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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ture
Overture
서곡. 오페라 ·오라토리오 ·발레 ·모음곡 등의 첫 부분에서 연주되어 후속부로의 도입 역할을 하는 기악곡. 그 자체가 정돈되어 있는 내용을 갖고, 완결되어 명확한 종지감(終止感)을 줌으로써 후속부와는 독립하여 존재하는 경우도 많다.
제1악장
솔직히 첫 인상은 그리 좋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니?”
약간 불쾌한 듯 카랑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진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른 당혹감을 삼키려는 듯 약간 숨을 삼켰다.
여자는 장신이었다. 그보다 시선이 높은 데다 턱을 쳐들어서 그런지 한층 박력 있는 각도에서 속눈썹을 약간 아래로 내리깐 채 내려다보듯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짧은 미니스커트 차림의 미모. 그 모습에서는 박력이라고 해야 할까? 묘한 분위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대각선으로 올려다보는 그의 눈을 마주 보더니 매끈한 미간을 희미하게, 신경질적으로 찌푸렸다.
“이민소 씨 계십니까?”
그녀는 가볍게 눈을 깜박이다가 아, 하고 담배를 끼운 손가락을 튕겼다.
“그쪽이 사 진?”
“그렇습니다만.”
“뭐야, 생각보다 더 꼬마잖아. 게다가…….”
그녀는 관찰의 시선을 물끄러미 그에게 보냈다.
“남자 맞아? 그 얼굴?”
시선도 말투도 불쾌 그 자체. 진은 대뜸 외모부터 평가하는 여자의 태도에 화가 슬슬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하는 말치고는 정도가 지나치다. 대체 뭐하는 사람이기에 태도가 이 따위야?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를 달고 살 것 같은 얼굴이구나, 너.”
진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말없이 여자를 노려보았다.
“어머나, 눈은 제법인데?”
그 무언의 항의에 대한 그녀의 대답은 이랬다.
“그쪽 눈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휙 돌아서고 있었을 때, 마침 문이 벌컥 열렸다.
“민소 씨, 거기 서서 뭐해요?”
그 말에 진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어깨가 꿈틀 떨리고, 다리가 천천히 움직여 돌아섰다. 그는 쌍꺼풀 없이 날카롭게 생긴 큰 눈을 한 번 깜박인 다음 물었다.
“당신이…… 이민소?”
“그건 분명 내 이름이야, 꼬마 도련님.”
여자는 입술 한끝을 비틀어 올리며 희미하게 웃다가 뚝, 멈췄다.
“별난 애네. 너 설마 내 얼굴도 모르고 왔니?”
따지는 말투에도 진은 주눅 들지 않고 여전히 정중하게 반문했다.
“그럼, 꼭 알아야 됩니까?”
“음악잡지 안 보나 보지? 단골로 실리는 사람 얼굴도 모르다니.”
“어휴. 공주. 완전 우주황녀병이라니까? 그만 하십쇼, 이민소 씨.”
방금 문 열고 나온 남자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어깨를 툭 건드린다. 잘생기진 않았지만 인상이 좋은 그는 진에게 시선을 돌리며 싱긋 웃어보였다.
“사 진 군이지? 이번 세션의 프로듀서인 한준영이야. 그런데 부모님은?”
“저 혼자 왔습니다.”
“어, 부모님하고도 얘기해야 하는데, 몰랐나?”
“제가 먼저 얘기를 듣고 결정한 다음 계약하게 되면 그 때 오실 겁니다. 이 일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저니까요.”
민소는 그렇게 말하는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겨우 고교 1년생인 주제에 매니저 하나 없이 혼자서 일을 처리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짐작했던 사실이었지만, 이 젊은 바이올리니스트는 예상 이상으로 야무지다. 딱딱한 한 마디에, 책임자인 준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 수긍하고 문을 열었다.
“들어와서 얘기하지.”
*
굉장히, 피곤하다.
