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Intro


“수고하셨습니다!”


스텝 중 한 사람이 지나가며 준희에게 바람처럼 인사했다. 준희는 까딱 목례를 하며 뻣뻣하게 굳은 뒷목을 어루만졌다. 촬영 장비들과 기자재를 전부 실은 차가 이제 막 공터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는 중이었다. 남은 몇몇의 연기자들 주변에 노란 바리케이드 너머에서 촬영 장면을 구경하고 있던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싸인하느라 시끌벅적했다. 밤하늘을 쳐다보며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준희는 문득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여기요!”


찾는 소리도 내지 않았는데 저 녀석은 언제나 준희가 찾기만을 기다리는 녀석처럼 착실하게 이쪽으로 달려온다. 이상한 녀석.


“너 찾은 거 아냐.”


“어, 그럼요?”


“내 차 어딨는지 찾은 거야.”


“에이.”


“목이 뻣뻣해서 주무른 거야.”


준희가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며 피곤한 말투로 투덜대자 정우는 빤히 쳐다보았다.


“주물러드릴까요?”


“다 풀렸어. 괜찮아.”


준희는 얼른 한발 뒤로 물러서며 표정을 감췄다. 정우는 무안함을 감추며 계속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래, 넌 좀 이상한 구석이 있어.


정우에게는 두 가지 얼굴이 있었다. 보통 사람이 본래의 모습을 감추고자 가면을 하나 만들어두는 처세술의 한 방편으로 그런 짓을 한다고 친다면, 정우는 어느 한쪽도 가면이나 연기가 아니라는 점이 달랐다. 그저 만나는 상대가 망각을 하게 만들 뿐이었다. 한쪽 면의 모습을 보게 되면 그 다른 이면에 대해서는 먼 과거의 일이 되어버리게끔 만들 줄 안다.


대부분의 경우 준희는 그런 감각을 천부적인 재능으로 분류하지만, 정우에게는 1년이 다 되도록 판단을 보류 중이었다. 연기를 아무리 잘 한다고 해도 최소한 실제 모습이 무엇인가를 헷갈리게까지 만드는 사람에게는 재능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기에. 별다르게 연기공부를 하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연기할 줄 아는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지만, 그 소질을 적당한 때에 컨트롤할 줄 모르거나, 언제 뭘 꺼내어 써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는 걸 보면 아직 어설픈 구석이 많았다.


“저…….”


“왜?”


정우와의 시작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재능인지 실제 캐릭터인지 착각하게만들만큼 영리했으니까. 촬영장에 데리고 다닐 때마다 이 동네에서는 준희가 드디어 새끼 강아지 한 마리를 기르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솔솔 퍼져나가기 시작하고 있을 정도로 정우는 준희의 말을 잘 들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싹싹하고 예의바르게 굴었다. 준희와 둘이 있을 때는 개구쟁이처럼 귀여운 장난을 쳐댈 때도 있었다. 도를 넘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즐겁게 만들어주는 엉뚱함은 준희가 때때로 발견하는 신선함이기도 했다. 시온이었을 때의 모습에서 준희가 느낀 염세적이고 어두운 분위기 따위는 지금의 정우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1년이나 지나는 동안 준희는 정우의 옛 모습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그래서 정우가 정색을 하고 그렇게 말을 걸어왔을 때 준희가 본능적으로 긴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두 가지 모습을 다 알고 있는 준희는 정우가 어떤 얼굴을 하고 어떤 목소리를 낼 때 자신을 도발하기로 작정한 것인지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클럽 안에서 있었던 일은 여전히 준희의 기억 속에서 낯선만큼 생생했다. 기억이란 생각 이상으로 단순해서, 아무리 아득한 시간의 저편에 봉인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어떤 계기만 주어진다면 그 봉인을 너무도 쉽게 찢고 튀어나오는 법.


어쨌든 준희는 피곤했기에 판단 능력이 엉망이었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긴장이 정확히 어떤 이유 때문인지 판단하기 어려웠고, 그럴 땐 그저 피곤함 탓으로 이유를 돌려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냥 괜한 긴장과 짜증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말해. 무슨 일 있어?”


“제가 아니라 실장님 말이에요.”


“나? 내가 뭘?”


“저는 실연당하고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여자들이 제일 걱정돼요.”


이 말을 듣기 전까지는.


 



Lesson one.


처음엔 두통이 지독해서 헛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뭐라고?”


“그동안 나쁜 일 있었던 거 알아요, 실장님. 이런 날은 혼자 계시면 위험해요.”


“내가 실연당했대? 누가 그래?”


정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정우를 가만히 노려보던 준희는 코트 주머니를 뒤지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끈을 찾았다. 하지만 갖고 나온 게 없었던 탓에 주머니에 쑤셔넣었던 흰색 실크 스카프를 손에 말아쥐었다. 그리고는 길게 늘어뜨렸던 머리를 손으로 빗어 하나로 모은 뒤 두어번 감아 돌린 뒤 질끈 동여매었다. 찬바람이 목덜미를 스치자 졸린 기운이 조금 달아나는 것 같기도 했다. 열받는 일이 있을 때 머리를 묶으면서 열을 가라앉히는 방법은 준희의 버릇이었다.


“참, 외로운 여자들 위로하는 게 네 본업이었지. 그러고 있으니까 더 잘 어울린다.”


준희의 말투는 차가웠다. 정우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화나셨어요?”


“아니.”


“그럼 왜 그러세요.”


배역을 위해서 까칠한 턱수염을 붙이고 분장을 아직 지우지 않은 얼굴이 추위 때문에 창백해져 있었다. 밤길 위험하니 걱정된다고 말해주는 순진한 말투와는 전혀 상관없는 험상궂게 분장된 얼굴로 그런 말을 듣고 있으니 기분이 좀 이상하긴 했다.


“내 사생활 캐고 다닐 시간 있으면 연기 연습이나 더 해. 오늘 대체 몇번이나 NG를 냈는지 알아?”


“죄송합니다.”


“다음 주 촬영 때 볼 거야. 오늘만큼 NG 내면 알아서 해.”


“죄송합니다.”


준희는 코트 주머니 속에서 차 열쇠를 꺼내며 돌아섰다. 리모콘을 누르려는 찰나, 갑자기 뒤에 서 있던 정우가 준희의 팔을 잡아 부드럽게 당겼다.


“화내지 마세요.”


“내가 너한테 화내는 게 한두 번이니?”


“그런 거 말구요.”


“내가 실연당했다고 누가 그래?”


정우는 그 말에 눈을 슬쩍 피했다. 준희가 현빈과 사귀고 있었다는 사실은 오프더레코드였다. 하지만 말이란 게 어떻게 들어왔다가 흘러나가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일. 완벽한 비밀일 수록 전혀 엉뚱한 곳에서 새어나가는 경우도 많이 겪어보았다.


“실장님이 화내시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준희는 코웃음을 쳤다.


“내 사생활에 누가 간섭하래?”


“운전 제가 할게요.”


순간 정우는 준희의 손에서 열쇠뭉치를 휙 채갔다. 준희는 화난 얼굴로 손을 내밀었지만 정우는 얼굴을 돌린 채 딴청을 부렸다. 무슨 생각이 들어있는지 모를 옆얼굴은 까칠거리는 턱수염과 날카로운 턱선 때문에 위험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내놔.”


