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unk paradise
- 소설
- 완결소설
글 수 198
5. 사건과 사건의 연관성
오준호는 입가에 희미한 냉소를 띤 채 표치현을 보고 있었다. 그는 자기 연구실 소파에 형사를 앉으라고 권하면서 자신도 느긋한 동작으로 앉았다. 여러모로 부티가 흐르는 남자였다. 비싸 보이는 양복에, 손목시계에, 구두에 넥타이, 단정하고 말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 약간 느끼한 인상이긴 하지만 미남자형이다.
“아, 선영아. 커피. 그런데 저도 용의선상에 있는 겁니까?”
조교에게 차를 내오라고 지시하고, 그는 침착하고 직설적으로 질문했다.
“수사에 협력을 바랄 뿐입니다.”
치현이 지지 않을 정도로 냉정하게 대꾸했다.
“저, 저도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오준호의 조교였다. 어깨에 닿을까말까 한 단발을 한 그녀는 커피 잔을 두 사람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오준호가 소개했다.
“제 조교인 고선영입니다.”
“선생님은 알리바이가 있어요. 제가 압니다.”
“말씀하십시오.”
치현이 수첩을 꺼내며 말했다.
“남안진 선생님이 돌아가신 날, 오 선생님께선 아침부터 여기서 학생들이 제출한 논문을 체크하고 계셨어요. 그 분이 쓰러졌을 땐, 점심시간이 끝나 수업이 막 시작되었을 무렵이었죠.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신 선생님께 커피를 타다 드렸기 때문에 잘 기억하고 있어요.”
고선영이 설명하자 오준호가 덧붙여 말을 이었다.
“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사한 후 연구실로 돌아왔습니다. 수업도 달리 없고 해서 아침부터 내내 틀어박혀서 논문검토만 했죠.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니까 때맞춰 종이 울렸던 걸로 봐서 그 때가 1시 10분이었을 겁니다.”
치현이 만년필로 메모를 하면서 물었다.
“그 시간에 식사를 했다는 걸 증언해 줄 사람이 있습니까?”
“예.”
오준호가 대답했다.
“함께 식사한 사람입니다.”
“한번 뵀으면 좋겠군요.”
치현은 대답하면서 한편으로 머리를 굴렸다.
남안진의 사망시각은 검시관과 학생들의 증언대로 오후 1시 반 경의 일이었다. 교탁위에 놓여있던 미네랄워터가 담긴 페트병 안에서 치사량의 청산가리가 검출되었다. 페트병에 찍혀 있던 것은 오직 피해자의 지문뿐이었다.
“이제 저한테 알리바이가 있단 걸 알아주시겠지요.”
오준호는 입가에 냉소를 떠올리며 담배를 꺼냈다.
“좀 다른 얘기를 여쭤보고 싶은데요.”
치현의 말에, 담배에 불을 붙이면 오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인 건 압니다만, 그쪽 은행계좌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갑자기 연기를 뿜어내던 오준호의 얼굴이 슬쩍 굳었다.
“약 2년 전부터 정기적으로 상당금액의 돈이 들어오고 있더군요.”
“보험금입니다.”
오준호가 담배를 한손에 든 채 대답했다.
“딸이 교통사고로 죽었기 때문에…….”
“아픈 얘기를 끄집어내서 죄송합니다만 어떤 사고였습니까?”
치현이 묻자, 오준호는 입술을 꾹 다물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뺑소니였죠. 자전거에 타고 있던……, 고작 7살밖에 안되는 애를 차가 치고는 그대로 도망쳐버렸습니다.”
치현은 고통스런 표정을 하고 있는 오준호에게 더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저쪽 Y대 사건 말인데, 피해자인 성유리 씨와 애인이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예?”
오준호가 눈썹을 들어올렸다.
“몇 번 식사를 같이했던 정돈데요. 차로 바래다주고……, 뭐 딱 그 정도.”
“남안진 씨와도 같은 술집에 자주 가셨다면서요.”
“그건 맞습니다. 아까 말한 같이 식사한 친구도 같이, 셋이 자주 뭉치곤 했죠.”
