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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01
그런 날이 있었다. 꽤 추운 날씨가 이어지던 어느 날, 햇빛이 살짝 머리를 내밀었었다. 마침 가방은 늘어난 몇 권의 책으로 묵직해져 습관처럼 넣던 보라색 벙어리장갑을 책상 위에 놓고 나왔었다. 햇볕이 따뜻하고 바람도 시원하다고 생각했던 건 잠시, 겨울강풍이 몰아쳤다. 도시락 가방을 들어야 하는 왼손은 고스란히 강풍을 맞았었다. 집에 들어가서 그 보라색 장갑을 가져올까 하고 망설였었는데, 버스 놓치겠다는 생각에 그대로 학교에 갔었다. 그리고 굉장히 후회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눈이 펑펑 쏟아져 손이 빨갛게 얼었었기 때문에...
“채칵, 채칵, 채칵, 채칵-”
샤프 꼬리를 꾹꾹 누르는데, 순간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반복적으로 두드려도 머리를 내밀지 않는 샤프심. 눈은 샤프의 가장 날카로운 끝을 바라보고, 한 손으로 필통을 뒤적였다. 그리고 떠오른 보라색 벙어리장갑. 필통 안에 샤프심이 당연히 없을 거라는 건 알고 있다. 보라색 벙어리장갑처럼 혹시 하면서도 설마 하고 책상 위에 남겨두고 학교에 온 터였으니까. 분명 놓고 온 건 자신인데, 괜히 애꿎은 샤프만 하릴없이 괴롭히고 있다. 불쌍한 검은 색 샤프 아래로 도형과 숫자가 어수선하게 섞여있다.
두 문제만 더 풀면 되는데, 수학은 꼭 흑연으로 만들어진 필기용품으로 풀어야 한다는 게 세영의 지론이었다. 사각사각. 하는 소리가 답으로 인도하는 소리 같아서 너무 좋았다. 다 풀고 난 문제지의 숫자들이 따뜻해 보였다. 진회색의 뭉툭한 필체가. 서른 문제 중에서 겨우 두 문제가 남았는데, 덮자니 아쉽고 그렇다고 볼펜으로 풀기는 싫었다. 이럴 때는 제3의 요소가 불쑥 뛰어들면 좋은데... 말하자면 하나 남아있는 도넛을 먹기에는 배부르고, 그렇다고 남기기는 아까울 때, 누군가가 나타나 먹어치우는. 일종의 우유부단함의 해법. 슬쩍 휴대폰을 보니, 정확히 6시 30분. 이게 바로 제3의 요소였다.
창밖너머 운동장이 조용하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어이, 어이, 하는 구령소리가 쩌렁쩌렁했는데, 그게 언제였는지 싶을 정도로 조용하다. 4월이 되면서 해는 갑자기 길어져서 운동장에는 햇살이 충만하다. 가만히 운동장을 바라보다, 벌떡 일어나 가방을 쌌다. 못다 푼 두 문제에 대한 미련은 깨끗이 사라졌다. 남색 가방에 수학, 세계사, 영어를 차례로 집어넣고, 노트며 필통이며 책상 위에 남아있던 물건들을 남김없이 집어넣었다. 왼쪽 어깨에 꽤 묵직해진 가방을 걸치고, 오른손에는 체육시간에 벗어놓은 교복이 담긴 종이가방을 들었다.
세영은 대리석 계단을 내려가며 시간계산을 하고 있었다. 8시에 과외가 있으니까, 지금부터 7시 20분까지 연습을 하고, 7시 22분에 오는 마을버스를 타면 7시 40분쯤에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그럼 간단하게 요기를 하면 되겠다. 분 단위로 계획을 짜는 건 세영의 습관이었다. 절대 허투루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된다는 인식이 어렸을 때부터 머릿속에 차돌처럼 박혀있었다. 그래서 오늘도 방과 후 보충수업이 끝난 5시부터 6시 30분까지 수학 30문제와 영어 지문 10개를 끝내려고 했는데, 수학 두 문제는 끝내지 못했다. 사실 수학 30문제와 영어 지문 10개 대신 수학 과외를 해야 했다. 매일 5시 30분부터 7시 30분까지는. 갑자기 계획이 어긋난 건 순전히 축구사랑 나라사랑이라 부르짖는 담임선생 때문이었다.
“어, 세영이 아직 안 갔니?”
일층 로비에서 신발을 갈아 신는데, 상냥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상냥한 목소리는 이 학교에서 국어 선생님 밖에 없을 거다. 이제 2년차인 선생님은 예쁘고 상냥하지만 성적에는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는 낭만파 수업은 들어주기 힘들었고, 천사들의 합창의 클라라 선생님처럼 학생들을 이해한다는 눈빛은 도저히 받아줄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이제 가려고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꾸벅 인사하고 나가려는데, 이 참견쟁이 선생님이 그래라 하고 보내줄 리가 없다.
“어머, 지금까지 공부했니? 그럼 도서실로 오지. 거기서 1,2학년 얘들은 자율학습 하는데. 교실에서 했니? 뭐 하러 썰렁하게 교실에서 그래.”
그러니까 썰렁한 게 좋아서 교실에 있던 건데. 시도 때도 없이 들락날락하고 여기저기 쪽지가 휙휙 날아다니는 도서실은 말 그대로 정말 자율학습이었다. 이 선생님이 감독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절대 자율학습에는 참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또 붙잡을까봐 다시 한 번 꾸벅 인사하고 재빨리 뛰어나왔다. 옅은 바람에 국기게양기가 선들선들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휘적휘적 뛰어가 스탠드 계단 제일 아래 가방과 종이가방을 놓고, 조회대 아래 있는 체육 비품실에 갔다. 낡은 축구공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내가 아끼는 축구공 하나 저기에 남겨 놓을 테니까, 연습 좀 해라. 월드컵 때만 대~한민국 이러지 말고 평소에 축구에 대한 애정을 팍팍 키우란 말이야. 축구사랑이 나라사랑이고 나아가 세계적인 인류애로 도약할 수 있는...블라 블라 블라...
담임이자 체육 선생님인 구기중이 끊임없이 쏟아내던 축구사랑이 떠올랐다. 축구에 환장하는 구기중은 체육시간을 K리그 시작해 프리미어리그로 마치는 축구광신자였다. 그래서 고교축구계의 킹이라는 이 학교로 전근오기 위해 갖은 아부와 뒷거래를 서슴지 않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여하튼 이 축구광신도 때문에 1학기 체육 실기는 죄다 축구였다. 그 첫 번째 관문이 바로 승부차기 거리에서 10번의 기회 중 7번 성공시키기.
낡은 축구공을 들고 골대 근처로 뛰어갔다. 이 학교 운동장은 근사하다. 고등학교 주제에 꽤 넓고 그럴싸한 운동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잘나가는 축구부에 딱 맞게. 농구부도 야구부도 아닌 오직 축구부에 적합한. 사실 축구부 말고 농구부나 야구부는 있지도 않다. 운동장이 좋거나 말거나 세영은 0.001%도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관심은 운동장도 아니고 구기중 선생이 주창하는 축구사랑은 더더욱 아니며, 선생님이 원하는 대로 연습을 성실을 하는 착한 학생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녀의 관심은 오직 A+를 맞는 것.
