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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후회하지 않아.
거짓말이었다. 틀림없는 거짓말이었다. 연우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후회하고 있었다. 왜 고백 따위 했을까,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그가 도망치듯 자신을 공원 벤치에 혼자 두고 가버리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연우는 보지도 않은 책은 짐일 뿐이라며 왜 들고 나왔느냐 투덜거리다가 어느새 건전지가 다 되어버린 mp3는 또 왜 갖고 나왔느냐 트집을 잡으며 애꿎은 소지품들을 놓고 잔뜩 불만을 늘어놓았다.
후회해.
거짓말이었다. 이 또한 틀림없는 거짓말이었다. 연우는 결코 후회 따위 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결코 그의 입술을 그 금단의 열매를 맛보지 못 했을 테고, 그런 맛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 했을 테니까 말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연우는 아직도 그의 입술이 닿았을 때의 느낌이 가득한, 짙은 키스로 이미 부드러워진 자신의 입술 위에 가만 손가락을 대어 보았다. 아직도 열에 들떠 뜨거웠지만, 그 달뜬 느낌은 거기에서 멈췄다. 역시, 자신의 갑작스런 고백에 놀라 당황한 채 도망치듯 자리를 피한 그를 기억에서 몰아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대문 앞에 다다라서야, 연우는 이렇게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기분으로는 집 안에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밖에서 생긴 문제는, 밖에서 해결까지 해야 했다. 그래야 집에서는 편히 쉴 수 있을 테니까. 몸도, 마음도 그래야 쉴 수 있을 테니까.
<받아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말은 내가 있어서 하는 거니까 듣기만 해도 돼>
집 앞을 서성거리며 문자를 하나 보내고 1분 뒤, 연우는 손이 외어버린 익숙한 번호를 거침없이 눌렀다. 벨이 울리기 시작했고 심박동이 순식간에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받는 순간 네가 어떤 대꾸라도 한다면, 내게 약간이라도 희망이 있겠지만, 만에 하나 응답이 없다면…….
“그만 하자.”
전화를 받고도 한 참을 묵묵부답. 답은 나온 것이다. 연우는 선언했다.
“불편하게 할 생각, 전혀 없었어. 내가 한 말 못들은 걸로 해. 어색한 사이 딱 질색이야, 너도 그런 거 싫잖아. 더 이상 우리 인연 이어가려고 애쓰지 말고, 여기서 그만 하자. 나도, 너도 서로를 위해 모르는 사이가 되는 게 나아.”
종료 버튼을 누르는 순간, 뚝 하고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를 잃을까 겁이나 하지 못했던 일을 결국 해치웠다. 금단의 열매를 맛 본 벌이었다. 물론 달게 받을 것이다. 그를 보지 못 한다는 건 정말 죽을힘을 다해 참다보면 참아지고 그러다 그가 세월에 잊혀 질 그런 성질의 것이었으니까, 조금만 참으면 다 괜찮아질 것이었다. 게다가 그를 사랑하는 마음 따위야 정말 죽을힘을 다해 억누르다보면 꼭꼭 눌려 가슴 한켠에 담겨지고 그러다 기억에 묻혀 질 그런 성질의 것이었으니까, 조금만 억누르면 금방 괜찮아질 것이었다.
연우는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씨익 웃는 연습을 해 보였다. 그 괜찮아질 때까지 그래도 약간의 연극은 올려야했다, 나를 감춘 채 나인 척 하는.
“선배, 근데 무슨 일 있어요?”
거울을 보며 타이를 매고 있는데 수연이 친근한 어조로 물어왔다. 연우는 거울에 비친 수연의 얼굴을 쳐다보며 왜 그러냐는 듯 그저 눈썹만 살짝 올렸다가 제자리에 놓았다.
“며칠 새 얼굴이 안됐네. 아까 지하철 안에서는 남자 친구랑 눈도 안 마주치더니.”
무심해졌다고 생각은 했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무심코 수연의 입에서 나온 별 거 아닌 그의 얘기에도 눈이 휘둥그레 떠지는 걸 보니 말이다. 테이블 위에 놓았던 가방을 캐비닛에 넣으며 연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는 같은 지하철을 타도 못 본 척 하는구나.