“음…….”
치현은 그 제3의 선생도 조사해봐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두 사람이 친한 사이였다면 알리바이를 서로 만들어주는 거야 별 문제도 아니었겠지. 딸이 몇 년 전에 죽었다고……. 이건 넘겨짚는 거지만, 딸을 치고 달아난 범인이 피해자 두 사람이었다면? 복수로 접근해서 그들을 살해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지만.
“어쨌든 저한텐 알리바이가 있습니다. 증인도 있죠. 아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치현은 이제 물러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치현이 메모를 갈기면서 말했다.
“혈액형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쪽 조교분도.”
“B형입니다.”
“O형인데요.”
두 사람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치현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윤희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오늘은 민형과 함께 듣는 수업이 하나도 없는 날이다. 어제 그런 식으로 뛰쳐나오고 나서 그로부터 전화 한통쯤 올 거라 기대했던 자신은 바보였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자신이 먼저 전화 걸 생각 또한 들지 않았다.
“하아…….”
팔에 든 파일을 끌어안은 채 그녀는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오늘은 한경이랑 저녁을 먹기로 한 참이다. 정문으로 향하면서도 윤희는 혹시 민형이 보이지 않을까,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대신 정문에 거의 다 다다랐을 때, 그런 그녀의 눈에 중학생인지 고등학생인지 교복차림의 소녀가 품에 커다란 봉투를 안은 채 그녀와 마찬가지로 두리번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어…….”
눈이 마주치자 그녀 쪽에서 말을 걸어왔다.
“네?”
“저기……, 사람을 찾고 있는 데요…….”
윤희가 반문하자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주춤거리며 말을 꺼냈다.
“사람? 누구요?”
“이름도 모르고, 잠깐 지하철에서 본 분이라 얼굴도 잘 몰라요…….”
“그런데 찾아왔어요?”
“예, 이것 땜에…….”
소녀는 품에 안은 서류봉투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걸 떨어뜨리셨어요. 제가 집어든 신문에 끼워져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죠. Y대라고 겉에 써 있는 봉투를 그 분도 들고 있었던 기억이 나서요. 여기서 일하는 분이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찾아야 할지 도통…….”
“교무과에 가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교무과요?”
소녀의 눈이 빛났다. 윤희는 가까운 교무과가 있는 건물과 거기까지 가는 방법을 자세하게 알려 주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듣던 소녀가 물었다.
“언니는 이 학교 학생이시죠?”
“네.”
“저도 이 학교 치고 싶은데…….”
“아, 정말요? 이름이 뭐예요?”
“유진영이요.”
윤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영이 말했다.
“저어, 혹시 제가 찾지 못할 경우에, 담에 도움을 청해야 할지도 모르고……, 음, 그게 아니더라도 이 학교에 혹시 붙으면 언니를 만나 뵙고 싶은데, 성함 좀 여쭤 봐도 돼요? 실례라면……, 음…….”
“최윤희요.”
윤희가 말하자 그녀는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더니 수줍게 물었다.
“저기, 핸드폰 번호 좀 여쭤 봐도 되요? 함부로 걸지는 않을 게요…….”
윤희는 잠시 망설였지만 나쁜 아이는 아닐 거란 생각에 번호를 가르쳐주었다. 그녀는 열심히 번호를 입력하고는 자신도 윤희에게 번호를 알려줬다.
“꼭 합격해서 만났으면 좋겠네.”
“네. 저도요.”
웃으며 말하는 윤희에게 진영은 마지막으로 꾸벅 고개를 숙이고 인사한 다음, 저편으로 서서히 멀어져갔다. 그런 진영을 바라보던 윤희도 몸을 돌렸다.
“윤희야!”
만나기로 한 카페에 들어선 윤희는 그녀를 부르는 한경의 소리에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성현이 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
“안녕.”
“아, 안녕.”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쪽으로 가자, 한경이 대뜸 물었다.
“민형이는?”
“응? 민형이가…… 왜?”
“민형이랑 같이 안 왔어?”
윤희가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성현과 한경은 다분히 놀란 표정을 지으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어, 장민형! 여기!”
