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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19
초조해 죽을 거 같다. 휴대폰을 감싸진 두 손이 땀으로 끈끈했다. 습관적으로 슬라이더를 올리고 통화버튼을 누르지만 역시나 꺼져있다는 소리만 나온다. 익숙한 기계음에 집어던지려는 것을 간신히 다스렸다. 이 전화기라도 없으면 영영 세영이와 끈이 끊어질 거 같아 불안해서.
“야아, 윤태양!”
기현이가 다가와 머리를 헝클었지만 태양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온 신경이 오직 휴대폰. 아니 이세영에게 달려가 있었다. 연락이 끊긴지 오늘까지 7일째다. 저번 주 수요일 경기가 끝나자마자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시험이니까 피곤해서, 공부하느라 힘들어서 그러려니 하고 목요일도 금요일도 참았다. 문자라도 보내줄 텐데, 아무 연락 없는 세영이가 이상했지만 다분히 시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말 내내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했다. 뭔가 큰일이 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집 근처까지 갔다가 돌아온 게 몇 번 이었다. 그리고 어제 학교에 오자마자 세영을 찾았다. 설마 아프거나 해서 연락을 못 하는 것이 아니길. 단지 그것만 아니길 기도했다. 수소문 끝에 세영이 시험을 잘 치르고, 등교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머리카락 한 올도 볼 수 없었다. 여자 반에 쫓아가고 싶었지만 선생님들의 철저한 단속 때문에 이동수업이 아니고서 여자 반에 가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동수업만 기다리고 드디어 영어수업이 되었을 때 세영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건 뭐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태양은 이제 앞뒤를 잴 수 없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세영의 반으로 보이는 여자애를 붙잡고 물어보니 양호실에 있단다. 그 길로 달려갔지만 양호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뒤로 계속 세영을 찾았지만 어긋났다. 이세영은 윤태양과 함께 같은 학교에 있으면서도 만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아주 교묘하게 어긋나는 술래잡기 같았다. 이쯤 되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안다. 이세영은 지금 윤태양을 피하고 있는 거다. 도대체 왜? 태양은 쥐고 있던 휴대폰을 책상에 굴리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왜? 왜? 왜!
“야, 애꿎은 머리가지고 그러지 말고, 나가봐.”
기현이 태양의 앞에 의자에 걸터앉으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태양은 감싸 쥔 머리를 부여잡고 책상에 이마를 쿵 내려찍었다. 소리만으로 기현의 이마가 시큰거릴 만큼 큰 소리였다.
“내가 보기엔 이세영….”
세영이라는 말에 태양이 벌떡 일어나 두 눈을 번쩍였다.
“세영이가 왜? 정말 아픈 거래?”
애처롭던 눈빛에 불안한 기색이 더해졌다.
“아프겠지. 아마도. 여기가.”
기현의 손가락이 가슴을 향했다. 기현의 손가락을 따라가던 태양의 눈이 흔들렸다. 가슴이 왜? 태양이가 바들거리는 입을 떼기도 전에 그 이유가 들려왔다.
“야! 난리 났어. 이세영 완전 망했어! 전교 20등이야! 이게 웬일이냐?”
누군가가 지른 소리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얘들이 앞을 다투어 달려 나갔다. 태양의 눈썹이 찌릿 움직였다. 이제는 당황한 기색이 짙은 눈동자였다.
“이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지. 전교 1등 이세영이 이번 시험에서 20등을 했다는….”
태양이 벌떡 일어났다. 말도 안 된다. 세영이가? 공부 빼면 시체인 이세영이? 나보다 공부가 더 중요하다는 세영이가 그럴 리가 없다. 그런데 왜! 어째서 나한테 연락을 하지 않은 거지? 시험이 힘들었다고, 어려웠다고 연락하지 않았다. 흔한 투정 한 마디 한 적 없다. 그렇게 내가 믿음직스럽지 못했나? 이 윤태양이 이세영한테는 이 정도로 별거 아니었나? 태양은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프겠지. 그래. 가슴이 아플 거야. 못 견디게 싫어서 한다던 세영의 얼굴이 생각난다. 다른 세계를 바라보는 듯 초연했던 눈빛.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미세한 끈. 분명 보았다. 못 견디게 싫어한다 했지만 사실 그 반대의 마음이 깔려 있다는 걸. 그럼 설마 울고 있을까? 가슴이 먹먹했다. 혼자서 훌쩍이고 있을 세영이를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팠다. 내가 믿음직스럽지 않아서 말하지 않은 거래도 상관없다. 그런데 내가 없는데서 울고 있는 거면 안 된다. 그건 참을 수 없었다. 태양은 무작정 뛰었다. 찾아야했다. 세영이를.
‘울지 마. 혼자서 울지 마!’
“담임한테 호출 받아 갔는데. 상담실에 있지 않을까?”
마침 계단을 올라오던 보배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한달음에 상담실로 달려가 노크를 할 찰나에 문이 열렸다. 구기중이 놀라 손을 휘휘 저었다. 담배 냄새가 나는 것이 아무래도 몰래 담배를 피운 모양이었다.
“선생님, 세영이는요?”
“어? 방금 나갔는데.”
담배 피운 것을 들켰다는 것에 온 신경이 쏠린 구기중은 방금 전의 세영과의 대화는 깡그리 잊은 듯 했다. 구기중이 다급하게 냄새를 없애는 사이 태양이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때야 구기중의 머리가 번쩍했다.
“야! 윤태양! 너 거기 서.”
뒤늦게 소리쳤지만 번개처럼 사라진 후였다.
“저 놈한테도 경고해야 하는데.”
구기중은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고는 누가 볼 새라 재빨리 상담실 문을 닫았다. 그래도 담배냄새는 쉬이 가시지 않았지만. 이게 다 니들이 속 썩여서 그런 거야. 이 놈 들아!
“체육복 들고 화장실 갔는데.”
서쪽 계단으로 달려갔다. 계단 옆에 있는 여자화장실 앞에서 세영이가 나올 때까지 서 있을 작정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봐야했다. 마음이 통했는지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세영이가 나오고 있었다. 고개를 든 세영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깊은 눈동자가 일렁였다. 아무리 점심시간이지만 여자 교실 쪽에 나타난 윤태양으로 주위가 술렁거렸다. 화장실 앞이라 더 복작복작했다. 드디어 세영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세영이 계단으로 뛰어갔다.
“이세영!”
젠장! 또 놓칠 줄 알고. 세영은 4층의 계단을 지나 옥상 쪽으로 향했다. 못 쓰는 책걸상이 옥상 문 앞에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막다른 골목.
“이세영!”
멀리서 들려오던 태양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렸다. 바보같이 위로 올라오다니. 세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피할 수도 없는 건가. 이제 정말 안녕인건가?
“피하고 싶었는데.”
세영의 낮은 목소리가 두 사람의 사이를 채웠다. 태양은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짐작이 사실이 되었다.
“왜?”
너에게 안녕이라고 말해야 하니까. 너는 네 길을, 나는 내 길을 가야한다고 말해야 하니까. 우리 이제 아무 것도 아닌 사이가 되는 거니까.
“싫어서.”
“…뭐가?”
태양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내가? 제발 내가 아니라고 해 줘.
“듣지 못했니?”
“뭘?”
“이세영이 얼마나 추락했는지. 천하의 이세영이 아주 시원하게 미끄러졌지.”
세영이 입술을 거칠게 씹으며 뒤돌아섰다. 깊은 눈동자는 여전했다. 바람에 휘날려 흩어진 앞머리도 정수리에 가지런히 묶인 긴 머리도, 모든 게 여전한데 딱 한 가지 다르다. 보고 있지 않다. 윤태양을 보고 있지 않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모르겠어? 내가 왜 추락했는지? 왜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는지?”
“……글쎄.”
태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슬픈 기색이 짙었다. 세영은 태양의 어깨너머 복도를 바라보았다. 도저히 태양의 슬픈 낯을 볼 자신이 없었다.