정우는 열쇠 뭉치에 달린 리모콘에 붙은 버튼을 꾹꾹 눌러댔다. 전조등이 깜빡대고, 도어락이 삑삑대며 걸렸다 풀리는 소리가 났다.


“천국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해본 적 없어요?”


정우는 지나가는 것처럼 말했다.


“뭐?”


“난 있어요.”


준희는 한숨을 내쉬며 허리에 손을 얹고 다시 한 손을 내밀었다.


“가고 싶으면 너 혼자 가고, 가기 전에 열쇠는 돌려주고 가.”


“다 잊게 만들어줄 수 있어요.”


정우는 딴청을 부리던 시선을 거두어 준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오늘 하룻밤만 나에게 시간을 주면, 내가 완벽하게 망가뜨려줄 수 있다구요.”


“날 망가뜨려?”


준희는 코웃음을 쳤다. 하얀 입김이 터져나와 공중에서 흩어졌다.


“다 잊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잊게 해줄 수 있어요.”


“이것 봐요, 최정우 씨.”


“오늘같은 날은 저 믿으셔도 돼요. 말한 건 꼭 지키는데.”


준희는 정우의 잿빛 렌즈로 덧씌워진 눈동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항상 이런 렌즈를 끼고 있으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지 않은가. 정우의 과거를 궁금하게 여겼던 적은 없었지만, 오늘처럼 의외의 모습을 드러낼 때는 무슨 생각을 하는 녀석인가 싶을 때가 있었다. 일하는 대부분의 시간을 준희와 같이 보내기는 하지만 정우는 언제나 해맑고 예의바른 모습 그 이상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예전에 보았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려고 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오랜만에 네 특기 살려서 위로라도 해주고 싶다, 이거니?”


준희의 혀는 날카로워졌다. 신경이 곤두선 것만큼이나. 정우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지만 고집을 꺾지는 않았다.


“원한다면요. 두번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짓이지만, 실장님이 원한다면…….”


그래, 한참을 잊고 있었다. 퇴폐적이고 거리낌없는 음란이 미덕이었던 정우의 과거 직업에 대해서. 준희는 기가막혔다.


“최정우 씨, 난 당신하고 불장난할 생각 없어. 그 뜻으로 말한 거 맞아?”


“맞아요.”


“내가 같이 일 하면서 그때 얘기 하면 어떻게 한다고 했어?”


“계약 파기.”


“그러고 싶어?”


망설이던 정우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귓불이 새빨갛다. 대체 이 녀석 머릿속에는 뭐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길래 이 모양일까.


“그럼 왜 이래?”


“그냥…….”


기가 막힌 입에서 자꾸 헛바람만 새어나오자 준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이러는 이유가 있을 거야. 피곤한 사람 속까지 뒤집어 놓고 그냥, 이라는 대답으로 답답하게 만드는 데에는.


“정우야.”


“네.”


“내가 실연당한 기념으로 너한테 뭘 원할 거라고 생각했니?”


정우는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대답을 하고 싶은데 적당히 꺼낼 말이 없어서 전전긍긍하는 표정이었다. 다 드러난다. 표정 하나도, 생각 하나도. 혼란스러울 수록 더더욱 적나라하게.


“아무 상관도 없는 너한테 내가 위로라도 받자고 할 거 같았어?”


“아니, 그게 아니라 저는 그냥…….”


기세등등하던 좀전과는 달리 정우는 우물쭈물 말끝을 흐렸다. 준희는 피곤한 눈가를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네가 호스트 일 하는 거, 끔찍해져서 그만 두고 나왔다거나, 하기 싫어서 그만 둔 게 아니란 건 잘 알아. 다만 네 진로 변경에 내가 영향을 줬다면 준 건데, 혹시 나 때문에 적성에 맞는 직업을 버린 거라면, 언제든지 돌아가도 좋아. 네가 일하는 클럽은 없어진 모양이던데, 너 정도면 다른 곳에서도 최고의 대우를 받고 다시 일할 수 있을 거라는 건 본인이 더 잘 알 테니 그것까진 신경 안 써줘도 될 거 같은데. 어때? 다시 돌아갈래? 계약 파기 하자면 얼마든지 해줄 테니까.”


“아니에요.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갈 데도 없는데.”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쉰 준희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적막한 공터 한 가운데 서 있는 두 사람밖에는 다른 아무도 없었다.


“지금 나 충분히 오해한 거 들었잖아. 불장난 하자고 하는 말 맞다며? 그런 말 버젓이 해놓고 얼굴은 왜 붉혀? 사람 헷갈리게. 내가 알아들을 줄 몰랐어? 아니, 지금 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는 맞니?”


“잘못했어요, 실장님.”


화가 난 준희는 기가 막히고 뒷골이 땡겼다. 말이 안 통하잖아. 없던 두통이 생기려고 할 정도로 준희는 머리 끝까지 김이 모락모락 솟았다.


“아니, 잘못한 건 둘째 치고 이유 좀 듣자.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 내가 언제부터 너한테 그렇게 우습게 보였는지. 대체 갑자기 너 왜 이래? 하루 종일 너 때문에 같은 장면 몇번이나 찍게 만들고, 생각은 딴 데 가 있고, 한번 말할 거 두번 말하게 만들고, 내가 묻는 말에 제대로 된 대답도 못하고. 안 그랬잖아.”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그런 거 정말 아닌데.”


호스트 시온이었을 때의 정우는 퇴폐적인 은밀함이 온몸에 흘러넘치는 녀석이었다. 무엇을 제안하든 거절할 수 없게 만드는 색기가 흘러넘쳤다. 사근사근하지만 정확하게 자신이 원하는 타이밍에 상대를 굴복시키고 흥분시킬 수 있는 매력을 숨기려고 들지 않는 선수. 시온이라는 이름은 접대받았던 상류층 손님들 중에서도 그 영향력과 지명도가 압도적이었다고 했다. 그런 고급 인력이라면 클럽에서 쉽게 놔주려고 하지 않았을텐데, 어찌된 일인지 정우는 자신과 만나고 나서 정확하게 한달 뒤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준희 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게 그렇게 좋니?”


“네?”


“그 일 말이야. 마음만 먹으면 여자들과 뒹굴 수 있었던 그 직업.”


“아…….”


물론 자신이 금욕주의자라는 건 아니지만, 준희는 정우가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직업으로 삼을 수 있었는지 궁금하긴 했었다. 그저 즐기는 것만으로 그 세계를 온전하게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준희의 상식 선에서는 아무도 없었다.


“대답해. 새삼 훈계하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져서 그러는 거야.”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보세요?”


“너도 갑자기 그랬으니까.”


정우는 다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뭔가 생각하는 듯 한참을 망설이던 정우는 다시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실장님은 술 잘 안 드시죠? 통제할 수 없는 게 싫어서 잘 드시지 않는 거 알아요.”


“맛이 없어서 안 마시는 거야. 그래도 칵테일은 좋아해.”


“취할만큼 마셔본 적은 별로 없죠?”


준희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래도 한번쯤은 아무 생각없이 망가지고 미쳐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아세요? 솔직히 말하면 전 그렇게 해서 견뎠거든요.”


“뭘 견뎌?”


“제 과거요.”


“네 과거?”


짐작으로 미루어 호스트 시절이 아닌 훨씬 전의 어떤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정우의 표정은 멍하니 딴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잊고 싶은데 잊을 수 없는 게 있잖아요. 물 속에 거꾸로 쳐박혀도, 미친 듯이 달려봐도 잊혀지지 않는 거. 시간이 해결해주기 전에 내가 먼저 목 매달고 죽어버릴 것 같은 기분에 삼켜지는 거. 무섭잖아요, 그런 거. 특히 이런 밤에는요.”


