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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98
6. 1 puzzle, more pieces
언뜻 보면 ‘강력계’의 이미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눈앞의 서민호란 남자는 그저 말끔하게 생긴 보통 샐러리맨의 이미지를 하고 있었다. 그야 공부를 잘할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처음 봤을 때 우신은 그로부터 지금 같은 위압감은 찾지 못했다. 그저 선하게 생긴 공부벌레 타입이랄까. 어디까지나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인상이다. 그런데.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검사의 음성은 지극히 정중했음에도, 우신은 그래서 더 초조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니, 그럴 이유가 없다. 그런데 왜…….
취조실에 둘만 앉아 있어서 그런 걸까?
“코코아 드시겠습니까?”
민호는 보온병을 들어 보였다.
“커피가 아니라 코코아요?”
“밤중 커피는 위에 안 좋습니다.”
검사는 그렇게 말하더니 종이컵에 무작정 부어 내밀었다.
“그렇긴 하죠. 잘 먹겠습니다.”
한여름의 코코아라. 별로 달갑지는 않았지만 우신은 일단 받기로 했다. 한 모금 마셔보니 제법 괜찮다. 뜨끈하고 달짝지근한 것이 기분 좋았다.
“맛 좋은데요? 부인 솜씬가요?”
코코아를 마시던 민호가 조그맣게 웃는 것 같았다. 컵에 입이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왠지 그렇게 보인다.
“여동생입니다. 와이픈 요즘 바빠서 집에도 못 들어오고 있거든요.”
“직업이 뭐길래……, 검사보다 더 바쁜가요?”
“삐까빠까죠. 디자이넙니다. 그러잖아도 몸이 무거운데…….”
“임신?”
우신은 배를 가리켜 보였다. 민호가 조금 걱정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신은 눈을 깜박였다. 주변에 제 나이에 맞춰 장가를 가고 아기를 낳는 사람이 워낙 없다보니 왠지 신기하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검사님.”
우신은 선수를 치기로 했다.
“일이 넘치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관심이 많으시죠?”
민호는 눈만 약간 가늘게 해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구한열의 기소는 제가 맡았습니다.”
“그렇군요.”
우신은 할 말이 없어졌다.
“물론 불기소처분으로 넘어갈 수도 있죠. 총을 불법 소지한 건 제쳐두고 ‘살인’에 관해서는 말입니다. 일단은 정당방위에 가까우니까요. 회칼에 총……이란 부분이 과잉방위이긴 합니다만 그 이전에,”
검사는 열려 있던 보온병의 뚜껑을 닫았다.
“제가 이 사건에 관심이 있는 건 구한열 때문이 아닙니다.”
“김성민이 비혈파 하수이기 때문에……?”
“아시는군요.”
비혈파는 청현회 같은 최강은 아니지만 제법 큰 조직이다. 게다가 다른 대형조직들이 점차 양성화되면서 슬슬 손을 놓기 시작한 ‘매춘, 약, 밀수’ 세 가지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최강 조직 못지않은 활약을 보이고 있었다. 보스의 이름은 이후준. 최근 대형선박까지 건조해, ‘바다 위에서의 카지노’ 붐을 일으킨 바로 그 장본인이었다.
“김성민은 조직에서도 완전아랫줄 아니었습니까? 대형문제라기엔…….”
“폭죽 때문입니다.”
민호가 말했다.
“이 얘기는 사실 표 형사님이 하셔야 할겁니다만, 이 자리를 빌어 제가 말씀드리도록 하죠. 1년 전의 폭발사고를 기억하시나요?”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어찌 잊을까 보냐.
우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반용수란 남자도 아십니까?”
“이름은 들어봤죠.”
“그가 폭발사건의 용의자였다는 것도?”
“압니다.”