“선배님!”
“응.”
자신을 귀찮게 자꾸 불러대는 수연의 말에 마지못해 한 대꾸는 건성이었다.
“싸운 거예요?”
“아니.”
차라리 싸운 거면 풀기라도 하겠다. 연우는 속으로 이죽거리며 종이컵에 찬물을 가득 담았다.
“설마, 헤어진 건 아니시죠?”
만난 적도 없는데 헤어지기는. 연우는 차마 말도 못 하고 그냥 찬물만 벌컥 들이켜 잔을 비운다음, 다시 한 번 잔을 채웠다.
“헤어졌어.”
그리고 다시 찬물을 들이키기 전에야 중얼거렸다. 어쨌건, 다시 만나지 말자고 선언은 했으니 헤어지긴 한 거였다. 그게…… 벌써 이 주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연우야, 헤어졌어?”
탈의실에 들어오던 은정이 그새 끼어들었다.
“응, 헤어졌어요.”
체념한 듯 크게 한 숨을 내쉬며 연우가 대꾸했다.
“근데 언니, 나 사귄 적 없는데.”
그리고 억울함이 가득 베인 어조로 투정부리듯 말을 이었다.
“근데 뭐 헤어졌다고 그래.”
“좋아는 하는데, 그만 만나자고 선언은 했으니까.”
“그냥, 그럼 네가 좋아만 한 거야?”
“어? 선배님, 그러면 저번에 저한테 했던 말은 뭐예요? 남자친구라고 자기가 직접 얘기했던 거 말예요.”
연우를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가만 듣던 수연이 다시 끼어들었다. 연우는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으음 하고 신음소리를 살짝 흘렸다.
“그냥, 장난삼아. 건 의미 없어.”
“뭐야, 그런 거였어? 별루다, 연락도 안 오디?”
연우가 누운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며칠 째?”
“한……, 이 주?”
“됐어, 됐어, 그만 둬. 딴 놈 만나. 세상 반이 남자고, 좋은 놈도 많아. 너 좋다는 놈 만나. 소개팅이라도 시켜주리?”
은정이 유니폼 매무새를 가다듬고 소지품을 캐비닛에 대충 넣으며 연우의 마음을 말렸다. 연우가 눕혔던 몸을 일으켜 의자에 똑바로 앉으며 뚱한 표정으로 은정을 멍하니 쳐다보다 도로 테이블 위에 누워버렸다.
“문제는, 내가 좋아 죽겠다는 거지.”
꽤나 마음에 들지 않는 대꾸이긴 했지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다.
“됐어, 잊어. 연락도 안 온다며?”
아픈 데만 콕콕 찌르고 있었다. 맞는 말이라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연우는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 폴더를 괜스레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다른 여직원 몇 몇이 들어왔고 화제는 어제 방송됐던 각종 드라마와 드라마에 출연했던 연예인들에 관한 것으로 옮겨졌다. 연우는 직원들의 얘기를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보내며 핸드폰의 전화번호부에서 그의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그리고 또 한 번 큰 맘 먹고 번호 삭제 버튼을 눌렀지만, 삭제하겠냐는 물음에는 그만 ‘아니오.’ 버튼을 눌러버렸다. 이 주 전부터 항상 내내 이런 식이었다. 그래서 아직까지 번호를 지우지 못 하고 있었다. 무슨 미련이 그렇게 남아서 그러냐고 물어보면 솔직히 입 밖에 꺼내 놓을 말은 없었다. 그저 지워봤자 손가락이 외우고 있던 탓에 지우나 안 지우나 똑같다는 건 변명에 불과하니까.
“언니, 관두는 게 맞는 거겠지?”
연우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신중한 어조로 물었고, 은정이 들어 볼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잊어. 남자 많다니깐.”
딱 잘랐다.
그래, 까짓 거.
연우는 큰맘 먹고 다시 한 번 핸드폰의 전화번호부에서 그의 전화번호를 불러냈다. 그리고 과감하게, 두 번 생각은 안 하고, 눈 딱 감은 채 그의 번호를 삭제해버렸다. 그건 겨우 두 세 번만 손가락을 움직이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뭐, 마음도 두 세 번의 손가락 운동으로 조절되는 간단한 일이라면 더할 나위 없을 테지만, 뭐든 값은 제대로 치러내야 하니까 진실로 그걸 바란다면 그건 순 도둑놈 심보라는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바보.