“뻥!”
도르르 굴러간다. 소리만 요란하다.
‘안 돼. 난 꼭 A+를 맞을 거야! 아니, 맞아야 해!’
“뻥!”
도르르 굴러간다. 이번에는 왼쪽으로.
‘안 돼. A+가 아니면 S대는 못가는 거야!’
“뻥!”
도르르 굴러간다. 더더더 왼쪽으로.
‘이 따위 때문에 내가 주저앉을 줄 알아?’
“뻥!”
“뻥!”
“뻥!”
“뻥!”
골대 부근은 조용했다. 공포탄이 터진 것 마냥 소리만 요란하고 실탄은 나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굴러가는 공을 차고 줍고만 몇 번 했더니 지친다.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씩씩대면서도 눈빛은 날카롭다.
‘이 따위 축구공도 못 넣는 건 이세영이 아냐!’
“뻥!”
조금 공중에 떴다 했더니, 저기 엎어지면 코 닿을 때에 떨어져있다.
-그러기에 유학을 가자니까. 일반고 가서 뭐해. 쓸데없는 게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너 여기서는 가정, 미술, 체육 이런 거 하나도 안 했잖아. 왜 그랬겠니? 그런 거 대학 가는 데 하나도 필요 없어서 그래. 그런데 일반고 가면 그런 거 다 해야 해. 아무리 공부 잘하는 애는 거저 준다고 해도, 하는 티는 내야 한다는 거 모르니? 그 시간에 단어 하나 더 외우고 수학 하나 더 푸는 게 낫지. 얘가 왜 다 늦게 속을 썩이나 몰라.
바람에 치여 흔들리는 축구공 위로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아함과 교양의 대명사인 엄마가 오만가지 인상은 다 찌푸리고 언성을 높였었다. 그게 불과 한 달 전, 그 때는 딱 죽고 싶을 만큼 혼란스러웠던 상황이라 그런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중학교 선생이 저런 말을 하는 게 참 웃기다 라고만 생각했을 뿐. 그런데 지금 보니 딱 맞다. 내가 뭐 하러 이걸 죽어라 하고 있는 건지 화가 나려고 한다. 과외시간까지 미루면서 공부할 시간까지 쪼개면서 고작 체육 실기하나 A+맞자고. 더 어이없는 건 이 A+가 없으면 S대 최고학과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S대 최고학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이가 꽉 물렸다. 어이가 있든 없든 난 이걸 해야 한다. 발목이 부서지든 말든 해서 꼭 A+를 맞고 S대 최고학과에 가서 보란 듯이! 보란 듯이!...
“뻥!”
‘날아라! 날아라! 날아가란 말이야.’
픽 올라섰던 공이 또 저만치 앞에서 고꾸라져 있다. 골대가 정말 아득해 보인다.
“발등으로 차보지 그래?”
망연자실해서 공만 쳐다보는데, 낯선 음성이 날아들었다. 이 시간에 누가 있을 리가 없는데. 고3은 전부 4층 교실에서 자습 중이고, 자율학습을 신청한 1,2학년의 쉬는 시간은 족히 40분은 기다려야 했다. 한마디로 그녀에게 말 걸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 고개를 갸우뚱하고 세영은 바람에 밀려 더 멀리 굴러가려는 공을 잡아 다시 원위치에 놓았다.
“뻥!”
소리라도 요란해서 다행인 건가.
“발등으로 차야 한다니까!”
‘누군데 참견이야!’
세영은 휙 사방을 둘러보았다. 조회대 근처에 남자애 한명이 우뚝 솟아있다.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계속 보고 있었나 보다. 헛발질만 몇 번째인데. 창피했지만 이런 걸로 기죽을 이세영이 아니었다. 이 따위 창피가 그녀에겐 조금도 걸림돌이 될 수 없었다. 세영은 더 힘껏 공을 찼다. 역시나 불발.
“발등으로 차라니까!”
그 녀석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남이사! 지가 뭔데 상관이야! 세영은 흘러간 공을 다시 줍고 정위치에 툭 놓았다. 그리고 다시 뻥 차려는데, 차려고 하는 오른발이 보이지 않았다. 힘을 줘 보았지만 오른발이 앞으로 나오질 않았다.
“봐봐. 여기라니까. 여기로 차라고.”
그 전봇대 같은 녀석이 오른발을 붙잡고 발등을 가리키고 있었다.
‘뭐,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어!’
“뭐야!”
잡혀있던 오른발로 그 녀석의 손을 퍽 차냈다. 그런데 그 녀석은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일어났다. 순식간에 그 녀석이 시야를 가리고 햇빛을 가렸다. 164cm, 대한민국 평균키를 웃도는 키인데, 앞의 녀석은 대한민국 남학생 평균키를 깡그리 무시한 높이처럼 웅장해 보였다.
“네가 뭔데 남의 발은 붙잡고 그래!”
이런 높이 따위에 기죽을 이세영이 아니었다. 꽥 소리를 질렀다.
“발등으로 차는 거라고! 너처럼 찼다가는 공 들어가는 건 꼬부랑 할머니 돼서도 불가능이다!”
벌이 윙윙 대는 소리처럼 들렸다.
‘왜 신경 쓰고 난리야. 기가 막혀. 웃겨. 어이없어!’
“신경 꺼!”
연습할 시간을 낭비하는 게 아까워, 더 쏘아줄 말을 꾹꾹 삭히고 다시 공을 뻥 찼다.
“그거 봐라. 빈 수레가 요란하다더니.”
꾹꾹 삭히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 참겠다.
“너 나 알아? 나 너 모르거든. 참견할 사람을 찾고 싶으면 한가한 사람을 찾아봐. 나는 무지 바쁘거든.”
입술을 꽉 깨물고 그 녀석을 쏘아보았다.
“이것 봐. 나도 바빠. 연습하려고 왔더니, 생뚱맞은 여자애 하나가 아주 현란하게 헛발질을 하고 있잖아. 그렇게 할 거 같으면 관 둬. 남 연습할 시간 빼앗지 말고.”
이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내가 무슨 연습할 시간을 빼앗았다 그래? 이 운동장에 골대가 하나야? 저기도 있잖아!”
세영은 손을 뻗어 저쪽 반대편에 있는 골대를 가리켰다.
“난 매일 이 시간에 바로 이 골대에서 연습한다고!”
“하, 어이없어! 그게 무슨 상관이야. 아무데서나 연습하면 되지!”
세영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뭐라고 더 쏘아붙이려고 하는데, 삑삑삑. 체육복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 알람이다. 7시 15분. 그러고 보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알람을 끄고 축구공을 들고 그 녀석을 찌릿 째려봤다. 넘어가는 해를 등지고 있어서 그런지 검은 실루엣만 보였다. 재수 없는 놈! 눈빛으로 그렇게 말하고, 스탠드로 달려가 가방을 낚아채고 교문으로 뛰었다. 노골에 재수 없는 놈의 참견에. 기분이 정말 더럽다.