모를 수가 없다. 그것은 워낙 유명한 사건이었으므로. 한낮, 레스토랑의 폭발사고. 열 명이 넘어가는 사람이 죽었고 그 중에는 아이도 있었다. 그 때 반용수는 사건의 강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그는 외국에까지 이름이 알려진 폭탄의 명수였다. 물론 그 지식을 가지고 나쁜 일을 한 건 아니다. 그에게는 그 자체가 생업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를 경찰이 의심한 이유는, 폭탄에서 풍기는 향기였다. 그가 만드는 폭탄에는 항상 특유의 독특한 향이 났다. 일부러 그런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예외가 없었다.
그리고 그 폭발사고 현장에 있던 폭탄 파편에 같은 향기가 남아 있었다. 반용수의 폭탄에서 나는 것과 정확히 같은 향기가.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바로 반용수가 폭발사고의 범인이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는 없다. 하지만 표치현을 비롯해서 담당 형사들은 모두 그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하지만 반용수는 무죄로 판명되었다. 반용수에게 불리했던 상황은 최고의 변호사와 은밀하게 이루어진 물밑 거래를 통해 완벽하게 반전되었던 것이다. 반용수는 풀려나고 사건은 미궁으로 남았다. 그리고 1년이 흘렀다. 죄 없이 죽어간 시체들과 한을 품고 남겨진 유족들을 뒤로한 채.
“같은 향기라고 하더군요.”
민호는 짧게 말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그리고 반용수는 현 비혈파의 핵심멤버죠. 표면에 나서지 않을 뿐.”
“우연의 일치 아닐까요? 아니면 일부러 반용수가 범인으로 의심받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일 수도…….”
“바로 그 변론에 의해 놈은 도망쳤지요.”
낮게 내리누르는 목소리. 그 속에 숨겨진 격한 분노.
……아.
그 때의 검사가 이 사람이었나.
납득이 간다. 자존심에 지워지지 않을 생채기를 남겼겠지. 만일 이번에 증거를 잡는다면,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패배감을 깔끔하게 지울 수 있을 것이다. 좀처럼 얻기 힘든 기회였다. 우신은 이제서야 서 검사가 집착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다.
“검사님은 1년 전 폭발사건과 이번 일이 관계있다고 확신하시는군요.”
민호는 쓰게 미소했다.
“증거는 아직 없죠. 하지만 지나치게 겹칩니다.”
확실히.
“그쪽의 생각은 어떤가요?”
그것이 바로 다름 아닌 검사가 하고 싶은 말인 듯 했다. 우신은 조금쯤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1년 전에 말입니다, 반용수를 잡으려던 이유는 놈이 비혈파와 관련이 있다는 심증이 있어서였겠지요?”
“당시 비혈파와 적대관계에 있던 쌍봉파 간부를 노렸던 거였으니까요. 정작 노렸던 장본인은 운 좋게 폭발 몇 분전에 레스토랑을 나왔지만. 덕분에 반용수가 범인이란 증거를 또 하나 놓쳐버린 셈이었죠.”
“혹시 다른 사람을 노렸다는 생각을 해 보신 적 없습니까.”
“예를 들면?”
“그 레스토랑에 있는 사람이 죽음으로서 이익을 얻는 또 다른 사람. 그 이익이란 거액의 보험금……, 그리고 죽은 사람이 갖고 있던 보석……같은 겁니다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보신 적, 검사님은 없으셨나요?”
민호는 눈썹을 가볍게 찌푸렸다.
“지금 얘기……, 의뢰인을 의심하고 계시군요. 표 형사님도 같은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당시엔 조직간의 대결이란 게 명백해 보였으니까요. 그 뒤에 곧바로 쌍봉파 보스가 죽었죠. 최고급 킬러의 손이 확실하다 싶을 정도로 흔적 없이 깔끔하게 말입니다.”
“음…….”
저절로 입에서 신음이 나왔다.
흩어진 퍼즐. 비슷한 색의 조각들이 너무 많다.
우신의 머리가 다시 아파 오기 시작했다. 혀끝에 남아 있는 코코아의 단맛이 갑자기 쓰디쓰게 변한 것처럼 느껴진다.