이런 밤. 크리스마스 이브. 온 세상에 평화가 가득한 밤. 정우의 눈빛은 어쩐지 그런 세상을 질투하는 듯 했다.


“저는요, 실장님이 나한테는 화난 거 다 풀어도 상관없는데, 그렇게 해서 분이 가라앉는다면요, 근데 내가 실장님한테는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나한테 절대 그러지 않을 거잖아요. 바보처럼 혼자 화내고 궁금해하다가 엉망이 되어버릴 거예요. 그런 건 내가 잘 아니까, 그러지 않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도와드릴 수 있을 거 같아서.”


“난 괜찮아.”


준희는 피곤한 두 눈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대며 중얼거렸다.


“정 아무 것도 원하지 않으시면, 그냥 옆에만 있어드릴게요. 원하지 않으면 정말 아무 짓 안 하구요.”


“넌 상관없어. 이건 그냥 내가 견디고, 용서할 수 있으면 용서하고 그러다가 시간 지나면 잊혀지는 거…… 그런 문제야. 사적인 문제. 너는 상관없어. 일하면서 정든 의리로 네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위로해주고 싶다고 생각한 건 고마운데, 아무한테나 제발 그러지는 마. 바보같잖아.”


“실장님은 저한테 아무나가 아닌데요.”


“너 가끔 헷갈리는 소리 하는데, 나한테는 안 통해.”


정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알아요.”


대답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리가 작았다.


“그럼 됐어.”


차에 다시 타려던 준희는 문득 정우의 풀죽은 표정을 살폈다. 하고 싶은 말이 가득 쌓여 있는 얼굴. 오늘 하루 종일 정우는 사연 있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다가 한숨 짓다가, 쳐다보다가 딴청부리다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할 말 가득한 표정을 도무지 숨기지 못했었다. 아니, 요 며칠 동안 정우에게서 이상한 기미가 조금씩 보이긴 했었지. 그러다가 마치 지금이 마지막 기회인 양 이렇게 물고 늘어지는 것이고. 도무지 말도 안되고 앞뒤에도 들어맞지 않는 정우의 뜬금없는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머리가 마냥 복잡하기만 했다. 코끝이 욱신욱신 쑤시고 두통이 점점 더 심해졌다. 점점 눈앞이 흐릿해졌다.


“피곤하다, 정우야. 오늘은 내가 있지 정말…….”


정우는 준희의 뺨에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잿빛 렌즈로 막힌 정우의 눈동자가 일순 죄책감으로 흔들린다고 생각했던 건 준희의 착각이었을런지도 몰랐다. 차가운 손가락이 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지금 울고 있는 거 알아요?”


뺨에 닿았던 정우의 가지런한 손가락 끝에 반짝거리는 물기가 묻어 있었다. 준희가 당황해서 젖은 뺨을 손으로 문질렀다.


“두통 때문에 그래.”


정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울었던 적이 까마득하죠? 분명 헤어질 때도 안 울었을 거고.”


“헤어진다고 우는 거 꼴사납잖아.”


준희는 자기도 모르게 시인하고 말았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도 없고, 말하지 않았던 상처. 도저히 더 이상은 한계라고 생각했을 때 헤어지자고 선언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남자의 곁을 떠났던 자신의 결심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던 미련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었다. 지현빈과 헤어진 뒤 그 어느때보다 더디게 흘렀던 시간과 정우를 데리고 다시 일을 시작한 일년의 시간. 각각의 시간은 서로 다른 속도로 흘렀었다.


“자기가 우는 줄도 모르게 우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말해요.”


“뭐?”


“울어야할 때 울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구요.”


준희는 소매로 눈가를 문질러 닦아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녀석이 자신이 일년 동안 단 한번도 입밖에 꺼낸 적이 없는 일을 위로해주겠다고 덤벼드는 것으로도 모자라 울게 만들다니. 하는 말과는 달리 언제나 괜찮지 않았던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고 나니 준희는 정우의 마음이 와닿았다.


어쩌면 이 녀석도 오늘 혼자 있고 싶지 않은 거야.


“그런 사람들 많이 봤어?”


정우는 주의를 쏟고 있는 상대의 감정 변화에 대해서 상당히 예민한 녀석이었다. 준희가 자신을 집안으로 초대하기로 마음을 바꿔먹었다는 사실을 단번에 깨달은 정우의 어두웠던 표정이 순식간에 활짝 개었다.


“그런 사람들, 사실 클라이언트라고 해요.”


짐짓 거드름을 피우는 정우의 농담섞인 대답에 준희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Lesson two.


“실장님은 내가 싫어요?”


“응?”


정우는 둥근 와인 잔을 입에 댄채 웅얼대듯 물었다. 두 사람은 심야 케이블TV에서 해주는 흑백 영화를 보고 있었다. 아니, 영화를 제대로 보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준희는 영화를 틀어놓은 순간부터 소파 위에서 쿠션을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가 조금 전에 깨었고, 정우는 준희가 잠든 모습을 보다가 약이 올라 와인을 한모금 마시고, 장면이 숨가쁘게 넘어가는 흑백 화면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다시 준희가 곤하게 자는 얼굴을 쳐다보다가 그러기를 몇번이나 반복했는지 몰랐다. 남자와 단둘이 있는데도 저렇게 태평스럽게 잠이 들 수 있다니, 정우는 사실 자존심에 약간 상처를 입었다.


“왜 그런 걸 물어? 싫은 사람과 어떻게 일을 하겠어?”


“그런 거 말구요.”


“그럼 질문을 확실하게 해야지.”


테이블 샐러드볼 안에는 딸기, 파인애플 슬라이스, 키위, 까망베르 치즈, 다크 초콜렛 등등이 아직 반이나 남아 있었다. 화이트 와인을 다섯 잔째 홀짝거리면서 마시던 준희는 플레인 요구르트가 듬뿍 섞인 과일을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그럼 좋아해요?”


“응, 좋아해.”


준희의 흐릿한 말투는 와인 덕분이었다. 정우는 알면서도 자신이 들은 말이 믿기지가 않아 잠시 준희를 돌아다보았다.


“뭐가 좋다는 말이에요?”


준희는 키득거렸다.


“거 봐. 질문이 애매하니까 대답도 모호하잖아.”


그래. 민준희니까.


정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을 호스트가 아닌 눈으로 봐주었던 여자도, 여자를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의 직업이 신경쓰였던 적도, 대화가 섞이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흥분시킬 수 있는 페로몬도 유일하게 이 여자를 통해서 일어나는 화학반응이었다. 정우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민준희니까, 이 여자니까 나를 감히 이렇게 망설이게 만드는 거야.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지.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는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도 없지 않은가.