6시 30분. 29라는 숫자가 30으로 바뀌는 것을 낚아채자마자, 책상 위에 있던 책과 필기구를 한꺼번에 가방에 쓸어 넣고 무서운 기세로 조회대까지 달려갔다. 운동장에는 아래위 하얀색 축구부 유니폼을 입은 남자애 하나가 공을 차고 있다. 아직 축구부연습이 끝나지 않은 걸까? 6시 35분. 휴대폰의 시계는 정확하다. 휙휙 둘러보니, 저쪽 운동장 귀퉁이에 축구부원들이 공을 가지고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축구부실에 가는 것이리라. 학교 저 구석에는 굉장한 축구부실이 있다고 들었으니까.
‘근데 저 사람은 누구람?’
세영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무슨 상관이야, 하고 고개를 쓱쓱 흔들고는 어제와 같은 장소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10개 성공하고 집에 가는 거야!’
굳은 의지를 가지고 축구공을 가슴에 꼭 안았다. 교문과 가까운 골대에서 하고 싶었지만, 축구부원으로 보이는 사람 때문에 저쪽 멀리 있는 골대까지 달려갔다. 그나저나 오늘은 재수 없는 놈이 안 보인다. 감히 이세영에게 아는 척을 하던 놈. 지 연습장소라느니, 이렇게 저렇게 해보라느니. 지가 뭔데 아는 척이야! 집에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도 그 재수 없는 놈을 마구 욕하고도 모자라 과외 할 때도, 샤워할 때도, 잠이 들기 전 까지 계속 ‘재수 없어’를 중얼거렸다. 완벽한 이세영에게 아는 체를 하기에는 그 놈은 백 만년 아니 억만년은 빨랐다.
“뻥~”
‘아니야, 평생 평어어어엉생 그런 놈이 나에게 ‘척’따위를 하는 것은 감히 어불성설이야!’
그 재수 없는 놈을 공에 그리고 뻥 찼지만 역시나 왼쪽으로 픽 꺾여서 맥없이 떨어졌다. 이가 득득 갈렸다. 더불어 배가 찌르르 아팠다. 너무 골대를 외면하는 공 때문에 화가 치솟은 게 분명하다.
“그러게. 죽어라 무조건 찬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니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재수 없는 그 놈의 목소리다.
‘어디서 나타난 거야!’
미동도 없이 서 있는 공을 줍고 재수 없는 놈을 아주 묵사발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찌르르 배가 쑤셨다.
“상관 마!”
배를 꾹 움켜잡고 통증을 가라앉힌 다음, 허리를 올렸다. 그 녀석의 얼굴에 능글능글한 웃음이 달려있다. 손에 든 공을 확 던져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하얀 유니폼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축구 양말과 검은 색 축구화.
‘오라, 이 녀석 축구부원인가 보네. 그래서 그렇게 아는 체를 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웃기지 마!’
세영은 홱 고개를 돌리고, 저벅저벅 승부차기 선으로 걸어갔다.
“보는 사람이 답답해서 그런다.”
‘웃겨! 그렇게 답답하면 안 보면 되잖아. 누가 봐 달라고 애원했냐!’
“뻥!”
역시나 미스다. 공은 오른쪽 저 너머로 나동그라졌다.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 ”
공을 주우러 뛰어가는데 요란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재수 없는 놈! 사람 앞에 두고 정말 재수 없게 비웃는구나.’
이가 득득 갈렸지만, 저런 놈하고 또 말을 섞었다가는 짜증지수가 폭주할 것 같아 꾹꾹 참았다. 찌르르. 공에 손을 대는데 배에 통증이 왔다. 그리고 느낌이 이상했다. 아무래도 터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9일이었다. 확신이 들자마자, 통증이 찌르르 찌르르 무한대로 퍼져갔다. 입술을 꽉 깨물고 공을 집고 스탠드를 향해 걸었다. 배가 제대로 아프기 시작했지만, 머릿속에는 오늘 있을 과외와 숙제와 공부들을 생각하고, 겉으로는 그 녀석에게 강한 오라를 뿜어내기 위해 당당하게 걷고 있었다.
“어?”
그 녀석을 지나치고 운동장을 가로 질러 비품실 앞에 공을 놓고 빠르게 교문으로 향했다.
“야! 좀 웃었다고 그러냐?”
그 녀석이 어느새 스탠드 앞까지 와서 소리치고 있었다. 녀석은 뭐라고 더 떠들었지만, 세영은 통증 때문에 그게 뭔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계속 좋은 날씨다. 초록빛 나뭇잎이 짙게 푸르러지고, 햇빛도 점점 따사로워지고. 날씨가 참 좋다. 이중창을 뚫고 햇볕이 그의 머리에 착륙했다. 교실 맨 뒤의 창가 옆은 항상 태양의 자리. 190cm가 조금 넘는 그의 키는 보통 고등학교 남학생 사이에서는 최상급의 키였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현재까지 그는 항상 끝자리였다. 자리 바꾸기를 할 때마다 키에 맞춰 서라는 선생님의 말에 이거저거 눈치 볼 거 없이 쪼르르 맨 뒤에 가서 섰다. 키 큰 자는 때때로 외롭다. 35명 혹은 37명처럼 한반에 학생 수가 홀수일 때는 짝 없는 외기러기 신세가 되어야 했으니까. 짝이 없으면 교과서를 잊고 안 가져왔을 때도, 쪽지시험을 보고 바꿔서 채점할 때도 꽤 기분이 울적하다. 최고로 울적했던 건, 남들은 다 있는 여자 짝꿍을 못 가져보는 것이었다. 하필 남자애만 낳기 시작한 때라 반에는 남자애보다 여자애가 네댓 명 적었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남자를 짝꿍삼거나 혼자 앉는 게 일쑤였다. 그때는 그게 참 우울했는데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공학이어도 남녀 반이 갈려서 모조리 남자가 짝꿍이었다. 입학식 첫날, 그 사실에 괜히 좋았었다. 뭔가 이제는 다 공평하구나. 너희들도 내 기분 좀 느껴봐라. 그러니까 억울함을 한 번에 풀어주는 포청천을 만난 기분. 그러다 열일곱이나 먹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웃겨서, 아무한테도 말 안하고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 털썩 앉았었다. 사실은 배를 잡고 교실바닥을 구르면서 웃어주고 싶었지만.
“자, 이 시는 정말 낭만적이란다. 누가 한번 낭송해볼래?”