연우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또 다시 등록해버린 정우의 핸드폰 번호를 멍하니 쳐다보며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이럴 거 왜 지웠냐는 책망 어린 자책을 하다가 핸드폰을 침대에 던져버렸다. 계속 보고 있자니, 자꾸 전화가 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별을 선언한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그러니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법은 없으나, 질질 끌려 다닐 작정이 아니라면 눈 딱 감고 참아내야 하기는 했다. 정말 목소리가 듣고 싶어 미칠 지경이라면, *23과 상대의 핸드폰 번호면 된다. 그거면 발신번호가 액정에 뵈지 않으니 살짝,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 정도는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눈치가 빠르다면, 혹시 하는 의심은 하겠지만, 말 그대로 의심일 뿐 확신은 될 수 없을 테니 그런 대로 쓸 만한 방법이긴 했다. 죄 진 것도 아닌데 당당하지 못하게 스토커처럼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핀잔을 혹시 누가 던진다면, 거야 개개인의 선택의 문제일 뿐이라고 톡 쏘아주면 될 테고 말이다.
연우는 침대에 던진 핸드폰을 도로 주워들어 익숙한 그 번호를 눌렀다. 물론 *23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그 혹시나 하는 의심조차도 받기 싫다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그녀를 말렸다. 그리고 또 가만 몇 분을 버티고 앉아 있다가 또 다시 핸드폰에 시선을 던지고, 까닭 없이 매만지다가 미치겠다는 심정으로 최근통화목록에서 서영을 찾아내고는 무작정 통화 버튼을 누르며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 쳐다보는데 서영이 전화를 받았다.
“나랑 오늘 죽자.”
지독하다.
정우는 핸드폰을 쳐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 한 문장으로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중간, 중간 살아있다는 표시로 뭐 하냐는 문자라도 하나 보내던 연우가 벌써 2주가 지나도록 무소식이었던 탓이었다. 처음 일주일간은 정말 독하게 마음먹었다고 생각하며 정말 그만할 작정인가 보다며 그녀의 이별 선언을 묵묵히 받아들였지만, 그 일주가 지나고 난 다음부터는 일 분, 일 분, 뭐 하냐는 그 문자를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건 늘 핸드폰을 다른 곳에 두고 어디 뒀는지 찾느라 고생을 하던 자신이 핸드폰을 손에 달고 사는데다가, 전화 한 통 하다 못해 문자 하나가 와도 연우의 연락이길 바라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던 자신을 깨닫게 됐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런 느낌 처음 갖게 됐다는 미주를 만나서도 흥이 나지 않고 자꾸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며 문자 하나만 와도 심장이 두근거리며 바로 폴더를 열어 확인을 하는 자신의 낯선 모습 때문만도 아니었다.
미주, 아니 치마 두른 여자, 아니 것 보다 갓 태어났어도 여자라는 성별만 부여받기만 하면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연우의 이미지가 최고 공신이었다. 아침마다 잠을 깰 목적으로 마시는 자판기 커피만 봐도 직접 탄 다방 커피가 제일 맛있다던 연우가 생각이 나니 이건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살아있냐는 문자라도 보내 볼 요량으로 폴더를 열었지만, 결국 전송버튼까지 누르는 길은 초코파이의 마시멜로 때문에 찐 살을 빼기 위해 지구를 네 바퀴 반이나 달릴 정도의 먼 길이었다.
이런 느낌이었나?
아니었다. 이렇게 연락 없이 한 달을 지내온 적도 있는데 새삼스러울 게 대체 뭐가 있겠냐 하겠지만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그 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 탓에 그냥 연락이 없어도 잘 지내겠거니, 잘 살고 있겠거니 생각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처음 생각은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매 순간 순간, 그녀가 잘 있을까? 잘 살고 있을까? 궁금해 하고 있는 모양을 보니, 자꾸 보고 싶고, 전화해서 그냥 걸었다, 뭐 하냐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던 그 때가 마냥 그리운 걸 보니 그 생각은 딱 맞아떨어지는 정답이다.