정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계산에 들어있지 않은 일이었다. 다른 남자가 아직도 심장에 깊이 박혀 있어 괴로워하면서도, 단 한번도 앓는 소리를 내려고 하지 않는 여자를 걱정하는 일 따위. 민준희와 지현빈, 두 사람의 비밀스러웠던 관계가 위태위태하다는 것도, 미적거리긴 했어도 두 사람이 헤어지리란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흘러가도록 만든 건 자신의 짓이었으니까. 하지만 실연의 상처를 섣부르게 아무에게나 내보이지 않고 혼자 감당하려고 애쓰는 준희의 태도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정우는 준희에게 있어 아직도 상관없는 사람에 속하기 때문에. 그저 일만으로 엮여진 관계. 준희에게 정우의 위치는 아직도 거기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건 한쪽만 애가 닳아 미쳐 넘어가는 불리한 관계의 서장이었다. 이렇게 답답하고 초조한 시간 제한에 걸려들 줄 알았다면 애초부터 시작하지도 말았어야 하는 건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정우는 그 사실이 미치도록 신경쓰였다. 후회 따위 남기지 말고 떠나야 하는데.


그러니까 오늘이 마지막 밤. 이 여자가 모든 것을 알아채기 전에 자신이 최정우라는 이름으로 이곳에서 있을 수 있는, 어쩌면 최후의 밤이다. 떠나고 나면 다시 돌아올 용기가 언제 생길지 알 수도 없고,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준희가 자신을 예전처럼 받아줄 지도 의문이었다. 모든 게 불확실했다. 일을 그만둘 지도 모르고, 훌쩍 여행을 떠나버릴 지도 모르고, 어쩌다가 운이 나빠 그 자식과 다시 엮이기라도 하면…… 아니, 그런 일까지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복수는 끝났지만, 깔끔한 기분이 들지 않는 건 모두가 다 이 여자 때문이다. 다른 건 몰라도 지현빈 그 자식이 민준희와 다시는 엮일 일이 없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 상상의 끝을 잘라내기 위해서.


푹신한 소파 위에서 몸을 움직여 비스듬히 누운 준희는 시계를 다시 보았다. 시간은 새벽 3시 30분. 정우는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대고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을 마셔대며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몇 개의 DVD타이틀과 나쵸칩, 살사 치즈 소스, 과일이 가득 들어 있는 샐러드볼, 와인병 등등이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준희는 테이블 쪽으로 손을 뻗어 와인잔을 가져갔다.


“그만 마셔요. 취하겠어요.”


“취하긴. 말짱해, 나는.”


와인을 한모금 마신 준희는 포크에 찍은 딸기를 정우에게 들이밀었다. 요플레가 진득하게 묻어 있는 딸기를 한번 보고 준희의 입술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아이를 어르는 것마냥 아랫 입술을 이로 살짝 물고 있는 얼굴은 나른해보였다. 묘한 상상을 자극하는 도톰하고 붉은 입술 선은 준희의 얼굴 중에 가장 매혹적인 부분이었다.


“먹어 봐.”


“많이 먹었어요.”


준희는 딸기를 냉큼 가져가 입에 쏙 집어넣고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초조해보이는데.”


“이상해서.”


그 말에 준희는 정우가 앉아 있는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호흡에 실려 나오는 와인향이 목덜미에 닿자 정우는 온몸이 뻣뻣하게 긴장되는 기분이었다.


“뭐가?”


정우는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나는 내 자신이 하는 일이 부끄럽다고 생각해본 적 한번도 없어요. 변명이나 사과 같은 거 하지 않으면서 살고 싶어서 매 순간마다 내 현재에 충실했어요. 그 순간 내가 뭘 하든, 뭘 하고 있든, 후회하는 짓 따위 늙어죽을 때까지 하지 않겠노라고, 그렇게 마음 먹고 살면 그게 제대로 사는 거라고, 그렇게 하면 내가 원하는대로 살 수 있을 줄 알았으니까.”


준희는 웃었다.


“쉽지 않은 건데. 사는 게 그렇게 뜻대로만 되면 얼마나 좋겠어.”


“그러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든, 나를 설사 개처럼 취급한다고 해도 한번도 억울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는 말이에요.”


이번엔 준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정우의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정우는 준희의 표정이 궁금했지만 애써 참기로 했다.


“근데 그게 안돼요.”


“뭐?”


“실장님한테는 그게 안돼요.”


정우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애써야 했다. 이 여자한테는 항상 거짓말도 아니고 연기도 아닌 진심을 얘기하게 되는 걸까. 이제껏 잘해왔으면서. 적당히 눙치고 동정을 얻어내어 마음을 사로잡는 술수 따위 지겹도록 많이 부려봤는데. 사랑한다는 말을 수십 번도 더 입에 담아가면서 상대 여자들에게 눈물을 쏙 뽑게 만들고 돈을 가져오게 만든 것들이 자신의 거짓 고백이라고 생각했을 때도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았는데. 오늘 그렇게 해서 이 여자 마음을 훔칠 예정이었는데.


이 여자에게는 오히려 자신이 거짓말을 할까봐 자꾸만 말을 고르고 더듬었다. 거짓말 하지 않으면, 자꾸 진실을 말하게 되면 불리해지는데. 하고 싶은 말과 할 수 없는 말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려고 애를 쓰고 있으니 말이 제대로 되어 나갈 리가 없었다.


“나는 부끄럽다거나, 창피하다거나…… 그런 감정들이 싫어요. 그런 걸 느끼기 시작하면 제대로 서 있을 데가 아예 없어지니까, 그냥 수치를 모르는 사람처럼 살면 훨씬 용감해지지 않을까 해서 될 수 있으면 그런 건 생각하지도 않고 느끼지도 않으려고 애써요. 더더욱 천박하게 행동해서 바닥을 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올라갈 것만 생각하면 되니까, 정말 그래본 적도 있거든요. 그러면 더 용감해지고, 자신감도 붙고. 근데 실장님과 있으면 나는 항상 내가 벌거벗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게 화가 나고 억울해서…….”


정우는 갑자기 하던 말을 멈췄다. 무언가 정우의 정수리에 가만히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더니 닿은 손바닥이 머뭇거리듯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 너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근데…….”


“근데 난 너를 그렇게 생각한 적 없지만, 날 볼 때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라면 말이야……, 그럼 그건 미안한 일이지.”


준희의 손가락이 정우의 머릿결을 부드럽게 만지작거리며 말을 끝냈다. 정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준희의 목소리는 달래듯 호소하듯 나직했다. 쉰 듯 잠긴 듯 탁하게 들리는 목소리는 정우의 오감을 정확하게 깨웠다. 와인은 좋은 거야. 페로몬 상승, 화학작용, 달콤한 속삭임, 부드러운 미소, 그리고 미열처럼 올라가는 살갗의 온도가 이 순간의 모든 감각을 명쾌하게 증명해주고 있다. 입술이 열릴 때마다 부드럽게 살갗이 이겨지는 소리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나는 너 싫어하지 않아. 네가 했던 그 일들이 어떤 건 줄 알지만 상관하지 않는 건, 정우야, 네가 좋은 애라서 그런 거야. 나는…… 조금 녹슨 거 같긴 하지만, 사람 보는 눈은 아직 그런대로 쓸만하다고 생각하거든.”


그렇게 말하는 준희의 목소리는 쓸쓸했다. 분명히 헤어진 현빈에 대한 미련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머릿속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몰라도, 나는 네가 보여주는 성실함이 좋고, 잘 웃는 얼굴이 좋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줄줄 꿰고 있는 사람처럼 찡그리지 않고 곁에 있어줘서 좋아. 내가 말하는 거 하나도 어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좋고, 그래서 너하고 일하는 게 즐거워. 그래서 힘들었다고 말하지 않고도 잘 견뎠는데, 어떤 부분이 널 아프게 한 건지는 잘 모르겠어. 그냥 너 아프고 괴롭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그랬어요?”