역시나 H고에 낭만파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로 가득 찬 국어 선생이다. 보아하니 오늘도 눈동자 안에 이미 다른 세계가 담겨있다. 이미 저 강 넘어 낭만파 시대에 빠진 듯 했다. 쓱 보니, 얘들도 따분한 듯 하품만 하고 있었다. 원래 국어 선생님은 최고의 인기선생이었다. 부임하지 2년. 즉, 꽃다운 26살. 긴 생머리에 하늘하늘한 몸매며 그야말로 남학생들의 동경 대상이었다. 작년에 입학했을 때 2학년을 맡았다는 것을 듣고는 1학년 남학생들이 죄다 그 자리에 앉아 대성통곡을 할만치로. 2학년이 되는 개학식, 2학년을 또 맡았다는 소식에 이번에는 그 얘들이 아주 괴성에 가까운 소음을 내질렀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난 지금 그 누구도 국어선생을 보고 환호하지 않는다. ‘국’이라는 말만 들어도 몸서리를 쳤다. 이 국어선생은 대한민국 입시제도 속에서 어떻게 선생님이라는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가 싶을 만큼 입시와는 상관없는 교육을 펼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학생을 위한 교육인가? 그건 또 그렇지도 않다. 자기가 좋아하는 시며 소설을 들고 와, 꿈에 부푼 목소리로 낭독하고는 혼자 분위기에 취해 50분의 수업시간을 마감했다. 처음에 여자란 저래야 제 맛. 이라며 열렬하게 추종하던 남학생들도 하나 둘 떨어져나가더니, 이제 그 누구도 국어 선생이 좋다고 난리치지 않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국어 선생은 언제나 낭만에 빠져 있었다.
‘쯧쯧, 정말 공립이 아니라면, 당장 모가지 일지도.’
“어머, 다들 아직도 부끄러운 거니? 그럼 오늘만 내가 낭송할게. 흠흠. 초원의 빛. 에드...”
오늘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쭉 낭송하실 거면서. 본격적인 낭만에 빠져든 국어 선생을 향해 픽 웃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살살 졸음이 쏟아졌다. 점심을 먹고 난 후의 국어시간은 참을 수가 없었다. 이미 하품하던 녀석들 중 대부분이 낭만의 파도에 밀려가고 있었지만, 태양은 애써 참고 있었다. 그래도 열심히 시를 낭송하는 선생님 앞에서 대놓고 자기는 미안했다.
운동장에는 남색 체육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정렬해있었다. 체육시간인가보다. 자칭 축구부의 넘버원 팬이라며 태양을 볼 때마다 친한 척을 하시는 체육 선생님이 보였다. 체육시간마다 드리블, 패스 등 갖가지 묘기를 보여 달라는 통에 난감한 때가 많지만 정말 축구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군말 없이 축구공을 찼다. 정렬되어 있던 줄이 흩어지더니 여학생들이 두 팀으로 나눠져서 골대 앞에서 축구공을 차기 시작했다.
‘어라? 저건 내 연습을 방해하던 지지리도 공을 못 차던 애가 하던 거랑 똑같은 거잖아.’
하고 생각하는데, 탁하며 책상이 흔들렸다.
“오라~ 누구 좋아하는 여학생이라도 발견?”
앞에 앉은 기현이 녀석이 의자를 흔들거리며 책상 앞부분을 툭툭 쳤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 녀석의 의자를 제지했다. 그러자 아예 의자를 바싹 밀어 그의 책상에 붙였다. 어지간히 지루한 모양이었다.
“누군데? 어디보자......”
기현이 왼쪽으로 돌린 목을 창문 쪽으로 쭉 내밀었다. 고개를 살짝 흔들며 눈동자를 이 쪽 저 쪽 굴렸다.
“야, 넌 시력도 좋다. 3층에서 얼굴이 보여?”
꽤 심각하게 보고 있는 기현을 향해 툭 내뱉었다. 그래도 기현이 놈은 눈을 떼지 않았다. 눈이 고집스럽다. 괜히 안 되는 게 있으면 오기가 나서 그만두지 못하는 타입이 바로 한기현, 이 녀석의 타입이었다. 때론 이런 고집스런 성격이 좋은 결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중학교 때 태양의 달리기 기록을 넘어서겠다고 몇 주일은 훈련이고 뭐고 달리기만 하더니, 따라잡지는 못했어도 2초나 기록을 단축시켰었다. 축구부 감독님도 훈련을 게을리 한다고 불같이 화내셨는데, 그 녀석의 단거리 기록에 입을 다물지 못하셨다. 그런데 그 고집이 이런 쓸데없는 거에도 작용하는 게 문제였다.
“구기중 선생이 정말 축구를 좋아하긴 하나보다.”
그 녀석의 고집을 꺾기 위해서 살짝 화제를 바꿨다.
“그러게 말이다. 내가 들었는데 이번 년도 체육 수업 계획표를 몽땅 축구로 채웠다던데.”
자기도 지치고 있었는지 태양의 말에 쏜살같이 반응했다.
‘귀여운 녀석.’
태양은 픽 웃으며 생각했다. 덩치가 산만한 녀석에게 이런 말은 안 어울리지만.
“그것도 3학년까지 죄다 똑같아. 엄청 수업 짜기 귀찮았나 보더라. 사실 우리야 좋지. 만날 죽어라 하는 건데. 뭐, 축구가 아니어도 이 몸은 몽땅 톱을 달리시겠지만. 후후.”
기현이 불편하게 머리를 반쯤 돌리고 조용조용 입을 놀렸다. 그래도 수업시간이라고 선생님이 신경 쓰는 모양이었다. 물론 우리의 국어선생님은 이미 딴 나라에 가 있었지만.
“여자애들은 축구 좀 힘들지 않나?”
몇 명만 제대로 골대 안에 들어갈 뿐 나머지는 공이 절반도 못 날아가고, 헛발질만 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소리만 요란했던 여자애가 떠올랐다.
‘그 여자애나 쟤네들이나......’
“운동 잘 못하면 힘들겠지. 그런데 뭐, 요즘에 누가 체육 따위 신경 쓰냐? 체육 시간이 있으니까 저러고 있는 거지. 솔직히 실기에서 점수 잘 따려고 하는 얘들, 아마 한명도 없을 걸?”
‘그런데 왜 그 여자애는 필사적으로 공을 찼던 거지?’
“그나저나 쟤네 진짜 못 찬다. 구기중도 심하게 못 찬다. 크크. 월드컵 때 꺅꺅 소리만 지를 줄 알지. 쟤네가 축구에 대해 뭘 아냐? 근데 구기중은 교과서에 나와 있는 대로 설명해주고 노터치라더라. 우리한테도 그러잖아. 그래도 남자얘들은 축구에 대해 웬만큼 아니까 따라 가는 거지. 이야, 축구 축구 노래를 불러도 정작 축구는 못한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가만 보니 여자애들은 공을 어떻게 차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되는 대로 마구잡이로 뻥뻥 차고 있을 뿐. 단순히 공을 차는데도 기술이 필요한데. 그래서 그 애도 그렇게 지독한 공차기를 보여 준 건가? 그런데 나도 구기중처럼 교과서대로 말한 것 같다. 발등으로만 차라고. 하기는 축구공 처음 차는 여자애한테 그렇게 말하면 누가 알아들을까?