미치겠군.
지금 자신의 심정을 정확히 압축한 한 문장이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을 맞이해 줄 것만 같던 연우가 갑작스레 키스를 해오고 고백을 하더니 이별을 선언한 그 날부터 그런 심정이 차곡차곡 쌓이더니 이제는 더 이상 쌓아둘 곳도 없게 되어버렸다. 그 키스를 즐기지 않았다면, 아니 적어도 되돌리지만 않았더라면, 물론 처음엔 당황해서 더듬었을 테지만 이내 수습을 해버리고 에이, 너 키스 연습 더 하고 와야겠다, 이참에 내가 선생이 되어줄까, 라는 되먹지않을 농담을 던졌을 텐데, 즐겼을 뿐만 아니라 되돌리기까지 했으니……. 되돌린 것으로 끝났으면 퍽이나 좋았겠지만 뿐만 아니라 미주에게 키스를 하려던 그 순간 미주의 얼굴이 연우로 보이기까지 했으니, 그 이후의 상황은 말 안 해도 뻔했다. 일단은 대충 그 상황을 모면하고, 다음날이 되자마자 미안하다는 말로 관계를 정리했다. 제 아무리 여자를 많이 만나고 다녀 플레이보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살아가는 인생이라도 지킬 건 지켜야하지 않는가.
복잡한 건 딱 질색인데.
연우가 모든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어 놨다. 그래놓고 참 잘도 살아가는 모양이었다. 평소와 같은 모습,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게 단정한 모습으로 늘 같은 위치에서 알람시계처럼 매일 똑같은 시간에 틀림없이 나타나는 걸 보니 말이다. 물론 연우는 자신을 보지 못했다. 늘 그렇듯 그녀는 이어폰은 잊지도 않고 챙기면서 시력이 나쁜데도 렌즈는커녕 안경조차 착용 안 하는 주제라 주변 사물은 전혀 챙기지 않은 탓이었다.
어쨌건 전 같으면 슬금 그녀 뒤에서 약간 놀래 켜 준 뒤 환한 웃음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같이 출근을 했을 테지만, 그 일 이후에는 왠지 그녀가 마냥 편하지도, 먼저 다가가 자신의 존재를 인지시키기도 어색해 끝끝내 모르는 척, 못 본 척 해야 했다. 물론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화가 났다. 자신을 이렇게 못나게 만든 그녀한테, 그녀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지 못 한 채 그녀가 뒤돌아 봐 주기만을 기다리는 자신의 소극적인 모습에. 그리고 정말은 그때가 너무 그리웠다. 전 재산을 탈탈 털면 그 때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준다는 사이비 마법사라도 만난다면 앞뒤 안 가리고 무조건적인 신뢰로 전 재산을 탈탈 털어 버릴 정도로 말이다.
보고 싶고, 그립고, 궁금하고, 자꾸 생각나고, 그래서 미치겠다…….
이게 무슨 감정이냐는 자문을 수십 수백 번 해봤지만 답은 정말 모르겠다, 이거였다. 소리 없이 입 모양만으로 으아아 하고 괴성을 지르던 정우가 머리를 쥐어뜯다가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한껏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뭔가 큰일을 치를 심산인 양 그걸 움켜쥐더니, 또 한 참 그냥 액정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고는 마침내 뭔가를 결심한 듯 크게 한 숨을 내쉬고 폴더를 연 순간, 액정에 전화가 왔다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뜨더니 곧이어 벨소리가 울렸다.
“지갑은?”
왔냐는 인사도 전에 서영이 지갑의 안부를 먼저 물어왔다. 테이블 위에 고개를 댄 채 쓰러져있는 연우가 눈에 들어오자 반가움에 웃음이 났지만 애써 무심한 척 시선을 서영에게 돌렸다.
“갖고야 왔는데 건 왜 그리 챙기는 건데?”
가만 있어봤자 앉으란 소리 죽어도 할 것 같지 않아 무작정 빈 의자에 눌러 앉으며 정우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지갑보다 못 한 취급을 받는데 말이 곱게 나갈리 만무했다.