“…너…때문이거든.”
다부지게 말하려 했지만 떨리는 성대는 통제할 수 없었다. 굳어지는 태양의 얼굴을 느꼈지만 멈춰선 안됐다.
“너. 바로 너, 윤태양 때문이거든. 난 너처럼 강인하질 못해서 두 가지 일은 동시에 못 하겠더라. 결국 이렇게 됐지 뭐야. 그게 바로 이유야. 피하고 싶은 이유.”
미안해, 너 만큼 강하지 못해서. 너 만큼 빛나지 못해서.
“…도망가는 거겠지. 넌 지금 너 자신을 위해 도망가는 거야. 싸워보지도 않고 내빼는 거야! 그 때처럼 포기하려는 거야! 이세영. 내가 그랬지. 그렇게 도망치는 게, 지는 거라고.”
태양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도망? 그래. 도망치는 거야? 왜 치면 안 돼? 나는 그거라도 안 하면 펑! 터져버리거든. 성적은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무기란 말이야. 그것마저 잃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넌 몰라! 다 가진 네가 어떻게 알아? 넌 평생 가도 내 맘 모를 거야! 난 안 돼! 너처럼은 절대 안 돼. 내가 무너질 걸 알거든. 내가 질 걸 안다고! 그런데 어떻게 싸우란 말이야? 누구는 지는 게 좋은 줄 알아? 나도 실패하고 싶지 않아. 패배자가 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너처럼 하면 난 이미 패배자야. 난 이미 아무 것도 아니라고! 그래서 도망가는 거야! 내뺀다고 해도 좋아. 포기한다고 해도 좋아. 이제 그런 거 따위 상관하지 않아! 더 이상 비참해지고 싶지 않다고! 윤태양, 넌 몰라. 너는 절대 몰라!”
격한 숨을 넘기지 못하고 세영의 가슴이 들썩거렸다. 헝클어진 앞머리를 마구 쓸어 올렸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자신의 숨소리인지도 모르겠다.
“…세영아.”
태양이 한 걸음 올라왔다. 험한 음성으로 소리 질러도 그저 애처로운 표정일 뿐이다. 진짜 윤태양, 널 어쩌면 좋으니?
“애초에 다른 길이었어. 이제 분명해진 거야. 넌 네 길을, 그리고 난 내 길을 가면 되는 거야. 우리가 만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살면 되는 거야.”
세영이 태양의 옆을 지나쳐 계단을 내려갔다. 태양의 체취가 따라왔다. 따라오지 마. 너의 아무 것도 따라오지 마. 부디 너의 그 무엇도 남겨주지 마. 난 힘들 거야. 네가 기억나서 힘들 거라고. 미안. 미안해. 마지막까지 나만 위해서 미안해. 이렇게 이기적이니까 잊어. 내가 했던 모진 말도 다 잊어. 몽땅 잊어줘.
“넌 그 길 못 가.”
4층 복도를 지나 아래층 계단을 향하던 세영이 멈췄다.
“네가 그랬지. 못 견디게 싫어서 하는 거라고. 그래서 못 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어. 내가 그랬었지. 못 견디게 싫은 거와 못 견디게 좋은 거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아니. 아니야. 그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 넌 그만 둘 거야. 포기할 거야. 이렇게 내빼겠지. 아마 강인하지 못해서 라는 이유를 댈 지도. 못 견디게 싫어서 하는 건, 네가 포기하겠다 마음먹는 그 순간 끝이야. 네가 그만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넌 절대 그 길로 못 가. 못 견디게 좋아해서 하는 건 달라. 힘들어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멈출 수 없어. 너무 좋아하니까. 그만두면 얼마나 아플지 아니까, 힘들어도 해야 해. 끝까지 가야해. 이세영! 넌 못 가. 네 길? 그거 너 못 가! 그런 마음으로 해 봤자 넌 평생 못 견디게 좋은 거에는 따라갈 수 없어!”
태양이 세영을 지나쳐 계단을 내려갔다. 한 발 앞의 계단에서 태양의 홱 고개를 돌려 세영을 쳐다보았다. 결연한 의지가 담겨있는 눈빛이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세영을 옭아맸다.
“절.대.”
잇새로 다부지게 말하고도 한참 태양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세영을 향했다. 그리고 아주 매몰차게 고개를 돌려 내려갔다. 세영의 뺨에 한 줄기의 눈물이 흘렀다. 태양의 멀어지는 발소리에 세영이 무너졌다. 그대로 복도에 주저앉았다.
“알아. 하지만 어떡해. 난 못 찾겠어.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안 돼. 그저 해 왔던 데로 할 수 밖에 없어. 걸어 왔던 데로 갈 수 밖에...”
수업을 알리는 종이 교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세영의 눈물도 퍼져 나갔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학교가 연일 시끄러웠다.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며칠 전부터 시작된 화제로 말이 끊이질 않았다. 2반 교실 문을 열고 보배와 서경이 들어서자 잠시 조용했던 교실이 금방 시끄러워졌다. 보배는 듣기 싫은 소리에 짜증이 나서 비어 있는 책상에 수학책을 던졌다. 탁. 하는 소리가 울리자, 이목이 집중되었다.
“시끄러워 죽겠네.”
의자에 앉으며 잠자코 서 있던 서경이 한 소리했다. 그다지 크게 말하지 않았지만 입을 꾹 다물고 낮게 지르는 것이 이 상황이 정말 싫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서경! 넌 모르나 보지?”
2분단 맨 앞자리에서 떠들던 무리 중의 한명이 빈정거렸다. 서경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옆에 앉으려던 보배가 책상을 밀어젖히며 일어났다. 성격 급한 보배의 머리에서는 벌써 스팀이 팍팍 나오고 있었다.
“야! 말이라고 다 하는 게 아니다!”
“으흥, 그래? 그럼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말끝을 살짝 올리는 폼이 신경을 득득 긁었다. 보배는 숨이 거칠어졌지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세영이 D외고에서 전학 왔다는 거. 그거 사실 아니야?”
분명 사실이라는 투가 다분히 담겨있는 말이었다. 물꼬를 트자 여기저기서 질문이 쏟아졌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소문은 이제 전교를 휩쓸고 기정사실화가 되어 있었다.
“이세영, 걔 내신 잘 받으려고 온 거지? 그치?”
“D외고면 최고잖아. 거기 바로 미국 대학 진학하는 얘들도 엄청 많고, S대는 말 할 것도 없지. 다만 문제는 내신 아냐? 걔 그거 때문에 온 거지?”
“이야, 완전 이기적이야. 거기서 내신 못 받아서 S대 못 간다고 여기 온 거잖아. 그럼 우리는 어떡하라고. 아, 진짜 공부 못하면 콱 삼류대나 가라? 이런 거야?”
어디서부터 시작된 소문인지는 모르지만 일파만파 번진 세영의 전학 건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정말? 하고 반신반의하던 투가 점점 처음 전학 왔을 때 이세영의 오만한 행동과 연관되었고, 종국에는 이기적인 이세영이 되었다. 내신 잘 받겠다고 전학 온 이세영으로 자신들만 더 불리해졌다는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모두 재수 없는 이세영이라고 부르짖었다.
“그런 건지 아닌지 니들이 어떻게 알아?”
서경이 빽 소리쳤다. 많이 참은 거였다.
“그럼 한서경! 넌 알아? 이세영이 너한테 말했어? 나 D외고에서 전학 왔어. 내신 잘 받으려고 전학 온 건 아냐. 이렇게 말했어?”