준희의 손이 정우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정우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준희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민과 동정으로 혼재된 준희의 얼굴이 정우의 바로 코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숨결에서 쏟아지는 와인향이 좀더 짙어졌다. 나른하게 내리깐 눈꺼풀이 느리게 깜빡대며 정우의 얼굴을 가만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꼭 귀여운 강아지를 보는 것처럼 흐뭇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응, 그랬어.”


정우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그러니까 내가 굳이 위로해줄 필요는 없다는 얘길 하고 싶은 거예요?”


“네가 나 때문에 망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


“어째서?”


“나는 네가 원하는 의미로 널 좋아하는 게 아니야. 네가 내 앞에서 보여주는 모습을 좋아하는 거고, 그게 싫지 않은 거지. 그러니까 나는 너한테 그런 걸 강요할 수는 없어.”


“상관없다잖아요, 내가.”


준희는 허리를 펴고 소파 깊숙이 몸을 다시 묻었다. 그리고는 마치 정우의 대답을 듣지 못한 것마냥 갑자기 명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요즘에도 가끔 말이야, 나는 네가 호스트였을 때, 여자들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았기에 그렇게 백전백승이라는 명성이 자자했을까, 그런 게 궁금했던 적도 있었거든. 근데 요즘은 알 거 같아. 넌 상대가 원하는 걸 사람 보자마자 파악해서 대할 줄 아는 눈썰미를 갖고 있는 것 같아. 천부적이야. 너 무슨 일로 먹고 살았는지 몰랐다면, 나는 정말 일하면서도 착각하면서 혼자 고민했을 거야. 이 핏덩이한테 반해서 뭘 어쩌자고? 내가 어떻게? 이러면서.”


하나도 우습지 않다. 정우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러면 안돼요?”


“그런 사이가 될 수는 없어, 너하고 나는.”


“왜?”


“의견을 묻는 게 아니라, 결론이야, 그건.”


그래, 그런 거지. 이 망할 여자. 그걸 몰라서 기다린 게 아니야. 인내심이 원하는 대답을 듣게 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만든 건 내가 순진해서 그렇다 치지. 하지만 그런 결론을 듣자고 내가 당신에게 매순간 웃어줬던 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나도 더 이상은 안 참아.


“그런 걸 누가 정하죠?”


“뭐?”


“나는 그런 결정권, 당신한테 넘겨준 적 없는데.”


정우는 TV를 끄고, 몸을 틀어 일어났다.


준희를 소파 위로 넘어뜨리고, 몸을 타고 앉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탐색전은 끝났다.


 



Lesson three.


“이거 풀어.”


그 다음 순서는 간단했다. 여자가 입고 있던 옷을 단숨에 벗겨내고 두 팔을 위로 올려 준희의 머리에 묶여져 있던 실크 스카프를 풀어 두 손목을 엇갈리게 만든 뒤 꽉 묶어버렸다. 그리고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두 손목 사이를 꽉 잡아눌렀다. 설묶여있던 준희의 긴 머리는 고스란히 풀어헤쳐져 이리저리 흐트러졌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반항할 수도 없게 만들어놓은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난 준희는 입술을 깨물고 정우를 노려보았다. 정우는 준희를 조용히 내려다보며 자신이 입고 있던 셔츠 단추를 하나 하나 풀기 시작했다.


“내가 졌어요.”


앞머리를 훅 불어넘기며 마지막 단추까지 다 풀어버린 정우의 얼굴에는 체념이 가득한 말투와는 전혀 다른 서늘한 표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친 듯 나직하게 퍼지는 목소리는 탁하고 거칠었다. 내리 깐 속눈썹 아래 짙은 그늘을 감추고 있었던 텅 빈 눈동자에는 짐작할만한 어떠한 감정조차도 전혀 드러나 있지 않았다. 철저하게 계산된 욕망 외에는.


“풀어줘.”


“설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다니, 내가 미쳤지.”


“설득?”


“괜히 시간 낭비했네.”


정우는 준희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중얼댔다. 낯선 목소리. 준희는 기억을 더듬었다.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건, 아주 옛날에 들어보았다. 상대의 뼛속까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자신만만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면서 말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셔츠를 벗어 아무렇게나 집어던져버린 정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여자의 벌거벗은 상체가 흐릿한 조명 아래서 선명하고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도망 안 간다는 거 알잖아.”


“가면 안되죠. 그럼 민준희가 아니지.”


“그럼 왜 이러는데?”


“한번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순간을 즐겨볼 필요도 있어요.”


정우는 이 집에 들어오는 순간 무언의 합의대로, 준희를 쓰러뜨리고 바로 침대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몸을 흥분시키는 일은 간단했지만, 머리로 거부할 것이 뻔한 준희를 설득시켜보고 싶다는 욕심을 도무지 포기할 수가 없었다. 본심을 들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준희는 마치 너하고는 터놓고 얘기할거리 따위 없다는 듯 정우가 원하는 말을 단 한번도 들려주지 않았다.


과유불급. 욕심이 모든 것을 망쳐버리기 전에 서두르는 게 현명한 일. 얻을 수 없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가질 수 있는 것에만 욕심을 내야 삶이 편안한 법이라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다만 오랫동안 갖고 싶었던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잠시 그 원리를 잊고 있었을 뿐. 남은 건 지금이 중요하다는 사실 뿐. 준희와 얘기하면서 이미 단단해진 몸이 견디기 괴롭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으니, 이제 그만 달래줘야지.


애초부터 다른 건 필요없었어. 여길 온 목적은 딱 하나니까.


“이상한 짓 하면 죽을 줄 알아.”


준희는 씨근덕댔다. 투명하게 반들대는 우윳빛 속살이 낮은 조명 아래서 은은한 빛을 내며 타오르는 모습을 홀린 듯 보고 있는 정우의 눈빛은 나른했다.


“이상한 짓?”


정우는 손바닥을 펴서 둥글게 퍼져있는 젖가슴을 가만히 문질렀다. 부드러운 가슴 가운데 박힌 돌기가 단단해지며 꼿꼿하게 일어서는 것이 느껴지자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최고의 순간을 즐기기 전에 으레 드는 직감과도 같은 감각이었다. 정우는 마치 옛날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배하고, 정복하고, 혹은 지독하게 혹사당하면서도 쾌락에 소리지르던 그 순간으로.


“내…… 내가 싫다고 하는 건 하지 마. 하면 안돼.”


“왜요, 내가 채찍이라도 준비해왔을까봐?”


정우는 웃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오기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실장님이 원하지 않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아요.”


“정말이지?”


“그럼요.”


“그럼 풀어줘.”


“그것만 빼고.”


정우는 부드럽게 달랬다.


“혹시 모르니까, 싫어하는 게 뭔지 미리 말해주면 사전에 방지할 수 있을텐데.”


난감해하는 표정을 보니 준희는 정우가 장난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목록 같은 건 없는데. 그때그때 얘기해주면 안돼?”


“여기 무슨 교통순경이라도 세워둔 줄 알아요?”


더 이상 참지 못한 정우는 고개를 내려 한쪽 가슴을 입술로 물었다. 온통 끈적끈적한 소리가 거실 전체에 울려퍼졌다. 한손이 머리 위에서 묶인 손목을 꽉 잡아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준희는 꼼짝없이 정우가 하는대로 움찔대는 몸을 맡기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흥건해진 타액이 물린 가슴을 적시며 흘러내리고, 자극받은 여자의 어깨가 저절로 올라가고, 다리가 꼬이는 건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앓는 듯한 신음소리가 입술 새에서 흘러나오자 정우는 온몸의 신경이 한곳으로 빠르게 집중하기 시작하는 변화를 느낄 수가 있었다.


