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_09



휴대폰 슬라이더를 올렸다. 6시 34분. 테이블은 난장판이었다. 식은 고기 조각이 군데군데 떨어져있고, 흥건히 젖어있는 물수건. 섞인 반찬들. 기름이 튀겨 불투명해진 물잔들.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던 처음의 모습과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남자, 여자 구역을 나눠 앉아있던 얘들이 분위기에 휩쓸려 남녀 섞어 삼삼오오 모였다. 구기중과 국사는 한 병만 따겠다는 말에 무색하게 세 병의 빈 소주를 테이블 아래 세워뒀다. 앞에 앉아있던 서경과 수진은 고기 몇 점을 먹고는 초저녁에 뒤의 테이블로 사라졌다. 그리고 보배는 건너 건너에 앉아, 삼육구 게임에 심취해있었다. 모두 다 웃고 떠드는데 세영은 물 잔만 서너 번 채웠다. 상당히 좋았던 기분은 조금 전부터 급속도로 하강하는 중이었다. 왜냐하면 정반대에 앉아있는 윤태양이라는 녀석의 주위가 시끄러워서.


“그래서 태양이 이놈이, 어쨌냐면......”


“그만해라.”


“에~! 재밌는데. 그래서 태양이가 어쨌는데?”


교태가 다분히 붙은 목소리가 녀석의 주변에서 우글거렸다.


“어머머머~ 진짜? 아, 뭐야. 태양이 그렇게 안 봤는데. 꽤 재밌는 구석이 있네.”


“에~ 나는? 나는?”


“어머, 기현이 너는 우리가 당연히 알지. 얼마나 재밌고 얼마나 매력 있는지. 호호.”


“태양이 너는 재밌는 이야기 없어? 기현이에 대해서.”


“없는데.”


“이 자식 봐라! 암튼 윤태양 눈치 없는 건 알아준다니까. 그치? 그치?”


“어머~ 그게 태양이의 매력이지.”


세영은 탁, 유리잔을 테이블에 세차게 쳤다. 그래봤자 워낙 시끄러운 통에 그 누구하나 돌아보지 않았다. 녀석의 그룹은 저 멀리 있는데 여자애들의 간지러운 목소리는 토씨하나 빠뜨리지 않고 들렸다. 뜨거운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여자애들 틈에 끼어서 노는 폼이 눈에 거슬렸다. 객관적으로 태양의 말소리보다 그 앞에 앉은 느끼한 화법을 구사하는 녀석의 소리가 대부분이었지만, 그 틈에 앉아있는 태양의 모습이 곱지 않았다.


‘빛나 보여? 행여나. 취소야! 취소! 웃겨, 윤태양! 아주 웃기다고!’


생각하니 분에 차, 세영은 다시 물을 따라 쭉 들이켰다. 시원한 물이 뜨거운 식도를 타고 쑥 넘어갔다.


‘가만, 뭐가 웃겨? 저 녀석이 뭐라고. 그래, 이세영! 정신 차려. 아무 것도 아닌 거 가지고. 하등의 의미 없는 거 가지고, 왜 열 받아? 정신 차려.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생각이 미치자, 휴대폰 슬라이더를 밀고 빠르게 손을 놀렸다. 과외 선생님에게 조금 일찍 보자는 문자를 초고속으로 날리고, 가방을 열어 지갑을 꺼냈다. 지갑 안쪽에 넣어둔 버스카드를 꺼내고 다시 지갑을 넣는데, 학교 오기 전에 넣어둔 스프레이와 체크무늬 손수건이 보였다. 입술을 잠깐 물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올려 앞을 보니 녀석은 여전히 여자애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순간, 세영은 과감히 가방 지퍼를 찌익 내려 닫고, 뒤도 안 돌아보고 식당을 나섰다.


하늘이 서서히 빨개지고 있었다. 세영은 주머니에 넣어둔 아이팟을 꺼내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틀었다. 언니가 좋다며 보내준 팝송이 흘러나왔다. 음악이라도 들으니 괜히 성났던 기분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러다 다시 여자애들 주위에 있던 태양이 떠올라 음량을 올렸다. 최고로. 오로지 노래만 들렸다. 귀를 넘어 머리까지 울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음악 템포에 맞춰 걸음도 빨라졌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몇 미터 앞에 정류장 팻말이 보였다. 몇 시차가 있더라? 휴대폰을 꺼내 배차를 계산하는데.


“꺄!”


어깨가 잡혔다. 뭔가가 어깨를 쳤다. 세영은 기겁을 하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직 해도 안 진 시간에 주정뱅이는 아니겠지. 찰나에 세영은 별별 생각을 다 했다. 귀에는 여전히 신나는 템포의 팝송이 울렸다. 두둥. 두둥. 템포에 맞춰 가슴도 쿵쾅. 쿵쾅.


“안녕.”


세영은 숨을 훅 들이켰다. 공기가 모자랐다.


‘숨 막혀.’


“켁켁...켁켁...”


“어? 괜찮아?”


가슴을 두드리며 기침하는 세영에게 태양이 다가왔다. 세영은 괜찮다는 의사로 손을 흔들었다. 태양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췄고, 귀에서 떨어진 이어폰은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몇 번의 기침이 지나고서 세영은 안정된 숨을 쉴 수 있었다.


“괜찮아.”


세영은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답하고, 버스 정류장 앞에 섰다.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을 놀라게 하고 그래. 세영은 옆에 서 있는 태양을 흘겼다. 큰 키 탓에 흘겨보는 것도 힘들었다. 세영은 짜증이 났다. 가방을 메고 있는 것이 녀석도 집에 가는 모양이다. 계속 여자애들이랑 시시덕댈 것이지. 쳇. 세영은 휴대폰을 확인했다. 7시 5분. 곧 버스가 올 것이다.


“발목은 괜찮아?”


태양의 시선이 세영의 왼쪽 발목에 머물렀다. 세영은 무의식적으로 왼발을 들어 괜히 오른발에 꼬았다. 그냥 그 녀석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발목이 부끄러웠다.


“괜찮아.”


“다행이다. 치료 잘 했나보네.”


녀석 때문에 기분이 나빴었는데, 그 녀석의 다행이란 말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맞다. 이거...”


치료라는 단어에 가방에 넣어둔 스프레이와 손수건이 떠올랐다. 세영은 가방을 가슴께에 내리고, 지퍼를 열어 태양의 물건을 찾았다. 책 속에 끼어있는지 몇 번을 뒤적였다. 태양은 세영의 다급한 손놀림을 호기심 가득 담긴 눈으로 쳐다보았다.


“버스 왔는데.”


“어? 자..잠깐...”


가방을 뒤지던 세영의 손이 더 분주해졌다. 빨리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자꾸 손이 꼬였다.


“일단 타자.”


버스의 앞문이 바로 세영의 앞에서 열렸다. 태양이 먼저 타라는 눈짓을 보냈다. 아무래도 이 녀석도 같은 버스인가 보다. 하기는 학교까지 오는 마을버스는 딱 한 노선이었다. 세영은 가방을 대충 닫고, 들고 있던 버스카드를 찍었다. 녀석도 금방 버스카드를 찍고 성큼성큼 걸어 맨 뒷좌석에 앉았다. 하교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학생은 한명도 없고 두 명의 노인과 아주머니 몇 명이 듬성듬성 앉아있었다. 세영은 버스가 문을 닫고 덜컹하며 움직이는 순간까지 앉을 생각을 안 하고 서 있었다. 조금 열린 가방을 가슴에 안고.


“안 앉아?”


태양이 긴 뒷자리를 탁탁 치며 신호를 보냈다. 세영은 잠깐 고민하다 태양의 옆에 앉았다. 스프레이와 손수건을 전해줘야 하니까. 라는 이유를 되새기며. 그 이유에 목숨을 건 것처럼 세영은 열심히 뒤져 태양에게 내밀었다. 엄청난 일을 해낸 것 같아 뿌듯했다.