방금 전의 기백은 어디로 가고 서경과 보배는 입을 꾹 다물었다.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 어떤 말도 세영에게 들은 적이 없다. 세영이 전학생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저 지방에서 왔거니 생각했다. D외고는 금시초문이었다. 유난히 성적에 민감했지만 공부 잘하는 얘들의 특성이려니 생각했지, 그 최고의 D외고에서 내신 때문에 전학 왔을 거라고는 예상도 못했다. 서경과 보배도 알고 있다. 만약 세영이 정말 D외고에서 전학 왔다면 그건 백발백중 내신 때문에 왔을 거라는 걸. 얘들이 이렇게 난리를 치는 것도 이해했다. 세영으로 인해 밀려난 내신에 화가 난 것이다. 세영을 몰랐다면 보배와 서경도 저 무리에 합류에 지금쯤 신나게 세영을 씹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세영의 이면을 알고 난 지금 저 무리에 낄 수도, 그렇다고 세영을 두둔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세영이 지나가는 투로도 언질을 해준 적이 없다는 게 너무 서운했다.
“아니겠지. 이세영은 우리 같은 것들은 안중에도 없을걸. 그런 데서 놀다 온 얘가 어디 공부 못하는 우리를 동급생으로라도 보겠니? D외고 얘들이 얼마나 기가 센데. 그런데 어디 너 네를 친구로라도 생각하겠니? 걔는 그저 성적만 생각할 걸.”
서경이 거칠게 수학책을 폈다. 반박할 수가 없었다. 정말 세영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걔는 그저 원만한 학교생활을 위해 옆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세영과 지냈던 나날이 모두 진심이 아니었다니. 배신감이 들었다.
“야! 너네한테도 잘 된 거야. 이제 이기적인 이세영 뒤치다꺼리는 그만두고 살 길 찾아. 걔가 좋은 대학가는 게 무슨 상관이야. 너 네가 잘 되 야지. 걔가 이번 시험이라도 망쳐서 다행이지. 이번에도 1등 했으면 진짜 억울해서 못 산다.”
맞는 말이다. 이제 내신 잘 받으려고 온 이세영 따위 무시하고 내 공부만 열심히 하는 거다. 하고 생각하는 보배와 서경이었지만 가슴 한 구석이 욱신거렸다. 그래도 설마 세영이와 함께 한 지난 몇 개월이 거짓이 아니겠지. 세영이가 적어도 우리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겠지. 하는 남은 믿음을 버릴 수 없었다. 직접 듣지는 않았지만 학교의 분위기만으로도 이미 세영은 자신에 관해서 어떤 소문이 있는지 알아차렸다. 하지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보배와 서경이도 세영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세영이 먼저 말해주길.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 세영이 먼저 입을 열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 이틀, 그리고 삼일. 기다리는 둘의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끊이지 않는 세영의 이야기에 보배와 서경은 마주보고 한숨을 쉬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한편, 그 시각 옆 반에서도 세영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세영이 한 쪽에서 이어폰을 끼고 있는 것도 상관하지 않은 채 수군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이 싸늘하고 냉담하다는 것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수요일 학교에 온 순간부터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 받았던 시선들이 다시 시작된 것을 알았다. 시험성적 때문이려니 하고 생각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적대적인 시선이었다. 태양이와의 일이 불거졌을 때는 시샘어린 시선이었지, 이 정도로 세영을 죽일 듯이 쳐다보는 학생은 몇 명 없었다. 뭔가가 더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떨어진 시험성적과 태양과의 이별로 지쳐있는 세영에게 음산한 학교의 공기는 세영의 핏기를 앗아갔다.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을 거야. 라고 생각하며 별 것 아닌 것이겠지 하고 넘어갔지만 더 나쁜 상황이었다.
-미안하구나. 전학 올 때부터 확실히 덮으려고 했는데. 어디서 말이 새어나갔는지…. 나 원 참, 어쩔 수 없지. 이미 다 알아버린 것을. 시간이 약이야. 조금만 있으면 얘들도 다 잊을 테니까, 그 때까지 힘들어도 신경 쓰지 말고 네 할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
구기중의 말에 세영은 어지러웠다. 이 학교로 전학을 온다고 했을 때부터 부탁했던 것은 딱 하나. 자신이 D외고에서 전학 온다는 사실을 숨겨달라는 것. 그래서 일부러 학년이 바뀌는 신학기에 딱 맞춰 전학 왔다. 전학생 소개도 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럼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하필 이 때에 터지다니. 세영은 가슴이 턱 막혔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짐작 가는 데가 있었지만 따져 보나 마나였다. 틀린 말도 아니었고, 이미 퍼진 말들을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그저 이 폭풍이 빨리 잠재워지길 바랄 뿐이었다.
“이세영. 옆자리 비었니? 앉아도 돼?”
허락을 구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공다운이 세영의 옆자리에 앉았다. 세영은 슬쩍 쳐다볼 뿐 다시 수학 문제집을 풀었다. 아이팟의 음량을 더 올렸다.
“귀 먹겠다. 왜? 듣기 싫은 말이라도 있어?”
다시 1등을 차지한 공다운은 기세등등했다. 음량을 높였음에도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공지랄의 목소리를 막을 수 없었다. 샤프를 쥐고 있는 세영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난 네가 개천에서 용난 줄 알았는데. 그거 있잖아. 과외도 안하고 교과서만 봤어요. 이런 타입? 사실 네가 그렇게 굴기도 했고. 난 정말 혼자서 열심히 공부해요 라는 얼굴로 다녔잖아. 그런데 너 나보다 꽤 하더라. D외고 영어과 출신? D외고면 과외 다섯 개는 기본? 걔네는 영어도 리딩 따로 리스닝 따로 뭐 이렇게 과외 한다며? 그래? 정말? 어머, 돈이 썩어 나는 구나.”
세영은 이어폰을 잡아당겼다. 공다운의 입가에 아주 고소한 웃음이 맺혀있었다.
“개천에서 용이 아니라 뱀이겠지. 이세영! 너 용꼬리도 못 되니까 뱀 머리라도 해 보겠다고 전학 온 거 아냐? 너 때문에 피해보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인지 아니? 너 때문에 모두 한 등수 씩 밀려났잖아. 너 그냥 놀던 물에서 놀아. 왜 그 물에서 못 살겠으니까 여기로 와서 물 흐려놔? 너 때문에 나는 희생되어야 하는 거야? 넌 굳이 학교 안 와도 검정고시를 보든 미국유학을 가든지 하면 되잖아. 나는 너처럼 과외 다섯 개씩 뛸 재력이 안 돼서. 그래도 나도 S대 가고 싶거든. 그러니까 네가 좀 아량을 베풀래? 응?”
주위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이번 소문에 대해서 세영의 면전에 대고 말하기는 공다운이 처음이었다. 모두 이세영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에 대해 집중하고 있었다. 세영은 꽉 잡았던 샤프를 놓고 수학문제집을 덮었다. 세영의 고개가 공다운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과외 다섯 개? 그거 너 같은 얘들이 아무리 해도 못 쫓아오니까 만든 루머 아냐? D외고 얘들 과외도 안하고 교과서만 봤어요 하는 타입 생각보다 많아.”
공다운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사실이었다. 많지는 않지만 아주 드물게 그런 얘들이 있기는 있었다. 물론 과외 여러 개 하는 얘들이 비하지는 못했지만.
“헤~ 그래? 그럼 이세영 넌 걔네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네? 못 견디고 나왔으니. 음, 다른 말로 하면 실패했다고 해야 하나? 적응 못해서 온 거 아냐?”
세영의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뭐...뭐라고?”
“그러니까 이세영 넌 D외고에서는 하위권이었다는 말 아냐? 뭐야, 별거 아니었잖아.”
세영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중심을 잃은 의자가 좌우로 휘청대더니 결국 넘어졌다. 둔탁한 쇳소리가 울리고 긴장감이 감돌았다. 세영의 눈이 시큰거렸다. 눈을 깜박였다가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거 같았다. 여기서 눈물까지 쏟아진다면 당장 저 창밖으로 몸을 던질 거다. 세영은 이를 꽉 물었다. 제발, 흐르지 마. 이세영 제발!