“근데 미리 말해주지 않으면 잘못하다가는 길이 잘못 들 수도 있다는 거 명심해둬요.”


“길……?”


혀가 가슴 아래부분을 핥아 내려갔다.


“하다보면 아무리 나라도 제어를 못하게 될 때가 있거든요. 몰입하다보면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했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어져요. 그 다음엔 그냥 본능에 몸을 맡기게 되고…….”


“난 내 평생 싫은 게 좋아졌던 적은 없어. 단 한번도.”


준희는 어금니를 앙다물고 고집스럽게 대답했다. 정우는 고개를 들었다. 느끼지 않으려는 듯 어금니를 악물고 동그랗게 부풀어오른 뺨을 보자 정우는 잠시 질투가 났다. 그 자식한테는 더 부드러운 표정으로 다정하고 허물없이 굴었겠지. 허점과 약점을 전부 드러내놓고, 벌거벗은 채 깔려서도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서 애쓰는 모습 같은 건 애초부터 필요없이 먼저 팔을 벌려 달려들었을 거야. 이 예쁜 몸도 그 자식이 먼저 봤을 거고. 그렇게 고양이처럼 날카롭게 털을 곤두세우지도 않고 가르랑대면서, 먼저 안아달라고 졸랐을지도 몰라. 처음 봤던 그 순간부터 내가 가장 먼저 이렇게 하고 싶었는데.


“좋겠다. 난 있던데.”


정우는 다시 가슴 아래 갈비뼈 부근에 입을 맞췄다. 흡 하고 숨을 들이키는 준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정우는 그렇게 하나하나 예민하게 반응하는 곳을 찾아나갔다.


“그, 그게 그렇게 부러운 일이야?”


“죽고싶을 정도의 수치를 겪고 바닥을 헤맨 다음에야 간신히 좋아지기 시작하는 거니까.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거기에만 무섭게 빠져들어요. 누가 말려도 죽어도 그것만 하겠다고 달려들죠. 이미 그때는 예전에 봤던 모든 게 전부 시시해져서 옛날로 돌아갈래야 돌아갈 수도 없게 되는 거예요.”


“그게 무슨…….”


정우는 고개를 들어 올라오더니 준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표정이었으나 정우는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준희의 귀를 만지작거리던 곳으로 입술을 옮겼다. 길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긴 정우의 혀가 귓속으로 들어오더니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뜨겁고 축축한 입술과 혀가 핥고 지나갈 때마다 준희는 가쁜 신음과 함께 몸을 뒤틀었다. 원하는 반응이 나올 때까지 귓불을 자근자근 물어대던 정우는 나직한 목소리로 준희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싫어한다는 건 취향의 문제가 아니에요. 두려움과 편견의 문제지. 안해봐서 무섭고, 낯설어서 두려운 거. 금기를 극복하면 중독되는 건 순식간이에요.”


준희의 대답은 억눌린 신음과 점점 거칠어지는 호흡이 전부였다. 정우는 준희의 뺨과 관자놀이에 정성스럽게 키스했다.


“다 잊게 해줄게요. 오늘, 아니 지금 저지르는 일이 실수가 아니었다고 생각하게. 내 얼굴, 당신의 기억……. 끝나고 나면 그것까지도 생각나지 않게 해줄게요. 그러니까 원하는 건 뭐든지 다 말해주세요. 하고 싶은 건 뭐든지 요구해줘요. 부끄러운 거, 창피한 거,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전부 다.”


“너는……?”


준희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뜬금없이 물었다.


“나? 내가 왜요?”


“나는 너한테 뭘 해주면 돼?”


정우는 목 안에서 울리는 깊은 웃음소리를 냈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보지도 말고, 기억하지도 말고…….”


“이상해. 불공평한 거 같아.”


“기분이 좋아졌나보네.”


준희는 입술을 깨물며 대답을 망설였다. 새빨개진 귓불이 그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래, 섹스는 섹스일 뿐이야. 기대하지 마. 기대하면 안돼. 그럴 자격도 없으면서.


윗입술에 살짝 키스를 한 정우의 젖은 입술이 귓가에 와닿았다.


“날 믿어요. 그럼, 천국에 보내줄게요.”


정우의 낮은 목소리는 마치 주문처럼 귓가에 파고들었다. 속삭이며 확신을 주는 낮고 허스키한 음성이 준희의 감각을 당장이라도 폭발시킬 정도로 예민하게 만들어버렸다. 믿을 수 없었지만, 처음부터 그랬다. 이미 정우가 건드리고 만지고 핥고 문지르는 모든 곳이 전부 민감한 성감대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아직도 들어오려고 하지 않는 정우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준희는 낮게 울리는 정우의 목소리에, 애태우는 손끝에, 탐닉하는 눈빛 하나하나에 이미 흠뻑 젖어 당황할 정도로 깊이 빠져버렸다.


한차례의 탐식을 끝낸 정우는 몸을 일으켜 준희의 변화를 나른한 눈으로 관찰했다. 정우는 짙은 색 리바이스 하나만을 걸친 상태였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정우는 옷을 입고 있을 때와는 분위기가 전혀 달라보일 정도로 낯설다. 근육으로 꽉 짜여진 골격은 완벽하게 남성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묘한 중성적인 분위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정우는 목이 말랐는지 몸을 조금 틀어 테이블 위에 남아 있던 둥근 와인잔을 들고 목을 축였다. 준희는 여유롭게 뻗어나가 잔을 집는 팔의 움직임, 비틀리며 굴곡을 만들어내는 옆구리와 등선의 유연함에 저절로 시선을 빼앗겼다. 그 여유롭고 느린 모든 움직임이 준희에게는 낯설면서도 낯익었다. 그 이유는 준희도 알고 있었다.


클럽에서 정우를 보았을 때 받았던 느낌과 똑같았으니까.


자신의 몸을 훔쳐보는 준희의 눈길을 파악한 정우는 싱긋 웃으며 벨트를 풀고 청바지 단추를 끌렀다. 배꼽 아래 이어진 체모가 점점 짙어지며 벌어진 지퍼 사이로 이어진 모양을 홀린 듯 쳐다보던 준희는 문득 정우가 겉옷 아래 속옷을 전혀 입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준희의 표정을 알아챈 정우는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몸을 굽혀 왼쪽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혼자 해본 적 있어요?”


어지럼증에 눈앞이 빙글 돌자 준희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찔하게 만드는 교묘한 손가락이 다리 사이를 파고 들었다. 정우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준희의 숨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졌고 몸을 계속 뒤틀어대기만 했다.


“풀어줘.”


정우는 낮게 웃었다.


“질문에 대답하면 풀어줄게요.”