성현의 외침에 윤희가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자, 문가에서 민형의 장신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는 윤희와 눈이 마주치자 잠시 멈칫하는 듯 했지만, 이내 여느 때와 다름없는 태연한 표정이 되어 그들 자리로 다가왔다.
“이왕 올 거 같이 오지.”
성현이 그렇게 말하자,
“그런 말 없었잖아!”
윤희와 민형의 입에서 똑같은 말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아니, 우린…….”
벌써 ‘우린’이야? 어이고, 빠르기도 하시네. 윤희는 변명을 늘어놓기 위해 입을 연 한경을 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당연히 니네가 같이 올 줄 알았지. 오늘 우리가 만난다고 하면…….” - 한경
“같이 온단 소리도 안했잖아.” - 윤희
“엥? 안했던가?” - 성현
“안했어.” - 민형
갈수록 말이 짧아지고, 갈수록 분위기가 어색하게 흘러간다. 한경과 성현 두 사람은 대충 민형과 윤희가 싸웠다는 걸 잽싸게 파악한 눈치였다. 그들은 얼굴을 마주보더니 어떻게든 이 궁극의 썰렁함을 극복해보고 싶은 듯 입가에 필살기인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민형과 윤희는 상대적으로 뚱한 표정들이었다.
“뭐, 일단 먹고, 먹고. 아, 배고파. 난 햄버그스테이크 시킬래. 너흰?” - 한경
“아하하, 그래. 먹자, 먹자. 난 스파게티 시킬래.” - 성현
“나도 스파게티.” “김치볶음밥.” - 윤희와 민형
한 커플은 살살 웃으면서, 한 커플은 무뚝뚝한 표정 그대로 어떻게든 음식을 시킨 후, 성현이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있잖아, 너희라면 궁금해 할 거 같아서. 한경이가 두 번째 사건 목격자잖아. 당연히 궁금해 하리라고 생각했거든.”
“궁금해.”
민형이 말했다.
“그렇지? 하하, 그렇지?”
성현이 V자를 그려 보이며 한경을 쳐다보았다. 한경이 입을 열었다.
“수업은 ‘현대물리학과 사상의 기초’야. 교양필수니까 다들 울며 겨자 먹기로 듣는 강의. 어쨌든 대규모 수업이고 학점도 잘 따야하니까 졸음 참고 필사적으로 듣고 있는 수업인데, 시작하고 한 15분 정도 지났던가? 선생님이 쓰러지셨어.”
“갑자기? 이유도 없이?”
민형이 물었다.
“글쎄. 언뜻 본 걸론 페트병의 물을 마시자 마자였던 걸로 기억해.”
한경이 말하자 이번에는 윤희가 물었다.
“그래서, 그 담엔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되긴. 무서워서 다들 벌벌 떨었지. 그래도 구급차 부르고, 안미주 선생님께 구원요청해서 그 분이 와주셨고.”
“안미주 선생님?”
“응. 국문과 조교수님이야. 나이는 한 30대 초반 정도? 아무튼 엄청 젊고 똑똑하신 분이셔. 인기도 있고. 내가 들은 기억으론 그 분이랑 돌아가신 남안진 선생님이랑 굉장히 친했다고 했던 거 같아. 안 선생님이 뛰어오셔서 이것저것 연락을 하시고 학생들을 진정시켰어. 애들은 다 파랗게 질려있거나 아님 흐느껴 울고, 그러다가 경찰이 와서 이것저것 이야기했어.”
“음, 그 페트병 안에 독이 있다고 했지…….”
민형이 중얼거리자, 이번에는 성현이 물었다.
“그 선생님, 수업하시면서 항상 물을 마시냐?”
“거의 그래. 3시간 연강짜리거든.”
“수업 시작했을 때 그 병은 이미 개봉한 상태였어?”
민형이 엄지손가락을 입가에 갖다댄 채 물었다.