“왜? 할 말 없니? 없겠지. 천하의 이세영이 패배자였다니. 이거, 안쓰러워 어떡하니?”
패배자!
세영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의식적으로 잊으려고 지우려고 노력했던 단어.
-노력해봐. 다들 똑같이 입학했어. 그런데 차이가 나는 건, 네가 열심히 안 했다는 거야. 이렇게 낙오되고 싶니? 여기서 패배하면 넌 평생 그렇게 사는 거야. 전학은 무슨! 해! 열심히 하면 안 될 게 뭐가 있어.
-이세영, 너 들어올 때 전교 5등 안에 들었다며? 그런데 전학 간다고? 진짜 쪽팔리게 뭐냐. 그러고 가봤자 낙오된 사람으로 밖에는 안 봐.
-너 차라리 자퇴하는 게 나을 걸. 그게 더 모양새 있다. 뭐 어차피 오십보백보 차이 패배자지만.
깊숙이 묶어두었던 기억의 편린들이 쑤셔왔다. 담임선생부터 같은 과 얘들이 했던 말들이 쩌렁쩌렁 울렸다. 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이렇게 쉽게 떠올라 다시 세영의 심장을 좀 먹고 있었다.
‘그래, 이세영! 넌 패배자야! 낙오자야!’
“왜 이렇게 조용해?”
긴장감이 고조된 공간이 깨졌다. 뒷문을 열고 들어오던 1반 반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교실로 들어오는 다른 인물로 모두 숨 쉬는 것도 잊었다.
“뭐야? 왜 그래?”
평소답지 않은 쉬는 시간의 조용함에 태양이 짧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학시간 전답게 남녀가 모여 한바탕 난리 브루스를 치고 있어도 아까울 시간인데 방과 후 같이 고요한 교실 안이 이상했다. 흐르던 눈길이 4분단에서 멈췄고, 이 고요함의 원인과 눈을 마주치기 전 한 명이 정신없이 책을 들고 앞문으로 뛰쳐나갔다. 띠리리리. 하는 방정맞은 종소리와 함께 교실로 들어오던 수학 선생을 제치고 달려 나가는 사람은 세영이었다.
“이세영! 너 어디가! 임마, 종 쳤어! 어? 야! 윤태양! 넌 또 어디 가!”
수학 선생의 외침에도 태양은 복도를 질주했지만, 이미 세영은 온데간데없었다.
“젠장!”
태양의 거친 욕설이 메아리쳤다.
파란 하늘의 한 귀퉁이에서 스멀스멀 붉은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세영은 가방을 챙기던 손길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보이지 않던 구름떼가 운동장 위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구름 사이에서 옅은 붉은 빛이 숨어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양호실로 뛰어 들어가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는데 일어나 보니 여섯시가 넘어있었다. 일어나보니 일어나면 문 잠그고 열쇠는 교무실에 걸어놓으라는 양호선생님의 전언이 담긴 쪽지가 있었다. 아까의 맘 같아서는 수면제 다량을 삼켜도 잠이 오지 않을 거 같았는데, 6교시부터 꿈도 꾸지 않고 쭉 잤다. 사람이란 동물이 대단한 건지, 이세영이란 인물이 대단한 건지. 세영은 자조하며 가방을 챙겨 들었다. 기계적으로 계단을 내려와 운동화로 갈아 신고 현관을 나섰다. 현관을 나서자 붉은 기운이 만발해져 있었다. 유유히 움직이던 구름떼는 이미 저 멀리 향하고, 빨간색 그라데이션이 펼쳐졌다. 데자뷰. 언젠가 이런 노을을 본 적이 있는 거 같다. 사방이 붉은 빛. 세영은 노을에 홀려 운동장으로 걸었다. 푸른 잔디밭이 붉은 노을에 젖어 오렌지빛을 내는 거 같기도 하다. 오렌지빛. 톡 쏘는 오렌지 향기가 느껴진다. 데자뷰. 어디선가 맡아보았던 향기. 골대 가까이에 낡은 축구공 하나가 서 있었다. 익숙한 둥근 물체. 무언가 세영을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축구공을 발견하자마자 저절로 세영의 발걸음이 움직였다. 데자뷰. 언젠가 보았던 공. 익숙한 몸짓이 기억난다. 조금씩 달렸다. 서서히 빨라지는 몸을 느끼며 뻥! 공을 찼다. 직선으로 날아가리라 생각했던 공이 오른쪽으로 꺾여 픽 떨어졌다. 도르르르 굴러 다시 제자리로 왔다. 휘휘 축구공이 돌았다. 헛웃음이 났다.
“너도 제자리야? 결국 못 가고 되돌아 온 거야?”
같은 자리에서 멈춘 축구공이 세영 자신 같다. 제자리. 저기를 가려고 했는데 다시 이 곳이다. 다시 시도해도 같은 결과일 것이다. 한번 찍힌 낙오자, 패배자라는 낙인은 사라지지 않는다. 노력해도 다시 위로 올라갈 수 없는 거다. 세상은 그대로 있는데, 내가 있는 이 자리만 푹 꺼진다. 한없이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발등으로 차는 거라고.”
세영의 머리칼이 휘날렸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신기루였으면. 네가 여기 없었으면. 어느 새 가까이 온 태양을 피해 세영이 빠르게 걸었다.
“또 도망 가? 그러니까 패배자라는 소리를 듣는 거야.”
패배자. 패배자. 패배자!!!
그만! 그만해!
“아니야! 아니야!”
세영이 두 귀를 막고 머리를 흔들었다. 목이 꺾일 정도로 격하게.
“그럼 뭐야?”
피식피식. 태양이 웃고 있었다. 조롱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뒤로 돌았다. 태양의 입가가 한쪽으로 말려있다. 비웃고 있다.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다.
‘글쎄, 뭘까? 내가 뭘까? 나는 뭘까? 공부 열심히 하고 말 잘 듣는 모범생?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로봇? 잘난 줄 알았는데 아무 것도 아닌 그저 그런 사람?’
“…모…르겠…어….”
세영은 얼이 빠져 있었다. 태양은 놓여있는 공을 뻥 찼다. 가볍게 골대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저벅저벅 걸어와 세영의 볼을 훔쳤다. 축축함이 느껴졌다. 눈물이 났나 보다. 한 줄기. 두 줄기. 축축함이 끊이지 않았다. 축축함 위로 태양의 뜨거운 손가락이 지나갔다.
“바보. 모르는 게 당연하지. 열여덟 살에 그런 걸 어떻게 알아?”
희미한 세영의 동공이 또렷해졌다.
‘무슨 뜻이야?’
“고작 18년이야. 앞으로의 나날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세월이었다고. 이만큼 살아놓고 나는 이런 사람이다 정해버리는 건 너무 재미없지 않아?”
응? 세영의 눈이 반문했다.
“너...넌 알잖아. 못 견디게 좋은 게 어떤 건지 알잖아.”
혼란스러운 세영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던 태양이 덥석 세영을 안았다.
“풋. 나는 특별하니까!”
마주한 태양의 가슴이 간헐적으로 들썩였다. 하하하. 웃음소리가 들린다. 태양의 턱 아래에 묻혀있던 세영의 머리가 들렸다. 환하게 웃고 있는 태양의 얼굴을 바로 아래에서 올려 보자 색다른 느낌이 일었다.
“풋.”
태양을 따라 웃음을 흘렸다.
“어?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 뭐 나는데.”
꽉 조였던 팔을 풀고 세영과 눈을 맞춘 태양의 눈가에 장난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세영은 휘었던 입가를 한일자로 경직시켰다.
“좋아하는 게 뭐야?”
따스한 태양의 목소리가 바로 위에서 들려왔다.
‘글쎄. 뭘까? 그런 게 있을까? 나에게?’