정우는 잔에 남은 나머지 와인을 전부 마신 후 테이블에 잔을 돌려놓은 뒤 준희에게 입을 맞췄다. 양볼을 감싸쥐고 혀를 깊이 넣어 입안 구석구석을 탐험하듯 격렬하게 키스하던 정우는 준희의 상체를 일으켜 품안으로 끌어당겼다. 정우의 입안에 남아 있던 와인이 준희의 입안으로 흘러들어갔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놀란 준희의 입가에서 붉은 와인이 흘러내렸다. 정우는 턱을 타고 쇄골 사이 우묵한 곳, 앙가슴 사이로 흘러내리는 붉은색 와인이 흐르는 곳을 따라가 남김없이 핥아먹었다. 겨드랑이 안쪽, 옆구리를 지나는 정우의 뜨겁고 축축한 혀끝이 꼿꼿하게 일어선 검붉은 젖꼭지를 건드리자 준희의 입술에서는 곧바로 자지러지는 신음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 이상은 건드리려고 하지 않고 계속 감질나게 만들기만 했다.


준희는 입술을 꼭 깨물었고, 정우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대답을 요구했다. 정우의 손놀림과 입술의 움직임이 좀더 미묘하고 야릇하게 변하자 준희의 다문 입가에서는 의미불명의 가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결국, 나쁜 자식으로 시작하는 희미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할딱대는 대답을 들려주자 정우는 만족한 표정으로 손목을 묶은 스카프를 풀어주었다. 준희는 팔이 풀리자마자 본능적으로 정우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런 걸 왜 묻는 건데?”


“상상하고 싶으니까.”


정우의 눈빛에는 장난기와 욕망이 뒤섞여 있었다.


“변태.”


“사실 참고하려구요.”


“변태.”


정우는 낮게 웃었다.


“겨우 그거 갖고?”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소파 위에 앉은 자세로 준희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엉덩이를 두 손으로 움켜쥔 정우는 흥건해진 다리 사이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서 천천히 문질러대며 가슴을 빨았다. 맨살이 아닌 청바지의 질감은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난 피부에 비해서 거칠었기에 쾌감은 두배로 증폭되어 섬세하게 분포된 신경줄을 타고 날카롭게 퍼졌다.


“하…….”


미끈대는 액체가 청바지를 흠뻑 적시고 있는 것을 확인한 정우는 준희의 숲을 손가락으로 헤쳤다. 젖을대로 젖어 미끌대는 입구에 흠뻑 젖은 손가락이 들어와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작은 돌기를 찾아내더니 손톱으로 살짝 긁었다. 깜짝 놀란 준희는 허벅지를 꽉 오무렸다.


“힘 빼고, 천천히 다리를 좀더 벌려봐요. 그렇게…….”


허벅지가 좀더 벌어지자 정우는 손가락을 깊이 밀어넣었다. 침입하는 이물감에 얼굴을 찡그린 준희는 정우의 목을 끌어안고 숨을 골랐다. 손가락이 천천히 안쪽의 뜨겁고 질척한 내부를 건드리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준희는 곧바로 첫번째 절정에 도달했다. 부들부들 떨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날씬한 다리가 정우의 허벅지를 타고 앉은 채 다리를 강렬하게 조여대며 몸을 떨었다.


정우는 그런 준희의 열기어린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흥분으로 달싹대는 입술을 물고 오래도록 입을 맞췄다. 준희가 숨이 차다고 항의해도 키스를 포기하려고 들지 않았다. 도톰한 입술이 좀더 붉어지고 부풀어오를 때까지 준희의 입술을 계속해서 빨아대며 입안으로 삼키고 혀를 밀어넣고 헤집었다. 준희는 그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허리를 움직여 허벅지 위에서 본능적인 리듬을 타면서 중심을 비벼대더니 곧바로 다시 절정에 오르고 말았다. 준희의 비명은 정우의 입안에서 삼켜졌다. 이윽고 정우가 입맛을 다시며 입술을 놓자 겨우 해방된 준희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입술이 쓰라린 듯 이마가 살짝 찌푸려지면서도 믿기지가 않는 듯 놀라는 모습도 정우는 놓치지 않았다. 절정에 오른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저 키스만으로 절정에 오른 자신이 믿기 힘든 모양이었다.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숨을 가쁘게 고르는 준희의 모습을 본 정우는 불쑥 입을 열었다.


“저기요.”


“응?”


“내가 천박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준희는 정우의 얼굴을 살폈다.


“왜 그런 말을 해?”


“미안해서.”


“뭐가?”


“나중에라도 후회하게 될까봐. 나하고…….”


그런 정우의 표정을 가만히 보고 있던 준희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더니 지퍼가 벌어진 사이로 손을 집어넣더니 이미 단단하게 흥분한 남성 위에 손을 대었다. 뜻밖의 행동에 놀란 정우는 준희의 손목을 잡고 떼려고 했다. 준희는 자신의 손안에서 점점 커지는 것을 신기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말 하지 마.”


정우가 당황한 표정으로 어물대자 준희는 어색하게 웃었다. 자신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정우는 준희의 말에 어떠한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부드럽게 자극하며 어루만지는 준희의 손놀림에 정신이 점점 아득해졌다.


“그냥 그런 거야. 오늘 밤에 특별한 의미 같은 걸 담고 싶어서 시작한 거 아니잖아. 처음엔 네가 제안한 게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거 같아.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는데, 너하고 이렇게 지금 있는 게 너무 따뜻하고 좋아. 내가 힘들어했던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될만큼, 지금은 그래. 믿겨지진 않는데, 정말 그렇다구. 그러니까 그냥 너도 그냥 생각하지 마. 처음 그러기로 한 것처럼 그냥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하자. 혼자 있기 싫은 사람들끼리…….”


준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우는 준희를 소파 위에 눕히고 청바지를 급하게 벗어내렸다. 또 하나의 생명력을 갖고 있는 듯 무성한 수풀 사이 솟은 남성은 다른 살갗에 비해 좀더 검붉었고 오만해보이기까지 했다. 방금 절정을 겪은 준희의 그 부분은 여전히 예민했고 흠뻑 젖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정우는 콘돔을 뜯어 끼운 뒤 자리를 잡았다. 가늘고 탄력있는 허벅지 사이를 벌리고 엉덩이를 들어올린 뒤 팽팽하게 긴장한 남성을 붉게 벌어진 입구 안으로 천천히 밀어넣었다. 땀이 송글송글 맺힌 정우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입에서는 저절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러다가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끝내버릴 것 같다. 몸을 끝까지 밀어넣고 난 정우는 마지막으로 준희의 귀에 간절하게 속삭였다.


“오늘 일, 후회하면 안돼요.”


준희는 생경한 이물감과 함께 밀려드는 통증에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뺨과 귓불 사이에 도장을 찍듯 간절하게 입을 맞춘 정우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중에라도, 나 잊어도 좋고, 나쁜 놈이라고 원망해도 좋은데…… 후회하지만 말아줘요. 나하고 이렇게 됐다고…… 아니, 그것만 약속해주세요.”


눈을 감고 통증과 쾌감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던 준희는 본능적으로 정우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그런 말 하지 마. 자꾸 왜 그래.”


“후회하지 말아요.”


“대체…….”


“그냥 대답만 해요. 그냥 대답만.”


열에 달뜬 준희는 그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지도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래, 그럴게. 후회 안 할게.”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준희는 정우의 어깨를 꽉 끌어 잡은 채 가쁜 숨을 내뱉었다. 처음엔 통증으로 망설이던 준희는 천천히, 빠르게, 부드럽게, 리드미컬하게 속도와 방향을 주도하는 정우의 교묘한 움직임에 점점 과감하게 하체를 움직이며 가파른 절정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준희의 허리가 활처럼 휘어 팽팽하게 시위가 당겨지고, 정우는 그런 준희의 허리를 움켜쥐고 아랫배에 얼굴을 묻고 허덕였다. 정신없이 열락에 빠져드는 두 사람의 붉은 알몸은 땀으로 번들거렸고, 결합된 두 사람의 하체는 불처럼 뜨겁게 녹아들기 시작했다.