“아. 고마워.”


무슨 말을 하려던 것 같은데, 태양은 씩 웃으며 고마워 라고 했다. 세영은 의아해하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제 옆에 앉은 목적이 사라졌다. 가방 문을 닫고 나니 태양이 옆에 있다는 사실이 자꾸 신경 쓰였다. 자세를 고쳐 앉는 척하며 조금 옆으로 비껴 앉았다.


“회식 어땠어?”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 마냥 가방을 끌어안는데, 태양이 고개를 돌렸다. 앉으니까 그나마 눈높이가 얼추 맞는다.


“...그냥, 뭐.”


“흐음. 계속 혼자 앉아있던데.”


세영의 눈썹이 꿈틀댔다.


‘이 녀석, 나를 보고 있던 거야?’


세영은 놀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 일찍 나왔어?”


태양은 답을 하지 않아도, 굴하지 않았다.


“과외시간 때문에.”


“흐음.”


태양이 살짝 엉덩이를 빼고 편안히 앉았다. 그에 반해 세영의 어깨는 꼿꼿이 섰다.


‘잠깐. 내가 왜 이렇게 쫄지? 이 녀석이 뭐라고. 그래. 아무 것도 아닌 녀석인데. 그냥 버스 타면 옆에 앉을 수 있는 승객의 한 명일 뿐이잖아.’


세영은 살짝 등을 기댔다. 쫄지마. 쫄지마. 쫄지마. 라고 주문을 걸면서.


“그러는 넌?”


목소리가 매끄러웠다. 세영은 자신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어 더욱 자신감이 차올랐다. 이제 꼭 끌어안았던 가방을 바로 옆에 놓았다.


“졸려서.”


‘졸렸다고? 여자애들 사이에서 웃어댈 땐 언제고.’


세영의 입술이 오물거렸다.


“집이 어디야?”


녀석의 고개가 살짝 세영에게로 향했다.


“ㅇㅇ쪽.”


“나는 그 뒤에 있는 A아파트 인데.”


헤, 꽤 가까운데 살고 있었잖아. 그래도 상권이 달라서 자주 가는 동네는 아니지만. 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버스가 두 번을 멈추고 달려가고 있었다. 태양이 오른쪽에 있는 창문을 열었다. 진하게 붉은 세상을 뒤로 하고 습한 바람이 날아왔다. 바람을 맞는다는 핑계를 대며 녀석을 보았다. 너무 짧지 않는 스포츠 머리였다. 바람에 아주 조금 살랑살랑 거릴 만한. 두상이 동그랬다. 딱 축구공처럼. 쿡 웃음이 터졌다. 저 머리가 축구공이라고 생각하니까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왜?”


녀석의 고개가 완전히 세영에게 향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었다. 아, 이마도 반듯하구나. 눈썹은 예쁘게 짙네. 눈은 약간 내려가고. 감았다 뜰 때 쌍꺼풀이 있네. 입술은 얇지 않고. 헤, 꽤 생겼잖아. 그래서 그렇게 난리들인가?


“왜?”


세영은 몽롱했던 시선을 거두었다.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 차리자. 이세영.’


“아니야. 아무것도.”


고개를 푹 숙였다. 볼에서 뜨거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녀석의 시선이 계속 느껴졌다.


‘제발, 고개 좀 돌려라. 이러다 내 볼 터지는 거 아냐?’


세영은 손바닥을 볼에 대었다. 약간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녀석의 시선이 다시 살짝 비껴갔다. 버스는 세 번째 정류장에 멈췄다.


“왜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해?”


세영은 볼을 쓸던 손을 멈췄다. 태양의 얼굴을 살폈다. 무슨 의중으로 물었나 싶어. 녀석의 눈이 세영의 눈을 쫓았다. 왜 그런 거를 하는데? 하는 것 같다. 그 눈빛에 괜히 오기가 생겼다.


“학생의 본분이니까.”


‘그래서 하는 건가?’


세영은 자신이 말하고도 갸우뚱했다.


“헤에~”


녀석의 반응이 거슬린다. 우와 하는 것인지, 에이 하는 것인지. 어느 쪽이든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질문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넌 왜 그렇게 축구를 열심히 하는 건데?”


‘나도 너와 같은 반응을 보여주겠어.’


세영은 이상한 오기가 발동했다.


“못 견디게 좋아서.”


가볍게 웃더니, 단호하게 대답한다. 태양의 눈가에 웃음이 가득하다. 웃음이 정말 웃음 같다. 정말 너무 웃고 싶어서 웃는 그런 웃음. 또 보인다. 그 웃음에서 시작된 빛줄기가 녀석의 얼굴을 감싸고, 녀석의 몸을 감쌌다. 태양에게서 빛이 났다.


“너도 못 견디게 좋아서 공부하는 거지?”


세영은 어스름하게 떴던 눈을 깜빡여 시선을 모았다. 태양의 눈빛이 차랑하고 빛났다.


“하기는 전교 1등 정도면 그렇겠지.”


태양이 살짝 눈웃음을 쳤다. 하지만 세영은 그의 질문에 얼었다. 내가 못 견디게 좋아서 공부를 하는 건가?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아니다. 나는 못 견디게 좋아서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나는 그러니까 나는.......


“패배자가 되기 싫어서.”


머릿속에서도 떠오르지 않는 말이 주저리 쏟아졌다.


“실패라는 것이 못 견디게 싫어서.”


세영은 자신에게 흠칫 놀랐다. 자신의 목소리가 싸늘했기 때문에. 태양은 시선을 내린 세영을 미묘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뭐, 못 견디게 좋아서나 못 견디게 싫어서나.”


풋 웃는 녀석의 소리에 세영은 눈동자를 굴렸다.


“나도 못 견디게 좋아했던 건 아냐. 나는 그냥 달리기가 빨랐던 아이였거든. 사실 빠른지도 잘 몰랐어.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이 나오라는 거야. 차를 타고 한참 같더니 엄청 큰 육상 경기장이었어. 선생님은 그저 열심히 뛰라고 했어. 그래서 나는 뛰었지. 그리고 1등으로 들어 온 거야. 기분이 썩 좋았지. 그냥 그러고 끝이구나 했는데, 몇 주 후에 선생님이 날 또 부르는 거야. 도착한 곳은 저번보다 더 커 보이는 경기장. 트랙 위에 섰는데, 옆의 얘가 꽤 날렵해보였어. 운동화도 모양새도 정말 육상 선수 같았거든. 근데 나는 자만했었어. 저번에도 가볍게 1등 했는데 또 1등할 거라고. 뭐, 결과는 안 봐도 뻔했지. 그 날렵해 보이던 녀석이 1등을 했어. 당연한 거였지. 알고 봤더니 그 녀석은 유명한 육상부 녀석이었거든.”


버스는 여섯 번째 정거장을 지나 oo마을의 입구에 진입하고 있었다. 태양의 시선은 과거를 향해 날아가 있었고, 세영의 시선은 태양에게 박혔다.


“내 평생 그렇게 재미없는 달리기는 처음이었어. 누군가의 등을 보고 달린 건 처음 이었거든. 그게 참 재미없더라. 나는 온 풍경을 다 제치고 달리고 싶은데, 누군가가 앞을 탁 막고 있으니까. 그 뒤로 계속 달렸어. 누군가에게 가로막히지 않기 위해서. 재미있게 달리고 싶어서. 그리고 중학교에 가서 축구공을 잡았는데. 내가 달리는데 공도 같이 나와 달리는 거야. 이 녀석은 조금 앞서서 나를 이끌어주는 기분이랄까. 나와 함께 달리는 친구 같은 느낌이었어.”


태양의 얼굴이 눈부셨다. 그 녀석 주위에 새하얀 빛이 뿜어 나왔다. 세영은 눈이 시렸다. 태양의 빛나는 눈과 빛나는 미소. 어째서 윤태양, 이 녀석은 이렇게 눈부신 걸까?