“나는 보슬보슬 비 내리는 날이 좋아. 촉촉해진 그라운드에서 축구할 때의 기분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어. 미끄러지고 넘어져도 진흙에서 구르는 그 기분은 끝내줘. 형이랑 게임할 때도 좋아. 둘 다 승부욕이 강해서 누구 한 명이 쓰러질 때까지 하거든. 이기든 지든 게임이 끝나고 나면 우리 둘 다 바닥에 쓰러져. 그리고 서로를 보고 씩 웃지. 잠자는 것도 좋아. 특히 이기고 돌아와서 숙면을 취할 때. 먹는 것도 좋아한다. 가리는 거 없이 다. 축구경기 보는 것도 좋아. 프리미어 리그는 비디오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봐. 책 읽은 것도 좋아. 장르 구분 없이 그냥 손닿는 대로. 이런 거 말이야.”
‘그런 거?’
세영의 눈빛이 몽롱했다. 기억을 헤매고 있었다.
“…나도 비 오는 날 좋아해. 창밖으로 비 내리는 거 보고 있으면 내 마음도 씻겨나가는 거 같거든. 비 내리고 난 후도 좋아. 세상이 깨끗해져서. 그리고 비 온 뒤의 해가 상큼해서. 언니랑 얘기할 때도 좋아. 언니는 뭐든지 명쾌하거든. 언니 말을 듣고 나면 기분이 좋아져. 잠자는 것도 좋아해. 꿈꾸는 게 재밌거든. 생선은 엄청 좋아해. 식탁에 생선이 나오면 그 자리에서 다 먹어. 책 읽는 것도 무지 좋아. 책 속에는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거든. 눈을 감고 다른 세계를 상상해. 멋있고 예쁘고 그런 것이 가득해.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것도 좋아. 책 속에는 내가 모르는 있는 것들이 그득하거든. 하나씩 새로운 걸 발견할 때마다 가슴이 떨려. 이...이런 게 좋아...하는 거야?”
좋아하는 것을 기억해낼 때마다 벅차오르는 가슴에 어느 순간부터 세영의 말이 빨라졌다. 눈물이 흐르던 양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응. 그거야. 그럼 이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건 뭐야?”
“…제일 좋아하는 거?”
빠른 숨쉬기에 들썩이는 세영의 등을 태양이 천천히 어루만졌다.
“나는 그 중에서 공을 차는 순간이 제일 좋아.”
‘나는...나는...’
“그래서 그걸 못 견디게 좋아하게 된 거야.”
세영은 혼란스러웠다.
‘나는...나는!’
“난! 새롭게 알게 되는 그 순간! 내가 모르는 것을 알게 된 그 순간. 그래, 그 때가 제일 좋아!”
세영은 누가 세차게 머리를 때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자신도 모르고 있던 자신이었다.
“그럼 세영이, 넌 공부하는 게 못 견디게 싫은 게 아니야. 못 견디게 좋아하는 거지.”
세영이 태양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정말? 내가 그래?’
태양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영아, 못 견디게 좋으면 지고, 이기는 거. 그런 거 없어. 못 견디게 좋아하는 거에는, 미치도록 좋아하는 거에는 그런 거 없어. 패배자, 승리자. 이런 거 없어. 그냥 좋아하니까 하는 거야. 그냥 그 이유 하나로.”
태양이 세영을 살며시 안았다. 세영의 눈에서 다시 말간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좀 전과는 다른 의미의 눈물이었다. 뭔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복합적인 눈물이었다. 기쁨이 녹아있고, 회한이 스며있고, 벅참이 묻어있는 그런 눈물이었다.
나에게도 좋아하는 게 있었어. 즐거운 게 있었어. 가슴이 뜨거워질 정도로 두근거리는 게 있었어. 사실 좋았던 거다. 책을 보는 게, 문제를 풀고 몰랐던 것들을 알아가는 게. 언제부터 부모님들이 요구하고 선생님들이 재촉하면서 잊어버렸던 기쁨. 주위의 기대에 닦달에 채근에 그 기쁨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래. 사실은 좋아했었다. 즐거워했었다. 그냥 좋아했었다. 너무 좋아서 읽고 또 읽고, 풀고 또 풀고 했었다. 이기고 지고 그런 게 뭔지도 몰랐다. 등수도 없었다. 그 곳에는 낙오자도 패배자도 없었다. 그 곳에는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게 좋은, 그게 마냥 좋은 이세영만 있었다. 그런 이세영.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런 이세영. 찾았다. 그 이세영을 찾았다.
“응. 응. 태양아. 응. 그래. 응. 응.”
세영은 연신 미소를 지으며,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응, 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래, 태양아, 네 말이 맞아. 네 말이 모두 맞아.’
붉은 노을이 새빨개지고, 다시 저편에서는 거무스름한 색깔이 다가오고 있었다. 태양은 마지막까지 어둠에게 지지 않으려 빨간빛을 뿜어댔다. 태양은 강렬했다. 그리고 따뜻했다. 마지막까지 스러지지 않으려 자신을 분출하는 태양 아래서 붉은 노을 아래에서 태양을 껴안고 비로소 마음이 가라앉았다. 아주 편안한 마음을 느꼈다. 아주 오랜만에 세영은 안식을 얻었다. 태양이 스러진다. 태워도, 태워도 태워지지 않는 빛을 쏟아내면서.
_20
목이 탔다. 너무 오랫동안 탕에 있었는지 눈앞이 부옇다. 쪼글쪼글해진 손바닥에 닿는 은색 냉장고 손잡이가 시원했다. 덜 말리고 나온 탓에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타월로 비비며 냉장고 안쪽 깊숙이까지 살폈다. 아침에 마셨던 오렌지주스 병도 주말에 사다놓았던 초코우유도 없었다. 세영의 왼쪽 눈이 살짝 찡긋했다.
“엄마, 뭐 마실 거 없어?”
긴 머리를 털며 세영이 거실에서 책을 보고 있는 엄마를 불렀다.
“아침에 오렌지 주스 다 마시고 아무 것도 없어. 그렇잖아도 내일 아주머니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목 마르니?”
책을 뒤집어 탁자에 놓고 엄마가 세영을 돌아보았다. 약간의 걱정이 담긴 표정이다. 아직은 낯선 엄마의 다정한 얼굴.
“그럼 편의점 갔다 올게.”
대충 말린 머리를 손으로 빗어 넘기고 제법 추워진 날씨를 생각하며 두툼한 점퍼를 챙겼다.
“이 밤에? 얘, 위험해. 그냥 물 마셔. 내일 아주머니한테 사다놓으라고 한다니까.”
날쌘 몸으로 벌써 운동화에 발을 넣고 있는 세영에게 엄마가 다가왔다. 아직 다정해진 엄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세영이었다.
“아냐. 탕에 오래있었더니 덥기도 하고. 뭐 아홉시도 안 됐는데. 요 앞이니까 금방 다녀올게요.”
계속 만류하는 엄마를 뒤로 하고 세영은 밖으로 나갔다. 싸한 바람이 뜨거운 뺨을 스쳤다. 좀 전까지 함께한 탕의 열기가 순식간에 날아갔다. 골목길에 쌩쌩, 하고 바람소리가 생생했다. 이제 겨울이라더니. 정말 그렇다. 11월이 되고 부터는 겨울의 기운이 확 느껴졌다. 제법 말렸다고 생각했던 머리칼이 굵게 뭉쳐 굳었다. 말리고 올 것을 하고 잠시 생각하던 사이에 골목길을 나와 큰 길로 나갔다. 드문드문 사람들이 바람에 몸을 움츠리고 빠른 걸음으로 세영을 지나쳤다. 세영도 점퍼의 지퍼를 목까지 쭉 올리고 팔짱을 꽂았다. 다시금 엄마의 다정한 얼굴이 떠올랐다. 엄마가 다정해지고, 아빠가 세영을 챙기기 시작한 건 몇 주 전부터다. 정확히 중간고사 성적표가 배달되었던 그 날.
-너 이게 뭐야? 너 이러려고 거기 간 거야? 응?