진은 회의실 의자에 앉은 채 눈을 깜박였다. 막 기말고사를 마치고 이곳으로 달려온 참이었다. 천재라고 불리고 얼마 전 음반까지 냈지만, 고등학생이란 신분을 대신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진은 불과 3년 전,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바이올린을 손에 잡아본 적도 없던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런데도 배우기 시작한지 3년이 지났을 때, 그는 각종 콩쿠르를 석권하는 연주자가 되어있었다.
그것도 피아노 같은 건반악기나 북 같은 타악기가 아닌 현악기, 바이올린으로.
한준영 프로듀서의 설명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번 세션의 취지부터 시작해서 어떤 식으로 진행할 것인가를 차분히 설명하고 있다. 진은 금방이라도 감길 것 같은 눈을 애써 깜박이다가 문득 앞을 바라보았다.
또 다른 천재가 바로 앞에 있었다.
이민소.
아버지는 세계적인 지휘자, 어머니는 유명 피아니스트인, 음악계의 thoroughbred 같은 존재. 고명한 음악가문의 외동딸로 태어난 그녀 역시 어릴 때부터 신동이니 천재니 하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란 인간이었다.
물론 진과는 다르다. 그녀가 피아노에 처음 올라간 건 3살 때였다. 그런 만큼 팬 층이 두텁다. 진의 주위엔 혜성처럼 나타난 그의 천재성에 열광하는 열혈 팬들과 그의 연주를 들어보지도 않은 채 무턱대고 깎아내리는 안티들이 공존했다. 하지만 음악계의 엘리트 코스를 어린 시절부터 찬찬히 밟고 내노라하는 음악계의 거물들과 협연을 펼쳐온 그녀를 대놓고 욕하는 음악 팬들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잡지건 코앞에서건 남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는 편이 아니라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진도 그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난이도가 높은 곡일수록 그녀의 연주는 빛을 발휘한다. 화려함, 우아함, 차분함, 섬세함, 그리고 인간적인 면까지 두루 갖춘 그녀의 표현력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특히 리스트에 관한 한 극상의 연주라고 해도 무리 없을 정도라고 한다. 초절기교 연습곡은 그녀의 베스트 레퍼토리로 유명했다.
진짜 천재…….
하지만 그 천재의 외모는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랐다.
진은 흔히 피아노 연주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품위 있고 세련된 젊은 여자를 상상하고 있었다. 의상은 검은 색 계열로 단정하게 입었을 것이고, 메이크업은 한 듯 만 듯한 투명 메이크업일 것이라고. 그런데 눈앞의 저 여자는 삐죽삐죽한 커트 머리에 눈 화장은……. 업계용어로는 스모크 메이크업이라는 것이지만 진의 눈에는 멍든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흰 피부, 보라색으로 칠한 입술, 커다란 링 귀걸이, 어깨를 훤히 드러낸 탱크톱에 팬티가 보일 듯 말듯 아슬아슬한 미니스커트. 앙상한 어깨와 그럼에도 꽤 볼륨 있는 가슴 언저리.
흥, 저런 외모니 잡지에 단골로 실릴 수밖에.
“설명은 그만 하고, 이제 그만 천재의 연주를 들어보고 싶은데요.”
사고의 줄기를 차단한 것은 약간 허스키한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다름 아닌 민소였다. 진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녀를 맑은 눈으로 응시했다. 민소는 입가에 달콤한 미소를 띤 채 왼쪽 손바닥에 얼굴을 괴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얼굴을 받친 손가락은 피아니스트답게 손톱이 짧게 잘려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길고 매끈하고 아름다운 식물줄기처럼 뻗어 있었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연기가 허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진은 표정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얼굴을 한껏 찌푸렸다. 담배를 피우는 여자는 딱 질색이다. 그것도 이런 자리에서! 에어컨을 틀어 놓지만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창문을 열어젖혔을 것이다.
“그러잖아도 그렇게 하려고 했어요. 두 사람 다 서로의 연주를 생으로 들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사 진 군, 부탁해도 되겠지?”
“여기서…… 말입니까?”
