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14. 순백의 눈물





- 그쪽도 이용당하고 있는 주제에.



처음부터 궁금했다. 이 사건이 하나의 희비극이라면, 자신의 역할은 대체 무엇인 것일까. 규해의 마지막 한마디가 의문을 다시금 재생시켜 주었다.

‘대체 나는 어떤 의미로 이들의 게임에 참가하고 있는 것일까.’







“묻고 싶은 게 있어.”

“……네.”

우신의 차 속에서, 지해는 어딘가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머니와 구한열의 관계는 언제부터였지?”

하도 울어서 눈이 새빨개진 그녀에게 그는 찬찬히 물었다. 옆에서 흡,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지해는 아까 우신이 입술을 댔던 얇은 피부에 난감함이 어린 낯빛을 떠올리며 조그맣게 대답했다.

“잘 몰라요. 하지만 최소한 아빠가 살아계실 무렵부터였어요. 솔직히 말하면……, 난 엄마가 아빠를 만나기도 전부터 그 두 사람은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을까 의심하고 있었어요.”

우신은 구한열을 생각하고 있었다.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외모. 유하연의 집을 제집 드나들 듯이 하고 있던 남자는 권총까지 불법소지하고 있었다. 다리의 상처는 어느 정도나 나았을까.

어찌되었건 구한열의 존재가 민감한 나이인 지해와 규해 남매에게 각자 나름대로의 상처를 주었으리란 사실은 익히 짐작이 갔다.



- 동정은 상대를 봐가면서 해요.



갑자기 지해가 했던 말이 떠올라, 우신은 핸들을 그러쥐었다. 카 오디오가 떨어져 나간 차안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심심하고 어색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아까 자신이 했던 행동이 다시 떠올라서 우신은 입술을 혀끝으로 축였다. 왠지 목이 말랐다. 물을 마시고 싶었다.

자신의 충동에 대한 책임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해결책은, 일단 일을 끝내고 나서 찾기로 하자. 우신은 속으로 그렇게 말하며 핸들을 틀었다. 그런 그는, 하지만 조수석에 앉아 있는 지해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유하연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들을 맞이한 유하연의 얼굴은 매우 피곤해 보였다. 처음 보았을 때의 고양이처럼 부드럽고 날렵한 매력을 주던 표정과 움직임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의 그녀는 그저 지친 30대여자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는 우신과 지해가 함께 온 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지해는 놀랄 만큼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차안에서의 어색한 소녀의 표정은 어디로 가고, 의연하게 허리를 편 어른의 자세로 돌아와 있다.

유하연은 그런 지해와 우신을 번갈아보다 날카로운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탐정님도 젊으신 분이니까.”

“그저 같이 왔을 뿐이에요.”

지해는 야무지게 말하고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우신은 그런 지해를 따라서 거실로 향했다. 유하연은 딸이 한 말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으쓱하더니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소파에 앉았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한가지만은 확실했다. 이쪽의 정신상태도 그녀의 아들과 마찬가지로 그리 정상은 아니었다. 차가운 얼음 동상 같은 태도를 하고 있는 지해 옆에 자리 잡고 앉아, 우신은 맞은편에서 눈을 내리깔고 있는 유하연을 바라보았다. 그 앞가슴에 목걸이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우신은 그것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진홍루?

“아니, 아니에요.”

유하연은 손을 들어 초조한 몸짓으로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이미테이션이에요. 도통 안정이 안 되서…….”

또 이미테이션인가. 진짜보다 더 진짜 같군.

“규해가 전에 잃어버렸다는 그겁니까?”

우신이 묻자, 유하연은 ‘당신이 그런 것까지 알아?’란 식의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더니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대답했다.

“아뇨. 잃어버린 건 잃어버린 거고……, 하나 새로 만들었죠.”

허스키한 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유하연을 보는 지해의 얼굴에는 혐오의 빛이 뚜렷이 떠올라 있었다.

“아드님에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규해가요?”

유하연이 소파에 눕다시피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뭐라던가요? 네?”

“별말은 없었고, 그저 잘 있다고 식구들에게 알려달라고만 하더군요.”

우신은 규해가 서명의를 죽였다는 사실은 일단 알리지 않기로 했다. 옆에 앉아 있던 지해는 그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았다. 우신에게 뭔가 생각이 있으리란 걸 알아차린 눈치였다.

“산속에 있는 별장이란 어딥니까.”

“네?”

“규해가 거기 숨었었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나왔지만…….”

유하연은 주름이 팍 질 정도로 미간을 찌푸렸다. 불쾌한 낯빛이었다.

“죽은 남편이 산거에요. 남편이 죽은 후론 도통 들르질 않아서…….”

“들르지 않았다고요?”

