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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98
19. 희망을 잡고서
방금 전에 켠 등은 지나치리만큼 밝았다.
“왜…….”
그 등 아래서 지해의 얼굴은 지나치리만큼 잘 보였다.
“왜 여기 온 거예요.”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투명하게 젖어 있었다. 마치 색이 변한 채 얼음 속에 웅크리고 있던 진홍루 같다……고, 우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오고 싶어서.”
“왜 그런 바보짓을 해요…….”
창고바닥을 포복상태로 기어온 우신의 얼굴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지해는 그 얼굴을 손으로 만지고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그녀는 뒤로 묶인 양손을 꽉 주먹 쥐면서 남자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땀으로 범벅이 되었지만, 그의 눈은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웃고 있었다.
“왜 사서 고생을 해…….”
“누나……?”
눈물이 끊임없이 솟아나왔다. 옆에 있던 규해가 놀란 듯 그녀를 살핀다. 그런 소년은 누나와 남자를 번갈아보더니 알아차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여느 때 같으면 놀렸을지도 모른다. 다만 때가 아니었다. 아까의 괴로움이 한 꺼풀 꺾였음에도 규해의 얼굴은 점점 고뇌의 그것으로 변해갔다.
아무도 죽을 거라고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입 밖에 내면 그것이 기정사실이 되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아…….”
우신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바지가 온통 피 빛으로 물들어 있는 걸 보면서 지해는 오열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눌렀다. 아픈 그에게 울음소리를 듣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콧잔등에 맺혀 있는 땀을 닦아주고 싶었다. 손으로 할 수 없으면 입술로라도.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은 그를 그런 방식으로 책망하고 싶었다.
“침착하게 들어.”
그 때 우신이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날 좀 도와 줘.”
‘무슨?’ 이라고 지해의 얼굴에 씌어 있었다.
“등 뒤로 돌아갈 테니 내 바지벨트를 풀어서 넘겨줘. 묶인 손목으로도 그 정돈 할 수 있을 거야.”
지해는 지친 얼굴에 의아한 기색을 떠올렸지만, 더 묻지 않고 우신에게 다가붙어 몇 번이나 실패한 끝에 겨우 벨트를 끄집어냈다. 까진 손끝을 한 채 안도감을 토해내는 그녀에게 벨트를 받으면서 그는 칭찬을 건넸다.
“잘했어.”
우신은 방금 받은 벨트 버클을 분해하고 재조립했다. 피를 너무 흘린 탓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 데다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하는 거라 여느 때보단 시간이 걸렸지만, 워낙 숙련된 솜씨라 2분 정도 지나자 버클은 제법 근사한 소형 나이프로 변신했다. 우신은 지해 뒤에 바싹 달라붙어 그녀의 팔목을 묶고 있는 로프에 매달렸다. 팔목이 저려서 미칠 것 같았지만 초조한 시간이 흐른 끝에 결국 그는 로프를 끊어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는 힘을 잃은 손에서 나이프를 떨어뜨리고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지해가 ‘하아…….’ 하고 긴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자유로워진 양손으로 재빨리 나이프를 잡더니 우신의 손목을 묶고 있는 로프를 잘라냈다. 그런 후엔 자신의 발목, 규해의 손목과 발목을 차례로 로프에서 해방시켰다.
“잠깐만요.”
지해는 우신과 규해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다리가 심하게 저리는 지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절룩절룩, 옆에 멍하니 앉아 있는 이진희에게 향했다. 그리고는 등 뒤에 쭈그리고 앉아 이진희의 팔목을 묶은 로프를 마지막으로 끊어냈다. 그 모든 작업을 하고 있는 동안 이진희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그저 지해가 하는 대로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이진희의 로프를 끊은 지해는 우신 앞으로 돌아왔다. 입고 있던 남방을 나이프로 길게 찢은 그녀는 그 천으로 우신의 상처부위를 단단히 묶었다. 악, 소리가 나올 정도로 아팠지만 우신은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규해가 그의 옆으로 몸을 옮겨왔다. ‘괜찮아요?’ 하고 힘없이나마 묻는 걸 보니 축 늘어져 있던 아까보다는 훨씬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여기서 나가야 해. 우리가 폭탄을 멈추는 건 무리야.”
“어떻게 나가요. 잠겼단 말이에요.”
소년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평소의 기가 강한 태도는 어디로 가고 완전히 자포자기한 모습이다. 지해가 그런 동생의 손을 꼭 쥐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지해는 규해의 손을 잡은 채, 신뢰와 미안함, 그 밖의 여러 가지 감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맑게 우신을 응시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보자.”
그녀가 떨리는 소리로, 그렇지만 용감하게 말했다. 우신은 그런 지해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도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미안……. 움직일 수가 없어. 저쪽에 창문 보이지? 저기 있는 타이어를 집어서 거기 바로 아래 쌓아주겠어?”