“더……! 더……!”


준희에게는 곧 세번째 절정의 순간이 찾아왔다. 그리고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곧바로 네번 째 순간을 향해 짧고 거친 삽입을 시도했다. 모든 시간이 산산이 부서지고 감각이 수천가닥으로 갈라졌다가 합쳐지는 순간, 두 사람은 거의 같은 지점에서 동시에 절정에 올랐다. 준희는 연속으로 폭발하는 감각에 정신을 잃었고, 정우 역시 마지막 순간을 참지 못하고 소리질렀다. 정우의 등에 준희의 손톱이 강렬하게 파고들자, 정우는 준희의 목을 조르듯 움켜쥐며 어깨를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고통은 쾌감만 증폭시켜주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미칠 듯이 흥분하며 잔물결처럼 퍼져나가는 쾌감으로 몸을 떨었다.


그러기를 잠시, 정신이 다시 들자 정우는 어깨와 목이 연결되는 사이 선명하게 피가 배인 그곳을 핥아 준희를 깨웠다. 그리고 다시 예고도 없이 파고들었다. 지칠 때까지, 숨이 막혀 죽는다고 할때까지, 제발, 이라는 말밖에 외칠 게 없을 정도로 언어 감각이 마비될 때까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때까지. 몸의 모든 감각이 사라지고 자신이 주는 쾌락에만 몰두할 수 있게끔, 온몸 구석구석을 핥아대고, 흥분시키고, 흐느끼게 만들었다. 온몸의 신경을 자극하고, 곤두세우고, 잠들지 못하게 괴롭히고 흔들어대며 여자를 결코 잠들지 못하게 했다. 땀으로 젖은 소파가 불쾌해지면 거실 바닥으로, 욕실로, 침대로 장소를 옮겨가며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쾌락의 감각은 쉽게 잊혀진다. 육체가 각인하고 있는 것은 그 순간의 절대 온도와 시간들이다.


후회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미련 따위 남기지 않고 떠날 수 있다면.


 


Outro.


감정의 변화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속도가 빨라서 섣불리 인정할 수가 없었다.


준희로서는 혼란 그 자체였다.


처음부터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던 일 하나하나가 정신을 차려보니 모두 완벽하게 이루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논리가 생략되어도 말이 되는 이 상황 자체가 준희에게는 대단히 낯선 경험이기도 했다. 정우의 말이 맞았다. 한번쯤 모든 것을 잊고 미쳐서 망가져보니, 이상하게도 과거는 희석되고 아픔은 견딜만한 무게로 점차 줄어든 기분이다. 엑스터시는 기억을 지우고, 오르가즘은 수치를 잊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 반복될수록 그 효과는 탁월해서 중독될 확률마저 높다는 사실까지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이었어.”


한동안 죽은 듯이 잠이 들어 있던 정우의 귓속에 준희가 조용히 고백하듯 속삭여댔다. 침대 위에 엎어진 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정도였지만, 정우의 귀는 준희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그 말뜻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정우는 한쪽 뺨을 파묻은 얼굴을 돌려 한쪽 눈을 반쯤 떴다.


“뭐가요?”


“오늘이 처음이었다구. 나 말이야.”


그 말이 천천히 귓속에 흘러들어오고 한참 뒤에야 정확하게 이해한 정우는 당황한 나머지 엎드렸던 몸을 엉거주춤 일으켰다.


“아, 저, 정말……?”


준희는 성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준희는 움직임에 따라 매혹적으로 패이는 정우의 근육과 골격 자체에 넋을 잃고 있었다. 벌거벗은 남자의 몸을 가까이 보는 건, 아니, 그런 적은 많았다. 직업적인 눈으로 파악해야 하는 프로필에 신체 사이즈를 확인하는 건 거의 필수 코스였으니. 하지만 이런 식으로 느껴본 적은 없었다. 움직이는 하나하나의 굴곡이 남성적으로 느껴지거나 색스럽게 느껴졌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자신이 사랑했다고 생각한 현빈에게조차도 이런 도발적인 욕구를 느꼈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 아프지 않았어요?”


“전혀.”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한 정우는 엉거주춤하게 몸을 일으킨 채 준희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처음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해서…….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런 건 생각도 안 하고, 내가 좀 거칠었을텐데……. 마, 말을 해줬어야죠.”


준희는 횡설수설하면 당황한 것이 역력한 정우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말하면 네가 포기할까봐.”


“뭘?”


“네가 뭘 천국이라고 부르는지 궁금했어.”


정우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는 다시 시트 위에 얼굴을 파묻으며 웅얼댔다.


“눈치챘어야 하는데.”


“뭘?”


이번엔 준희가 되물었다. 정우는 베개를 사이에 두고 한쪽 눈만 뜬채 준희와 마주 보았다.


“처음이라는 거.”


“선수라며.”


“처음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말해줬으면 좋았을텐데.”


“그럼 뭐가 달라져?”


“환상.”


“환상?”


“그냥 그런 게 있어요.”


준희는 눈을 굴렸다.


“직업적인 비밀이라도 돼?”


“네.”


한동안 말없이 준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우는 손을 뻗으려다가 허공에서 문득 멈췄다가 도로 거뒀다.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좀전까지 그렇게 빈틈없이 꽉 맞춰진채 몇번이나 끌어안아놓고서도, 정우는 뭔가 망설이는 표정으로 더이상 준희에게 다가가려고 하지 않는 듯 했다.


“잘 때 꿈꾸고 일어나면 다 기억하는 편이에요?”


“거의 다 까먹지.”


“그럼 푹 자요. 일어날 때쯤이면 오늘 모든 일들은 이미 거짓말이 되어 있을테니.”


준희는 상처받은 눈빛으로 정우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너…….”


“자요. 푹 자요. 피곤할 거야.”


“내 말은…….”


“잘 자요.”


준희는 정우를 빤히 바라보며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다가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금세 새근새근 잠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무방비한 얼굴을 바라보며, 정우는 흔들어깨우고 싶은 충동과 오래도록 싸워야했다. 분명히 뭔가 중요한 말이었을텐데. 도대체 무슨 말이었을까. 듣고 싶은데, 들어서는 안될 것 같은 느낌. 그 말이 무엇이든간에, 정우의 마지막 결심을 뿌리째 흔들리게 만들 것이라는 이상한 직감.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결코 짐작해서는 안되었다. 최소한 여기서 나갈 때까지는.


누군가에게는 마지막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처음인 이 순간이 잊혀지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계획을 시작하면서, 많은 일들이 예상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는 법이라는 것도 배웠다. 간절히 원할수록 오히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들을 어쩌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까지도.


미안해요. 후회하지 말아달라고 마지막까지 욕심부려서.


잠든 준희의 얼굴을 바라보며 정우는 속으로 그렇게 몇번이고 용서를 빌었다. 잠에 빠져든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며 어느 하나도 빼먹지 않고 기억할 수 있도록 오랫동안 훔쳐보고 머릿속에 담아두려 애썼다.


허락된다면, 결코 지금 이 순간이 여자의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정우는 잠이 든 준희를 확인하고 침대에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Da Capo.


눈을 떴을 때, 준희는 거짓말처럼 혼자 남아 있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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