갑자가 지해가 외쳤다.

“그럼 뻔질나게 들락거린 남녀 한 쌍은 대체 누구랑 누구죠?”

유하연은 목걸이에 손가락을 대고 초조한 동작으로 만지작거리면서 눈을 치켜뜨듯이 지해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태도가 지친 40대 여자로부터 고양이과 짐승처럼 매끄러운 인상으로 돌아왔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지해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우신은 그런 그녀에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었지만 참고, 유하연에게 별장 주소와 가는 길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10분 후, 두 사람은 유하연의 집을 나왔다.

나오자마자 지해는 땅을 세차게 걷어찼다.

“내가 왜 집을 나왔는지 알겠죠?”

“그래.”

우신은 진심으로 대답했다.







유하연의 집을 나온 두 사람은 입맛은 그리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점심을 먹었다. 그런 뒤 바로 차를 몰아서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어둠이 까맣게 내려앉기 직전이었다.

울창한 산림에 둘러싸인 작은 별장엔 확실히 비밀스런 분위기가 있었다. 우신은 별장 앞에 재규어를 멈추고 시동을 껐다. 차에 탄 뒤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지해는 여전히 말없이 안전벨트를 풀고 그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사각거리는 숲의 속삭임에 둘러싸인 채 잠시 서 있었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와 나무 사이를 스쳐가는 바람소리가 바로 근처에서 들렸다. 산속이라 그런지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다. 왠지 으스스한 느낌까지 든다고 우신은 무심히 생각했다. 그건 아마 지금도 별장 안에 있을 지도 모를 시체를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고집을 부려 우신을 쫓아온 지해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몸을 바싹 움츠렸다.

“그냥 여기 있을래?”

“아뇨. 같이 들어갈게요.”

“내가 부탁한다면?”

지해가 그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여기 남아서 차를 지켜 줘. 차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알았지?”

지해는 우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갑자기 몸을 뻗어 그의 볼에 키스했다. 우신이 순간적으로 놀라서 몸을 경직시키고 있는데, 그녀가 입술을 떼더니 그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며 그에게 말했다.

“알았어요. 도움이 필요하면 부르세요.”

“고마워.”

우신은 그녀에게 미소와 함께 차 키를 건네주고 몸을 돌렸다.

조심스럽게 집 가까이로 다가갔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주위를 한바퀴 돌아보았다. 창은 전부 세 개였지만 빛도 새어나오지 않았고, 누가 있는 것 같은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우신은 재킷안의 권총을 확인하고 문을 열어 집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면서 그의 눈이 뭔가를 발견했다.

문이 완전히 열렸을 때 그 뭔가의 정체가 확연히 드러났다.

그것은 인간의 팔이었다.

우신은 침착하게 팔을 구두 끝으로 건드려보았다. 이미 사후경직이 진행된 지 오래된 팔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바닥에 흩어진 피의 흔적은 검붉게 굳어져 있었다. 도망치려다가 등 뒤에서 총격당한 듯한 모양을 하고 있는 시체 옆에 쭈그리고 앉아 얼굴을 확인했다.

물론 서명의였다. 그는 등에 구멍이 뚫린 건 물론이고, 대머리로부터는 뇌수가 흘러나와 허연 가루처럼 굳어진 끔찍한 꼴을 하고 있었다. 우신은 숨을 가볍게 토해내고 근처 마루를 뒤져보았다.



- 머리에 두발, 등에도 두발 맞았으니 죽었을 게 확실해요…….



규해의 말대로 탄피의 흔적은 정확히 네 개였다. 그것을 확인하고 그는 안쪽에 있는 방으로 발을 디뎠다.

그곳은 부엌이었다. 아니, 정확히 부엌의 형태를 하고는 있었지만 누가 쓴 것 같은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뭐, 밀회의 장소로 쓰였다면 부엌을 쓸 이유도 없었겠지, 하고 우신은 생각했다.

바로 그 때였다. 갑자기 위잉……, 하고 순간적으로 숨을 덜컥 내려앉게 만드는 기계음이 들렸다. 우신은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고야 그 소리의 근원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 작은 부엌에 비해서 지나치게 크다 싶을 정도로 대형 사이즈의 고급 냉장고였다.

그리 쓴 흔적이 없는 부엌에서 위화감마저 들 정도의 냉장고 앞에 선 채 우신은 조심스럽게 냉장실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아무 것도 없었다.

“뭐야, 이건. 전기 낭비 아냐?”