그 말을 들은 규해가 비틀거리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네!”
누나의 손길이 소년에게 마지막 버틸 힘을 불어넣은 모양이었다.
빗소리를 통해 창문이 저 위에 있는 걸 진작부터 우신은 알고 있었다. 좀 아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처음엔 흐릿할 정도로 약한 소리만을 내던 비는 어느 샌가 창문을 두들길 정도로 심한 폭우로 발전해 있었다. 우신은 그 빗소리를 들으며 지혈자리를 고쳐 묶는 지해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는 긴장과 초조함이 역력한 표정이었지만 그에게 미소했다.
그 때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옆에서 들려 두 사람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눈에 들어온 광경에 경악했다.
“뭐 하는 거예요!”
지해가 황급히 소리쳤다.
그들의 시야 끝에 이진희가 있었다. 다리를 못 쓰는 소녀는 체력이 거의 바닥난 건지 거의 기어가다시피 몸을 움직여 권총을 막 붙잡은 참이었다. 아까 구한열이 버리고 간 물건이었다. 그것을 집는 소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녀는 조용한 동작으로 권총을 집고 안전장치를 풀었다. 그 모습에는 왠지 의식을 치르는 승려처럼 경건한 분위기가 존재했다.
킬러의 여동생은 자신의 머리 위에 총구를 갖다댔다.
“막아!”
우신이 소리쳤다. 지해는 그 말에 반응한 것처럼 재빨리 소녀를 향해 몸을 움직였지만, 그러나 한 발 늦었다!
“안돼!”
타앙!
지해가 비명을 질렀을 때는 이미 방아쇠가 당겨진 뒤였다. 스스로 최후를 맞은 여동생의 불쌍한 몸은 자신의 오빠 위로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지해는 입을 가린 채 간신히 울음을 막았다. 그런 그녀의 몸을 우신은 말없이 끌어당겨 안았다. 지해는 우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숨겼지만, 이미 범벅이 된 얼굴 위로 또 굵은 한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운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낸 지해는 감정을 누르려는 것처럼 벌떡 몸을 일으켜 동생 옆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자신도 타이어를 들어 먼저 쌓은 위에 올리기 시작했다.
타이어의 언덕 위로 보이는 건 쇠창살도 없는 말 그대로의 유리창뿐인 창문이었다. 저 창문은 아마 지붕으로 통해 있을 것이다. 우신은 점점 힘을 잃어가는 몸을 반쯤 일으켜 남매의 곁으로 다가갔다. 자꾸 흐려지는 의식을 가누는 데만도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 들었다.
“올라가.”
열과 고통 속에서도 우신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지해가 반문했다.
“그쪽은요?”
“나도 갈 거야.”
두 사람은 남자의 말에 자신들이 방금 쌓아올린 타이어의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은 꽤 높아 언제 쓰러질지 모를 정도로 위태로웠지만 두 사람이 오를 때까지 어떻게든 버터 주었다. 지해는 간간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신을 보고 있는 우신을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봤지만, 사실 그녀 혼자만을 지탱하기도 힘들 터였다. 우신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어보였다.
타이어 산의 정상에 다다르자, 어려도 남자인 규해가 먼저 필사적으로 창 가장자리를 붙잡고 매달려 몸을 올렸다. 지붕으로 먼저 나간 그는 아래로 손을 내밀어 자신의 누이의 팔을 붙들고 위로 올라서는 걸 도왔다.
우신이 무거운 몸을 움직여 타이어 산을 오르기 시작한 건, 두 남매가 천장의 창문을 통해 지붕 위로 몸을 올린 걸 확인한 후였다. 그는 어금니를 악물고 이미 통증조차도 반쯤 줄어버린 왼쪽다리를 무겁게 끌며 타이어를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은 그의 마지막 의지였다. 단단한 타이어 끝이 다리를 스칠 때마다 불에 타는 듯한 아픔에 이대로 죽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몸의 근육을 움직일 때마다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렸다. 살아서 통증을 느낀다는 자체가 버거웠다.
마지막 한단을 밟았을 때 타이어의 산이 꿈틀하더니 한꺼번에 무너졌다. 우신은 초인적인 의지로 창에 매달렸다. 위에서 뻗어준 규해와 지해의 손을 잡고 방금 문을 연 창문을 통해 창고 지붕 위로 간신히 올랐을 때.
“…….”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생각 자체를 잃었다.
“틀렸어…….”
규해가 정신 나간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후둑…….
머리며 몸이며 전부를 삼킬 것처럼 누르며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폭우는 아니지만 시계(視界)를 가리는 비에 처음엔 잘 보이지 않던 앞이, 아니 아래가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와 바깥 공기를 접하니 일시적으로나마 안심이 되어야 하는데, 역으로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이 그들의 몸을 괴롭게 압박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후둑…….