“난 가르치는 자질은 없는 거 같다.”
기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얼라리요. 너 그걸 이제 알았냐? 넌 정말 그런 재주 없어. 내가 어떻게 하면 그렇게 빨리 달리냐고 물어봤을 때, 너 뭐라고 한 줄 알아? 그냥 힘껏 달려. 이랬다니까. 그 때는 어려서 너처럼 막 했는데. 보니까 팔, 다리를 올리는 각도가 다른 거야. 그런 데서 크게 차이 나는 걸 몰랐던 거지. 뭐, 그 때야 너도 나도 어렸으니까 이해할 수 있어. 근데 1학년 얘들이 너의 그 현란한 드리블에게 대해서 물어봤을 때, 너 그랬다. 발을 잘 움직여야 해. 이랬다고. 크흐흐흐흐. 그렇게 말하면 누가 알아 듣냐? 무릎으로 이렇게 발목 이렇게 저렇게 암튼, 그렇게 세세하게 하나하나 보여주면서 설명해야 할 거 아냐. 너 절대! 저얼대 은퇴해서 코치나 감독된다고 설치지 마라. 그게 바로 대한민국 축구계를 퇴락시키는 거다. 흐흐흐.”
이놈의 입이 웬수지. 한기현 이놈이 내 약점을 잡고 몇 마디로 끝낼 놈이 아니라는 걸 잠깐 망각했다. 기현이 놈은 계속 숨죽여 큭큭댔다. 심통이 나서 녀석의 의자를 발로 퍽 찼다. 움찔하는 가 싶더니 다시 큭큭댔다. 그 모양새를 한심하게 쳐다보다 어제 여자애가 훌쩍 떠나는 모습이 생각났다. 그 애도 기분이 상했던 게 틀림없다. 그렇게 웃어댔으니. 별로 웃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 여자애가 하는 행동이 괘씸해서 더 크게 웃었다. 대꾸 없이 휙 사라지는 모습에 기분은 더 상했지만. 그런데 기현이 놈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도 그다지 잘한 게 없었다. 발등으로 차라고만 했을 뿐, 그 이후에는 말씨름하다 끝났다.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공을 차던데... 혹시 오늘도 오려나? 만약 오면, 오늘은......’
“한기현, 골 넣는 방법 좀 쉽게 설명해봐.”
이 녀석의 설명을 그대로 외워서 말해줘야겠다. 그런데 기현이 자식,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 보고 있네. 뭐, 이 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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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다. 남색 학교 체육복에 긴 머리를 질끈 높이 묶고, 낡은 축구공을 들고 있었다. 그제랑 어제랑 다를 게 없는 모습으로 운동장을 가로 질러 반대편의 골대로 향했다. 태양은 골대에 너부러져 있는 축구공을 줍는 척하며 걸어가는 여자애를 슬쩍 훔쳐봤다. 그 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공을 놓고 힘껏 찼지만, 역시나 헛발질이다. 이제는 태양 자신이 제발 한 골이라도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현이가 말해준 데로 하면 쉬우려나?’
“저기. 무조건 차지 말고. 공에 닿는 순간 발목에 힘을 주고, 발등에 공을 맞춘다는 생각으로 쑥 밀어줘. 소리만 크게 낸다고 공이 멀리 나가는 게 아니라......”
“필요 없어.”
“어?”
쳐다보지도 않고 매몰차게 한마디 던졌다. 그리고 다시 뻥. 역시 소리만 수준급이다.
‘기현이 자식이 설명한 데로 하는 건데. 이해가 안 되나?’
“그러니까 공이 자꾸 옆으로 나가는 건, 볼 중심이 발등에 닿지 않고 옆쪽에 닿아서 그런 거야. 발등에 맞춘다는 생각으로 낮게 쑥 밀면 훨씬......”
“필요 없대도!”
날이 선 목소리다.
‘어렵나? 한기현 이 자식. 너도 나중에 코치는 절대 하지 마라. 그런데 얘는 사람도 안 쳐다보고 성질이야. 어제 웃은 거 때문에 아직도 화났나?’
“어제 내가 웃은 거 때문에 그래?”
대꾸도 없다. 그리고 다시 뻥. 화가 스물스물 나는 것보다도 중간에 픽 떨어지는 공이 더 안타까웠다. 이제는 정말 뻥소리와 함께 챙하며 골대 안에 안착한 공을 보고 싶었다. 이건 뭔가 오기 같은 거였다.
“그건 정말 미안한데. 내가 말한 대로 차보라니까.”
“정말 왜 그러니? 필요 없다고. 너는 네 할 일하고 나는 내 할 일하면 그만이지. 감 놔라 대추 놔라. 왜 참견이야?”
씩씩거렸다. 양손을 허리에 착 올리고 꽥꽥 소리 질렀다. 그게 맞는 말인데, 고작 이 여자애를 이틀 전에 보았을 뿐이라는 거 아는데, 이렇게 못 차는 꼴은 축구를 하는 사람으로서 도저히 눈 뜨고 봐줄 수 없었다.
“정말 눈 뜨고 못 봐주겠어서 그래.”
진심은 통한다니까. 이게 태양의 진심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애, 더 울근불근했다.
“......뭐야? 그럼 눈을 감아버리든지. 알아서 안 보면 될 거 아냐!”
이렇게 무례한 남자애는 처음이다. 어쩜 저런 말을 대놓고 하는 거야. 너 따위가 뭔데!
“그럼 뭐해. 헛발질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안되겠다. 그 녀석이 정 안되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면서 보여주랬어. 잘 봐. 이렇게 차는 거라고.”
평소에 하는 공차기가 아니라, 슬로우 모션으로 뻥 찼다. 공은 가볍게 포물선을 그리며 골대 안에 들어갔다. 무척 깨끗한 골이었다.
“자, 가볍게 밀어 넣는 거야.”
그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공을 넣고는 씩 웃었다. 세영이 백번 넘게 차도 안 들어가던 공이 너무나 가볍게 골대 안에 떨어졌다. 그 녀석의 웃음이 이것 봐라. 이것도 못 하냐.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주 느물느물하게.
“너나 그렇게 해. 남이사. 내 맘대로 할 거야.”
이건 이세영의 오기다. 저런 애 따위가 마음대로 모욕을 주는 것에 대한 오기.
“야! 너 설마 보여주는 데도 못 따라하는 거야? 에이, 설마. 봐봐. 이렇게 천천히 보여줄게.”
그녀의 낡은 공을 뻥 찼다.
“이렇게 보여주는데도 못하면, 그냥 포기해라.”
다시 깨끗하게 들어가는 공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의 말이 세영에게는 일찌감치 포기하시지. 죽었다 깨나도 못한다 로 들렸다. 정말 느물느물한 입을 꽉 꿰매고 싶었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너 따위가, 너 따위가!’
“나도 할 줄 알아!”
