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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98
9. 범인
"발자국이, 이상해."
민형은 이마로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미간에 살짝 주름이 새겨져 있다. 윤희는 설명 없이 결론부터 시작하는 화법, 또 시작이구나 하고 생각하며 그래도 지치지 않고 되묻는 자신에게 신비로움을 느꼈다.
"무슨 소리야?"
"발자국은 서재 창가에서 경원 형 방 창문 앞까지 이어져 있었어."
"그런데?"
"범인은 낚싯줄을 사용해서 창을 잠궜다 했지. 창을 통해 밖으로 나가고 나서 돌아보고 낚싯줄을 조종한 거란 말이야. 그런데 발자국은, 지나치게 뚜렷했어.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단 말이야. 그야말로 일직선으로……."
"……아."
입에서 감탄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창에서 내려서서 창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어야 하는데, 그런 흔적이 없다. 발자국은 줄곧 한 방향으로 경원의 방 창문을 향해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일단 반론은 제시해 본다.
"상반신만 돌아본 거 아닐까? 그렇게 해도 줄은 당길 수 있잖아."
"뭐 하러 그런 짓을 하지?"
민형은 어, 하고 머뭇거리는 윤희를 똑바로 바라보며 손을 들었다.
"우리 시험 볼 때 자주 그러듯 케이스를 두 가지로 나눠서 생각해 보자. 먼저 처음 형사 아저씨가 말한 대로 경원 형이 범인이라고 가정한다. 경원 형이 창에서 나온 다음 상반신만 비틀어 고개를 돌렸다고 생각해 봐. 자연스럽게 발을 돌리는 것보다 오히려 더 쉽게 자신을 범인으로 모는 증거물인 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겠지? 경원 형이 자기 발자국을 알아차렸다면 바로 지웠으면 지웠지, 내가 범인이오, 라고 말하듯 자기 방까지 걸어가지 않는다구. 제 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말이야."
"그렇구나."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다음, 진범이 따로 있어서 경원 형에게 덮어씌우려 했다고 가정해 보자. 범인은 당연히 발자국을 신경 써야 하지. 발자국을 형의 방 앞까지 남겨야 하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자국을 굳이 흐트러뜨릴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여태까지 정석이라고 생각해 온 낚싯줄 트릭이 진범이 쓴 방법이 맞다면 말이야. 뭐 하러 그런 짓을 하겠어? 말이 안돼."
윤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치만……, 일단은 증거품이잖아. 그리고 발자국은 분명히 있었다구. 달리 무슨 방법으로……."
"봐."
민형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바닷물에 젖어 발자국이 남기 쉬운 흙 쪽으로 걸어가더니, 윤희를 향해 오라는 표시로 손을 흔들었다.
"여기 앉아 봐."
그렇게 말하더니 민형은 윤희가 앉은자리 바로 앞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다리가 길고 보폭도 시원시원하다. 쏟아져 내리는 햇빛 아래, 그의 모습이 빛을 반사했다. 윤희는 에이는 눈을 가리면서 말없이 그가 하는 짓을 보고 있었다. 민형 역시 그런 그녀에게 가타부타 뭐라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잠자코 걸어 수 미터를 간 지점에서 뚝, 걸음을 멈추더니, 방금 남긴 발자국 옆으로 다시 걸어 돌아오기 시작했다.
뒷걸음질을 쳐서.
"앗!"
윤희는 저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 그녀의 앞까지 차분히 뒷걸음질 쳐서 되돌아온 민형은 말을 이었다.
"그 발자국은 뒷걸음질 쳐서 만든 것이었어."
"왜……, 그런 짓을?"
민형은 한숨을 쉬었다. 어지간하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진범은 경원 형을 범인으로 몰고 싶었어. '경원 형이 세아를 죽인 다음 자살로 보이도록 위장했다'고 비치게 하고 싶었던 것이지. 경원 형이라면 천장에서 낚싯줄을 조종해 서재를 밀실로 만드는 게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범인은 곧 깨달았어. 자신으로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왜? 현관이 잠겨져 있었으니, 창으로 나와 버리게 되면 별장 안에는 다시 되돌아갈 수가 없었거든."
"안에서 열면 되잖아."
윤희는 자신이 꽤 고집스런 인간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 얘긴 나중에 하자."
민형은 털썩 주저앉아 설명을 계속했다.
"밖에서 현관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해. 하지만 형을 범인으로 몰기 위해서는 서재까지의 발자국은 꼭 찍어둬야 하지. 그래서 범인은 생각했어. 아, 현관에서 나가서 서재까지 뒷걸음질 쳐서 발자국을 찍으면 되겠다고."
침묵.
"범인은 슬리퍼를 신고 현관에서 나갔어. 현관에서 경원 선배의 방 창문까지는 약 1.5m 거리. 첫 한발이 중요했지. 네 말대로 신경 써서 착지한 후, 발자국을 어지럽히지 않도록 각별한 신경을 쓰면서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어. 서재까지 겨우 도착해서는 슬리퍼를 벗고 창으로 들어갔지. 들어가자마자 창을 잠궜고."
"그럼 어디로 나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의문투성이였다. 머리가 갈수록 얽혀서 터질 것만 같았다. 민형은 잘생긴 눈썹을 슬쩍 치켜들며 대답했다.
"물론 문으로 나갔지."
"문에는 특수 잠금장치가 내려져 있었는데……."
그 때 민형이 싱긋 웃었다.
"네가 냉장고 얘기를 했었지? 그 덕분에 생각이 났어."
"응, 하지만 그건 시체를 식히느라……. 응? 역시 대형 냉장고를 이용해 범행시간을 늦춘 거야?"
"그럴 리가."
민형이 말도 안 된다는 투로 대답했다. 윤희는 입을 비죽이 내밀었다.
"그럼 뭐야."
"얼. 음."
민형은 짧게 한 글자씩 끊어 말했다.
"얼음?"
"그래, 아마 얼음일 거야. 잠금장치는 반회전 스타일이었어. 약간 열린 문 사이에 손을 넣고 잠금장치의 금속판을 살짝 내린 다음 그 사이에 작은 얼음을 끼워두는 거지. 시간이 지나면 얼음이 녹아 이미 반 이상 내려가 있던 금속판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고, 문은 잠긴다. 얼음이 녹은 물도 깨끗하게 증발해 버리지. 아주 간단해. 초에 불을 붙여서 이용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흔적을 남기기 십상이니까. 그 후, 진흙이 묻은 슬리퍼랑 전혀 건드리지도 않은 낚싯줄만 휴지통에 버리면 준비는 끝난 거지."
