜을 갈겨 적었다. 내일 강용우가 출근하면 스케줄을 수정하도록 일러둬야 한다. 도시계획국장과의 약속을 모레 잡으려면 역시 다른 약속을 취소해야 할 것 같다. 글피는 건설교통부 차관과 식사라도 하면서 함께 대책을 논의해야 할 것이고…….



- 그 언젠가 당신이 공사현장에서 뭔가 지시하고 있는 걸 봤어요. 그 때 한눈에 반해버렸어. 이건 진짜예요.



미희가 본 것은 아마 프로젝트에 열중하고 있을 무렵의 자신이었겠지.

그 때의 자신은 지금의 자신과는 다르다.

되살리고 싶지 않은 과거.

“하아…….”

아무래도 오늘은 이걸로 돌아가야겠군.

현호는 한숨을 토해내며 미간을 손가락으로 살짝 문지른 다음, 옷걸이에 걸려 있던 슈트 상의를 꺼내 입고 귀가 준비를 서둘렀다.









“늦었네요.”

당황하게 된다.

“배고프시죠? 뭣 좀 차릴까요? 아니면…….”

막 벗은 웃옷에 손을 가져가는 미희를 내려다보자 기쁜 듯이 웃고 있었다. 그 웃는 얼굴을 보면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 당황하게 된다. 생각을 감추려는 것처럼 그는 여자로부터 싸늘하게 눈을 돌렸다.

“네 입장을 알고는 있는 건가?”

“……아?”

“넌 내 애인이 아냐. 착각하지 마라. 여기 있게 해준다고 정도를 벗어나는 건 이쪽이 용납 못하니까. 자꾸 선을 넘으려 들면 내보내는 수가 있어.”

“혼담……, 때문인가요?”

“……?”

대답 없이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미간에 표가 나지 않을 정도의 불쾌함이 슬쩍 구겨져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별로 기가 죽지 않은 표정으로 생긋 웃더니 팔을 앞으로 죽 뻗으며 여유롭게 덧붙였다.

“피해갈 일은 안 해요. 첫째, 여기는 이 맨션의 젤 위층이고 나는 여기서 거의 한 발짝도 나가는 일이 없으니. 여름동안의 기한부라고 했잖아요. 기한이 끝나면 절대 달라붙지 않을 거야. 절대.”

그렇게 말하는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달라붙지 않는다’는 말과는 달리 남자의 팔에 아무 거리낌 없이 매달리며 쿡쿡 웃는다. 그 행동이 오히려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자신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같아서…….

“일이 많아.”

그대로 싸늘하게 자르며 팔을 풀었다. 어디까지나 덤덤한 말투로.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해요? 계속 혼자 방치해두고.”

“돌아온 것도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 안 들어? 혼자 놀기 싫으면 누군가 같이 놀 상대를 찾던지.”

조금 화가 난다. 애인은 아니라고 누누이 말했거늘, 뻔뻔스럽도록 거리낌 없이 자신의 영역을 파고들어오려는 저 버릇없는 태도가. 확실하게 선을 그을 필요를 느낀다. 그게 안 될 상대라면 아예 거래는 중도에서 끝내버리는 게 낫다. 고객이 피곤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상품을 취급할 필요는 없으므로.

“이상한 남자야.”

방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뒤에서 은근히 신경을 자극하는 웃음기 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가시다고 생각하며 눈썹을 들어올리자 변명하듯 덧붙인다.

“그렇지만 이상하잖아요. 혼자서 고독하게 클럽에 들르는 걸 보면 특별한 애인이 있는 눈치는 아니면서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여자가 옆에 있는데도 손대지 않다니. 줘도 못 먹나 수준이잖아, 이건.”

“안 땡겨.”

비웃음 어린 투로 대꾸하자, 갑자기 미희의 눈이 흐려졌다. 쌍방이 지나쳤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먼저 사과할 마음은 들지 않아서 그대로 방에 들어가려고 문을 열었을 때였다. 갑자기 문 안쪽으로 여자가 미끄러져 들어오더니 발돋움을 해 얼굴을 갖다댔다. 따스한 감촉이 부드럽게 입술을 스친다.

“뭐야.”

어깨를 가볍게 밀어 문밖에 내보내자,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미소 지었다.

“그렇게 싫어요? 처음엔 그쪽에서 먼저 했었잖아.”

“시험용이었어.”

“난 불합격?”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고 있다. 짧게 대꾸했다.

“알면 나가.”

그러자 픽, 하고 건방진 웃음이 흘러나온다.

“거짓말.”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는 엷은 갈색의 눈동자.

“지금도 원하고 있으면서.”

문을 닫아버렸다. 밖에서는 뭔가 투덜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상대하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윗옷을 한구석에 던져 놓으면서 그는 어이없는, 그러나 조금은 무겁게 눌러 죽인 고소(苦笑)를 터뜨렸다.

저 여자, 스물 둘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저런 스타일은 취향이 딱히 아님에도 이곳에 여자를 들인 이유는……, 자신도 알 수 없는 충동 같은 데서 나온 것이었지만 그래도 여자란 느낌이 들지 않아서, 혹은 어린애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 오는 날 골목 한구석에서 떨고 있는 고양이를 발견한 기분이랄까. 그런데…….

분명 자기 기준으로는 어린애인데, 그 어린애는 간혹 예기치 못한 순간을 틈타 훌륭한 ‘진짜’ 여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농후한 눈을 한.



계속.




성실연재는 쭈욱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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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릴리

2004.07.11 10:48:28

줘도 못먹나라니.... 으이구.. 정말 줘도 못먹냣!!!!!

Junk

2004.07.11 11:09:45

릴리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왜 이리 쑥스러운지......;

리체

2004.07.12 00:03:05

쌓아놓은 게 몇편이더냐..;;난 12편만을 기다리고 있어..ㅡ0ㅡ

Junk

2004.07.12 07:14:05

원... 참...-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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