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붉은 다이아몬드










0. 프롤로그





“일을 의뢰하고 싶어요.”

흰 얼굴. 윤기가 흐르는 긴 생머리. 약간 날카롭고 어딘가 도도해 보이는 눈.

알록달록한 느낌을 주는 니트 스커트에 흰 반소매 티셔츠를 입은 소녀가 그렇게 말했다. 상당히 당돌한 말투였다.

고등학생?
아니, 대학생이다.

“앉으십시오.”

우신은 될 수 있는 한 부드럽게 말했다.

“음료는 뭘로 하시겠습니까? 커피? 녹차? 홍차?”

“콜라 있어요?”

약간 도전적인 반문이 돌아온다. 그는 싱긋 웃고, 냉장고로 걸어가서 캔 콜라를 꺼냈다. 스트로와 얼음을 넣은 유리컵을 쟁반에 담아 가져왔을 때, 소녀는 앉은 자세로 사무실 안을 두리번두리번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별다른 가구도, 그 외에 다른 사람도 없어 어딘가 휑한 인상을 주는 내부를.

“달리 직원이 없나 봐요?”

“하나 있었는데, 지난달에 해고했습니다.”

소녀는 뚱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왜요?”

“고용주의 돈을 횡령하려 들었으니까.”

“……어머.”

담담한 그의 대답에 소녀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로서는 별로 되살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갖은 위기를 몸소 겪어가며 뼈 빠지게 움직여 번 돈을 부하직원이 빼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배신감이란! 잘 아는 민중의 지팡이들에게 얘기해서 감방에 집어넣어 버릴까도 잠시 고민해 봤지만, 그냥 한 대 치고 끝내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부하는 강한 스트레이트 한방에 병원으로 실려 갔고, 그는 당분간 혼자서 모든 걸 하기로 마음먹었다. 역시 세상에 믿을 건 자기 자신뿐이다.

“일을 의뢰하고 싶다고 하셨습니까.”

우신은 화제를 돌렸다. 더 이상 그녀의 쓸데없는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고 싶지 않다. 그는 책상 위에 서류를 펼치고 물었다.

“이름과 나이?”

“박지해예요. ‘혀이’가 아니고 ‘하이’요. 스무 살, 대학교 1학년이에요.”

소녀는 또렷하고 야무진 인상을 주는 목소리로 말했다.

“박지해 씨. 제가 뭘 해드리면 됩니까?”

그녀는 숨을 가볍게 들이키더니, 도전적인 눈을 그에게 돌렸다.

“불륜 증거를 잡아 주셨으면 해요.”

그의 눈썹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죄송하지만 그런 일은 맡지 않습니다.”

소녀가 황당하다는 듯 그를 고쳐봤다.

“여기 탐정 사무소 아닌가요? 그런 일을 하기 위해 있는 곳이잖아요.”

“개중엔 그런 곳도 있겠죠. 다만 여기서는 불륜 증거를 잡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이곳의 원칙입니다.”

“돈 제법 버시나 봐요? 일을 가려 하시게.”

그녀가 콜라가 담긴 크리스털 글라스를 손에 꽉 움켜 쥔 채 내뱉는다. 시비조란 것이 꽤나 역력한 말투였다. 그는 속으로만 나직이 웃었다. 이봐, 아가씨. 괜히 힘 빼지 않는 게 좋을 걸? 그런 도발엔 개도 안 넘어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야 할 정도로 못 벌지는 않습니다.”

그는 느긋한 목소리로 말하고, 손을 깍지 낀 채 소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죄송하지만 용역회사 쪽으로 알아보시는 게 좋겠군요.”

“깡패들한텐 맡기고 싶지 않아요.”

이를 악물고서 뱉어내는 듯한 목소리다.

후, 고집은. 그쪽이야말로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인가 보지?

우신은 귀찮은 손님을 한시라도 빨리 자르는 길은 다른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는 손이 닿는 곳에 있던 메모장을 한 장 북 뜯어 그 위에 전화번호를 갈겨 적었다.

“민간조사원협회 번홉니다. 이쪽으로 연락해 보십시오. 아마 다른 좋은 사무소를 소개시켜 줄 겁니다.”

그녀는 종이를 받아 쥐더니 작게 한숨쉬었다.

“결국 못 맡겠다는 말씀이군요.”

“죄송합니다.”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사실 요즘 일이 밀려서 정신없는 처지다. 혼자 하기에는 좀 버거운 업무가 많았다. 굳이 간통 조사 같은 쓰레기 일을 맡지 않더라도 잠잘 시간이 충분히 부족한 우신이었다.

“알겠어요.”

소녀가 일어섰다.

“별 도움이 못 돼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는 몸에 밴 방문객에 대한 예의로, 그녀를 따라 사무실 문까지 걸어가 정중히 문을 열어주었다. 소녀는 나가려다가 우뚝 발을 멈췄다.

“가기 전에 하나 충고해도 될까요?”

“얼마든지.”

“그 셔츠에 그 넥타이, 진짜 안 어울려요.”

“그렇습니까?”

그는 싱긋, 그러나 조금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지금 처음 듣는 말이 아닌 것이다. 전에도 이런 말을 해주던 사람이 있었다. 아니, 이런 말을 해주는 데만 그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이런 모습을 개선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던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기억 속에만 아련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아름다운 사람이.

“차라리 넥타이를 안 매는 게 낫겠어요.”

문가에 선 소녀가 고개를 왼쪽으로 슬쩍 기울이며 말했다.

“그렇게 정장이 안 어울립니까?”

그도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뇨, 굉장히 어울려요.”

소녀는 그렇게 말하고 생긋 웃었다.

“벗겨보고 싶을 정도로.”

“…….”

그의 눈앞에서 매끄럽게 문이 닫혔고, 그 문을 경계로 소녀는 벽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그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책상 앞으로 돌아왔다. 잠시 잊고 있던 어떤 추억을 떠올리듯 쿡쿡, 안타깝게 웃으면서.

그렇다, 시간은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빨리 흐르는 법.

어느 새 그것은 2년 전의 일이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2년이 흘러간다.



계속.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07)

댓글 '1'

D

2004.06.23 14:19:43

이렇게 맹랑한 여자를 보았나...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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