“그래서 같이 달리다보니까, 못 견디게 좋아졌어.”


태양이 세영을 향해 씩 웃었다. 세영은 멍하니 태양을 바라보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부심이 아름다웠다. 나도 저 미소를, 저 빛남을 갖고 싶다. 세영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왜 이 녀석을 부러워하는 거야? 아무 것도 아냐. 그저 착각한 거야. 이세영. 똑바로 눈 뜨고 봐. 저 녀석은 그저 그런 녀석일 뿐이라고!’


숨이 거칠어졌다. 이 녀석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녀석인데, 세영은 자신이 더러운 오물 속에 빠진 것 같았다. 비참하고 더러웠다. 스스로가 너무 싫어서 못 견뎌졌다. 빛나는 윤태양, 그 녀석의 옆에서 세영은 점점 어두운 그림자에 휩싸이고 있었다.


“누가 그러더라. 싫음과 좋음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그만! 그만해! 비웃음이 들린다. 나의 실패에 비웃었을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더러운 것들을 뒤집어 쓴 패배자가 된 기분. 이 녀석은 세상의 모든 빛을 흡수한 빛나는 수정체 같다. 아냐! 아냐! 부정할수록 세영은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에 추락하고 있었다.


“훗! 한 마디로 타고난 재능 덕이네?”


세영의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혼돈의 상태에 빠진 세영은 그저 이 더러운 오물 속에서 헤어나고 싶었다.


“...그런 녀석.”


세영의 눈동자는 어둠에서 질척댔다.


“재수 없어!”


버스가 끼익 멈췄다. 세영은 단숨에 버스를 내렸다. 태양은 사라진 세영의 자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던 세영의 눈빛이 슬펐다고 생각하면서.



“열쇠 안 가지고 갔냐?”


바다는 요란하게 울리는 벨소리에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문을 열었다. 태양은 티셔츠에 팔을 끼고 있는 바다를 지나쳐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에? 야?”


무표정에 반응 없이 물러간 태양이 이상해 바다는 태양의 방문을 열었다. 태양은 벌써 교복을 훌렁 벗고 추리닝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녀석의 기운이 사뭇 쌀쌀해 뭐라고 쥐어박으려고 했던 바다의 생각이 쏙 들어갔다.


“저녁은? 안 먹었으면 냉장고에서 꺼내 먹어. 어머니랑 아버지는 부부동반 모임 가셨어.”


태양은 대충 교복을 개어놓고 방문을 가로 막고 있는 바다를 지나쳐 주방으로 갔다. 이렇게까지 반응이 없는 녀석이 아닌데, 이상하다. 바다는 태양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태양은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 한 병을 꺼내 벌컥 들이켰다.


“야, 무슨 일 있냐?”


바다가 3살이나 위였지만, 이럴 때의 태양은 건드리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고개를 젖히고 계속 물을 들이켜는 태양 옆에 있는 게 어색해, 괜히 냉장고 문을 열고 생각에도 없는 오렌지 주스를 꺼냈다. 찬장에서 유리잔을 꺼내 졸졸 따르는데 빠지직 하는 요란한 소리가 조용한 주방을 두들겼다. 생수 병이 볼품없이 찌그러져 있었다.


“재수 없대.”


바다가 오렌지 주스 뚜겅을 닫아 냉장고에 넣는데, 드디어 태양이 입을 열었다. 그것도 꽤 충격적인 문장으로.


“뭐가?”


오렌지 주스가 제법 상큼했다. 친구 녀석들이랑 저녁을 먹으면서 맥주 한 잔을 해서 그런지 속이 더부룩했는데 배가 조금은 편해진 기분이었다. 태양은 구겨진 생수병을 가볍게 싱크대로 날렸다.


“내가.”


바다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비웠다. 이거 꽤 흥미로운 주제인데 라고 생각하며.


“누가?”


비스듬하게 서 있던 태양이 몸을 돌려 바다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여자애가.”


이제 오렌지 주스가 바다의 정신을 빼앗을 수 없었다. 윤태양 입에서 나온 이야기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입 무거운 저 녀석에게서 미주알고주알 나오게 만들려면 태연함을 가장해야 한다. 바다는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태양을 지나쳐 거실에 있는 소파에 눕다시피 앉았다.


“흐음. 너 싫다는 여자애도 있네?”


탁자에 놓인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언제나처럼 스포츠 채널이었다. 하도 눌러서 그림이 사라진 채널 표시를 길게 눌렀다. 화면이 스슥스슥 빠르게 바뀌었다.


“그게 싫다는 거야?”


관심 없어하는 바다의 행동에 조바심이 났는지 태양이 탁자 밑 카펫에 털썩 앉았다. 바다는 속으로 큭큭 웃고 있었다.


“그럼 재수 없다는 말이 언제부터 긍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냐?”


그나마 시선을 당기는 음악 프로그램에 채널을 맞췄다. 태양의 몸이 점점 바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 건가?”


태양의 표정이 우울했다. 이상하다. 여자애들이라면 바퀴벌레 보듯 싫어하는 녀석이었는데. 바다가 겉모습을 십분 활용해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반면, 태양은 겉모습 플러스 여자들을 미치게 하는 운동실력까지 가지고 있으면서 여자들을 귀찮아했다. 워낙 축구에 미쳐서 그런 탓도 있지만. 열 여자 아니 몇 백 명의 여자도 마다하는 녀석의 얼굴이 왜 우울하담? 재수 없다고 그러면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하는 거 아냐? 꺅꺅 거리는 여자애들 때문에 머리 아프다고 한 게 엊그저께인데. 이거 정말 이상하다.


“뭐, 상황에 따라서 간혹 이중적 의미를 내포하기도 하지.”


태양의 눈이 반짝했다. 바다의 입이 살짝 씰룩댔다. 이거 잘하면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걸 죽기 전에 한번은 보겠는 걸.


“첫째, 상대가 좋은데 부끄러워서 둘러대는 말. 예를 들면, 초등학교 때 꼭 여자애들 괴롭히고 고무줄 끊고 아이스 깨끼하고 그러는 얘들 있지? 그런 얘들처럼 마음은 안 그런대 표현할 줄 몰라서 그러는 거지.”


태양이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다.


“둘째, 진심으로 상대가 싫을 때 하는 말. 말 그래도 재수 없어. 이 경우가 많겠지. 그냥 싫어. 이러는 것도 아니고 재수 없어는 아무래도......”


“아무래도?”


태양이 입술을 물어뜯고 있었다. 꽤 초조한 가 본데?


“아무래도 너 정말 싫다. 무진장 싫다. 미치게 싫다. 보기도 싫다. 뭐 이런 거 아니겠어?”


태양의 기분이 와르르 무너졌다.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바다는 좀 심했나 싶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기분 안 나쁘냐?”


TV의 음량을 낮췄다. 이제 진지해질 필요가 있었다.


“뭐가?”


“아니, 재수 없어 라는 말을 들었는데, 기분 안 나쁘냐고?”


맞다. 사실 엄청 기분 나빠지는 말이다. 이게 장난스럽게 한 말이 아니라면, 남자들 사이에서는 주먹다짐이 일어나 누구 하나 병원에 실려 가는 결과를 만들 만한 말이었다.


“......아니.”


바다의 눈이 커졌다. 이건 대어(漁)다! 대어!


“왜?”


줄을 거둘 때까지 긴장감을 늦추면 안 된다. 바다는 침을 꼴깍 삼켰다.


“...슬퍼보였거든.”


세영의 눈빛은 슬펐다. 눈동자가 깊었다. 속을 알 수 없을 만큼. 하지만 태양은 알아챘다. 사실 그 눈빛은 어두웠고 슬펐다는 걸. 그런 눈빛을 가지고 왜 그런 말을 했는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세영의 눈이 너무 슬퍼서 태양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흠......”