진은 기대에 찬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죽 둘러보았다. 하나 같이 저명한 음악평론가들 뿐이다. 게다가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무대나 콩쿠르에서라면 다르다. 그럴 때의 진은 반 무아지경이 되기 때문에 전혀 떨린다거나 하는 일이 없다. 하지만 이곳은 그저 회의실일 뿐…… 연주자와 관객이 거의 같은 눈높이에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도 과연 연주가 가능할까.
진은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그는 망설였다.
“어머나, 왜 그래? 자신 없는 거니?”
하지만 망설임은 웃음기를 머금은 빈정거림에 날아가 버렸다.
“아닙니다!”
진은 외쳤다. 그리고 그 외침과 동시에 불안감도 사라져버렸다. 도전하고 싶다는 기분이 안에서부터 강하게 치밀어 올라온다. 그는 바닥에 내려두었던 케이스를 천천히 책상 위로 끌어올려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바이올린을 들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하지만 또렷하게 선언했다.
“연주하겠습니다.”
*
하지만 막상 바이올린을 든 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서 연주하게 될 거라고 미처 생각지 못했던 그는 당연히 무엇을 연주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소년이 난감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곡목은 내가 신청하고 싶은데, 가능할까?”
여자의 발언은 진으로서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무엇을 연주해야할지 선뜻 생각나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차라리 저쪽에 맡겨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피아니스트니까 지나치게 난이도가 높은 곡은 제시하지 않겠지. 괜찮을 거야, 맡겨버려도. 그는 마음을 정하고 입을 열었다.
“무슨 곡입니까?”
“어머, 딱딱한 말투. 꼭 듣고 싶은 곡이 있었거든.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여섯 개의 유머레스크’. 아, 그중에서도 2번, 작품 87의 2를 부탁해.”
“2번……입니까?”
진의 입술이 굳어졌다.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여섯 개의 유머레스크는 교향시 ‘핀란디아’로 유명한 시벨리우스가 파가니니에게 헌상하기 위해 만든 초절기교곡이다. 굉장히 난이도가 높은 곡인데다 특히 2번은 엄청난 스킬과 집중력을 요하기로 유명했다.
“고등학생, 그것도 1학년한테 저런 곡을……?”
다른 사람들도 당황한 눈치였다. 모두들 민소의 선곡이 심술궂다고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들은 수군거리며 두 사람, 진과 민소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못해? 그럼 할 수 없고.”
진은 우뚝 선 자세로 그렇게 말하는 민소를 내려다보았다. 민소 역시 앉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은 한 30초 정도를 말없이 서로 노려보고 있었다. 긴 침묵이 공기 속으로 사라지고, 마침내 진이 입을 열었다.
“못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하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진은 싱긋 미소 지었다. 그러자 이제까지 딱딱하게 굳어 있던 인상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17세 소년다운 순진무구함이 그를 휘감았다. 입술을 아주 약간 틀었을 정도의 가벼운 미소였지만 그 미소는 그 자리의 분위기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그냥 저 여자 앞에서 나를 보여주면 돼.
그것뿐이야. 항상 그래왔잖아?
진은 살짝 숨을 들이마시고 활을 바이올린 현에 가져다댔다.
그리고 연주가 시작되었다.
연주가 시작된 순간, 실내는 조용해졌다. 숨소리조차 사라지고, 오로지 현에 활이 부딪쳐 만들어내는 소리만이 방안을 가득 메운다. 눈을 감고 활을 움직이는 17세의 소년과, 눈을 감고 집중해서 음악을 경청하는 소수의 관중들.
이 곡은 연주뿐만 아니라 제대로 듣기 위해서도 굉장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곡이다. 소품이지만 곡 전반부가 알레그로 아사이(allegro assai, 매우 빠르게)의 템포로 이어지는데다가 짧은 곡 안에 단조와 장조가 한데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연주는 물론 듣는 데만도 굉장한 긴장감을 동반한다.
한여름이기는 해도 에어컨은 강으로 틀어져 있다. 그런데도 방금 전까지 보송하게 말라 있던 진의 이마에서는 한줄기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극히 짧은 연주동안 그의 온신경과 영혼은 음악만을 향해 존재하고 있었다.
관중들은 이미 그 존재감에 취해 있었다.