“술값 꽤 나올 거 거든. 너 땜에 마신 건데 내가 내려니까 배알이 쫌 심히 꼴리드라.”
“말 좀 곱게 해라.”
정우가 혀를 내차며 말했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연우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싶은 욕망을 자제하며 정우가 자꾸 연우에게로 향하려는 손에 물이 담긴 컵을 쥐어주었다.
“고상한 척, 교양 떠는 건 취미 없네.”
“누가 고상, 교양하래? 적어도 여자…….”
“여자는 쓰지 말란 법 있냐? 그리고 내가 너한테까지 꼭 그래야 하는 이유는 뭔데?”
서영이 트집 잡아 물었다. 딱히 대꾸할 마땅한 말이 선뜻 떠오르지 않자 정우는 물이 담긴 컵을 입에 댄 채 주변을 휙 둘러보다가,
“얜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테이블 위에 쓰러져있는 연우를 걸고 넘어졌다.
“말 돌리기는…….”
못 마땅한 어조로 서영이 정우의 질문에 대꾸를 하는 대신 핀잔을 던졌지만, 정우는 얼마나 마셨는 지만 말하라는 듯 그저 눈썹만 살짝 치켜떴다가 도로 내렸다.
"딱 먹고 죽을 만큼. 그러자고 본 거니까."
"좀 말리지."
"책임전가 하지 마. 원인제공 너야."
“아, 예. 근데 밥들이나 먹고 나서 마신 거야?”
서영의 따끔한 한 마디에 정우가 바로 숙이고 들어왔다. 물론 말하는 투에 장난이 어느 정도 섞인 터라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부정이나 반문 따위는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서영은 참고 넘기기로 했다. 아주 가끔, 서영은 정우의 이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인정할 건 순순히 인정을 해 버리는 그런 거.
“모르지. 만나자마자 시작한 거니까.”
“그게 대체 몇 신데?”
“글쎄, 한 9시쯤 되려나?”
시큰둥한 대꾸에 정우가 테이블을 주욱 훑었다. 한 병은 테이블에 쓰러진 채 였고, 다른 네 병은 똑바로 세워져 있기야 했지만 모두 텅텅 빈 상태였다. 게다가 술이 좀 남은 다른 한 병조차 이미 거의 바닥까지 비워진 채였다.
“니들 그럼 세 시간동안 저걸 다 마신 거야?”
“먹고 죽으려고 만난 거라니까. 자꾸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라. 안 그래도 연우 술 상대해주느라 머리 깨질 것 같다.”
“으이그, 내가 정말 못 산다.”
정우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면서 연우의 어깨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야, 야, 정연우, 그만 일어나. 집에 가야지.”
“나 죽을 거야.”
단정 짓 듯 중얼거리는 그 말은 술에 잔뜩 취해 마비되어 버린 혀 때문에 발음이 정확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에서 정우는 옅은 슬픔을 읽어냈다. 마음 한켠이 싸하게 아려왔다. 정우가 연우의 얼굴을 커튼처럼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드디어 쓸어 올렸다. 그리고 드러난 볼을 슬며시 쓰다듬었다.
“네가 왜 죽어.”
“보고 싶단 말이야.”
“보고 싶은 데 왜 죽어.”
밑도 끝도 없는 나지막한 대화가 계속 이어지는 동안 정우는 연우의 얼굴을 연신 쓰다듬는 중간, 중간 자꾸 얼굴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쇼를 해요, 닭살들. 뒷정리 깔끔하게 해라, 난 갈란다.”
뭔가 잔뜩 비틀어진 시선으로 그들을 쳐다보던 서영이 자리를 탁 털며 일어섰다. 그러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술집을 나섰고, 정우는 연우를 신경 쓰느라 서영이 가는 걸 봐주지도 못했다.
“나 미쳤나봐, 연정우가 보여.”
여전히 혀 꼬인 발음으로 연우가 중얼거렸다. 간신히 테이블을 지탱한 채 약간 몸을 일으킨 상태였다. 그제야 정우는 연우의 초점이 흐릿해진 눈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근데 너 왜 울어?”
문득 연우의 눈에서 뚝 떨어지는 눈물방울에 당황한 정우가 까닭을 물었다.
“정말 돌아버리겠네. 이젠 환청까지 들려.”