감히 날 모욕했단 말이지. 이세영 인생에서 못하는 건 하나도 없다. 카피기능. 한번 본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놓치지 않았다. 머릿속에 그대로 저장해 출력하는 건 그녀의 전매특허였다. 죽어도 네 놈의 동작 따위는 쓰고 싶지 않았지만, 이 녀석의 느물느물함을 태워버리고 싶었다. 그러니까 달리다가 발등에 정확히 공의 중심을 조준하고 발목에 힘을 준 다음, 미는 거야. 하나. 둘. 셋!
“뻥!”
“착. 탕-”
들어갔다. 백번이 넘는 시도 끝에 들어갔다. 그물에 맞은 공이 쪼르르 흘러내렸다.
“오! 나이스! 역시 눈으로 한번 보는 게 백번 말하는 거보다 낫다니까.”
그 녀석이 박수를 짝짝짝 쳤다. 공이 들어간 게 기쁘기는 하지만, 이 녀석이 다 내가 알려줘서 그런 거야, 라고 뻐기는 거 같아 부아가 치밀었다.
“그 쪽이 보여줘서 그런 거 아냐. 내가 한 거야!”
앙칼지게 톡 쏘아주고는 공을 향해 뛰어갔다.
“참 내. 진짜 한 성질 하네.”
태양은 어이없었지만 드디어 한 번 성공한 것만큼은 자신도 기뻤다. 지금까지 자신이 가르쳐서 성공한 첫 번째 사례였다. 이거 재밌는데. 씨익 웃는 사이에 그 얘는 공을 가져와 놓고 다시 찼다. 그러나 공이 골대 앞에 떨어졌다.
“힘이 덜 실렸어.”
그 얘가 씩씩대며 달려가 공을 줍고 격렬하게 공을 찼다. 이번에는 살짝 왼쪽으로 빗겨갔다.
“공을 끝까지 보랬잖아.”
이제 대꾸도 없었다. 그리고 다시 시도. 분명 발을 들고 앞으로 밀었는데 공이 제자리에 있다. 완벽한 헛발질.
“무리하게 발등에 맞추려고 하니까 그러지.”
세영은 이가 득득 갈렸다. 웬 참견이냐 하고 버럭 외치고 싶지만, 이 녀석 같이 느물느물 끈끈이에게는 먹히지 않는 다는 것은 이미 터득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속에서 열불이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 녀석 때문에 아까처럼 공이 안 들어가는 게 분명했다. 근방에 학교 하나만 더 있었어도 백번 양보해서 가버리면 되는데. 적어도 30분이상은 버스를 타고 나가야 했다. 천불이 나는 가슴을 툭툭 두드리는데, 삑삑삑 알람이 울렸다. 집에 갈 시간이다.
'이 느물아, 오늘은 이렇게 가지만 두고 봐. 그 느물거리는 무례함에 고춧가루 팍팍 뿌려 줄 테니!'
세영은 사력을 다해 째려보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그 녀석은 당연하게 물었다.
“내일도 올 거지?”
그래, 내일은 뻥뻥 골대에 들어가는 장면만 보여주마!
“이동하기 전에 매점 잠깐만 들리자!”
일단 좌표를 그리고, x1은 1보다 크고, y2는 1보다 작으니까 x1은 y2 보다 크다. 이건 참.
“누구 영어책 두 개 있는 사람? 아씨. 없지? 없지? 없지? 이동수업인데 누구한테 빌려? 아씨.”
(x1,y1)(x2,y2)는 직선 y=2-x위의 점이니까 이게 -1이 되고, y1-y2도 참.
“오늘 주번 누구야? 가기 전에 칠판은 지워놔!”
“순영이 벌써 날랐어. 반장, 네가 지워라! 크크크”
“진짜 반장이 봉이냐!”
x2-x1은 0보다 크고, x1+x2>2이므로, x1y1-x2y2는 0보다 크다. 그렇게 되면.......
“어이, 이수방! 나 화장실 급해! 내 책 좀 갖다놔!”
“아야, 이 기집애가! 어디로 던져! 머리에 맞았잖아!”
“야, 빨리들 나와. 오작교 열리는 날 아니냐! 나 오늘 파우더도 했는데 티 많이 나?”
“그 정도쯤이야. 나는 마스카라까지 했다. 큭큭.”
x1y1은 x2y2보다 크니까, 이것도 참이로군. 그럼.......
“띠리리리리~ 리이이이이~ 이이이이~”
예비종이다. 답만 체크하면 되는데, 교실 칠판 정중앙 위에 걸려있는 시계바늘이 정확히 12시 50분을 가리키고 있다.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얘들도 한차례 쑥 밀려나가고, 몇몇 얘들이 책을 챙기고 있었다. 다음 시간은 영어이동수업이었다. 이 학교도 꼴에 영어, 수학은 문과 이과별로 각각 6개의 반으로 나누어서 수준별 학습이란 걸 했다. 그래봤자 수준이 썩 좋은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옮기라니 옮길 수밖에. 몇몇 남아있던 얘들도 뭐가 그리 좋은지 꺅꺅대며 교실을 나갔다. 덩그러니 남은 건 세영 혼자. 뭐, 이런 게 좋다. 누구에게 방해받지 않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고. 그래서 일부러 개학식에 맞춰 전학을 왔다. 어차피 반이 바뀌니까 전학생이라고 자기소개하고 이래저래 주목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개학을 한 그 날부터 세영은 조용히 구석 자리에 앉아, 화장실과 학생식당을 가는 거 빼고는 수학문제를 풀고 영어단어를 외우고 영어듣기를 했다. 그 누구하나 그녀를 건들지 않았고, 그녀 또한 그 누구에게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세영에게 이 얘들은 불필요한 존재들이었으니까. 세영은 재빨리 5번 ㄱ,ㄴ,ㄷ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영어책을 들고 이동교실로 향했다.
“어이~ 태양!”
기현이 자식이 단팥빵, 단팥빵. 하도 노래를 불러서 매점에 들러 그 놈의 단팥빵을 하나 먹이고 2층 계단을 지나가고 있었다. 누구 하나가 넘어져도 못 알아볼 만큼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점심시간이지만 이상하게 자기 이름은 잘 들린다. 휙 돌아보니 성웅이다. 긴 얼굴 탓에 몸이 왜소해 보이지만 성웅이는 전국 고교 내 3순위에 드는 무시무시한 골키퍼였다.
“어? 점심 먹었어? 오늘 메뉴 네가 좋아하는 탕수육이던데.”
“그럼, 나를 아주 사랑하시는 아주머니가 아주 이만큼 쌓아주셨다.”
양손을 벌려 크기를 설명하는 녀석의 표정이 아주 흡족했다.
“너는 그렇게 먹는데 왜 살이 안찌냐?”
마지막 남은 단팥빵 조각을 입에 집어넣고, 기현이 성웅의 배를 툭툭 쳤다. 흡족했던 성웅의 얼굴이 단번에 찌푸려졌다. 살은 이 녀석의 약점이었다.