바다의 표정은 오묘했다. 앞뒤 문맥이 안 맞는 소리를 해대는 태양 때문에 오랜만에 머릿속의 윙윙, 엔진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싫어하지 않는 거네.”


사실 싫어하는 않는다는 감정을 넘어선 거 같지만. 자칫 어느 쪽으로 튈 수 없는 예측 불가한 녀석이기 때문에 바다는 세심하게 단어를 골랐다. 초점 없이 생각에 빠져있던 태양의 눈동자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런 건가?”


으이구. 이 녀석아. 바다는 차마 입으로 나오지 않는 말을 속에서 뱉었다. 이거 한마디로 좋아해! 이거고만. 이렇게 둔할 줄이야. 축구에 미친 이후로 다른 건 눈에도 안 담더니. 얘가 아주 원시인이 되었다. 초등학교 때는 집안의 말썽꾸러기로 통했던 녀석이 중학교에 올라가서 축구부에 들어간 이후로는 말수도 적어지고 의젓해졌다. 아주 축구가 사람을 버렸네. 바다는 살짝 혀를 찼다.


“그럼 뭐가 문제야?”


천천히 다뤄야 했다. 확 몽땅 불었다가는 앞으로의 이야기는 절대 들을 수 없을 터였다. 무료한 나날에 잡은 재미난 물고기를 놓칠 수는 없지. 바다는 곁눈질로 태양을 보며 넌지시 말했다. 태양의 머리가 갸우뚱했다.


“......그런 건가?”


태양은 곰곰이 생각했다. 뭔지 모르겠는데, 바다의 말이 다 맞는 거처럼 들렸다. 세영의 말에 기분은 전혀 나쁘지 않았다. 단지, 슬픈 세영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확실히 바다의 말처럼 세영을 싫어하지는 않는 거였다. 근데 정말 세영이 자신을 무진장 싫고, 미치게 싫고, 보기도 싫은 사람으로 여기는 거라면. 그런 거라면...... 초조해졌다. 그럼 정말 어떡하지?


“문제는 그 여자애가 한 그 ‘재수 없어’가 첫 번째 그거냐? 아니면 두 번째의 그거냐? 그건데......”


태양의 표정을 읽었는지 바다가 딱 요점을 짚었다. 태양은 바다를 뚫어질듯 쳐다보았다.


“...음...잘 모르겠다. 정보가 부족해.”


한참 뜸을 들이더니 바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채널돌리기에 열중했다. 태양의 미간이 좁혀졌다. 바다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 표시였다. 뭔가 입을 열듯 하다 다시 닫았다. 훗. 녀석. 머리 좀 아플 것이다. 그러게. 내가 여자애들하고 부비부비할 때, 좀 따라오지 그랬니. 바다의 눈에는 회심의 미소가 담겨 있었다.


“뭐, 좀 더 부딪혀봐. 첫 번째인지 두 번째인지. 뭐가 나와도 나오지 않겠어?”


태양의 초조한 기색이 극에 달했다고 생각했을 때, 바다는 살짝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풀었다. 아마 앞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고하겠지. 크크. 바다는 생각 만해도 재밌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TV에 신경을 쏟고 있는 것처럼 행세했다. 태양은 한참 대답을 않더니, 벌떡 일어났다.


“왜?”


TV에 집중하고 있던 사람답지 않게 바다의 눈이 주저 없이 태양에게 향했다.


“뛰려고.”


8시였다. 태양이 밤바다 뛰는 시간. 학교에서도 남아서 연습하고 오는 녀석이 밤마다는 뜀박질이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꽤 복잡해 보였는데, 뜀박질을 중단할 정도는 아직 아닌가 보군. 바다는 입맛을 다셨다.


“다녀와. 아. 열쇠 챙겨가라.”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현관문을 여는 태양에게 소리쳤다. 태양이 응, 이라고 말하고 문이 닫혔다.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다는 소파에 긴 다리를 쭉 펴고, 머리를 풀썩 쿠션에 뉘였다.


“그나저나 그 여자애는 누구야?”


바다의 중얼거림은 흘러나오는 뮤직비디오의 흥겨운 템포에 묻혔다.



_10



두 번째 모의고사가 끝나고도 일주일이 지났다. 달력은 5월의 막바지를 달려가고 있었다. 녹음은 짙어가고, 화려한 꽃이 만발할 대로 만발했다. 기온도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 조만간 긴 소매 교복을 옷장에 넣고, 반소매 교복을 꺼내 입어야 할 만큼 더운 기운이 찾아올 것이다.


“점심 먹었어?”


세영은 아이팟을 꽂고 열심히 수학을 풀고 있었다. 답 근처에 까지 숫자를 나열했을 때, 문제집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를 드니 보배였다. 회식 이후로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게 된 사이였다. 세영은 이어폰을 빼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와, 빠르다. 하기는 4교시 끝나자마자 사라지니까. 같이 먹자고 말하려고 돌아보면 벌써 없더라.”


보배가 세영의 앞에 있는 의자를 돌려 앉았다.


“그랬어?”


이제 얘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이 편해졌다. 세영은 들고 있던 샤프를 문제집 사이에 끼웠다. 보배의 눈 꼬리가 올라갔다.


“안 풀어?”


보배의 눈이 문제집 사이의 골에 쏙 박힌 샤프에 향했다. 세영도 보배의 눈길을 따라 검은 색 샤프를 보았다. 그리고 세영의 말간 눈이 두어 번 깜빡였다. 멍한 표정이다.


“너 공부 방해하는 거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세영의 눈이 몇 번 깜빡였다.


“아아...”


세영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세영 자신도 이상했다. 보배가 말하지 않았다면, 지금 자신이 이런 행동을 했다는 것도 몰랐다. 보배 말대로 쉬는 시간이든 점심시간이든 공부를 방해받는 건 너무 싫은 일인데...공부는 세영의 인생의 전부였으니까. 세영의 웃음 사이로 당황한 눈빛이 스쳤다.


“뭐, 너도 사람 아니겠어. 사람이 어떻게 24시간 내내 공부만 하냐. 이렇게 쉬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그게 더 능률도 오르고. 뭐, 암튼 그런 거 아니겠어. 하하. 이세영, 너도 이제 사람 냄새 좀 난다.”


당황하는 세영의 눈빛을 읽었는지 보배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런 보배의 모습이 세영에게도 전염되었다.


‘이게 사람다운 건가? 그럼 난 지금까지 사람답지 않았다는 걸까?’


세영은 웃으면서도 보배가 했던 말이 머리 한 귀퉁이에서 맴돌았다. 사람다운 게 뭘까?


“다음 시간 영어다. 휴우. 가자.”


고개를 돌려 칠판 위의 시계를 확인한 보배가 세영을 재촉했다. 세영은 보배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가만히 앉아있었다.


“뭐해? 늦겠다. 책 어디 있어?”


“지금 나랑 같이 가자는 거야?”


평소의 세영의 말투답지 않게 어눌했다. 보배는 어이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응. 맞는데.”


보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영이 벌떡 일어나 책가방을 뒤져 책을 꺼내고, 부산스럽게 필통에 필기구를 집어넣었다. 보배는 고작 이동 수업하러 가는 건데 요란하게 준비하는 세영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저게 정말 초반의 이세영이 맞나 싶었다. 완벽, 깔끔 그 자체였던 이세영이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모습이라니. 보배는 큭큭대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책을 챙겼다.



“오늘은 내 차례라니까!”


“야, 너 저번에 앉았잖아!”


“그냥 먼저 온 순서대로 하자고. 내가 제일 먼저 왔다.”


2반에서 수업인 보배와 인사를 하고 들어오는데, 1분단 끝에서 아옹다옹하는 여자애들의 모습이 정면으로 들어왔다. 언제나 이동수업시간이면 일어나는 다툼이었다. 세영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되도록 저 여자애들과 멀리 떨어진 자리를 찾았다. 3분단 중간쯤에 빈자리가 있었다.