창백해진 엄마는 이마를 짚으며 앙칼진 목소리로 세영을 긁었다. 옆에 앉은 아빠는 평소 무표정답지 않게 참담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너 뭐하고 다녀? 이게 점수니? 어쩜, 이걸 점수라고 받아와? 엄마 아빠 얼굴에 먹칠을 해도 어느 정도껏 해야지. 우리 집안에 이런 점수 맞은 애는 네가 처음이야!
세영은 앞의 탁자를 응시할 뿐이었다.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고 엄마의 화를 다 받아줄 심산이었다.
-그만해.
계속 소리를 지르는 엄마의 말을 아빠가 막았다. 묵묵히 엄마의 말을 들어줄 작정이었던 세영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세영이 너도 할 말이 있을 거 아냐. 왜 이렇게 되었는지, 어떻게 할 생각인지. 말해봐라.
세영이 일반고로 전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도 아빠는 아무 말이 없었다. 길길이 뛰는 엄마의 옆에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 때 세영이는 아빠가 이미 자신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라고. 차라리 엄마처럼 화라도 냈으면 하고 생각할 정도로 아빠에게 섭섭했고 슬펐다. 그런데 아빠가 입을 열었다. 세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왜? 어떻게? 지금 아빠는 나에게 나에 대해서 묻고 있었다. 나 스스로 나에 대해 말할 때가 오리라고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는데, 열여덟 인생 처음으로 부모님이 세영에게 세영의 의사를 물었다. 세영은 마른 입술을 적셨다.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이를 악물고, 생각했다. 태양이를.
‘태양아, 힘을 줘.’
-엄마, 아빠. 저 공부하는 거 좋아해요.
세영이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데 이게 뭐야! 응?
그 사이를 못 참고 엄마가 성적표를 거칠게 흔들었다.
-여보!
아빠의 한 마디에 씩씩거리던 엄마가 입을 다물었다. 세영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마음에 짊어지고 있던 모든 것을 쏟아낼 시간이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기회였다.
-성적을 위한 공부 말고 날 위한 공부가 좋아요. 엄마, 아빠! 저요. 책 읽는 거 좋아했어요. 엄마 그랬었잖아. 어렸을 때, 언니랑 나랑 잠자리 들기 전에 항상 동화책 읽어줬잖아. 나 그 때가 너무 좋았어. 상상의 나래를 펼쳤거든. 그래서 책 읽고 싶어서 글도 빨리 배우려고 했잖아. 학교 들어가서 새로운 것을 알 때마다 너무 즐거웠어. 이 세상에서 내가 아는 것이 늘어날 때마다 재밌고 신기해서. 엄마, 난 있지. 국어, 수학, 영어 이렇게 과목으로 생각한 적 없어. 글 쓰고 읽고 숫자 배우고, 문제 풀고, 모르는 언어를 알아듣는 거라 생각했어. 국어 100점, 수학 100점 이렇게 생각한 적 없어. 그냥 배우는 게 아는 게 좋았어. 그런 나에게 엄마는 학교에 들어간 때부터 그 모든 개념을 등수로 바꿔줬잖아. 1등, 1등, 1등. 뭐든지 1등으로. 과목도 1등이어야 하고. 얘들 사이에서도 1등이어야 하고. 백일장에서도 사생대회에서도 1등이어야 했잖아. 나는 그냥 배우는 게 좋고, 친구들이랑 노는 게 좋고, 글 쓰는 게 좋고, 그림 그리는 게 좋았는데, 엄마는 1등을 원했어. 나 말이야. 그래서 1등을 해야 하는 건 줄 알았어. 언니도 해내는 것이었으니까. 사촌들도 해내는 거였으니까. 나도 그래야 하는 줄 알았어. 엄마, 아빠. 그래서 내가 남은 게 뭔 줄 알아? 이기적인 나였어. 친구 한 명 없고, 같이 밥 먹어 줄 그런 친구 한 명 없는 쓸쓸한 나만 남았어. 겉으로는 안 외로운 척, 안 쓸쓸한 척 했어. 모두 앞에서는 언제나 당당하고 도도한 이세영이어야 했으니까. 근데요. 엄마, 아빠. 저 힘들었어요. 같이 이야기 할 친구가 있었으면 했어요. 내 고민을 들어줄 든든한 선생님도 있으면 했어요. 저를 만능으로 보는, 신경 쓰지 않아도 잘하는 그런 학생으로 보지 않는 누군가가 있으면 했어요. 외고에서는 견딜 수 없이 힘들었어. 내가 뭐든지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거든. 서로를 적으로 보는 그 곳에서 점점 떨어지는 성적을 보며, 난 정말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더라고. 왜 이런 초라한 모습으로 그 곳에 있어야 하는지. 너무, 너무 숨이 막혀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그런데 한 번도 제가 어떤지 물어봐 주지 않았잖아요. 제 생각, 제 의견! 한 번도 묻지 않았잖아요!
세영의 손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가슴이 뻥 뚫렸다. 시원했다. 가슴을 훑고 내려가는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참 시원했다. 엄마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아빠의 표정은 복잡했다.
-저도 떳떳하지 않아요. 이제 성적 따위 아무 것도 아닌 거 알지만 이 성적표. 그래요. 부끄러워요. 내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결과물이라서. 내 자신을 내팽개치고 무시한 걸 보여주거든요. 엄마, 아빠. 나 아직도 잘 몰라요. 뭘 하고 싶은지, 뭐가 되고 싶은지. 그런데 나 이제 즐겁게 할래. 1등을 위해서 공부하는 게 아니라 즐겁게 공부 할래요. 내가 좋아하니까. 너무 너무 좋아하니까요. 엄마, 아빠. 저를 여기까지 이끌어주신 거 너무 감사해요. 엄마, 나 잘되라고 그런 거 알아. 하지만 이제 나 혼자 갈래. 어디가 목적지인지는 모르지만, 나 이제 혼자 갈 수 있어. 엄마가 끌어주지 않아도 나 이제 똑바로 걸어갈 수 있어. 그냥 지켜봐 줘. 내가 씩씩하게 가는 모습을 응원해 줘.
세영은 일어났다. 열여덟 살, 딸의 생생한 생각을 처음 들은 부모님은 넋이 나가 있었다. 끝났구나. 세영은 큰 숨을 뱉었다. 그리고 느꼈다. 다시 시작할 시간이라는 것을. 아주 옛날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 진정한 자신의 길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그 후 부터다. 엄마가 어색하게 다정한 기색을 보이고, 무뚝뚝하던 아빠가 저녁 식탁에 앉아 세영의 하루를 묻기 시작한 건. 대꾸도 못할 정도로 불편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따뜻했다. 그리고 점점 엄마도 아빠도 그리고 세영 자신도 달라지고 있는 가족 간의 변화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었다.
“어? 닫았네.”
생각에 빠져 있던 세영이 닫혀있는 편의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임시 휴무라고 쓰인 종이 한 장이 문 앞에 달랑달랑 붙어있었다. 돌아갈까 하다 여기까지 나온 게 아쉬워 아파트 단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제법 큰 아파트 단지이기 때문에 여기보다는 가게가 더 많았다. 멈췄던 바람이 쌩 불자, 세영은 몸을 더 움츠리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달리게?”
운동화 끈을 꽉 여미는 태양의 머리 위로 바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야! 지치지도 않아? 오늘 경기하고 온 녀석이 뭘 또 뛰고 그래? 좀 쉬어. 피로 쌓이면 안 좋아. 그거 나중에 펑 터진다.”
태양이 일어나 신발장 위에 놓은 야구 모자를 푹 눌러썼다.
“이게 피로 풀리는 방법이거든.”
태양이 양 팔을 앞뒤로 흔들며 픽 웃었다. 바다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으이그. 알았어. 나 안 자고 있을 거야. 과제 있어.”
태양은 챙기려던 열쇠를 도로 현관 앞 선반 위에 얹었다.