“한기현 이놈은 진짜 살살 긁는데 뭐 있다니까. 누군 찌기 싫어서 안찌냐! 아 진짜. 나도 찌려고 밤마다 불어터진 라면 두 봉지는 기본이고 아이스크림, 초콜릿 안 가리는 것 없이 처 넣어도 이렇다고. 가뜩이나 Y고 기범이 녀석이 근육 트레이닝까지 한다는 말이 들리는데. 아 진짜.”
이 녀석 정말 화났다. Y고 김기범은 성웅이와 같은 포지션으로 역시나 고교축구에서 골키퍼 3순위에 드는 잘 나가는 녀석이다. 기범이 경우는 끝내주는 떡대로 골대를 가리는 걸로 유명했고, 성웅이 녀석은 날쌘 몸으로 한 발 빨리 예측하고 공을 잡아내는 걸로 유명했다. 각기 장점이 있겠지만 태양의 경우엔 성웅이의 움직임이 좋았다. 그 예측성은 훗날 성웅이에게 엄청난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성웅이는 기범이처럼 큰 체격을 타고나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었다. 그런 성웅이를 기현이는 요리조리 피하며 놀리는 걸로 재미를 찾았고, 단순한 성웅이는 교활한 기현이에게 언제나 휘둘렸다.
“오케오케. 스탑! 내가 니 마음을 다 알지. 그럼. 그럼. 암. 그렇고말고. 그럼 오늘부터 우리 성웅이도 근육 트레이닝 들어갈까? 어때? 또 내가 한 근육 트레이닝 하잖아. 너 알지? 우리 헬스장에 끝내주는 전문 근육 트레이닝 기계 들어왔다.”
“진짜? 그거 단번에 근육 붙고 살 붙고 그러냐?”
“그럼. 그럼. 이놈아. 내가 언제 거짓말하든? 이거 봐. 이게 딱 일주일 하니까 생기더라. 어때? 끝내주지? 이따 연습 끝나고 갈래? 내가 울아부지한테 잘 말해놓으마. 크크”
오른쪽 셔츠 소매를 말아 올리고 근육을 자랑하는 꼴이 돌팔이 약장수 같다. 무슨 새로운 기계? 태양은 진실을 말하려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초롱초롱하게 기현의 팔을 바라보는 성웅을 보고 그만두었다.
‘아주 한기현, 도가 텄다니까.’
“기현이, 너는 은퇴하고 사업이나 해라. 넌 진짜 남의 등 잘 쳐 먹고 살 거다.”
“칭찬이냐? 욕이냐?”
“알아서 생각해라.”
머리를 들이미는 기현을 밀쳐내며 태양은 피식 웃었다. 3층 복도에도 학생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복도창문에 다닥다닥 한 무리가 붙어있고, 복도를 질주하는 한 무리의 남학생들. 그나저나 여학생들이 평소보다 많다. 학교 절반을 나눠, 한쪽은 남학생 교실, 한쪽을 여학생 교실이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 떡 하니 2학년 담임선생님만 있는 교무실이 있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남녀 머리카락 한 올도 못 보다가, 이동수업만 대면 무슨 오작교처럼 복도에 2학년 남녀학생이 우글댔다. 선생님들은 니들이 무슨 견우직녀냐? 라고 호통을 쳤지만, 수업이동이라고 이유를 대는 통에 할 말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5교시가 영어였다.
“성웅아, 너 영어 숙제했냐?”
“뭔데?”
“이 자식아, 나 네 꺼 베끼려고 안했단 말이야!”
헬스장 시설이 어떻고 근육이 어떻고 입에 발린 말로 꼬일 때는 언제고 기현이 버럭 화를 냈다. 이 녀석들은 제일 꼴찌반이면서 숙제도 제대로 안 한다. 버럭버럭 계속 화를 내는 기현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말만 청산유수지. 태양은 기현과 성웅의 만담을 들으면서 눈은 이리저리 지나가는 여학생을 쫓고 있었다. 질끈 묶은 긴 머리를 조랑말 꼬리처럼 나풀대는 여자아이. 태양이 찾고 있는 여학생이었다. 지독히도 공을 못 차는 성질 더러운 여자애가 연습을 나온 지 벌써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다. 얼마나 지독한지 저번 주 수요일부터 어제까지. 그러니까 9일 동안 조금 부풀려서 몇 천 번은 찬 것 같다. 성질도 더러워서 그가 하는 말에 정 떨어지게 대꾸하고 앙칼지게 쏘아보았다. 그래도 자신이 알려준 방법으로 공을 한번 넣은 이후로는 성질을 부리면서도 그가 해주는 지적을 무시하지는 않아서 엊그저께에는 대다수의 공을 성공했다. 그래도 그 놈의 입은 살아서 필요 없어, 남이사, 급기야 재수 없어 라는 말까지 들었지만. 코치의 마음이라는 게 그럴까. 그가 가르쳐주는 거에 따라 바로바로 성과가 나타나는 게 묘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태양은 그 여자애의 이름 석 자는 물론이고 학교에서 본 적이 없다. 그저 6시 30분. 축구부 연습이 끝난 그 시간에 홀연히 등장해서 7시 20분 즈음에 바람같이 사라진다는 것만 알았다. 매점에서 식당에서 수업이동시간에 그 모습을 찾았지만 그 비슷한 모습의 여학생도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 1학년 아냐?’
아냐. 1학년은 식당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럼 4층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박혀 배식해주는 밥만 먹고 공부만 하는 3학년? 설마.’
3학년이면 반말을 한 게 걸리고, 1학년이면 그 더러운 성질을 고스란히 받아준 게 괘씸하다.
“야. 야. 야아! 윤태양!”
어깨를 툭 치는 손길에 눈을 돌렸다. 기현이와 성웅이가 어리둥절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뭐 찾아? 왜 그렇게 두리번두리번 거려?”
기현이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를 탐색했다.
“이 자식, 너 요즘 이상하다. 누구 찾는 사람 있냐? 혹시. 혹시. 혹시?”
눈치 백단 한기현. 성웅이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다.
“혹시 뭐! 너네 숙제하러 안 가냐? 영어 불곰 아냐?”
“얼씨구, 너는 2반이라 이거지? 당최 나는 네가 왜 2반인지 모르겠어. 이 자식 만날 남아서 연습도 하면서 왜 성적은 저기 윗대가리냐? 이거 미스터리 아니냐? 엉? 성웅아.”
“응, 맞아. 태양이만 영어 레벨2지? 이야. 그거 영어 등수 70등 안에는 들어야 하잖아.”
“헛소리 그만들하고, 빨리 숙제나 해. 이제 예비종 친다. 봐봐.”
하자마자, 띠리리리~ 예비종이 울렸다. 종소리가 나자, 아씨 짜증을 내면서 기현과 성웅이 복도를 질주했다.
“그러기에 미리미리 하라니까.”
태양은 꽁지 빠지게 달려가는 기현과 성웅을 보며 자신도 교실로 향했다.
“드르륵.”
선생님 대신 처음에 선출되었던 알림반장이 들어왔다.