"현관문을 안에서 열어두면 일은 간단했을 텐데, 뭐 하러 뒷걸음질까지 쳐가며……."
윤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직도 자신의 발견에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그녀다. 민형이 그 부분만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슬쩍 아래로 기울였다. 그 시선을 윤희도 쫓았다.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범인이 실수했던 거야. 너무 머리를 굴리다보니까."
"경찰이 제대로 조사해 본다면 당연히 뒷걸음질이란 걸 알겠지?"
윤희는 조그맣게 말했다.
"아마도."
"얘기해 볼까?"
민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일러. 뒷걸음질이란 걸 경찰이 알면 경원 형에 대한 의심은 완전히 가시겠지. 그 대신 주목받게 되는 건 우리들이야."
윤희가 고개를 들어 민형을 올려다봤다.
"너하고 난 알리바이가 있잖아. 지금이라도 말하자. 나, 상관없어."
"정말?"
민형은 갑자기 고개를 숙여 윤희의 눈을 들여다봤다. 왠지 쑥스러움에 얼굴이 잔뜩 붉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진지하던 그의 눈은 이내 부드럽게 가늘어지며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공범으로 몰릴 수도 있을 걸."
"음……."
확실히.
확실히 그렇다.
"경찰에게 얘기하기 전에 우리끼리 범인이 누군지 생각해 보자."
민형이 모래를 손으로 집었다가 도로 뿌리면서 말했다.
"발자국이 트릭이라면, 경원 형은 피해자겠지. 너와 나는 일단 제외하고, 남아 있는 사람은 두 명."
두 명.
서혜 씨와 상우.
윤희는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먼저 서혜 씨. 꽤 키가 작지? 아, 윤희 넌 키가 몇이냐?"
"168. 세아랑 같아."
"몸무게는 60 넘지?"
"……너, 죽인다."
분노의 오라를 내뿜으며 윤희가 말했다.
"살려 줘. 그럼 서혜 씨는 키랑 몸무게가 어느 정도 될까?"
별로 반성의 기색이 없는 민형이 물었다.
"160 안될 거야 아마. 몸무게는 40kg 조금 넘을 것 같은데……."
"그래. 서혜 씨는 몸집이 굉장히 작다구. 그런 서혜 씨가 세아를 천장에 매다는 건 좀 힘들 거란 생각이 들어. 세아는 키가 있으니까 아무리 날씬해 봐야 45kg은 거뜬히 넘을 거라구."
여전히 윤희는 반론을 제기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렇지만.
"끈을 이용해서 힘을 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음, 하지만 서혜 씨는 그런 짓 할 리가 없어."
"무슨 근거로?"
"그, 그냥……. 들어 봐."
윤희는 되는대로 입을 열었다.
"난 진범이 상당히 추리나 트릭에 대해서 박식한 사람이 아닐까 싶어. 순간적으로 생각해 냈다기에는 너무 절묘하거든? 트릭 자체는 마니아라면 어떻게든 떠올리지 못할 것도 아니지만, 추리소설을 별로 안 좋아한다고 서혜 씨가 자기 입으로 그랬잖아. 왠지 좀 서혜 씨는 아닐 것 같다고……."
"확실히 자기 입으로 그랬지."
"거짓말일 수도 있단 뜻이야?"
"아니, 나도 일단은 믿고 있어. 나 역시 서혜 씨가 범인이 아닐 거라고 지금은 생각하고 있으니까."
민형은 발밑의 모래흙을 신발로 툭툭 찼다.
"마지막 발자국에서 현관까지의 거리가 1.5m였지. 키가 작고 상대적으로 다리가 짧은 서혜 씨의 보폭으로는 무리일 거야."
"점프했다면?"
"이 경우에는 현관에서 창으로 점프했어. 자칫 잘못하면 바로 흙 위로 나뒹굴지도 모르지. 넓이뛰기를 하면 대체로 조금은 미끄러지기 십상이야. 그런데 발자국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아주 깨끗이 찍혀 있었어. 게다가 서혜 씨가 미끄러지지 않고 점프할 수 있으려면, 몸이 거의 서커스단 수준으로 가벼워야겠지? 근데 서혜 씨 말야……."
민형은 거기서 으흐흐, 하는 웃음을 흘렸다.
"키가 작고 마른 것치고는 가슴이 굉장하더라고."
"일른다 너. 으음……, 그래서."
머리에서 김이 솟으려 하는 걸 간신히 뚜껑을 닫아 무마시켰다.
"확실히 가슴 때문에 별로 가벼워 보이는 몸은 아니었지. 어쨌거나 서혜 씨가 범인이라면, 작은 몸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괴력과, 트릭을 만들어 낼만한 센스와, 진흙창에 착지해도 비틀거리거나 미끄러지지 않는 균형감각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어때? 가능하다 봐?"
"안되겠다."
윤희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역시 서혜 씨한텐 무리야. 범인은 보다 보폭이 큰 사람일 거야."
민형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상우가?"
숨이 막혔다.
"글쎄."
상대는 코끝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낚싯줄과 슬리퍼가 어디 버려져 있었는지 기억하지?"
"쓰레기통……."
"정확히 어디 쓰레기통?"
"부엌 쓰레기통……."
고개를 끄덕이는 민형을 윤희는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래. 부엌 쓰레기통이랬어. 형사 아저씨가 그렇게 말했지. 상우가 범인이라고 생각해 보자. 이상하지 않아?"
"음……."
"어제 우리가 무서운 얘길 하고 나서 상우는 책을 읽겠다며 서재로 가 버렸잖아. 그리고는 잘 때까지 그 서재 안에 있었지. 윤희 네가 마지막으로 상우를 봤다고 했나? 상우한테 부엌에 쓰레기통이 있다고 했어?"
"아니. 그러진 않았지만……."