“연우야.”
“서영아, 나 좀 말려봐. 네가 정우로 보이고, 네 목소리가 정우 목소리로 들려.”
연우가 한숨을 푹 내쉬며 또 다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지만, 중간에서 정우가 가로채는 바람에 마시지는 못했다. 잔을 도로 테이블 위에 놓으려던 정우가 잔에 든 술을 자신의 입에 털어 넣고 빈 잔을 내려놓았다. 속이 꽤 탄다.
“서영이 갔어, 너 지금 나랑 있는 거 맞아.”
낮은 목소리로 정우가 진지하게 대꾸했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꿈인가? 너무 생생하긴 하지만.”
연우가 눈까지 비벼가며 자신이 보고 있는 상대를 부정만 했다.
“꼬집어 줄까?”
아무리 술에 취했다지만 계속해서 자신을 부정만 하는 연우를 마냥 보듬어주기에는 약간 심술이 났는지 정우가 제안과 동시에 제대로 실천에 옮겼다.
“아야. 뭐야, 그대로잖아.”
팔뚝의 살집 있는 부분을 제대로 꼬집힌 탓에 절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연우는 문득 정신이 깨는 느낌에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상대를 자세히 쳐다보고는 의중을 알 수 없는 말을 평이한 어조로 내뱉었다. 대체 그래서 실망이라는 건 지, 좋다는 건 지 정우는 그 의중을 정확히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래봤자 취중진담일 것이었다. 깨고 난 뒤 기억 안 난다고 오리발 내밀면 그만인 그 것.
“정신은 좀 들어?”
“너 나뻐, 못 됐어. 독해. 내가 그만 하잔다고 이 주가 지나가도록 어떻게 연락도 없냐?”
정우의 존재를 인정하자마자 마침 잘 만났다는 듯 연우가 몹시도 못 마땅하다는 어조로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그러는 넌. 네 연락 기다리다 나 목 늘어난 거 안 보여?”
안 보이면 잘 보라는 듯 정우가 자신의 목을 쭉 내 빼며 건넨 말에,
“넌, 네 연락 기다리다 나 눈 빠진 건 안 보이지?”
연우가 지지도 않고 정우의 말을 받았다. 정말 말 한 번 지고 들어오지 않는다. 같이 살게 된다면 꽤나 골치 아플 테지.
“이 화상아.”
“못 됐어, 정말.”
그러더니 울어버린다. 펑펑 눈물을 쏟아내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목 놓아 서글피 울어댔다.
“이거 주사야.”
그러다 한다는 소리였다. 정우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꾸했다.
“응.”
“그러니까 창피해.”
“뭐, 별 게…….”
“별 거 아냐, 창피하단 말이야. 이런 꼴 보이기 싫단 말이야. 그니까 너 그만 가.”
그러더니 창피하다면서 못 쫓아내 안달이 났다.
“너 집에 들어가는 거 봐야가지.”
“건 서영이…….”
“서영이 아까 갔잖아.”
그제야 테이블을 둘러보며 서영을 찾는 연우에게 정우가 서영의 부재를 알렸다.
“서영이 갔어? 그러네, 갔네 기집애. 그럼, 네가 서영이 해. 정우한테 보여주기 싫은 모습이라도 서영이라면 보여줄 수 있으니까, 너 서영이 해.”
그러자 정말 연우가 문자 그대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지만, 정우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 서영이 할게. 안 그래도 서영이 가기 전에 뒷정리까지 부탁했는데 잘됐지, 뭐.”
귀찮은 짐짝 취급하는 듯한 말투에 연우가 은근히 상처를 받았지만, 애써 담담한 척 자리를 툭 털고 일어섰다. 아니 일어선 순간, 술기운에 그만 중심을 못 잡고 휘청거리는 바람에 정우가 재빠른 동작으로 연우를 부축해야 했고, 연우는 그런 정우를 보며 산뜻하게 빙긋거렸다.
“정말 딱 먹고 죽을 만큼이네.”
그러더니 털썩 쓰러지며, 그냥 정신을 놓아버렸다.
*
즐거운 한 주 보내세요^^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1-13 18:15)
연우 너 주기에 넘 아까워