일단 자고 생각해 봐야겠다고 그는 결론지었다.
어둑한 복도.
“……?”
우신은 걸음을 멈췄다. 한숨을 쉬고, 입을 연다.
“정말 눈에 뵈는 게 없는 아가씨로군. 이 밤중에…….”
어둠 속, 쭈그리고 앉아 있던 그림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왜 이렇게 늦은 거죠? 엉덩이 아파 죽는 줄 알았잖아.”
지해는 아까 낮에 본 그 차림 그대로였다.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어서 어둠과 거의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다. 그래도 턱만은 오만하게 치켜들고, 눈은 강하게 우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 사무실 앞에서 뭐 하는 거야?”
“뭐하긴요. 그쪽을 기다리고 있었죠.”
그녀는 다리가 저린지 얼굴을 가볍게 찌푸리면서 대답했다.
“아까 우리 깔끔하게 굿바이 한 거 아니었던가?”
우신은 차갑게 말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냉랭하게 그지없을 정도의 목소리다. 지해는 원망스런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대체 여긴 왜 온 거야?”
“들여보내 주면 얘기할게요.”
말투는 딱딱했지만, 표정은 애처롭게 떨고 있는 어린아이의 그것이었다. 적어도 우신의 마음을 흔들어놓을 만큼은.
“와.”
우신은 한숨을 쉬고 문을 열었다.
사무실 안쪽에 그의 집인 개인공간이 있었다. 부엌, 그리고 부엌에 붙어 있는 2인용 테이블, 작은 거실, 싱글베드와 책상, 의자가 놓여 있는 침실. 불필요한 물건은 전혀 없는 공간이다.
“갈아입을 옷 같은 거 없어요?”
뻔뻔하게도 지해는 거실에 선 채 그렇게 물어왔다.
“없어.”
우신은 전혀 동요치 않고 대답했다.
“그럼 할 수 없네요, 내 알몸을 보여주는 수밖에.”
“지금 장난하잔 거야?”
냉장고 문을 열고 캔 맥주를 꺼내던 우신은 이내 동작을 멈췄다. 지해는 소파 뒷벽에 몸을 기댄 채 똑바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장난 아니에요. 난 하루종일 입었던 옷을 또 입고 자는 건 딱 질색이고 게다가 이 원피스, 한번 넘어지는 바람에 흙이 잔뜩 묻어버렸어.”
“그게 요점이 아니잖아. 여기서 잠을 자겠다구?”
“그래요. 하룻밤만 거실에서 재워주면 안돼요? 정 힘들다면 사무실 소파라도 상관없는데.”
“자기 집 놔두고 왜 하필 여기지?”
“…….”
침묵.
약 3초간, 강한 시선의 교차.
그리고 그녀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거기……, 경찰이 있었어요.”
우신은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고, 흐트러진 그녀의 긴 머리와 고개를 수그린 탓에 비치는 제법 긴 속눈썹과 불안한 듯 떨리는 핏기 없는 입술을 잠자코 지켜봤다. 갑작스레 감정을 통째로 내비치는 그 몸짓까지.
“분명히 규해에 대해서 물어볼 거야. 난 거짓말은 못해요. 그치만 규해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아. 걔가 의심받게 하고 싶지 않아. 사, 사실은 걱정돼서 미칠 것 같애. 걔가 지금 뭘 하고 있을 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돼서 미칠 거 같아요……. 답답해서 죽을 것만 같아……, 나한테 남은 가족은 이제 그 애 뿐이란 말이에요!”
우신은 눈을 깜박이고, 맥주 캔을 손에 든 채 걸어갔다. 목표는 소파 앞에 꼼짝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는 누군가. 그녀의 바로 앞까지 걸어간 그는 차갑게 식은 맥주 캔을 내밀며 조용히 물었다.
“티슈, 필요해?”
흘러내린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려던 그녀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07)
멋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