"그래. 상우는 부엌에 쓰레기통이 있단 사실을 몰랐어. 왜냐면 세아가 원피스에 와인을 쏟아서 그걸 닫은 휴지를 버리러 간 것, 즉 부엌 쓰레기통에 대한 화제가 나온 건 상우가 서재에 간 후의 일이었다구. 상우는 부엌에 쓰레기통이 있는 줄도 몰랐어. 그런데 낚싯줄과 슬리퍼는 부엌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었단 말이야."
"그야……, 쓰레기통을 찾다가 그럴 수도 있지."
"최윤희."
민형이 이마에 손을 짚었다. 이마를 짚고 있지만 사실 거의 머리를 감싸쥘 듯한 분위기다. 윤희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난 어쩜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릴까?
"응?"
"니가 범인이라 생각해 봐. 손에 낚싯줄이나 슬리퍼처럼 어찌됐건 범행과 관련이 있는 물건을 들고 있다고 쳐. 오밤중이긴 해도 그걸 한시라도 빨리 처리하고 싶지 않겠냐?"
"그야 그렇지. 그런데……."
"너, 어제 상우가 껌을 어디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했지?"
"계단 아래, 서재 입구에 있는 쓰레기통."
윤희는 웅얼거렸다.
"그래. 상우는 서재 입구 쓰레기통을 썼던 사람이라구. 서재에서 나오던 사람이 뭐 하러 귀찮게 부엌까지 일부러 가서 물건을 버렸겠냐. 그러다가 들키면 어쩌겠어? 상우가 범인이라면 서재 입구에 버렸을 거라고."
"음."
반론의 여지가 없다.
"범인은 부엌 쓰레기통을 썼어. 그건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부엌에 쓰레기통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거야. 즉, 범인은 어제 세아가 와인을 흘린 걸 본 사람이야. 상우는……, 아마도 아닐 거야."
"그럼……, 역시 서혜 씨가?"
"우리 아까까지 서혜 씨는 무리란 얘기를 열심히 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치만 상우도 아니랬잖아."
"그래."
민형의 얼굴이 점차 어두워진다.
"무슨……."
드물게 엄숙한 그의 표정. 윤희의 얼굴도 서서히 창백해졌다.
세아를 죽이고 경원 선배에게 죄를 덮어 씌우려했던 사람은 서혜 씨도, 상우도 아니란다. 민형은 뭘 말하고 싶은 걸까. 대체, 뭘…….
몸이 오싹해지고 있었다.
민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최윤희, 범인은 너야."
10. 키스
일순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하얀 것 같기도 하고 까만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범인이라고?
내가……, 세아를 죽였다고?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굳어진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민형아. 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정말?
"쿡쿡……."
앞에서 희미하게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린다. 꿈틀, 몸을 움직였다.
"아하하……."
웃음소리가 커진다. 침을 한번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하하하하!"
민형은 이마에 손을 짚은 채 허리까지 꺾으며 웃기 시작했다. 윤희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민형은 그런 그녀를 내버려두고 한참을 웃고 나더니, 그제야 조금 진정된 얼굴을 했다.
"뭐야. 진짜로 믿은 거야?"
장난스런 목소리. 태연한 얼굴.
"네 알리바이를 가장 잘 아는 나라구. 널 어떻게 의심하겠냐?"
아…….
장……난……?
장난……이었어……?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 때서야 입에서 절규(?)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 진짜로……, 지, 지, 진짜로 놀랐단 말이야!"
갑자기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흐릿해진 시야가 조금쯤 밝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윤희는 얼굴에 손을 가져갈 힘도 없어서, 멍청하게 선 채 앞인지 아니면 흐릿한 화면인지 모를 정체불명의 공간을 보고 있었다. 계속해서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닦고 싶지도 않았다.
"어……."
앞에서 당황한 듯한 민형의 목소리가 들린다.
윤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꽉 문 입술 사이에서 흐느낌 같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바보로 보일 거야. 민형 앞에서. 분명히.
"아……, 저어……, 미안……. 나는……."
민형은 당황한 듯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의 손이 무심결에 올라가려다 뭔가에 신경 쓰인 것처럼 내려간다. 민형은 잠시 혀를 찼다. 그러더니 할 수 없지, 중얼거리고는 그녀 앞으로 다가선다.
그는 그녀를 가만히 품안에 끌어당겼다.
"미안……."
다정한 동작이었다.
"미안……, 내가 잘못했어……."
민형은 윤희를 품에 안은 채, 몇 번이나 사과의 말을 반복했다. 윤희는 눈물이 멎어 가는 걸 느꼈다. 그것은 민형이 사과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품에 안긴 사실을 머릿속이 명료하게 인식하게 되면서부터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기 때문이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넓고, 따뜻하고, 심장소리가 느껴지는 품.
내 앞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평소에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다정함으로 나를 안아주고 있는 이 남자…….
"근데 너 말야……, 되게 귀엽다."
민형은 윤희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참을 수 없어."
뭐?
윤희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민형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로 바짝 다가온 걸 깨달았을 때였다. 그대로 덮치는가……?
생각했는데, 민형은 코끝에서 얼굴을 딱 멈춘다.
"이럴 땐 눈을 감는 게 상식적인 행동이지."
어린애를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
'이 자식이……, 또 놀려……?'
하지만 머릿속과는 달리, 윤희는 순순히 눈을 감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지금 자신이 뭘 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자문의 사이렌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민형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쪼듯이 부딪고 이어 혀끝이 입술을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나마의 생각도 잊고 말았다.
포근하다. 따스하다. 이것은 첫 키스.
치열을 훑고 혀를 휘감아 핥고 빨아들이는, 농후한, 그러나 부드러운,
키스.
마치 며칠동안 자신에게 벌어진 모든 악몽 같은 기억들이, 일시에 녹아 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입맞춤의 감각은 너무도 생생하고, 그러면서도 부드럽고 달고 몽롱하고 싸한 그런 것이었다.
아아, 형용할 수 없다, 는 표현이 맞을 거다. 분명.
미안해, 세아야.
널 질투해서 미안해.
같이 있었으면서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네가 죽었는데 뻔뻔하게 이런 짓을 하는 거, 미안해.
너무 행복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 넘쳤다.
윤희는 민형의 품에 자신을 맡긴 채 한참을 울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별장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별장 현관 앞에는 정 형사가 기다렸다는 듯 서 있었다.
"데이트는 어땠나?"