“너희 좀 그만해. 이런다고 윤태양이 알아주겠어?”


자리에 앉은 세영의 몸이 굳었다. 윤태양이라는 이름에 세영의 눈동자가 얼었다.


“하기는 그래. 윤태양이 내 이름, 석자 알까?”


“뭐, 난 상관없어. 내가 그냥 좋아하는 건데.”


세영은 가지고 온 책 사이를 뒤졌다. 틈만 나면 읽는 타임지가 없었다. 아무래도 다급하게 챙기다 놓고 온 모양이었다. 안되겠다. 영어듣기라도 해야지. 치마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수학문제집을 덮을 때, 아이팟을 같이 덮어버렸다.


“그래. 그냥 보고만 있어도 좋은 걸 어떡해! 그러니까, 오늘은 내 자리!”


“어어어? 야! 윤태양 자리는 내 꺼라고!”


세영의 손이 조급하게 움직였다. 오늘 나갈 부분이 어디더라? 이 부분은 저번 시간에 했고. 121쪽. 122쪽... 세영은 온 신경을 영어책에 몰아넣었다.


“쯧쯧. 윤태양은 그만 포기하라니까. 차라리 한기현이 낫지. 기현이는 반응을 보여주잖아. 윤태양. 걔는 뭐 무뚝뚝해서...”


“뭐라고? 한기현보다 윤태양이 백배, 아니 천배. 만 배 낫거든!”


“울 태양이를 쫓아올 자 없다고!!!”


온 신경을 다 영어책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는데, 세영은 윤태양. 윤태양. 윤태양이라는 이름 하나 하나에 반응하고 있었다. 어느 새 세영의 고개는 1분단 맨 끝의 태양의 책상을 향해있었다. 서너 명의 여자애들 사이에 태양의 책상이 있었다. 버스에서의 일 이후로 태양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벌써 이주일이나 지나가고 있는데. 어떻게 지내는 걸까? 나라는 사람을 기억하고는 있을까? 세영은 씁쓸한 미소를 토했다. 기억할리 없을 것이다. 그렇게 심한 말을 퍼부었는데. 아마 화가 엄청 났을 것이다. 뭐 이런 재수 없는 여자가 있어! 하며 성을 냈겠지. 그리고 잊었겠지. 버스에서 내리고 집까지 걸어오면서 태양의 굳은 얼굴을 수 백 번 떠올렸다. 속을 알 수 없던 마지막 표정. 왜 나는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정말로 좋아 죽겠다는 태양의 표정이 왜 그렇게 싫었던지. 하지만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간대도 세영은 태양의 앞에서 똑같은 말을 뱉을 것 같다. 정말 그 순간, 세영은 오물 속에 빠진 비참한 모습이었고, 태양은 새하얀 빛을 빨아드린 눈부신 모습이었으니까.


“이 녀석들, 뭐해! 종 친 거 몰라! 다 자리에 앉아.”


쾅, 하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태양의 책상에 모여 있던 여자애들이 흩어졌다. 세영은 시선을 거두었다. 눈앞에는 알파벳이 나열된 영어책이 있었다.


‘그래, 이세영. 공부하자. 감정에 빠지지 마. 차라리 잘된 거야. 차라리 화내고 나를 잊어버린 게 잘 된 거야. 이제 공부에 집중하자. 나는 보란 듯이 S대 최고학과에 들어가야 하니까.’


세영은 검정 펜을 꽉 쥐어 잡았다.



빳빳한 천 원짜리 지폐가 지이익 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지폐가 잘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옆으로 비껴서 저 끝 쪽부터 맨 아래까지 음료수를 살폈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서 세영의 손가락은 선뜻 버튼을 누르지 않고 여유롭게 음료수를 살폈다. 음악 수업이 일찍 끝난 탓에 교실에 가기 전 1층 자판기에 내려왔다. 음악 실기 때문에 오랜만에 노래를 불렀더니 목마르다는 보배의 말에 세영도 목마름이 느껴졌다. 겸사겸사 보배의 음료수도 사갈 생각이었다.


‘뭘 좋아하려나?’


“아얏.”


등에 아픔이 느껴졌고, 왼손에 들고 있던 음악책과 필통이 바닥에 떨어졌다. 세영은 책을 잡으러 손을 뻗었지만, 누군가의 팔이 더 빨랐고, 세영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손이 책과 필통을 건넸다.


“미안.”


세영은 숙였던 고개를 치켜들었다. 가슴이 뛰었다. 태양이 세영의 책과 필통을 들고 서 있었다. 3주 동안 머리카락 한 올도 보지 못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만나는 구나. 세영은 뛰는 가슴과 떨리는 입술을 숨기며 책과 필통을 받아들였다.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아,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뒤를 돌았다.


“어이! 윤태양! 나 포카리로 뽑아줘.”


“어. 나도. 콜라 말고.”


세영의 뒤에서 남자애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또 바꿔?”


태양의 목소리가 투덜거렸다. 세영은 자판기에 비치는 태양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잔뜩 몸을 움츠려서.


“그러게. 누가 가위바위보 지래? 축구했더니 더워 죽겠다. 빨리 뽑아와. 교실에 있을게~”


회식자리에서 태양의 앞에 앉아 여자애들과 시시덕대던 남자애의 목소리였다. 체육시간이었나 보다. 투명한 자판기 음료수를 배경으로 보이는 태양은 하얀 반팔 티에 체육복 남색 반바지였다. 꽤 더운지 반소매가 말려 어깨까지 올라가 있었다. 하기는 이제 6월이니까. 중앙현관에서 움직이던 남자애들이 우르르 사라졌다. 이제 이 공간에는 태양과 세영. 둘이었다. 세영은 입술을 한번 꽉 폈다 오므렸다. 세영은 가만히 자판기 앞에 서 있었고, 조금 떨어진 세영의 뒤에 태양이 서 있었다. 음료수를 뽑으러 온 사람들. 지금의 태양과 세영의 공통점은 딱 그거 밖에 없었다.태양은 앞사람이 음료수를 고를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세영은 씁쓸한 헛바람을 가볍게 날렸다.


‘잊었을 거야. 나라는 사람 잊었을 거야. 그게 당연한 거야. 이세영, 네가 그렇게 만들었잖아. 저렇게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는 건 당연한 거야.’


그런데 조금. 아주 조금 가슴이 서늘하다.



“삑. 투둑.”


한 눈에 들어온 초코우유는 누르자마자 내려왔다. 세영은 살짝 무릎을 구부려 초코우유를 빼냈다.


“어? 옆에 흰 우유 있는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세영이 몸을 돌렸다. 태양이 허리에 손을 얹고 세영의 손에 든 초코우유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라는 사람 잊은 거 아니었어? 세영은 복잡한 눈동자로 태양을 보았다. 땀이 송송 맺혀 있는 얼굴은 언제나처럼 맑고 빛났다.


“나 흰 우유 못 먹어.”


세영은 남은 돈으로 다시 초코우유를 눌렀다. 초코우유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컸다.


“...어? 그랬구나......”


태양의 목소리에 갑자기 힘이 없다. 세영은 초코우유를 집어 들었다.


“미안.”


세영은 몸을 돌렸다. 세영의 왼손에는 영어책과 필통이. 오른손에는 두 개의 초코우유가 들려있었다. 그리고 깊은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왜 네가 미안하다고 그러는 거야? 내가 너한테 심한 소리 한 건데. 왜 네가 미안하다고 그래? 배알도 없어? 바보야? 왜! 왜! 왜! 미안이라고 말하는 거니!!!’


세영은 붉은 입술을 맹수처럼 물어뜯었다. 태양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이상하다. 태양이 모르는 사람처럼 뒤에 서 있을 때는 가슴이 서늘했는데, 녀석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을 보니 화가 난다.


