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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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리가 났다. 열리고, 그리고 닫히는 소리가.

“싫어! 풀어줘요! 싫어!”

미희는 몸을 반쯤 일으켜 필사적으로 외쳤다. 앞이 보이지 않는 속에 공포감이 자꾸만 무럭무럭 그 부피를 키워간다. 가슴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다. 미칠 것만 같다. 제발 살려 줘! 제발! 제발!

“애인이 하는 걸 지켜보는 게 취미야. 날 즐겁게 해주는 게 네 임무 아닌가?”

“싫어……, 싫어!”

필사적으로 팔을 움직였다. 그렇게 꽉 묶어놓은 것도 아니었는데 오히려 그녀가 움직임으로 팔을 묶은 매듭은 더 단단해져 버렸다. 절망감이 온몸을 휩싼다. 팔은 어차피 풀 수 없다. 다리라도 움직여 빠져나가야 한다. 미희는 필사적으로 침대에서 몸을 움직여 바닥에 다리를 내렸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더듬어 가야만 하는 지금의 자신은 비참할 지경이었다. 눈물이 희미하게 배어나온다.

그 때, 뭔가 소리가 들렸다.

누……구?

그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카펫을 밟는 희미한 발소리.

피해야 해! 

“하아!”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려던 순간 어깨가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쳤고, 놀라 몸을 움츠린 순간 어깨를 단단한 팔에 안기고 있었다. 미희는 어떻게든 그 팔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어깨와 다리를 열심히 움직였다. 하지만 그건 상대에게는 어린애 장난 같은 발버둥에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몸은 이내 가볍게 들어올려졌다.

“싫어! 싫어!”

외치며 몸을 마구 휘저은 다음 순간, 그대로 침대에 내던져졌다.

“싫어…….”

눈물이 방울방울 흘렀다. 몸을 어떻게든 움직여보려고 노력했지만 방향을 잘못 잡았는지 도리어 머리가 벽에 부딪쳐 굴렀다. 온몸으로 숨을 쉬면서 뒤에서 다가오는 누군가를 피하려 애쓴다.

“싫어…….”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체온이 느껴지고 양어깨를 잡힌 순간, 두려움으로 온몸이 경직되는 걸 느꼈다. 자신의 몸을 당기는 남자의 힘과 인력에 끌려 그녀는 상대의 몸 위로 무너져 내렸다. 감은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고, 그 눈물이 넥타이에 스며들어갔다. 겁에 질려 몇 번이나 웅얼거리면서 미희는 울었다.

“제발……, 제발 도와줘요…….”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악문 잇새로 새어나온 울음을 막을 수가 없어 미희는 그대로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고 어느 새 정신없이 소리 내 엉엉 울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서야 몸을 누르던 것이 사라져버렸음을 깨달았다. 팔은 여전히 그녀의 몸 위에 있었지만 압박감은 없었다. 대신 팔은 따스한 온기를 가진 채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미희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어린애로군……. 그만, 이제 그만해. 더는 괴롭히지 않을 테니.”

그것은 현호의 음성이었다. 그러고 보니 향기가 난다. 자신에게 뻗어온 손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박현호, 그 사람의 것이었다.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도 분명히 그 전에 알았던 것이었다. 어째서 눈치 채지 못했을까.

눈을 가리고 있던 넥타이가 치워졌다. 미희는 젖은 눈을 천천히 떴다. 남자가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역시 어린애였어. 세상은 그렇게 녹록치 않아. 자, 집에 돌아가라.”

“싫어…….”

미희는 남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아직도 그칠 줄 모르는 눈물을 비비기 시작했다. 목구멍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넘쳤다. 울면서 상대에게 매달릴 때마다 새롭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건조한 느낌이지만 더 이상 싸늘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 커다란 손바닥이 그녀의 젖은 눈을 닦아주고 등을 쓸어내려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이상할 만큼 안심이 된다.

“다행이야……. 가지 말아요.”

미희는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가지 말아요…….”

“너는 날 무서워했던 거 아닌가.”

귓가에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스쳤다.

“아니야,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서웠어. 그러니까……, 이제 가지 말아요…….”

“어째서?”

남자가 되묻는다. 그 음성에 당황스런 기색이 흘렀다. 미희는 고개를 저었다.

“나, 나도 모르겠어……. 돈 같은 거……, 그런 건 필요 없어요……. 아주 잠깐이라도 좋아……. 잠깐만 곁에 있게 해주세요.”