어느 새 반말로 바뀌었다. 민형을 보며 기분 좋게 웃는다. 민형은 싸늘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어지간히 신경 쓰이게 하더군요. 덕분에 제대로 못했잖습니까."
"뽀뽀 말인가?"
뽀뽀, 라니. 너무나 유치한 말이다. 하오체를 쓰는 저 아저씨 형사한테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뭐? 방금, 뭐라고 그러셨어요?
"첫 키스였단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방해나 하고, 정신적인 손해배상을 청구해도 되겠습니까?"
"방해라니……, 무슨 소리야?"
윤희가 다급하게 끼어 들었다. 민형은 형사를 노려본 그대로 툭 말했다.
"미행. 형사 둘이 줄곧 달라붙어 있었는데."
"뭐어?"
머리를 망치로 쾅! 얻어맞은 듯한 충격과 더불어 앞이 노래졌다가 파래졌다가 까매졌다가 했다. 정신이 들자 목까지 빨개진 자신을 깨달았다.
"진짜 몰랐었어?"
민형이 놀란 표정으로 물어온다.
"너! 너! 그런데도! 그런데도! 나한테 키스했단 말이야?"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응."
민형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윤희를 보았다.
"언제 어디서건 하고 싶으면 한다. 그게 내 신조야."
신조 좋아하네! 어이없음에 다시금 눈물이 찔끔 배어 나왔다.
"여자를 울리는 건 제대로 된 남자가 할 짓이 아니지."
형사 아저씨가 혀를 차며 말했다.
아저씨가 더 미워욧!
"그나저나 무슨 얘기를 그렇게 길게 했나?"
"못 들으셨습니까?"
"너무 거리가 멀어서 말이야. 무슨 얘긴지 물어봐도 될까?"
정 형사는 싱긋 웃었다.
"별 얘기 아닙니다. 발자국을 다시 조사해 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형사의 눈이 일순, 커졌다.
"자네 혹시……, 알고 있었나? 뒷걸음질이란 걸."
윤희의 표정이 풀렸다. 창피함도 잊고 그녀는 형사를 올려다봤다. 민형은 아주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형사님이야말로 이미 다 알고 계셨군요. 우리들이 헤매는 걸 보면서 참 즐거우셨겠습니다."
형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야. 방금 조사 결과가 나왔네. 조사 없이도 알아차리다니 자네 정말 인물이구먼."
"괜히 말을 돌리시려 해도 소용없습니다."
민형은 가차없다. 놀라지는 않고 다만 확인하듯 덧붙였다.
"확실히 뒷걸음질이 맞습니까?"
"그렇다네. 발자국은 진범의 트릭이야. 또 한가지 물어도 되겠나?"
"나중에 듣겠습니다."
민형은 불쾌한 듯 윤희의 손을 잡고 별장에 들어가려 했다.
"가기 전에 이 말은 듣고 가지? 서재 문의 특수 잠금장치로부터 양초가 타다 남은 자국이 발견되었다네."
고개를 돌리던 민형의 동작이 일순 멎었다.
"트릭일세. 짐작이 가나?"
"양초……였습니까?"
윤희의 표정도 천천히 굳어졌다. 역시 민형의 말대로였구나. 범인은 서재의 문으로 나왔던 거야. 얼음이 아니라 초를 이용했을 뿐.
그런데, 민형의 얼굴은 그리 기쁜 듯이 보이지 않았다.
"서재 앞에 작은 창고가 있더군. 거기서 초를 가져온 것 같네."
"예."
"자네 상당하군. 앞으로도 뭔가 떠오르면 말해주길 바라네."
형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민형아?"
민형은 웬일인지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안 들어가?"
윤희의 말에 그는 생각난 듯 고개를 들었다.
"아, 응. 먼저 들어가. 응접실에 가 있어. 잠깐 형사님과 얘기하고 올게."
"같이 갈까?"
윤희는 왠지 걱정스러웠다. 얼굴을 붉히면서 말해 보았지만,
"아니, 혼자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민형은 그렇게 말하고는 문으로 들어가라는 턱짓을 하고, 자신은 형사가 가버린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윤희는 그 뒷모습을 잠시 서서 바라봤지만, 이내 한숨을 쉬며 별장에 들어갔다.
응접실에는 경원과 서혜 씨가 앉아 있었다. 굉장히 피로한 얼굴이다. 두 사람 역시 범인이 누군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일까. 윤희가 들어온 걸 보더니, 서혜 씨가 일어섰다.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 저녁 다 해놨어요. 바로 먹죠. 민형 씨는?"
그녀가 말했다.
"먼저 가 있으랬는데……. 곧 올 거예요."
그 말을 듣더니, 서혜 씨는 더욱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거나 잠시 후 민형은 돌아왔고, 네 사람과 거기 머물고 있던 형사들까지 서혜 씨가 만든 요리를 먹었다. 스테이크는 연하고 비싼 고기였지만, 어제 본 시체가 떠올라서 도통 넘어가지를 않는다. 다들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모습이었다. 형사들만이 사건과 관계없는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상우는 내려오지 않았다. 계속 방에 틀어박힌 채 꼼짝하지 않고 있다.
"상우……."
괜찮을까, 하고 윤희가 말을 꺼내는데, 갑자기 민형이 생각난 듯 고개를 든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상우……, 상우에게 부엌 쓰레기통에 대해 말하신 적 있습니까?"
그는 서혜 씨를 보고 질문하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왜요?"
민형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경원 형, 다 드셨으면 제 방에 와 주실 수 있겠어요? 아, 윤희 너도 와라."
"저는요?"
서혜 씨가 물었다. 민형은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그러십시오."
"이거 설거지만 하고 갈게요."
"아, 제가 거들게요."
윤희가 재빨리 말했다. 서혜 씨는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먼저 올라가 계세요. 금방 따라갈 테니까. 옆에 누가 있으면 제가 힘들어요. 금방 갈게요."
민형의 방.
윤희는 침대에 앉은 채 불안한 시선으로, 잠자코 벽에 기대만 서 있는 민형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무슨 얘기지? 서혜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거야?"
경원이 물었다. 민형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지금 바로 시작하죠. 형,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검사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땅에 있던 발자국은 뒤로 걸은 거라고 하던데요."
경원이 놀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트릭……이었어?"
"네. 형에게 혐의를 돌리기 위해서요."