“윤태양! 나가는 김에 콜라 하나 사다줘. 아까 고기 먹은 게 더부룩하네.”
현관문이 거의 닫히려는 찰나, 바다가 고개를 쏙 내밀고 태양에게 외쳤다. 태양은 막 올라온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고개를 끄덕였다. 9, 8, 7, 6, 5, 4…. 빨간 불빛이 옮겨가는 모습을 보며 태양은 한숨을 뱉었다. 흘깃 엘리베이터 벽에 붙은 거울을 보았다. 복잡한 표정이 잡혔다. 태양은 다시 한숨을 뱉고, 남색 져지 지퍼를 목까지 쭉 올렸다. 그와 동시에 띵, 하며 문이 열렸다. 저벅저벅 걸어 나가던 태양은 밤의 기운이 느껴지는 아파트 입구에 나가자마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시원한 바람이 그의 폐부를 식혔다. 하지만 머리는 점점 엉켰다.
-좋은 기회야. 태양이 너도 한번쯤은 생각했을 거 아냐.
감독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숨이 빨라졌다. 아파트 정문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래요. 태양군. 지금도 늦은 감이 있어요. 그래서 더 빨리 추진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오늘 처음 만난 협회 이사라는 백발이 성성한 분의 목소리도 들렸다. 속도를 올렸다. 초겨울로 진입한 날씨답게 차가운 밤바람이 온 몸을 스쳤다. 가로등 사이 언뜻언뜻 보이는 낙엽이 떨어진 앙상한 나무들을 제쳤다. 정문을 돌아 큰 길로 달렸다. 해가 빨리 지는 탓인지 몇 주 전만 해도 이 시간대에 시원한 바람을 즐기러 나왔던 사람들이 많이 줄었다.
-부모님과도 한번 상의해 봐야겠지만, 태양군의 생각이 제일 중요하죠. 어때요?
어때라? 당연히 예스다. 그랬었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간혹 생각했었다. 무엇 때문에 훈련하면서도 공부를 해 왔던가.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도 그런 이유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내셨던 것임을 태양은 알고 있다. 하지만…. 태양은 자주 가는 편의점 앞에 멈춰 숨을 가라앉혔다. 너무 세게 달렸다. 양 무릎을 붙잡고 몇 번 숨을 토해 호흡을 안정시켰다. 달리면 뻥 뚫어지리라 생각했는데 더 복잡했다. 태양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편의점문을 밀었다.
“어서오세요.”
띠링, 청아한 종소리와 함께 굵은 알바생의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갑자기 훈훈한 열기가 덮치자 약간의 더움을 느끼며 태양은 음료코너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몇 번 눈을 감았다 떴다. 세영이었다. 얼기설기 엉켜있는 긴 머리를 넘기며, 오렌지 주스를 고르고 있는 세영이었다.
“나는 오른쪽 거 더 좋아해.”
어느 것을 고를까 양 손에 잡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세영은 낯익은 음성에 홱 고개를 들었다. 태양이 씨익 웃고 있었다. 이틀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어머. 웬일이야?”
잡고 있던 오렌지 주스를 가슴에 안고 세영이 쪼르르 태양에게 다가갔다. 이틀 만에 보는 얼굴인데 태양의 얼굴이 해쓱하다. 경기가 힘들었나? 세영이 습관적으로 오른쪽 볼에 바람을 넣었다. 걱정스러운 생각을 할 때마다 하는 행동이었다.
“달리기 하는 중. 그런데 형이 콜라 사다달라고 하기에. 왜 얼굴은 찡그려?”
태양이 세영의 부푼 볼을 검지로 푹 찔렀다. 세영의 입에서 바람 빠진 풍선 소리가 났다. 태양이 큭큭 웃었다.
“뭐야. 경기는 잘 끝났어?”
“…응. 뭐, 그럭저럭.”
웃던 태양의 얼굴이 굳어진 건 착각인가? 세영은 뭔가 더 묻고 싶었지만, 태양이 잠깐만 하고 콜라를 집었다.
“넌 여기까지 웬일이야? 밤에 위험하게.”
“그냥. 오렌지 주스가 너무 마시고 싶어서. 그런데 우리 집 쪽 편의점이 닫혔더라고.”
“그럼 그냥 집에 가지. 여기 까지 와? 가까워보여도 여기 단지가 넓어서 거리가 꽤 된다고. 요즘에 사람도 많이 없어서 밤에 얼마나 위험한데.”
태양이 미간을 좁히고 세영을 책망했다. 태양의 걱정이라는 것을 아는 세영은 그저 태양의 말에 추임새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태양은 밤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이야기하며 세영의 품에 안긴 오렌지 주스를 받아들었다.
“음. 그런데 오른쪽이야? 왼쪽이야?”
아무 생각 없이 고개만 끄덕이던 세영은 카운터로 걸어가던 태양이 갑자기 멈춰 묻는 질문에 눈을 크게 떴다. 응? 이라는 반문이었다. 태양은 가슴에 안은 오렌지 주스를 고갯짓했다.
“아. 오른쪽.”
네가 좋아한다니까. 라는 말은 삼켰다. 세영은 다른 하나의 주스를 집어 다시 원위치 시키고 옆에 진열된 초코우유를 집어 들었다.
“초코우유 귀신, 이세영.”
세영은 헤헤 웃으며 태양을 앞질러 카운터로 갔다. 태양은 그런 세영의 뒷모습을 보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세영이 마음의 짐을 다 끌어낸 후로는 웃기도 잘 하고 농담도 잘 했다. 처음 자존심에 똘똘 뭉쳐 매서운 눈빛을 빛내던 이세영이 이렇게 잘 웃고, 부드러움이 물씬 풍겨나는 눈매를 가지게 될 줄이야. 뭐든지 열심히 하는 전의 세영의 모습도 좋았지만, 모든 것을 풀어내 편안하고 안정적인 현재 세영의 모습은 태양의 마음을 따스하게 만들었다.
“안녕히 가세요.”
띠링, 똑같은 종소리와 알바생의 인사를 받고 편의점을 나섰다. 세영의 오렌지 주스와 초코우유, 그리고 바다의 콜라를 따로 담은 봉투를 들고 세영과 보폭을 맞췄다. 편의점에 들어설 때보다 강한 바람이 둘을 지나갔다. 세영의 어깨가 움츠려들었다.
“춥지?”
세영 곁으로 좀 더 밀착했다. 그녀가 춥다면 한 줌의 바람도 그녀 곁을 스쳐선 안 되니까.
“그런데 머리도 안 말리고 왔어?”
아직 물 기운이 있는 세영의 머리를 보고 태양이 찡그렸다.
“이렇게 추운 줄 몰랐지. 정말 겨울인가 봐.”
세영이 다시 배시시 웃는다. 미치겠다. 요즘 너무 자주 웃어서 태양은 안달이 났다. 세영이 밝아진 건 좋은데, 너무 웃음을 남발하는 탓에 남학생들 눈이 끈적끈적해졌다. 저런 귀여운 웃음은 윤태양 앞에서만 보여줘야 할 것을. 태양은 쓰고 있던 야구모자를 세영의 머리에 얹었다. 큰 모자가 세영의 눈썹까지 눌러졌다. 세영이 고개를 올리면 모자가 눈까지 덮을 거 같았다. 세영은 손을 뻗어 모자 뒷부분을 당겼다. 모자가 뒤로 젖혀지면서 태양의 내음이 훅 다가왔다. 야릇한 그의 냄새에 양 볼이 뜨거워졌다. 모자를 당기던 손을 볼에 가져다 댔다. 뜨겁다.
“신기해.”
“응?”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는 큰 길 신호등 앞에서 멈췄다.
“벌써 겨울이잖아. 막 잎사귀가 파래질 때 너를 만났는데,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도 지나서. 이제 겨울이라는 게.”