‘왜 재수 없다 말한 나에게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 거야? 네가 뭔데 그런 소리해? 나도 너 재수 없어. 이런 식의 말을 하지 않는 거야? 윤태양, 너 도대체 뭔데 그래?’


세영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태양을 쏘아보며 몸을 돌려 계단으로 향했다.


“나도 너 재수 없어.”


막 첫 번째 계단에 오른발을 올린 세영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린 곳에 태양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태양의 눈은 평소답지 않게 날카로웠고, 보기 좋은 입술은 한 쪽으로 휘어있었다. 세영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대로 멈춰 날카로운 태양의 눈빛을 그대로 받아내고 있었다.


“그래도 난 예의는 차려.”


태양의 말에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세영을 바라보고, 자신의 말을 관철시켰다. 세영은 그저 가만히. 아주 가만히 태양을 쳐다보았다. 태양은 당황한 세영의 얼굴을 더 볼 필요도 없다는 듯 홱 몸을 돌려 자판기에 지폐를 넣고 음료수를 뽑았다. 태양의 몸짓은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했다. 살짝 엉덩이를 빼고 서 있는 모습이 삐딱하게 보이기는커녕 모델같이 선이 살아 움직였다. 태양과 마주하기만 하면 보이는 따뜻하고 새하얀 빛과 함께. 태양은 한 병의 생수와 두 개의 이온음료와 하나의 흰 우유팩을 가슴에 안고 저벅저벅 세영에게 다가왔다. 세영은 커지는 태양의 존재를 요동치는 가슴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럼 잘 가.”


세영을 스치며 태양은 속삭였다. 잔머리에 가려있던 귀의 감각이 깨어났다. 말랑말랑함 속에 무뚝뚝함. 태양은 가볍게 세영을 지나 세영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태양의 하얀 등이 점점 작아졌다. 재수 없다면서 예의는 왜 차려! 입 안에서 아우성치지만 말할 수 없었다. 갑자기 가슴이 찌르르 찌르르 아파서. 가슴이 너무 아프다.



“야!”


짧은 소리와 함께, 퍽퍽퍽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어? 얌마!”


태양의 손을 떠난 음료수 세 개가 정확히 기현과 기수와 재현에게 꽂혔다. 웃통을 벗고 있던 기현의 맨살에 차가운 생수 한 병이, 막 교복 셔츠를 잠그던 기수의 손 안에 이온 음료가, 또 다른 이온 음료는 교복 바지를 엉거주춤 올리던 기수의 머리를 때리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어! 이 자식이!”


“야, 뭐야?”


태양은 세 녀석의 항의 따위는 아랑곳 않고 사나운 얼굴로 지나쳤다.


“얼라리요? 이 자식이 오다가 썩은 우유를 먹었나?”


옷 입을 생각도 않고 태양에게 한바탕 욕을 퍼붓는 기현은 신경도 안 쓰고, 태양은 막무가내로 반팔티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 가볍게 긴 셔츠에 팔을 끼었다. 하지만 표정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날카롭다 못해 누구 한명 걸리면 죽는다는 오라를 뿜었다. 태양의 어이없는 공격에 성질이 올라왔던 기현과 기수, 재현도 태양의 오라에 기가 죽었다.


“야, 화났냐? 아, 가위바위보. 그거 정말 정당한 거다. 네가 졌으니까...”


이미 꽁무니를 빼고 옷을 입고 있는 기수와 재현과는 달리, 기현은 바득바득 태양에게 대들었다. 그러다 태양의 무지막지한 눈빛에 말을 흘렸지만.


“아, 진짜 왜 그래? 아까 밀어서? 인마. 내가 흥분해가지고...”


교복바지를 꿰차고 벨트의 버클을 잠그던 태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온순하기 그지없던 얼굴이 한 순간에 눈앞에 먹이를 발견한 맹수로 변했다. 태양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가위바위보에서 진 것까지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축구도 이겨서 기분 좋았으니까, 굳이 가위바위보가 아니래도 음료수쯤은 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우연히 태양만 가위를 냈고, 모조리 주먹을 낸 거다. 세 녀석들은 흥분했고, 방방 뛰며, 중앙현관까지 가서는 빨리 사오라며 태양을 민 것이. 바로 그것이 화근의 시작이었다. 하필이면 거기에 세영이가 있을 게 뭐야. 그래. 부딪힌 거 까지 좋았다. 그런데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떨어진 책을 줍는데, 그 여자애가 이세영이었다. 지난 3주간 태양을 고뇌의 세계에서 들었다 놨다 했던 장본인. 크지도 않은 학교에서 우연이라도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던 세영을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사실 3주의 고뇌동안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기 때문에 세영을 보고 당황했다. 어떻게 말해야 하나. 수 만 가지의 대응책을 생각했었지만, 막상 세영의 깊은 두 눈을 보니 머리가 펑 터졌다. 정말 백지. 새하얀 백지였다. 그런데 세영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서서 음료수를 뽑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순간 퍼뜩 생각난 형의 말.


-너 정말 싫다. 무진장 싫다. 미치게 싫다. 보기도 싫다. 뭐 이런 거 아니겠어.


설마. 설마. 최악의 두 번째의 의미? 내가 무진장 싫고 미치게 싫고. 그리고 보기도 싫다는 뜻?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미치게 초조해 손이 미세하게 떨릴 정도였다. 젠장, 형은 왜 정작 중요한 이런 상황에서 대처하는 방법은 안 가르쳐준 거야! 시간은 째깍째깍 가고, 세영의 움직임은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뭐라도 무슨 말이라도 해야 된다. 라고 생각했을 때, 눈에 들어온 초코우유. 차라리 말을 말걸. 세상에 이런 바보가 어디 있을까. 내가 먹는다고 세영이도 흰 우유를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어라.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다. 등등의 속담이 좌르르 지나갔다. 그럼 지난번의 그 우유도 지지난번의 그 우유도 다 쓸모없는 거였잖아! 너무 바보 같다. 윤태양. 너만한 바보는 더 이상 없다. 온갖 자책감은 다 끌어안았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나온 말이 미안. 정말 미안했으니까. 못 먹는 걸 먹으라고 준 건 태양이었으니까. 그런데 돌아선 세영의 표정이 장난이 아니었다. 붉디붉은 입술을 하얀 이로 물어뜯으며 가뜩이나 새까만 눈동자가 커져 동그래졌다. 그리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는 게 아닌가. 그 때, 정확히 그 시점에서 태양의 꼭지는 돌았다. 아주 확! 그러지 않고서야, 세영에게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었다.


“아, 짜식. 좀생이 같기는. 퉤퉤. 아씨, 진짜 윤태양 ‘재수 없다’!”


태양이 눈이 지그시 감겼다. 기현이는 말하는 것이 질렸는지 교복을 차려 입고 있었다. 태양의 머리 위에서 스팀이 나오는 걸 눈치 채지 못하고.


“야! 한기현!”


태양이 무릎을 굽혀 기현의 등을 푹 쳤다. 갑작스런 공격에 기현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기현은 너무 놀라 멀뚱히 태양만 쳐다보았다. 이럴 녀석이 아닌데 정말 유통기한 100년은 지난 우유를 먹었나 보다.


“그 소리 한번만 더 내 앞에서 꺼내봐! 정말 확...”


교실의 눈동자들이 전부 태양에게 향했다. 태양은 거칠게 얼굴을 쓸고 교실을 나갔다. 교실 문을 닫는 소리에도 기현의 열린 입은 닫힐 줄을 몰랐고, 수십 쌍의 눈동자는 갈 곳을 잃고 사라진 태양의 기운에 쓸려갔다.


“야. 저 자식. 확? 확? 뭐라는 거야!”


기현이 닫히지 않는 입으로 말을 더듬고 있었다.


‘나, 확! 확! 확 돌아버리는 수가 있어!’