경원의 목구멍이 꿀꺽 울리는 것이 보였다. 착잡한 기분이겠지. 누군가가 자신을 범인으로 몰아붙이기 위해 노력했단 사실을 안다는 건.
"진범은 경원 형에게 혐의를 돌리고 싶었습니다. 형이 세아를 죽인 다음 자살로 보이도록 위장했다고 경찰이 생각하게끔 만들고 싶었지요. 하지만 잠겨 있는 현관문에 대해서 생각한 범인은 일단 슬리퍼를 신고 현관에서 나왔습니다. 현관에서 경원 형의 방 창문 밑까진 1.5m. 보폭이 넓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건너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리고 현관에서 형의 방 창문 바로 아래까지 한 걸음에 간 범인은 발자국을 어지럽히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뒤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서재에 도착한 범인은 슬리퍼를 벗어들고 창을 통해 서재에 들어갔습니다. 세아의 시체가 있는 바로 그 서재예요."
민형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창을 잠근 범인은 당당히 서재 문을 통해 나왔습니다. 나오기 바로 전에 서재 문 잠금장치의 금속판을 거의 다 내려놓고 작은 초를 하나 세워서 받쳐 둡니다. 물론 초에는 불을 붙였죠. 시간이 지나면 촛농은 녹아 초의 길이는 줄어들고, 결국 초가 다 타면 이미 반 이상이 내려가 있던 판은 완전히 회전, 문이 잠기고 서재는 완벽한 밀실이 되는 겁니다. 좀 전에 형사에게 들었는데 잠금장치에서 초가 녹은 흔적을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추리소설을 많이 본 형이라면 충분히 아는 트릭이실 거예요. 그리고 나서 범인은 쓰지 않은 낚싯줄과 진흙 묻은 슬리퍼를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경원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경원을 보며 민형은 코끝을 살짝 문질렀다. 다음 말을 찾기 위해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윤희는 잠자코 그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11. 결론
"그럼 누가 과연 이런 트릭을 실행에 옮겼을까요."
민형은 다시 입을 열었다.
"먼저 서혜 씨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서혜 씨는 몸집이 작습니다. 세아를 천장에 매다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체구예요. 하물며 이 경우에 범인은 현관에서 형 방 창문까지 무려 1.5m 거리를 단숨에 뛰어넘었습니다. 서혜 씨 보폭으로는 아무래도 무리지요. 물론 넓이뛰기를 한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겠지만, 그렇다기에는 비에 젖은 땅에 새겨진 발자국이 지나치게 안정적이었거든요. 미끄러졌다거나 하다못해 비틀거린 흔적조차 없었어요. 게다가 추리소설에 관심 없다는 서혜 씨가 이런 복잡한 트릭을 생각해 냈을 거란 것도 유추하기 힘듭니다. 이 외에 서혜 씨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확신하게 된 이유는 하나 더 있지만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경원은 조금 다행스런 표정이 되었다. 그는 아내가 결백하다는 사실에 비교적 안심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상우는."
"상우라면 충분히 세아를 천장에 매달 수 있을 겁니다. 현관에서 경원 형의 방 창문까지 한걸음에 디딜 수도 있었을 거구요. 하지만 상우가 범인이라기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곳이 있습니다."
민형은 한 호흡 쉬고 계속했다.
"범인이 낚싯줄과 슬리퍼를 버린 것은 부엌 쓰레기통이었죠. 유감스럽게도 상우는 부엌에 쓰레기통이 있단 사실을 몰랐습니다. 기억하세요? 세아가 와인을 쏟아서 부엌 쓰레기통이 화제에 오른 건, 상우가 책 읽겠다고 서재에 간 다음의 일이었거든요. 어젯밤 상우를 본 마지막 사람인 윤희도 저도 형수님도 부엌의 쓰레기통에 대해서는 말해준 적이 없었지요. 게다가, 상우는 어제 서재 앞의 다른 쓰레기통에 껌을 버렸어요. 아무리 밤중이라도 혹시라도 일어나 있을 지도 모를 다른 누군가에게 들키면 끝장일 바쁜 시간에 일부러 부엌까지 가서 낚싯줄과 슬리퍼를 버릴 이유가 없죠. 눈앞에 아까 쓴 쓰레기통이 버젓이 있는데, 본 적도 없는 쓰레기통을 찾으러 부엌까지 가겠습니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럼 뭐야……."
경원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윤희가 범인이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민형은 씁쓸하게 웃었다.
"물론 아니죠. 저는 누구보다 윤희가 결백한 걸 알고 있는 사람인 걸요. 윤희도 제가 결백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구요. 실은 어젯밤에 저희는 한방에서 새벽까지 있었습니다."
"뭐? 한방에서……?"
경원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무 일도!"
윤희는 화들짝 놀라서 손을 내저었다. 경원이 중얼거리듯 물었다.
"그럼 둘이 한방에서 뭘 했는데?"
"아실 거 없습니다. 저희 둘만의 달콤한 비밀이니까요."
아하, 하는 표정을 짓는(아하는 뭔 아하!) 경원과 뻔뻔+느끼함의 극치를 달리는 민형을 번갈아 보면서 윤희는 부들부들 손을 떨었다.
"어쨌거나 저희는 알리바이가 있습니다."
민형이 잘라 말했다.
"말이 안돼."
경원이 반응했다.
"그럼 우리 중 아무도 범인이 아니라는 결론이잖아."
윤희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잘못된 추리였던 건가?"
경원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민형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맞다고 생각합니다. 범인도 분명히 우리 중에 있고요."
경원은 멍하니 생각하고 있었다. 윤희도 마찬가지였다.
"민형아……. 그럼 외부사람이 범인이라는 거야?"
"너 말이야,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왜 성적이 안나오는지, 조금은 알 거 같다."
"야!"
윤희는 또 다시 화르륵 불타서 소리쳤다.
"뭐, 그런 둔한 점이 귀여운 거지만."
가볍게 윤희를 일축한 민형은 다시 경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아까보다 조금 낮고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형, 자수하세요."
라고.
"뭐……?"
"자수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자수하면, 형이 조금은 감경될 테니까요."
윤희는 저도 모르게 입에 손을 가져갔다.
"민형아, 너……."
그런 그녀에게 민형이 고개를 돌렸다.
"그래."
그는 조금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경원 형이……, 세아를 죽인 범인이었어."