민소 역시 진지하게 연주를 듣고 있었다. 평소에는 건방지단 소리를 들을 정도로 거침없는 그녀지만, 음악에 관해서라면 태도는 한없이 겸손하고 정중해진다. 더구나 이런 정도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면…….
예상 이상이었다.
솔직히 완주를 해낼 거라고도 기대하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선곡은 고1의 어린 소년에게는 버거운 것이었다. 그런데 진의 연주는 완주 정도가 아니었다. 아니,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의 귀로는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사소하고 미약한 흐트러짐조차 없는, 일단은 완전한 연주였다. 게다가 존재감이 대단하다.
시작한지 겨우 3년이라고?
과연 천재구나.
하지만…… 아직은 미완이다. 자신이 기대하는 파트너로서의 레벨에 그는 아직은 모자랐다. 하지만 아주 근접해 있었다. 게다가 대단히 매력적이고 멋들어진 연주다. 간만에 한국에 돌아온 것도 시간낭비는 아니었어.
“기대만큼은 아닌데, 천재 군.”
하지만 민소는 일체의 부연설명은 치우고 단지 한 마디만 했다.
온통 갈채가 쏟아지는 가운데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있던 진은 이마의 땀을 한번 훔치고는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렇……습니까.”
“응, 너무 과대평가했었나 봐. 나는 ‘천재’를 기대했는데.”
확실히 진의 연주는 완성도가 높았다. 하지만 민소가 진에게 기대한 것은 그간 들었던 천재로서의 호칭에 어울리느냐는 것이었다. 천재는 단지 완전하거나 개성 있는 연주 정도로 끝나는 존재가 아니므로.
이걸로 만족하지 말아주세요, 어린 천재 씨.
그대가 노려야 할 곳은 저 위에 있으니까.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은 침을 삼켰다. 그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 것을 알아차렸는지, 프로듀서 준영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그럼 이번엔 민소 씨 차롄가. 한 곡 부탁해요.”
“그럴까요. 사 진 군, 뭘 듣고 싶어? 내 신청곡을 들어줬으니까 이번엔 그쪽에 선택할 권한을 줄게.”
“아…….”
얼굴이 수치감으로 달아오른 진은 피아노 앞으로 걸어가는 민소를 보았다. 분한 마음을 억누르며 그는 머릿속으로 알고 있는 온갖 피아노곡들의 이름을 나열해보았다. 어떻게 해서든 어려운 곡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벨리우스의 유머레스크에 뒤지지 않을 난곡은? 리스트의 초절기교 곡,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 중 스카르보, 발라키레프의 이슬라메이, 브람스의 파가니니 변주곡…….
하지만 입술에서 새어나온 곡명은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월광.”
피아노 앞에 앉아 있던 민소가 당혹한 듯 돌아보았다.
“월광? 지금 월광이라고 했어? 리스트가 아니고?”
“네.”
“아, 그래. 월광이라면, 베토벤? 포레?”
“드뷔시…….”
드뷔시의 월광은 시벨리우스의 유머레스크와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곡이다. 느릿하고 투명한 분위기의 이 곡은 별로 기교를 요하지 않는 곡으로 민소 정도의 테크니션에게 신청하기에는 좀 어색한 감이 있는 연습곡 같은 것이었다.
사실은 진 자신도 당황해 있었다. 리스트나 브람스의 파가니니 변주곡 같은 걸 신청하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말이 튀어나왔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술술 대답해버린 뒤였던 것이다.
아마도 무의식에서 우러나온 것이리라.
드뷔시의 월광은 진이 가장 사랑하는 곡이었다. 그가 음악을 하기를 원치 않는 부모님과 싸우면서 여기까지 오기까지, 긴긴 밤의 고독을 버티게 해주었던 곡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것을 저 화려한 인상의, 고생 따위는 전혀 해보지 않았을 것 같은 여자에게 부탁하다니……. 나는…… 어째서?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생각에 잠긴 채 한동안 서 있던 진이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 앉은 순간, 민소의 긴 손가락은 살며시 건반 위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피아노의 음.
실내에 맑고 투명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진의 몸이 굳어졌다.