“프린트가 불량으로 나와서 조금 시간 걸리신데. 금방 오신댔으니까 자습하자.”
영문판 타임지를 읽고 있던 세영은 안경을 쓰고 짧은 커트머리를 하고 있는 여학생에게 잠시 눈을 돌렸다가 빠르게 영문 잡지에 시선을 고정했다. 영어 레벨 1반에 걸맞게 학생들은 종이 울리자마자, 정숙 모드에 돌입해있었다. 35명 남짓 되는 이 반은 그나마 전 학교 분위기가 느껴졌다. 다들 눈에 불을 켜고 책을 쳐다보고 있으면서도 누가 무슨 참고서로 공부하나, 누가 요상한 문제는 풀지 않나 눈동자를 굴렸다. 세영은 속으로 풋 웃었다. 그래봤자 뱁새는 황새를 절대 못 따라온단다.
“책상 안 좀 훑어봐봐.”
“가만. 가만. 뭐가 잡히는데? 책은 아닌 거 같고.”
조용한 분위기에 읽는 속도에 박차를 가려고 하는데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근원지는 세영의 왼쪽 줄에 앉아있는 여자애들이었다.
“어머머, 이거 러브레터? 뭐야! 사탕 묶음도 있다.”
“뭐? 아씨! 누가 먼저 선수 친 거야?”
창가 맨 끝자리의 책상 속에서 꺼낸 편지와 사탕이라 말하는 묶음을 들고 있던 여학생의 얼굴은 울상이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세영의 뒤에 있던 여학생도 그 여학생의 옆에 앉아있던 여학생도 세영의 앞에 앉은 여학생도 호들갑을 떨며 울상이 된 여학생에게 다가갔다.
“수학 이동 수업 때 아냐? 아까 2교시 수학이었잖아.”
“이힝. 이럴 줄 알았으면 수학도 열심히 할 걸. 난 수학 완전 젬병이라서.”
“그나저나 지수 넌 오늘은 성공이다. 자리 맞기. 대체 언제 온 거야?”
“사실 식당에도 안 갔다! 흐흐흐.”
“뭐? 나는 그래도 점심은 못 굶어!”
“대충 빵으로 때웠지. 뭐. 그 대가로 태양이랑 눈도 마주쳤다!!!”
“뭐!”
“뭐?”
“뭐!!!!!!!!!!!”
여자애들의 웅성거림에 교실의 분위기는 대번에 시끌벅적해졌다. 대화의 주제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세영은 집중을 흩뜨린 여자애들을 향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조용히 하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쓸데없는 눈길은 받고 싶지 않았다. 재킷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아이팟을 꺼내들었다. 영어듣기를 하는 게 낫겠다.
“지수 너 완전 복 터졌다. 한번 스쳐지나가기도 어렵다는 그 윤태양의 눈길을 받았단 말이냐! 넌 오늘 내 손에 죽어도 여한이 없으렷다!”
“야! 배희 너는 한기현파 아니었어?
“아냐. 배희 쟤는 축구부라면 아마 다 찍었을 걸. 크크크.”
이어폰을 귀에 꽂기 전, 세영의 귀에 축구부라는 단어가 날아들었다. 그러니까 축구부에 환장을 한 여자애들이었군. 눈 감고 귀 막고 오롯이 공부에 전념하는 세영에게도 축구부의 인기는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원인의 첫 번째는 하나, 쓸모없는 체육담당 담임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교실이고 화장실이고 식당이고, 여자애들의 수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조리 축구부였다. 목소리나 환호는 또 얼마나 큰지.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귀에 푹푹 박혔다. 대학진학률만큼 축구대회 우승에 목숨을 거는 학교가 바로 H고. 전학 전에 그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 시간이 걸리더라도 옆 학군에 있는 A학교로 갔을 수도 있었으리라. 거기도 S대 진학률은 매년 올라가고 있으니까. H고는 버스를 타고 20분 거리고, 서울시내 일반고에서도 최고의 S대 진학률을 자랑한지 수십 년 째였다. 그런 명문고였기 때문에 세영은 일반고로 전학을 결정했을 때, 주저 없이 H고를 선택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요즘에는 진학이 축구에 추월당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H고를 졸업하고 S대에 가서 유명한 국회의원까지 되었던 모 선배가 대한축구협회장이 되면서 모교에 축구부를 개설을 권유했고 엄청난 기부금까지 주었다는 뭐, 그래서 불과 5년 밖에 안 된 신생 축구부가 창설 2년 만에 전국대회를 휩쓸고 명문 축구고교로 자리 잡게 됐다는. 암튼 그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화장실에서 들었던 거 같다. 이렇듯 저렇든 어떻든 간에 세영에게는 축구부의 열기 자체가 짜증스러웠다. 이렇게 공부를 못하게 만드니까!
“암튼 다 좋은데. 축구부가 이렇게 멋있어서 난 정말로 공부할 기운이 막막 샘솟는데! 아씨. 구기중은 참을 수 없어!”
“크크. 배희 너도 무(無)골의 여왕이구나! 나돈데......”
“나 심각해. 내일이 시험이거든. 체육은 이미 제쳤지만, 우리 윤사마에게 부끄럽잖아.”
“얼씨구. 우리 윤사마 좋아하신다?”
“드르륵!”
도저히 못 참겠어서 한마디 해야겠다. 하고 고개를 쳐든 순간, 교실 문이 드르륵 열리고 프린트물을 가득 안은 영어선생님이 들어왔다. 창가 쪽 자리를 서성이던 여자애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마치 그 자리에 앉아있던 것 마냥, 스스슥, 세영의 뒤와 앞과 옆을 채웠다.
“역시 우리 반은 자습도 잘 하는군. 자아, 이거 저번 모의고사에서 너희들이 많이 틀렸던 문제만 추려 놓은 거다. 뒤로 넘기도록. 저번에 나눠줬던 프린트 다 가져왔지? 그럼......”
세영은 아이팟을 도로 집어넣고 앞에 여자애가 건네주는 프린트를 받았다. 얼굴을 보니 무골의 여왕인 듯하다. 벌써 실기시험이 다가왔다. 그리고 떠오른 얼굴은 키만 멀대 같이 크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놈. 세영도 모르게 프린트를 잡은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이 들어갔다. 그 녀석은 지난 며칠 동안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녀 앞에서 서슴없이 ‘못 한다’를 남발했다. 웃기는 자식. 그 입에서 그런 말을 뒤집어엎으려고 세영은 수백 개의 공을 찼고, 이제 90%의 적중률을 자랑했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비웃어줬지만 그 녀석도 웃는 게 아닌가. 마치 그 녀석은 ‘그게 다 내 덕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거 같았다. 정말 느물느물. 딱 토악질이 나올만한 웃음이었다. 세영은 그 녀석의 웃음이 영어단어가 나열되어 있는 프린트에 둥실 떠 있는 것을 보고 빨간 볼펜으로 영어문장을 쫙쫙 밑줄 그려 내려갔다. 이제 이틀이 남았다. S대에 한발자국 가까워질 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