윤희는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범인은 선배한테 혐의가 돌아가도록 꾸몄었다구. 선배가 범인이라면 뭐 하러 일부러 그런 짓을 하겠어?"
"충분히 할 수 있지."
민형이 차갑게 말했다.
"간파 당하기 위해서."
간파 당하기 위해서……?
"발자국 말인데, 뒤로 걷지 않을 수가 없었어. 아무리 경찰이 바보라도 그 정돈 조사해서 밝힐 거고. 그리고 그걸로 형에 대한 의심은 풀리겠지? 누군가 형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거라고 생각하게 될 테니까."
"아……."
간파 당하기 위해서.
"낚싯줄과 슬리퍼를 부엌 쓰레기통에 버린 것도 그래. 너무 뻔히 발견될 만한 곳에 버린 이유가 뭘까? 난 처음에 범인이 '경원 형이 세아를 죽이고 자살로 위장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데, 형사 아저씨가 와서 초가 타다 남은 자국이 발견됐다고 하는 거야. 그 때 알게 됐어, 이것은 진범이 꾸며낸 이중 시나리오란 걸. '진범이 따로 있어 경원 형을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한다'고 생각케 만들기 위한 이중적인 트릭이란 걸 말이야. 얼음을 쓰면 훨씬 간단하고 흔적을 남기지 않을 일을 왜 굳이 깔끔치 못하게 초를 썼을까. 이유는, 발견되어야 하니까."
민형은 어디까지나 침착한 목소리였다. 변호사가 되면 잘하겠구나, 윤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왠지.
"실은 여기서도 저나 윤희, 상우가 범인이 아니란 결론이 납니다. 초가 창고에 있었단 사실을 알 사람은 형 아니면 형수님 정도일 테니까요. 물론 형수님은 아까 말한 이유로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남은 건, 한사람 뿐이지요. 깨닫고 나서도 믿을 수가 없었지만……."
"너 너무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 거 아니냐?"
그 소리에 윤희는 민형에게서 시선을 떼어 경원에게 돌렸다. 놀랍게도 그는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니들이 서로에게 알리바이를 만들어 준 걸 수도 있지. 안 그래? 그리고, 내가 뭐 하러 그런 짓을 했겠어? 내가 왜 세아한테……."
"형, 그만 하세요. 모르고 계셨던 모양인데……."
민형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아, 뱃속에 아기가 있었답니다."
"뭐……라구?"
"방금 경찰에게 들었어요."
민형은 윤희 옆 침대로 몸을 내려 손가락을 깍지끼었다.
"너도 기억날 거야. 요트도 탈 줄 안다는 애가, 이상하게 배 안에서 멀미가 심했던 거. 게다가 내내 졸리다면서 바닷물엔 들어가지도 않고 누워만 있었지. 하는 짓도 좀 이상했었어. 우리가 형이랑 형수님을 막 놀렸을 때 갑자기 들고 있던 글라스를 떨어뜨리기도 했고."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불쌍할 정도로 예뻐 보이고 싶어하더군요. 2시간 걸려 화장하느라 집합장소엔 지각을 하질 않나, 수영복도 이상하게 야시시한 걸 입고. 눈은 시원해서 좋았지만요. 아, 좋아하는 남자가 있으니까 당연한 건가……. 그 녀석, 생각해 보니 바닷가에 앉아서도 계속 형만 눈으로 쫓고 있었어요."
경원의 얼굴이 서서히 흐려져 갔다.
"세아가 임신이란 얘기를 듣고 역시 형수님은 범인이 아니라고 확신했어요. 하다 못해 공범도 아닐 거라고……. 제가 저녁 먹을 때 상우에게 부엌 쓰레기통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느냐고 형수님에게 물었죠. 형수님이 범인이라면 서슴없이 상우의 혐의를 벗겨주는 대답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첨에는 형수님 온단 얘기 없었죠? 상우가 물어보니 먼저 가 있다고……. 형은 원치 않았는데 형수님이 오고 싶어했던 거 아닌가요?"
경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민형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는 모릅니다. 세아가 무슨 말을 해서 형을 화나게 만든 건지도 모르구요. 물론 제가 말한 건 그냥 제 생각일 뿐, 물증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죠. DNA 감정을 하면 아기 아버지가 누군지 밝혀지겠지만……, 솔직히 전 그 사람이 형이 아니길 바래요. 물론 아기 아버지가 형이라고 해도, 범인은 아닐 수도 있을 테고요. 윤희 말대로 외부사람이 꾸민 짓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형……."
민형의 목소리가 조금씩 끊어졌다.
농담이지, 민형아.
농담이지, 그렇지.
이번에도 농담이라고 해 줘.
우리 중에 아무도 세아를 죽이지 않았다고 해 줘.
윤희는 현재가 꿈처럼 생각되었다. 이게 꿈이라면 좋겠다. 아니면 민형이 잘못 생각하는 거라면 좋겠다. 하지만…….
불쌍한 세아…….
고개를 돌린다.
침묵.
깊고 무거운 침묵.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심연과도 같은…….
거짓말이라고 말해 주세요, 선배.
민형이 아니라면, 선배라도요…….
시야에 비친 건,
반짝반짝.
경원의 뺨을 적신 물기가 빛을 반사하며 빛나고 있었다.
"좋아했어. 정말 좋아했어. 하지만……, 서혜한테 말할 수가 없었어. 우리 아버지가 진 빚을 결혼하면서 모두 갚을 수 있었으니까. 서혜도 싫어했던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서 결혼했단 감정이 있었지만……, 역시 세아처럼 사랑했던 건 아니었어. 그렇지만 서혜에게 말할 수가 없어서, 차라리 이럴 바엔 세아와 끝내자고……, 더는 이런 식으로 관계를 지속하고 싶지 않아서 이제 그만 헤어지자고 했는데……, 세아가 화를 냈어. 내일 다 말해 버리겠다고, 전부 다 얘기할 거라고. 설마 임신했을 줄은……."
그는 눈물에 젖은 눈 그대로 시선을 들어서 허공을 보고, 그리고 다시 시선을 내려 자신의 양손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가 죽였어, 세아를. 이 손으로."
눈물에 젖은 얼굴로 말하는 목소리는 마치 먼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힘을 잃은 채 울리는 작은 흐느낌 같았다.