하다못해 맥주라도 들어있을 줄 알았던 우신은 힘이 풀려 중얼거리면서 이번에는 냉동실 문을 열어보았다. 비어 있는 냉장실과는 달리, 냉동실에는  냉동만두며 냉동된 고기가 들어 있었다. 제빙기에 얼음은 없었다. 그런데도 얼마나 온도를 내렸는지 냉동실 측면에는 지나칠 만큼 두꺼운 벽을 만든 얼음이 빽빽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쓴 흔적이 거의 없는 부엌에서 돌아가고 있는 냉장고.
몇 개 안되는 냉동식품을 넣어놓고 지나치게 온도를 내린 냉동실.

이건 뭔가…….

위화감이 지나치다.

우신은 냉장고 문을 연 채 가만히 얼음을 응시하고 있었다. 뭔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했다. 심장이 쿵쿵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혼란스런 머릿속을 찬찬히 정리하는 동안, 아직 미처 맞춰지지 못한 퍼즐의 한 조각이 제자리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 진홍루는요, 기온에 따라서 색이 변하는 보석이에요. ……아주 추운 날, 그러니까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 보통의 다이아몬드 색, 투명한 흰색으로 변한다는 말이에요. 굉장히 반짝거리죠.

- 규해가 훔쳤던 건 이미테이션이었어요. 그 땐 겨울이었고 규해는 그걸 바깥에 갖고 나갔는데도 색이 변하지 않았다고 했어요.



이미테이션.
규해가 처음에 훔쳤던 건 이미테이션이었다. 두 번째 훔친 게 진품.



- 이미테이션이에요. 도통 안정이 안 되서…….

- 아뇨. 잃어버린 건 잃어버린 거고……, 하나 새로 만들었죠.



두개.
이미테이션은 하나가 아니라 두개였다.



- ……저어, 민우신 씨……, 되세요?



규해는 왜 자신에게 전화를 건 것일까. 굳이 전화를 걸어야 할 이유가 달리 있었던 것일까? 뭔가 노리는 것이 따로 있었던 것 아닐까?

그게 아니면, 뭔가를 부탁하기 위해?



- 첨에는 보통 다이아몬드처럼 투명하길래 진홍루가 아닌 줄 알았어요. 근데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집에 들어온 그 여자가 소파에 드러눕는데, 점점 색이 변하더군요……, 빨갛게.



진홍루는 기온에 따라 색이 변하는 보석…….

우신은 양복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냈다. 쏘기 위해서가 아니라, 냉동고 안의 얼음을 부수기 위하여. 그는 총 끝으로 얼음을 부수기 시작했다.



- 굉장히 반짝거리죠. 정말 예쁘긴 해요. 그게 이미테이션과 다른 점이기도 하구요. 이미테이션은 그저 붉은 색이지, 절대 그 색깔이 다르게 변하진 않으니까요.



어느 순간,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흘러내려 바닥에 부딪쳤다. 우신은 허리를 굽혀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무언가가 얼음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아마 얼음이 녹으면 더 아름답게 빛나지 않을까. 순백의 눈물처럼 아름답게, 순백의 눈물처럼 투명하게. 그리고 어느 순간, 붉은 피눈물로 변모할 것이다. 청순하면서도 잔혹한 여인처럼.

그의 손안에 시가 20억 이상의 값어치를 가진 보석,
진홍루가 있었다.



계속.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08)

댓글 '9'

리체

2004.06.28 22:59:23

왜 이미테이션이 두개지?

Junk

2004.06.28 23:01:54

유하연이 현재 갖고 있는 것 하나, 그리고 규해가 어릴 때 훔쳤다가 잃어버린(잃어버렸다고 했던) 것 하나. 역시 설명 부족인가;

리체

2004.06.28 23:11:42

아, 그렇군. 난 규해가 훔쳤다가 되돌려줬다고 읽었나봐..바보..ㅡ0ㅡ

BubBles

2004.06.29 01:38:02

읽으면 읽을수록 우신이 저의 취향이라는 강력한 확신이..ㅋㅋ. 처음엔 차갑게만 봤는데
갈수록 귀엽게만 변해가는 모습 너무 좋아요.

릴리

2004.06.29 10:22:23

들고 지해랑 튀어!!................;;;

셔니

2004.06.29 15:21:10

점점 미궁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어요... 규해가 일부러 알려주려고 ??? 기대 기대....

Junk

2004.06.30 02:26:43

BubBles님, 감사합니다. 우신이 너무 행복해 할 말씀이셨어요.
릴리님, 하하하... 좋은 생각이십니다^-^;
셔니님, 예. 규해가 일부러 알려주려고 전화를 했던 겁니다.

D

2004.07.17 10:39:41

아. 아쉬워라... 오늘은 여기까지 읽어야겠네요. 도무지 앉아서 집중하고 읽을 시간을 안주네요... 진홍루는 찾았네요.

은기

2005.01.18 23:03:41

지해는 정말 아무 연관이 없을까요????   [0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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