태양은 외치지 않은 분노를 가슴에 삭이고 고장 난 세면대에 채워지지 않아 얕은 물에 얼굴을 담갔다. 태양의 곧게 뻗은 콧날만 잠겼다. 나 이러다 정말 접시 물에 코 박고 죽는 거 아냐?



-나도 너 재수 없어.


눈이 딱 떠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블라인드 너머로 하얀 햇살이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스탠드 아래 있는 탁상시계를 확인했다. 7시. 지각이다! 하늘색 시트를 박차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노란색 칫솔에 파란 민트향 치약을 묻혔다.


-나도 너 재수 없어.


세면대 위에 붙어있는 거울 속에 흠칫 놀란 세영의 모습이 담겨있다. 양치질하던 오른손이 멈춰있다. 세영은 고개를 흔들고 다시 이를 닦았다. 어제 샤워를 하고 자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얼굴을 닦고 옷장 문을 열었다.


-나도 너 재수 없어.


옷걸이에서 교복을 내리는 손길이 움찔했다가 빠르게 움직였다. 저번 주부터 입기 시작한 하복이 깔끔했다. 하얀 양말을 신고, 브러시로 머리를 한번 쑥 잡아 위로 올렸다. 입에 물고 있던 검정색 머리끈을 잡아 시원하게 묶었다. 밤에 공부하던 수학 문제집과 필통을 어제 챙겨놓은 가방에 집어넣고 어깨에 걸쳤다.


-나도 너 재수 없어.


방문을 여는데 다시 표정이 굳었다. 세영의 미간이 잠시 오그라들었다. 식탁에 있는 식빵 위에 딸기잼을 바르고 입에 물고 거실로 나왔다. 큼지막한 괘종시계가 7시 20분을 지나고 있었다. 현관에 있는 하얀색 스프리스 스니커즈에 발을 넣었다. 넉넉하게 매어놓은 탓에 쑥 들어갔다. 뒤에서 인기척이 들였다.


“가니? 아침은 먹었어?”


예쁘게 차려입은 엄마가 나왔다. 세영은 입에 문 식빵을 가리켰다.


-나도 너 재수 없어.


식빵을 씹던 이가 뚝 멈췄다.


“그래, 그럼 다녀오렴. 괜히 얘들이랑 놀지 말고 공부해라. 알았지?”


세영은 살짝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해는 반짝이고 바람은 습했다. 초여름이었다. 정류장 앞에는 똑같은 교복을 입은 얘들이 죽 늘어서있었다. 세영은 맨 끝에 가서 섰다. 7시 30분. 평소보다 늦은 시간이지만 지각은 하지 않을 터였다. 저기 녹색 마을버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도 너 재수 없어.


카드 리더기 앞에 놓인 세영의 카드가 흔들렸다.


“안으로 들어가세요!”


운전기사 아저씨가 세영에게 재촉하는 눈짓을 보내며 크게 소리쳤다. 역시나 만원버스다. 앞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간신히 손잡이를 잡았다.


-나도 너 재수 없어.


입술을 꽉 깨무는데 끼익 하고 버스가 급정거했다. 옆에 있던 여학생이 중심을 읽고 세영을 밀쳤다. 피 맛이 났다. 혀를 굴려보니, 입술이 찢어졌다. 점점 쓰라리다. 버스는 예고도 없이 흔들렸다. 팔에 아플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나도 너 재수 없어.


버스가 끼익 멈추고 사람들이 우르르 움직였다. 학교 앞이었다. 세영은 가방을 고쳐 메고, 내리는 사람들 뒤에 가서 섰다. 교문 앞에는 복장 검사를 하는 학년 주임이 있다. 7시 50분. 학생들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시간이었다. 몇몇 귀걸이를 하고 치마가 짧은 여자애들이 몰려 들어가는 학생들 사이에 끼어 총총대었다. 하지만 학년 주임의 날카로운 관찰을 피할 수는 없었다. 잡힌 학생들이 교문 앞에 쭉 앉아있었다. 아마 0교시 시간에 쓰레기 줍기를 할 것이다.


-나도 너 재수 없어.


앉아있는 학생들은 쓱 훑으며 지나가던 세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교실 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벌써 등교한 얘들이 삼삼오오 모여 잡답을 하고 있었다. 저번 주에 바꾼 1분단 셋째 줄에 가서 앉았다.


-나도 너 재수 없어.


가방을 여는 세영의 손이 살짝 떨렸다.


“오늘 좀 늦었네.”


자리를 바꾼 뒤, 세영의 뒤에 앉게 된 서경이 인사를 건넸다.


“늦잠 잤어.”


고개를 돌려 어이없는 웃음을 날렸다.


-나도 너 재수 없어.


꺼내고 있던 책이 세영의 힘에 의해 휘어졌다.


“우와, 웬일이야? 이세영이 늦잠도 자고. 이거. 이거. 오늘 해가 서쪽에 떴나?”


서경이 과장되게 입을 벌리며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세영은 살포시 웃었다.


“어? 왔네. 너 보려고 오늘 일찍 왔는데. 좀 늦었네?”


“이세영이 늦잠을 주무셨단다.”


화장실을 다녀오는지 교복치마에 손을 문지르며 보배가 다가왔다.


“진짜? 와. 신기하다. 크크.”


보배가 큭큭대는 웃음을 참지 않고 쏟아냈다. 세영도 자신이 어이없다는 웃음을 날렸다.


“근데 왜?”


“아, 나 수학 문제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서.”


보배가 옆 분단의 자리에서 수학책을 가져왔다.


-나도 너 재수 없어.


보배가 넘기는 수학책을 바라보는 세영의 시선에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한보배, 선수 치는 거야? 기말 고사 준비 벌써 들어간 것이야?”


“벌써 라니? 다음 주야!”


“엥? 정말? 잠깐. 분명 2주나 남아... 설마 오늘이 19일이야?”


“그래! 으이고.”


서경이 책가방을 뒤집어 안에 있는 책을 다 꺼내 분주하게 책장을 넘겼다. 세영은 절규하는 서경을 뒤로 하고, 보배가 지목한 문제를 읽기 시작했다.


-나도 너 재수 없어.


서경이 건네준 알록달록 무늬의 샤프가 일그러져 보였다.


“야, 소식 들었어? 축구부 결승 진출이래. 꺄악!”


“진짜? 너 진짜 소식 빠르다. 경기 어제였잖아.”


“그럼, 내가 한기현 팬클럽 임원진이잖아. 호호호.”


“결승은 언제래?”


“이번 주 목요일.”


“어머머, 그럼 걔네도 기말고사 보는 거?”


“그렇겠지. 다음 주부터 기말고사니까. 아, 어떡해. 우리 태양이. 걱정된다. 2주나 학교 안 나왔는데. 어쩜 좋아?”


알록달록 샤프를 잡은 세영의 손등에 파랗게 핏줄이 솟았다.


“아, 그럼 여기서 X를 넘겨줘야 하는 거야? 엉? 세영아? 이세영?”


“아? 어어. 여기서 X를 넘겨야 돼.”


뒤늦게 반응하는 세영을 보배가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세영의 손은 수학공식을 적어 내려가고 있었지만, 귀는 옆에서 수다를 떠는 무리를 향해 열려있었다.


“내가 알아낸 소식에 의하면, 태양이가 기말고사 걱정한다더라. 솔직히 우리 태양이가 축구부지만, 성적은 꽤 좋잖아. 특히 영어는 50등 안에 들고. 전 과목 다 합하면 전교 100등 안에는 들걸. 얼굴 잘생겨. 몸매 훌륭해. 머리도 좋아. 그 과묵한 성격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남자 아냐?”


“당연하지! 어머머. 근데 태양이가 걱정한대?”


“이번이랑 저번 대회 다 지방에서 하는 거라서, 학교에 스트레이트로 안 나왔잖아. 가뜩이나 중간고사 안 봐서 기말고사로 다 반영되니까 좀 부담이라 그러더라고.”