세영이 점퍼소매 아래로 삐져나온 양 손을 호호 불며 말을 이었다. 입 안에 잠겨있던 열기가 빨개진 손끝을 녹였다.
“음. 그러네.”
태양이 세영의 왼손을 잡아채 져지 주머니 안에 넣었다. 세영이 놀라 태양을 올려보았다.
“장갑을 가져올걸.”
하는 태양의 말 뒤로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앞으로 나가는 태양의 발에 맞춰 걸었다. 2인 3각을 하는 기분이었다. 발이 묶인 건 아니지만 태양의 손과 얽혀 오른발, 왼발 하는 건 꼭 2인 3각을 하는 것 같았다. 내년 체육제에서는 태양이와 2인 3각 경기에 나가볼까? 물론 같은 팀이 된다면 가능하겠지만. 세영은 운동장에서 태양과 2인 3각 경기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키득거렸다. 그런데 3학년이구나.
“뭐가 그렇게 재밌어?”
“응? 아니, 그냥.”
밤에 태양과 이렇게 길을 걷는 게 행복했다. 고즈넉한 달빛 아래에서 그의 모자를 쓰고, 그와 잡은 손을 따뜻한 그의 주머니에 넣고 걷는 이 순간이 너무 행복했다. 상상도 못했던 순간이 지금 현실이 되었다. 바로 태양이 있어주었기에 가능했던 일. 세영은 태양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세영의 시선을 느꼈는지 태양이 세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마주보는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치는 이 순간. 기억해야지. 영원히. 세영은 태양의 얼굴을 머리 깊숙이 새겼다.
“모의고사는 어땠어?”
세영이 중간고사를 치르고 처음 보는 공식적인 시험이었다. 태양은 혹시나 세영이 저번처럼 떨진 않았을까, 초조해하진 않았을까 걱정되었다. 가뜩이나 옆에 있어주지도 못하고 멀리 해남까지 가게 되어서 더 걱정되었었다.
“음.”
세영인 입을 앙 다물고 눈동자를 굴렸다.
“재미있었어.”
세영의 의외의 대답에 태양이 걸음을 멈췄다.
“정말?”
“응. 정말. 문제도 잘 보이고, 떨지도 않고. 수학은 너무 잘 풀려서 신났어.”
고개를 끄덕이며 시험시간을 회상하는 세영의 목소리가 발랄했다. 태양이 안심한 듯 휴, 깊은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나 걱정했어?”
안도의 빛을 띠는 태양에게 세영이 은근슬쩍 물어봤다. 걱정했을 거라는 것을 알지만 태양의 입으로 듣고 싶은 건 뭔지. 세영은 그럼, 이라고 대답하는 태양의 반응이 너무 좋아 씩 웃었다.
“걱정 마. 이세영이 얼마나 씩씩한데.”
세영이 오른손으로 가슴 부근을 탁탁 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래. 우리 세영이 씩씩하다.”
그리고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워. 태양은 주머니에서 잡고 있던 손을 빼, 세영의 어깨를 감쌌다. 약간의 간격도 사라지자 따뜻한 온기가 둘을 감쌌다. 세영이 살짝 태양을 흘깃 보고는 웃었다. 큰 길을 지나 세영의 동네가 시작되는 골목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근데 무슨 경기였어? 다른 축구부원은 학교에서 훈련하던데.”
“아. 학교경기가 아니고, 상비군 선발 대회라.”
“상비군?”
“응. 뭐, 청소년국가대표 이런 거 뽑는 경기였다고나 할까.”
세영이 놀란 눈을 하고 태양을 바라보았다.
“정말? 그럼 태양이, 너 국가대표가 된 거야?”
세영이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태양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수도. 아닐 수도.”
“그래도 실력을 인정받은 거잖아. 그런 곳에 차출될 정도로. 그치?”
덤덤한 태양과는 반대로 세영은 방방 떴다. 금방이라도 폴짝폴짝 뛰어다닐 것 같았다.
“세영아.”
-너 정도면 그 곳에서도 충분히 된다. 마침 진출한 선수도 몇이 좋은 성과를 보여주고 있으니 더 관심이 갈 거야.
해남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감독님과 나누었던 말이 스쳤다.
“응?”
들뜬 세영이 동그란 눈을 깜박였다.
-때가 된 거다. 이때를 위해 아버지도 다 닦아 놨으니, 넌 아무 걱정 말고 준비하렴.
중국 출장을 간 아버지와의 전화 통화도 스쳤다.
“국가대표 이런 거 되면….”
“응. 그런 거 되면?”
-그래, 윤태양. 가서 길 잘 닦고 있어. 이 형아도 조만간 갈 거야. 자식. 드디어 꿈이 이루어지는 구나.
같이 떠났던 기현이가 부러운 눈빛을 보이며 했던 말이다. 꿈, 그렇다. 이건 축구선수의 꿈이었다. 축구선수라면 한번쯤 생각하는 꿈의 그라운드.
“그런 거 되면, 나…,”
순진한 세영이 태양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태양은 후, 숨을 불었다. 하얀 입김이 허공에 흩어졌다. 아직은, 아직은 아니다. 세영의 깊은 눈망울을 보며, 태양은 생각을 바꿨다.
“나 굉장히 바빠진다고. 학교도 잘 못 나가고, 비행기타고 경기하러 가고 그런다.”
“정말? 하기는 그렇겠다. 국가대표는 그런 거잖아. 어떡해. 너 더 힘들어져서.”
방방 뜨던 세영의 음성이 착 가라앉았다. 힘들어질 태양도 걱정이지만, 그럼 자주 못 보고 연락도 자주 못할 걸 생각하니 금세 우울해졌다. 그래도 태양이가 잘 되는 거니까, 즐겁게 축구하는 태양이를 보는 거니까 며칠 못 보는 거쯤은 감수해야겠지. 세영은 혼자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세영을 보는 태양의 얼굴은 착잡했다. 어느 새, 세영의 집에 다 왔다.
“춥다. 들어가. 이제 밤에 이렇게 나오지 말고. 알았지?”
태양이 세영의 손에 봉투를 쥐어주며 다시 다짐을 받아냈다. 세영은 태양의 머리에 야구모자를 씌워주었다. 세영의 높이에 맞춰 태양이 허리를 숙였다.
“응, 알겠어. 내일은 학교 오는 거지?”
모자를 매만지던 태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영이 싱긋 미소를 짓고 대문을 열었다.
“세영아.”
“응?”
인사를 하려던 세영이 손을 내렸다.
“이리 와봐.”
세영이 응? 하고 묻는 사이 태양이 끌어당겨 안았다. 따뜻하다. 태양은 세영의 등을 꼭 끌어안았다. 힘껏. 더 힘껏. 세영은 태양의 갑작스런 포옹에 놀라다가 태양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하나도 춥지가 않다. 따뜻하다. 정말 많이.
“잘 자.”
태양의 압력에 끄덕여지지 않는 고개를 세영이 머리를 약간 움직임으로 대답했다. 태양은 서서히 힘을 풀고 한 발짝 떨어졌다. 세영의 머리가 헝클어져 붉게 상기된 뺨을 배회하고 있었다. 태양은 조심스럽게 세영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아주 소중하게. 하지만 그 눈빛은 슬펐다. 그렇다고 세영은 생각했다.
“들어가.”
“응, 조심히 가.”
하지만 세영은 찰나에 사라진 태양의 슬픈 기색을 뒤로 하고 인사를 나눴다. 피곤해서, 오늘 서울에 와서 힘들어서 그런 가 보다고 생각하면서. 태양은 들어가는 세영을 보며 여지까지의 한숨보다 깊은, 몹시 깊은 한숨을 뱉었다. 검은 하늘에 대고, 가는 달을 향해 푹 내뱉었다. 하지만 닿지 않았다. 그저 흩어질 뿐이다.
“윤태양. 너 어떻게 할래?”
마지막으로 손을 한번 흔들고 들어간 세영의 빈자리에 태양의 답답한 물음이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