“그건 잘……. 근데 그 선생님, 내가 알기론 오전에도 수업하셨거든. 보통 때도 늘 갖고 다니는 가방 안에 병을 넣고 다니니까 이번에도 그렇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앞 시간에 쓰러지지 않았단 건, 점심시간에 독이 들어갔단 뜻인가.”
“모르겠어. 그런 것까진 난…….”
한경은 말하면서 몸을 흠칫 떨었다. 기억이 떠오르자 두려워진 모양이었다.
“남 선생님은 대개 시간 빠듯하게 채우시는 편이고 질문하러 갈만한 학생도 없었을 걸? 수업시작 직전에도 아무도 선생님 근처에 갔던 기억은 없어. 경찰이 꼭 우리 중에 범인이 있을 거란 식으로 말해서 기분이 너무 안 좋아.”
“아,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응? 왜?”
민형이 웃으면서 대꾸하자, 한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윤희와 성현도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뭐, 그래봐야 직감에 지나지 않지만, 이번 사건과 첫 번째 사건이 동일범의 소행이라면 적어도. 범인은 첫 번째 피해자를 죽일 동기, 그리고 한밤중에 학교에 보안을 뚫고 잠입할 배짱 정돈 있는 사람이어야 할 거야. 게다가 수업 중에 피해자가 쓰러지면 당연히 큰 소동이 날 테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혐의가 돌아갈 것도 당연하고, 소란스런 틈을 타 도망칠 수 있을지, 의심을 피할 수 있을지 여부도 분명치 않아. 게다가…….”
민형은 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게다가 사건이 있었을 때 의심스런 차 한대가 빠져나가는 것이 목격됐어. 그 교실에 학생들이 거의 갇혀 있다시피 남아 있었는데, 범인이 차를 타고 도망쳤단 가능성이 있는 한, 아직까지는 학생들이 범인이라고 한정짓고 싶지 않아. 외려 죽은 피해자에게 가장 먼저 접근한 사람, 안미주 선생님, 그 분이 더 수상하지. 어디까지나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말이야.”
“설마…….”
한경이 고개를 저었을 때, 마침 주문한 음식이 날라져 와서 살인사건에 관한 대화는 거기서 일단락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좀 더 이야기를 했지만 딱 그 정도였다. 민형도 들을 만큼 들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고, 한경도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식사를 마친 뒤 이제 그만 찢어지고 싶다는 눈빛을 강렬하게 보내오는 뉴 커플을 알아차리고 윤희와 민형은 두 사람과 헤어지기로 했다.
“그럼.”
성현과 한경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윤희가 쌀쌀하게 말했다.
“우리도 이만…….”
‘헤어지자.’ 라는 매몰찬 문장은 마지막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고개를 돌린 채 말하고 있던 윤희의 어깨를 민형이 꽉 잡아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윤희는 처음엔 민형을 뿌리치려했지만, 이내 포기하고는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아주 질 낮은 농담을 했단 거 알아?”
“미안.”
민형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린다. 윤희는 작게 투덜거렸다.
“사람을 뭘로 보고…….”
“알아. 미안, 진짜로 미안. Sorry, désolée, entschuldigung, lo sient, ごめんなさい, 對不起. 이제 그런 말 안할게. 절대. 약속해.”
“뭐야, 너…… 켁켁!”
민형이 하도 세게 끌어안았기 때문에 그녀는 숨도 잘 쉴 수가 없었다.
“써, 썰렁……, 켁켁……, 해…….”
“나한테 최윤희만한 여자가 어디 있겠냐.”
민형은 윤희의 머리에 얼굴을 파묻은 채 말했다. 아니, 파묻는 정도가 아니라 머리 냄새까지 맡고 있는 듯하다. 안겨 있는 건 자신 쪽인데, 어쩐지 안고 있는 민형 쪽이 강아지 같아서 윤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그만해, 간지럽다…….”
사실 간지러운 건 둘째 치고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다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하고 싶으면 한다.’는 민형을 말리는 건 애당초 무리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기에 그저 한숨을 머금은 채 잠자코 투덜거릴 뿐이었다.
“후, 팔에 힘 좀 빼……. 으, 갑갑…….”
6. 조사를 시작하다, 로 계속.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