"왜 그 애가 죽어야 했을까. 왜 그랬을까. 어째서 서재를 밀실로 만들고 싶단 생각을 했을까……. 믿을 수가 없었어……, 내 손으로 그 애 목을 조르면서도……, 왠지……, 꿈같아서……. 왠지, 거짓말 같아서……."
경원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세아가 보고 있었어. 내 손안에서……, 나를……. 믿을 수 없단 얼굴로,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그는 주먹으로 눈물을 훔쳤다. 훔쳐도 훔쳐도 계속 흘러내렸지만.
"자수하겠어. 내려가자."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문을 연 경원은 우뚝 발을 멈췄다.
"고맙소."
문 밖에는 정 형사가 안타까운 듯, 씁쓸한 미소를 담은 채 서 있었다.
12. 다시 한번 키스
"안녕하세요, 형사님."
야외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정 형사를 보자마자 윤희는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형사는 어쩐지 못 본 새 머리가 조금 희끗희끗해진 것도 같다. 형사가 윤희를 보더니 가볍게 인사치레를 했다.
"예뻐졌는데? 애인이 생겨서 그런가?"
"형사님도 그 이상한 하오체 안 쓰시니까, 훨씬 잘생겨 보이시네요."
윤희도 가볍게 받아넘겼다. 형사가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애인은 어떡하고 혼자 왔나?"
그 여름의 사건 이후 수개월이란 시간이 흘렀다. 오늘은 웬일인지 형사가 두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먼저 전화를 해왔던 것이다.
"일이 있어서요. 금방 올 거예요."
"아니, 같은 학교 같은 과에 다니는 애인끼리……."
"그러게 말예요. 학교에 왔나 하면 금방 없어져 버린다니까요."
윤희는 때를 놓칠 새랴 투덜거렸다.
윤희와 민형은 이제 법대 공식 커플이 되어버렸다. 사귀면서 알게 된 일이지만 민형은 학교 공부 외에도 아르바이트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도 전직 깡패였던 삼촌이 운영하는 용역회사에서의 아르바이트라니,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건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생각하니 이가 갈린다.
애인이면 뭐하나! 캠퍼스 커플이면 뭐하나!
데이트란 걸 해 본 역사가 없는데!
"그러지 말고 다른 놈을 사귀지 그래? 영 껄렁한 게 아가씨 쪽이 아까워서 말이야. 여자 행복하게 못해줄 놈 같단 말이지."
"정말 그럴까요?"
"정말 그럴까요오오?"
헉.
돌아보니 민형이 싸늘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형사님. 괜히 얌전히 있는 애를 이상한 방향으로 선도해서 잘 나가는 커플을 갈라놓으려는 수작이시라면, 저희는 이만 사라지겠습니다."
민형이 앉아 있는 윤희의 팔목을 붙들고 일으켜 세워 자리를 벗어나려 했을 때, 마침 웃음기를 가득 담은 형사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저녁 사려고 불렀는데? 장어구이 맛있게 하는 집을 안다네. 정력에도 좋은 장어구이일세. 애인한테 싸랑 받으려면 정력부터 보강해야지?"
정 형사가 쌍시옷 발음으로 '사랑'을 강조했다. 상당히 느끼하다.
민형이 자신만만하다 못해 시니컬한 인상의 미소를 떠올렸다.
"지금도 넘쳐서 큰일인데요. 윤희한테 물어보면 아실 겁니다. 제발 자제 좀 해 달라고 안달이니까요."
"뭐, 뭣?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무 부끄러워하지 마, 형사님은 다 이해해 주실 거야."
"너어?"
정력? 노, 놀고 있네? 키스도 세 번인가 밖에 못했는데! 대체 저 인간은 뭐가 그리 바쁘고 만날 사람도 많은지!
윤희는 손톱을 세워 민형의 손등을 세게 꼬집어주었다. 민형이 신음소리를 가늘게 흘렸지만 개의치 않고 더욱 힘을 싣는다.
"음, 그래서 먹으러 가지 않겠단 소린가?"
정 형사가 묻자, 민형은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지었다.
"전, 최소 5인분은 먹어야 합니다. 아시죠?"
윤희는 들키지 않도록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장어구이가 드디어 바닥을 드러내고 더는 먹지 못할 만큼 배가 차자, 정 형사가 생각난 듯 물어왔다.
"김상우 씨는 어떻게 지내나?"
"외국으로 여행을 떠났어요."
상우는 휴학을 했다. 아무래도 충격을 이길 수 없었던 모양이다. 경원이 범인이란 걸 안 상우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어떻게든 격분은 가라앉았다. 그렇지만 마음의 상처는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고백도 해 보지 못하고 죽어버린, 짝사랑의 상대…….
아마 그에게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을 테지.
그렇지만 상우는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다.
윤희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법의학 동아리 '퍼즐'은 해산되었다. 의대생들은 본과에 진입하여 본격적으로 힘든 공부의 길에 접어들기 시작했고, 막 사법시험을 공부하기 시작한 법대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얘기는 안 했지만, 세아의 죽음에 의한 충격도 해산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정 형사가 침통한 목소리를 말을 꺼냈다.
"유경원 씨 자살은 우리 실수였어. 할 말이 없네."
경원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칼로 목을 찌른 것은 감시하던 사람이 잠깐 한눈을 판 새 일어난 일이었다고 한다.
"서혜 씨는 좀 어떠세요?"
윤희가 물었다. 형사가 말했다.
"강한 사람이더군.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남편을 용서하겠다고……. 하긴 용서하지 않으면 또 어쩌겠냐만은. 잘못도 없는 사람인데 이세아 양 묘에는 거의 2주에 한 번씩은 찾아가는 것 같더군. 이번 일로 가장 후유증이 큰 건 서혜 씨일텐데 말이야. 남편이 자살한 걸 알고는 처음으로 울었다네. 어쨌든 이겨나갈 걸로 생각하고 있어, 일단은 강한 사람이니까 말일세."
"서혜 씨가 형이 범인이란 걸 짐작하고 있었다니……."
민형이 중얼거렸다.
그것은 어떤 논리나 추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부로서의 '직감'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의심을 받던 남편이 자기 곁에 돌아와서 응접실에서 둘만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그녀는 오히려 심증을 굳힌 것이었다.