희망을 순식간에 짓누르는 절망감에 생각이 차마 나지를 않았다. 다른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서로 몸을 맞대고 두터운 콘크리트 지붕에 기댄 채 어찌할 바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갇혀있는 창고는 저 서명의의 아지트와 비슷한 자리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 때보다 더한 악조건인지도 몰랐다.
그들이 있는 창고는 외딴 절벽에 세워져 있었고, 그 절벽과 통해 있는 길은 단 하나ㅡ 그러나 그 단 하나의 길은 이미 쓸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 길이란 다름 아닌 콘크리트 다리였는데, 그 다리는 이미 무너져 있었다. 구한열이 나가자마자 들린 폭발음은 다리를 폭파하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참으로 용의주도한 놈이었다. 우신은 흐릿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지붕에 쓰러지듯 몸을 기댄 그의 시야 아래로 검푸른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바다 위에 막 저물기 시작한 저녁 하늘 속, 어둑하게 서려 있는 비구름 사이로 언뜻 달 같은 것이 엿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지붕에 갓 올라섰을 때보다는 연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사방의 시야를 가리는 가느다란 빗줄기 때문에 흐릿하게 밖에 보이지 않았다.
제법 높은 위치다.
방법은 단 하나, 이 빗속을 이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수밖에 없다.
과연 그런 무모한 짓을 하고도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 의심은 가지만 잠시 동안만 일부러 놓아줄 작정이야.
우신은 사무실로 돌아가기 전에 나눴던 치현과의 대화를 생각했다. 아마 녀석은 반드시 구한열의 꼬리를 잡아낼 것이다. 이미 공항에 잠복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뉘앙스의 말을 했었으니까. 녀석이라면 아마 구한열이 비행기를 타기 전에 그를 잡아낼 수 있을 테지. 그렇지만…….
그런 친구조차 우신 자신의 위기는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지해와 규해, 그리고 우신을 구해낼 수 있는 자는 그들 자신밖에 없었다.
그런데…….
가늘게 쏟아지는 비 때문일까.
우신은 아까부터 시야가 흐린 회색으로 변한 걸 느끼고 있었다. 눈앞의 모든 광경이 어느 순간부터 모노크롬으로 변해 있었다. 땀이 흐르는데 몸이 덥다기보다 비로 인해선지 몸이 식어 내려가는 기분이다. 줄곧 뜨겁게 불타고 있던 다리의 환부가 점점 차갑게 얼어가고 있었다.
지혈도 소용없었던 것일까. 계속 피가 외부로 흘러나와 비에 섞여간다.
후둑…….
소리만이 고막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 소리도 이어졌다가 끊어졌다 하고 있다. 지붕에 올라섰을 때 순간적으로 맡았던 비 냄새도 이젠 흐릿했다.
무력감.
도대체 얼마만큼의 피를 흘린 걸까.
춥다. 싸늘하다. 몸이 차츰 식어가는 걸 느낀다.
눈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주먹이 잘 쥐어지지 않는다.
도저히 안 되겠어……. 도저히 이 이상은 움직일 수 없다.
바다에 뛰어내린 것 갖고 바로 죽지는 않겠지. 하지만 이 몸으로는 혼자 버티는 것도 버거운 지해 남매의 방해물이 될 것이다. 두 사람을 방해할 수는 없다. 두 사람은 살아줬으면 좋겠어. 우신은 마음을 정했다. 자신의 손을 꼭 쥐고 있는 지해를 바라보자 그녀는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했다.
“뛰어내려요.”
“누나! 미쳤어? 여기서 뛴다고? 이 빗속을?”
“달리 방법이 없잖아. 이대로 있으면 우리 모두 죽어.”
벌써 30분 가까이 지나 있었다. 구한열의 말이 거짓일 리 없었다. 그가 그들을 살려둘 리가 없는 것이다. 지해의 입술은 결연하게 다물려 있었다. 이미 결심을 굳힌 표정이었다. 대조적으로 규해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못 뛰어. 여기서 어떻게 뛰어. 난 못 뛰어…….”
“뛸 수 있어. 뛸 수 있어. 뛰어야 해.”
지해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서 우신은 규해를 향해 희미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사실 규해가 보이는 건 아니었다. 우신의 시야와 머릿속은 완전히 흐려져 있었다. 지금의 움직임은 거의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결과였다. 온몸을 가늘게 적시는 비를 느끼면서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래, 넌 뛸 수 있어. 꼬마……. 두 사람……, 할 수 있을 거야.”
“당신은요?”
지해가 그를 약간 놀란 듯이 응시했다. 우신은 힘겹게 중얼거렸다.
“난……, 움직일 수 없어.”
“왜요? 왜……?”