“…….”
첫 소절부터 온몸, 온신경이 압도당했다.
결코 웅장한 음악이 아니다. 창으로 스며들어오는 달빛처럼 부드러운 음색. 대낮, 한여름의 대낮인데도 이곳이 칠흑 같은 어둠의 공간으로 변해버린 느낌마저 부여하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감각.
이것이, 이민소란 사람의…… 달빛(월광)?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최고다.
이것이 음악이라는 사실마저 잊어버리게 할 정도로.
진은 뚫어지게, 열렬한 시선으로 민소와 그녀의 손가락, 그리고 소리를 내고 있는 피아노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런 걸 듣고 싶었어. 내가 손에 쥐고 싶었던 달빛, 내가 바라보고 싶었던 밤하늘.
이 여자가 내게 보여주고 있어.
피아노로, 음악으로, 천상의 멜로디로.
그녀는…… 진짜 천재다.
*
연주가 끝났다.
민소는 손가락을 피아노에서 살짝 떼고 눈을 감으며 숨을 가볍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언제나 그렇듯 체내에는 아직도 음악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등 뒤에서 터져 나오는 박수에 현실로 돌아온 그녀는 미소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시선이 닿은 곳은 소년의 얼굴이었지만, 순간 그녀는 당황했다.
진은 고개를 들고 허공을 향해 시선을 돌린 상태였다.
그 얼굴에 흐르고 있는 것은,
눈물……?
그것은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흘리는 눈물이었다. 소년은 민소의 시선이 닿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을 들어 얼굴에 비친 물기를 닦아냈다. 그런 진을 보다가 민소는 피아노 의자에서 내려와 앞으로 다가왔다.
“어째서?”
“묻지 마요……. 제길…… 그런 거 묻지 마…….”
진은 정말 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감동하고 또 감동해서 분해 죽겠다는 그 얼굴은 확실히 17세 소년의 그것이었다. 민소는 아직도 젖어 있는 눈과 약하게 떨리고 있는 얇은 입술을 보면서 입 맞추고픈 충동을 느꼈다. 그녀는 조금 난감한 감정을 품에 안고 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진은 감정을 추스르려는 듯 주먹을 얼굴에 댄 채 침묵하고 있었지만, 잠시 후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죄송하지만,”
그가 입을 열었다.
“저는 이번 세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기 시작한 가운데 준영이 외쳤다. 이번 일은 돈과 인력을 꽤나 필요로 하는 프로젝트다. 클래식 CD와 동시에 소규모 콘서트를 한다는 이 기획은 매력적인 만큼 부담스런 작업이다. 천재란 평가를 받고 있는 사 진은 그 이름 두 자로 홍보효과가 있을 터였다.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이번 세션에 참여할 자격이 없습니다.”
“어째서?”
“세션에 참가하는 연주자들의 실력은 어느 정도 대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민소 씨에게 한참 뒤쳐져 있어요. 아닙니까?”
준영은 반론은 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사 진 군에게는 사 진 군만의 소리가 있어.”
“아시잖아요, 그걸 찾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모자란다는 겁니다.”
진은 차갑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바이올린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없었던 일로 해주십시오.”
“어이, 사 진 군! 어이!”
준영이 부르는데도 아랑곳 않고 진은 차분한 동작으로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멍한 표정의 일동을 남겨두고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잠시 회의실 안은 어이없는 침묵으로 가득 찼지만, 그 때 진의 뒤를 따라 나간 사람이 있었다.
(제2악장부터는 중략)
앤솔로지에 낸 단편입니다. 3악장+CODA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음악에 대해서 잘 모르는 주제에 도전해봤던 것은 그냥, 너무 쓰고 싶어서였는데 역시 잘 안 되더군요. 쩝. 민망스러우니 웃어 넘겨주삼(ㅜ_ㅜ).
어쨌거나 완결을 기념하는 의미로 1악장만 올립니다. 나머지는 상상해주십시오.
민소의 이름을 지어주신 진아네고 님께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모처럼만에 글 올리신 정크님, 와락 반가워요>.< [01][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