그래서 윤희와 민형이 산책에서 돌아왔을 때 본 그녀의 모습이 그토록 불안해 보였던 모양이다.
꽤나 진부한 살인사건은 범인의 죽음으로 그 막을 내렸다.
하지만 엄청 진부한 연애사건은 아마……, 이제부터 시작일 것이다.
바람이 어느 사이 거세졌다. 초겨울이 시작되려나 보다. 시험이 끝나면 겨울방학이 시작되겠지. 여느 때라면 기다리고 기다렸을 방학이 마냥 기쁜 것만은 아니다. 지난 여름방학의 기억이 너무나 참혹했기에.
정 형사는 장어구이를 대접한 후, 또 일이 있다며 가버렸다. 형사도 그리 편한 팔자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건가.
"너 말야, 그 때 정말은 세아랑 무슨 얘길 했었어?"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윤희가 물었다. 민형이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묻는다.
"그 때란 언제를 말하는데?"
윤희는 작게 대답했다.
"그 때 그 섬에서 수영하고 있을 때……."
"아, 그 때?"
민형은 약간 씁쓸하고, 그리고 기분 좋은 기억을 되살리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그런 그를 보며 윤희도 말을 덧붙였다.
"세아가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킥킥 웃고 있더라고. 난 니네 둘이 사귀는 줄 알았는데."
"너 얘기 했었어."
"응?"
내 얘기?
"세아가 나더러 묻더라고.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아니냐구. 말했지. 답답해서 속 터질 정도로 좋아한다구, 저 둔녀를."
둔녀……?
"솔직히 말이다. 인간적으로, 그렇게 내가 대시하는데도 못 알아차릴 수가 있는 거냐, 너?"
"언제 대시를 했다는 거야? 니가 맨날 갈구기밖에 더 했어?"
"내가 언제 갈궜다는 거야."
아무래도 그게 민형의 애정표현방식인 모양이다. 윤희는 말싸움은 포기하기로 했다. 지금 또 시작하면 피곤해진다.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억지로 고치려고 들지 않고 상대방의 단점까지 인정하기로 했다. 그게 최윤희의 연애방식, 그게 장민형 같은 남자를 사귀는데는 꼭 필요한 테크닉이다.
"암튼 세아가 대신 떠봐줄까 하더라고. 그러면서 니 앞에서 일부러 친한 척 하자며……, 분명히 반응이 나올 거야 라면서 웃었어."
윤희가 상우와 세아를 연결시켜 줄까 하고 있던 그 때, 세아는 자신과 민형을 연결시켜 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아.
세아도 행복해질 수 있었는데…….
미안해, 세아야.
"우리도 이번 주말에 세아한테 가볼까……."
신호가 바뀌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한 민형의 말에 윤희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한 마디만은 결코 잊지 않는다.
"너만 바쁘지 않으면 얼마든지."
"그 말에 왠지 가시가 느껴진다?"
민형은 윤희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이 기회에 까놓고 말하자. 너랑 나랑 사귀고 우리가 놀이동산엘 한번 간 적이 있니? 아니면 저녁식사를 한번 제대로 했니?"
"아, 그게 불만이었던 거야? 알았어! 겨울 되거든 여행을 가자."
"싫어."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신호는 빨간 불로 변했다. 정말이지 너무 신호가 짧다, 우리나라 횡단보도는.
"왜?"
민형이 놀란 표정으로 손을 놓는다. 윤희는 몸서리쳐진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반은 농담, 반은 진심이다.
"혹시라도 거기서 또 끔찍한 꼴을 당하면 어떡해?"
"내가 옆에 있잖아. 뭐가 걱정이냐."
"더 걱정돼."
"그래서 안 간다 이거야?"
"안 가!"
민형은 쿡쿡 웃었다.
"단단히 삐지셨군, 마누라. 영양제라도 줘야겠다. 자, 눈감아."
"뭐? 너, 길거리 한복판에서 키스할 생각이야?"
"그게 뭐가 어때서. 말 안 했나? 언제 어디서건 하고 싶으면 한다. 그게 내 신조라니까."
"날 네 신조의 희생양으로 삼지 말아 줘!"
윤희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소리쳤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미뤄 보면 민형의 뻔뻔함은 거의 낯가죽을 강철 콘크리트로 만든 게 아닐까 의심되는 수준이었다. 자칫 방심했다간 바로 입술을 기습당할지도 모른다.
민형은 부드럽게 웃었다.
"언젠가 책에서 읽은 건데, 지구를 없애는 방법 알아?"
"무슨 소리야?"
이 인간이 또 무슨 꿍꿍이로 이래?
"해볼까? ……자."
민형은 그녀를 끌어당겼다.
"엇, 앙탈부리면 힘 빠지지. 자아, 눈을 감아."
"뭐?"
"제발."
그건 마법의 주문이었다.
제발.
그 한마디에 이끌린 것처럼, 윤희는 눈을 감았다.
"자, 지구가 사라졌지?"
정말이다. 둘이 끌어안고 눈을 감자, 지구가 사라졌다. 둘만이 존재하고 있다. 막 불어오기 시작한 초겨울 바람 속,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최고의 기분이었다.
으응, 길거리 한복판이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지구는 사라졌으니까.
그래서 윤희는 민형의 품속에서 눈감은 그대로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럼 이번엔 중력을 없애 줘."
민형은 바로 알아들었다. 그는 몸을 낮추고, 윤희의 머리를 끌어당겨,
……키스했다.
그리고.
입술에 입술을 포개자마자,
두 사람은 그대로 지구도 중력도 잃어버린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곳은 연인들만 갈 수 있는 특별한 세계.
지구도
중력도
고통도
미움도
오해도 없는
특별하고 특별하고 특별한 세계.
사족을 붙이자면, 그들이 무중력의 공간 속에 머문 시간은 그 자체로도 꽤 길었지만 실은 더 길어질 수도 있었단 이야기다. 저쪽 골목길 포장마차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BGM, 방실이의 '뭐야뭐야'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꽤나 진부한 살인사건, 엄청 진부한 연애사건/ Fin
럽펜에서 약 4일만에 초 스피드로 끝낸 글입니다. <진부살인, 진부연애> 시리즈의 제1작이기도 하죠. 물론 다음 글은 아직 쓰지도 않았지만요;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