정신없이 고개를 저으면서 애원했다.

“잠깐이라도 좋아요…….”

아주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현호는 가벼운 한숨을 토해냈다. 눈물로 전혀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가 약간이나마 난감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미희는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에게 어린애처럼 매달렸다.

“잠……깐이라도…….”

말을 더 이으려고 했을 때 갑자기 입술에 온기가 스쳤다.

놀랐다.

차갑지 않다. 방금 것은 전혀 차갑지 않았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매끄럽고 촉촉한 뭔가가 입술을 뚫고 들어오더니 잇몸과 치열을 한번 훑고 이내 혀까지 감아올린다. 온몸이 떨렸지만 이제 공포심은 증발해 있었다. 다만 달콤한 욕구가, 뜨거운 숨결이 심장박동수를 증가시키고 온몸의 다른 감각을 흐리게 만든다. 남자의 향기가 느껴져서 그것만으로도…….

“좋아.”

짧고 온화한 딥 키스 끝에 입술을 떼고 그는 말했다.

“내 곁에 있어라.”

상냥하다.

마치 처음 듣는 것 같은 상냥한 목소리였다.

믿을 수가 없어, 저절로 놀라움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상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눈가에 다시 한번 따스한 입맞춤이 내려온다. 그것만으로도 정말 너무나 행복해서 죽을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남자의 가슴에 안긴 채 그 희미한 체온과 향기를 가득 느끼면서, 미희의 눈에서는 최후의 한 방울 눈물이 마지막이라는 것처럼 흘러내렸다.

“단, 애인은 아냐.”

그 말에 젖은 가슴이 욱신거렸다. 역시……, 역시 그런 건가.

“왜……요?”

더듬거리면서 그렇게만 물었다.

“어린애를 애인으로 삼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만 네가 원할 때까지 내 옆에 있어도 좋아.”

남자의 속삭임은 달콤하고, 따뜻하고, 그리고 아직도 차가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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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9'

문은희

2004.07.09 00:30:55

어린애라....빨리 어린애가 어른이 되서 서로 사랑하면 좋겠다..^^

리체

2004.07.09 01:30:51

오...두근거리는 4편이군요.

Rain

2004.07.09 03:40:24

전번꺼 이번꺼...남자여자 나이차이가 넘 나네요..그것도 여자가 어리고..(나이 먹은것에 응근히 열받고 있는 레인.)

씬~

2004.07.09 09:08:34

좋아여 좋아...어린애가 언능 관능적인 향기를 물씬 풍겨서..남주를 놀라게 해주세여..

mirage

2004.07.09 11:34:07

어린애를 애인으로 삼을수는 없으니까....훗훗훗~~고상합니다~
그.러.나.
조만간 자신의 입을 내리치는일이 있지않을까~생각해봅니다.

Miney

2004.07.09 19:25:32

애;한테 당해보면 그 무서움을 알겠지요. 늘 생각하는 거지만, 사랑하고 사랑받는 인간으로서의 여자는 남자보다 빨리 자라는 법인데. 훗.

BubBles

2004.07.09 23:20:14

역쉬 10번 잘해 주고 한 번 못하는 것보다, 10번 못하고 한 번 잘해주는 게 낫다더니 (이 경우는 쫌 아닌 것도 같지만서도..ㅡ_ㅡ;;) 무섭게 나오다가 상냥해 지니, 그 따뜻함이 마구마구 퍼지는 것 같습니다.ㅎㅎ(완전 도취된 상태)

Junk

2004.07.10 00:10:20

Rain/ 죄송합니다; 사실 저도 동갑내기의 연애를 제일 좋아하는데 어쩌다 보니 최근 쓴 글은 여주가 어리고 남주가 나이 많은 구도가 많군요. 저도 나이 먹어놓고 왜 이러는지; 다음에는 동갑이나 적은 나이차의 로맨스를 올리도록 합죠. 죄송;
그리고 다른 분들 이 이야기의 본질을 꿰뚫고 계십니다. 후반부의 카타르시스를 위하여~ 이 글의 여주는 정말로 사랑받을 여주랍니다. 아마.

금보c

2004.07.14 17:18:29

당혹스런 전개에 손을 주먹쥐고 봤는데 역시 잠깐 기대한 예상이 맞았군요..역시 남주는 도를 넘으면 안되죠.. 그런 일이 진짜 전개됬다면 남주를 어찌 해석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걸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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