“울 태양이가 성적이 안 좋아져도 나는 좋지만. 태양이가 걱정하는 건 싫은데.”


“그러게. 나도 나도. 아, 내가 대신 봐줄 수도 없고.”


세영이의 문제풀이가 공책 한 장을 향해가고 있었다. 옆에서 조잘대는 여자애들의 잡담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도 너 재수 없어.


툭. 알록달록 샤프심이 부러져 어딘가로 튕겼다. 세영은 보배에게 미안한 눈빛을 보내며 샤프의 끝을 눌렀다. 검은색 샤프심이 쏙 튀어 나왔다.


“문제지라도 훔쳐다 줄까?”


“어이쿠. 윤태양 살리자고 네가 죽을래?”


“시험에 나올 문제라도 뽑아다 줄까?”


“야야야. 너나 잘해. 너 기말에서 만회 못하면 그대로 미끄러지면서.”


“아씨. 윤태양을 위해서라면 내가 뭔들 못할까?”


X=1이라는 마지막 답이 깔끔하게 적혀졌다. 보배가 아, 하는 탄성을 질렀고, 세영도 만족한 미소를 띠었다.


-나도 너 재수 없어.


미소가 사라졌다.


“아, 윤태양. 이번에도 MVP타려나?”


“탁!”


굉장히 큰 소리였다. 교실에 있던 눈이 한 쪽으로 쏠렸다. 세영의 손에 두꺼운 수학 문제집에 들려있었다. 허리를 숙이고 문제풀이를 보고 있던 보배가 엉거주춤 몸을 세웠다. 시험범위를 체크하던 서경은 넘기던 페이지를 잡고 세영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축구부 이야기로 떠들던 여자애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세영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정적. 정적.


“띠리리리~ 띠리리리리~”


종소리가 울려도 누구하나 움직일 생각을 못했다. 시쳇말로 귀신이 들어온 것 같은 교실의 풍경이었다.


“드르륵.”


“다들 뭐하냐?”


그대로 멈춰라 놀이를 하는 것처럼 굳어있는 반 아이들을 본 구기중이 걸음을 멈췄다.


“뭐하는 거야? 다들 앉아. 0교시 시작이다.”


누가 땡을 외친 것 마냥, 모두들 세영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자리로 돌아갔다. 얼어있던 보배도 얼이 빠진 얼굴로 자리로 돌아갔다. 서경은 세영에게로 손을 뻗으려다 거뒀다. 뭔가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나도 너 재수 없어.


세영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흔들었다. 사라지란 말야!


-나도 너 재수 없어.


갑자기. 수시로. 예고 없이. 불쑥 끼어드는 말이었다. 태양이 말했던 그 날부터 문득문득. 아니 종종 떠올라 세영을 괴롭혔다. 심지어 꿈에서도 나타나 태양은 그 말을 던지고 사라졌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태양의 무뚝뚝한 음성이 들렸다. 두통이 생길 정도였다. 녀석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지워버리고 싶은데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윤태양. 녀석은 펄펄 날아다니며 결승까지 진출했다는데 세영은 꼬박 2주 동안 심각한 두통에 시달리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잘 지경이다. 잠을 제대로 못 자니 몸이 피곤했고, 식욕도 떨어졌다. 그러니 당연히 공부에 집중하는 정도도 떨어졌다. 한마디로 요즘의 세영은 엉망진창이었다. 이 모든 게 윤태양. 그 녀석이 한 말 때문이었다. 무시하고 싶지만 무시가 되지 않는 그 말.


-나도 너 재수 없어.


그 녀석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세영이 먼저 한 말이니까. 그리고 태양이 그런 말을 안 하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태양이 막상 그 말을 하고 나자 생각했던 거와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 들었다. 기분이 싫고 나쁘고를 떠나 그 말에 독이 들었는지 가슴 정 중앙에 꽂혀 붉은 피를 남겼고, 단단히 중독되어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해독제가 없는 독이었다. 세영은 잊자고 안간힘을 썼지만 벗어나지 못하고 그 말에 갇혀 허우적댔다.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녀석의 무뚝뚝한 음성을 지워버릴 수 있을까? 세영은 지끈지끈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책장 넘기는 소리와 사각거리는 샤프 소리가 들렸다. 자습 시간이 이미 중반을 향해가고 있었다. 세영은 쌓아두었던 책 속에서 하나를 꺼내 펼쳤다. 세계사였다. 이미 시험범위까지 서너 번은 보았지만 예전만큼 내용이 명료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서너 번을 보는 동안 제대로 집중한 적은 50%가 될까 말까였다. 태양의 말 때문에. 다시 책장을 넘겨보지만 글씨가 이중, 삼중으로 겹쳐보였다. 아무래도 아스피린을 먹어야 될 것 같다.


-기말고사 걱정한다더라.


약통을 찾으려 가방을 뒤지는 데 이번에는 다른 환청을 들렸다. 여자애들이 떠들었던 말들이 똑같이 회상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영은 아스피린 한 알을 꺼내고, 책상 위에 올려둔 생수통의 뚜껑을 열었다.


-학교에 스트레이트로 안 나왔잖아.


꼴깍 넘어가던 아스피린이 식도에 걸렸다. 세영은 아예 물을 쏟아 넣었다. 간신히 식도 벽에 붙어있는 아스피린이 넘어간 것 같았다. 다시 펜을 잡았다. 교과서를 그대로 베껴 쓰기라도 해야겠다. 도저히 이 상태로는 세계사를 오늘 내로 끝내는 건 불가능이었다. 연습장을 꺼냈다.


-시험에 나올 문제라도 뽑아줄까?


도르르르. 펜이 조르르 연습장 위에서 굴러갔다. 세영은 탁한 한숨을 내뱉고, 작은 손바닥으로 앞머리를 넘겨 이마를 짚었다. 미치겠다. 환청에 미치든지, 생각에 미치든지. 둘 중에 하나였다. 아니면 둘 다 던지. 어느 것이든지 모두 윤태양. 그 녀석이 중심에 있다는 것.


‘언제까지 괴롭힐 거니? 얼마나 괴롭히면 물러갈래?’


이마에 머물렀던 손바닥이 세영의 양 볼에 얹어졌다.


-난 예의는 차려.


‘그래. 윤태양. 어디 네가 말하는 예의를 차려주겠어. 내가 져서 그런 게 아니야. 네가 이겨서 그런 것도 아니고. 이건 그냥 예의야. 동방예의지국 대한민국의 한 사람으로 지키는 예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냐. 그러니까 이건...이건....그래! 네가 감아준 그 붕대. 그 붕대에 대한 예의일 뿐이야.’


세영은 양 볼을 꾹 한번 누르고, 도르르 사선으로 굴러간 펜을 다시 잡았다. 그리고 책상 속에 넣어둔 주황색 새 공책을 꺼냈다. 그 안에 세영의 글씨가 또박또박 적혀내려 가기 시작했다.


문서 첨부 제한 : 0Byte/ 2.00MB
파일 제한 크기 : 2.00MB (허용 확장자 :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완결소설은 가나다 순입니다 Junk 2011-05-11
198 폭설 - Intro 5 secret [13] 리체 2006-11-03
197 폭설 - Intro 4 secret [13] 리체 2006-11-01
196 폭설 - Intro 3 secret [11] 리체 2006-11-01
195 폭설 - Intro 2 secret [9] 리체 2006-10-31
194 폭설 - Intro 1 secret [17] 리체 2006-10-31
193 토막살인 - 4 (완결) [1] 페르스카인 2004-10-11
192 토막살인 - 3 [3] 페르스카인 2004-10-03
191 토막살인 - 1, 2 [7] 페르스카인 2004-10-01
190 치킨 (下) [16] Lian 2008-07-21
189 치킨 (上) [8] Lian 2008-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