“아까……부터 앞이……, 잘 보이질 않아……. 힘이…….”
엄지와 검지를 맞대어 만들 수 있는 원 정도의 크기만 남은 시야 안에서 지해가 그를 보며 뭐라고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리조차도 잘 들리지 않아 우신은 그저 무작정 중얼거림으로 대답했다. 자신의 입에서 소리가 나는지조차도 실은 알 수 없었다. 한계다.
“미안…….”
힘이 빠진 만큼 통증이 엷어진 탓에 오히려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빗속에서 이렇게 잠이 들 수 있다는 건 제법 낭만적인 건지도 모른다. 통증이 줄어들고 있다는 건 잠이 온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므로. 나쁘지 않다…….
“모르겠어요?”
체력이 완전히 고갈된 채 지붕에 겨우 기대 있는 그의 귀에 그런 속삭임이 희미하게 들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당신이 좋아요…….”
그 말이 귀를 파고들었다고 생각한 건 그저 자신의 착각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신은 알고 있었다. 눈 앞, 여자의 눈에 보석보다 아름다운 눈물이 흐르고 있단 사실을. 자신의 손을 붙잡고 보석처럼 울고 있단 사실을.
젠장, 엄살은 떨고 싶지 않은데.
아니, 엄살을 부릴 기회조차 남아 있지 않잖아.
그렇게 울지 마, 아가씨. 마지막까지 지켜주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지금으로선 무리인 것 같아. 그래도 넌 살아줘. 혼자서라도 살아남아 줘.
우신은 자석을 매단 것 같은 눈꺼풀을 사르르 내려감았다. 비도 내리지 않는 이공간에 붕 떠 있는 듯한 미묘한 감각. 이대로 기댄 채 어둠의 세계로 내려가면 된다. 분명 이걸로 편안해질 거다. 힘들지 않아…….
그 때였다.
“말했잖아!”
커다란 외침이 고막을 찢은 건.
반쯤 잠들어 가는 그를 필사적으로 누군가 건드렸던 건.
“말했잖아! 희망은 절대 잃어선 안 되는 거라고, 당신이 그랬잖아!”
지해는 그의 몸을 붙들고 울음 섞인 외침을 외치고 있었다. 그녀는 뭔가 더 외치려고 했지만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신 그녀는 남자의 식어가는 입술에 혼신의 힘을 다해 키스를 떨어뜨렸다. 비가 얼굴이며 머리카락을, 그리고 몸을 온통 적시고 있었지만 그녀는 느끼지 못했다.
“제발……! 일어나요! 민우신! 일어나!”
이제 채 1분도 남지 않았다.
그녀가 울고 있다. 그녀가 일어나라고 말하고 있다.
가슴이 막혀서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울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그랬다. 그들에게는 판도라의 상자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을 배신하지 않고 붙어 있던 희망도.
빗방울이, 빗줄기가, 희망처럼 세 사람의 몸을 감쌌다.
도저히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우신의 손가락이 순간, 움직였다. 지해는 희미하게, 그러나 마지막 힘을 다하여 자신의 손을 잡는 상대의 손가락을 느꼈다. 저승으로 넘어가는 강에 몸을 담근 것처럼 차갑지만 그러나 다시 온기를 되돌리려는 의지의 움직임, 정말로 강인한 그의 손가락을.
그녀는 울면서 웃었다. 웃으면서 그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깍지를 만들었다.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처럼. 그의 손가락이 마치 미소를 전해줄 것처럼 그녀의 손가락을 더듬는 걸 깨달았다. 눈물로 앞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그들은 이제 아래로 추락하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뒤로 물러서는 걸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에.
폭발음 속에서도 시들지 않을 뭔가를 찾아,
연인들은 그렇게 서로 힘을 다해 깍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힘을 합쳐 판도라의 상자 속에 있던 희망을 잡았다.
에필로그로 이어집니다.
아마 오랜 공백을 갖지 않고 금방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다음 번에 갖고 돌아올 글은 인생미학, 아니면 잃어버린 황녀를 위하여 둘 중 하나가 될 겁니다. 잔혹한 여름이라는 추리물을 하나 더 올릴까 하다가 지나치게 한쪽으로만 가는 것 같아서 되도록이면 전형물을 올리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잃어버린 황녀를 위하여가 될 것 같은데, 이렇게 예고해 놓긴 했지만 완전히 다른 제4의 글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군요.
물론 다른 자리에 올리다가 만 얼음에 마비되다도 조만간 재개하겠습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했죠. 가장 독촉이 많았던 글인데(라기보다 다른 글들은 독촉이 거의 없었죠), 어쩌다가 보니(-_-). 하여튼 좀 개과천선하도록 노력합죠. 글 뿐만 아니라 현실서도 좀 달라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벌써 2004년의 절반이 흘러갔잖습니까.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